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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별처럼 많던 신라 사찰들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죠”

경주 황룡사를 안다고 말하지만 금당지 장육존상의 받침돌에 스며든 신라인의 미적 감각을 발견하는 이는 드물다. 넓적한 바윗돌 위에 앉아 있었을 1장 6척 불상을 상상하며 1천500년 전 신라인들의 바람과 조우하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황량하기 그지없는 절터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야만 목격할 수 있는 귀중한 앎이다. 역사적인 안목은 물론 시간을 거슬러 한 시대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 신라인을 향한 순수한 경외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적지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없다. 기나긴 시간의 강을 건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혹여나 이 사람과 동행한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경주지역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신라역사를 연구했으며, 경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30년째 시민을 대상으로 신라문화유적 답사를 진행하고 있는 김호상 이사장을 경주시 석장동에 위치한 진흥문화재연구원에서 만났다. -들어오는 길이 복잡하고 좁은 농로여서 애를 좀 먹었다. 이곳 진흥문화재연구원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문화재 발굴을 전문으로 하는 법인이다. 전국의 발굴업체는 110개 정도인데 그 중 대구·경북지역에 가장 많은 20개가 밀집해 있다. 국내 발굴조사는 1970년대까지 국가주도로 이뤄지다가, 80년대부터 대학박물관이 이끌었으며, 2000년대 이후 매장문화재 기관들이 주도하고 있다. 진흥문화재연구원은 2014년 설립해 경주 천군동 유적을 비롯해 분황로, 서면 도리길, 괘릉리, 대릉원 중앙로 등 40여 곳을 발굴했다.-수천 년을 묻혀있던 유물과 만나는 일인 만큼 가슴 뛰는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이전에는 ‘불명 유구’로 취급됐던 숯가마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냈다. 90년대 중반, 경주 경마장 건설예정부지 발굴조사에서 숯가마가 대량으로 나왔다. 드문드문 나오기는 했지만 한꺼번에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기와나 토기를 굽던 가마와 달리 숯가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불명 유구’나 불에 탄 ‘소토(燒土) 유적’으로 취급되어왔다. 불타고 남은 재 이외에 별다른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주 경마장 예정부지는 국내 대표적인 토기 집단군이기도 해서 일본의 가마 연구자 후지와라 마나부(藤原學) 선생을 초청했는데 발굴현장을 둘러보더니 일본에도 소수만 보이는 숯가마라고 알려줬다. 당시 숯가마에 대한 연구는 전무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가마전문박물관인 스이타(吹田) 시립박물관으로 연수를 가서 마나부 선생의 사사를 받아 2003년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 숯가마 연구사를 최초로 정리했다.-신라사람들은 가마에서 생산한 숯으로 뭘 한 건가.△신라 전성기 경주에는 17만8천936호가 살았고,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하층민은 장작을 땠겠지만 귀족은 숯을 썼다. 신라 귀족은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해서 금을 입힌 집에서 호화롭게 생활했기에 그을음 없는 숯을 선호했다. 숯에는 흑탄과 백탄이 있고 가마 구조도 다르다. 활활 타는 숯을 흙이나 재로 덮어 만든 백탄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고급연료로 제철에 사용했다. 아궁이를 막아 산소공급을 중지시켜 만든 흑탄은 취사용이었다. 신라인들은 가마에서 숯을 구워 양질의 숯을 다량으로 누린 것이다. -불명 유구이던 신라 숯가마에 이름을 부여한 고고학자지만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했다.△80년대만 해도 국내에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거의 없었다. 서울대를 비롯해 몇몇 대학에 고고학과가 있었는데 대부분 서양의 이론들을 다루었고 실제 발굴은 역사학과에서 담당했다. 90년대 들어 고고학과와 문화인류학과가 생기면서 연구가 분화됐다. 지금은 그마저도 경계가 허물어져 자연과학분석을 도입해 고고학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대학시절부터 발굴현장에 살다시피 했다고.△대학박물관이 발굴을 주도하던 80년대는 학생들의 현장참여가 활발했다. 강의실 수업과 발굴 실습 가운데 선택할 수 있었는데 답답한 강의실보다야 현장이 좋았다. 학기 중에는 경주박물관으로 등교하고 방학에는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일했다. 발굴은 고된 작업이다. 첫 직장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월성 발굴현장이었다. 땡볕 아래 하루 종일 땅을 파고 흙을 나르다보면 철조망 너머 관광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면 나만 빼고 벚꽃 대궐에 있었다. 선배들이 없었다면 호미를 내던지고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선배들도 일이 익숙한 후배가 편하니까 잘 한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지금까지 왔다. 처음에는 선배들에 이끌려서 나중에는 후배들에 떠밀려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대학 4학년 때 문화재 관련 전시회를 열었다고.△대학생활을 마무리하며 문화유산의 중요함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문화유산 보존과 보호라는 사명감이 컸던 시절이다.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청계천에서 거금 40만 원을 주고 카메라를 구입해 유적지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경주읍성이나 폐사지 같은 훼손되거나 조명받지 못한 곳들을 촬영해 학생복지관에 전시했다. 매년 전시를 열겠다며 나름 포부가 컸지만 한 번으로 끝났다.-문화재 보호의식이 지금보다 더 부족하던 시대 아닌가.△개발논리가 우선하던 시대여서 유적이 파헤쳐지기 일쑤였고 어이없는 과정을 많이 목격했다. 포항시 신광면에 위치한 영일 냉수리 고분도 지방도로 공사 중에 훼손됐다. 보호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긴급하게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할 때 학생 신분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문화재 보호의 소중함을 알릴 필요성을 깨달았고 대학을 졸업한 1991년부터 매달 시민들을 상대로 문화유적 안내를 해오고 있다. 6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3~40명이 참여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신라문화진흥원을 조직해 유적답사와 문화행사, 강좌도 진행한다.-한미정상회담을 비롯해 국내외 주요 인사가 경주에 올 때마다 문화유산 안내를 도맡았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2005년 한미정상회담 때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불국사로 안내했고, 2009년에 시진핑 당시 중국 부주석을 월성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결이 달랐는데, 부시 대통령은 질문도 하고 활달한 반응이었지만 시진핑 주석은 조용히 경청하는 모습이었다.2009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북한 김기남 단장을 대릉원과 불국사로 안내했다. 남북한을 비교해서 유적을 설명하는데 북측 안내자가 “동무, 북한이나 남한이라 하지 말고 북측, 남측이라고 하라우”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경주를 찾는 해외 인사들에게 먼저 권하는 장소가 있나.△한미정상회담 당시 회의가 끝나고 한두 시간 안에 둘러볼 수 있는 문화유적을 선정해야 했다. 첨성대와 월지는 다소 밋밋하게 생각됐고, 헬기를 타고 남산을 갈 수도 없어 종교적인 거부감만 없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제안했다.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도 아름답지만 최고의 정수는 축대이다. 축대 아래는 자연석으로 얼기설기 쌓고 위쪽은 다듬은 돌을 배치했는데, 위아래가 만나는 지점이 압권이다. 울퉁불퉁한 것을 평평하게 깎은 것이 아니라. 평평한 윗돌을 아랫돌에 맞춰 울퉁불퉁하게 다듬었다. 이를 ‘거랭이 기법’이라 하는데, 흔들리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한국의 오랜 문화라고 설명했다. 못을 박지 않고 나무를 결구하는 방식이나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화강암 석재의 불상도 감탄을 자아냈다. 부시 전 대통령이 불국사를 보며 한국문화에 감탄했다는 기사가 신문에도 크게 실렸다. 혹자는 우리나라 유적을 두고 거대하고 화려한 해외 유적에 비해 볼품없다는 말을 하는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여기며 필요한 만큼만 다듬어 쓰는 유일무이한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몰라본 얘기다.-경주 유적지를 잘 설명하는 비법이 있나.△뛰어난 언변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도 많지만, 있는 그대로의 가치에 집중하려는 편이다. 흥미도 중요하지만 재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해쳐서는 안 된다.-경주문화유적을 알리는 저술 작업을 하면서 낭산을 첫 번째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낭산(狼山)은 신라로 들어가는 출입구이자 신라 문화의 광맥과도 같은 곳이다. 신라 왕이 살던 왕궁이 월성이고, 무덤이 대릉원이라면, 제사를 지낸 신전이 낭산이다. 사천왕사와 황복사, 분황사, 선덕여왕릉 등의 유적이 남아있고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과 향가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의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다. 그럼에도 ‘낭산’은 ‘남산’으로 자주 오인될 만큼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낭산은 산의 지형이 이리가 길게 엎드린 모습이라고 ‘이리 낭(狼)’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다. 경주 도심에 인접한 해발 115m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하루나 반나절이면 충분히 둘러본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 ‘낭산, 도리천 가는 길’(9월 12일까지)이 열리고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우리나라 사람치고 경주 한번 안 다녀온 이는 없다. 경주를 새롭고 깊이 있게 보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문화유산 해설사와 동반하거나 안내서를 참고해 걸어서 둘러보길 권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 첫 장에서 가을이면 불쑥불쑥 경주를 찾고 싶다고 했다. 어디를 가나 정겨운 모습에 마음이 느긋해지고 은은한 향수를 호흡할 수 있는 곳이라고 쓰고 있다. 경주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려면 느긋한 도보 여행이 제일이다. 차량보다는 도보로 여유를 갖고 유적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신라 역사를 연구하고 경주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알리고 계시는데,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일연은 신라를 두고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 했다. 별처럼 많던 사찰과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줄지었던 탑들은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경주에 남은 2~300개의 폐사지가 더 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관심을 이어갈 것이다.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들을 제대로 알리는 저술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경주 답사여행의 꼼꼼한 길잡이가 되는 자료집이 됐으면 한다. 신라역사를 연구하고 경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는 일을 지금처럼 해나갈 것이다. /배은정 작가김호상 이사장은동국대학교 국사학과에서 고고학을 배우고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과 동국대학교·위덕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재단법인 진흥문화재연구원(매장문화재 발굴전문기관)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1991년부터 매월 첫째 주 일요일마다 시민들과 문화유적 답사를 떠난다. 문화유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신라유적을 중심으로 안내서 발간작업을 하고 있으며, 첫 번째 작업으로 ‘신의 숲 왕의 산, 낭산’을 지난해 출간했고 현재는 신라왕궁 유적을 집필중이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2022-08-29

검은돌장어 입맛 살리고! 흥겨운 공연 분위기 띄우고!

‘제7회 포항 영일만 검은 돌장어 축제’가 5천여명의 인파가 몰리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코로나19의 여파로 3년 만에 재개된 이번 행사는 지난 27일부터 28일까지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일원에서 열렸다.포항시 주최, 경북매일신문 주관, 경북도·경북도의회·포항시의회·포항수협이 공동 후원한 이번 축제는 검은 돌장어를 널리 알리고 그 브랜드가치를 끌어올려 전국의 대표 특산품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 첫날 열린 개막식에는 이강덕 포항시장과 백인규 포항시의회의장, 임학진 포항수협장 등 주요 관계자와 방문객 3천여명이 참석해 축제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했다.오프닝 공연으로는 포항예술고등학교 실용무용과 학생들이 평소 갈고 닦은 기량을 뽐내며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이어진 초대가수 공연에서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인 ‘미스터트롯’에서 매력적인 저음 보이스와 훈훈한 외모로 인기를 끈 가수 류지광이 멋진 공연을 펼치며 행사장 전체의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이어 가수 김민교와 이병철이 화려한 퍼포먼스와 함께 ‘히트곡 메들리’를 불러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축제는 포항뿐만 아니라 서울과 대구, 구미,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포항을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검은 돌장어의 맛과 진가를 알렸다는 호평을 받았다.서울에서 온 조은정(38·여)씨는 “난생처음으로 검은 돌장어를 먹어봤는데 다른 장어보다 육질이 부드럽고 식감이 좋으며 비린 맛이 덜한 것 같다”며 “특히 장어 강정은 달콤 짭짤한 양념소스가 듬뿍 발라져 있어 생선 특유의 누린맛이 하나도 안 느껴져 어린 아이들이 먹기에도 안성맞춤인 것 같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검은 돌장어의 저렴한 가격에 매력을 느꼈다는 반응도 있었다.포항시민 김재훈(45·남구 효자동)씨는 “일반 장어는 1㎏ 싯가로 3만9천원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행사장에서는 검은 돌장어 1세트를 2만5천원으로 팔고 있다”며 “몸이 허해 몸보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값도 싸고 맛도 좋은 검은 돌장어를 사먹어야겠다”고 말했다. 단순한 먹거리 판매 외에 축제 기간 진행됐던 각종 부대 행사도 방문객들을 신나게 했다.십여 개가 넘는 먹거리 판매부스와 월드아트송페스티벌, 사물놀이 공연, 지역가수 공연, 색소폰 앙상블 연주 등의 행사는 축제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특히 축제 마지막 날인 28일에는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전국 팔씨름 대회’가 진행됐다.사단법인 대한팔씨름협회가 진행한 팔씨름 대회는 일반부(남) 오른팔, 일반부(남) 왼팔, 일반부(여) 오른팔, 청소년(남) 오른팔 4종목에 전국에서 힘 좀 쓴다는 200여명의 선수들이 모여 평소 갈고 닦았던 기량을 겨뤘다. △일반부(남) 오른팔 75㎏이하 이용승(수원시), 90㎏이하 신호근(강릉시), 90㎏이상 이상필(포항시) △일반부(남) 왼팔 80㎏이하 김수범(포항시), 80㎏이상 이상필(청송군) △일반부 여자 오른팔 무체급 김혜정(대구시) △청소년 남자 오른팔 70㎏이하 서민규(포항시), 70㎏이상 이준희(포항시)가 1위를 차지해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임종석 경북매일신문 부사장은 기념사에서 “지난 2000년도 경북매일신문이 처음 과메기 축제를 시작했고 이제는 과메기가 포항을 대표하는 명품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검은 돌장어 역시도 포항의 두 번째 먹거리로 전국적인 브랜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영일만을 바라보며 검은 돌장어 많이 즐기시고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이강덕 포항시장도 “포항 향토 식품이 된 검은 돌장어를 더욱 발전시키고, 관광객들에게 대표적인 포항 먹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며 “이 축제를 통해 검은 돌장어 사업이 경북매일신문과 포항지역이 함께 노력해 더욱더 번성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축제 이모저모 선선한 날씨도 행사 성황에 한몫○… 행사가 열린 27일 오후 포항지역은 덥지 않은 화창한 날씨를 보인데다 행사 이틀째인 28일 낮 최고기온 25℃의 선선한 날씨로 행사장 곳곳에서 긴 팔 나들이 방문객 눈에 띌 정도.영일대해수욕장에 산책 나왔던 시민들도 인파에 놀라 걸음을 멈추고 행사장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진행요원들이 바쁘게 의자를 꺼내주느라 분주.최고 인기상품은 장어구이 야채세트○… 행사 최고 인기상품은 단연 장어구이 야채세트. 방문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은 장어구이 야채세트는 싱싱한 채소 쌈과 매콤달달한 양념이 발린 검은 돌장어 구이를 함께 먹는 조합.야외에서 진행된 요리 특성상 조리시간이 오래 걸렸음에도 구매 희망 줄은 계속 이어져 검은 돌장어의 폭풍 인기 실감. 구매자들은 탱글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라며 입 모아 칭찬. 축제에 빠질 수 없는 신나는 음악○… 초청 가수들과 지역 가수들의 공연으로 개막식장 뜨거운 열기로 가득.미스터트롯 출신 류지광이 시원한 날씨와 어울리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시작으로 축제의 흥을 돋우고, 팀 ‘원플러스원’ 멤버 이병철·김민교가 ‘강남스타일’, ‘마지막 승부’ 등 댄스곡 메들리를 선사하자 행사장은 환호와 박수로 절정.방문객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신나게 몸을 흔들며 분위기에 몸을 맡기는 모습.이강덕 시장, 포항 외식 산업 세계화 약속○… 이날 행사에는 이강덕 포항시장, 백인규 포항시의회 의장, 경북도의원, 시의원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이강덕 시장은 “포항지역 외식 산업을 세계화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며 “영일만 검은돌장어가 구룡포 과메기의 인기를 이을 것”이라 강조.김정재 국희의원과 김병욱 국회의원은 축전을 통해 “비록 함께 자리를 못하지만, 마음은 여러분과 함께 하겠다”며 행사성공을 기원하고 시민들에게 인사./이시라·김민지기자/사진이용선기자

2022-08-28

작은 석굴 사원에서 최고의 예술적 성취를 느끼다

□ 감실 안의 석상 엄격한 좌우대칭의 형식석불사는 돌로 만든 작은 석굴 사원이다. 인도의 아잔타나 중국의 둔황 석굴 사원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규모지만 조형미나 예술적 성취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 수준의 성취를 보인다.석불사를 보수하면서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석불의 훼손을 우려해 석불 입구를 아예 유리로 막아버렸다. 석불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본존불과 사천왕상 등의 일부 조각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석실 내부는 시각적인 제약으로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사진까지 찍을 수 없어서 석불사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석불의 구조는 사각형의 앞방을 지나면 뒷방으로 이어지는 이중구조다. 통로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이 자리고 잡고 원형의 뒷방으로 들어가면 방 벽면에 여러 불상들이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다. 둥근 천정은 360개의 넓적한 돌로 교묘하게 축조되어 있다.석굴 내부에는 다양한 조상(彫像 조각상)들이 있다. 먼저 석굴의 둥근 주실은 석불 조성의 뜻이 총집중되어 있는 공간이다. 석불사에는 본존인 여래좌상1구를 중심으로 팔부신중상(8구) 인왕상(2구) 사천왕상(4구) 천부상(2구) 보상상(3구) 나한상(10구) 감실좌상 등이 있다.이 많은 상들은 엄격한 좌우대칭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석굴을 반으로 접으면 완벽하게 겹치게 했다. 이와 같은 좌우 대칭은 고대 조형미술에서 지켜온 하나의 기본원칙이다.전문가들은 석불사의 변화무쌍하면서도 안정감있고 통일성을 보이는 사찰의 모습은 유례가 없다고 했다.우선 석불사 본존불부터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본존 부처님은 높이 총 326㎝ 대좌 높이 160㎝ 기단 상대석 폭은 272㎝의 거대한 불상이다.본존불은 세계문화유산가운데 종교성과 예술성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조각했지만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빚어낸 솜씨는 가히 명불허전이다.우선 석불사 석불은 나선형의 나발과 삼도를 하고 있다. 나발(螺髮)이란 소라 나(螺)와 머리털 발(髮)이다. 원래 인도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위로 거둬 모아 상투를 틀고,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 터번을 둘렀다. 더위나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나발은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아 올려진 머리카락 모양을 말하며, 육계는 그런 나발들을 정수리에서 묶어 세운 상투를 의미한다.석불의 목 주위에는 3개의 주름이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삼도(三道)라 한다. 이는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을 뜻하는 탐진치(貪瞋癡)나 삼독(三毒) 또는 중생들이 살아가다 죽고 이후 윤회(다시 태어남)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세 가지 단계인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를 뜻한다고도 한다.석불의 눈은 가늘고 길다 눈썹은 온화하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석불의 인자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숭고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다. □ “시선의 원근을 고려해서 정밀하게 조각”석불의 머리는 마치 소라같은 그루터기가 가득 붙어있다. 원래 인도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위로 거둬 모아 상투를 틀고,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 터번을 둘렀다. 더위나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도는 계급사회, 자연히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높은 신분일수록 상투와 터번에 많은 금은보배를 장식했고, 이러다 보니 상투가 더 높아졌다. 초기 불상조각가들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머리카락을 정수리 부근에서 묶어 상투를(후일 육계란 명칭으로 불림) 만든 형태의 불상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상투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었으나, 불상 양식이 점차 정교해지면서 끈은 사라지고 상투만 표현됐다.머리에서 위에서 비치는 두광(頭光)에서는 진리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두광은 본존상과 분리되어 본당의 벽에 새겨졌는데 자세히 보면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다. 좌우는 224.2㎝임에 반하여 상하는 228.2㎝로 아래위가 긴 타원형이다. 실제는 타원이지만 참배객의 자리에서 보면 원형으로 보인다.일제시대 활동했던 천재 미술사가 이여성은 ‘석굴암 조각과 사실주의’라는 책에서 두광의 모습이 얼마나 절묘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서술하고 있다. “두광의 연판은 상부와 하부의 소밀(疏密 성김과 빽빽함)의 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바 이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의 원근을 고려하여 먼 것은 세밀히 새기고 가까운 것은 드물게 새긴 것이다. 이것은 회화의 원소근대(遠小近代)의 원근법을 반대로 처리함으로써 시각상 착각을 피하고저 한 것인 만큼 그 용의가 얼마나 주도하였나(용의주도하였나) 하는 것을 능히 엿볼 수 있다.”고 했다.석불의 가사(부처님의 옷)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불상이나 승려가 가사를 입은 모습에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通肩)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이 있다.어깨는 둥글고 가슴은 알맞게 넓고 살결이 고와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하다. 허리는 잘록하여 늘씬한 세련미를 더하고 가부좌를 튼 다리는 안정감 있게 바탕을 이룬다. 곧추 세운 등은 기품 있는 자세를 형성하고 매초롬한 피부는 부드러운 건강미를 형성한다.불상의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이란 좌선할 때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을 말한다. 이는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얻었고 땅의 신(地神)이 이를 증명하였음을 상징하고 있다.수많은 사람들이 석불상에 매혹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의 글은 가히 압권이다.“누가 능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 뜻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불상이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무런 착잡한 수법도 보지 못한다. …모든 의미는 그 단정한 용모에 모여 있다. 그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입은 다물고 눈은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어둡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석굴안에 앉아서 깊은 좌선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간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무의 경지이다. 어떠한 참된 것도 어떠한 아름다움도 이순간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일제의 한국강점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의 문화유산을 사랑한 대표적인 일본 미학자답게 석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남김없이 쏟아놓고 있다.그렇다면 본존불은 어떤 부처님일까? 석가모니불인지 아미타여래인지 혹은 비로자나불인지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모습에 비추어 석가여래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황수영 박사같은 이는 아미타여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부처님 제자와 불법신 등 다양한 석상석굴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입상도 석불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석실 내부에 모두 8구가 조각되어 있는 팔부신장(八部神將)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을 말한다. 원래는 8구가 모두 온전했는데 동쪽 끝의 2구가 석벽이 무너져 파손되고 매몰되었다. 이후 일제 초기에 복원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팔부신장은 각각 아수라(1상)를 중심으로 용신(4상), 금시조라고도 불리는 가루라(5상) 같은 인도 신화 속에 나오는 존재들이다.주실 입구에는 금강역사 입상이 양측에 1구씩 배치되어 있다. 2구 모두 한쪽 팔을 들어 주먹을 쥐었고 다른 손은 내리고 있다. 마치 무예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듯한 모습이다. 석굴에 이르는 짧은 통로 남북 양벽에는 대부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사천왕상 4구가 조각되어 있다. 천왕은 무복을 입고 3개의 상은 모두 긴 칼을 잡았는데 그중 북쪽의 상만은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굴 안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2개의 천부상이 있다. 첫 번째 안치된 상은 민간 신앙에서 가옥 안에 있다고 믿는 제석(帝釋)이며 그 반대쪽(남쪽)은 범천(梵天)이다. 범천은 인도 고대 신화에 나오는 만유의 근원인 브라마를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으로서 비슈누, 시바와 함께 3대 신으로 불리며 이후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천부상 옆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도래하고 있다. 이들 2구의 보살은 석굴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석굴 뒷벽 중앙에는 십일면관음상이 있다. 이름 그대로 머리가 십이면으로 되어 있는데 중생들의 성품에 따라 얼굴 모습을 달리하여 적극적으로 교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십일면관음상 좌우로 5구씩 부처님의 십대 제자가 배치되어있다. 십대 제자의 모습은 인도 사람의 특징이 그대로 보인다. 높은 코와 깊은 눈이 인상적이다.제자들은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마하가전연, 아나률, 우파리, 라후라, 아난타 등 불교인들이라면 능히 알만한 인물들이다. 이들 석상은 모두 머리를 깎고 발목까지 걸쳐진 가사를 입었으며 두 어깨를 걸치거나(통견), 오른쪽 어깨를 나타내고 있다.(우견편단)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다. 어떤 이는 향로를 또 어떤 이는 승려들이 공양(식사)할 때 사용하는 식기인 발우(鉢盂), 또 어떤 이는 목이 긴 형태의 물병인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미술사학자 고유섭은 “우리는 무엇보다도 잊어서 안될 작품으로 경주의 불상을 갖고 있다.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보물은 이 석굴암의 불상이다”라고 말했다. 유리속의 본존불 앞에 서서 차가운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신라인들을 생각했다. 높고 낮음 없는 부처님의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이 신비로운 석불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최병일 작가

2022-08-28

“남빈동 집이 무사하다는 소식 듣고 포항으로 돌아와”

1945년 11월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한 한동웅 선생 가족은 3년여 만인 1948년 가을에 포항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2년이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은 포항 시내까지 밀려온다. 한동웅 선생 가족은 또 짐을 꾸려 부산으로 피난길에 오른다.김 : 광복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 유년시절을 보냈는데.한 : 남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일신국민학교로 옮겼어. 아버지 수입이 좋았던 덕분에 가정부를 두었지. 가정부한테는 20대 아들이 있었는데 키가 크고 몸이 좋았어. 가정부 아들이 아침에 리어카를 몰고 일을 나갈 때면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었지. 혼자 학교 다닐 때는 심심했는데 리어카 타고 다닐 때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하든지. 공부보다 노는 게 훨씬 더 좋았던 시절이지. 김 : 당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면.한 : 이, 벼룩이 많아 DDT를 막 뿌렸고 독한 약도 많이 먹었어. 회충을 몸 바깥으로 나오도록 하는 데 좋다는 미역도 자주 먹었고. 그땐 콜레라로 죽은 사람이 많았지. 콜레라로 사망하면 집 앞에 새끼줄을 쳤어. 그 앞을 지나가면 한기가 들 듯 으스스했어.김 : 그때 교회는 다니셨습니까?한 : 할머니(박상복 여사)가 돌아가신 후 교회에서 할아버지(한승곤 목사)에게 새 인연을 맺어주었지. 새 할머니를 따라 영락교회에 다녔어. 동생과 둘이서 교회 안을 다람쥐처럼 쏘다니면 할머니가 우리를 찾으러 다녔지.김 :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인데 선생님 댁은 윤택한 편이었으니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많았겠습니다.한 : 우리 집이 괜찮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이북에서 많이 찾아왔어. 38선이 허술한 때여서 가능했지. 아버지는 적잖은 돈을 쥐어주며 그래도 고향이 좋다시며 돌려보냈어. 그런데 한종호라는 먼 친척뻘 되는 청년이 한사코 남쪽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버지는 정 그러면 동생으로 호적을 올리자고 해서 세영(世英)이라는 이름을 짓고 아버지의 친동생이 되었어. 남쪽에서 살아가려면 그렇게 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고 판단한 아버지의 호의가 아닐까 싶어. 나한테 졸지에 삼촌이 생긴 거지.김 : 포항으로 오신 게 1948년이지요?한 : 그해 가을 갑자기 포항으로 오게 되었어. 아버지의 결정이었지.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는 아버지가 당시 난치병인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걸 치료하려면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신선한 해산물을 먹으면 좋다는 의사의 권유 때문이지. 또 하나는 곧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어. 《타임》과 《뉴스위크》를 들고 다녔던 아버지는 시국에 밝았거든. 이 두 가지를 충족할 수 있는 곳이 어디겠어? 남쪽의 바닷가잖아. 아버지가 문인들과 경주에 고적지 순례차 왔다가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일행과 떨어져 포항에 잠깐 들렀지. 포항 바다를 본 순간 바로 여기다 싶었던 거야. 그 직후 우리 식구는 서울에서 열두 시간 가까이 열차를 타고 포항으로 왔지.김 : 포항에 와서는 어디서 기거하셨습니까?한 : 해군 제독이 살던 여천동 ㄴ 자 큰 기와집에 잠깐 살다가 남빈동 530번지 집을 사서 이사했어. 방 세 개가 있는 집이었는데, 달전 사람이 70년 전에 지었다고 했지. 집이 오래되어 용마루가 파도처럼 울퉁불퉁했어.김 : 어느 국민학교에 다니셨는지요?한 : 포항국민학교에 다녔어. 여전히 공부는 재미없었지만 미술에는 소질이 있었어. 4학년 때 미술 솜씨가 선생님 눈에 띄어 교실 환경판 그림은 전부 내가 그렸거든.김 : 포항에 오신 한흑구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한 : 전쟁 때 프로펠러 전투기인 F-51 무스탕(Mustang)과 제트 엔진 전투기인 F-86 세이버(Sabre)가 우리 집 위로 계속 지나갔어. 포항 쪽으로 전선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지. 그런데 아군 쪽에서 오폭(誤爆)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어. 인민군이 고지를 점령해 미군 전투기가 출격하면 그사이에 국군이 고지를 다시 점령하는 경우가 있었지. 그렇게 되면 미군 전투기가 국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오폭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던 거야. 통역이 원활했다면 그런 사고가 없었겠지. 그래서 미군이 아버지를 찾아왔고, 아버지는 K-3 미국 공군 통역관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1954년에 포항수산초급대학 교수로 초빙되었지.김 : 남빈동 시절에 기억나는 장면은.한 : 한번은 어머니가 독감에 걸려서 고생을 심하게 하셨어. 이러다가 어머니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하고 식구들이 걱정할 정도였지. 그때 아버지가 미군 부대 폐자재를 갖고 나와서 응접실을 만들었어. 어머니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지. 응접실 선반은 내가 만들었고. 거기에 2천여 권의 책을 진열했어.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갖고 나온 포켓북을 소중하게 여겼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등이 쓴 소설책이 생각나는군. 그 영어책 덕분에 나도 영어와 가까워졌어. 그 후 별채도 만들었어. 별채는 등유로 난방했는데 한번은 아찔한 일이 있었지. 어느 겨울날, 아침 일찍 깨보니 별채가 벌겋게 달아 있는 거야. 깜짝 놀라서 별채로 급하게 뛰어가니 문이 잠겨 있지 뭔가. 큰일 났다 싶어 문을 따고 들어가니 아버지가 이상한 거야. 산소 부족 상태였던 거지. 조금만 늦었으면 큰 화를 당할 뻔했어. 김 :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겪게 됩니다.한 : 포항에 온 실향민들이 죽도시장에 많았어. 평양냉면집은 딱 한 군데 있었지. 8월 10일 아버지가 그 냉면집에서 술을 드시다가 인민군이 달전까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이튿날 새벽에 아버지가 피난 가야 한다며 짐을 꾸리라고 하시더군. 어머니가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하니까 아버지는 몸만 살면 먹을 것은 생긴다면서 최소한의 짐만 꾸리라고 하셨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은수저 스무 벌을 담요 안에 넣던 기억이 나.김 : 피난은 어느 쪽으로 가셨습니까?한 : 죽도시장에 살던 친한 실향민과 우리 식구까지 합쳐서 모두 73명이 해도를 거쳐 형산강에 도착했어. 강둑을 따라 연일 쪽으로 가는 피난민들의 기나긴 행렬이 보이더군. 형산강 입구는 미군 헌병이 지키고 있었지. 아버지가 헌병과 대화를 나눈 후에 헌병이 형산강을 건너도록 허락하더군. 우리 일행은 오천을 지나 감포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 오천에 K3 비행장이 있으니까 비행장 안전 때문에 그쪽 길은 피난민들이 지나갈 수 없도록 통제했던 것 같아.김 : 울산 방향으로 가셨군요?한 : 그렇지. 울산에 도착하니까 일행의 의견이 갈렸어. 울산이면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온 거지. 결국 우리 식구 다섯 명만 부산으로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울산에 남기로 했어. 울산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부산 동래가 보이더군. 포항에서 출발한 지 일주일 만이었어. 온천 근처 다리 밑에 자리를 잡았지.김 : 부산 분위기는 어떻던가요?한 :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온 산이 하얗더군. 피난민들이 밤에 덮었던 이불을 말리느라 관목 위에 올려놓은 거야. 그 풍경이 장관이었어.김 : 다리 밑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었을 텐데요.한 : 아침에 일어나니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어서 짐을 꾸려서 다리 위로 올라오라고 하는 거야. 다리 위에는 미군 두 명과 쓰리쿼터가 있었어. 그걸 탔는데, 초량동에 있는 동광병원 앞에 도착하더군. 우리 가족은 그 병원의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내게 되었지.김 : 다른 피난민에 비하면 형편이 나았던 편이군요.한 : 그런 셈이지. 그 방에 큰 책상이 있었는데, 서랍을 열면 아버지가 급여로 받은 빳빳한 신권(新券)이 꽉 차 있었어. 그중 한두 장을 빼서 시내에 나가면 놀기 좋았지.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영도다리도 건너보고. 도떼기시장(현 국제시장)에 갔던 기억도 나. 그런데 아버지는 자식들도 자립해야 한다는 생활철학이 있었어. 그래서 나더러 동생과 둘이서 장사를 한번 해보라고 하는 거야. 카멜(Camel), 럭키 스트라이커(Lucky Strike), 체스트필드(Chesterfield) 같은 양담배를 구해주더니 길거리에 나가서 팔아보라고 했지. 그걸 들고 길거리에 나갔는데 한 아저씨가 한꺼번에 다 살 테니 따라오라고 하더군. 웬 떡인가 싶어 한 건물 앞까지 따라갔지. 그런데 그 아저씨가 보따리에 담배를 모두 담고는 돈을 가지고 곧 온다며 건물 안으로 사라졌어. 그러고는 안 나타났어. 보기 좋게 사기를 당한 거지.김 : 포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습니까?한 : 11월 어느 날 아버지가 포항 집으로 가자고 하셨지. 남빈동 집이 무사하다면서.김 : 전쟁 때 포항 도심이 초토화되었는데 선생님 댁은 용케 남아 있었군요. 만약 댁이 무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한 : 포항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김 : 포항 집으로 가게 된다니 기분이 어떻던가요?한 : 서울에서 본 전차를 부산에서 다시 보게 되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런데 포항에 가면 전차를 볼 수 없잖아.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섭섭하더군. 그래서 전차표 한 묶음을 사서 동생 동명이와 둘이서 온종일 전차를 타고 다녔어. 대신동에서 서면, 서면에서 동래온천까지 계속 다녔지.김 : 포항에 도착하셨을 때 풍경이 기억나시는지요?한 : 트럭을 타고 늦은 오후에 포항 효자에 들어섰어. 거기서 시내를 바라보니 폭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거야. 제일교회(현 소망교회) 건물만 솟아 있고 멀리 송도 솔숲이 보이더군.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제공 : 한동웅

2022-08-24

여름의 막바지 영화관으로 피서 어때요?

아스팔트가 녹아내리고, 달궈진 낮의 열기가 식지 않아 밤새 잠을 이루기 힘들었던 열대야의 성하(盛夏)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덥다. 재론이 여지없이 아직은 여름.하나 둘씩 순서대로 폐장하는 해수욕장을 찾기는 그렇고, 멀리 있는 계곡으로 가기도 어려운 처지라면 에어컨 시원한 극장에서 2시간 남짓 더위를 피해보는 게 어떨까?다행히 현재 영화관엔 여름 성수기 관객을 겨냥해 개봉된 작품들이 적지 않다. 한국 영화가 주류를 이루지만, 주목할 만한 외화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적절한 주제의식과 어느 정도 재미를 갖춘 것이라면 영화를 통해 맛보는 ‘대리 만족’의 기쁨은 지불하는 입장료에 비해 크다. 막바지 여름을 이기는 피서법으로 나쁘지 않을 듯하다.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지만 영화관에서라면 조선과 일본이 나라의 운명을 걸고 전투를 벌였던 400년 전 한산도 바다를 볼 수 있고, 불의한 독재자를 처단하고 싶었던 40년 전 사내들과 만날 수 있으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온갖 욕망이 비등하는 오늘날 미국 할리우드 인근 목장에서 달리는 말에 올라타는 게 가능하다.지난주.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시기에 개봉돼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영화 3편을 관람했다. 간략하게 이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자들의 선택에 작은 도움을 주고자 한다. ▲또 다시 소환된 이순신… ‘한산:용의 출현’영화나 드라마, 연극이나 소설로 만들어질 만한 매력을 갖춘 역사적 사건은 우리나라에도 여럿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정도의 드라마틱한 요소를 간직한 건 드물다.대륙으로의 진출을 열망하던 섬나라 일본이 교두보로 지목한 조선을 침탈하고, 백성을 지켜야 할 왕과 벼슬아치들은 일본 군대를 피해 도망치고, 나라로부터 받은 혜택이 거의 없었던 이들이 의병으로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국난(國難)에서 민족을 구하는 영웅이 탄생하고….임진왜란의 전개는 그 자체로 영화적이다. 그랬기에 이미 수십 수백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관객들과 만났다.부정할 수도 없고, 선택을 망설일 것도 없다. 임진왜란이 낳은 ‘최고의 스타’는 이순신이다.국가의 존망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던 탐관오리와 싸워보지도 않고 겁을 집어먹은 채 식솔들을 이끌고 왜군을 피해 달아나던 상당수 조선 관료들 사이에서 이순신은 돌올했다.지금의 해군 작전사령관격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을 맡아 반쯤은 파손된 12척의 보잘것없는 함선으로 일본 해군 전투선 133척에 맞서 싸운 그의 기개와 전략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칭송받고 있다.이 전투를 영상으로 옮긴 것이 자그마치 1천700만 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명량’이다. 연출자는 김한민.이순신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이 21세기에도 통한다는 것을 깨달은 김한민은 이를 한 번 더 우려낸다.‘한산:용의 출현’은 명량해전이 있기 5년 전 한산도에서 벌어진 조선 수군과 일본 해군 사이의 전투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역시 흥행 가도를 달려 벌써 관람객이 600만 명을 넘어섰다.역사에 손톱만한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전투의 승자가 누구이고, 패자가 누구인지 안다. 그러니, 구구절절 ‘한산: 용의 출현’의 줄거리를 읊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일진일퇴의 16세기 전투 장면은 제법 실감나고, 박해일을 포함한 주연과 조연들의 연기력도 크게 흠잡을 게 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한산: 용이 출현’에서 임진왜란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과 이순신에 관한 기존의 인식을 전복시키는 놀라움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하기야, 그러기엔 우리들 머릿속에 새겨진 ‘이순신이란 존재’의 힘이 너무 강하다. ▲두 사내, 학살자에게 총을 겨누다… ‘헌트’키 크고 잘생긴, 그러나 연기력은 거론할 게 없던 20대 초반 배우에서 시작해 현재는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이정재와 정우성.결코 짧지 않은 30년의 시간은 두 사람을 ‘그저 잘생긴 영화배우’에서 타자의 삶을 자신의 몸 안에 효과적으로 담아낼 줄 아는 능숙한 연기자로 만들었다.이제는 이정재와 정우성의 연기를 “형편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드문 걸 보면 이는 비단 기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둘은 나란히 영화 연출에도 도전을 했는데,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 받은 평가도 박하진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개봉된 ‘헌트(Hunt)’의 연출자는 이정재. 주연도 맡았으니 1인2역이다.제목으로 정한 ‘사냥’이란 단어가 의미심장하다. 누가 누구를 사냥하고 싶은 것일까? 사냥의 대상으로 지목된 짐승 혹은, 인간은 누구일까? 마지막엔 진짜 사냥꾼이 밝혀질까?‘헌트’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 초반.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의 18년 장기집권을 부하였던 군인이 끝냈고, 또 다른 정치지향형 군인들이 등장해 이른바 ‘군사독재’를 이어가던 이 시기 역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익숙하다.1970년대와 1980년대 내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이 나라를 독단과 교의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의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치게 했던 그 두 기관에도 의인(義人)은 있었던 모양이다. 영화 ‘헌트’에 따르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영화는 군사독재 시절 최고의 권력기관 내에서 벌어지는 막후 암투와 50대 이상의 관객들에겐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역사적 사건들을 적절히 버무려 흥미로운 2시간 5분을 선물한다.이정재와 정우성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근사한 슈트를 차려 입고 뛰어다니며 폼나게 총질을 한다. 이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둘의 팬들은 열광할 게 분명한 일.몇몇 부분은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의 냄새가 난다. 비유하자면 애써 공부한 티가 이곳저곳에서 난다는 것. 연기자로선 베테랑이지만 감독으로서는 신출내기인 이정재의 연출력이 제법이다.그러나, ‘헌트’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를 몸으로 겪으며 살았고,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공부한 이들이라면 영화가 밍밍하고 싱거울 수도 있다. 이를 감안하고 보시길. ▲우리를 삼키는 괴물의 이름은 욕망… ‘놉’매주 극장에 걸리는 천편일률적이고, 그저 그런 상업영화에 물린 사람들이라면 조던 필(Jordan Peele)이라는 이름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조던 필은 전작 ‘겟 아웃’과 ‘어스’를 통해 그가 태어나 활동하고 있는 미국만이 아닌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감독이다. 한국에도 적지 않은 추종자를 거느린.그의 영화는 치밀한 복선 깔기와 예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결말, 능수능란한 배경 음악 사용과 오래 기억될 은유와 상징을 두루 보여주고 있어 ‘영화 보기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는 평가를 받는다.평론가와 관객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연출가 조던 필. 여전히 백인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할리우드에서 흑인이 감독하고, 흑인이 주연을 맡는 드문 영화가 그의 작품들이다.조던 필은 초지일관 흑인이 연관된 정치·사회적 문제에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도 꽤 유명하다. 다만,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으니 세련되기까지 했다.그의 신작 ‘놉(Nope)’은 스토리가 아주 간명해 그걸 언급하면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 욕을 얻어먹을 게 분명하다. 스포일러 유포는 기자의 몫이 아니다.하지만, 이것 하나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영화엔 각기 다른 이유에 의해 무언가의 커다란 입 속으로 삼켜지는 인간들이 수없이 등장한다.인간은 왜 위기에 처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할까? 어째서 그렇게 태어났을까? ‘놉’엔 이 질문에 대한 조던 필의 답이 담겼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8-23

‘군민과 함께하는 행복한 청송’ 위해 날마다 한 걸음씩

변화와 도전은 윤경희 청송군수가 지향하는 군정의 주요 방향이다. 이를 바탕으로 ‘군민과 함께하는 행복한 청송’을 만드는 것이 윤 군수의 궁극적 지향점.민선 7기를 거치며 청송군은 사회와 경제를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발전을 이뤄냈다. 민생과 직결된 여러 사업들은 지금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앞서 언급한 변화와 도전의 의지로 발전의 길을 걷고 있는 청송군의 현재 모습을 아래에서 상세하게 살펴봤다. △개선된 도시 미관과 상생하는 지역경제최근 청송군의 도시 환경이 눈에 띄게 밝고 깨끗해졌다. 청정한 콘셉트의 도시브랜드 ‘산소카페 청송군’ 개발 이후 이에 어울리는 정책과 사업을 펼친 결과다.청송읍 소재지 중앙로 구간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전신주와 통신주를 지중화해 전선 없는 깨끗한 거리로 만들었다. 보행환경과 도시미관이 개선돼 주민들의 삶의 질도 올라갔다. 청송읍 소재지 금월로 전선지중화사업도 진행 중이며, 앞으론 진보면 소재지에도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는 것이 청송군의 설명.간판개선사업도 아름다운 거리환경 조성에 보탬을 주고 있다. 무분별하게 난립한 옥외간판을 정비해 쾌적하고 깨끗한 도시미관을 만들기 위해 청송읍 간판개선사업과 진보면 신촌 간판개선사업이 진행됐고, 진보면 진안리에서도 같은 사업을 벌이고 있다.청송의 밤도 환해졌다. 용전천 주변의 경관 조명들이 어두운 청송의 밤을 환하게 밝히면서 주민들과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청송의 관문인 청송IC에 지역을 상징하는 명품 소나무숲과 경관 시설물을 설치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과 ‘산소카페 청송군’ ‘청송사과’ 경관 시설물 설치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앞으로도 청송군은 밝고 깨끗한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정책을 이어감으로써 군민 삶의 질 향상과 관광객 유치에도 진력할 방침이다.청송군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전 세계적 경기 침체에도 군민이 살맛나는 다양한 생활밀착형 경기부양책을 펼쳐 상생하는 지역경제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왔다.그중 군민들에게 실질적인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청송사랑화폐다. 청송사랑화폐는 지난 2020년부터 유통됐다. 발행 규모만 봐도 2020년 251억, 2021년 455억, 2022년 600억 원으로 인기가 계속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10% 할인판매를 비롯해 농민수당, 농산물택배비, 재난지원금 등 각종 정책수당이 청송사랑화폐로 지급되면서, 이러한 자금이 타 지역으로 유출되지 않고 지역의 소상공인 매출 향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이와 더불어 경기 침체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송군 소재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특례보증을 지원하고, 2020년부터 매년 맞춤형 재난지원금을 지급해 골목 상권을 살리는데도 주력하고 있다.또한 전국 규모의 체육대회 개최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했다. 전국 고등축구리그, 회장기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대회, 청송사과배 전국테니스대회 등은 청송군을 찾는 방문객을 증가시켰고, 이는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맞춤복지 실현과 체류형 관광지로의 도약청송군은 포용적 복지 실현에도 계속적으로 노력했다. 청송군 전체 인구 중 30%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층을 위해 추진해온 100세 행복 정책들이 지금은 그 결실을 맺고 있다.경로당 지원을 현실화하고, 경로당 신축·환경 개선을 통해 소외와 불편 없는 행복경로당을 만들어가고 있고, 노인일자리사업도 점진적으로 확대할 것이라는 게 청송군의 부연.어르신 목욕비 지원, 어르신 맞춤돌봄서비스 제공 등은 노인 복지사각지대 해소에도 도움을 줬다. 향후 보편적 복지 확대 차원에서 군민은 물론 청송을 방문한 누구나 관내 시내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관련 지원도 적극적으로 준비 중이다.청송은 출산장려금 확대 지원으로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앞장섰다. 진보키즈카페는 어린이들에게는 놀이공간을, 주민들에게는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지역 청소년들의 교육환경 개선과 양질의 교육기회 제공도 청송군이 신경 쓰고 있는 문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보훈가족에 대한 예우와 지원을 확대하고, 장애인 일자리사업을 활성화한다는 것도 청송군의 향후 계획이다.체류형 관광지로의 도약도 청송군의 비전이다. 맑고 청정한 자연친화 도시 이미지를 바탕으로 ‘산소카페 청송군’ 브랜드를 활용한 마케팅과 언택트 관광정책 등이 그 실질적 사례다.‘산소카페 청송정원’은 새로운 힐링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고, ‘청송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은 청송의 관광지도를 바꿀 역점 시책으로 꼽힌다. 체류형 관광지로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먹을거리 개발과 양질의 숙소도 준비하게 된다. “사과축제도 재정비 할 것”이라고 청송군은 설명한다. △군민의 건강과 안전 속에 미래농업 구축청송은 실속 있는 농업 지원정책과 기술 개발로 지속가능한 농업경쟁력을 견인하고 있다. 농민수당 제도를 도입해 농업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삶의 질 향상과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변함없는 청송군의 미래 계획.지역 농산물 판로 확대와 유통 활성화를 위해 택배비, 포장재, 유통편의장비, 비대면 판매 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 중이며, 청송사과유통센터 운영체제 변경과 농산물 산지 공판장 개설로 농산물의 유통·판매 경로를 다각화하고 있다.청송황금사과 ‘황금진’을 상표로 등록하고, 튀는 컬러와 새콤달콤한 맛으로 소비자의 눈과 입을 사로잡는 마케팅 전략을 펼쳐 황금사과 시장도 선도하고 있다. 여기에 청송사과 품질보증제, 농축산물 가격안정기금 운용, 농업인 안전보험료 지원도 농민들에게 작지 않은 힘을 주고 있다. 청송군은 차별화된 미래농업의 선두주자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윤경희 군수는 지난 민선7기 임기 첫날 민생 현장을 방문하는 것으로 군정을 시작했다. 당시 태풍 쁘라삐룬의 피해 현장을 살핀 것이다. 군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군정 철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지난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 세계는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청송군은 선제적인 행정조치와 군민들의 적극적인 방역 참여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선제 검사 조치와 치밀한 방역체계 구축은 바이러스의 지역사회 전파를 막았고, 청송군은 우수한 대응책을 인정받아 행정안전부로부터 특별교부세를 확보하기도 했다‘걸음아 나 살려라’ ‘나 혼자 운동한다’ ‘마실길 걷기’ ‘자기주도 건강관리교실’ 등 각종 비대면 건강관리 프로그램도 군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산남지역 건강증진센터 운영과 응급 의료 전용헬기장 조성, 정신건강 복지센터 설치와 보건의료원 의료진 숙소 건립 등도 주목할 만한 사업이었다.윤경희 군수는 말한다. “변화가 없으면 모든 것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늘 새로움을 원하고 있고, 농촌도 그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이에 덧붙여 “많은 현실적 난관들이 있지만, 앞으로도 청송군은 변화와 혁신을 선도해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김종철·홍성식기자

2022-08-22

“개나리가 아름다웠던 평남 강서군 연곡리 옛집”

1945년 광복 직후 38선을 넘어 서울로 온 한 가족이 있었다. 이들은 3년 후 바다가 아름다운 포항으로 와서 둥지를 틀었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 갔다. 그리고 고적한 포항으로 돌아와 삶의 뿌리를 내렸다. 지난 2000년 동지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한동웅 선생의 집안 얘기다. 한동웅 선생의 아버지는 문학가 한흑구, 어머니는 중등학교 음악 교사 방정분 그리고 할아버지는 도산 안창호의 동지였던 한승곤 목사다. 포항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한동웅 선생 일가의 발자취는 파란 많은 우리 근현대사의 독특한 전형이다. 다만 포항에 정착한 한흑구가 바다와 술을 벗하며 은자(隱者)로 살아간 까닭에 그 사연을 세상 사람들이 소상히 모를 뿐이다. 한동웅 선생을 만나 193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선생의 삶과 집안의 역정(歷程)을 들어보았다. 김도형(이하 김) : 근황은 어떠신지요?한동웅(이하 한) : 타고난 건강 체질이고 두주불사(斗酒不辭)에 술로는 져본 적이 없어.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나이가 든 탓인지 여기저기 탈이 나네. 구급차 신세를 대여섯 번 졌지. 움직이는 게 좀 불편하지만 거의 매일 40킬로미터 정도 운전하며 바깥바람을 쐬지.김 : 2000년 8월 말에 동지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셨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한 : 정년퇴직 후 여러 단체에서 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이 왔어. 사회봉사라 여기고 승낙했는데 한때는 무려 16개 단체의 대표가 되었지. 그렇다고 대표의 명함을 만들지는 않았어. 봉사로 생각하고 대표직을 수락했는데 남들한테 굳이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 대표 중 하나가 평안남도 도민회 회장이야.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남 강서군으로 이사 가서 광복되던 해 10월까지 살았던 인연이지.김 : 포항에도 이북 출신이 있는지요?한 : 지난 3월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에서 ‘잃어버린 고향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 나를 초대하더군. 원래는 실향민 1세대를 불러서 증언을 들으려 했는데 1세대가 살아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1.5세대인 내가 참석하게 된 거야. 아버지가 실향민 1세대고, 나는 1.5세대에 해당하지. 포항에 ‘서부회’라는 이북 출신 모임이 있어. 회원이 십여 명 되었는데, 지금은 세 명만 살아 있지. 모두 구순이 넘었어.김 : 이북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요?한 : 나의 원적은 평안남도 평양시 하수리 96번지야. 생후 한 달여 만에 평남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안말로 이사 가서 1945년 10월까지 살았지. 평양의 기억은 남아 있을 리 없고, 연곡리 시절의 기억은 꽤 갖고 있지. 강서군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향으로 국무총리를 여러 명 배출한 곳이야. 연곡리는 조상 삼대가 살던 곳이지.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간 한흑구는 1934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게 된다. 한흑구는 평양에서 ‘대평양(大平壤’ 등 잡지 편집과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 1937년 4월에 결혼한다. 하지만 그해 6월부터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이 터지면서 한흑구 부자(父子)는 안창호 등과 기소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이듬해 3월 한동웅이 태어났다.김 : 한흑구 선생이 평양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한 : 일본의 박해가 심해서 모든 걸 접고 시골에 가서 좀 쉬자고 생각하셨을 거야. 아버지는 농사를 좋아하셨거든. 소나무를 베어내고 2천여 평 되는 땅에 사과나무와 자두나무를 심었지. 그 과정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어. 일본은 정책적으로 밀주(密酒)와 벌목을 엄격하게 단속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많은 소나무를 베어냈으니 오죽했겠어. 일본인 면장이 깜짝 놀라 평양시장한테 상황 보고를 했지. 평양시장은 골치 아픈 사람이 갔으니 그냥 내버려두고 동태만 살피라고 했다더군.김 : 연곡리의 추억을 들려주신다면.한 : 내가 살던 집은 ㄴ 자 기와집이었어. 봄이 되면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꽃이 아름다웠지. 닭 둥지에 닭이 수시로 달걀을 낳았고, 밤에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겁나서 문밖에 나가지도 못했어. 여름이 되면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강냉이를 삶아 먹었지. 내가 다니던 학교에 마츠다(松田)라는 교장이 있었는데, 칼을 차고 교단에 올라와 훈시했어. 아이들한테 공포감을 심어주려고 그랬을 거야. 마츠다 교장은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거나 재끼(노름)를 했지. 마츠다 교장은 말을 타고 우리 집에 왔는데, 말발굽 소리와 철커덕거리는 사브르(Sabre, 軍刀)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해. 김 : 마츠다 교장이 선생님 댁을 자주 방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한 : 아버지를 감시하고 회유하기 위해서였지. 나는 마츠다 교장이 나타나면 집 옆에 있는 언덕바지로 도망갔어.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고 모기도 성가셨지만 마츠다 교장이 더 무서웠거든.김 : 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한 : 아버지는 낚시를 좋아하셨어. 집에서 5리 떨어진 낚시터를 즐겨 찾았는데 나도 아버지를 따라다녔지. 포항에 와서도 아버지와 낚시를 다녔어. 서울에 있던 최상수라는 민속학자가 연곡리까지 찾아왔던 기억이 나는군. 그분이 바나나를 들고 온 덕분에 난생처음 바나나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 사탕은 소련제가 맛이 좋았고.최상수(1918∼1995)는 ‘조선민요집성’, ‘한국의 세시풍속’, ‘한국민속놀이의 연구’ 등을 저술한 민속학자다. 1937년 일본 오사카외국어학교(大阪外國語學校) 영어부를 졸업하였고, 1940∼1950년대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국외국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민속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민속학의 정립에 기여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조.김 : 남쪽으로 올 때는 어떻게 이동하셨습니까?한 : 아버지는 시국에 밝았어.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식구들을 놔두고 먼저 월남하셨지. 그리고 11월에 식구들에게 월남하라는 전갈을 보내셨어. 연곡리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염소를 가리키며 네 엄마에게 인사하라고 하시더군. 어머니가 나를 낳고는 젖이 잘 안 나와 젖동냥을 하기도 했는데 이따금 염소젖을 먹이셨나 봐. 눈망울이 선한 염소의 뺨을 비비던 기억이 지금도 선해. 얼마나 마음이 짠하던지. 가재도구를 실은 달구지를 끌고 신작로를 걸어서 강서역으로 향했지. 강서역에서 기차 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꿈만 같았어. 기차 타고 개성역에 도착했고, 백천온천에서 하룻밤을 묵었지. 백천온천은 당시 한반도에서 최고로 치던 온천이야. 목욕하고 따뜻한 다다미방에서 잤는데 먹고 남은 강엿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았지. 아침에 일어나니 엿이 녹아서 방바닥까지 내려와 있던 기억이 나.김 : 38선은 어떻게 넘었습니까?한 :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제목의 글이 그렇게 많다던데, 나도 할 말이 좀 있지. 당시 11월은 꽤 추웠어. 낮에 움직이면 인민군에 걸리니까 어둠을 틈타 관목(灌木) 사이로 기어서 남쪽으로 이동했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숨죽이며 움직였어. 인민군이 한 번씩 공포탄을 쏘았는데 총소리에 놀란 꿩들이 갑자기 날아가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랐지. 그렇게 밤새도록 남쪽으로 이동해 아침 6∼7시쯤 위험 지역을 통과하니 식당 딸린 집 한 채가 보이더군. 그 집에서 쉬면서 백숙을 맛있게 먹었는데,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곧바로 설사를 하고 말았지. 거기서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했어. 나는 짐칸에 타고 있었지. 그런데 누군가 운전석에 고춧가루를 실어두었는지 그게 바람에 날리면서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어.김 : 38선에 소련군도 있지 않았습니까?한 : 트럭을 타고 한참 가니 아버지와 소련군이 보였어. 아버지가 소련군에게 ‘따바리쉬(товарищ, 동지)’라고 하니까 소련군이 통과시켜주더군. 아버지가 식구들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린 거지. 우리 식구는 미군이 운전하는 쓰리쿼터(three-quarter)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어. 숭례문 인근의 대동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중구 필동 9번지 집에서 짐을 풀었지. 필동은 고위층이 많이 살던 동네로, 우리가 짐을 푼 곳은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살던 집이었어. 방 여덟 개가 있는 이층집이었고 작은 연못과 정원, 불교식 등(燈) 두 개가 있었어. 서울시의 통역관이었던 아버지가 미군정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는 얘기지. 부엌 옆에 온돌방이 하나 있었는데, 키 작은 일본인 노부부가 그 방에 있었어. 아마 그 집의 주인이 아니었나 싶어.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손을 흔들며 떠나던 부부의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한동웅1938년 평양에서 한흑구 선생과 방정분 여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10월 월남해 서울 필동에서 살다가 1948년 가을 가족과 함께 포항에 정착했다.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으며, 3학년 때 4·19혁명에 앞장섰다. 대학 졸업 후 포항으로 돌아와 1962년 3월 영일중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1968년 9월 동지상고로 옮겼고, 2000년 8월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38년 6개월 교직에 있는 동안 교장으로 16년 있었다. 그 후 평안남도 도민회 회장, 포항환경운동연합 공동 대표 등 여러 단체에서 봉사했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사진촬영: 김훈(사진작가)

2022-08-22

“묵묵히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

서울 연남동의 한 건물. 지하로 들어가는 문을 열자 밴드 ‘공중그늘’의 작업실이 펼쳐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게 꾸려진 창작의 공간에서 4명의 멤버와 마주 앉았다. 멤버들은 시종일관 밝고 선명했다. 인디 음악가의 거창하거나 추상적인 예술적 고뇌 대신 자신들이 지향하고 표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노래와 기타를 맡은 이장오와 드럼을 연주하는 이해인은 형제다. 기타를 치는 경성수와 베이스의 이철민까지 넷은 모두 어릴 적 친구사이다. ‘공중그늘’은 2016년 결성됐다. 거창한 시작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떻게 밴드를 하게 됐어요?△(이장오) 청소년기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에요. 놀던 사이죠. ‘뭔가를 좀 같이 해 볼까? 어차피 매일 같이 모여 있는데 생산적인 걸 해보면서 놀아도 되지 않을까?’ 하면서 시작한 것 같아요. ‘그냥 놀듯이 하자’ 이렇게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밴드의 SNS 관리나 대외 홍보는 해인이 맡고 서류 작업은 장오가 한다. 음반 심의 의뢰 등은 철민의 담당. 성수는 공연과 관련한 소통을 도맡아 한다. 대부분의 인디 밴드가 그렇듯 가내수공업이다. 화제가 됐던 ‘포크음악의 대모’ 장필순과의 협업 과정도 단순했다.△(이해인) 편곡을 할 당시에 ‘여기에 장필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어가면 진짜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락을 드려볼까 하는데 되게 사실 망설여지는 일이잖아요. 근데 좋은 음악을 만들어서 존경하는 음악가한테 같이 하자고 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웃음) 그냥 연락을 드려볼 수도 있지 약간 이런 생각으로 연락을 드렸던 거고 해주실 거라고 크게 기대는 안 했었어요.‘놀 듯’ 시작한 밴드는 어느새 청춘의 진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8년 발매한 싱글 ‘선’에선 경쾌하고 감각적인 연주 위에 대상과 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사로 얹었다. 같은 해 발표한 ‘산책’에선 ‘우리는 길을 잃었지만 산책이라 부르지’라는 가사와 희망적 멜로디를 통해 방황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노래했다. 독보적인 스타일과 문학적 가사는 평단과 인디 씬의 주목을 받았다. -스타일이 상당히 독특해요.△(이해인) 저희 스타일이 막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거라기보다는….△(경성수) 굳이 우리를 따라하지 않는 것 아닐까?(웃음)△(이장오) 저희는 정규적인 작곡을 배워서 쓰는 스타일의 곡들이 아니라서 좀 더 자유로운 부분은 있어요.정규앨범 ‘연가’는 지난해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 부문 후보에 올라 ‘섬세한 표현력과 몽환적 스타일을 내세워 음악 안팎에서 매혹적인 감응을 이끌어 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악 자체와 더불어 비주얼 요소를 포함하는 공감각적 표현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공중그늘의 뮤직비디오는 실사(實寫) 대신 일러스트가 주를 이룬다.-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이에요. 종합예술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주얼 작업에 공을 들이는 것 같습니다.△(이장오) 실사 보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표현하는 것이 저희와 결이 맞는 것 같아요. 음악을 깊이 있게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라는 생각보다는 작가주의적인 작업 방식을 택하기 때문에 그걸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기 위해 시각적인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뮤직비디오 작업에 특히 공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실사보다 표현이 자유롭고 이를 받아들이는 대중들에게도 해석의 여지가 넓은 일러스트를 선택했단 얘기다. 첫 싱글이자 대표곡으로 꼽히는 ‘파수꾼’의 뮤직비디오에선 자칫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입체적인 도형들이 공간을 떠돈다. 선과 면으로 단순화된 오브제들이 반복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해인) 사실 어떤 일의 결과라는 것이 조금 허무할 수도 있고 의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일을 묵묵히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예요. 파수꾼의 일처럼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꾸준하게 하는 것이요. 이런 생각을 비디오 작가님과 나누면서 나온 시각적인 아이디어예요. 반복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 이유에요.이들의 음악은 몽환적이고 부유하는 듯 한 정서의 연주 위에 과하지 않은 담담한 가사가 얹혀 있다. 순수하고 문학적인 가사는 어쩐지 인디음악 스럽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의 창작물은 기성의 장르에 맞춰 정의하기 어렵다.-장르를 굳이 얘기할 수 있을까요.△(이해인) 제가 그냥 우스갯소리로 ‘굿보이 사이키델릭’이라고(웃음) 저희도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어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는데 사이키델릭이라고 하면 날이 서 있고 그런 이미지인데 ‘너희 음악 정말 착하다’ 이런 얘기를 되게 많이 들어요. 사실 저희가 명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곡은 슬픔이나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너무 감정에 함몰돼 있지 않게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사이키델릭: 환각적·몽환적 분위기의 록 음악 장르)대중음악 씬에서 밴드가 귀해진 마당이다. 그렇기에 경연 프로그램을 비롯해 인기 매체에서의 섭외 요청도 수시로 들어온다. 하지만 이 오랜 친구들은 달콤한 유혹을 모두 거절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 같단 이유에서다. -오버그라운드에서 호출이 오면 나설 의향이 있어요?△(이해인) 섭외가 많이 왔었어요. 특히 경연 프로그램에서요. 그런데 다 거절했어요. 저희 음악이 퍼포먼스 자체로 사람들한테 엄청나게 인상을 주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하고 멤버들 성격 자체도 경연에 적합하지 않아서(웃음)….△(이장오) 다들 좀 내성적인 편이기도 하고 또 곡 같은 거 선정할 때도 음악가로서의 자존심 같은 걸 굉장히 생각하는 편이라서 대중한테 어떤 곡이 인기가 좋을까보다 어떤 곡을 들려주고 싶은지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요.함께한 시간만큼 멤버들의 우애도 각별하다. 작사와 작곡은 개인이 하지만 발표는 밴드 이름으로 한다. 한 멤버가 곡을 스케치 해 오면 함께 다듬어 가며 완성해 가는 식이다. 제각기 개성을 담아 곡을 쓰지만 앨범 안에선 일관성이 느껴진다.-작사·작곡이 공동으로 돼 있어요.△(이장오) 스케치를 만들어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작곡했다고 하는 게 되게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고 또 그냥 사이좋게 오래 하는데도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게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싸우진 않아요?△(이장오) 엄청 많이 싸워요. 또 그렇게 싸우고도 다시 풀릴 수 있는 정도 관계라서 계속 함께 하는 거 아닐까요. 저희는 보통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욕구 보단 누군가가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욕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팀이에요. 그래서 한 사람이 진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면 저희는 안 하려고 그래요. 하기 싫은 일을 하다 보면 오래 함께 하기 힘든 것 같더라고요.멤버 중 누군가의 ‘하고 싶지 않은’ 욕구를 존중하며 6년 째 섬세한 창작물을 묵묵히 만들어 가고 있는 이들. 지난 4월 발표한 ‘모래탑’에선 밴드의 자전적 읊조림이 들린다.“우리는 모래탑을 쌓을 거야바람에 흩날려 작아지더라도때로는 헤매는 사람들의멀리서 반짝이는 꿈인거야.”장오·해인 형제는 경상북도 포항시 출신이다. 청하면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향이 주는 영감이 있나요?△(이해인) 저는 청하에서 행복했던 기억이 많아요. 저희 집이 나무 농장이었거든요. 넓은 농장에서 매일 놀았어요. 학원도 없었고요. 여름이면 바다도 거의 매일 갔거든요. 그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 있어요. 시골에서 자연을 느꼈던 것들이 표현에서 조금씩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이장오) 포항에서 가장 답답했던 게 문화 격차가 너무 크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어요. 문화적인 지원이 많이 필요하겠죠.밴드 ‘공중그늘’은 오는 27일 오후 5시 포항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콘서트를 연다. 이재중 TV조선 탐사보도부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 파리 테러, 네팔 대지진, 로힝야 사태 등 국제 분쟁·재난 취재를 해 왔다. 국제부와 사회부 법조팀 등을 거쳐 현재 탐사보도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2016 한국기자상 대상, 2017 관훈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2022-08-22

“석불, 수리적 비례에 기반한 美 의 만다라”

□자연 활용해 습기 제거한 신라인의 지혜석불사의 석불은 예술적 측면에서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1000년 전 신라인들의 과학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지난호에도 언급했듯이 석불사 발견 이후 보수작업을 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습기 제거였다. 일제가 석불사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콘크리트를 사용해 석굴암의 외벽을 막은 것은 당시 기술의 한계라고 해도 현재까지 석불사 습기 제거 문제는 뚜렷하게 개선된 것이 없다. 1963년대엔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크리트 외벽 바깥으로 약 1m의 공간을 두고 다시 콘크리트 돔을 씌웠다. 하지만 이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실내에 에어컨을 설치해 습도 조절을 해야 했다.첨단 건축기법을 사용해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했음에도 석불사의 습기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경덕왕 때인 8세기 중엽 착공돼 무려 1천200여 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신라인들의 지혜와 과학적 수준을 경시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석불사의 습기 제거 원리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한 것이었다.석불사 조성 당시 외벽에는 직경 10㎝가 넘는 자갈들이 1m가량 쌓여 있었다. 이 자갈층이 바로 석굴암의 습도를 조절하는 자동 제습 장치였던 것이다. 습기 차고 더운 외부 공기는 자갈층을 통과하면서 수증기가 응축돼 자갈에 남고 공기는 차가워진다. 자연의 원리를 이용한 에어컨인 셈이다. 이렇게 차가워진 공기는 밀도가 높아 자연히 아래쪽으로 흘러 석굴암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송풍기가 없어도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내부를 꾸준히 채우게 돼 석굴암 안은 항상 뽀송뽀송한 상태가 유지된 것이다.석불사 아래로 흐르던 지하수도 바닥 온도를 벽면의 온도보다 낮게 유지해 불상 표면에 맺히는 이슬(결로)현상을 막아주던 자동 제습기였던 셈이다.일제가 보수작업을 한다고 콘크리트로 돔을 만들고 지하수의 물길을 바꿔버린 것이 오히려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일으켰다. 1963년 석불 보수 공사를 재개할 때도 지하수가 석불사 습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수의 물을 퍼내기 위해 동파이프를 묻어 석불사 밖으로 물을 빼내려고 했다.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였던 이태녕 박사는 역사학회에 ‘석굴암의 구조와 습기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석굴암 석면(石面)의 결로현상은 석면의 온도 조절이 균형을 잃은 데서 일어난다. 일제 때 보수하기 이전(즉 원형)에는 석굴 밑에 있는 바닥 돌에서만 결로현상이 나타나고 풍화작용도 이곳에서만 심했다. 그러나 일제 때 두 차례에 걸친 보수 공사에서 바닥을 강회로 보강하고 샘물을 연관으로 돌리고 요석 뒷면에 콘크리트를 다져 넣었기 때문에 온도가 낮아야 할 바닥돌의 온도가 높아지고 반대로 요석 부분의 온도가 낮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벽면에 물기가 돌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이태녕 박사는 신라인이 왜 석불사 지하에 샘을 만들었는지를 간파한 것이었다.신라인들은 단지 습기 문제만을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석굴 내부에 정체된 공기가 바깥 공기와 자연스럽게 순환할 수 있는 환기구를 만들었다. 환기구는 석불 본존불 어깨높이에 있다. 주변 벽에 감실 구멍이 10개가 뚫려있는데 이것이 자연의 환기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석불의 받침돌도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감실 폭이 받침돌보다 더 넓다. 석굴 내에 정체된 공기는 감실과 받침돌 사이에 생긴 틈 사이로 자연스럽게 순환한다. 이러한 공기 순환 방법은 석굴 안팎의 온도 차를 좁혀 습기를 자연스레 억제한다는 원리다.석굴 천장부에도 환기구가 있었다. 돔형 천장 천개석 부분에 작은 석재를 끼워 틈을 만들어 자연스러운 환기구 역할을 했다.내부로 들어오는 동안에 공기는 차가운 돌을 만나 습기를 빼앗겨 석굴 내부에는 제습된 공기가 들어오게 된다. 밤에는 반대로 작용해 건조해진 내부 공기가 돌에 맺힌 습기를 머금고 석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석불에 다양한 습기 제거 장치가 있음에도 석불사 외부를 콘크리트로 만들었으니 석불이 습기에 노출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일제시대와 박정희 시대에 있었던 두 번의 석굴암 보수 공사 때, 습기를 누수로 판단해 외벽에 2겹 콘크리트 돔을 만들고 석굴 안 샘물도 밖으로 뽑아내는 관을 설치했다. 이로써 석굴은 숨 쉴 구멍이 막히게 되었고 자연적인 습기 제거 시스템도 없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독창적인 석불석불사의 자연조명도 지금까지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이다. 원래 석불사는 돔형의 천장으로 막혀있는 구조이기에 태양광이 직접 닿을 수 없다. 그런데도 석불의 위엄을 신라인들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조명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반사광을 활용해 조명을 해결했다고 한다. 전실 부분이 개방된 상태에서 석굴 바닥 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일종의 거울효과를 낸 셈이다. 햇빛이 반짝이는 석굴 바닥 면에서 반사되어 석불사 구석구석을 비추게 만든 것이다.석불사는 구조에서도 신라 건축술의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신라인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해 지상 세계인 전실은 네모꼴로, 하늘 세계인 주실은 둥근 모양의 돔 천장으로 꾸몄다. 특히 천장은 네모난 판석들 사이에 비녀 모양의 긴 돌 30개를 박고 그 위에 잡석들을 쌓아 눌러줌으로써 힘의 균형을 보장하는 특이한 공법으로 완성했다. 신라인들은 당시 중근동이나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돔의 형태는 받아들이되 축조법은 우리 식으로 개조한 슬기를 발휘한 것이다. 석불사는 당시 천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석불사는 직사각형 모양의 전실, 전실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부분인 비도, 본존불상이 있는 원형의 주실 등 3개소로 구성된다. 그중에서 특히 주실의 돔형 천장은 당시 천문학의 결정체다. 주실의 돔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을 상징하며, 지름 24척은 1일 24시간을 나타낸다고 한다. 석불사의 석불이 향하는 방향도 무수한 논쟁을 낳았다. 석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동남쪽 30도로 동해 바다의 수평선이 바라다보이는 장소다. 1960년대 석불사 보수 공사 총감독을 맡았던 황수영 박사는 석불이 문무대왕의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東海口)를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대왕암과 석불상을 왜의 침략에 대한 수호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천우 박사가 진단학보에 낸 ‘석굴암에서 망각된 고도의 신라과학’이라는 논문을 통해 석불의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29.4도)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동짓날 일출은 1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석불의 방향은 ‘일년의 시작’ 혹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천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었던 셈이다. □천문과학적 원리까지 숨겨진 석불의 신비석불사에 천문과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밝혀낸 사람은 일본인 토목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였다. 193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고건축 측량을 맡았던 요네다가 기술한 짧은 논문인 ‘석굴암 석굴의 천체 표현사고’에 따르면 “석굴암의 평면은 석굴암 구성의 기본이 되는 반경12척(직경 24척으로 1일 24시간의 12각과 일치)의 원이다. 이는 1년 360일의 360도와 일치한다. 굴의 개구부 12척은 1일 12각과 일치한다. 또한 궁륭(활이나 무지개같이 한가운데가 높고 길게 굽은 형상. 아치 모양의 구조물) 천장은 같은 원둘레에 유구한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 중심에 원형(태양)과 큰 연꽃이 새겨져 있어 구면의 각판석 사이 전석(벽돌)은 모든 별자리의 별을 상징하고 있다”고 했다. 석불사는 석가모니가 상주하는 정토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석불사 전체는 인간이 느끼는 세계인 천체 우주를 보여준다는 것이다.요네다는 천문과학적인 측면뿐 아니라 석불이 수리적 비례에 기반한 미(美)의 만다라(蔓多羅)임을 최초로 실증해낸 위대한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의 ‘조선상대건축의 연구’중에서 ‘경주 석굴암의 조영계획’은 석불사를 만든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수치로 재현시켜놓았다는 점에서 ‘석불학의 위대한 노작’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석불을 실제로 측면한 유일한 도면이기도 했다.요네다는 석굴 조영을 하면서 당시 신라인 기술자들이 사용했던 자에 주목했다. 자의 길이를 알아야 석불의 정확한 길이를 측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국사와 석불사를 측량한 수치와 그전에 있었던 보수 공사의 측량 결과를 토대로 신라 기술자들이 쓰던 자는 0.98곡척(29.7cm)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네다는 이 길이를 당척(唐尺)이라고 이름 붙였다. 당시 당나라에서 쓰던 자의 길이와 동일했기 때문이었다.측량한 결과 본존불의 얼굴 너비는 2.2자, 가슴 폭은 4.4자, 어깨 폭은 6.6자, 결가부좌한 양 무릎의 너비는 8.8자였다. 이를 비율로 보니 1:2:3:4였다. 이 부분의 기준이 된 1.1자는 본존불 자체 총 높이의 10분의 1에 해당했다.인류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건축은 물론 인체 조형에서도 각 부분의 크기에 비례배분을 설정해 인체의 안정감이나 균형을 꾀했다. 가장 이상적인 몸의 비례는 석불의 예와 같이 1:2:3:4의 비율이다. 본존불이 불상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완벽한 몸의 비례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병일 작가

2022-08-21

“여긴 어디?”… 섬에 발 디디면 황홀한 풍경에 홀리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섬을 다룬 수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김훈의 첫 문장만큼 아름다운 표현을 본 적이 없다. 대청도는 김훈의 문장이 육신의 골격을 입고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여름이 절정인 대청도는 마치 꽃이 피듯 화사한 풍경이 피어난다. 한반도의 서쪽 끝 대청도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지만 막상 섬에 발을 디디면 황홀한 풍경에 사로잡혀 버린다. 섬의 모든 것이 푸르른 섬 대청도로 여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해안사구가 이색적인 옥죽포 모래사막바다는 쉽사리 섬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청도로 향하는 배는 쉴 새 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뱃길을 따라 4시간을 가니 쪽빛처럼 파란 바다가 마중을 나왔다.인천에서 북서쪽으로 202㎞나 떨어진 외로운 섬 대청도(大靑島)다.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예로부터 권력에 밀려난 이들을 품어온 유배의 섬이기도 했다. 대청도는 옛 원나라의 유배지이기도 했는데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고려 출신 공녀를 황후(기황후)로 삼았던 혜종(토곤테무르)이 황태자 시절 2년가량 이곳에 유배되기도 했다.대청도 여행의 시작점은 선진포선착장에서 3.5㎞ 떨어진 옥죽포 모래사막이다.밀물에 밀려와 썰물 때 햇볕에 바짝 마른 모래가 이룬 해안사구가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해 한국의 ‘사하라 사막’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옥죽포 해안사구는 인근 옥죽동 농여해변에서 날아온 모래가 수만 년에 걸쳐 쌓여 이뤄진 신의 걸작이다.과거에는 모래사장의 규모가 컸으나 30여 년 전 소나무 방풍림이 조성되면서 모래사장 규모가 5분의 1로 줄어들었다.대청도에는 굳이 옥죽포 모래사막이 아니어도 모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곳곳에 널려 있다.과거 대청도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 혼기가 차면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로 동네 어른들이 놀리곤 했다고 한다.집안에 하도 모래가 많아 빨래할 때, 밥 지을 때, 반찬 만들 때마다 모래가 섞여 들어가 알게 모르게 먹었기 때문이다.모래와 관련된 또 다른 곳은 대청 4리에 있는 사탄동(沙灘洞)이다. 한자를 풀면 ‘모래 여울마을’이지만 악마를 뜻하는 ‘사탄’으로 들리는 게 싫어서 주민들이 옹진군에 모래여울마을로 바꿔달라 청원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본 듯한 농여해변이 이색적 풍경대청도 해안가로 내려오면 백령도까지 이어지는 모래풀등을 만날 수 있다.모래풀등은 간조 때 바닷속에서 하루 두 번 드러나는 모래섬이다. 풀등을 품은 농여해변은 대청도의 8개 해변 중 가장 아름답고 볼거리가 가득한 곳이다. 해변에 줄지어 선 기암괴석이 그중 하나다. 풍화작용으로 표면이 나무의 나이테 질감을 지닌 ‘나무테 바위’는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다.시간의 변화에 따라 농여해변은 색다른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뭇사람을 감성적 존재로 만드는 아름다운 노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어 해가 지고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면 ‘별이 쏟아지는’ 해변을 감상할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이 저녁해를 받아 붉게 물드는 장관을 넋 놓고 바라봤다. 지구가 10억 년 세월을 들여 지켜온 풍경은 마치 영화에서나 봤던 화성의 모습과 닮았다.대청도는 걷기 여행지로도 최적이다. 매바위 전망대를 출발해 삼각산 정상을 찍고 광난두로 내려와 서풍받이를 돌아 나오는 7㎞ 코스를 삼각산의 ‘삼’, 서풍받이의 ‘서’를 따서 ‘삼서 트레킹’이라고 부른다.대청도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걷기 길이다. 삼각산을 오르는 들머리는 매 동상이 있는 매바위전망대다. 광난두에서 20분쯤 제법 가파른 길을 오르면 능선 위에 매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매바위 전망대에 오르면 남서쪽으로 모래울 해변과 독바위 해변, 대청도의 보물 서풍받이가 보인다. 대청도 서쪽 끝에 있는 서풍받이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서쪽에서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를 막는 기암절벽이다. 깎아지른 해안절벽은 대청도 제1경으로 꼽힌다. 매바위 전망대에서 삼각산 정상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삼각산 능선에서 모래울해변과 서풍받이로 이어지는 대청도 서쪽 해안의 모습을 내려다보니 영락없이 날개를 펼친 매의 형상이다. 서풍받이가 매의 머리라면 광난두해안이 왼쪽 날개, 모래울 뒤편 울창한 송림이 오른쪽 날개가 되는 셈이다.호젓한 숲길과 암릉을 통과하자 널찍한 전망대가 설치된 정상이 나온다. 북쪽 농여해변에는 풀등이 길게 드러났고, 그 뒤로 백령도가 보인다. 백령도 뒤로 아스라이 북녘 황해도 땅이 펼쳐진다. △트레킹 중 만나는 풍경마다 절경 펼쳐져대청도 트레킹의 또 다른 코스인 서풍받이 트레킹은 광난두 정자각에서 출발해 서풍받이와 마당바위를 찍고 오는 왕복 코스다. 정자각에 오르면 두 개의 뿔처럼 튀어나온 봉우리와 그 사이에 자리한 서풍받이 전망대가 보인다.우렁찬 파도 소리 들으며 해안 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쪽, 왼쪽 어느 쪽으로 가도 길은 이어진다. 작은 언덕을 넘으면 바람이 휘몰아치는 서풍받이 전망대에 닿는다. 전망대 양쪽으로 보이는 높이 약 80m의 눈부신 흰색 규암이 서풍받이다. 가히 백령도 두무진의 기암절벽이 부럽지 않은 절경이다. 섬이 탄생한 10억 년 전부터 섬으로 몰아치는 서풍을 온몸으로 받았다니 고맙고도 든든하다.전망대에서 언덕을 오르면 서풍받이 트레킹 중 가장 높은 봉우리에 닿는다. 여기에 하늘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는 작은 바위섬인 대갑죽도가 잘 보인다. 사람의 옆얼굴을 닮았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 형상은 아니다. 주민들은 대갑죽도를 바라보면서 고기잡이 나간 가족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고 한다.하늘전망대에서 내려와 숲길을 지나면 마당바위를 만난다. 마당바위 다음에는 이름 없는 해변이 나온다. 타조 알만 한 돌이 널려 있다. 해변에서 발 담그며 잠시 한숨 돌린다. 산행의 피로가 파도에 씻겨 나가는 듯하다. 다시 출발해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앞에서 봤던 갈림길을 만나고, 광난두정자각에 닿으면서 트레킹이 마무리된다. 찾아가는 길대청도로 가려면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하루 3회(오전 7시50분·8시30분, 낮 12시30분) 운항하는 배를 타야 한다. 대청도까지는 3시간 20분 걸린다. 선진포선착장에서 마을버스를 이용해 광난두정자각 정류장에 하차해서 트레킹을 시작하면 된다. 아가페펜션과 엘림펜션, 하늘민박, 오후엔 등이 깔끔하고 조용하다.바다식당은 홍어회와 홍합탕이 맛있다. 섬에는 맛있는 중국음식점이 제법 많다. 그중에서도 섬중화요리는 짬뽕이 특히 맛있다. 돼지가든은 간재미탕이 칼칼하고 담백하다./최병일 작가

2022-08-18

“사람은 나무를 닮는다”

꽃샘추위라 했던가. 초여름인 듯 올라갔던 기온이 떨어졌다. 벚꽃은 졌고 이팝나무 꽃이 피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철쭉 꽃망울이 조금씩 색을 입어가던 날 오후에 찻집 ‘꽃멀미’에서 이삼우 원장을 다시 만났다. 마지막 인터뷰였다. 계절 탓인지 혹은 서로에게 익숙해진 탓인지 밝은 목소리로 맞아주셨다. 김 : 노거수회는 원장님께서 기청산식물원만큼 정성을 기울인 모임이라고 들었습니다.이 : 그 이야기에 들어가려면 먼저 들어야 할 것이 있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패전국이 된 독일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50페니히(Pfennig) 주화에 참나무 심는 여인상을 넣었지. 독일의 국목(國木)이 루브라참나무거든. 그리고 법으로 정했지. 참나무는 230세 되어야 벌채할 수 있다고. 나무는 100세부터 노거수 축에 드는데, 100세부터 229세까지 자란 참나무 노거수가 국토 곳곳에 많아지게 한 거지. 벌기령(伐期齡)이 왜 하필이면 230세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걸작인 것이 게르만 민족이 우수한 민족이 되도록 하는 방편이라고 하더군. 국민들이 참나무 노거수를 무시로 접하면서 이 나무를 닮아 참되고 의연해지기 때문이라는 거야. 나무는 사람을 닮지 않지만 사람은 나무를 닮게 돼 있거든. 결국 서독은 종전 후 불과 10여 년 만에 유럽 일등급 국가가 되었지.김 : 230세라. 우리나라에서 그만한 노거수는 손에 꼽을 정도일 텐데요.이 : 그렇지. 내가 노거수를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은 40년 전이었어. 추수를 앞둔 가을 어느 날, 신광면 토성마을 앞 들판 길을 차를 몰고 지나가고 있었지. 비학산과 동리 집들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거목 한 그루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라. 순간 감탄사가 나왔어. 저 나무 한 그루 덕분에 마을 풍광이 사는구나. 두 아름 반쯤 되는 300여 년 묵은 상수리나무였어.김 : 그렇게 노거수회가 시작된 것입니까?이 : 저런 귀한 생명 문화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틈날 때마다 노거수를 찾아 나섰지. 1987년에 『영일군사』 편집위원장을 맡게 되었는데, 집필위원들이 쓴 원고를 세심하게 검토하려면 현장을 일일이 확인하러 다녀야 했어. 각 마을의 역사를 직접 집필해야 하니 주말마다 자연부락이며 전설이 있을 법한 산천을 조사하게 되었지. 마을 연혁을 조사하다 보니 어느 마을이든 당산목이나 마을 숲이 있는 거라. 당산목은 민초들의 토속신앙 흔적이 구구절절 쌓였거나 정자목이 되어 여름철 노인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런 거목이나 마을 숲이 없었다고 상상해봐.김 : 차를 타고 가다 당산목이 서 있는 마을을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저 마을은 유래가 깊겠구나, 저 나무 밑에서 마을의 이야기가 비롯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이 : 그게 노거수의 역할이지. 그런데 노거수를 조사하다 보니 온전한 노거수가 점점 사라지는 거야. 노거수에 대한 식견과 애정이 부족한 시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심지어 관에서 노거수를 보호한다고 조치한 일이 오히려 해롭게 하는 경우가 빈번했어. 그냥 방치할 일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서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1990년 『영일군사』 편찬을 끝낸 후 본격적으로 노거수 연구를 해보니 이 사업이 혼자서 감당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1991년 이른 봄에 뜻있는 사람들과 노거수회를 창립했지. 노거수 보호 운동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거야. 김 : 30여 년 전이군요. 그동안 많은 일을 해내셨을 것 같습니다.이 : 첫 번째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찾아내 포항의 첫 번째 천연기념물로 등재한 일이지. 이 군락지는 하늘이 내려준 귀한 선물이야. 처음 눈에 띈 것은 장기면 모포리 소재 뇌성산 기슭이었고, 그 후 영일만 일대를 조사해보니 동해면 흥환, 발산, 대동배리에 꽤 큰 군락지가 있더군. 포항 시내에서도 찾아냈는데, 양학동, 환여동은 물론, 제산, 장기면에도 자생하고 있더라고. 전체적인 규모가 세계적으로 커. 100만 년 전에는 이 일원이 거대한 호수였다는 귀중한 지질학적 의미가 있기도 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발산리 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받게 되었어. 그다음으로는 마북 느티나무를 구해낸 일이야. 노거수회 회원 50여 명이 보호수 도목(道木) 1호인 신광면 마북리 600년생 느티나무를 찾아갔어. 향토순례 행사였지. 비료 주기와 잡목 제거 등 무육(撫育) 작업을 하고 있는데, 신광면 상록회 회장과 마을 주민들이 막걸리와 음료수를 들고 찾아왔어. 그리고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 나무가 곧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는 거야. 우리가 언론기관에 제보하고 협조를 요청해서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결국 이식하게 되었지. 그 밖에도 경상북도 수목원이 자리하고 있는 매봉 북쪽 북골 거대한 참나무 숲이 개벌될 것을 무산시켜서 보경계곡 12폭포 계곡이 폭우 때 황폐화되는 것을 막은 일, 보경계곡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는 등 난개발 계획을 막은 일, 죽장면 하옥 계곡 향로봉 서편 자락을 뒤덮은 국내 최대 규모의 참나무 천연림이 산림청의 무육 사업으로 훼손당할 뻔한 것을 막은 일, 해당화 군락지를 무육한 일 등 많은 일을 했지. 김 : 많은 일을 하시는 동안 아쉬운 일도 있었지 싶은데요.이 : 포항 송라면에 화진해수욕장이 있지. 그곳에서 임진왜란 때 벌어진 이야기야. 일본의 수송선 한 척이 화진 인근에 정박하고 노략질을 일삼았어. 송라 아래쪽 청하 월포리에는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있었고, 덕천리에는 찰방(察訪)이 있었거든. 그 시절 청하현은 꽤 잘나가는 곳이었어. 월포리와 덕천리의 군사와 의병이 야밤에 화진에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했고, 장시간 백병전 끝에 양쪽이 거의 몰살했어. 그리고는 경황이 없어 백사장 한구석에 시신들을 대충 묻었지. 그곳을 ‘썩은숭이네고랑’이라 한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이 달밤에 ‘썩은숭이네고랑’을 찾아가 제단을 차리고 통곡하며 제를 지냈다는 거야.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민족적 자존심이 팍 상했지. 그래서 노거수회에서 2004년부터 17년간 해마다 위령제를 지냈어. 이 전투의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고 위령비를 세워주지 못한 게 안타까워. 죽장면 입암에 산남의진(山南義陣) 장병들을 추모하는 위령비 건립을 시도했는데 그것도 좌절됐어. 포항의 시목(市木), 시화(市花)를 해국과 모감주나무로 바꾸는 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한 것도 아쉬워. 포항의 시화와 시목이 무엇인지 아는가?김 : 시화는 장미, 시목은 해송 아닌가요?이 : 맞아. 20여 년 전 30여 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정했지. 1차 회의에서는 해송과 해바라기가 선정되었어. 내가 제안한 모감주나무와 해국은 2등으로 밀렸지. 해바라기가 당시 소련의 국화인 데다 해를 따라 얼굴을 돌리는 행태가 아부성이다, 하는 여론이 있어서 1년 후 재심의를 했어. 그 결과가 해송과 장미야. 내 제안은 또다시 2등이 되었지. 그런데 그게 납득이 안 돼. 일단 해송은 잘못된 표기야. 곰솔이 맞지. 그리고 장미는 전국 20여 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상징화로 삼고 있어. 그만큼 희소가치가 없다는 말이지. 그것 말고도 아쉬운 게 여럿 있어.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노거수와 황보 씨 집성촌 등 소중한 향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했어. 겸재 정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청하를 진경산수화의 메카로 조성하고 청하읍성을 복원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더군. 그래도 많은 일을 해냈으니 위안을 삼아야겠지.김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이 : 다른 것은 기억하지 않아도 좋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시게. 노거수를 해코지한 사람은 필히 사고를 당했다는 것, 마을 숲을 훼손한 사람들은 거의 다 오래가지 않아 힘들어졌다는 사실을.마지막 인터뷰가 끝나고 이삼우 원장이 식물원 입구까지 배웅해주셨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 식물원 안으로 들어가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며 한 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나무와 식물과 땅과 함께하여 그들의 향이, 본성이 몸에 밴 그는 한 그루 노거수였다.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사진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제공:이삼우

2022-08-17

“위기와 불편의 현장, 보살핌이 필요한 곳에 항상 머무를 것”

울릉도는 도서 낙도로 정부예산을 많이 유치해야 하기 때문에 집권당과 지역구 국회의원의 소속 정당과 관계가 어느 지역보다 돈독하다. 따라서 보수 성향이 굉장히 높은 편이다.국민의 힘이 5년 만에 집권하고 지역 국회의원도 국민의 힘이다. 정치 구도상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울릉군수 선거에 무소속으로 당선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표현이 옳다.그런데 현 남한권 울릉군수는 집권당 후보와 1대1 대결에서 투표자 수 6천796명 가운데 4천629표(69.71%)를 받아 압도적 지지로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역대 어느 군수보다 확실한 울릉군민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이 같은 힘을 바탕으로 전 군수들이 표를 의식해 하지 못한 일도 과감하게 추진할 힘을 얻었다. 따라서 남 군수는 자신이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은 물론, 과거 못한 민원 해결을 위해 실제 행동에 옮기면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이로 인해 일부 이기적인 군민의 저항도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만큼 민선 8기 울릉군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여건과 울릉도 출신의 최초 장군 예편, 행정학박사라는 타이들이 무게감과 함께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주고 있다.군민들의 기대감속 주식회사 울릉군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남 군수에게서 울릉군정의 방향과 미래의 청사진을 들어보았다. -늦었지만, 압도적 당선을 먼저 축하한다. 울릉도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아껴왔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울릉도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4년간 울릉군정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궁금하다.△ 울릉군민들께서 위대한 선택으로 태어났고, 살았고, 저의 육신과 영혼이 머무는 고향 울릉도를 위해 일 하다가 죽는 제일 행복한 사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선거 기간 군민의 바람과 고충을 가슴에 새기며 오직 멋지고 행복한 울릉건설과 잘사는 군민의 삶을 그려왔다. 위기와 불편한 현장, 보살핌이 필요한 곳에 자리하겠다. 군수 위에 군민이 있다.진짜 울릉을 사랑하는 그 초심으로 맡겨진 책임과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 군민을 부모·형제처럼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으로 늘 곁에 있겠다.어디서라도 울릉을 대변하고 대표하겠다. 일을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열정과 신념으로 울릉의 특별한 변화에 부응해 정직하고 성실한 군수가 되겠다. -지금 울릉도는 위기라고 하셨는데.△ 군민을 만나다 보니 많은 분이 ‘울릉이 달라져야 한다.’라고 했다. 허리 세대인 젊은이들이 떠나기만 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찾기 어렵다, 경제, 관광, 일자리, 의료, 교육, 숙박, 주거, 교통, 주차장, 쓰레기, 하수처리, 독도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코로나 19의 빗장이 풀려 관광객들이 다시 울릉도를 찾고 있다. 크루즈가 취항하고 울릉공항이 2025년 개항을 목표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울릉도역사와 함께 천 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이 기회, 반드시 꽉 잡아야 한다.지금부터 민선 8기 재임기간인 3~4년이 울릉도 미래 100년을 준비하기 위한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중차대한 시기로 미치도록 일하며 바꿔 나가야 한다. 군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반드시 함께 해주시기 바란다.군민과 함께 새로운 울릉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한다. ‘새희망 새울릉’의 민선 8기 군정 슬로건 아래 군정 목표는 ‘행복한 군민 다시 찾는 새 울릉’으로 정하고 앞으로 4년 동안 중점적으로 울릉을 경영할 5대 군정을 발표했다.-군민이 주인인 열린 군정을 펼치겠다고 했는데.△군민의 목소리에 더욱 낮은 자세로 경청하겠으며 월 1회 이상 군정 브리핑과 찾아가는 군정 서비스를 시행하고 차별과 편견을 넘어 서로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소통하겠다.대화를 하면 어떤 갈등과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장 취임식 이후 주민 선표 문제도 인터넷이 어렵고 불편한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군청민원실에서 전화 예약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울릉군의 가장 큰 복지는 울릉주민들이 육지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과 친인척 길·흉사도 언제든지 다니도록 하는 것이 울릉주민들의 복지다.-다 함께 누리는 희망 복지를 실현하겠다는 의미는.△청년 및 서민 임대주택 공급을 시작으로 주거환경 불균형 해소 시책 등을 추진하겠다. 울릉도 상주 응급헬기 운영과 이른 시일 안에 기본의료체계를 만들고 힐링과 치유가 병행하는 찾아오는 웰니스 관광계획을 수립·시행하겠다.어르신들이 편안하고 재미있는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구석구석을 챙기겠다. 인재육성은 교육이 핵심으로 더 당당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환경 조성에도 총력을 기울이겠다.-웃음꽃 피우는 지역경제를 만들어 가겠다고 했는데.△우선 일자리 창출 기본계획을 수립해 인구증가와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 투자유치 활성화를 위해 제작 직접 세일즈맨으로 나서서 ‘주식회사 울릉도’를 전국 1위 잘사는 도시 건설을 위해 매진하겠다. 남한권 울릉군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농수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은?△지금의 농·어촌은 인구 유출은 물론 급속한 노령화에 따른 일손 부족 현상으로 많은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지만 지원하고 육성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하겠다.또, 섬 지역특성상 울릉도주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택배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울릉도 농·수산물이 특별한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울릉브랜드를 세계화 하겠다.-매력이 넘치는 생태관광 섬을 조성하겠다는 공약은?△울릉도는 자연이 살아 숨 쉬고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세계적인 보석 같은 섬으로 최우선 과제는 관광산업의 도약이다. 공모선과 대형여객선 취항, 위그선의 현실화, 2025년 울릉공항 개항에 발맞춰 걸맞은 사업을 추진하겠다.먼저 관광의 3대 거리인 볼거리, 먹을거리, 쉬고 즐길 거리를 만들도록 노력하고 이를 통해 사계절 쉼 없는 관광 섬으로 관광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100만 관광객이 찾아오는 생태 도시를 만들겠다.-추가적인 계획은 없나?△지면상 언급이 어려워 제가 약속드린 공약 실행과 미래를 위해 가칭 ‘울릉도 발전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추진할 것이며 인수위원회에서 구체적인 군정의 현 수준을 파악해 정책추진백서를 만들었다.-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공직자들은 개개인 모두가 훌륭하다. 공직자의 직무수행과 행동은 울릉군을 대표하고 군수가 하는 일이다. 공직자가 곧 군수이자 군수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공직자들은 이를 명심해야 한다. 저에게는 꿈 있다, 새희망, 새울릉을 위해 울릉도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모든 사람들이 다시 찾는 새로운 울릉도를 만들고 이 작은 공간을 울릉군민 모두가 화합해 즐겁고 살맛 나는 섬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주어진 4년 동안 1분 1초라도 게을리하지 않고 군민과 함께하겠다.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그 길은 우리 울릉도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반드시 울릉도에 사는 것이 자랑이요 행복임을 느끼게 하겠다. 그 도전의 길에 군민 여러분께서 함께 해주시기 바란다. 울릉군민 여러분이 울릉도 주인이기 때문이다.울릉/김두한기자kimdh@kbmaeil.com

2022-08-16

폭염 속, 한 줄 ‘문장’이 주는 위로와 감동이란…

세 나라 소설가들이 바라본 베트남 전쟁문학평론가 이경재 ‘한국 베트남 미국의 베트남전 소설 비교’문학평론가 이경재는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 ‘소설과 그 소설의 무대인 공간의 연관성’을 탐구해온 국문학자다.몇 해 전엔 본지에 ‘경북문학기행’을 6개월 간 연재하며 문학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긴 대구·경북 소설가와 시인들을 세밀하게 소개하기도 했다.숭실대 국문과 교수이기도 한 이경재가 가장 최근에 출간한 책은 ‘한국 베트남 미국의 베트남전 소설 비교’. 이 책은 제목 그대로 3개 나라 소설가들의 작품 연구를 통해 ‘베트남 전쟁’이라는 인류사의 비극을 해석하고 있다.10여 년 전부터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이 교수는 다문화를 소재로 한 소설들을 읽으며 그것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그 관심은 이번 저작으로 이어졌다.1960년대 시작돼 1970년대까지 이어진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베트남인과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의 곤혹스런 입장 등으로 인해 복잡한 양상을 띠며 전개됐다. 한국도 이 전쟁의 제3자가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인을 파병한 국가다.10년 이상 장기적으로 진행된 전투는 군인들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작가들에게 충격과 환멸을 가져왔고, 이는 당연한 수순처럼 소설과 시로 형상화됐다.이경재 교수는 ‘국가’ ‘정체성’ ‘젠더’라는 3가지 관점에서 베트남전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을 읽어내 수많은 사상자를 낸 비극적 전쟁의 뿌리를 찾아간다. 이 교수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이라는 것을 소재로 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미국 작품들의 경우 ‘현미경적 시각으로 병사의 감각에 제한된 현장밀착식 재현’을 위주로 하는 것이 많고, 한국 소설은 ‘베트남전의 보편적·역사적 맥락을 조망하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전쟁의 고통을 가장 크게 겪은 베트남 작가들의 경우는 ‘정서적인 측면이 강하며 비극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베트남인들의 내면을 형상화하는데 탁월하다’고 이경재는 설명한다.‘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직전까지 베트남은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 중 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역사적 아픔을 겪었는지 제대로 알려하는 이들은 드물었던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만약 이번 여름에 이경재의 ‘한국 베트남 미국의 베트남전 소설 비교’를 읽는다면 이후에 떠나는 베트남 여행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너무나 자주 사용된 문장이라 식상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여행이니까. 사랑은 불완전한 종교가 아닐지…이병철 시인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이병철 시인은 독특한 사람이다. 통상 ‘시인’이라는 단어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해사한 얼굴에 여윈 몸, 영감을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는 불면 등과 이 시인은 거리가 멀다.그는 아마추어 야구단의 에이스고, 학생들에게는 더없이 유쾌한 선생이며, 프로 수준의 낚시 실력을 갖춘 한국에선 유사한 전례가 거의 없는 시인.2년째 본지에 ‘2030 우리가 만난 세상’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이병철은 그 긴 기간 동안 한 번도 원고 마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는 성실한 생활인이기도 하다.이병철의 2번째 시집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는 그가 시간을 쪼개 쓰며 살고 있는 삶이 어떠한 형태이며, 열망 뜨거운 한국의 젊은 시인이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병철은 시집의 제목이며, 동시에 인간들이 객관적으로는 영원히 해석해내지 못할 ‘사랑’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사랑은 구원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신(神)이다. 인간이 실존의 한계인 죽음이나 현실원칙으로 인한 고통을 잊는 순간은 오직 타자와 사랑할 때다.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무모한 열정에서 완벽한 사랑의 형태가 빚어진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사랑을 완성했듯. 사랑할 때 인간은 신이다. ‘나’와 ‘너’가 만나 서로의 신앙이 되고, 서로의 세계가 되고, 서로의 신이 되어 구원했다가 끝내는 심판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불완전한 종교라고 믿는다.”사실 이병철의 말처럼 “시는 예정된 실패고, 미래가 없는 몰입이고, 이룰 수 없는 꿈”일 수도 있다.그러나, 체온보다 뜨거운 날씨 속에서 달아오른 서로의 몸과 만질 수 없는 마음까지 애타게 탐하는 ‘사랑’이 없다면,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그래서다. 아래와 같은 이병철의 시를 읽다보면 아주 잠깐이나마 여름밤의 찜통 같은 더위를 잊게 된다. 청와대서 문학으로 돌아온 시인이 하고픈 말신동호 시인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연설비서관으로 일했던 신동호가 자신의 본령이자 본업이라 할 문학으로 귀환했다.세상의 흐름을 때마다 정확하게 읽어내고,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예민하게 포착해 써내야 하는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하는 건 당연지사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그러나, 신동호는 이 지난한 작업을 5년간 큰 실수 없이 해냈다. 그를 오래전부터 알아온 기자는 그 5년 동안 신동호의 숨겨진 면모를 여러 번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운문만이 아닌 산문도 좋은 작가다.50대 후반인 그를 지금은 ‘대통령의 연설문을 썼던 사람’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신동호는 사실 10대 때부터 상징과 은유 가득한 문장을 써내던 영민한 소년 시인이었다.19세에 강원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신동호는 청년 시절을 거치며 ‘겨울 경춘선’ ‘저물 무렵’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등의 시집을 펴내며 작가로서의 길을 꾸준히 걸었던 사람.그가 청와대로 갔을 때 누군가는 “출세”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 문학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지만, 천만에. 신동호는 보란 듯 시인으로 돌아왔고, 4번째 시집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를 최근 출간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 가보지 못한 길이 있다. (그러니) 여전히 골목을 서성일 수밖에 없다.”신동호가 이번 시집을 출간하며 독자들에게 전한 말이다. 여기서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 ‘가보지 못한 길’ ‘서성일 수밖에 없는 골목’은 모두가 ‘시(詩)’의 은유란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세상 사람들에겐 저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이 있다. 신동호에게 어울리는 옷은 청와대가 아닌 앞으로 그가 서성일 골목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신동호는 언제나 문학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다. 아래와 같은 절창을 쓰는 시인이니 그의 귀환이 더욱 반갑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8-16

“자연주의 철학을 담고 있는 참느릅나무”

기청산식물원이 여느 식물원과 다른 점은 독특한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그 철학은 식물원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마다 담겨 있다. 기청산식물원이 조성되는 과정 그리고 식물원의 철학이 깊이 배어 있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 : 기청산식물원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으면 합니다. 당시 5만 평을 모두 식물원으로 바꾸지는 않았겠지요?이 : 5만 평 넘던 땅을 사반세기 동안 야금야금 절반을 팔았어. 식물원을 조성하고 가꾸는 데 들어간 거지. 식물원은 돈을 펑펑 버는 곳이 아니야. 사람 손이 무진장 들어가니까 인건비가 많이 들고, 특히 기청산식물원은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곳이니까.김 : 잘 버텨야 하는 곳이군요.이 : 이 식물원이 서울이나 부산 인근에 있었으면 굉장하겠지. 최근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최고의 치유 안식처가 식물원이라고 하잖아. 특히 코로나 난세에는 더 중요한데 말이야. 국내외 명승지만 골라 돌아다니다 보면 심혼이 붕 뜨고, 막상 집에 돌아오면 허탈해지지. 그게 병이 되기도 해. 그런 반면 가까운 식물원에 다녀오면 정신이 맑아지고 생기가 돋아나. 선진국에서는 지역 기업이 식물원 입장권을 다량으로 할인 구매해서 직원들에게 선물한다고 해. 월요일 근무 분위기가 생기로워지니 작업 능률이 확 높아진다면서.김 : 처음 기청산식물원을 열었을 때 반응이 어땠습니까? 특히 포항에서의 반응이 궁금합니다.이 : 포항 사람의 이용률이 가장 뒤졌어.김 : 뜻밖이군요.이 : 포항은 주변에 내연산, 운제산 같은 좋은 산이 있고 바다도 있지. 바로 곁에 경주도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서울, 부산, 대구보다 정서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수준급 환경이 많이 있지. 그래서 식물원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는 것 같아.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포항 사람도 많이 오는데, 그분들이 포항에 이런 데가 있었나 하고 놀라기도 해. 서울 근교의 잘나가는 식물원에는 연간 20만에서 50만 명이 찾아간다고 하더군. 기청산식물원은 아직 3만 명을 못 넘어. 기다리는 거지. 힘겹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김 : 수목원과 식물원은 어떻게 다릅니까?이 : 대학교에 빗대 말하자면 수목원은 단과대학이고 식물원은 종합대학이지. 수목원은 나무 위주로 조성한 곳이고, 식물원은 나무와 초본류를 망라한 곳이니까.김 : 지금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언제쯤입니까?이 : 1991년에 시작해서 10년 정도 걸렸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걱정이 돼. 국립수목원을 제외하고 한국 공사립 식물원 중에서 나무만큼은 가장 나이가 많고 큰 편이지. 처음에는 크게 자란 나무를 솎아 팔면서 조성하니까 재정에 도움이 되었지. 요즘은 나무 가격이 많이 내렸어. 나무 판 돈으로 빈자리를 메우고 뒷정리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어. 번거롭기만 해. 그래서 큰 나무를 그냥 베어버리기도 하는데, 마음이 아파. 베어낼 때마다 미안하다 위로해주고 때로는 막걸리 한잔 치기도 해.김 : 연아송 이야기 좀 들려주시지요.이 : 연아송 일원에 소나무를 수십 그루 심어 키웠어. 수형(樹形)을 다듬어서 잘 팔았지. 그런데 연아송은 삐딱하게 자라서 안 팔리고 홀로 남은 거야. 직원들이 베려고 하기에 내가 불쌍하다고 그냥 두라고 했지. 4, 5년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났어. 휘어진 형상이 김연아 선수의 이나바우어(Ina Bauer) 포즈를 닮지 않았어? 김연아가 세계 빙상 대회에서 첫 그랑프리를 수상했을 때 그걸 기념해 ‘연아송’이라 이름 붙인 거야. 이제는 효녀 노릇을 해.김 : 재미있군요.이 : 굽은 솔이 선산(先山)을 지킨다는 철학을 가르치는 나무가 되었어. 이제는 2억 원을 준다 해도 못 팔지.김 : 다른 이야기 하나 더 해주시지요.이 : 기청산식물원의 자연주의 철학을 나타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참느릅나무야. 기청산식원의 참느릅나무 김 : 참느릅나무, ‘참’ 자가 붙는군요.이 : ‘참’ 자가 붙으면 훌륭하다는 뜻이거든. 왜 참느릅나무를 귀중히 생각하느냐 하면 참느릅나무가 있어야 귀조경이 되기 때문이지. 조경에도 서열이 있어. 귀조경이 1등이야. 꽃이 언제 많이 피는지를 따지는 것은 눈조경이고 2등이지. 원장님 이거 먹는 겁니까, 하고 자꾸 묻는 것은 입조경, 3등이야. 냄새 좋다 하는 것은 코조경, 4등이지. 귀조경을 하는 데는 느릅나무가 최고야. 늦봄부터 초가을 붉은 상사화가 필 때까지 꾀꼬리가 이곳을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거든. 꾀꼬리는 느릅나무가 있는 숲에 서식해. 먹이사슬 때문이지. 그 밖에도 느릅나무한테 배울 점이 많아. 나무 밑을 관찰해보면 작은 식물들이 살고 있어. 느릅나무가 늦게 잎을 내거든. 1년에 6개월만 잎을 피워서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남은 6개월 동안은 아래 것들도 탄소동화작용을 할 수 있게 베푸는 거지. 민초들을 생각하는 자비심 같아. 그러니까 자기는 여위었지. 꾀꼬리는 이 자비로운 나무를 사랑하는가 봐. 해마다 5월 초순이면 찾아오는데 ‘조수미(鳥秀美)’ 왔느냐, 하며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네.김 : 킹트리에 관한 이야기도 부탁드리겠습니다.이 : 킹트리? 낙우송이지. 그 나무가 서 있는 땅은 원래 내 땅이 아니었어. 거기에 물웅덩이가 하나 있었고 늘 물이 흘렀어. 바로 언덕 위에 대처승이 시무(視務)하는 암자가 있었는데 부인이 나더러 빨래하는데 더우니까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 하나 심어달라 하기에 2미터 정도 되는 나무를 심었지. 그런데 낙우송이 물구덩이에서 얼마나 신바람 나게 크는지 몰라. 자기 특기인 호흡근을 솟구쳐 올리면서 말이야. 저 나무를 보는 사람마다 백 살이 넘었다 생각하지. 그런데 쉰두 살을 먹었다는 건 아무도 몰라. 이 낙우송도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어. 어느 해 겨울이었는데, 그날따라 뭔가 찝찝해서 나무를 둘러보러 나갔더니 대형 굴삭기가 낙우송 주변을 흙으로 메우고 있는 거야. 택지 개발해서 판다고 말이야. 그때 이 킹트리가 사라질 뻔했지.김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이 : 작업을 중지시키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달라는 대로 주고 매입했지. 그렇게 이 나무의 생명을 구했어. 그 후 6, 7년 지났을 즈음이었어. 내가 킹트리에게 이렇게 말했거든. “이 친구야, 내가 너 때문에 진 빚이 많아 힘들다. 네가 하다못해 이자는 물어줘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농담 반 진담 반 투정을 했지. 그러고 나서 보름쯤 지났나? KBS에서 찾아왔더라고. ‘나무야 나무야’ 프로그램 제작팀인데 이 나무를 주제로 촬영하겠다는 거야. 추석 특집으로 방영되고 나니까 그다음 날 800여 명이 들이닥쳤어. 1년 이자를 한 방에 갚아버리더군. 의리 있는 나무야. 요즘은 내가 이렇게 말해. “이 친구야, 해마다 이자도 갚고 원금도 좀 갚아줘.”김 : 아직 반응은 없고요?이 : 믿어보는 거지. 의리 있고 능력 있는 지천명 사나이 같은 나무니까.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2022-08-15

“골든타임 놓친 트라우마 기한 없이 반복… 완치 위한 치료를”

김상호대구한의대 부속포항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트라우마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학계에 따르면 재난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3단계로 나타난다. 망연자실하며 일주일을 보낸 뒤에 불안과 우울,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3개월을 넘기면 만성기로 들어간다. 완치기회를 놓친 트라우마는 기한 없이 반복된다. 포항 지진 1년 후에 실시한 시민의식조사에서 트라우마 고위험군은 40%가 넘었다. 지진 3년 후에도 비슷한 수치였다.포항에서 지진 트라우마 환자를 연구한 김상호 교수는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을 최초로 개발했다. 인적·물적 의료자원이 제한적인 대규모 재난상황에서 즉각적인 심리지원이 가능하도록 한 한의학적 의료 지원 안내서이다. -재난 트라우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2017년 11월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고 병원에서 단체 의료지원을 나갔다. 그리고는 1년 넘게 잊고 지냈는데 연구재단의 지원과제를 준비하다 이재민들이 여전히 텐트에서 생활하며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를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다. 진료팀을 꾸려 흥해 보건지소 재난심리지원센터의 협조 하에 이재민을 대상으로 의료지원활동을 펼치며 진료 매뉴얼을 개발했다.-트라우마 치료는 어떻게 하나.△현재의 재난심리지원은 심리적 중재가 주로 활용된다. 재난의학에서는 피해자를 생존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심리적 증상뿐만 아니라 불면과 어지럼증, 두통, 피로 등 다양한 신체증상을 호소한다. 한의에서는 침 치료와 더불어 호흡이나 명상을 함께하는 심신(心身)중재 방식을 활용한다. 해외에서는 귀에 놓는 이침(耳針, Ear Acupuncture)을 활용해서 재난 구호 활동을 펼친 사례가 많다. ‘경혈 자극을 통한 감정자유기법’과 호흡이나 명상 같은 안정화기법도 사용한다.-트라우마 치료에 이침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침 치료는 기본적으로는 이완 효과가 있다. 귀는 자율신경계 중에도 미주신경과 연결되어 이침은 불안이나 불면 치료에 효과적이다. 원래 이침은 미국에서 마약 중독 환자들의 금단증상에 사용됐다. 9.11테러를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 치료에 본격적으로 활용됐으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친 대규모 참사 현장에도 쓰였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국경없는 침술사회’라는 민간단체도 존재한다. 한의사가 없는 일본에서는 침이나 마시지, 한약을 의사들이 활용한다. -재난 현장에 적용 가능한 최초의 한의진료지원 매뉴얼이라고.△사실은 세월호 이후에 이뤄졌어야하는 작업이다. 세월호 사건 당시 진도에서의 한의사협회 의료지원 활동을 기록한 논문이 나왔지만 매뉴얼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개발한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은 재난현장에서의 한의진료지침을 제시하고, 검사방법을 표준화했으며, 단계별 대처방법과 증상별 진료 프로토콜을 정리했다. 30명 가까운 검토위원과 자문위원의 도움을 받았다.-재난 현장에서의 한방 진료 매뉴얼이 해외에는 있나.△최근 이 매뉴얼을 소개하는 논문을 투고해 국제 학술지 JICM(Journal of Integrative and Complementary Medicine)의 게재가 확정됐다. 재난 현장에서 전통의학을 체계적으로 활용한 좋은 사례라고 평가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차 의료 현장에서 전통의학 활용을 권고한다. 1차 의료나 공공의료 강화를 위해 그 나라가 가진 문화적 특성을 고려하고, 의료인적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공공 보건 의료에 한의사가 배제되어 있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의료지원 첫날, 대피소 밖에 나와 기다리던 70대 할머니다. 지금도 내원해서 진료를 받는다. 여전히 텔레비전이 거꾸러지고 세면대가 박살난 그날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악몽에 시달린다. 할머니 댁에서 예전 사진을 봤는데, 지진을 겪으면서 몰라보게 나이든 모습이었다.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생각만 해도 고된 일이다. 환자의 마음 한 부분을 꺼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마다 진을 빼는 일일 것이다. 환자들의 힘든 얘기를 듣다보면 고된 마음이 전염되지는 않을까. 스스로를 듣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김상호 교수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돌보고자 선택한 일이며,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는 시대인 만큼 본인만의 특급 처방전 하나씩은 필요하다고 말한다.-한의학을 그것도 신경정신 분야를 선택한 계기는.△고등학교 때는 공과대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학교 대표로 포항공대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IMF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위기 조짐을 읽은 아버지가 한의대 진학을 권유했다. 학습량이 많아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공부가 잘 맞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의대에서 봉사활동을 같이했던 선배가 자신만의 분야를 가지라며 서너 과를 추천했는데, 마음치유에 관심도 있고, 개인적으로 불안이나 긴장 같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겪었기에 신경정신과를 선택했다.-불안이나 긴장감이 높은 편인가.△학창시절에는 공부도 운동도 노는 것도 뭐든 잘 하고 싶었다. 되돌아보면 부모님의 인정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했던 것 같다. 남들 보기에는 모범생이지만 사람에 대한 불안 수준이 높고 낯가림이 심했다. 출석을 부르면 순서가 되기 전부터 긴장하는 학생이었다.-마음을 들어주는 일이 힘들지는 않나. 어디에다 털어놓는 편인가.△힘든 마음을 듣는 일이 쉽지 않지만, 나는 듣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직업적 사명감이 있다. 물론 오래 듣다보면 집중이 안 되고 용량의 한계를 느낀다. 학창시절부터 그런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었다. 운동을 하면 두통이나 스트레스가 개선되는 걸 중학생 때 깨달았고, 달리기며 축구, 농구를 가리지 않고 했다. 코로나19 전에는 마라톤을 했고 요즘은 바다수영에 빠져있다. 수영에 나름 자부심이 강했는데 바다에서 겸손해졌다. 포항시민연극단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래봬도 무대에 다섯 차례나 오른 뮤지컬 배우이다.-뮤지컬 하는 한의사라니 독특하다. 어떻게 시작했나.△아이와 아내가 먼저 시작했고, 남자배우가 필요하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5년째 하고 있다. 포항문화재단 소속의 포항시민연극단에는 10대부터 70대까지 30여명이 활동한다. 70대 최고령 단원이 대본을 가장 먼저 외우고, 드로잉이 취미인 아내가 팸플릿의 그림 도안을 도맡아 한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 현재 맹연습중이다. 오는 26일, 포항시청 대잠홀에서 열리는 ‘나의 꿈’이라는 뮤지컬이다. -가족 전체가 연극에 푹 빠져 사는 것 같다. 연극 경험이 진료에도 도움이 되나.△불안과 불면을 겪는 취업준비생이 어머니와 내원한 적이 있다. 상담을 해보니 따돌림이나 학대당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힘들어하고 있었고, 즉석에서 역할극을 제안했다. 첫 만남이었지만 바로 해야겠다 싶었다. 모녀는 상대의 입장에서 대화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환자가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역할극의 치료효과는 뭔가.△대부분의 고통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고통은 주관적인 감정이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만 쉽지 않다. 역할극은 자신의 고통을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한다.-환자들에게 취미활동을 권하기도 하나.△환자마다 가지고 있는 정신건강의 자원이 다르다. 내가 해보니 좋더라고 무작정 권하지는 않는다. 일단 반드시 처방하는 것은 걷기다. 정신과 환자 대부분은 활동량이 떨어진다. 버겁지 않는 선에서 활동량을 늘려가며 생활리듬을 정상화하고 몸의 에너지를 얻도록 한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오전 걷기를, 이완을 위해서는 저녁 걷기를 처방한다. 예전에 즐겼던 취미생활을 다시 해보는 것도 좋다.- 후학 양성을 위해서도 힘쓰고 계신다.△공중보건의로 복무를 마치고 한방병원에 근무하며 선배의 추천으로 한의대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과 늦게까지 토론하며 교감하는 일이 가슴 뛸 정도로 즐거웠다. 진료도 하고 학생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다, 대학 은사의 추천으로 포항에 왔다. 고등학생 때 참가했던 포항공대 캠프 이후 두 번째로 온 포항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대구한의대에서 학생들을 만난다.-진료와 연구, 강의로 바쁜 나날들인데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시민들의 아픈 마음을 보듬는 일을 계속하면서 환자와의 에피소드를 기록해두고 싶다. 진행 중인 재난 트라우마와 우울증 연구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고, 연구자로도 계속 성장하고 싶다. 포항에 살아서 감사한 일이 많다. 바다수영을 꾸준히 하고 기회가 되면 다이빙도 배울 예정이다. 오래도록 아내와 연극무대에 오를 것이며,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다.김상호 교수는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에서 일반·전문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공중보건의로 복무를 마쳤는데 첫 근무지인 흑산도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한방병원에서 근무하며 상지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지도교수의 추천을 계기로 대구한의대학교 부속 포항한방병원에 내려와 현재 교수로 재직하며 한방신경정신과학회 교육이사, 대한한방병원 중앙수련교육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포항지진을 계기로 재난 트라우마를 연구하고 ‘재난 트라우마의 한의사 진료 매뉴얼’을 개발했다. 사진 촬영과 마라톤, 바다 수영을 수준급으로 즐기며 포항시민연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2-08-15

“다양한 비전 실행, 조화로운 균형발전 이끌겠다”

끈기의 4전 5기 신기록으로 청도군의 행정을 책임지게 된 김하수 청도군수. 이러한 연유로 김 군수에게 ‘청도군수’의 직함은 남다른 감회로 다가오며 4만2천명의 군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사로울 수밖에 없다.민선 8기 청도 군정의 슬로건을 ‘청도를 새롭게! 군민을 힘나게!’로 정한 것에서도 군민을 최우선으로 하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행정학 박사로 청정자연을 지키며 군민의 소득증대를, 인구감소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며 농촌의 대표도시로 내일의 청도를 짊어질 젊은 층의 욕구에도 부응해야 하는 김 군수에게서 청도 군정의 방향성과 미래의 청사진을 들어보았다. -늦었지만,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4년간의 군정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 궁금하다.△선거에서 보내준 군민의 과분한 사랑과 성원에 감사드린다. 군민이 저에게 거는 기대를 잘 알고 있어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슬로건인 ‘오직 군민 행복!, 오직 청도발전!’을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하겠다. 더 큰 청도를 만들라는 군민의 명령을 받았으니 군민 모두가 살기 좋고 행복한 청도, 열린 청도, 함께하는 청도를 만들고자 제대로 일하고 소통하는 군수가 되겠다.이를 위해 청도 군정은 △첨단 기술을 접목한 고품질 친환경 미래농업 육성으로 부자가 많은 살기 좋은 청도 △최고의 위락단지와 레포츠단지 조성을 통한 관광의 메카로 부상 △다 함께 누리는 따뜻한 선진 복지를 실현 △지방소멸 위기에 적극 대응 △상생 협력의 신성장 혁신경제를 구현 △소통과 변화, 섬김의 군정 추진 등을 약속한다.청도를 중심으로 영남권에 1,30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위락단지와 레포츠단지가 조성되면 청도 경제에 큰 힘이 될 것이다.군민 모두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맞춤형 복지와 군민 모두가 행복한 세상, 일자리와 주거, 교육, 문화예술, 체육 기반시설이 조화롭게 정착하는 환경을 아름답게 만들겠다. -4년 군정 방향에서 가장 중요 포인트는 무엇인가.△인구유입정책으로 생동감 넘치는 청도를 만드는 것이다. 관광단지 조성 등으로 인구유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겠지만 군정 운영의 핵심 가치인 군민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할 것이다.소통의 시작은 경청이지만 소통의 완성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서로 마음이 공감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역에 거주하는 외부 전문가들이 외부에서 겪은 경험을 행정에 접목해 군정 운영에 반영하고 군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생각이다.또 행정을 주도적으로 접하고 집행하는 공직자의 역량도 개발하며 공직자 스스로 혁신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군수와 공직자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로 지역문제를 군민과 함께 해결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군정 운영은 군수 한 사람이 아니라 군민과 공직자 등 모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적극적인 소통의 장을 만들고 실천할 것이다. -선거에서 균열 된 민심의 화합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지방자치단체장이 선출직으로 바뀌고 난 후부터 지역 분열의 우려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선거 과정에서 누구를 지지했건 청도의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은 같아 가장 먼저 선거 때문에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지지하지 않았던 군민들과 대화를 통해 이 불협화음을 풀어나가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로 경쟁했던 후보의 공약도 청도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함께 실현해 나가면서 통합의 메시지를 전달하겠다.-군정 슬로건을 ‘청도를 새롭게!, 군민을 힘나게!“로 정한 이유는.△청도군의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도군수 후보 시절 ‘농업은 생명, 농촌의 미래’라는 메시지를 제시한 바 있다. 청도군민의 70%는 농·축산업에 종사해 농위국본(農爲國本)이라는 말처럼 당연히 농업은 중요하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동물만이 살아남듯이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로 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농업도 변화의 시대에 발맞추어 간다면 농촌의 미래가 될 것이다.그러나 농업만으로는 청도군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없기에 도시·문화관광·인구 정책 등 전방위로 청도군의 미래 청사진을 담을 수 있는 통합과 발전의 슬로건이 필요했다. -청도군의 군정 목표로 ‘혁신하는 친환경 농업도시 조성’ 등 5대 목표가 제시되었다. 이들을 설명한다면.△군정의 5대 목표는 △혁신하는 친환경 농업도시 조성 △살고 싶은 행복한 복지도시 △성장하는 상생의 균형도시 △매력적인 고품격 관광도시 △변화하는 창의적 교육도시 등이다.첫째 혁신하는 친환경 농업도시 조성은 미래전략형 신성장 농업인 육성 등 첨단 기술을 접목한 친환경 미래농업을 육성하고 부농이 많고 농민이 꿈과 희망을 키우는 청도를 만드는 것이다.둘째 살고 싶은 행복한 복지도시는 드림생활봉사센터와 가족센터 건립 등으로 아이의 꿈을 키우고 어르신의 행복한 노후 생활을 보장해 누구나 살고 싶은 청도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셋째 성장하는 상생의 균형도시는 대도시와 연접한 청도만의 큰 장점을 살리며 지역 자생력을 높여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한다.넷째 매력적인 고품격 관광도시는 1천300만 명의 배후 관광객을 관광과 휴양, 치유, 힐링의 관광 서비스를 제공해 매력적인 고품격 관광도시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다섯째 변화하는 창의적 교육도시는 지방소멸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아이의 꿈을 키우며 더 나은 교육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인재 양성원을 설립하고 청소년 국제 교육 교류 추진, 유명 강사 초빙 등으로 교육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다. -군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청도군수로 일할 기회를 준 군민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청도군민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청도군 예산 1조원 시대가 현실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또 두 손 모두를 오직 군민 행복과 청도발전이 갑절이 될 수 있도록 사용하겠으니 많은 응원과 지지를 부탁한다.청도/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2-08-11

3년 만의 귀환… 반가움에 ‘흠뻑’ 흥겨움에 또 한번 ‘흠뻑’

‘2022 예천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이 10일 오후 7시 ‘SEMI 곤충엑스포 2022 예천곤충축제’가 열리고 있는 한천체육공원 메인무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예천군이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이 행사는 ‘SEMI 곤충엑스포 2022 예천곤충축제’를 축하하고 낙동강 수변생태공간 홍보 및 낙동강 관광·레저 산업 육성을 통한 관광객 유치와 지역 경기 활성화를 위해 마련됐다. 코로나19로 취소·연기된 이후 3년 만에 열려 축제장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학동 군수를 비롯 최윤채 경북매일신문 사장, 최병욱 군의장, 도기욱·이영식 도의원, 신향순 군의원 등 지역 기관단체장과 군민, 관광객 등 2천여 명이 참석해 깊어가는 여름밤의 정취를 만끽했다.특히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맞은 가족단위 관람객들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다채로운 체험·공연 행사를 즐기며 축제의 흥겨운 분위기를 만끽했다. 전시·체험 프로그램으로는 민속놀이 체험, 보부상 체험, 추억의 뻥튀기, 옛날 간식 체험 등이 마련됐으며 부대행사로 신도시 맘카페와 연계한 플리마켓 장터가 운영돼 많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특히 ‘살아있는 곤충 세상 속으로’를 주제로 개최되는 이번 ‘예천곤충축제’장에서는 딱정벌레목 곤충과 나비, 호박벌 등 살아있는 곤충을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해 인기를 모았다.이날 ‘예천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은 신인배우 서하가 사회를 맡아 양동근, 산이, 강혜연, 류원정, 김민교, 이병철, 최상, 강민주, 이종학 등 국내 정상급 인기가수들이 대거 출연해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여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이끌어냈다.김학동 예천군수는 “이번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공연을 통해 휴가철 축제장을 찾아주신 지역 주민들과 많은 관광객들이 즐겁고 행복한 여름밤을 보내시고 추억을 만드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예천/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사진= 이용선 기자

2022-08-10

“알짜배기를 골라 푸른 강산을 만들고 싶었지”

봄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고개를 내민 수복초와 동강할미꽃에게 눈인사를 하며 식물원으로 들어섰다. 이 비가 그치면 활짝 피리라 말하듯 살포시 벌어진 수선화 꽃대 끝 노란 꽃잎에서 봄을 느꼈고, 겨우내 가다듬은 몸매를 자랑하듯 솟아오른 상사화의 매끈한 잎을 보며 뜨거운 태양과 마주할 상사화 꽃을 떠올려보았다. 식물원 안에 있는 찻집 ‘꽃멀미’ 통나무 의자에 앉아서 모닥불을 보고 있는 사이, 이삼우 원장이 까맣게 그을린 솥에 우려낸 감태잎차를 잔에 담아 건네주셨다. 김 : 부친께서 하시는 과수원에서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자주 하셨다면서요?이 : 많이 했지. 겨울에는 기술자들과 가지치기도 하고. 일해서 번 돈이 제법 두둑했어. 수원역 앞 골목길에 허름한 빈대떡집이 있었는데 방학 끝나고 개학하면 친구들 불러서 한턱내는 거지. 시국과 인생을 논하면서 말이야. 진지하고 멋진 학창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김 : 그런 추억이 구석구석 남아 있겠습니다. 1969년에 기청산농원을 시작하셨지요?이 :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거지.김 : 1991년에 기청산식물원을 개원하셨고요.이 : 농원 이름은 내가 지었어. 국토가 헐벗은 시절이라 푸름에 대한 욕구가 팽배했던 탓인지 청산, 청산 그랬는데 청산은 흔한 이름 같아서 고심 끝에 앞머리에 ‘키 기(箕)’를 붙였어. 키는 찌꺼기를 버리고 알곡을 모으는, 옛날 농가마다 있던 곡식 선별 기구인데, 나는 푸른 것이라고 무조건 취할 것이 아니라 알짜배기를 골라서 이 강산을 푸르게 해야 한다는 뜻을 품었지. 한국에서 최고라는 작명가의 감정까지 받았고.김 :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과 식물원에 자주 오면서도 이 근처에 ‘기청산’이라는 산이 있나 보다 했지요.이 : 따지고 보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지. 킹트리라고 이 식물원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오래된 나무가 서 있는 구역이 야산인데 마치 키 모양이야.김 : 킹트리, 큰 낙우송이 있는 그 산 말이군요.이 : 그래, 그 산. 농사를 처음 지을 때는 고구마, 수박, 배추, 참외, 참깨, 유채 등 갖가지를 재배했어. 일꾼들과 더불어 똥물로 퇴비도 앙구고 소를 몰아 밭갈이도 해봤지. 닥치는 대로 체험한 셈이랄까. 1969년부터는 학교법인 과수원 관리 농장장도 했어. 그러다가 재단 이사장인 선고께서 돌아가신 후 묘한 인연으로 그 과수원을 내가 매입해 운영하게 된 거야. 아버지의 땀과 사랑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900여 평의 농장을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하소연하니까 팔촌 형님이 선뜻 자금을 빌려줘서 구입한 거지. 팔촌 형님은 아버지가 큰 상회를 경영할 때 점원으로 들어와서 훗날 그 상회를 비롯해 양조장까지 인수한 신실한 분이었어.김; 과수원에서 식물원으로 바뀌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이; 과수원은 일 년에 평균 열일곱 번 정도 농약을 쳐야 해. 그런데 농약을 칠 때마다 엄청 괴롭고 힘든 거야. 벌레, 병균과의 전쟁을 치르는 거지. 수입은 괜찮지만 뭔가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때부터 농약을 안 치는 친환경 농법으로 바꿨는데, 완전히 실패했어.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군. 그러고 나니 나무 키우는 업종이 다시 내 마음에 들어오는 거라.김 : 그래서 과수원을 그만두셨나요?이 : 당장 그만두지는 않았어. 나무 생산에 점차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 거지. 그즈음부터 우리나라 산에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했어. 그전에는 민둥산이라 등산을 하면 허탈했는데 녹화에 속도를 내니까 진짜 산 같은 멋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등산을 자주 갔는데, 숨어 있던 야생초목이 눈에 띄더군. 그때 야생식물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우리 조경 세계에 우리 식물을 보급해야겠구나 하는 사명감을 느꼈어. 그래서 ‘향토 고유수목 연구개발 보급농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우리 나무에 대한 연구, 개발, 보급을 시작했지.김 : 과수원 일과 같이하신 거군요.이 : 그렇지. 연구해서 하나둘 개발하는데 굉장히 보람을 느꼈어. 그런데 초창기에는 잘 안 팔려서 힘겨웠지.김 : 나무들 말씀이죠?이 : 그 시절 조경 현장에는 향나무, 히말라야시다, 플라타너스, 이태리포플러 같은 외래종이 주종을 이루었어. 40여 년 전에 이팝나무를 2천여 그루 길러 보급했고, 그 다음에는 느티나무 모종을 십 수만 본 양묘(養苗)해서 대구·경북 일원에 뿌렸지. 수년 뒤에는 내가 판 느티나무 수십 그루를 다시 사와 몇 년간 키워서 판매하는 우스운 일도 있었어. 여기에 있는 나무는 다 팔려서 말야.김 : 모종을 키우고 판매하면서 재미난 일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이 : 나는 나무를 생산할 때 나무가 정당한 모양새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거든. 나무들이 자라서 비좁아지면 마음이 아파.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들이 팔려갈 즈음 내 마음이 그랬어. 애간장이 다 말라. 이것들을 어쩌나, 솎아 내버릴 수도 없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대구시장이 우리 식물원에 방문한 거야.김 : 대구시장이요?이 : 이상희 씨라고, 고위 관료로서는 식물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야. 나중에 내무부장관도 지냈던 분이지. 자연을 아끼고 우리 나무를 귀중히 생각하는 분이었어. 그분이 대구 시내 조경을 제대로 바꾸기 위해서 구상하는데, 거래하는 나무들이 전부 외래종이니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그러다 업자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하에 그런 나무를 심어놓고 못 팔아서 끙끙대는 별난 농사꾼이 있다는 말을 들었나 봐. 이분이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곧바로 여기로 와서 오후 5시까지 머물다 가셨지. 지금처럼 식물원이 무성하지는 않았지만 나무들이 자라서 제법 좋아 보였던 거야. 울릉도 후박나무, 참느릅나무, 느티나무 들이 한창 잘 자라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우리나라에 토종나무를 기르는 농장이 거의 없을 때라, 그분이 온종일 나무를 살펴보고 내 얘기를 경청했지. 그렇게 해서 느티나무부터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 이팝나무가 보급되었어. 이팝나무의 가치를 알리려고 당시 식물학계 3대 거장 중 한 분인 이창복 박사를 초청해 강연회도 열었어. 야밤에 식물원 정원에서 포항 유지들에게 삼겹살 대접을 하면서. 김 : 농원을 식물원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이 : 결정적인 계기가 있지. 우리나라에 식물원이라고는 광릉에 있는 국립수목원뿐일 때였어. 그런데 1996년에 식물원협회가 창설되었어. 우리나라도 이제 식물원이 필요할 때가 되었으니 먼저 식물원협회를 만들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지. 그래서 나의 모교 교수님 중 한 분이 뜻있는 식물계 인사들과 식물학도들을 주축으로 식물원협회를 조직했어. 협회를 창립하고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잖아. 내가 50만 원을 내놓았지. 사과 농사와 조경수 농사로 수입이 괜찮을 때였거든.김 : 당시 50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요.이 : 내가 젊을 때는 돈을 잘 몰랐어. 기부하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1년 뒤 부회장직을 맡게 되니 식물원을 제대로 조성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김 : 식물원협회 부회장이니까요.이 : 그렇지. 그래서 일본으로 벤치마킹하러 갔지. 도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하코네(箱根) 습생식물원이라고, 대지가 한 8, 9천 평 되는데 연간 50만 명이 다녀간다는 거라. 가서 보니 이 정도면 우리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어.김 : 자신감을 얻으셨군요.이 : 거기서 깨우친 것도 있어. 안내요원에게 일본에 등록된 식물원이 몇 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335개라는 거야. 게다가 등록된 식물원에는 정부에서 풍족하게 지원해주더군. 식물원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더니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국민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해. 그 말이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맴도는 거야. 그때부터 식물원 조성과 경영은 물론, 식물 세계에 대한 인문학적 공부를 시작했지.김 : 전공하셨는데 왜 다시 공부를 하셨는지요?이 : 학교 공부는 기초공사지. 파고 들어갈수록 엄청난 세계가 있는 거야. 조물주의 창조 순위가 식물이 세 번째고, 인간은 여섯 번째라는 ‘성경’의 뜻도 깨우치게 되었지. 식물 세계는 인간이 갖고 노는 대상이 아니야. 공존해야 해. 사실 공존도 교만스러운 거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에 붙어서 살고 있잖은가. 식물에 붙어서 뜯어먹는 벌레들을 천시하지만 우리는 벌레보다 더해. 확 깔아뭉개기까지 하잖아. 돈 벌어 호의호식하려고 농약 쳐가면서 다 죽여버리고. 식물 세계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버렸거든.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사진촬영 : 김훈(사진작가)

2022-08-10

밤마다 그려내는원색 불빛 찬란한 포항 바다를 담다

‘항온동물’로 지칭되는 모두가 견딜 수 없는 더위가 한국을 휩싸고 있다.인간의 체온 이상을 넘나드는 온도가 지속되는 8월 초의 폭염. 선풍기와 에어컨을 동원해 몸이 느끼는 온도를 낮춰보고 싶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다.이런 뜨거운 날들이 캄캄한 밤까지 이어지는 열대야. 많은 이들이 더위에 취약한 인간이 아닌, 차가운 심해를 헤엄치는 물고기로 존재를 전이하고 싶어지는 시절이다.앞으로 얼마나 이런 시간이 지속될까? 가끔은 섭씨 40도를 위협하는 집안 온도계가 도깨비처럼 두렵다.아주 오래전 개봉한 영화지만 어둡고, 습하고, 그래서 인간의 몸을 움츠리게 하는 ‘그랑부르’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듯하다.며칠 전이다. 견딜 수 없는 무더위를 피해 어둠이 내린 바닷가를 한참 동안 거닐었다. 점점이 빛나는 몇 점 불빛 외에는 어떤 것도 반겨주지 않는.앞서 언급한 ‘그랑부르’를 다시 떠올린 건 그 순간이었다. □ 늘어선 ‘차박 여행자’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푸르게 일렁이는 파도와 하얀 거품을 물고 자지러지는 포말, 원색의 비키니가 달리는 해변과 첫사랑의 기억인양 붉게 멍드는 석양. 전형적인 여름날 바닷가 풍경이다. 동양과 서양이 다를 수 없고,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 않은.아이들이 입을 모아 부르는 다장조의 동요 같은 도시의 회색 일상도 19세기나 지금 21세기나 다를 바 없다. 잠시잠깐의 떠남이 그 단조로움을 얼마만한 힘으로 치유할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2022년 여름은 누구나 바다로 가는 기차를 타고 싶은 목마른 날들이다. 하지만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언제나 있기 마련.햇살 부서지는 낭만의 금빛 해변을 꿈꾸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영화감독 뤽 베송의 영화 ‘그랑부르’는 조그맣지만 그 힘을 부정할 수 없는 대리만족의 기쁨을 선사한다. 이 영화는 차갑고 서늘한 페루와 그리스의 바다풍광을 배경으로 ‘인간이란 끊임없이 외로움과 싸우는 가여운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주는 슬프고, 그 슬픔 때문에 끔찍하게 아름다운 영화다.‘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바다 건너 낯선 땅으로 가는 길이 막힌 지 이미 오래. 한 해에 1천만 명 이상이 가깝건, 멀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여행을 다녔던 한국인들은 ‘앞으로는 오로지 조그만 한국, 여기서만 생을 견뎌야 한다’는 갑갑함을 견디기가 어렵다.그래서였을 것이다. 타고 다니던 차에 텐트를 싣거나, 아예 기본적 의·식·주의 해결이 가능한 캠핑카를 마련한 이들은 이른바 ‘차박’으로 갑갑함을 풀고 있다.대여섯 시간이면 ‘낭만의 금빛 해변’으로 자신을 데려다줄 비행기에 몸을 싣기 어려워진 시기.그러니, “불법주차입니다. 빨리 차를 빼주세요”라는 위협을 감수하면서 캠핑카에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으로 가고 싶다’는 꿈을 실은 여행객들을 마냥 질책하기도 어렵다.뜨거운 날씨 속에서 그보다 더 뜨거운 열망으로 차를 몰고 바닷가를 향하는 여행자들. 그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이 마음속에서 ‘차박 캠핑 여행자’를 꿈꾸고 있기 때문 아닐까? □ 포항 밤바다가 주는 특별한 선물을 기다리며앞서 말한 영화 ‘그랑부르’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자크 마이욜(장 마르크바 분)과 엔조 몰리나(장 르노 분)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다. 한적한 그리스의 해변 마을에서 누가 깊이 자맥질하는가를 내기하던 철부지들. 영화는 그 철부지들의 성장과 좌절, 희망과 소멸을 ‘짙푸른 바다’의 색채와 구원의 여인으로 상정된 조안나(로잔나 아퀘트 분)를 통해 보여준다.1988년 프랑스 칸영화제 오프닝 작품으로 상영된 ‘그랑부르’는 아주 긴 세월을 뛰어넘어, 하늘만큼이나 파랗고 광대한 심해(深海)의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이곳이 싫지만, 다른 저곳으로 갈 용기가 없는 인간들의 소심함을 위로해왔다.혼자선 외로움을 견딜 힘이 없고, 외로움을 나눠 가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용기마저도 없는 사람들.그래서였을까? “나의 우주는 바로 당신”이라는 로잔나의 고백은 새벽녘 해미 같은 서늘함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적셨다.20세기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오늘도 바다는 푸르렀다”고.눈으로 보는 바다는 단지 아름다울 뿐이다. 폭염의 햇살을 가리는 파라솔 아래에서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 모래성을 허물며 발가락을 간질이는 파도, 수평선 저편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빛…. 그러나, 인간사에 어찌 아름다움만이 있을까.눈이 아닌 가슴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막막함으로 우리의 가슴을 막아선다. 맑은 서정시의 소재가 되고 고운 노래의 가사가 되었던 바다. 그러나, 그 짙푸름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슬픔이 녹아있던가. 세상사의 회한(悔恨)이란 인간에게나 바다에게나 마찬가지인 것을.포항의 해변에선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포스코가 만들어내는 밤의 불빛을 만날 수 있다. 때론 여름날 정글을 닮은 초록빛으로, 가끔은 성하(盛夏)의 열정보다 온도 높은 선명한 붉은색으로 환한.낭만과 원시의 키워드인 ‘바다’가 생산과 노동의 은유인 ‘공장’의 불빛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실 그게 보편적인 시선이기도 하다.하지만, 깊은 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모래밭을 거닐어본 사람은 안다. ‘낭만’과 ‘노동’은 별개로 존재하는 상극(相剋)의 단어가 아닌, 인간의 삶 내부에 동등하고 동일하게 존재하는 상생(相生)의 단어라는 것을.살풍경한 포항제철이 하늘을 배경으로 밤마다 그려내는 원색의 불빛은 어찌 보면 동해안 바닷가마을 포항을 ‘포항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명백한 오브제(Objet)일 수도 있지 않을까. □ 이가리 닻 전망대에서 만난 밤바다는…다시 ‘그랑부르’로 돌아가 보자. 서늘한 밤바다로의 떠남을 꿈꾸었지만, 떠나지 못하고 식은땀 끈적이는 도시에 남은 사람들.떠난 사람들에게 ‘바다’는 분명 눈과 육체를 즐겁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떠나지 못한 사람은 어떤가? ‘그랑부르’를 통해 가슴과 영혼에 쌓인 일상의 묵은 때를 씻어내는 즐거움은 떠나지 못하고 도시에 남은 우리들의 몫이 아닐지.영화의 마지막. 자크는 돌고래의 노래 소리만이 적요함을 깨는 심해로 영원히 사라진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떠난다.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요절시인(夭折詩人) 박정만의 절명시 한 줄.“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우리 모두는 이 지긋지긋한 여름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 그곳이 심해건, 우주건. 그러나, 그것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상을 견디는 건 세속인간들의 천형(天刑)이기에.지난 주말이었다. 포항 청하면까지 차를 몰아 ‘이가리 닻 전망대’의 밤 풍경 속을 표표히 거닐던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 말을 했다.“여기서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경계가 희미해진다”고.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바라며 어디로 가고 있냐?”고.울울창창 소나무가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고,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속에도 수차례 등장하는 아름다운 바다에서 왜 친구는 굳이 삶과 죽음의 덧없음과 생의 허무를 떠올렸을까?그날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이제야 이런 위로를 ‘이가리 닻 전망대’ 위에서 번민과 고뇌 속을 헤맸던 그에게 해줄 수 있을 듯하다.“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열망과 환멸 사이의 간극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저 네 눈앞에서 빛나던 밤바다의 별빛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뿐.”/홍성식기자

2022-08-09

독립 유공자에게 정당한 공적 평가로 보훈해야

광복절 77주년을 맞았지만 광복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것 같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감격했던 기억이 추억이 되고 있는 것처럼.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태극기와 독립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국민정신으로 승화시키겠다고 선언한 광복회가 한때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오상균 광복회 대구시지회장은 “독립유공자 유족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닌 만큼 겸손하고 선열의 이름을 욕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사과한다.친일청산에 대해서는 “당연히 해야 한다. 목표는 맞지만 방법은 학자와 관계자들의 연구를 거쳐야 한다. 급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 다시 광복절을 맞았다. 광복회 지회장으로서 광복절을 맞는 소회부터 듣고 싶다.△77주년 광복절을 맞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광복절 행사가 축소된 것이 무엇보다 아쉽다. MZ세대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나는 광복회 지회장으로서 젊은 세대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려주고 또 그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하겠다.- 독립유공자 유족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독립유공자 유족이지 본인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겸손하고 선조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거다. 선조들의 풍찬노숙하면서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그 고결한 정신을 생각하고 이어받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광복회 대구지회장으로 취임한 지 한 달여가 지났다.△그동안 지역에 ‘사과’하러 다녔다. 광복회 중앙회에서 일어난 작금의 사태가 유족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워 대신 사과하면서 광복회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광복회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다짐이다.지금 중앙회장은 장준하 지사의 손자인 장호권 씨가 맡고 있다. 보궐선거에서 김구 선생의 손자 김진 씨 등과의 선거에서 이겼다. 어쨌든 김원웅 직전회장의 여러 불미스러운 일과 이번 회장 선거 과정에서 독립유공자 자제들이 선조들의 위명에 먹칠을 하는 추태를 보이거나 들추어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는 얼마나 되며 또 지역의 독립유공자는 얼마나 되나.△국가보훈처 자료에 의하면 7월14일 현재 1만7825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유공자의 세대 중 1명만이 유공자증을 받고 광복회원이 되고 다른 가족은 유족이 된다. 독립유공자의 본적지를 국가자료로 추정하면 대구와 달성군을 합쳐 180명 정도 되고 경북이 2천282명으로 합계 2천400명 정도 된다. 이는 전국 독립유공자의 13.8%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 우리 지역이다.- 대구 경북지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특별히 많이 배출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이 지역은 유림의 고장이자 선비의 고장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국제 성세를 판단하고 민중을 지도하는 사회지도층으로는 유림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 선비의 고장인 이 지역에서 자연히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결과였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 항일 정신과 독립 의식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석주 이상룡 선생이나 왕산 허위 선생의 가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직 서훈 받지 못한 유공자들은 얼마나 될 것으로 보나.△정확히는 판단할 수 없지만 여러 자료를 보면 20만~40만명으로 추산한다. 50년 일제 강점기 동안 얼마나 많은 분이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국가가 다루어야 할 문제다. 특히 만주나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하신 분들은 남북분단으로 자료 접근이 어려워 역사 속에 묻혀버린 감이 있다.3·1운동 집회인원이 204만6천938명이었고 사망자가 7천508명, 부상자 1만5천849명, 수감자가 4만6천306명이었다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기록했다. 거기에 비하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서훈 받은 독립운동가가 1만8천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적은 숫자다.현재 보훈처가 발굴하고도 후손이 없거나 소재파악이 안 돼 서훈을 전수하지 못한 독립유공자가 6천800명이나 된다.- 우리나라의 유공자 보훈은 어떤 것이 있고 독립유공자의 보훈은 어느 수준인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과 보상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는 것 같다.△국가보훈처에서 관리되고 있는 국가유공자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독립유공자와 호국유공자, 그리고 민주화유공자가 그것이다. 독립유공자는 동시대에 겪은 신체적·재산적 고통과 피해는 엄청나게 그 후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독립유공자는 ‘3대에 걸쳐 망했다’는 자조적인 말이 나돌 만큼 후손들에게 준 피해는 컸다. 다른 단체도 후손에게 영향을 주지만 독립유공자 유족과 비교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조상의 독립운동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후손들이다. 국가에서 독립운동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발적인 헌신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과 기득권을 버린 독립운동가들은 그야말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슈퍼에고’에 해당하는 분들이다.그러나 그 후손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뒷전에 밀려나기도 했으니 유공자들의 공적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의료혜택이나 보훈수당 등에서 지자체마다 다르고 국가보훈처에서는 타 보훈단체와의 형평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재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 절차와 방법에서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독립유공자가 받는 포상에는 5단계의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과 건국포장, 대통령장으로 나누어진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독립유공자의 훈격을 결정할 때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즉 같은 독립운동이라도 훈격이 달라 유족들이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 할 때 후세가 보상금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하는 반응이 나올까 두려워 선뜻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또 자칫 선대의 빛나는 독립운동 사실에 흠이라도 될까 우려해서 유족들이 서훈이 낮게 평가되어 있다며 재심요청을 해도 국가보훈처 공훈심사 부처에서는 재심의를 해주지 않고 있다.- 선친인 오기수(吳麒洙·1892~1952) 지사의 행적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달라.△나는 아주 어렸을 때 문중에서 큰아버지인 오 지사의 양자로 입적됐다. 큰집의 두 분 누님과 함께 자랐다. 그래서 내 기억에는 안방에 앉아 계시던 눈먼 노인의 기억밖에는 없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아 고생을 하셨던 것이다.어렸을 때는 선대의 많은 재산을 선친 옥바라지에 날려버렸다는 집안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어릴 때 가난하게 자랐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대개 그러하듯 재산적 피해로 제대로 공부를 못 한 분들이 많다. 나 또한 반항심을 많이 가졌지만 지금 이 나이에는 무한한 자긍심을 느낀다.- 석주와 함께 오 지사의 건국훈장 애족장이 훈격으로서 부족하다고 했다.△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라면 훈격이 매우 낮은 편이다. 또 오 지사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보니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너무나 과소평가돼 있었다. 그래서 지난 2005년 보훈청에 재심을 신청했더니 “미서훈된 분에 대한 공적심사를 우선 하고 있다. 따라서 기서훈자에 대한 훈격 조정을 위한 공적 심사는 계획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답변을 해 왔다.- 오기수 지사의 서훈은 어떻게 받았나.△내가 20대 초반이었던 1977년 신간회의 박노수 지사께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할 때 “나보다 오기수 지사의 공적이 큰데 같이 포상 신청을 올려야 한다”며 우리집을 찾아 왔다. 그렇게 해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고 1990년에야 건국훈장을 받았다.오 지사가 1919년 6월 중국 만주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대구지법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1920년 9월 대구 남문시장에서 동지들과 일제에 협력한 조선 관리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해 암살하려건 계획으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 복역한 것이 서훈 공적의 전부다.- 그렇다면 오지사의 주요 행적과 서훈 받지 못한 활동 이력은 어떤 것이 있나.△사실 확인과 재판 기록을 발굴해보니 실제 감옥살이도 3차례 4년10개월이나 됐다. 1929년 8월 만주 장춘경찰서에 붙잡혀 신의주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상소해서 징역 2년 판결 받아 1931년 석방됐다. 그때 고문으로 상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고향 의성으로 내려왔다.2년 뒤인 1933년 12월 의성적색독서회 사건 주범으로 체포돼 대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관련자 2명은 오 지사보다 적은 징역 2년6월 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 사건 하나만으로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당시 오 지사는 결국 무죄판결을 얻어낼 때까지 1년7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에 따르면 4년 10개월 수형기간은 애국장(5년 이상 활동 또는 4년 이상 옥고)을, 활동기간을 기준으로 하면 독립장(8년 이상 활동)에 해당된다고 보고 재심을 신청했다.- 유족으로서 오 지사에 대해 평가하면.△오 지사는 의성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서울로 유학, 경성관립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가 의성으로 귀향한 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멀어 힘든 노후를 보내야 했다.1920년대 후반부터 독립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주로 사회주의 운동을 했으나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 활동을 접고 자유민주주의로 건국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의성을 뒤흔든 ‘의성적색독서사건’은 당시 신문에 의성 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보도되었다. 자유민주주의자로 전향했음에도 ‘공산당’ 말만 나오면 움츠려드는 시대에는 쉬쉬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보훈 절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겠다.△이처럼 재심을 바라는 유족들이 많으나 상훈법에 따른 제약과 공훈을 욕심내는 후손으로 비춰질까봐 재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대한민국 역사에 영원히 남을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선친의 독립운동 사실 중 만주 의성에서의 기록들이 공훈록에 등재되지 못하여 유족으로서 죄송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다.공훈법이 개정되어 독립유공자의 공훈에 정당한 평가를 해주기를 바라며 독립운동으로 피폐해진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려는 유족들의 간절한 바람이 회한으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경우 편집위원

2022-08-09

민선8기 영주, ‘화려한 청년기’ 부활 기틀 만든다

박남서 영주시장은 민선 8기를 영주의 화려한 청년기를 되찾는 기틀을 마련한다는 포부다.박 시장은 취임 후 공약 및 핵심 사업을 점검하고 민생경제 챙기기에 몰두하고 있다.민선 8기 영주시정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는 단연 “경제”에 방점을 두고 있다.박 시장은 영주경제 대변혁을 통해 미래 산업이 꽃피는 영주, 청년을 지키고 키우는 영주, 문화가 힘이 되는 영주로 거듭날 것을 선언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세부계획 마련에 나섰다. 먼저 지역 경기침체 및 지속적인 인구감소 문제 등의 시대적 숙제를 해결하는데 역점을 두고 관련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지원, 이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지역의 우수한 청년 육성,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지역에 청년들이 북적이고 생기 넘치는 영주를 만들어 나갈 방침이다.이를 위해 기업지원 전담부서 신설과 국·도비 예산 확보를 위한 특별팀을 구성해 예산 1조원 시대를 연다는 계획이다. 민·관 합동 기업투자유치위원회를 구성해 기업유치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등 지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적 노력을 이어나가게 된다.박 시장은 “지역 기업이 살아야 영주가 도약한다는 신념으로 기업인들과의 정기적인 만남과 현장 기업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더 역동적인 경제도시, 더 강한 경제도시 영주를 만들겠다”며 “지역경제 활성화와 우수 기업유치를 위한 노력에 시정을 집중해 나갈 계획”을 밝혔다. 특히 시가 그동안 중점 시업으로 추진해온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의 조성원가 재점검을 통해 시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경량소재산업 육성 기반 구축과 기업유치에 힘써 안정적인 청년 일자리 확보와 세수를 올리는데 집중하는 등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도 적극 힘을 싣는다는 포부다. 문화가 곧 지역경제의 힘이 되는 선비 관광산업에도 나선다.영주는 선비정신으로 대표되는 문화도시로, 교육, 관광, 문화·예술, 시민의식 등 사회 전 분야에 올바른 선비정신을 담아내고 정도전, 안향, 금성대군 등 영주의 역사 인물을 활용한 선비콘텐츠를 개발해 선비정신을 잇고, 관련 문화콘텐츠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 소백산 케이블카, 익스트림 어드벤쳐파크 등 소백산 일대를 관광지화하는 계획을 검토 중이다.영주 지역의 자긍심인 소백산과 영주댐 일원을 관광경제의 랜드마크로 만드는 등 관광 산업에서도 지역 발전을 위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다. 영주의 대표적인 역사·문화관광 자산인 부석사와 소수서원, 선비촌, 무섬마을과 9월 개장하는 한문화 테마파크 선비세상의 성공적인 운영을 통해 K 문화 특별시 영주 조성에도 나선다.지역 경제의 또 다른 핵심축인 농업의 발전을 위한 정책도 새롭게 추진된다. 농산물 종합유통센터 건립 등 안정적인 유통망 구축과 농업에 6차 산업 추세에 발맞추는 정책으로 지역농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 기존의 농업정책이 재배와 생산에 중점을 뒀다면 유통과 마케팅 분야도 그에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여 나가게 된다. 미래 농업의 주역인 청년 농부 육성도 핵심 정책 중 하나다. 청년 농부 육성과 소득향상을 위해 청년 농업경제 플랫폼을 추진해 청년들에게 정보교류와 교육, 창업 등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청년 억대농부와 청년기업 육성에 힘쓸 방침이다.이 밖에도 교육재정 확대, 유소년 체육단 창립, 예·체능 특성화고 지원 등 교육정책을 강화하고 젊은 영주를 위해 구도심 경제활성화, 신도심 문화예술 및 힐링공간 확보 등 구도심과 신도심의 동반성장을 위한 계획도 추진한다.민선 8기에는 민생과 미래에 집중하며 모두가 행복한 영주시를 완성하는 데 힘쓰겠다고 밝힌 박 시장은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시민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시민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도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써 영주의 꿈을 시민과 함께 이루어 나가도록 하겠다”고 민선 8기에 임하는 각오를 전했다. 박남서 영주시장에게 듣는다“시장 직속 기업실 신설, 투자유치 직접 챙길 터”- 선거 이후 시민 화합에 대한 방안이 있다면.△ 영주시장을 목표로 오랜 시간 달려왔다. 그만큼 지역의 구석구석을 발로 뛰며 시민들의 애환을 들었고 공감했다. 선거는 새로운 영주시의 미래를 개척하는 과정이다. 민선 8기에서는 이전 시정에서 챙기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겨나가겠다. 영주시민 모두가 하나 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과 시민을 위한 시정을 펼쳐나가겠다. 코로나19로 많은 것이 망가졌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 내준 시민들에게 감사하며 지역의 정상화를 이뤄나가는데 전력을 다할 계획이다.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과 관심을 당부 드린다.- 영주농축특산물 국내외 판로 개척에 대한 계획은.△ 지난 7월 영주시와 삼성홈플러스는 년간 70억 규모의 매입 업무협약을 체결했다.다양한 대형 브랜드를 대상으로 판로 확대를 위해 (가칭)영주시 유통공사를 설립 중이다.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온라인 판매 확대와 온 오프라인을 통한 수출상담회 개최 및 해외 우수 바이어 발굴을 지원할 계획이다. 수출물류비 지원 확대, 맞춤형 수출지원에 의한 통상경쟁력 강화, 국제 박람회 참가지원, 영주수출기업협의회 활성화에 중점 지원을 계획 중이다.- 경제 시장, 청렴 시장에 대한 시민 기대감이 크다.△ 시민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경제성장을 통한 시민 모두가 행복한 도시를 만들겠다. 시장 직속으로 기업실 신설, 기업하기 좋은 도시 기반 마련, 베어링산단 조기 완공, SK스페셜티 등 대규모 투자유치에 의한 일자리 창출에 주력할 것이다. 국가산단에 투자를 희망하는 기업에 대해 1기업 전담공무원 3명을 배치해 입주단계부터 지원해 나갈 방침이다. 깨끗하고 투명한 시정으로 청렴도를 높여나가겠다.- 고령화, 인구감소에 따른 경제인구 대처 방안은.△ 20만에 육박했던 영주인구가 10만 명대로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낮은 임금과 청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인구감소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청년이 중심 되는 일자리 확보에 전력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첨단베어링 국가산단과 경량소재산업 육성 기반 구축 등 안정적인 일자리를 늘려나가겠다. 영주/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2-08-08

“리튬전지 폭발 위험·충전 느려짐 나노구조체 합성으로 문제 해결”

박문정 포스텍 교수 과학기술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분야로 알려져 있지만 오랫동안 성별 편향성을 드러냈다. 신약 연구에서 수컷 개체만을 사용한 결과 여성은 더 많은 의약품 부작용을 겪는다는 FDA 조사결과도 있었다. 노벨과학상에서 여성 비율은 4%에 불과하며, 뛰어난 여성 과학자들은 당대의 편견과 맞서야했다. 우리 사회 또한 과학기술 분야의 유리천장은 견고하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을 담당하는 관리직 가운데 여성 비율이 10%에 불과하다. 주변에서 여성 과학자를 만날 기회는 드물다.고분자 화학 분야의 세계적인 연구자인 박문정 교수와 약속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미국 출장과 국내 여러 학회 일정 사이에 찾아간 연구실은 여성 과학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교수님들은 방학에 주로 뭘 하며 보내나.△포스텍은 연구중심대학이라 강의 시수가 적다. 한 학기에 보통 한 과목 반을 가르친다. 한 과목이라 하면, 한 시간 반 수업을 주 3회 한다. 강의만 빠진 거지, 학기와 다른 것이 없다. 오히려 각종 학회 일정이 몰려 더 바쁘다.-연구실 한 벽을 가득채운 아이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오전 8시에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등교시키고 바로 출근한다. 중간에 학원을 태워주고 연구실에 데려와 저녁도 먹인다. 밤 10시까지 같이 있다가 퇴근한다. 코로나 이후 수업이나 회의가 화상으로 대체되면서 아이를 돌봐주시던 부모님이 본가로 가셨다. 처음에는 화상회의만 하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애를 먹었지만 지금은 혼자 만화책을 읽는다. 주말부부라 평일 육아는 내가 전담한다. -여성과학자의 현실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화학과 교수면서 미국물리학회의 ‘딜런 메달’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연구하는 분야가 정확히 무엇인가.△화학과의 화학공학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화학은 물질의 구조와 변화를 다룬다면 화학공학은 제품개발까지 연결된다. 화공을 전공하고 화학과에 임용된 것은 운이 좋은 경우다. 나는 화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고분자화학을 연구한다. 물질의 특수한 성질을 결정짓는 가장 작은 단위가 분자이다. 고분자(高分子, high polymer)는 분자량이 크다는 의미다. 분자 하나는 쉽게 휘발되지만 고분자는 그렇지 않아 다양하게 사용된다. 플라스틱을 비롯해 생활용품 대부분이다. 쓰임새에 따라 고분자를 합성하는 연구가 고분자 화학이다. 화학 가운데서도 물리학에 가까운 물리화학을 한다. 딜런 메달은 젊은 고분자 물리화학자에게 주는 상이다.-대표적인 연구는 배터리와 인공근육으로 알려져 있다.△내 연구의 핵심은 고분자 전해질이다. 고분자 전해질이란 유동성이 없는 고체인 고분자가 이온을 잘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물질이다. 연료전지에서는 수소이온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리튬전지에서는 온도 변화에도 리튬을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인공근육에서는 미세한 동작을 잘 구현할 수 있게 고분자를 합성하는 연구를 한다.-수소차 연료전지로 시작해 전기자동차의 리튬전지 연구로 이어졌다.△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할 때 수소연료전지 전해질을 연구했다. 국내 들어와 보니 수소연료전지로는 연구비를 받을 수 없었다. 국내 에너지정책은 정치성이 강한 탓이다. 당시 주목받던 리튬전지로 전환했고 지금까지 오게 됐다. 수소연료전지든 리튬전지든 이온이 흐르는 원리는 같다.-리튬전지의 어떤 부분을 연구하나.△전기 자동차와 스마트폰의 핵심 부품인 리튬전지는 폭발의 위험성이 있다. 리튬전지의 액체 전해질 대신 고분자 전해질을 사용하면 폭발 위험을 낮추지만 충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문제다. 나는 이런 현상을 나노 구조체 합성을 통해 해결했다. 이온이 지나가는 통로의 폭을 좁혀 이온이 흩어지지 않도록 효율을 높인 것이다. 샤워 헤드의 물줄기를 세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세계 최초로 전해질 나노 구조체를 생산했고, 현재까지 이 일을 하는 연구자는 나밖에 없다. 엄청난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일반에는 인공근육 연구자로 더 알려져 있다. 이전 인공근육 연구와 어떤 차이가 있나.△하버드대에서 뇌졸중 환자의 보행을 돕는 ‘엑소슈트(Exosuits)’를 개발해 주목받은 적이 있다. 운동능력의 3,40%을 향상시켜주는 일종의 입는 로봇으로, 아이언맨 슈트가 스파이더맨 슈트로 진화한 것이다. 우리 연구와 하버드의 가장 큰 차이는 전력이다. 하버드에서 만든 슈트는 가정용 전압 200볼트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야한다. 우리는 1.5볼트 전지 하나면 되도록 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식충식물인 파리지옥처럼 전력이 없어도 작동하는 인공근육도 개발했다. -제품으로 나와 있나.△인공근육 기반의 의료용 기구가 나와 있지만 시장이 크지 않다. 현재는 게임용 ‘햅틱 글러브(Haptic Glove, 촉각 장갑)’를 개발 중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장갑을 끼고 게임을 하면 터치 유무만 인식되지만,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 게임이 실감나려면 속도와 세기까지 더 세밀해야한다. 라텍스 장갑처럼 얇고 가벼운 장치에 인공근육을 연결해 세밀한 조작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인공근육 아이디어는 파리지옥에서 얻었고, 얼음이나 커피나무를 이용한 연구도 주목받았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가져오나.△다른 분야 세미나를 굉장히 열심히 듣는다. 타 분야 연구를 듣다보면 내 분야와 접점이 보인다. 고분자의 합성에 얼음을 활용한 아이디어는 환경공학자의 논문 발표회장에서 나왔다.-되겠다 싶어 시도했는데 실패한 경우도 있나.△커피나무에 있는 카페인산을 이용해 고속 충전되는 리튬 전지를 개발했다. 수없이 많은 분자들을 들여다본 결과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백만의 천연 화합물 가운데 원하는 분자구조를 찾는 일은 결국 시간 싸움이다. 시도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전지 성능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실패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해봐야 안다. 우리가 하는 실험 대부분이 후보군을 찾아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후보군을 좁혀가며 심도 깊게 테스트를 반복해서 단 하나를 얻는다.-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어느 분야까지 관심을 가져봤는지.△인공근육 연구를 하면서 환자들의 심리를 공부했다. 인공근육이 드러날 때와 감춰질 때 환자의 심리 상태에 차이가 있다. 몸이 아프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쉬워, 치료과정의 세심한 배려들이 회복속도와 연관된다. 내가 하는 연구와 관련 있는 강연은 열심히 찾아듣는다.예술가가 영감을 받듯 주변에서 연구 아이디어를 얻고 다른 분야를 경청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온 박문정 교수.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순정응용화학연합(IUPAC)의 ‘젊은 과학자상’을 수상했고, 미국물리학회의 ‘딜런 메달’을 수상한 최초의 한국인이며, 고분자 화학분야 국제저널 편집위원이 된 것도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포기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가는 확고함과 집념의 이 과학자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또래들 중에 돌 사진이 없는 몇 안 되는 아이였다. 남아선호사상이 남아있던 때라 유치원도 오빠만 다녔는데 그렇게 부러웠다. 산수를 유난히 좋아했다. 네다섯 살 무렵, 옆집 살던 동갑내기와 대결을 하면서 세 자릿수 곱하기 두 자릿수를 익혔다. 친구에게 지고 밤새 울면서 연습했고 다음 날 결국 둘 다 백점을 맞았다. 초중학교에서는 반장을 도맡았는데 수학시험 0점을 맞은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서 가르쳤다. 중학생 때는 유기정학 당한 친구의 공부를 도와 성적을 엄청 올리기도 했다.-방황했던 기억은 없나.△늘 1등만 하다 경기과학고에 가니 성적은 실망스러웠고 기숙사 생활은 적응이 안됐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팬이었는데 이들이 출연하는 방송을 보려고 학교 담을 자주 넘었다. 단골 치킨가게에서 감자튀김 하나 시켜놓고 텔레비전을 보고 PC통신 천리안에 글을 올렸다. 워낙 자주 가니 사장님도 그러려니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기숙사 사감한테 한 번도 안 걸렸다.-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치고 포항에서 자리 잡게 된 계기는.△포스텍은 연구중심대학으로 연구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던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가속기가 있었는데 거의 살다시피 했다. 가속기 때문에 포항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한국에는 없는 전자현미경 실험을 하러 미국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구시설이 가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질 높은 연구 성과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분자 화학 분야에선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이공계는 여성이 소수다보니 편견이 여전하다. 여자 교수는 육아하느라 연구에 집중하지 않고 승진을 다하면 느슨해진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편견은 깨질 수도 혹은 굳힐 수도 있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 분야에서 연구를 제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하던 대로 하자. 그것이 나의 계획이다.박문정 교수는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받고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했다. 현재 포스텍 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생활용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고분자를 배터리나 의료기기와 접목해 활용도를 높이는 연구를 한다. 여성과학기술자상(2015), 미래창조과학부가 수여하는 젊은 과학자상(2016), 국제순정응용화학연합(IUPAC)의 젊은 과학자상(2016) 수상에 이어 한국인 최초로 ‘딜런 메달(John H. Dillon Medal)’을 받았다. 미국 물리학회에서 박사학위 이후 12년 내의 젊은 과학자에게 수상하는 메달이다. 현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화학회지 ‘매크로몰리큘러스(Macromolecules)’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08-08

청하중 학생들과 함께 보살핀 ‘여인의 숲'

기청산식물원을 찾아가다 보면 소나무 숲이 펼쳐지면서 청하중학교가 나타난다. 100~200년은 되었을 법한 아름드리 노송들이 아래로는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위로는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관송전(官松田)이다. 나무와 나무 틈으로 지붕이 붉은 건물들이 보인다. 청하중학교다. 늦게 하교하는 한 학생이 숲길을 걷는다. 아름답고 넉넉한 숲에서 너희는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 가만히 다가가 묻고 싶지만 깊은 사색에 빠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발길을 돌려 곧장 식물원으로 향했다. 김 : 농대를 졸업하고 포항으로 오셨습니다. 부친께서 이사장으로 있던 재단 농장에서 농사도 짓고 나무도 기르면서 한편으로는 청하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이 : 젊은 나이에 애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어. 난 회초리는 한 번도 안 들었어. 학생들이 궁금한 게 많았던 것 같아.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이 내 양쪽에 주렁주렁 매달리듯 따라오면서 질문을 했어. 교무실까지 따라와서 계속 질문하고 나는 대답하고 그렇게 가르치니까 얼마나 재밌고 신바람 났겠나?김 : 정말 재미있었겠습니다. 청하중학교 연혁을 보니 1951년에 개교했더군요.이 : 1951년 휴전협정 중에 세웠지.김 : 이후에 선친께서 인수하신 건가요?이 : 설립자가 부채가 많아서 우리 선고에게 넘겼어. 선고께서 돌아가신 후 형님이 사업하다 부채가 많아져 학교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그래서 내가 객기랄까, 아버지가 우리 가문을 교육자 집안으로 키워놓았는데 남한테 넘기면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부채를 떠안고 맡게 되었어. 애초에 나는 여력이 생기면 대안학교 비슷한 농업계 고등학교를 세우고 싶었지. 철학이 있고 자존심 강한 인간 교육을 하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어. 청하중학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학교 숲 부문 대상도 타고, 아름다운 전원학교로 선정되었어. 솔숲 대부분은 기청산식물원 소유인데 식물원이 학교를 품에 안은 형국이지. 이렇게 자연환경이 좋은 학교는 없을걸.김 : 그렇지 않아도 오는 길에 관송전을 둘러보았습니다. 정말 좋더군요. 내친김에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식물원까지 왔습니다. 솔숲 산책로도 좋았습니다. 쉬엄쉬엄 가게 해주고, 무엇보다 직선이 아니어서.이 : 직선으로 산책로를 해놓으면 심리 치유가 안 되거든. 직선은 죽음을 뜻해. 직선적인 사람들을 보면 뭘 부수거나 앞서 해놓은 걸 확 지우고 없애고 그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처럼 물은 흐르다 막히면 잠시 머물러 찰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힘차게 굽이굽이 흘러가지. 점심시간에 학생들의 식후 산책을 유도하기 위해 예산을 엄청 들여 조성했어.김 : 후원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이 : 식물원이 기증받은 것을 교정에 세웠지. 강화플라스틱으로 제작된 거야.김 : 주물이 아니고요?이 : 주물이 아니야. 로댕의 후원자가 일본 사람이었어. 그 사람이 로댕의 양해를 받아 강화플라스틱으로 원작품 그대로 열 개를 만들었는데, 그중 한 개가 한국에 들어온 거지.김 : 그게 지금 후원에 있는 건가요?이 : 그렇지. 흉내 내어 깎은 것이 아니고 그대로.이 : 교육적으로 좋다 싶어 가져다 놓았지. ‘논어’에 이런 말이 있어.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지. 요즘 보면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이 수두룩해. 말이 앞서거나 많아. 되새김질하듯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데 말야. 되새김질하려면 고생하면서 공부해야 해. 정말 중요한 것은 철학적인 것, 즉 인생관이지. 고난이 없으면 나이테 없는 나무와 같아. 그렇게 자라면 태풍에 쉽게 부러지지. 고생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드는 것과 똑같아.김 : 말씀하신 내용이 원장님의 교육철학이겠군요.이 : 우리 학교의 교육철학은 “공부 선수는 공부 선수대로, 심부름 선수는 심부름 선수대로, 그 소질대로 성장하도록 교육 방향을 정해야 한다”거든. 교직원들한테 항상 하는 얘기가 성적 가지고 따지지 말라는 거야.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의 부족함 때문에 성공하거든. 부족함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그 공백을 메꿔야겠다는 의욕이 있으면 그게 성장이지. 학교에서 배운 게 다가 아니야. 건축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대학교는 기초공사에 해당하지. 참교육 결핍 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공부 잘해서 변호사, 의사 되고 출세만 하면 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데 그게 전부 착각이라. 아이들은 각자 잘하는 방향, 소양대로 키워야 해. 그리고 중요한 것이 체육이야. 건강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니까. 이런 우리 학교의 교육철학이 요즘 다른 학교에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어. 우리가 선두주자인 셈이지. 그 덕분인지 우리 지역에서 들어오는 학생 수는 10여 명 남짓한데, 포항 시내와 외지에서 학생들이 몰려와서 한 학년에 두 학급이 유지되고 있어.김 : 처음부터 한 학년이 두 학급이었습니까?이 : 한때 네 학급까지 있었어. 학생 수가 천 명을 넘을 때도 있었지.김 : 원장님이 계시기 전인가요?이 : 내가 인수하기 직전까지 그랬던 것 같아. 인수하고 얼마 안 지나서 도시로 많이 나갔어.김 : 물론 다른 사람한테 넘겨줄 수 없어서 인수한 것도 있겠지만, 나는 사학을 이런 식으로 해야겠다, 혹은 좀 전에 하신 말씀처럼 대안학교처럼 운영해야겠다, 이런 꿈이 있었습니까?이 : 큰 꿈이라기보다 청하중학교를 좋아했지. 학교를 인수한 후 교직원들에게 회초리는 들어도 매질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어. 군기 잡는다고 몽둥이질하는 선생을 종종 봤거든. 그리고 아이들 자존심 상하게 뺨을 때리거나 그와 비슷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어. 내가 겪어보니 회초리를 들 틈이 없더라고. 갸름한 플라스틱 자를 한 번 쓰긴 썼지만. 김 : 청하중학교 학생들과 같이한 보람 있는 일을 소개해주시지요.이 : 워낙 많아서 말이야. 그중 한 가지를 꼽는다면 ‘여인의 숲’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고 기념비까지 제작한 일이지. 이 숲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 있어. 조선 후기에 이 마을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김설보라는 여인이 마을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땅을 사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등을 심고 숲으로 가꿔 마을에 기증했다고 해. 마을 저수지가 무너지고 하천이 범람해 떠내려가던 사람과 가축이 이 숲에 걸려 피해를 줄였다고 전하지. 내가 청하중학교를 인수하고 나서, 그러니까 36년 전부터 우리 학생들하고 ‘여인의 숲’을 찾아가 보살폈어. 단순히 숲만 가꾸는 것이 아니라 향토의 역사와 지혜로운 조상들의 발자취를 본받게 하고 싶었어. ‘여인의 숲’이라 이름도 지었고. 훗날 포항시에서 예산을 지원해줘 기념비도 건립했지. 참나무의 씨앗, 도토리를 품고 기도하는 손을 형상화한 멋진 비야.‘여인의 숲’은 2011년에 산림청과 생명의숲 국민운동, 유한킴벌리가 개최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했어.김 : 졸업생 가운데 원장님처럼 농업을 하고 싶다는 제자는 있습니까?이 : 요즘 농사짓겠다는 사람이 있겠나?김 : 농사짓는 제자라면 많이 사랑해주실 것 같습니다.이 : 만약 있다면 내가 아마 업고 다니지 싶어. 물론 그다음부터는 플라스틱 자를 들고 가르치겠지만.대담·정리 : 김강 (소설가) / 사진제공 : 이삼우

2022-08-08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된 지고의 最美”

□생동감 넘치는 세계 유일의 인공 석축물“이윽고 공단 같은 짙은 어둠 위에 뿌연 환영이 드러나심, 그 부드러운 돌 빛, 그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하신 어깨와 팔과 손길 놓으심, 쳐다보는 순간마다 분명히 알리시는 미소, 전신이 여명이 쪼여질 때는, 이제 막 하강하신 듯, 자리 잡는 옷자락 소리 아직 풍기시는 듯. 어둠은 둘래 둘래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 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태준의 수필 ‘여명(黎明)’의 일부 토함산에서 석불사(석굴암·이하 석불사)를 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유홍준 교수는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 됨을 이루는 지고의 최미(最美)”라고 극찬했다. 석불사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 이가 어찌 이태준과 유홍준 교수뿐이겠는가!유치환 시인은 ‘석불암 대불’에서 “목 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니/ 천년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라고 노래했다.미술적인 심미안이 부족한 필자의 눈에도 석불사의 석불은 놀라울 정도의 생동감이 느껴진다.‘우담바라’를 쓴 소설가 남지심은 “가까이에서 마주한 본존불의 얼굴은 분명 돌로 조각된 것인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 세포조직을 보는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 감은 듯 보이던 눈은 선명하게 뜬 상태였고 금방이라도 숨소리가 들릴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이었다”고 석불의 모습을 묘사했다.석불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세계 유일의 인공 석축물이고,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신라 조각 미술의 정점이다.석불사의 잘못된 이름인 석굴암이 널리 알려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석불사를 암자로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실상 석굴사원에 가깝다. 석굴사원은 기원전 2세기경에 인도에서 시작해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유행했다. 주로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절벽에 조성되다 보니 시내의 사찰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많은 석굴사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아잔타 석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국의 원강 석굴, 맥적산 석굴 등이다. 우리나라에도 석불사를 비롯해 굴골암이 있고 경주 남산 칠불암과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제2석굴암), 양산시의 미타암이 있다. 석굴사원이 발달한 중국이나 인도에 비해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한반도가 조각하기 힘든 돌인 화감암과 석질이 단단한 청석(靑石)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조각 난이도가 높은 화감암으로 마치 살아 꿈틀대는 것 같은 매끄러운 석불을 깎은 것을 보면 한국인들의 손재주가 얼마나 탁월한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석불사는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시기 재상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작품의 완성도나 신비롭기 그지없는 불상의 모습만 보면 여러 세기에 걸쳐 사랑받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석불사에 대한 기록은 빈약하기 그지없다.신라시대 국가적 사업으로 지어졌지만 고려 건국 이후 귀족 세계에서 멀어진 석불사는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 간간이 언급된다. 조선 중기 유학자인 정시한(1625~1707)의 산중일기를 보면 “석문 밖 양쪽 바위에 각각 불상 4, 5위씩 새겨져 있는데 기이하고 묘한 것이 하늘이 빚은 듯하다. 석문은 돌을 무지개처럼 쌓아 올렸으며 그 가운데에 커다란 석불상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모셔져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석불사가 거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숙종 29년(1703), 영조 34년(1758)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크게 중수했다는 정도가 전부다. □제국주의 통치를 위해 석불사를 이용한 일제조선시대에 석불사가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된 것은 한양이 도읍지가 되면서 신라시대의 중심도시였던 경주가 평범한 지방 도시로 위상이 떨어졌기 때문이다.불교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석굴암도 해발고도 565m 산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히고 방치되었다.조선 말기에는 곳곳에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빈 절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틈을 타고 도굴꾼들이 사찰 문화재를 마구 탈취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나마 석불이 높은 산중에 있어서 도굴꾼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1902년 8월 세키노 타다시,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 일본제국의 유명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지만 석불사는 방문하지 않았다. 그만큼 석불사는 역사 속에서 존재가 희미했다. 조선 후기인 1891년 풍양 조씨 가문에서 석굴암이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한 우체부에 의해 석불사가 발견된 1907년까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우체부는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까지 우편 배달을 가다 지금의 양북면 범곡리에서 능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석불사인지 몰랐던 그는 당국에 문화재처럼 보이는 물건이 있다고 신고했다. 당시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 사학자들이 석불을 찾았을 때는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했다.당시 조선은 일본과 서구 열강에 의해 수탈당하던 때라 석불암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던 시기였다. 하지만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던 일제는 석굴암에 주목했다. 비록 무너진 상태였지만 불교 조각의 걸작임을 알고 있었다.1910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산간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해 경성부로 옮긴 후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막상 해체를 시작해보니 돌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이전이 불가능했다.석불사의 발견과 함께 석불사에 대한 가치평가가 진행됐다. 일제는 석불사를 ‘조선고적도보’에 소개했다. 국어학자 안확의 글과 일본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미술사에서도 석굴암을 부각했다. 당시 일본 최고의 민예 이론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석굴암 조각에 관하여’에서 석불을 ‘영원의 걸작’이라며 찬사를 보냈다.일제가 석불에 대해 집착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석굴암 등 신라의 미술문화를 한반도 문화의 최정점으로 두고 이후 문화가 점점 퇴락해 조선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조선은 퇴락하는 국가이고 일제가 석굴암의 가치를 재발견해 보수해 줄 정도로 고도로 문명화되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잘못된 보수로 인해 결로와 습기 생기기도조선 총독 데라우치는 석불사를 시찰한 뒤 보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일제의 야심찬 유적 복원이 시작되었다.이로 인해 석불사의 석굴은 창건 이래 처음으로 완전해체되어 수술대에 놓였다. 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했다. 1914년 8월 말에는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했다.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덮어씌웠는데, 이는 나름대로 당대 최신 건축 기법을 이용한 첨단 수리 방법이었다. 문제는 콘크리트가 방수에는 탁월해도 방습에는 취약하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었다.콘크리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가 커져 석불 내부에 습기가 더 많이 차고 이슬이 맺히는 결로 현상이 발생했다. 게다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켰다.당시 공사를 주도한 사람들은 석공 전문가가 아니라 철도를 놓던 터널 공사 전문가였다. 당연히 석굴암에 의도된 설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이들이 방습을 위해 도입한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보수공사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출몰했다. 습기에 노출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탄산염과 칼슘염이 누출되어 화강암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1917년에는 누수와 습기가 심해져 바닥과 천장 위까지 물이 스며들었다. 천장 방수를 위해 다시 보수공사를 했으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습기가 심해지면서 천장에 푸른 이끼까지 생겼다. 석불의 보수공사 비용만 무려 2만2천726원이었지만 결로나 이끼가 끼는 현상은 바로잡지 못하고, 이끼 세척과정에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마모되기까지 했다.결로 현상은 해방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아 급기야 1966년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런 상태로 석불을 개방했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1976년에는 유리문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현재는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을 지나면서 보는 것만 가능하다. 습기와 바람에 따른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에는 현대 과학의 산물인 공기 순환 설비가 돌아가고 있다. 다만, 매년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예외적으로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날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마저도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금지된 상황이다. /최병일 작가

2022-08-07

오징어배 줄고 사람들 떠났지만… 바다는 여전히 빛난다

화양연화(和樣年華), 누구에게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있다. 석탄가루 묻어있는 검푸른 항구, 비좁고 가파른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추억으로 남아 있는 동해안의 묵호에도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 ‘동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할 만큼 풍요롭던 묵호항은 세월 속에 화려했던 시절을 묻어두고, 그 흔적만 묵묵히 간직하고 있다. 지금, 묵호의 바다는 그때와는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흑백사진처럼 바다마을에 펼쳐진다. △옛 어촌마을 묵호동과 검은 바다 펼쳐진 묵호항강원도 동해시의 먹빛처럼 검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묵호는 예전에 검은 새와 바위가 많아 포구가 까맣게 보였다. 그런 이유로 오진, 오이진(烏耳津)이라고 불렀다. 조선 현종 때, 오진에 큰 수해가 나자 강릉부사 이유응이 현장 시찰을 나왔다가 마을주민들과 촌장을 만났다. 유난히 검은 포구를 본 이유응은 마을 이름을 오진이라 부르는 까닭을 듣고,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곳에서 멋진 경치를 보며 좋은 글씨는 쓰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의 ‘묵호(墨湖)’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밤이면 오징어 배의 불빛으로 묵호의 바다는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하다.’라고 할 정도로 묵호 바다에서는 명태와 오징어가 많이 났다. 어획량이 풍부하니 묵호항은 일거리가 넘쳤다. 남자들이 오징어를 잡아 오면 아낙들은 오징어 배를 따고 내장을 다듬었다. 일손이 부족해 인부들이 몰려오면서 묵호동 산비탈에 슬레이트지나 양철로 지붕을 올린 판잣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섰다. 밤에 산비탈 언덕의 판자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마치 반짝이는 도시의 빌딩 숲 같았다.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산비탈 골목 ‘덕장길’에는 소나무로 만든 덕장에서 오징어, 대구, 명태, 가오리를 꾸덕꾸덕하게 말리는 비린내가 풍겼다.1960~70년대 묵호는 불꽃 같은 호황을 누렸다. 1941년 개항해 삼척 일대의 무연탄을 실어나르는 작은 항구였던 묵호항은 1964년 국제항으로 승격했다. 1968년에는 쌍용양회 대단위 시멘트 공장을 준공했다. 동해안 제1의 무역항이 되면서 석탄과 시멘트를 실어나르기 위해 전국에서 화주와 선원이 몰려들었다. 묵호는 이주민과 지역주민이 한 데 어울려 번성했다. 요정이 생겨나고 백화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술과 바람의 도시’, ‘유행의 첨단도시’가 됐다. 그러다가 1983년 동해항이 국제무역항으로 떠오르면서 묵호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명태도 더는 잡히지 않아 부산에서 냉동된 원양 생선을 사올 지경이었다. △벽화마을 묵호동 논골담길우뚝 솟은 등대가 한 가닥 빛을 비추는 등대마을. 하늘에 닿을 듯한 산자락 동네에는 발아래에 바다를 두고 살아온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가파른 비탈길이 온통 흙바닥이었던 붉은 언덕은 명태와 오징어를 나르는 지게와 고무 대야에서 흐른 바닷물로 질퍽해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마을은 줄줄 흘러내린 물 때문에 흙길이 논길처럼 질척거려서 ‘논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따개비 등껍질 같은 시멘트 바닥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온 주민들이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슬레이트집 담벼락에 묵호 이야기를 담은 벽화를 그려 ‘논골담길’ 벽화마을을 조성했다. 고단한 삶을 지게에 지고 이겨냈던 아버지들과 덕장에서 언 손으로 젊은 날을 보냈던 어머니들이 예술가들과 함께 무수한 이야기들을 마을에 그려냈다. 담화로 감성을 덧댄 소박한 마을은 색다른 여행지로 다시 태어났다.네 갈래로 나눠진 골목은 각기 다른 매력이 있다. 논골 1, 2, 3길을 수놓은 벽화에는 황금기를 보냈던 묵호항의 역사와 바다에서 살아가는 지난한 삶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펼쳐진다. 등대오름길에는 논골담길에 불어오는 새로운 희망과 바람이 담겼다. 등대오름길은 2013년 방영된 드라마 ‘상속자들’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주인공 은상이 어머니와 도망쳐 나와 살게 된 집의 오렌지빛 지붕과 짙푸른 바다색의 대비는 눈이 시리다. 언덕배기 골목길 주인 없는 대문에는 바다로 나간 이에 대한 그리움인지 홀로 남은 외로움인지 모를 눈물이 녹이 되어 흘러내린다. 해양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묵호등대. △빛으로 마을을 물들이는 묵호등대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오르다 보면 논골담길 꼭대기에서 드넓은 바다와 동해시를 굽어보는 묵호등대에 다다른다. 파리의 에펠탑처럼 어디서나 보이는 묵호등대는 1963년 처음 불빛을 밝혔다. 하루에 보리쌀이나 밀가루 한 되 정도의 품삯을 받는 아르바이트로, 남자들은 지게를 지고 여자들은 대야를 머리에 이고 자갈, 모래, 시멘트를 담아 나르며 건설했다고 한다. 2007년 해양문화 공간을 조성해 새로 지은 묵호등대는 동해를 항해하는 선박과 묵호항을 찾는 선박들의 길잡이이자, 푸른 동해와 백두대간의 두타산·청옥산도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아침이면 온몸으로 해를 맞이하는 등대는 한낮에는 바다 바라기를 한다. 밤이 오면 환한 불을 밝혀 항구를 빛으로 물들인다. △바다와 하늘을 즐기는 체험명소 도째비골 스카이밸리해랑전망대묵호등대와 이어진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에 들어서면 마을의 감성에 취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등골이 오싹해진다. 해발고도 약 59m 높이의 하늘 산책로, 스카이워크는 바다를 향해 난 바닥 일부가 유리로 만들어져 마치 허공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담대한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왕버들을 모티브로 한 슈퍼트리 봉오리 조형물 앞에서 소망도 빌어본다. 영원한 약속을 의미하는 쌍가락지 조형물과 도깨비 뿔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볼거리다.메인 타워에서 27m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자이언트 슬라이드’와 케이블 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스카이 사이클’을 체험하면 짜릿함은 배가 된다. 음식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도째비 아트하우스 ‘눈누난나’는 도깨비에 홀린 듯 거꾸로 세워져 있다.바다로 내려가면 도깨비방망이를 형상화한 85m 길이의 해랑전망대를 만난다. 해상보도교량의 관문인 파란 도째비터널을 지나 다리 위를 걸으면 묵호의 바다 내음이 코끝으로 밀려온다. 투명한 유리 아래에서 파도가 발을 적실 듯 몰아친다. 하늘에서는 봉오리였던 슈퍼트리 조형물이 바다 위에 만개한 꽃처럼 피어있다.어스름 해가 저문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묵호항으로 향한다. 어시장 좌판에는 자연산 횟감들과 다리가 튼실한 대게, 눈알이 싱싱한 생선들과 살이 반쯤 말려진 생선들이 넘쳐난다. 흥정하던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항구에 갑자기 짙은 해무가 몰려온다. 바다는 금세 자취를 감춘다. 항구에 정박한 배들과, 산비탈에 촘촘히 박힌 알록달록한 지붕과, 그 위에 우뚝 선 하얀 등대가 희미하다. ※여행메모생김새가 못나고 투박해 선창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곰치에 잘 익은 김치를 썰어 넣어 김칫국처럼 끓여낸 곰치국은 동해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다. 흐물흐물한 생선 살덩이는 입안에서 녹을 것처럼 부드럽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살이 아주 연하고 싱거우며 곧잘 술병을 고친다’라고 전해질 만큼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은 속을 확 풀어준다. 해랑전망대 맞은편에서 어달항, 묵호항까지 이어지는 해안가에는 식객 허영만이 다녀가 ‘백반기행’에 소개된 식당부터 곰치국의 원조임을 자랑하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묵호=글·사진 이솔 객원기자

2022-08-04

“지역미래 책임질 ‘5·5·5 프로젝트’ 반드시 성공 시킬터”

향후 고령의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이남철 군수가 얼마 전 임기를 시작했다. 어려운 경제상황과 코로나19의 재확산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어려움에 빠져 있는 현재. 고령군도 적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고, 향후 발전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등 당면과제가 적지 않다.이남철 군수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군수는 경기 침체와 인구 감소 등 해결해야 할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적극 대응할 것을 내외에 천명하며 빈틈없는 군정을 약속했다.‘들썩들썩 젊은 고령’, ‘매력 넘치는 대가야’, ‘스마트한 부자농촌’, ‘일취월장 지역경제’, ‘다함께 행복한 복지’, ‘군민중심 공감행정’은 이남철 지사가 지향하는 군정의 기본 방향.군민중심의 공감행정 실현과 약속한 것은 꼭 지키겠다는 다짐을 내놓은 이남철 고령군수가 이번 인터뷰를 통해 향후 4년간의 계획을 가감 없이 밝혔다. 아래에서 그 계획의 구체적 실천방안을 들어본다. -먼저 축하드린다. 군정을 시작하며 든 생각은?△새롭게 시작될 희망 고령을 염원하며 보내주신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46대 고령군수로서 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선거 과정에서 흩어져 있는 민심을 모아 오로지 군민화합과 ‘젊고 힘 있는 고령’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불안정한 세계 정세 속에서 경기 침체, 인구 감소 등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만만치 않은 위기 앞에 놓인 우리 고령군과 군민들을 위해 온 마음을 담아 열심히 뛰는 전심전력의 군수가 될 것을 약속드리고자 한다. 더 빠르고, 더 똑똑하게 빈틈없이 군정을 살피고자 다짐하고 있고, 공약 실현에 노력할 결심이다.-고령군의 미래 목표와 방향이 궁금하다.△포스트 코로나19 시대로의 전환과 함께 시작되는 민선8기다. 우리 군의 군정 목표는 ‘젊은 고령, 힘 있는 고령’이다. 침체된 경기와 인구 감소 등 시대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가겠다. 한층 젊어진 고령의 힘을 발산해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워진 고령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들썩들썩 젊은 고령’, ‘매력 넘치는 대가야’, ‘스마트한 부자농촌’, ‘일취월장 지역경제’, ‘다함께 행복한 복지’, ‘군민중심 공감행정’이라는 군정 계획을 민선 8기의 기조로 삼으려고 한다. 행정에서는 정확하고 똑똑하게 방향키 역할을 수행해 군민들과 함께 희망 고령을 그려갈 것을 약속한다.-역점적으로 추진할 사업은 어떤 것인가?△지역 경기 침체와 지속적인 인구 감소 문제 등의 시대적 숙제를 해결하는데 힘을 쏟으려고 한다. 이를 위해 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지역의 우수한 청년들을 육성하겠다. 더불어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우리 지역에 청년들이 북적이고, 생기가 넘쳐나는 고령을 만들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인구 5만 명 도시, 신규주택 5천 호, 청년인구 5천 명’이라는 ‘5.5.5 프로젝트’를 역점적으로 추진하고자 하고 있다.지역의 우수한 청년들을 육성하고 이들을 우리 군에 정착시켜 ‘들썩들썩 젊은 고령’을 만들어보겠다. 청년농부를 위한 ‘스마트 팜 정책’을 통해 청년 리더를 키워나가고, 청년주택 등을 더욱 확대해 아름다운 전원마을 조성에 힘쓰겠다. 또한, 청년드림센터 운영을 통해 창업·정착·일자리 등 다방면의 원스톱 지원을 넓혀감으로써 우수한 청년들이 안정적으로 우리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갈 것이다. 또한 스마트한 부자농촌을 만들기 위해 우수 농축산물의 안정적인 유통망을 확산시키고, 농업 시설과 시스템의 현대화, 농촌인력뱅크 운영, 스마트 농축산 클러스터 조성을 통해 미래농업에 대비하는 플랫폼을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도 지속하려고 한다. -‘5.5.5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추진 방안은 무언가?△이 프로젝트를 통해 우수한 지역 청년들을 육성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끌어들이며, 나아가 젊음의 기운으로 에너지 넘치는 들썩들썩한 고령의 미래를 그려나가고자 한다.먼저 6개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선도경제 구축에 힘쓰며 1만 여 근로자의 ‘직장도, 집도, 주소도 고령’ 운동을 즉시 추진하려 한다. 100개 기업에 1조 원의 과감한 투자로 일자리 3천개 창출 등 지속가능한 산업경제 도시 인프라도 갖추겠다.둘째는 신도시를 조성하고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확장 추진하며, 도시가스 공급과 마을 하수도 시설을 확대하겠다. 타운하우스와 전원주택단지를 조성해 인구 유입을 이끌어내는 등 사람 중심의 고령 발전 기반을 마련코자 한다.셋째, 대구~광주간 달빛내륙철도 고령역 유치에 적극 나서고, 김천~거제간 KTX 조기 착공을 추진하고자 한다. 국지도 67호선과 지방도 905호선의 4차선 확장, 대가야 하이패스 전용 IC 설치로 광역교통망이 제대로 갖춰진 사통팔달 교통의 중추가 되도록 하겠다.마지막으로 친환경 축산 스마트단지를 조성하고 가축분뇨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스마트 팜 확대 및 클러스터 조성, 농촌지원 전담 인력센터 설치를 통해 미래 스마트 농업도시를 만들어 부자농촌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대가야 문화관광’의 발전 방향도 궁금하다.△대가야 문화를 바탕으로 ‘라이트플라워 로드’와 ‘왕의 길’ 등 빛과 자연이 어우러진 역사 힐링공간을 조성해 새로운 문화관광 트렌드로 구축할 것이다. 또한 폐교와 유휴자원을 활용해 문화예술 특화지구를 만들고, 낙동강 줄기를 따라 은행나무 숲 힐링단지와 수변테마파크, 낙동강 달빛 휴양원와 철기로드, 낙동문화권 에코뮤지엄과 주을저수지 생태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자연친화적인 휴식 공간을 마련해 군민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 넘치는 문화관광 힐링도시로 만들어갈 예정이다.-향후 4년간 군정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군민중심의 공감행정을 실현하기 위해 정례적인 군민 소통 콘서트를 개최해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듣고 해결책을 모색할 생각이다. 또한 군민이 만족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신속하고 간결한 행정 절차를 통해 대군민 서비스 만족도도 향상시킬 것이다.또한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업무 추진과 사기 진작을 위해 열심히 일 잘하는 직원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투명한 인사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그들이 고령 발전에 보탬이 되는 일꾼이 되도록 이끌겠다. 공무원 스스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책임과 권한을 주고, 그 노력과 성과를 반영하는 조직문화를 만들고자 한다.군정 속으로 뛰어드는 ‘행동하는’ 군수, 군민들의 마음을 읽는 ‘공감하는’ 군수, 약속한 것을 지키는 ‘능력 있는’ 군수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고령/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2-08-03

“참나무는 금수강산의 핵심이지”

이삼우 원장과 나무와 숲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림(造林) 이야기로 이어졌다. 특히 지난 3월 초 울진, 삼척에서 일어난 대형 산불 때문에 조림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국내 산에 아까시나무와 소나무가 많은 이유, 그리고 앞으로 심어야 할 수종(樹種)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 : 조림 분야는 일반인에게 생소한 것 같습니다.이 : 우리나라 초창기 조림 사업의 주목적은 벌거벗은 산에 푸른 옷을 입히는 것이었지. 산을 푸르게 하는 것이 1단계였는데, 이때 아까시나무와 소나무를 많이 심었어.김 : 그래서 우리나라 산에 아까시나무와 소나무가 많군요.이 : 그렇지. 일단 푸르게 입히자, 했어. 다른 나무는 민둥산에서 잘 못 버티니까.김 : 일단 입히자? 그다음이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요.이 : 그다음은 2단계지. 2단계는 1단계를 바탕으로 참나무라든가 한 차원 높은 나무를 많이 심었지. 해마다 봄 건기가 오면 발생하는 산불만 해도 그래. 참나무 숲이 많으면 대형 산불의 원인인 수관화(樹冠火)가 잘 안 일어나. 왜냐하면 잎이 겨울에 모두 떨어져서 아무리 강풍이 불어도 산불이 공중으로 날아다니지 않거든. 지표에서 일어난 불은 별로 겁이 안 나. 멀리 빨리 퍼지지도 않고, 참나무 잎은 잘 타지도 않아. 상록침엽수로 인한 수관화가 제일 겁나지.김 : 수관화가 뭔가요?이 : 나무 상체에 불이 번지는 걸 말하는데, 주로 소나무를 빽빽하게 심은 지역에서 발생하지. 소나무 가지에 얹혀 있는 마른 잎이나 솔방울 같은 것들이 불덩이가 되어 100미터, 200미터 날아가서 여기저기 퍼트리니 큰불이 되는 것이라. 그래서 소나무를 망국수(亡國樹)라고 해. 산이 헐벗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하지. 헐벗은 산에는 소나무가 잘 살고 그게 또 밀림이 되어 무성하면 대형 산불로 이어지고 헐벗게 되니 망국수라는 거야. 포항도 단계적으로 수종 갱신해야 할 소나무 숲이 많은데, 저대로 놔뒀다가는 나중에 혼쭐날걸.김 :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이 : 그렇긴 하지. 그래도 걱정되는 지역이 여러 곳 있어. 특히 도로가 있고 마을이 있는 곳이 그렇지.김 : 시 당국에 조언하지 않으셨습니까?이 : 참나무는 국내 임업 행정가들한테 잡목 취급을 당했지. 내 말을 귀담아들었으면 참나무 숲으로 많이 바뀌었을 텐데. 그러면 울진, 삼척의 대형 산불 같은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왜 참나무라 했는가 하면 ‘참’이라는 말은 영어로 ‘파인(Fine)’이지.김 : 파인(Fine). 예, 훌륭하다, 좋다는 말이죠.이 : 그렇지. 훌륭한 나무다, 이 말이야.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는 말은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거든. 소나무 숲 갖고 어떻게 그게 돼? 소나무 숲은 그저 산 능선이나 척박한 토양 같은 데 띄엄띄엄 있어야 정상이지. 상록이 아닌 참나무에는 졸참, 갈참, 신갈, 떡갈, 상수리와 같은 다양한 품종이 있는데, 봄에 새잎이 돋을 때도 그 색이 특별히 아름다운 연둣빛을 띨 뿐만 아니라 가을 단풍 색상이 품격이 높아서 금수강산 소재로 핵심적이랄 수 있지. 게다가 산불도 잘 안 나고.김 : 원장님이 쓰신 다른 글에서도 읽었습니다.이 : 내가 칼럼으로 수차례 발표한 적이 있어. 그리고 산촌 노인들이 밭둑을 태우다가 산불 냈다고 감방에 잡아넣곤 하잖아? 애초에 대형 산불이 안 나도록 과학적, 생태적 조림으로 대비하면 될 거 아닌가. 예를 들면 은행나무 같은 것.김 : 은행나무요?이 : 산기슭 부분을 선발해 상수리, 떡깔나무나 은행나무로 수림대를 조성하는 거지. 은행나무 낙엽은 불이 잘 안 붙어. 겨울이나 봄에 잎을 주워 불을 붙여 봐. 잘 안 붙어.김 : 소나무 숲이 무성해서 산불이 잘 나는군요. 또 다른 단점이 있습니까?이 : 둘째는 소나무 숲이 무성하면 강물이며 바다 수질 상태가 나빠져. 계곡물을 위시해 강물 정수가 잘 안 돼 결국 바다 정수력이 떨어지고 말지.김 : 왜 안 좋아지나요?이 : 소나무는 침엽수인데 침엽수는 바늘처럼 가늘게 생겨서 퇴적층 만들어지는 속도가 참나무 숲에 비해 10분의 1도 안 되거든. 참나무 낙엽은 넙적넙적해서 빨리 쌓이는데 소나무 낙엽은 그러질 못해. 참나무 숲은 낙엽이 산골짜기 구석구석에 쌓여 눈이나 비가 오면 물을 잔뜩 흡수하는데, 그걸 다시 우려내듯 서서히 배설하지. 김 : 그러면서 정수를 하는군요.이 : 그렇지. 게다가 참나무 잎이며 도토리가 함유하고 있는 특별한 성분으로 정수해서 샛강을 거쳐 바다까지 내려보내는 거야. 졸참나무 같은 것은 단풍색도 고상하니 붉고 멋지지. 가을이 깊어질 때면 상옥에 있는 경상북도수목원부터 하옥의 옥계까지 펼쳐진 참나무 숲이 그야말로 장관이야.김 : 예, 꼭 가봐야겠습니다.이 : 떡갈나무는 단풍이 별로지만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 말이지. 반세기 전만 해도 일본에는 찹쌀떡 장수들이….김 : “찹쌀떡”, 이러면서 말이지요?이 : 그 시절 우리나라에도 겨울철 늦은 밤이면 종을 딸랑딸랑하면서 찹쌀떡을 팔러 다니는 장수들이 있었는데. 그 찹쌀떡을 떡갈나무 잎으로 싸서 파는 거야. 상하지 말라고.김 : 그래서 떡갈나무군요.이 : 좋은 점이 또 있어. 참나무 종류는 구황식물로도 좋다고. 상수리나무를 봐.김 : 도토리 말씀이지요?이 : 참나무 종류의 열매를 도토리라고 해. 상수리나무는 들판을 내려다보고 열매를 단다고들 하지. 그해 흉년이 들 모양이다 싶으면 도토리가 많이 열리고, 풍년이겠다 싶으면 조금만 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야.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이삼우 원장은 참나무만 좋아한다, 소나무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시게. 그런 뜻은 아니니.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오해야.김 : 그렇지 않아도 여쭈려고 했습니다. 기청산식물원으로 들어오는 길에 청하중학교 앞 관송전(官松田)을 보며 참 좋다, 정말 잘 가꾸셨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소나무를 망국수라 하시니 조금 의아했습니다.이 : 소나무 하나로 밀림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소나무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김 : 솔숲이 학교를 두르고 있어서 청하중학교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겠습니다.이: 내가 청하중학교를 인수하고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꽃나무를 심으며 아름답게 조경한 것이지. 솔숲도 공들여 가꿨어. 솔숲이 있어서 교직원과 학생들 기상이 늘 푸르지. 수령 200년 이상 된 노거수림(老巨樹林)은 아무나 관리 못 해. 조경수로 소나무가 인기를 누릴 때는 이 소나무들을 팔라고 서울에서 의뢰가 들어왔지. 그때 돈으로 한 그루에 1천만 원씩 주겠다고 해. 요즘 돈으로 치면 5천만 원쯤 되겠는데, 서울로 가져가고 싶다고 하더군.김 : 서울로요?이 : 광화문광장에 심겠다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지. 내가 우리나라에서 노거수회를 가장 먼저 창립한 사람이고, 노거수와 마을 숲을 보호해야 한다고 운동을 펼친 사람인데 그럴 수는 없지.대담·정리 : 김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사진 제공 : 김진호(사진작가)

2022-08-03

한 여름의 ‘밤바다’때론 농밀하거나… 때론 고요하거나…

7월 말을 지나 8월 초순이다. 무더위는 한국 어느 곳에서도 피하기 어렵다. 이 기간은 한국 사람의 절반이 여름휴가를 떠나는 시기이기도 하다.산과 계곡으로의 피서도 좋다. 하지만, 대부분의 휴가객들은 ‘피서’라고 하면 가장 먼저 푸른 파도 넘실대는 바다부터 떠올린다. 한국인들은 특히 여름날의 바다를 좋아한다.‘코로나19 사태’가 한국을 뒤덮기 전 경상북도와 강원도, 부산의 해수욕장엔 해마다 수십 만 명의 인파가 북적였다. 바로 지금 이 시기 즉 7월 말, 8월 초가 그랬다.다시금 재확산 추세를 보이는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감지한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국내 해변으로 휴가를 떠나고 있다.천정부지로 오른 항공료와 높아진 외국에서의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위험성이 비교적 안전한 한국 바다로의 여행을 선택하는 이유일 터.영일대해수욕장과 칠포해수욕장을 비롯한 포항의 해변과 영덕과 울진 등 경북 일대 해수욕장을 지나는 도로는 주말과 평일 할 것 없이 정체가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해변마다 넘쳐나는 휴가객과 짜증스런 날씨에도 바다로 향하는 가족과 연인의 얼굴은 환하고 발걸음은 가볍다. 이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누린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 아닐까. □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낮의 바다도 좋지만…지난 7월 31일 서울에서 긴 시간을 운전해 연인과 함께 포항으로 휴가를 온 K씨를 월포해수욕장에서 만났다.“1년 내내 도심에서 직장과 집만을 오가는 서울 사람들에겐 포항의 푸른 바다가 마치 꿈속 이상향 같이 느껴진다”는 그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와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며 올여름 휴가지로 포항을 선택했다고 한다.월포 해변 일대는 ‘갯마을 차차차’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다. 드물게 파도타기가 가능한 한국 해변으로도 이름이 높은 월포해수욕장은 물론, 인근 청하시장에도 드라마 제작의 흔적이 남아 있어 젊은 여행자와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실제로 그날 월포해수욕장엔 100여 명 가까운 이들이 파도타기를 즐기고 있었다. 초보부터 전문가 수준까지 다양한 서퍼(surfer·파도타기 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월포해수욕장엔 파도타기가 처음인 사람들을 위한 강습소와 장비대여점이 만들어져 있다. 비단 여름만이 아닌 겨울에도 적지 않은 서퍼들이 월포 해변을 찾는다는 게 파도타기 장비대여점의 설명.시내 한가운데 자리한 영일대해수욕장 역시 포항으로 여름휴가를 온다면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 중 하나다.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이나 강릉 경포대해수욕장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고, 각종 편의시설도 잘 준비돼 있다. 2km 가까운 긴 백사장과 다양한 형태의 카페와 주점, 한식부터 일식, 거기에 이탈리아 요리까지 두루 즐기는 게 가능한 영일대해수욕장은 수심이 낮아 어린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그저 그만이다.영일대 해변에서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건 한국 사람만이 아니다. 적지 않은 외국인들도 구릿빛으로 몸을 태우며 공놀이를 하는 모습을 바닷가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국적 풍경까지 선사하는 것. □ 북적이는 한낮의 해변이 아닌 고요한 밤바다에선…취향과 성향의 문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 8월 초순 한낮의 바다는 관광객과 여행자들이 북적일 수밖에 없다.인파 넘치는 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한낮의 해변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낮의 바다에선 찾아보기 힘든 고요와 한적함을 원하는 여행자가 있다면 밤바다로의 산책을 권해보고 싶다.‘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이다. 필리핀 보라카이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눈처럼 곱고 하얀 모래가 깔린 보라카이 화이트비치의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수영을 하거나, 요트를 빌려 먼 바다로 나가 시원한 바람을 맞거나, 비치발리볼을 구경하거나, 선탠을 하거나…. 낮의 보라카이 해변은 수천 명의 인파로 시끌벅적했다.바로 그 해변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건 혼자서 산책을 나간 밤바다에서였다. 자정을 넘긴 시간, ‘언제 이곳이 그렇게 북적였던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한 밤의 해변은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선물해줬다.낮에는 들리지 않던 파도소리가 너무나 선명했고, 물결에 부딪쳐 속살거리며 굴러가는 조그만 자갈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나 홀로 원시의 풍경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쓸쓸했지만, 그 쓸쓸함이 좋았다.연이어 오래 전에 읽은 이성복(70)의 시 ‘바다’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런 노래다.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나는 달아나지 않고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서러움이 숨고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흰 물거품 입에 물고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밤의 해변‘바다’라는 제목을 달고도 바다가 아닌 ‘서러움’에 포커스를 맞춘 이성복의 시는 인간의 본질이 결국은 희열이 아닌 슬픔에 있다는 걸 문학적으로 형상화 한 절창이다.파도를 서러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건 시인만의 능력이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이라고 왜 밤바다를 보는 저마다의 감상이 없겠는가? 고요한 밤의 해변은 누구에게나 시적 영감을 주는 힘을 가졌다.영일대해수욕장과 월포해수욕장도 다를 바 없다. 휴가객이 북적거리는 낮의 해수욕장을 피해 밤늦은 시간 해변을 거닐어본다면 한낮엔 듣지 못했던 바다의 소리와 인파 속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미세한 움직임을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지난밤 영일대해수욕장을 거쳐 카페 거리가 형성돼 있는 여남동까지 방파제를 따라 30분쯤 걸었다.인적이 드물어진 그곳엔 열대야임에도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물새 몇 마리가 졸고 있었다.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에서 커피 하나를 사들고 한참 동안 일렁이는 바다의 조용한 몸부림을 바라본 시간. 낮의 해변에선 맛보지 못한 충일감이 몸을 감쌌다.소설가 장정일은 ‘누군가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썼다. 이걸 이렇게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밤의 바다를 응시한다는 건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라고.영일대해수욕장의 밤보다 더욱 농밀하고 원시적인 밤 풍경을 원하는 여행자도 있을 법 하다. 그렇다면 포항 장기면 신창리 해변으로 야간 산책을 가보면 어떨까 싶다.인적은 더 드물고, 바다와 백사장이 들려주는 여름밤의 소리를 더 미세하게 포착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신창리 해변이다. 때론 무서우리만치 고요하고 괴괴한 어둠도 그곳에서라면 낭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아름다움과 낭만은 한낮의 해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밤바다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는 2022년 여름휴가를 계획해보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08-02

“행복을 음미할 줄 알려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

한 분야에 평생을 몸담은 이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철학서다. 인생의 벽 앞에 먼저 부닥쳐본 누군가의 경험담만큼 실속 있는 지혜는 없다. 앞에 놓인 갈림길을 동시에 갈 수 없지만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통섭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어느 시구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며, 타인의 삶을 경청하는 것은 또 다른 우주와 조우하는 일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공동체의 희망은 잘 듣는 힘에 있다. 마음을 다해 듣고 쓰겠다. 편견 없이 질문하고, 귀 기울여 공감하며, 왜곡 없이 쓰는 겸손한 기록자가 되겠다. 한국인의 행복수준은 경제력이나 복지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 올해 유엔 세계행복 보고서가 발표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46개국 가운데 59위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다. 심지어 전 세대에서 행복도보다 불행도가 높게 나타난 설문조사도 있었다. 코로나19와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삶의 질은 더 나빠졌다.행복보다 불행을 더 가까이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 여기 행복을 찾아 길벗하자는 인문학자가 있다. 포항에서 인문학 공동체 ‘열린행복아카데미’를 개설해 14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박희택 원장이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불교시민사회운동에 몸담았으며, 수녀들이 운영하는 복지시설 마리아의 집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행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지만 정작 행복하다는 사람은 드물다.△“사람들은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도 불행의 원인들을 향해 달려가고, 행복을 바라면서도 무지하기 때문에 행복의 원인들을 원수처럼 물리친다”는 말이 있다. 행복하고 싶으면 이미 주어진 행복의 원인들을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열린행복아카데미’가 그런 곳인가.△‘열린행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행복이며, 풍성하게 열매 맺는 행복을 의미한다. 2009년 8월부터 길벗들과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시작됐다. 우리 시대의 3대 위기를 생태, 인성, 빈부로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생명공경, 인문공부, 복지이타(福祉利他)의 실천을 추구한다. 독서클럽, 인문학당, 사회복지회 등을 부설기관으로 두고 있다.-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공부하는 이유가 있나.△혼자 읽어서 도달할 수 없는 지혜를 같이 읽으면 도달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촉진’ 현상이다. 한 독서운동가의 말처럼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 혼자 읽다 보면 내 수준에 지식을 가두게 된다. 종종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책에 나온 대로 바뀌길 강요하게 되는 이유다. 소속감과 친밀감이 넘치는 공부모임을 경험하는 일 또한 의미가 크다.-생명공경과 인문공부와 복지이타를 설파하지만 알고 보니 정치학을 전공했더라. 현실정치는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된지 오래인데.△정치학은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을, 정치학은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윤리학을 정치학의 입문이라 한다. 아버지의 영향인지 공동체의 행복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 우리 집 사랑방은 밤마다 북적거렸다. 담배연기가 자욱하도록 시국담론이 이어졌고 나는 어른들 틈에서 귀 기울여 들었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받아봤다. 아버지는 인근 마을을 아울러 관혼상제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나라 돌아가는 일에 늘 관심이 많은 향촌 지식인이었다. 그런 영향으로 정치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동양정치사상에 매료되어 문사철(文史哲)을 두루 공부했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대학에서는 복지학을 가르쳤고 유교와 불교, 노장사상에 관한 강의도 한다. 이렇게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이도 드물 듯하다.△복지학은 행복학이다. 박사논문에서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이 불교에 기초한 복지정책임을 규명했다. 역사적 복지정치학을 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해 정치학과 복지학을 거쳐 다시 인문학으로 귀결됐다. 인문학은 인간 본연의 길을 모색하는 학문이니, 다른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여도 늘 인문의 맥락 위에 있었다.-어릴 적에 어떻게 고전을 접했나.△60년대 문교부가 고전읽기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했다. 시골학교에서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이 학교 명예를 걸고 출전했다. 문교정책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게 한 아주 전향적인 정책이었다.부모님 옆에서 밭일을 거들며 ‘박씨부인전’이나 ‘삼국유사’를 얘길 해드리면 크게 흐뭇해하셨다. 고향이 경남 창원군 대산면인데, 고전읽기 군 대회에서 성과를 얻고 도 대회까지 출전했다. 선생님 댁에서 합숙까지 했었다. 일찍부터 고전을 접해선지 군대에선 내무반에 뒹굴던 ‘노자’와 ‘맹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경주, 포항과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 80년대부터 불교시민사회운동에 참여했고,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 전국불교운동연합, 참여불교재가연대, 종교평화위원회 등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하다가 불교 종립대학인 위덕대학교 개교(1996) 준비과정에 참여했다. 문교부장관을 지낸 손제석 초대 총장을 도와 대학 아이덴티티 작업을 하고 기획업무를 초기에 7년간 맡았다.박 원장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스스로 내세우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를 빛내길 잘 하는 사람이 있다. 박 원장은 분명 후자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에서 전쟁고아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본 거인 남대영 신부의 자취를 정리하고, 조선시대에 여중(女中)군자로 불린 장계향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남대영 루이 델랑드 신부에 관한 학계의 사실상 첫 논문 저술자라고.△본심(本心)에 바탕하여 인연이 성숙되었다. 경주에 내려와서 줄곧 인근 포항에 있는 큰 공동체인 사회복지법인 성모자애원에 관심이 갔다. 그러던 차에 사회복지학부에 수녀 두 분이 편입했다. 설립자 남 신부님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이 거의 안 된 상태여서, 자료를 요청하고 목록을 작성해서 연구에 들어갔다. 2012년에 신부님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다. 지역사회에 반향을 일으켜 이듬해 ‘포항을 빛낸 인물’로 남대영 신부가 선정되는 계기가 됐다.-가톨릭 신부이기에 일반 시민들은 종교지도자로 범주화하지만, 한국 사회복지 역사로 보면 ‘남대영복지’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로 선구적 인물이라고.△남대영 신부(1895~1972)는 한국의 주요 수도회인 예수성심시녀회와 성모자애원을 설립한 한국 사회복지의 선구자이다. 한국전쟁기에 포항 송정리에서 800여 명의 전쟁고아와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폈다. 당시에는 한국 최대 규모의 복지시설이었다. 1968년 포항제철에 자리를 내어주고 현재의 대잠동으로 이주할 당시 건물이 무려 35채가 넘었다. 신부님은 생의 마지막까지 헌신하다 포항에 묻혔지만 조명이 덜 되어 안타깝다.-수녀님들과 유럽으로 성지순례도 다녀왔다고 들었다.△2013년 수녀님들의 성지순례에 연구자로 포함시켜 주셨다. 수녀님 12명에 남자는 ‘아름다운 사람 루이델랑드’를 쓴 안병호 작가와 나뿐이었다. 남 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노르망디 빠리니와 성모발현지들, 이탈리아 가톨릭 성지를 12일간 순례했다. 시녀회 총원(대구)에 건립된 남대영기념관에 가면 빠리니홀이 있는데 그 이름도 내가 제안했는데 수도회에서 받아줬다.-장계향학의 대표학자로도 불린다. 어떻게 연구하게 됐나.△장계향(1598~1680)은 여중군자로 불린 유일한 인물이다. 경북도는 경북여성인물 선양 제1호로 장계향을 선정했지만 초기에는 교육프로그램 정도만 운영했다. 2010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객원연구위원으로서 참여해 장계향의 삶과 정신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나섰다.-한글로 된 최초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의 저술 이외에도 업적이 많은가.△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 즉 군자는 한 가지 덕성만 갖춘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꼭 부합되는 인물이 장계향이다. 현모양처는 물론이고, 퇴계학파의 학맥을 잇게 한 교육자이며, 시서화(詩書畵)에도 능했다. 조선 중기 전란기에는 도토리죽을 끓여 구휼에 나선 사회사업가였다. 중용 사상가와 조리 과학자의 면모도 있다. 경북 영양의 아름다운 두들마을과 수비지역을 문화적으로 개척한 중심도 장계향이다. 장계향학을 집대성한 세 권의 총서를 기획했고, 두들마을에 있는 장계향 추모공간의 명칭을 짓는데도 역할을 해서 보람됐다. 영남대학교가 개설한 한국여성리더십학과에서도 장계향학을 강의했다.- 뭘 하나 파고들면 끝을 보는 편인데, 더 조명하고 싶은 인물이 있나.△근래에는 영성 대가 헨리 나우웬의 저서를 촘촘히 읽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한 포항의 거인 남대영과 여중군자 장계향, 그리고 현대 한국밀교 중흥조인 회당 손규상(1902~1963)을 ‘내가 만난 행복리더’라는 이름으로 한 권에 묶는 작업을 하고 싶다. 학문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바는 유불도기(儒佛道基)를 아우르는 회통(會通)인문학의 성과를 내는 것이다. 종교는 이념의 궁극이라 양보가 없다. 회통하고 대화해야 갈등이 사라지고 평화가 온다. 종교를 잘못 믿으면 자칫 허위와 환상에 빠지기 쉬운데, 이를 인문정신으로 초극(超克)하는 길을 밝히고 싶다.-인터뷰 내내 생각거리들을 던져줘서 드넓은 인문의 세계를 여행한 느낌이다. 꿈꾸는 인문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가.△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남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군자보살’이라고 칭하곤 하는데, 군자보살은 스스로 행복하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인류가 축적해온 지혜를 통해 오류를 줄이면서 행복해지는 공부가 인문학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공부한 바를 현장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내년에는 독서와 강의를 결합한 ‘열린행복독서대학’을 열 계획이다. 함께해온 길벗들이 강사로 참여해 그동안 쌓은 인문소양을 나눌 것이다. 길벗들 가운데 각 분야 전문가가 많다.박희택 원장은한양대학교에서 정치학을 배우고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위덕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와 사회복지대학원 원장을 지내면서 복지정치론과 사회복지정책론 등을 가르쳤다. 불교아카데미 원장, 성모자애원 이사, 포항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장계향아카데미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회복지법인 우리공동체 대표이사이다. 2009년부터 ‘열린행복아카데미’를 설립해 길벗들과 ‘생명공경·인문공부·복지이타’의 길을 걸으면서, 강독과 강연, 칼럼과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인문향기를 전하고 있다. 배은정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2-08-01

‘호국도시 칠곡’ 곳간 채우고, 경제 살리고, 군민 늘린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최근 ‘탈권위주의’소통 행보로 세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주민들과 직접 소통하는가 하면 군수실을 방문한 손님을 위해 직접 커피를 내리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김 군수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경직된 조직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직원들의 창의성을 끌어낼 수 있는 수평적 소통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CEO형 군수’를 표방한 김 군수는 경직된 공무원 조직이 먼저 변화와 혁신을 해야만 민선 8기 군정 비전인 ‘곳간 채우고, 경제 살리고, 군민 늘리고’를 현실화 시킬 수 있다고 본다.취임 한 달을 맞은 김 군수를 만나 그동안의 느낌점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최근 파격적인 행보로 관심을 받고 있는데, 기분이 어떤지.△주위에서 파격적인 행보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좀 당황스럽다. 출·퇴근길에 자전거를 타는 것은 지난 20년동안 해온 나의 일상이다. 규칙적인 운동으로 가장 좋은게 출·퇴근길에 자건거를 타는 것이여서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자건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칠곡군에 와서 자전거 출·퇴근의 불편함이 있다면 거리가 5∼10분거리밖에 안된다는 점이다.그래서 운동을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평소 차로 이동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방치된 쓰레기더미가 가장 눈에 잘 들어와 군청에 연락해 좀 치워달라고 부탁한다. 가장 큰 장점은 많은 주민분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한번은 80이 넘은 할머니가 취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 많은 분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소감은.△선거에 당선돼 군에 들어오니 민간조직하고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민간기업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발탁인사로 국장도 시켜도 되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선 TF팀을 만들어 일을 빨리 진행시킬 수도 있는데 여기는 조례, 기존의 규정 때문에 빨리빨리 일을 진행 할 수 없다는 점이 사실 좀 갑갑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것이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런 부분들이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공직에 들어와 보니 내부적으로 자율성이 좀 더 많아져야겠다고 느꼈다. 사고가 좀 유연하지 못한 부분과 불필요한 절차도 많은 것 같다. 예를 들면 내가 간단한 인사만 하면 되는 자리인데 과장, 국장이 모두 다 나왔있다. 난 이런 것이 불편하다. 그 시간에 일을 해야할 사람들이 불필요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느낀다. 꼭 필요한 자리에만 나왔으면 좋겠다.내가 군수실에서 손님을 위해 직접 커피를 내리는 것도 그 시간에 비서도 자신의 업무를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앞으로 조직의 유연성, 탄력성 등만 조금 바꿔 나간다면 절차는 복잡하지만, 전국 어느 행정기관보다 혁신적인 기관이 될 것으로 믿는다.-칠곡의 가장 큰 현안은.△누가 뭐라해도 경제다. 경제는 칠곡만의 문제가 아니고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다. 살림이 나아져야 근심걱정이 덜어지는 것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나라에서도 기껏 했는 일이라는게 돈 나눠주는게 전부였다. 물론 돈을 나눠주는게 마중물 역할은 하겠지만 결국 경제가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경제를 유기적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튼튼한 일자리부터 필요하고, 제대로 된 사람도 필요하고, 인구도 모아야 한다.실제 기업 사장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만 있으면 지금 수출의 두배는 하겠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지금 사람들이 전부 수도권으로 떠나니 일할 사람 구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래서 직장과 주거가 한 곳에 있는 직주근접을 실현시키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생각이다.우선 지역이 특히 칠곡이 얼마나 생활하기 좋은 곳인지를 알리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살기 좋은 곳, 교육시키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자연스럽게 인구가 늘어나도록 할 생각이다. 자연스럽게 인구가 늘어난다면 도드라지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시 승격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또 시 승격이 되지 않더라도 이렇게 우리만의 살기좋은 환경으로 변화해 간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지역의 균형발전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 것인지.△칠곡은 왜관을 중심으로 북삼, 석적 등 지역간 균형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앞으로는 이런 문제점들을 하나씩 해소해 나갈 것이다.대중교통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북삼의 경우 대구 광역철도가 곧 개통이 되기에 율리택지지구와 같은 비중 있는 발전 전략이 나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석적의 경우는 구미공단의 배드타운 역할을 해왔는데, 교통불편이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였다. 그래서 석적구미하이패스IC, 석적에서 북삼역을 광역철도망을 이용할 수 있는 버스노선, 도로확장 이런것들을 통해 새로운 변화을 이끌 계획이다.새로운 교통망은 지역균형발전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것이다. 이를 통해 북삼, 석적, 왜관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가지면서 서로 상생할 수있는 여지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천, 동명의 경우도 지역의 반이상이 그린벨트로 지정돼 하고 싶은게 있어도 하지 못해왔다. 하지만 최근 대구의 발전중심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조금씩 옮겨오면서 반사이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군부대 유치를 공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군부대 유치를 그린벨트 내에 성사시키게 되면 도시 자체가 지천 자체가 젊어지게 되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은 주민등록상의 인구도 좋지만 생활권 인구도 중요하다. 여기와서 먹고 쓰는 사람이 중요하지 주민등록만 옮겨놓고 먹고 쓰지 않는다면 지역 경제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근 이승만 전 대통령과 트루먼 미국 전 대통령 동상 설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트루먼 전 대통령은 아시아 끝에 있는 대한민국을 위해 미군을 참전시킨 사람이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사회주의로 가느냐 자유민주주의로 가느냐에 있어 자유민주주의를 택해 그 길을 가도록 기여한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에서 정말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 일생 전체를 다 논할 수는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만주군 이야기가 있고, 백승엽 장군도 간도 임시정부 이야기가 있다. 한 인물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생 전체를 다 논할 수는 없다. 나 조차도 살면서 낯 부끄러운적이 얼마나 많은 적이 모른다. 이 분들이 일했던 부분을 조명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또 칠곡군은 호국의 도시이다. 호국의 도시에는 100점 만점의 호국의 주인공, 60점 70점 주인공, 50점의 주인공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분들을 모셔놓고,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토론회, 학술대회를 열 수 있어야만 진정한 호국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저는 호국과 관련된 모든 이슈를 여기 호국의 도시 칠곡에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상에 계란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도 칠곡에 와서 이야기하고, 태극기부대도 와서 이야기하고, 공론의 장이 되어야한다. 그래야만 칠곡이 진정한 호국의 도시가 되지 않겠나. 순혈주의(純血主義)로 이사람 빼고 저사람 빼고 하는 것보다는 호국과 관련된 이슈들은 호국의 도시 칠곡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이야기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본다.칠곡/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2-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