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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공감의 마법을 찾아서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3-01-17 19:24 게재일 2023-01-1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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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볼 만한 영화 2편
‘오베라는 남자’는 명절에 따스함을 선물할 영화다.

떠났던 가족이 돌아오고, 잊고 살았던 친척간의 정을 확인하는 명절. 인간 모두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2023년 설날이 눈앞이다. 이런 날, 좁은 거실에 북적북적 모여 앉은 사람들이 영화 한 편을 골라 함께 보는 것도 피붙이의 따스함을 새삼 느끼게 하는 방법 중 하나가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사회. 노인은 젊은이를 이해하기 힘들고, 청년은 윗세대를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선 상대의 참모습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터. 아래 언급하는 두 영화가 그 노력에 힘을 보태 줬으면 한다.

 

인간의 체온을 실감하게 해주는 영화… ‘오베라는 남자’

한국인들에겐 멀게만 느껴지는 북유럽. 거기에 자리한 나라 스웨덴은 ‘사민주의 정책’으로 인해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드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완벽한 복지만으로 인간의 개인적 외로움과 고통까지 완벽히 치유할 수 있을까? 영화 ‘오베라는 남자’는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여기 일생을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원칙주의자가 있다. 스웨덴 나이로 59세이니 한국 나이로는 회갑을 앞둔 중년. 사람의 생에 왜 부침(浮沈)과 굴곡이 없을까. 하지만, 지금까진 행복하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살았다. 자신만큼 착하고 성실한 아내가 곁에 있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열차 청소부라는 직업도 있었다.

그런데, 겨우겨우 곁에 묶어둔 ‘행복’이란 단어가 일순간 증발해버린다. 암으로 아내가 죽고, 16살부터 43년간 근무한 직장에서 해고당한 것. 왜 불행한 일은 꼭 연이어 일어나는 것일까? 오베(롤프 라스가르드 분)는 갑자기 자신의 삶에 틈입한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에 죽기로 결심한다. ‘춥고 음습한 나라’ 스웨덴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은 국가다. ‘오베라는 남자’는 자살을 결심한 쉰아홉 사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삶의 따스함과 의미를 다시 찾게 되는지를 느리고, 편안한 화면에 담아낸다. 그 과정을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스피디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조율하는 하네스 홀름 감독의 역량이 만만찮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체온이 1도쯤 올라가는 건 억지스러운 눈물이나, 작위적인 감동 강요가 아닌 ‘삶이란 언제나 죽음보다 따뜻한 것’이란 메시지를 영상에 담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감독의 자연스러운 연출력 때문이다. 눈에 띄는 전작을 만든 바 없는 이름 생소한 감독과 더불어 ‘오베라는 남자’를 떠받치는 힘은 그들 역시 한국 영화 관객들에겐 무명에 가까운 조연들이다. 오베의 이웃에 살면서 다소간은 고집불통이자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에게 인간적 따스함을 선물하는 사람들.

고집불통 노인의 인간미 되찾기를 다룬 ‘오베라는 남자’.
고집불통 노인의 인간미 되찾기를 다룬 ‘오베라는 남자’.

그 중 기자가 눈여겨본 배우는 이란 출신 이주여성으로 분한 바하 파르스. 오베로 하여금 “그들을 돕느라 죽을 시간도 없다”고 푸념하게 만드는 가족의 엄마 역인데, 그녀를 포함한 딸들의 연기는 배꼽을 잡게 하다가도 일순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오베의 아내를 연기한 배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낭만적인 사랑이 거세된 21세기에 돈 한 푼 없이 낭만과 사랑만으로 결혼에 이르는 과정과 교통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상대에 대한 믿음이란 정신적 힘으로 이겨내는 감동적인 영상은 이 영화의 동명 원작소설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든다.

‘절망과 고통에 빠진 인간을 구하는 것은 신(神)이 아닌 인간’이란 문장은 무신론자들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멀리 있는 신이 아닌 가까이 있는 인간(오베의 이웃)이 죽은 아내가 그리워하며,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회사에 분노하던 또 다른 인간을 자살의 유혹에서 구한다. 그 과정은 한없이 따스하고, 그래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 인간인 우리의 체온을 따뜻하게 올려준다. 오늘, 내 삶이 가치 없다는 자학과 비탄에 빠진 이들, 죽음으로써 현재의 고뇌와 고독이 해결될 수 있다는 슬픈 착각에 빠진 이들에게 ‘오베라는 남자’의 스웨덴식 희망 되찾기 방식을 권하고 싶다.

 

 

‘싱 스트리트’의 주연을 맡은 젊은 두 배우. /영화 홈페이지
‘싱 스트리트’의 주연을 맡은 젊은 두 배우. /영화 홈페이지

권력과 돈보다 중요한 건 젊음이고 청춘… ‘싱 스트리트’

미사여구(美辭麗句) 생략하고 간략히 말하자면 이것은 첫사랑에 빠진 열여섯 소년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獻辭)’다. 그 찬양의 재료로 사용된 것은 음악과 열정.

누가 있어 감히 ‘청춘은 아름답다’는 명제에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는 문학을 통해, 잉그마르 베르히만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를 통해 부러움과 찬사를 바친 게 바로 ‘청춘’이다. 때론 한 청년의 넘치는 에너지가 지구 전체를 덮는 기적을 부르는 시절. 존 카니 감독의 영화 ‘싱 스트리트’는 바로 이 청춘과 청춘의 파생어 첫사랑으로 채색된 아름다운 필름이다. 지금 청춘을 사는 이들은 느끼지 못하거나 애써 모르는 척 하지만, 이미 청춘을 지나온 사람들에겐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애틋함을 부르는 단어들.

1985년 아일랜드 더블린. 몰락한 집안의 경제형편 탓에 교칙 엄격한 가톨릭계 학교로 전학을 가게된 코너(페리다 월시 필로 분). 교장 선생님은 등교 첫날부터 구두의 색깔로 시비를 걸고, 불량스런 동급생은 멱살을 쥔 채 협박을 일삼고, 실직자 아버지는 아들이 처한 현실에 입을 다무는 짜증스런 상황. 그러나, 어떤 시간 어느 공간에서도 구세주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한 살이 많은 열일곱 모델 지망생 라피나(루시 보인턴 분)의 모습에 첫눈에 매료되는 코너. 코너는 단도직입 다가가 라피나에게 묻는다. “너, 우리 밴드가 제작하는 뮤직비디오 출연할래?” 그리고는 당시 유행하던 노르웨이 밴드 아하(A-ha)의 노래를 불러준다. 테이크 온 미(Take on me)다.

자 앞으론 어떻게 될까? 코너의 첫사랑이 결실을 맺으려면 라피나 앞에서 큰소리 친 것들이 현실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소년은 아직까지 작사나 작곡을 해본 적이 없고, 뮤직비디오 역시 만들어봤을 턱이 없다. 여기서 코너를 구하는 건 ‘싱 스트리트’를 만든 감독 존 카니다. 다른 영화 제목을 빌려오자면 ‘카니의 코너 일병 구하기’는 영화의 핵심 키워드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역시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와 제임스 조이스에 필적하는 능력을 코너에게 선물한다. 단 몇 달 사이에 자신에게 숨겨져 있던 빼어난 작사 능력을 확인하는 코너. 코너의 학교 친구로 등장하는 만능 악기연주자 에먼(마크 맥케나 분)에게는 U2의 보노와 시네이드 오코너(이 두 뮤지션 역시 아일랜드 사람)처럼 매력적인 곡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영감을 선사하는 건 존 카니 감독이 영화의 재미를 위해 지급한 보너스다. ‘싱 스트리트’는 진앙지(震央地) 불분명한 가슴 떨림과 설렘을 수시로 소급해낸다. 라피나를 향한 코너의 애틋한 마음과 코너를 바라보는 라피나의 사랑스런 눈빛은 관객이 경험한 청춘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고, 둘의 입맞춤과 포옹이 주는 따스함을 함께 느끼게 되는 것.

청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영화 ‘싱 스트리트’.
청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영화 ‘싱 스트리트’.

젊은 관객은 물론이고, 나이 지긋한 영화팬들까지 영화와 온전히 동화되는 보기 드문 진경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또한, ‘싱 스트리트’는 악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흔치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고집불통의 교장도, 무능력자 아버지도, 히키코모리에 가까운 코너의 형도, 급우를 괴롭히는 불량 학생도 내면을 파고들면 사실은 착한 사람임을 장면 곳곳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 해서, 이걸 ‘착한 영화’라고 불러주고 싶다.

이심전심의 또래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우정을 나누고, 형에게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배우고, 무심한 듯 보였던 부모에게서 신뢰를 확인하고, 라피나를 통해 사랑이 가진 위대한 힘을 깨닫는 코너. 그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진화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해서, ‘싱 스트리트’는 빼어난 성장영화라 불러도 좋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조그만 요트에 몸을 싣고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를 건너 영국 런던으로 향하는 코너와 라피나. 둘의 손에는 노랫말을 적은 수첩과 허술한 모델 포트폴리오만이 달랑 들려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같이 있다는 것이 좋아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둘. 런던으로 간 어린 연인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1985년 영국은 마가렛 대처가 통치하던 대량실업과 구조조정의 시대. 아직 10대인 코너와 라피나가 거기서 제 역할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갈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둘에게는 입맞춤 한 번만으로 런던 전체의 가로등을 환하게 밝힐 청춘의 에너지가 있는데. 그 청춘은 대통령의 권력으로도, 재벌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인데. 그 에너지만으로도 둘의 앞날은 밝지 않았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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