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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마주하는 삶 속 문제, 영화서 찾다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3-01-03 19:44 게재일 2023-01-0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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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고 특정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과 빛나는 꿈을 이야기하는 새해가 밝았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엔 이 모든 꿈과 희망이 현실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누군가 말했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고. 여성 특유의 포용력과 이해심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검은 토끼’와 함께 온 새로운 1년이 시작됐다. 여성의 삶을 소재로 여성들이 주연한 영화 2편을 소개한다. 막막한 어두움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꿈과 희망을 발견하길 기대하면서.

 

여직원들의 연대가 이뤄낸 기적…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8만7000원과 250만원.

기억 속의 자리한 1990년대 풍경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무렵. 작은 섬에서 도시로 온 고졸 여성 노동자를 만났다. 8만7000원은 그 친구의 월급이었다. 잔업과 특근까지 했음에도 그 돈은 일당이 아닌 한 달치 임금.

250만 원은 같은 해 방송사 뉴스에 등장한 이른바 ‘압구정 오렌지족’의 한 달 용돈이었다.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그 아이가 말했다. “아버지는 제가 달라는 돈은 언제나 주니까요.”

‘평등’은 교과서에 나올 뿐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기자와 같은 동네에 살던 A는 1989년 중학교 모의고사 성적이 전국 2.5% 안에 들었음에도 여자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아이의 친구 하나는 울면서 고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치는 공장으로 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수학 공식과 영어 단어를 외웠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가난 탓이었다. 가난은 사람의 기를 죽인다. 한 달에 겨우 8만7000원을 벌면서 자신보다 30배의 돈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대들기란 쉽지 않다. 그게 ‘계급’이다. 그 상황에 접해보지 않은 이들은 엄연한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난에 의한 주눅은 치유도 어렵다.

그럼에도 여기 용기를 가진 월급 8만7000원의 여성들이 있다. 용기가 발현된 사건은 아주 단순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용기는 세상을 바꾼다. 자그마치 1억 원이나, 10억 원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두려움을 의식적으로 떨쳐낸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아무 것도 가지 못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에게 안간힘을 다해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20세기를 아프게 반추하게 한다.

어떤 일류대학 졸업자보다 명료하고 정확하게, 요즘 말로 ‘쿨 하게’ 회사 일을 처리함에도 겨우 대리라는 직함을 달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새벽부터 영어수업을 들어야 하는 고졸 평직원들.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을 보여주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연배우들. /영화 홈페이지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을 보여주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연배우들. /영화 홈페이지

“정말 그런 때가 있었어요?”라고 묻는 MZ세대도 있을 듯하다. 그 질문에 관한 답은 “네. 불과 20~30년 전이었죠”다.

아무도 관심 기울여 보지 않는 하찮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 일의 가치와 본질을 보려 하는 고아성(이자영 역), 박혜수(심보람 역), 이솜(정유나 역)의 열정은 우리가 ‘왜 직장에서 자존심을 꺾고, 월급쟁이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자본은 열정 뜨거운 그들을 배척했지만, 그들은 차갑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회사를 사랑했다. 그래서 잘못된 회사의 시스템에 저항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줄거리는 간명하다. 거대 기업의 후계자와 빼먹을 것만 빼먹고 재빨리 도망치는 다국적자본을, ‘선의’를 지닌 고졸 여성직원들이 뭉쳐진 힘으로 막아 낸다는 이야기.

통쾌하고 시원하다. 그러나, 영화가 아닌 현실을 떠올리면 다시 마음 아프다. 고졸 여성 직원을 미국 유명 대학을 졸업한 CEO보다 아끼는 경영자가 과연 존재할까? 세상 어떤 사업주가 20대 평직원의 진의을 제대로 알아줄까? 그러나,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빛난다.

카타르시스(Catharsis)는 현실이 아닌 예술 또는, 문학적 상황에서 발현되는 것. 가난한 노동자가 돈 많은 자본가를 이긴다? 현실에선 이뤄지기 힘든 상황이다. 그럼에도 잠시잠깐 영화와 만나는 시간은 현실이 아닌 유쾌한 환상 때문에 웃을 수 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1990년대부터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구나’.

아직도 한국 어딘가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청년들이 죽고 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낡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어두운 공장에서. 2023년엔 청년들의 절망과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빈다.

‘내가 죽던 날’에서 탁월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 이정은(왼쪽부터)과 김혜수.
‘내가 죽던 날’에서 탁월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 이정은(왼쪽부터)과 김혜수.

세상의 약자를 구하는 것은 누굴까?… ‘내가 죽던 날’

세상엔 3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함께 앓아주는 자, 자신 외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고통 속에 빠뜨리는 자.

어떤 게 지향할 만한 태도일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첫 번째와 같은 경우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게 쉬울까? 매우 어렵다. 그래서다. 역사는 타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을 성자(聖者), 혹은 위인이라 부른다.

영화 ‘기생충’을 통해 빼어난 연기력이 확인된 이정은과 10대 때부터의 연기 경력이 30년을 넘긴 김혜수, 여기에 젊은 배우 노정의.

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영화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자극하는 작품 하나를 만들어냈다. 이름 하여 ‘내가 죽던 날’.

부도덕한 밀수로 부(富)를 이룬 아버지는 비명횡사하고, 삼촌이라 부르던 아버지의 부하도 죽고, 남편의 돈에 기대 살던 새엄마는 제 삶 찾아 떠나고, 자신이 감당 못할 돈으로 마약의 유혹에 빠진 오빠는 감옥에 가고….

여고생 세진(노정의 분)은 겨우 열여덟 살에 까마득한 절벽에 선 입장이 된다. 주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어린 소녀. 부잣집 여고생은 단숨에 천덕꾸러기 천애고아의 형편에 처한다.

그리고, 영화 속 주연이라 할 나머지 두 사람. 남편의 오랜 기간 불륜을 알아챈 현수(김혜수 분)는 세상 어디에도 지금의 상황을 하소연할 곳이 없다. 남편은 외려 “네가 먼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고 겁박한다. 뱃일을 하다가 폭풍 몰아치는 바다에서 죽은 오빠의 치유 불가능한 아픈 딸을 제 목숨처럼 여기는 순천댁(이정은 분)의 처지도 딱하기는 마찬가지. 그녀는 조카딸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까지 잃는다.

‘내가 죽던 날’의 영화적 상황은 막막하고 어둡고, 동시에 눅눅하다. 나이와 형편에 무관하게 3명의 여성은 견디고 이겨내기 힘든 입장에 처해 있다. 어떤 좋은 약을 한 주먹씩 먹어도 치유될 수 없는 병.

더 큰 문제는 아무리 찾아봐도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피붙이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어린 소녀(노정의)만이 아니라, 중년의 여성 경찰(김혜수)과 조로한 섬 아낙(이정은)은 낭떠러지에 매달린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116분. 짧지 않다. ‘감독은 대체 마무리를 어떻게 지으려고 이야기를 이처럼 무한대로 확장하는 것일까? 세 여자 중 한 사람의 고뇌만으로도 러닝 타임이 모자랄 텐데’란 걱정을 했다.

증인 보호 프로그램으로 외딴 섬에 보내진 여고생 세진 역을 맡은 배우 노정의 . /영화 홈페이지
증인 보호 프로그램으로 외딴 섬에 보내진 여고생 세진 역을 맡은 배우 노정의 . /영화 홈페이지

그런데 그건 그야말로 기우(杞憂)였다. 이전엔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내가 죽던 날’의 감독 박지완은 마지막 10여 분의 화면으로 앞서 100분 이상 펼쳐 놓은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단숨에 풀어낸다. 이 정도면 ‘연출력이 놀랍다’는 문장이 레토릭이나 과장이 아닌 팩트가 아닐까?

소급되는 주연들의 과거와 추정 가능한 세 여성의 현재, 그리고 “너를 위해 나를 버릴게”라는 세 명 여성의 미래를 위한 눈물겨운 연대.

‘내가 죽던 날’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흡족한 영화적 결말이다.

웃긴 소재로 우스운 영화를 만드는 건 쉽다. 하지만 청승맞은 소재로 청승맞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영화가 그렇고 연극이 그러하며 문학 또한 마찬가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관객이 원하는 건 너나없이 유사하다. 입장권 가격에 상응하는 감동을 얻고 싶다. 잘라 말한다. ‘내가 죽던 날’은 그런 감동을 선물하는 영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불법과 위법, 위조와 변조도 때론 아름다울 수 있다. 그게 고통과 아픔에 처한 어린아이를 구해내는 방법이라면. 영화가 끝날 때쯤 이 마지막 문장에 당신도 고개를 끄덕일 게 분명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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