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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가?

신광조​​​​​​​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간이 아픈 분들이 꼭 진료를 받고 싶은 김정룡 의학박사가 계셨다. 오랜 연구 끝에 B형 간염백신을 개발했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이를 인증할 기준이 없어 보건복지부에서 인증 신청을 반려했다. 이후 1981년 프랑스와 미국이 B형 간염 백신을 인증하면서 한국은 세 번째로 B형 간염백신 개발 국가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남들이 만든 기준을 따라하는 패스트 팔로우어(Fast Follower)에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기준을 창조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 큰 바다를 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장자’ 천도 편에 수레바퀴 깎는 사람이야기가 나온다. 왕은 책을 읽고 윤 편은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윤 편은 당돌하게 왕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옛 성현들의 책을 읽고 있다.”“왕께서 읽고 있는 책은 조백(糟7CA8·술 찌꺼기) 일 뿐입니다.”“네, 이 놈, 무엄하도다.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하면 큰 벌을 받을 줄 알아라.” “저는 평생을 수레바퀴만 깎고 살아왔습니다. 조금만 느슨하게 깎으면 헐렁해서 쓸 수가 없고, 조금만 빡빡하게 깎으면 들어가지 않아 쓸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제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기에, 어떻게 설명해줄 방법이 없어 아들에게도 전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은 윤 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노여움을 풀었다. 우리는 종종 이념이나 이론에 얽매여 살아가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사건들이다. 보편적 이념에 구속되지 않으면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있고, 독립성과 생명력을 갖게 된다. 또한, 단순히 다른 사람이 공부해 놓은 것을 읽기만 하는 것은 죽은 공부이며, 실제로는 읽고 쓰는 것이 모두 필요하다. 배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이 배웠던 것을 습득하는 데만 길들여지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잊게 된다. 우리는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 배우기와 표현하기의 경계에 서야 한다. 기준의 수행자보다는 조그만 기준이라도 창조자가 되어야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야 눈빛에 야성이 돈다. 고정되면 죽는다. 죽은 나뭇잎 새는 흔들리지 않는다. 경계에 서서, 이 추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살아있다. 경북농정에 혁신 바람이 불고 있다. 논에는 그렇지 않아도 넘치는 벼만 심어야 하는가? 콩도 심고 사과·포도도 심을 수 있다. 인생도 2모작에서 4모작까지 가능하다. 청송은 ‘산소 자치단체’로 불리며, 울진·영양과 함께 ‘반딧불 도시’로 ‘항 노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공공임대주택 대신 ‘산소 스마트’ 주택을 청년들이 살면서 갚을 수 있도록 공급하며, 최고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빌리지를 조성하고 있다. 육아환경은 육아왕국인 일본 돗토리현 수준을 능가하며, 모든 분야에서 기준을 창조하겠다는 생각으로 할 일이 넘쳐난다. 동해안의 바다연안에 물고기들이 접근을 못하게 하는 시멘트 콘크리트 해벽을 포스코 철강 생산 부산물을 이용한 에코 콘크리트로 바꾸니 어민과 물고기, 고래가 모두 기뻐하고,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수입 요청이 쇄도하여 포항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2025-02-20

지방 미분양 부양책…언 발 오줌누기 아닌가

정부가 지방의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LH를 통한 준공후 미분양 아파트 3000가구 매입 등의 지방건설 경기 보완책을 발표했으나 지방업계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당초 지역업계가 강력히 요구했던 총부채원리금 상환비율(DSR) 규제 완화가 빠지고, 양도세와 취득세 등과 같은 수요를 촉진할 정책들이 보이지 않아 경기부양 효과가 미미할 거라는 반응이다. 물론 LH를 통해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후 미분양 물량을 매입함으로써 자금난을 일부 해소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은 있다. 하지만 지방의 준공후 미분양 아파트 물량이 모두 1만7000 가구에 이르고 있어 3000가구 규모의 매입으로 시장경기를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또 LH가 3000가구 중 대구와 경북에서 얼마 만큼의 물량을 매입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금 지방의 사정은 미분양 주택을 매입하려는 수요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수요촉진을 위한 직접적 대책이 나와야 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양도세·취득세 완화나 금융대출 지원이 바로 그것이다. 디딤돌 대출의 우대금리가 신설됐으나 이것 역시 간접적인 지원에 불과하다. 대구시는 그동안 지방 맞춤형 부동산 경기 진작책을 정부 측에 줄기차게 요구했다. 미분양 주택 매입과 지방 미분양 주택에 대한 한시적 세제완화 등을 요구했지만 미분양 주택 매입만이 이번 정책에 반영됐다. 그나마 지방만을 위한 정부정책이 나온 것은 다행스런 변화라 할 수 있다. 수년간 침체에 빠져있는 대구와 경북지방의 부동산 경기를 회복시키는 것은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측면에서 시급한 문제다. 정부는 이번 조치 후 지방의 건설경기 변화를 잘 살펴보고 시의적절한 추가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특히 지역 정치권에서도 논의가 됐던 DSR 규제 완화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미분양 증가 등 지금 지방은 오랜 부동산 경기 침체로 지역경제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다. 비수도권에 대한 중앙정부의 과감한 추가 조치가 있어야 한다.

2025-02-20

거짓말 사회

장규열 고문 법정은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곳이다. 판사는 증거와 법리를 바탕으로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며, 드러난 거짓과 진실을 토대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역할을 맡는다. 오늘날 법정에서 거짓말이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 피고인과 증인뿐 아니라, 심지어 법정에 선 공직자들이 공공연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진실을 숨기고 사실을 왜곡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기반을 흔들고 있으며,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공직사회에 대한 믿음을 훼손하고 급기야는 국민들 사이의 관계마저 흔들리게 한다. ‘나쁜 사람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통하지 않는다. 법정에서 밝혀지는 것은 범죄자의 진실이어야 한다. 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할 공직자들이 오히려 거짓말을 일삼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은 실망과 분노를 넘어 무기력감마저 느낀다. 공직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지면, 사회 전체는 도덕적 타락과 윤리적 일탈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거짓말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인가? 바로 ‘다음세대’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성실과 정직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현실에서 거짓말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본다면 그렇게 가르칠 수 있을까. 최고위 공직자들조차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을 일삼고,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겠는가. 사람은 들은대로 배우기보다 보는대로 배운다. 결국 정직한 사람이 손해보는 왜곡된 사회적 타락을 배우고 말 터이다. 사회적 진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하려면, 우리는 거짓말 문제에 대해 사회적 각성에 이르러야 한다.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 구조적으로 용인되는 문화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정직한 사람이 보호받으며 거짓말이 철저하게 배격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공직자들에게는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이 요구되어야 한다. 공직사회의 거짓말을 사회공동체에 미치는 해악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만연하고 진실이 손해보는 현실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법과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 정직한 사람이 인정받고 보호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적 관심과 집단지성에 기초한 행동이다. 거짓말이 성공의 수단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질서와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철저하게 징벌하며 진실의 가치를 되새기는 사회적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보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려는 탈진실의 허위를 각성하고 거짓말을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진실과 성실의 힘을 새롭게 강조하여 대한민국이 더이상 부끄러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단속해야 한다. 공직사회에는 거짓말이 절대로 통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하고 진실에 기초한 행정행위가 공직자윤리의 기초임을 확인해야 한다. 나라의 기반이 거짓말로 흔들리는 일을 더이상 두고만 볼 수 없는 지경이다.

2025-02-19

벼랑 끝 몰린 철강산업…정부 특단대책 나와야

포항지역 주력산업인 철강이 벼랑 끝 위기로 치닫고 있다. 미국정부의 철강제품에 대한 25% 관세부과로 수출 전망이 어두워진 가운데 국내적으로 저가의 중국산 철강이 대량으로 밀려와 사실상 사면초가다. 철강은 산업의 쌀로 불릴만큼 산업분야의 핵심 소재다. 그러나 세계 각국이 앞다퉈 기간산업으로 육성하면서 지금은 세계적으로 공급물량이 과잉이다. 더욱이 트럼프 정부처럼 보호주의 장벽이 글로벌 시장에서 확산된다면 국내 철강산업의 장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저가의 중국산 철강재의 국내시장 침투는 국내 철강업 생존에 치명적이다. 본사가 무역협회 수출입 통계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중국산 철강의 수입 의존도는 날로 커지고 있다. 작년 처음으로 전체 수입물량의 절반을 넘었다. 1990년 국내 철강 수입에서 중국이 차지하던 비중은 겨우 4.6%였다. 그러나 작년에는 51.5%로 늘었다. 이는 중국이 철강 생산을 늘리면서 저가로 국내 시장에 파고든 때문인데, 수입단가도 수입국 중 가장 낮다. 문제는 미국이 철강에 관세를 매기면서 수출 길이 막힌 중국산 철강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지역으로 더 낮은 가격으로 밀려올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경우 국내 철강업계의 가격 경쟁력은 더 떨어지고 시장은 교란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포항의 경제는 포스코 중심의 철강 경기에 큰 영향을 받는다. 철강산업 의존도가 큰 광양과 당진도 비슷한 처지다. 포항 등 3개 도시 단체장이 철강산업 위기에 공동대응키로 한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나 현재로선 뾰쪽한 대책도 없다. 지난 17일 국민의힘 김정재 국회의원이 산업부 등 정부 부처에 포항을 ‘산업위기 선제 대응지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국내적으로 기업을 보호하는 조치가 서둘러 마련돼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정부가 무역 협상력을 잘 발휘해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국내 철강산업은 앞으로 세계적 과잉생산과 보호무역주의, 탄소중립전환 요구 등 큰 도전에 직면한다. 중국 저가 공세를 포함한 모든 난제를 푸는데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 해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2025-02-19

갈수록 일본에 밀리는 한국 관광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서울과 제주도는 분명 매력적인 관광지다. 하지만, 재방문 의사를 묻는다면 글쎄...” 많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말끝을 흐린다. 치안이 좋고 거리는 깨끗하지만,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는 음식 가격과 높은 숙박비가 부담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거기에 최근 ‘계엄 사태’에 이어진 정치적 불안정이 관광업계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얼마 전 제주관광협회는 2월 1일부터 15일까지 제주도를 방문한 관광객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8.2%나 줄었다고 발표했다. 서울 여행에 대한 외국인 관광객의 평가도 박하다. 한 숙박 플랫폼의 조사에 의하면 중국인 여행자들의 숙소 평점은 서울이 4.31점, 일본 도쿄는 4.48점이었다. 서비스, 시설, 위생 분야에서 일본에 밀린 것. 관광업계가 원하는 건 여행자의 재방문이다. 한 도시를 다시 찾는다는 건 거기서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듯하다. 외국인 관광객의 한국 재방문율은 2019년 58.3%에서 2023년엔 56.1%로 감소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선 “비슷한 비용이라면 한국보다 일본 여행의 만족도가 높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그걸 증명하듯 해마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이 늘고 있다. 재방문도 잦다. 최근 일본관광청은 지난 12월 일본을 여행한 한국인 수가 86만7400명으로 이전 역대 최고치를 뛰어넘었다고 전했다. 작년 한 해에만 일본을 여행한 한국인이 882만명에 이른다. 일본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1/4에 달하는 숫자다. 갈수록 일본에 밀리는 한국 관광. 위기를 극복할 대책이 시급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2-19

망가지는 의료시스템…이게 의료개혁인가

의정갈등이 1년간 지속되면서 대구권 상급종합병원(수련병원) 의사수가 급격하게 줄고, 적자규모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대구권 수련병원 5곳(경북대·계명대동산·영남대·대가대·칠곡 경대)의 의사 수는 2023년 12월 1843명이었지만, 지난해 연말에는 1102명으로 40.2% 감소했다.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사직이 주요 원인이다. 전공의 공백으로 진료가 줄어들면서, 수련병원의 적자도 심각하다. 김선민 의원(조국혁신당)이 최근 전국 11개 국립대병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손실액은 5663억여 원으로 의정갈등 전인 2023년보다 2배(98.9%)가량 증가했다. 손실액이 가장 큰 병원은 서울대병원(약 1106억원)이었고, 다음이 경북대병원(약 1040억원) 이었다. 수련병원들은 전공의 이탈 후 수술규모와 병상가동률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점을 고려하면, 개학이 임박한 이달말까지 의정갈등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병원경영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부는 2026학년도 의대증원 규모를 각 대학이 자율결정하도록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의정갈등에 오히려 기름을 붓고 있다. 대학입장에서 보면 의대정원 규모는 학교위상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모집정원을 늘리려 할 것이고, 이게 현실화하면 앞으로 의대교수까지 전공의와 함께 집단대응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요즘 정부태도를 보면, 의료위기 사태가 1년이 됐지만 모든 의료시스템이 정상가동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의료시스템은 현재 내부적으로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지금 의료현장을 지키는 의대교수들은 밤새 당직을 서면서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수술하거나 외래진료를 해야 해 지쳐 있다. 최근에는 의대교수들도 대거 사직하면서, 대부분 수련병원은 부분적으로 돌아가는 진료행위 외엔 모두 파행 운영되고 있다. 정부는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올해도 제자리에 돌아오지 않을 경우, 의료공백사태가 손쓸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25-02-19

여행 준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여행 짐 싸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미리미리 메모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챙겨 바구니에 던져두면 된다. 갈아입을 옷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가 챙겨 넣어둔다. 떠나기 전날 종류별로 파우치에 넣어 큰 가방에 넣는 일쯤이야 뭐 그리 힘들 일도 없다. 여행 준비보다 나의 부재에 대비한 준비가 더 많다. 곰탕 끓이는 정도는 아니다. 여행 일수 만큼 남편의 아침식사로 야채샐러드, 두유, 찐계란을 밀프랩해서 냉장고에 가지런히 넣어 두면 된다. 원래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혼자서도 잘 사 먹는 좋은 습관이 있는 남편이다. 평소에도 하루 한 끼의 아침 준비로 참 수월하긴 한 편이니, 구태여 신경 쓰는 것은 내 최소한의 정성을 표하는 셈이긴 하다. 집안 청소도 중요한 여행 준비 중의 하나다. 나의 빈자리에서 발견될 허술한 구석이 걱정되기도 해서 남편의 행동반경 외의 안방과 주방, 앞뒤 베란다 등에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꼼꼼히 쓸고 닦는다. 청소를 미리 당겨서 한다는 심정으로 정리하니 이게 여행 준비가 맞나 갸우뚱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여행이든 최종정착지는 집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요, 가출일 거다. 내가 돌아왔을 때 말쑥한 집이면 더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 사이 남편이 많이 어질러도 어쩌랴마는…. 여행 준비의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손톱 정리다. 손톱에 이런저런 색으로 입히는 것을 매니큐어-잘못된 영어라고 했다-라고 했다. 요즘은 네일 케어라고 하던데, 뭐 둘 다 영어식 표현이라 좋은 우리말로 순화하면 좋겠다 싶긴 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여름방학 때 손톱에 빨간 봉숭아꽃물을 들인 채로 개학해서 학교 갔다가 그 도발적인 빨간색에 지레 부끄러워 손가락을 오므려 못 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엔 매니큐어를 미용실에서 했다. 미용실 바구니엔 오만가지 색의 매니큐어가 그득하니 넘쳤다. 장난 같이 발라보기도 하다가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플라스틱 대야에 비눗물을 따끈하게 데워줬다. 그 물에 손가락을 담가 손톱을 불린 뒤에 큐티클을 제거하곤 했다. 빨간 손톱칠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가끔씩 일면 방학을 기다렸다. 수업이 없으니 어떠랴 싶었다. 한 해 여름, 빨갛고 뾰족한 긴 손톱으로 학교엘 갔다가 정교님을 만나 교수답지 않다며 힐책을 들은 적이 있어, 다시는 하지 않았다. 다만 퇴직하고 나면 내 맘대로 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마냥 하지는 않았다. 며느리가 어버이날 선물로 네일아트를 예약해 주어 으리번쩍한 손톱으로 호사를 한 기억 정도. 다만 여행 계획이 잡히면 왠지 손톱 정리를 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여행이 많은 해는 제법 오랫동안 손톱이 화려했다. 지난 달 베트남여행 때는 며느리가 권해 쨍하게 붉은 와인색으로 도발했다. 한 달 남짓 되었고, 와인색 손톱이 반 이상 남아있지만 또 다른 여행이니까 다시 손질해야지. 이번엔 점잖은 색으로 골랐다. 올리브색이라고 하는데, 손녀는 아보카도 같다고 한다. 여행이 일상의 일탈이듯 손톱을 꾸미는 게 내겐 가벼운 일탈인 듯하다. 손톱정리가 나의 여행 준비요 시작이다.

2025-02-19

마음이 튼튼한 아이 키우기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신체적 발달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과 심리적인 발달이 필수적이다.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고 적절히 반응하는 것이 정서적 안정을 돕는 첫걸음이다.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을 가진 아이가 더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기에 애착 형성은 아주 중요하다. 부모가 꾸준한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감정 표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아이는 심리적으로 안정된다. 따뜻한 스킨십과 눈맞춤 칭찬은 자존감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감정 조절 능력은 아이가 좌절감을 줄이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필수적이다.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읽고 이름 붙여 주며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어 ‘속상했구나’라고 말해 주면 아이가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림 그리기나 역할 놀이를 통해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기조절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충동을 조절하고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부모는 아이가 기다리는 연습을 하도록 유도하고 규칙을 정해 지키게 함으로써 자기조절력을 키울 수 있다. 또한 자기조절을 잘했을 때 칭찬하면 긍정적인 행동이 강화된다. 사회성 발달은 또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협력과 배려 타협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래와의 놀이 기회를 제공하고, 친구와의 갈등 해결법을 알려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 ‘친구가 속상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도와줄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모는 결과보다는 노력과 과정을 칭찬하고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형제나 친구와 비교하는 행동은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이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므로 적절한 해소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충분한 놀이 시간과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기회를 제공하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더욱 안정될 수 있다. 육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의 스트레스 지수도 감소시키니 시간이 나면 야외 활동을 같이 하는 것이 좋다. 부모의 양육 태도는 아이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또 부모가 완벽하려고 하기보다는 실수를 인정하고 개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부모가 실수 했을 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도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빨리 인정하고 사과를 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잘 관리하면 아이도 심리적으로 안정될 가능성이 높다. 아동심리를 이해하고 활용하면 아이의 정서적 안정과 건강한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애착 관계 형성과 감정 조절, 스트레스 관리, 부모의 양육 태도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면 더욱 건강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아이는 가장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2025-02-19

민주교사 정영상

민주교사 정영상은 잠결에 웃으며 심장마비로 죽었다 모든 죽음이 마찬가지다 청량리에서 밤기차를 타고 제천에서 내려 단양으로 총알택시를 갈아타고 정영상의 죽음을 확인하러 갈 때 어둠은 아늑하게 우리의 삶을 확인해 주었다 젠장,산다는 것이 눈물 한 방울로 정점을 찍어 살아갈 목표를 확인시킨다는 것 그 무심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관(棺)을 부여잡고 운들 무엇하리 살아 죄 한 점 없었던 사람이 어린 아들 딸 남겨 놓고, 마누라만 남겨 놓고 그렇게 간 죄가 많은 사람이 되어 떠났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이유도 없이 분노했다 정작 벌을 받아야 할 나는 멀쩡히 소주를 마시며 먼 월악산을 보고 있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마음이 저승에 닿아 강물로 흐르면서, 그가 굵은 손으로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 그러나 그 감촉은 가을비보다 혹독했다 상(賞)보다 벌(罰)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 정영상은 결코 죽지 않았다. 정영상은 연일읍 출신으로 공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안동 복주여중에서 근무했으며, 전교조 활동으로 투쟁 중 심장마비로 세상과 이별했다. 내가 2학년 여름방학 때 임용대기 중이던 형은 자전거 뒤에 도시락을 묶어 화실로 출근하여 나와 자주 놀았다. 도시락과 막걸리를 나눠 먹으며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큰 자양분이 되었다. 털털거리는 그 자전거 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하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2-19

어머님의 막걸리

윤명희 수필가 구순의 어머님이 차례 준비로 비좁은 주방을 이리 저리 뒤지신다. 혼잣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뭘 찾으시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형님이 다용도실에서 막걸리를 들고 나온다. 어제 어머님이 직접 사오셨다고 한다. 당신 걸음으로는 한참 가야 할 거리다. 빈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조카와 떡국의 꾸미를 챙기던 나는 아침부터 술을 찾는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설한 차례 상은 떡국만 올리면 된다. 제주로 올릴 청주병도 상 앞에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막걸리를 들고 나오시는 통에 식구들의 눈이 그곳에 모였다. 한복을 곱게 입은 터라 행여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질까 불안한 눈치들이다. ‘음복주 마실 텐데 막걸리는 왜 들고 오시지?’ 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어머님은 조상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한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엉거주춤 바닥에 앉아, 손수 청주를 비우고 막걸리를 붓는다. 혼자서는 일어나지 못하시는 것을 아는 손자가 곁에 섰다. 침대에서 소파로 식탁의자로 옮겨 앉는 일이 전부인 어머님이 손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절을 두 번 하고 일어섰다. “어매 아배요, 우리 장손 장가 좀 보내주소. 영감은 거기서 뭐 하니껴” 참았던 소원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어머님은 조상님께 올리는 막걸리가 효험이 있을 거라 믿으시는 듯 했다. 차례 상 앞이 조용해졌다. 나는 곁눈질로 장본인인 조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같은 처지인 우리 아들을 끌어넣는다. 사촌형이 던진 장가라는 공을 얼떨결에 받은 아들이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조상님, 할매가 부탁까지 했는데 손자들이 장가 못가면 조상님 탓입니데이” 아들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으로 계면쩍은 순간을 넘겼다. 차례 상을 물리고 세배를 한다. 절을 한 손자들이 할머니께 증손자 대신 얇은 봉투를 내민다. 떡국을 앞에 놓고 둘러앉았다. 이제는 두 집 식구 모여 봐야 예전 큰댁 식구보다 적다. 시집간 딸네들의 빈자리는 떡국 먹는 소리만이 채우고 있다. 그때의 설날은 집안이 아이들로 왁자했다. 가래떡을 썰고, 강정을 만들었다. 조카들의 손까지 빌려 한 광주리나 되는 콩나물을 다듬고, 몇 시간동안 전을 부쳤다. 친척들을 맞이하는 인사가 연이었고, 방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만큼 주방은 상차리기에 바빴다. 차례상 앞은 흰 두루마기 차림의 어른들과 양복차림의 젊은이들로 그득했다. 맨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은 잠시 후에 받을 세뱃돈 생각에 마냥 신났다. 거실에 빙 둘러 앉아 윷놀이 판을 벌렸다. 바닥에 발을 구르며 도야, 도야 호부랑 도야를 외치며 흥을 돋우는 팀과, 모가 나오기를 두 손 모아 염원하는 팀의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공중을 휘돌아 치며 바닥에 떨어지는 윷가락이 판세를 뒤집으면, 와아 함성 소리와 함께 시아버님의 어깨가 들썩였고 큰며느리인 형님도 춤을 추었다. 서른 명도 넘는 친척들과 함께 했던 그날들이 꿈결인 듯 아스라하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 식구는 설날 아침에 큰댁에 간다.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는다. 상을 마주하고 앉아 하는 이야기가 길지 않다. 설거지를 끝내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소파에 앉는다. 차를 마시며 멀거니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 몇 번이나 재방송한 드라마의 대사까지 외우다시피 하는 어머님은 장면마다 설명을 덧붙인다. 사촌형과 몇 마디 나누던 아들은 할머니 방에서 자고, 남편은 소파에 앉아 졸고 있다. 형님이 윷가락을 가지고 나온다. 해 지난 달력의 뒷면에 윷판을 그리지만, 아무도 다가앉는 이가 없다. 나는 슬그머니 그 앞에 앉아 윷가락을 만져본다. 아버님이 만드신 싸리 윷이 손안에 착 붙는다. 어깨위로 높이 던져본다. 바닥에 먼저 떨어진 세 가락이 엎어지고, 뒤늦게 떨어진 한 개가 흰 배를 내 보인다. 한 귀퉁이가 배꼽마냥 까맣게 칠해져 있다. 왔던 길로 뒤돌아 가라는 뒷도다. 오래 묵은 윷가락도 어머님의 화양연화였던 그때가 그리운가 보다. 졸던 남편이 집에 가자며 옷을 주섬주섬 걸친다. 나는 형님이 챙겨 주는 음식들을 받아들고 마지못한 듯이 뒤를 따라 나선다. 설날 하루가 길다. 우리는 남은 시간 앞에서 잠시 허둥거린다.

2025-02-19

국립경국대학교 출범 즈음하여-안병윤 경북도립대학교 총장

안병윤 경북도립대학교 총장 신학기 3월이면 예천에 자리 잡고 있는 경북도립대학교가 국립경국대학교로 새롭게 출범한다. 국가의 글로컬 30 정책에 따른 국립안동대학교와 통합을 추진한 결과이다. 2023년 3월에 통합논의가 시작되어 지난해 교육부로부터 통합 승인을 받아 만 2년 만에 이룬 성과이다. 이러한 성과는 그간 경북도립대학교의 혁신과 변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 대학을 비롯한 지방소재 대학은 저출생에 따른 학령인구의 감소와 수도권 집중에 따른 지방소멸의 여파로 대학 운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의 급격한 사회변화에 맞춰 대학교육체제 전반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직면해 왔다. 이에 따라 우리 경북도립대학교는 선제적 대응의 방안으로 정부의 ‘글로컬 대학 30 정책’에 따라 국립 안동대학교와 전국 최초 국·공립대학 통합을 통해 지방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양 대학의 경쟁력을 제고하여 지역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해 양 대학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2023년 11월 ‘글로컬대학 30’사업에 선정되었다. 이후 세부적인 통합 방안을 마련하여 새롭게 새출발하는 것이다. 국립경국대학교는 지역정책, 산업적 특성 및 수요를 반영한 캠퍼스별 특성화 분야를 도출해 안동캠퍼스는 인문·ICT, 그린바이오, 백신분야를 예천캠퍼스는 공공수요분야를 특성화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예천캠퍼스에는 공공수요인재대학과 행정경영대학원을 중심으로 지역주민을 위한 평생교육원, 지역이 필요로 하는 해외 인력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는 경북글로벌 한글학교, 경북도 소속 연구기관 협업을 통해 지역의 발전 계획을 마련하고 추진하게 될 K-ER센터, 그리고 도서관 등을 공공부총장과 행정지원본부를 두고 운영하게 된다. 공공수요인재대학에는 동물생명공학과(기존 축산학과), 모빌리티디자인공학과(기존 자동차과), 응급구조학, 소방방재학과의 4개 학과가 지역의 공공수요에 기반하여 인재를 양성하게 될 것이다. 예천캠퍼스는 경북도립대 총장이 공공부총장을 맡아 책임 운영을 하여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통합취지에 맞는 특성화를 추진한다. 경북도립대학교라는 명칭이 사라지는 것은 아쉽지만 경북도립대학교의 역사와 전통은 국립경국대학교 예천캠퍼스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간 경북도립대학교는 농촌지역 교육양극화 해소를 위해 1997년 개교이래 약 1만여 명의 동문 들이 있다. 모두 자기의 자리에서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랑스럽게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경북도립대학교는 그간 저렴한 등록금과 풍부한 장학혜택을 통해 공교육을 실현하고, 또한 높은 취업률을 자랑하는 지역의 명문대학으로 자리해 왔다.  그간 경북도립대학교 예천, 안동, 영주 등 경북북부지역 중심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여 왔다고 자부한다.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의 제공과 평생교육 실시, 대학시설의 개방 등을 통해 지역사회와 상호발전해 왔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대학, 주민들이 참여하는 평생교육 중심대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가 경국대학교에서도 지속하도록 지켜나가야 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특히 예천의 발전을 견인하는 지역대학으로서의 새로운 역할도 만들어 가야만 한다. 이를 위해 지역의 다양한 아젠다를 창출하여 토론하고 논의하는 협력 거버넌스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또한, 대학이 가진 다양한 재능기부, 시설개방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소통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는 대학을 아껴주고 대학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는 새로운 지역대학의 성공모델을 만들어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제 큰 꿈을 가지고 통합 국립경국대학교가 첫 발걸음을 디디려 한다. 예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천 출신의 경북도립대 총장으로서 예천의 경북도립대학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새로운 탄생이라는 것을 예천군민들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국립경국대학교는 경북도립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갈 것이며, 예천군민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드린다. 한편으로 국립경국대학교가 새롭게 성장하기 위해 예천군민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사랑이 꼭 필요하니 많이 도와달라는 말씀도 함께 드린다. 경국대학교는 예천과 지역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는 그래서 예천군민과 함께하고 예천군민으로부터 사랑받는 대학교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안병윤 경북도립대학교 총장

2025-02-19

광주에서 연출된 ‘이데올로기 양극화’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지난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반집회는 우리나라 보수·진보 이데올로기 전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5·18 현장인 금남로에서는 지난 15일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 반대하는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경찰은 기동대 버스로 차벽을 설치해 양측의 충돌을 막았다. 경찰 차벽을 사이에 두고 보수·진보 집회가 동시에 열린 일은 지금 우리 사회의 분열이 얼마나 극단적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행히 집회는 큰 사고없이 끝났지만, 정치인들의 무차별적인 언어공격은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마디마디가 살벌하기 짝이 없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탄핵반대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전두환의 불법 계엄으로 계엄군 총칼에 수천 명이 죽고 다친 광주로 찾아가 불법 계엄 옹호 시위를 벌이는 그들이 사람인가”라며 탄핵반대 군중을 싸잡아 공격했다.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은 “계엄을 옹호한 극우 집회는 주력이 광주시민이 아닌 외지인 집회, 떴다방 버스 동원 집회”라고 했다. 민주당은 더 나아가 그저께 최고위원 회의를 열고 “5·18을 왜곡, 폄훼하는 극우 사이비 세력에 대해 당 차원에서 법적(5·18민주화운동 특별법 위반혐의)인 조치를 할 것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탄핵 찬·반집회에 참석한 국민은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나라를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런 군중을 싸잡아 “악마와 다를 게 무엇인가”라며 극단적인 비난을 하거나, 법적조치까지 하겠다는 발상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이념을 대표하는 도시인 대구와 광주는 해마다 GRDP(지역내 총생산)를 발표할 때면 나란히 꼴찌 성적표를 받으며 경제적인 소외의식을 공유해왔다. 이 때문에 행정기관끼리는 ‘달빛 동맹’을 맺어 우의도 다지고 수도권에 대해 투쟁도 하고 있다. 대구시장은 5·18 민주화운동 행사에, 광주시장은 2·28민주운동 행사에 매년 꼭꼭 참석하면서 양 도시의 정체성을 서로 존중해주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윤 대통령 탄핵사태를 맞아 정치권이 거친 언어를 남발하며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방식으로 강성 지지층을 자극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정국이 점점 극단화로 치달으면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최근 정치권의 이데올로기 전쟁은 일상화되는 추세다. 도심 주요교차로와 가로수는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정치현수막으로 얼룩져 있다. 경쟁하듯 자극적인 문구를 동원해 상대편을 비방하는 내용이 주류여서 출퇴근길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이런 식으로 정치권이 사생결단식의 이념대결을 펼치면 헌재가 대통령 탄핵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우리 사회는 견디기 어려운 후유증이 발생할 것이다. 정치권이 우리사회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국민은 자기와 이데올로기가 다른 상대까지도 감싸 안는 그런 정치인을 보고 싶어 한다.

2025-02-18

美 대통령의 날

우정구 논설위원 우리나라 날짜로 이달 17일은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날이다. 미국의 대통령 날은 매년 2월의 세 번째 월요일이다. 대통령 날을 정해 놓고 기념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미국에서는 이날을 휴일로 정하고 학교 등 대부분의 기관들은 쉰다. 원래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생일인 2월 22일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 날을 제정했으나 1968년부터 모든 대통령을 기리는 날로 바꾸었다. 이날은 대통령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각종 행사가 펼쳐진다. 학교에서는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어 워싱턴, 링컨과 같은 훌륭한 대통령에 대한 역사 공부도 진행한다. 또 사람들은 워싱턴 D.C 국립대통령 기념비를 방문하기도 하고 주에 따라서는 역대 대통령 퍼레이드도 펼친다. 미국 대통령은 국제사회에 있어 가장 막강한 영향력과 존재감을 과시하는 인물이다. 미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군사가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누가 당선될지는 세계적 관심거리다. 미국 의회가 대통령의 날을 정한 것은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추모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해 놓고 보니 그 이상의 가치가 생겨나고 있다. 국민이 미국의 역사를 익히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가적 성찰 기회도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이가 국민적 존경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다. 미국 국민이 40여 명의 역대 대통령을 함께 존경할 수 있는 대통령의 날을 가진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에게도 대통령의 날을 가지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2-18

경북 지방정부협력체, 분권협력 새모델 되길

경북도지사와 경북도내 시장 군수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정책 최고 협의체인 경북 지방정부협력회의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발족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도내 22개 시군 단체장은 17일 모임을 갖고 경북 지방정부협력회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협약서에 서명하고, 제1회 경상북도 지방정부 협력회의를 개최했다. 지방정부 협력회의는 기존의 시도지사협의회나 시장군수협의회 등과는 다르다. 광역과 기초가 수평적 관계 속에 지방의 업무를 공동으로 수행하고 성과도 공유하는 모임이다. 이를테면 균형발전, 국책사업, 국제행사, 지방소멸 등 지방과 관련한 주요 정책을 경북도와 시군이 입안단계에서 설정 및 후속 조치에 이르기까지 협의하고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도지사와 시장군수협의회장은 공동의장을 맡는다. 이와 관련,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시장군수협의회와 공동 구성한 지방정부협력회의는 지방정책 최고 심의.합의체 기구”라고 밝히고 “새로운 지방분권 협력모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한 지 벌써 30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전국 자치단체들이 수많은 역할을 수행했지만 여전히 중앙의 예속을 못 벗어나고 있다. 지방정책의 대부분이 중앙정부에서 결정되고 예산도 중앙정부가 주는 대로 받아 쓰는 게 현실이다. 지방자치란 지방 사정에 밝은 지방정부가 지역실정에 맞게 세금을 거두고 이를 재원으로 적재적소에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핵심이다. 권한과 예산이 중앙에 집중된 지금과 같은 구조 아래서는 지방자치는 불가능하다. 그동안 지방분권을 위한 입법조치를 수도 없이 요구했지만 중앙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실현되지 못했다. 중앙정부는 오히려 협의, 조정, 심사 등의 명목으로 자치권 행사를 막고 있다. 경북의 지방정부협력체는 도와 시군이 수평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지역의 문제를 민주적으로 행사하는 새로운 분권협력의 틀을 지향하고 있다. 온전한 지방자치와 분권을 희망하는 지방자치단체의 꿈과 의지가 담긴 협의체다. 이번 협의회 출발이 지방분권을 앞당기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2025-02-18

여야협치로 에너지3법 처리…경북 ‘대환영’

국회가 지난 17일 산자위 소위를 열고 ‘에너지 3법’(해상풍력특별법·전력망확충법·고준위방폐장법)을 합의처리했다. 경북지역의 오랜 현안이기도 했던 에너지 3법은 빠르면 이달 중 본회의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해상풍력특별법은 정부가 입지를 선정해 주고 인허가를 단축해 주는 내용이다. 현재 포항시는 산자부 공모사업에 선정돼 2026년 말까지 75억8500만원을 투입해 남구 구룡포읍·장기면, 북구 흥해읍·청하면·송라면 앞바다에 해상풍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한 민간사업자도 영일만항 인근에 96MW 규모의 해상풍력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복잡한 인허가와 규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풍력발전단지 조성을 위한 금융·세제혜택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다. 전력망 확충법은 정부가 송배전망 확충을 지원해 전력 생산을 돕는 게 핵심이다. 많은 양의 전력을 사용하는 AI산업을 뒷받침하자는 취지다. 에코프로 등 이차전지 산업이 몰려있는 포항으로선 전력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어주는 법이다. 고준위방폐장법은 원자력발전 과정에서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를 저장·관리하는 시설을 만드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우리나라는 원전을 가동한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 부지를 확보하지 못해 최근까지 약 1만9000t의 해당 폐기물을 임시 저장시설에 보관하고 있다. 울진 한울원전은 2031년, 경주 월성원전은 2037년, 신월성원전은 2042년에 포화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돼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법안처리를 한 것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이번에 상임위 소위에서 통과된 법안들은 모두 산업현장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계엄정국에 묻혀 있던 국회가 잠시나마 정상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동안 꽉 막혔던 민생 물꼬가 조금이나마 트이는 느낌이다. 앞으로도 국회가 민생을 위한 ‘협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여야 모두 노력해야 한다.

2025-02-18

볼거리보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 남원 교룡산성

광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는 한때 88고속도로라 불렸다. 그 광대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남원IC 인근에 있는 산으로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과 교룡산성이다. 두 개의 뿔로 형성된 산자락에는 교룡산성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쪽은 상당히 아늑한 느낌이다. 그 한 가운데에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이 위치한다.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와 대적하려고 쌓았던 삼국시대의 성으로,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전열을 정비한 장소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휴정대사의 제자이면서 호남의 승병을 이끌며 이치대첩, 독산성 전투, 행주대첩 때 맹활약한 뇌묵 처영(雷默 處英)이 교룡산성을 크게 수축(修築)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경주 용담정에서 도를 깨우치고 교룡산성으로 숨어들어 사찰의 방 하나에 8개월 동안 피신 수양하며 동학의 교리를 완성한 곳이기도 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교룡산성으로 올라선다. 길옆에는 동학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동학성지 남원’이라 쓰인 조형물이 보인다. 가파른 길로 조금 올라서면 이내 교룡산성이다.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부까지 계곡을 여러 개 감싸며 축성한 교룡산성은 그 길이가 무려 3킬로다. 산성이 번성하였을 때 우물이 99개였고, 무기고까지 있었다. 동서남북 4대 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문이었던 홍예문만 남아 그 흔적을 대변하고 있다. 그 홍예문 입구 좌측에 ‘김개남 동학농민 주둔지’라는 하얀 나무말뚝이 서 있다. 동학농민군 2차 봉기 때 그는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을 따르지 않고 청주를 향해 진격하다 패하여, 태인에서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대의를 잃어버린 그의 야욕이 빚은 오판 탓으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하여 2만여 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위민’이란 백성을 위하는 일이다. 평소 사람들의 목숨을 아끼고 양반들과 관리자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랬던 전봉준과는 달리 김개남은 양반들에게 엄청난 원망을 받은 두려움의 대상자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김영주, 동학의 후천개벽을 알게 되면서 남쪽 세상을 열고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뜻으로, 김개남(金開南)으로 고쳤다. 결단이 빠르고 과감한 추진력에, 활화산 같은 폭발성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으나 그것이 그의 한계이기도 했다. 권위에 대한 강한 애착과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질투와 시기심이 그 원인이었다. 고종의 지시로 내탕금을 전하러 내려온 선전관의 목을 베고, 2차 봉기 후 북상하는 도중에 남원 부사 이용헌과 그의 수행원 2명도 함께 참수했다. 고부군수 양성환은 그에게 붙잡혀 호되게 매질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열 손가락에 대못이 박히고, 소나무 서까래로 빙 둘러서 엮은 달구지 위에 태워졌다. 그러고도 불안했는지 짚둥우리를 서까래 위에 덮어씌웠다. 절대 탈출하지 못하도록 방지한 것이다. 재판 절차도 생략되었다. 붙잡힌 지 이틀 만에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목이 베어졌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에 대한 양반들과 관리자들의 원한과 두려움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교룡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홍예문은, 기역(ㄱ)자형의 옹성으로 둘러쌓았으며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이다. 외부에서 성문을 보면 외부에 쌓은 작은 옹성(甕城)으로 인해 그 입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측면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았고 그 위의 둥근 부분은 아홉 개의 돌을 쌓아 예술과 과학이 숨어 있는 아치형으로 맞추었다. 현재 전북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홍예문을 통과하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직도 교룡산성 안에는 민가가 몇 채가 남아 있다. 선국사로 바로 오르려다가 성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교룡산성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교룡산의 두 봉우리인 남쪽의 복덕봉(福德峯)과 주봉인 밀덕봉(密德峯)을 오르기 위해서다. 복덕봉에 오르면 발아래로 대구와 광주를 이어주는 광대고속도로와 남원 시내가 발아래로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만복대에서 정령치와 바래봉, 덕두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과 고남산, 만행산 등도 시원한 조망으로 구분된다. 현재 통신 탑이 세워져 있는 주봉인 밀덕봉에서 우측 능선을 따라 칠백여 미터를 돌거나, 선국사에서 삼백여 미터를 뒤쪽으로 오르면 ‘은적암’ 터다. 일명 ‘덕밀암’ 터로 불리는데 동학에서는 은적암, 불교에서는 덕밀암이라고 한다. 최제우가 수도하면서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집필했던 곳으로,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스님이 출가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장소의 의미는 어디로 가고,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작은 팻말 하나만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삼백여 미터를 더 내려서면 선국사다. 평상시는 불법을 수행하는 도량이지만 전시에는 방어진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전략적 요충지다. 지홍석 수필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순조 2년에 다시 지었다는 대웅전에는 2017년 7월 13일 국가지정 보물 제1517호로 지정된 건칠아미타여래좌상(乾漆阿彌陀如來坐像)과 지방민속자료 5호로 지정된 큰 북이 보관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인장인 ‘교룡산성승장동인’은 이번 기행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선국사에서 이백여 미터를 내려서면 처음 탐방을 시작했던 홍예문과 동학공원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탐방을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복덕봉과 밀덕봉, 은적암터를 지나 선국사를 두루 돌아보는데 약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남원 교룡산성은 영남지방에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 1만여 명이 산화한 성지로, 최근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만들어 성역화 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찾아들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홍석 수필가

2025-02-18

‘가치 더하기’ 열린 조직문화로 가는 길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열린 조직문화(Open Organization Culture)는 조직 내에서 수평적 소통과 협업이 강조되고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여 혁신과 창의성이 장려되는 문화를 말한다. 조직 내 위계질서보다는 유연성과 투명성이 중시되며 직원들의 참여와 자율성이 강조된다. 열린 조직 변화는 거창한 이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공감하고 생각이 모아지는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가령,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하는 ‘가치 더 하기’, 개인화가 특징인 MZ세대에 우리로 변화를 주는 ‘같이 한데이’, 한밤중 돌발이 걸리는 ‘정비인의 저녁이 있는 삶’ 등 현상에 대한 변화의 모티브를 주는 키워드(Key Word)이면 열린 조직문화로 가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열린 조직문화로 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는 수평적 의사소통 강화이다. 직급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 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경영진이 직접 직원들과 소통하는 ‘타운홀 미팅’ 도입이다. 둘째, 투명한 정보 공유이다. 경영진이 회사의 비전, 목표, 주요 의사결정을 공유하고,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블로그, 학습동아리 등)를 활용하여 정보 접근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셋째, 유연한 근무 환경 조성이다. 자율과 책임을 원칙으로 한 시간 유연근무제, 재택근무, 자율 좌석제, 특정일 자율 드레스 코드 적용 등이다. 넷째, 피드백 문화 정착이다. 한쪽에 편중되지 않고 1대1 미팅, 다면 평가 시행과 성과 평가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 창의성과 혁신 장려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형성하고 사내 아이디어 공모전 등을 통해 직원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것이다. 선진기업 열린 조직문화 사례를 보면, 구글(Google)은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20% 룰’(업무 시간의 20%를 창의적인 생각 갖기) 도입과 경영진과 직원이 직접 소통하는 ‘TGIF(Thank God It’s Friday)’ 미팅 운영이다. 넷플릭스(Netflix)는 유연한 근무 환경조성, 성과중심 문화 정착과 근속 연수가 아닌 기여도에 따른 보상체계 운영이다. 금년부터 컨설팅이 시작된 포스코스틸리온은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꿈을 가지고 열린 조직문화를 조성하려 한다. 직원들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주어 가치를 창출하고 보람과 행복을 주는 ‘가치 더하기’ 활동이 본격 시작된다. 예컨대 생산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장애가 없는 라인과 좋은 제품을 만들고, 기술개발팀은 창의적 사고로 생각을 더하여 소비자가 원하는 꽃무늬 컬러 강판을 개발하고, CEO와 임원은 직원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꿈을 실현하는 데 지원을 더하는 것이다. 컬러 강판 국내 으뜸은 물론 품질과 기업문화 면에서 월드 클래스 수준으로 거듭난다면 직원 개인의 성장과 회사의 발전을 이루는 행복한 일터가 될 것이다. 조직 문화는 직원이 공감하는 새로운 꿈을 여는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2025-02-18

월포 龍山을 오르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이른 봄맞이라도 하듯 야트막한 산엘 올랐다. 청하면 월포리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나즈막한 용산으로 비교적 가볍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중턱과 정상 부근에 군데군데 너럭바위가 있고 특히 청동기시대의 문화유산인 고인돌(지석묘)이 동쪽 등산로 초입에 있으며, 큰 암반 위에 솥모양으로 움푹 팬 솥바위 2개가 있을 정도로 신기하고 유서가 깊어 예로부터 청하 고을에서 신성시된 산이기도 하다. 용의 머리 형국을 하고 있다는 용산(龍山)은 용산으로 불러지게 된 슬픈 전설이 있는 산이다. 즉, 아주 오래 전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월포리의 한 부부가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예사롭지 않아 장차 장수가 될 아이이나 큰일을 저질러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라며 집안 어른들의 우려와 결정에 따라 더 자라기 전에 죽는 순간 그 산에 살던 용이 아들의 한과 함께 하늘로 날아가버렸다고 해서 ‘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믿기지 않은 주술적인 전설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액운타파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숨고르기 하듯이 천천히 등산로로 진입하는데 용을 연상케 하는 큰 소나무 뿌리가 투박한 모습으로 길바닥에 드러나 꿈틀대는 듯하니, 불현듯 전설 속의 승천한 용의 화신이 현상계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탄한 솔숲 주변에 2기의 고인돌을 지나서 크고 작은 소나무가 빽빽한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오르니 이내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용두암에 이르렀다. 활처럼 휘어진 월포리 해변과 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작년말에 개통된 동해중부선 철도가 너른 들판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힘차게 뻗어 있다. 그 옆으로는 포항~영덕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인데, 올해 말 개통되면 동해안을 잇는 교통망·관광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꿈에 부풀어 있는 듯하다. 북서쪽으로는 멀리 정상 부근에 잔설이 희끗한 내연산~천령산~삿갓봉의 연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들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청하읍내가 손에 잡힐 듯 정겹고 평온하게 다가온다. 또한 동쪽으로는 지척의 이가리 해안선 너머 호미곶 반도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용산 정상에서는 결코 조망할 수 없는 탁 트인 전경이 발 아래에 그림처럼 펼쳐지니, 과연 전설이 깃든 용산에서 용 한 마리를 타고 천하를 유람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해발 200여 미터의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는 너럭바위 등이 자리잡아 승천을 준비하는 교룡(蛟龍)의 억센 근육처럼 여겨졌다. 순탄한 둘레길 언저리에는 멸종 위기 종인 망개나무 덤불이 빨간 열매로 산객을 반기고, 진달래는 멀지 않은 날의 개화를 준비하는 듯 작은 망울을 내밀며 부풀고 있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던가. 몸을 움직여 걷고 뛰거나 함께 어울리다보면 저절로 생기가 나고 활력이 감돌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산보하듯이 산길을 걸으면 이것저것 보이고 새롭게 느껴지는 바가 많아져서 산행 그 자체가 힐링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25-02-18

떼돈 버는 극좌·극우 유튜버의 위험성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19세기 한 독일 철학자는 “모든 극단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이 말의 유효성은 세상이 바뀐 21세기 오늘도 유효하지 않을까? 이른바 ‘12·3 비상계엄 선포’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여기에 꽤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는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 집회 와중에서 “한국인들이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통합의 구심점이 될 인물도, 사람들을 화해와 상생으로 이끌 이념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혼란 속에서 유튜브 콘텐츠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진보와 보수 유튜버를 막론하고 ‘우리 편이 아니면 없애야 할 적’이라는 견해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형국인 것. 콘텐츠의 성격이 수익으로 직결되고 있어 유튜버들의 과격성과 편향성은 갈수록 더 커진다. 최근 매일경제는 ‘계엄 사태 이후 여론이 극단으로 분열되면서 혐오와 갈등을 먹이삼아 덩치를 키우는 정치 유튜브 채널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작년 12월과 올해 1월 상위 30개 유튜브 채널의 후원 수익은 19억6900만원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2배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수입이 대폭 늘어난 유튜브 채널의 절대다수는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자기 진영의 목소리와 의견만을 편협하게 담아낸 것들이다. 기계적으로라도 중도와 중립을 지키는 유튜버가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자칫 극좌와 극우의 입장을 가지지 않으면 SNS에서도 ‘돈이 안 되는’ 세태가 자리 잡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다. 앞서 한 말을 다시 반복한다. 모든 극단은 위험하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2-17

‘공화(共和)정신’ 없는 공화국의 위기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우리헌법 제1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결합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자유와 경쟁의 정신, 그리고 공화주의의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함께 존중해야한다는 것이 헌법정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화’에 치중한 나머지 ‘공화주의’ 가치를 경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공화정신이 없는 민주공화국은 허울뿐이다. 정치는 전쟁이 되었고,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분열과 대립이 극심하다. 다수의 횡포가 벌어지는 민주주의는 소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공성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와 함께해야 한다. 공화주의가 요구하는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즉 ‘관용과 절제의 정신’이 다수결 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라. 공화정신의 실종으로 나라는 온통 싸움판이다. 국가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은 야당을 외면하고,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다수의 폭정’을 서슴지 않는다. ‘나’와 ‘내편’은 있으나 ‘우리’가 없는 증오·배제·독선의 정치는 민주공화정에 대한 배신이다.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한 법치·공공성·시민적 덕성과 같은 공화정신은 없고 이념·진영·지역·세대·성별 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으니 나라의 미래가 암담하다. 이러한 공동체 위기가 다시 공화주의를 불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야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공화정신이다. ‘더불어’는 없고 ‘친명’만 있는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국민’은 안중에 없고 ‘용산’ 눈치만 보는 국민의힘은 모두 환골탈태해야 한다. 공동선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권력이 개인적·정파적 이익을 위해 남용되고 있다. 공공성을 잃은 권력의 독선은 공화국의 적이다. 따라서 여야는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소통·공존·통합의 정치를 모색해야 한다. 한편 주권자인 시민의 책임도 무겁다. 공화국의 시민은 권력의 ‘수동적 통치대상으로서 친애하는 국민’ 아니라 정치의 ‘능동적 주체로서의 동료 시민’이다. 진영정치에 예속된 신민(臣民)은 자유의지를 가진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시민이 진영정치의 볼모가 되면 민주공화정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치철학자 아렌트(H. Arendt)는 ‘시민의 덕성’과 ‘신뢰의 윤리’가 없으면 공화국은 위기에 처한다고 했다. 시민의 자유의지와 덕성, 책임감과 균형감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천박한 ‘중우정치(mobocracy)’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민주화를 넘어 공존·공생·공영을 위한 ‘공화의 길’을 가야 한다. ‘너와 내가 함께하여 우리가 되는 공화정신’이 있어야 죽어가는 나라를 살릴 수 있다.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좌우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을 배격하고 합리적 중도주의자들의 지적·도덕적·정치적 노력에 성원을 보내야 한다. ‘민주’와 ‘공화’가 동행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2025-02-17

연이은 드라마 촬영으로 관광명소가 된 포항

포항이 K-드라마를 대표하는 도시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최근 종영된 SBS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촬영지인 포항시내 관광명소들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주 촬영지인 송도송림테마거리, 이가리 닻 전망대,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등은 드라마 방영 중에도 관광객들로 붐볐다고 한다. 이 드라마는 포항시가 제작을 지원했다. 12부작인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 등의 OTT 플랫폼에서도 시청률 1, 2위를 차지할 정도로 K-드라마 팬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포항시는 촬영지에 포토존과 안내판을 설치하고,‘나의 완벽한 포항 여행’이라는 주제로, 드라마 투어코스를 별도로 조성할 계획이다. 포항은 인기드라마였던 ‘동백꽃 필 무렵’(2019)과 ‘갯마을 차차차’(2021)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인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는 세트장을 연상케 할 만큼 관광명소가 됐다.‘갯마을 차차차’의 촬영지인 청하 공진시장은 특히 동남아시아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요즘은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류팬이 많다. K-드라마와 K-팝, K-푸드 등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인구가 2억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이들을 ‘아름다운 바다도시’ 포항으로 유치하기 위해 포항시민 모두가 홍보맨이 될 필요가 있다. 포항은 K-드라마 외에도 다양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지난 설 연휴에는 포항 관광명소를 찾은 관광객이 16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광도시로서의 성공적인 새해 출발을 한 셈이다. 앞으로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와 연계한 관광상품을 계속해서 개발해야 한다.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관광인프라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합심해서 관광객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음식점과 관광상품 가게 주인, 택시기사 등 시민 모두가 친절하게 관광객을 맞이해 다시 찾고 싶은 포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관광의 최대 기피요인으로 지목되는 바가지요금은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

2025-02-17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사각지대 없도록

전세사기 피해자를 돕기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올해부터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금이 자치단체별로 본격 지급되고 있다. 대구에서는 수성구청이 30대 피해자 A씨에 대한 지원금을 처음으로 지급했다. A씨는 2021년 주거용 오피스텔을 임차했으나 계약기간 종료후에도 전세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해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은 케이스다. 달서구청도 법에 의해 피해자로 결정된 피해자를 대상으로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할 예정인데, 가구원 수에 따라 1인가구 80만원, 2인가구 100만원, 3인가구 120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수년 전부터 전세를 끼고 부동산을 매입하는 캡투자 방식으로 전세보증금을 가로채는 사기가 극성을 부려왔다. 대구에서만 2년동안 500건이 넘는 전세사기가 발생했고, 피해자 가운데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있다. 전국적으로 비슷한 수법의 전세 사기가 활개치면서 경찰청이 집중단속에 나서 약 2년 동안 무려 8323명을 검거하고 그중 610명을 구속하기도 했다. 국토부의 전세사기 피해자 접수 신청에 3만3000여 건이 접수되고 국토부의 심의과정을 거쳐 전세 피해자로 인정된 사례만 2만5000건이 넘는다. 특히 피해자의 70%가 40대 미만의 젊은이여서 사회적으로 던진 충격이 컸다. 전세 사기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 은행에 이자를 꼬박 내야 하는가 하면 집에 따라 단전·단수도 감당해야 했다. 최근 국민의힘 조지연 의원(경산)은 “현행법은 생계, 의료, 주거, 교육 등의 기본적인 지원만 규정하고 있어 이사비용이나 노후주택 시설보수 등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특별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이는 전세 사기 피해자가 현행법에 따라 일부 구제는 받으나 미처 미치지 못했던 부분도 보상을 받도록 법의 범위를 넓혔다는 말이다. 그러나 법을 떠나 아직도 많은 전세 피해자가 고통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생활안정금 지원을 계기로 그들의 상처를 더 보듬어줄 세심한 행정이 필요하다.

2025-02-17

당김음

세상은 늘 일정한 질서 속에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높은 곳에 있던 물이 아래로 흘러가고 낮은 곳에 고여 있던 물이 증발해 다시 하늘로 올라가듯, 자연의 순환 속에는 끊임없는 위치의 이동이 있다. 땅 위에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조차도 계절에 따라 잎을 떨구고, 새로운 가지를 뻗으며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는 익숙한 자리를 영원할 것이라 믿지만 세상의 모든 위치는 바뀌고 흐름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지위와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한때는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다시 바닥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던 사람이 어느 순간 세상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흔히 ‘성공’과 ‘평범’을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유동적이다. 음악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당김음은 원래 있어야 할 박자를 벗어나 예상보다 앞서거나 뒤로 밀려난다. 순간적으로 리듬이 어긋난 듯 보이지만 그 변주가 있기에 음악은 더 풍부한 은유를 만들어 낸다. 규칙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조화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탈선이 곡을 더 생동감 있게 만든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 졸업한 지 꽤 시간이 흘러서인지 친구들의 얼굴에는 그때와는 다른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금세 그 시절로 돌아가 건배를 하며 유치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당김음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다음 달에 있을 동창회 행사를 앞두고 그 시절 공부를 제일 못했던 친구가 유명한 사업가가 되어 기부금을 척척 내고 있었다. “올해만 해도 몇 백만원은 냈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반면 공부를 제일 잘했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학생 때 우리가 부러워하던 ‘성공한 직장인’이었다. 사회적으로 보면 안정적인 직장이지만 그는 “와이프 눈치 보여서 기부는 힘들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학생 때 우리는 성적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할 것처럼 생각했다. 공부를 잘하면 성공하고, 못하면 힘든 삶을 살 거라고 믿었다. 물론 어른들의 경험적인 삶에 비추어 보면 맞는 말일 수는 있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어떤 친구는 예상대로 정박을 따라갔고, 어떤 친구는 엇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떤 친구들은 아예 박자를 바꿔가며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김경아 작가 어쩌면 인생이란 단순한 4분의 4박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해진 박자에 맞춰 사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당김음처럼 예기치 않는 흐름이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공부를 못하던 친구가 사업가가 된 것도, 공부를 잘하던 친구가 월급을 받으며 사는 것도 결국은 각자의 박자대로 살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음악을 할 때 리듬을 타는 감각을 좋아했다. 일정한 박자 위에서 튀어나오는 당김음은 연주에 긴장감을 주고 곡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규칙적인 비트 속에서도 변주를 만들어 흐름을 깨뜨리는 순간 엇박이 정박이 되는 것이다. 중년이 된 지금은 음악이 아닌 글을 쓰고 있지만 내 삶의 리듬은 여전히 당김음처럼 흘러간다. 예측했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을 때 마디마디를 연주하듯 글을 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나만의 박자로 살아가는 것, 박자가 어긋날 때조차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음악일지도 모른다. 동창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자동차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안에도 어김없이 당김음이 섞여 있다. 박자가 예상과 다르게 흐를 때 우리는 놀라고 어색해하지만 그 당김음이 음악을 완성 시킨다. 살며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당김음이 만들어 내는 리듬을 즐기며 나만의 박자로 걸어가 보기로 한다. /김경아 작가

2025-02-17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교실을 지나며

도쿄대 정문에서 왼쪽으로 50미터 정도 걸어가면 고풍스런 강당이 하나 나옵니다. 정식 명칭은 ‘도쿄대학 교양학부 900번 교실’인데요. 1969년 5월 13일, 이 곳에서는 당시 일본의 사상지형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던 미시마 유키오와 가장 왼쪽에 있던 전공투(全学共闘会議)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펼쳐졌습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미시마 유키오는 ‘국화’와 ‘칼’을 모두 쥔 ‘절대 천황제’를 주장했던 인물인데요. 이런 미시마를 초대하여 토론을 벌인 전공투는 권위주의 대학의 해체와 발본적인 혁명을 추구한 조직이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를 퇴진하게 한 ‘1960년 안보 반대 투쟁’이 “전후 민주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었다면, 대학 봉쇄와 운동 분파 간의 격렬한 폭력을 일으킨 ‘70년 안보 반대 투쟁’은 “전후 민주주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 운동이었는데요. 미시마와의 토론회가 벌어졌을 때는, 전공투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도쿄대를 점거한 상황이었습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선 자와 가장 왼쪽에 선 자들의 만남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의외로 당시 기록을 담은 ‘토론 미시마유키오 VS 도쿄대 전공투(討論 三島由紀夫 VS 東大全共闘)’(신조사, 1969)에 따르면, 이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우호적이기까지 합니다. ‘900번 교실’ 앞에는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털복숭이 상체를 수시로 드러내곤 하던 미시마를 ‘근대 고릴라’로 소개한 입간판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고릴라 사육료가 100엔 이상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걸 보며 미시마와 학생들은 서로 웃음을 나누었다는데요. 인간이 웃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애당초 이 토론은 사생결단식의 대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상적 지형의 양극에 서 있는 둘을 만나게 한 공통분모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기성 체제에 대한 분노와 부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전후 민주주의(평화주의)’로 일컬어지는 ‘일본의 기성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했던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미시마가 모두 발언에서 “나는 지금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사상과 지식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라며, “제군이 한 일들을 전부 긍정하지는 않지만 다이쇼 교양주의로부터 유래하는, 우쭐대는 지식인의 콧대를 꺾었다는 공적은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라고 말하자, 학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미시마와 전공투의 차이란, 미시마가 의미와 가치를 묻지 않는 기성 정치 체제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전공투 학생들은 권위적인 대학체제와 마루야마 마사오와 같은 전후 지식인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 정도겠지요. 미시마가 주장한 ‘천황 친정’과 전공투가 주장한 ‘직접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가 중간 권력 구조의 매개물을 거치지 않고 국가의지와 직결하는 것을 꿈꾼다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일본이 고도 경제 성장의 궤도에 오르고 평화로운 국가로서 재부상하면서, 미시마와 전공투 학생들은 오히려 삶에 대한 공허함과 무의미에 괴로워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미시마의 대표작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금각사’(1956)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특징입니다. ‘금각사’는 미조구치라는 말더듬이 청년이 금박을 입혀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금각을 불태운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인데요. 흔히 이 작품을 ‘미에 대한 절대적 동경과 그로부터 비롯된 왜곡된 심리’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는 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그러나 ‘금각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오히려 인간에게는 불가능도 한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세계를 맘대로 바꾸려고 한 근대의 근본 원리(심리)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의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근대(미조구치)’란 결국 그 어떤 ‘위대한 전통이나 아름다움(금각)’도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미시마의 두려움이 작품의 저류에는 강하게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근대의 원리나 심성만이 전면화되면 예술도 정치도 불가능하게 된다고 미시마는 믿었던 것이 아닐까요? 1969년의 도쿄대 토론으로부터 1년 후에 미시마가 할복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면, 전공투는 3년 후에 아사마 산장 집단 살인 사건으로 사회적 죽음을 당합니다. 미시마는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지키지 못한 약속, ‘산케이신문’, 1970년7월7일)며 할복까지 했지만, 미시마의 죽음은 자신의 우려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은 1970년 미시마의 자살과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일본의 ‘좌우’가 모두 몰락했으며, 결국 현상태를 수용하는 가치 부재의 시대가 펼쳐졌다고 말하는데요. 어쩌면 1969년 미시마와 전공투가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교실에서 나누었던 토론은 전후 일본의 마지막 사상투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2-17

요즘 풍경

허민문학연구자 동네 카페에서 주문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기다리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야, 너희 계속 내 말 안 들으면 계엄 선포한다!”, “그래 맘대로 해봐라, 바로 탄핵할 테니까.” 내가 저 또래였을 때, ‘계엄’이나 ‘탄핵’이라는 단어를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선포’라는 말도 몰랐을 거다. 이렇게 빨리 알아야 될 말들인가 싶어서 괜히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세상의 변화는 일상의 언어로부터 감지되기 마련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요즘처럼 법률용어가 친숙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인용’과 ‘기각’, ‘가처분’과 ‘적부심’, ‘공소장’과 ‘증인심문’, ‘평의’와 ‘변론 기일’, ‘피청구인’과 ‘방어권’ 등등, 전에는 알지도 못할 낱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형사재판’과 ‘헌법재판’의 차이 정도는 마치 상식처럼 알고 있을 거다. 세상이 법의 언어와 사고에 지배되고 있는 형국인데, 이건 모두에게 긍정적인 현상은 아닐 거다. 법이 잊힌 상태가 가장 평화로운 법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학술대회 때 일이다. 발표를 맡은 선생들 다수가 ‘내란성 우울증’으로 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나도 각종 ‘내란성 질환’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아마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1차 체포영장 집행이 무산된 직후부터였을 거다. ‘2차 체포영장은 언제쯤 발부될지’, ‘이번에 발부된 영장은 대체 어떻게 집행할지’ 등,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속보를 확인했던 것 같다. ‘내란성 불면증’으로 잠을 뒤척이다가도 체포 여부부터 확인했으니, 피로하지 않은 온전한 하루를 갖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탄핵 심판 중계로 ‘내란성 위염’이 다시 도졌다고들 했다.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다”, “의원이 아니라 요원을 빼내라는 거였다”, “계엄의 형식을 갖춘 경고였다”, “탄핵공작이다” …. 언제까지 이런 궤변과 망언이 실시간으로 중계돼야 하는 걸까? “내란성” 신종 질환의 발견은 ‘비상계엄’이라는 사회적 트라우마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지시하기 위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상처를 익살스럽게 상대화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의 방어 전략으로 봐야 한다. “내란성○○”을 함께 앓으며 서로를 위무하고 버티는 거다.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던 날 기사님이 말을 걸었다. “오늘 손님이 다섯 번째네요. 찾는 사람이 없으니 알아서 셈이 됩니다. 제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데, 요즘은 누가 타든 하소연하게 되네요.” 그렇게 말이 없다던 기사님은 내가 내릴 때까지 말을 했다. 손님이 없을수록 말을 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택시 운전 20년 만에 이런 불황은 없었다는 호소를 듣다 보니 언제부턴가 한산해진 지하철의 광고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발언은 이러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으니 제발 탄핵 국면만 지나가길” 이게 요즘 풍경이다. 지난 일주일간 겪은 일을 적은 것만 해도 이렇다.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심판 중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체포가 없었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12·3 비상계엄은 아이들의 말과 우리들의 마음을 오염시켰다. 작지만 이미 커다란 일이다.

2025-02-17

딱지 두 개

강길수 수필가 요에 떨어진 딱지 두 개를 주워 책꽂이 책 앞에 두었다. 송사리 새끼와 나는 새 모양이다. 시간이 가며 그것이 떨어진 피부의 감각과 고통, 느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살펴보고 싶어서다. 지난 연말, 왼쪽 겨드랑이 아래 피부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질감이 생겼었다. 약한 통증을 동반하기도 하면서 메뚜기라도 붙어 기어가듯 왼쪽 등으로 갔다가 돌아서 앞 왼 가슴 위까지 옮겨 다녔다. 처음 겪는 증상이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 쓰였다. 속으로, “이게 어른들이 말하던 근육통 곧,‘담’인 게로구나”하고 생각했다. ‘텃밭에서 삽질 조금 했다고 담이 다 걸리다니’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삼일이 지나 제야(除夜)가 왔다. 담 증상이 멈추지 않고, 피부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아내에게 등 좀 살펴 달라고 했다. 그녀는 피부에 발진이 왔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하였다. 이튿날이 신정 휴무여서, 그다음 날 피부과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피부 발진 모양을 보자마자, ‘대상포진’이라고 진단했다. 아프냐고 묻기에 별로 안 아프다고 했더니, 건강한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곧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주사 맞고, 레이저 쏘이고, 처방 약을 사와 복용하는 과정이다. 일요일을 빼고 매일 두 주 가까이 통원 치료를 받았다. 다른 환자들처럼 바늘로 콕콕 찌르듯 심한 통증이 없어 견딜만했다.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딱지가 잘 앉았다. 돌아보면 중 2학년 겨울방학 때, 배가 매우 아파 고향 집에 한 달가량 앓아누운 적이 있다. 또 군시절 왼손등이 부어 두 주간 의무대에 입실했었다. 그 후로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어, 나름 건강에 자신하며 지금껏 살았다. 대상포진 예방접종 광고를 볼 때, 나와는 먼일이라고 여겼었다. 한데, 그게 오고 말았으니 삶은 정말 새옹지마(塞翁之馬)인가 보다. 딱지를 두 개를 왼손바닥에 놓고 바라다본다. 몸에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숨은 증거이자, 자기치유 싸움에서 희생된 세포들의 실체다. 반세기 이상 몸 면역력의 기세에 눌려 호시탐탐 공격기회를 노리던 수두 바이러스. 면역력이 떨어지자 싸움을 건 거다. 면역항체는 원상회복의 항전을 하여 상처 입고, 전사도 했다. 약과 레이저는 면역항체 지원군으로 참전, 이기도록 도왔다. 싸움 동안 쳐부순 바이러스와 전사한 면역항체가 뒤엉켜 말라붙은 딱지. 마침내 면역항체가 이겼다는 증표이기도 한 딱지…. 생각해보면, 살아있는 내 몸과 모든 생명체의 몸은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들의 싸움터이기도 하다. 미시세계부터 생태계, 나아가 우주까지 생존경쟁의 싸움 프랙털이라는 추론도 든다. 한편, 살아오면서 스스로 모르는 딱지가 마음에도 많이 붙었을 것이다. 여태 육신의 딱지는 신경을 쓰면서, 마음의 딱지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해성사가 있지만, 그것도 언제나 육신에 얽힌 것들이었다. 현대 양자역학이 물질과 정신이 상호작용을 한다고 밝히는 데도, 마음의 딱지에는 무관심했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의 딱지도 함께 살피는 삶을 살아내야겠다.

2025-02-17

문장 속에 머무르기

얼마 전 어느 술자리에서 지인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어휘력을 늘릴 수 있느냐고. 나도 딱히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어서 명쾌한 답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학생들에게 매 학기 첫 수업마다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어 그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은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고난도의 행위다.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편한데, 운동 경험이 없는 사람이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한 첫날부터 무거운 바벨을 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고강도의 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 근육과 근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레이너로부터 바른 자세와 운동법을 배워 몸에 익힌다. 언어에도 근육이 필요하다. 언어의 근육을 만들기 위해선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름다운 문학작품들이 바로 그 트레이너다. 시나 소설의 멋진 문장들을 여러 번 소리 내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는 것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언어의 근육이 생기고 가용어휘 또한 풍부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어딘지 허전했다. 시와 소설을 읽으며 좋은 문장에 밑줄을 치고 그걸 외우는 일이 어휘력을 늘리기 위한 기능적 행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문장을 오래 곱씹으며 그 안에 가만히 머무르는 것에는 다른 효용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가꿔준다. 순간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이 한 문장만큼은 외우고 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에게 봄이라는 계절은 이 문장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 문장을 알기 전에는 벚꽃과 목련과 철쭉이 피어도 매년 반복되는 자연 현상 정도로만 여겼지 꽃이 예쁜 줄 몰랐다. 하지만 이 문장을 알고 난 20대 초반의 어느 날부터 나는 꽃이 피면 꽃그늘 아래 단 5분이라도 머무를 줄 아는 사람이 됐다. 소설 속 허 생원과 동이가 보름달 아래 호수처럼 반짝이는 메밀꽃 윤슬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 문장은 내게 눈 내린 아침의 황홀한 흰빛을 오래토록 감각하게 해줬다. 저 문장을 알기 전 눈은 그저 유년의 추억을 회상케 하는 매개이거나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였다. 내 청춘의 감수성은 저 문장을 통해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와 빛으로 들어섰으며 거기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정지용의 ‘유리창1’ 같은 시를 만나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는 사람의 마음과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이의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4년 전 초여름,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시골길에서 큰 교통사고가 났을 때 일이다. 콘크리트 기둥과 부딪치는 그 찰나, 쾅! 세상의 모든 문들이 일제히 닫히는 소리, 내겐 억겁과도 같이 느껴진 몇 십 초 후 정신을 차렸는데 내가 살았는지 죽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엉뚱하게도 시를 외웠다. “가자 애인이여, 햇빛사냥을. 일어나 보이지 않는 덫들을 찢으며 죽음보다 깊은 강을 건너서 가자. 모든 싸움의 끝인 벌판으로”라는 장석주의 ‘햇빛사냥’을. 그리고 한 편 더, 이성복의 ‘연애에 대하여’의 한 부분 “내 살아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를 외우고 나서야 내가 살았음을 알았다. 그 일을 겪은 후 내게 시와 소설 속의 한 문장은 단순한 글귀가 아니게 됐다. 좋은 문장은 때로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이 되고, 또 때로는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되며, 마침내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다. 얼마 전 일본 도쿄에 가 우에노 공원에 핀 동백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한 얼굴이 떠올랐다. 긴 겨울 지나고 봄의 예감이 부풀어 오르는 요즘 내가 장기투숙 중인 문장은 이것이다. “그는 땅바닥까지 늘어진 동백 가지를 들치고 그녀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두운 동백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머리칼에 동백 가지에서 떨어진 이슬이 묻어 있었다.”(조용호 소설 ‘그 동백에 울다’ 중)

2025-02-17

정리의 힘

2025년도의 2월이 끝나가고 있는 현 시점이지만, 나는 아직도 새해의 첫 마음으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새로이 바꾸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우선 일 년 여간 고집했던 집 안의 가구 구성을 전부 바꾸고 있고, 일 년 사이에 늘어버린 몸무게 탓에 작아져버린 여러 옷들을 옷장 속에서 골라냈으며, 그간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을 전부 골라내어 버리거나 나누기 시작했다. 그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집 안의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교체해주며 다시금 새 것처럼 빛을 내는 작업을 두 달을 거쳐서야 드디어 끝을 냈다. 그 결과 지금 나의 원룸엔 내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이 남아 있다. 꼭 필요한 가구, 여분도 없이 지금 딱 쓸 만큼의 물건의 양들, 손을 뻗으면 필요한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며 나는 지난 한 해에 내가 그토록 집착하던 평안의 상태를 드디어 이르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평안, 차분한 마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나는 작년 한 해 런닝도 열심히 뛰어보고, 기록도 4개의 노트에 나누어 기록할 만큼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기도 했다. 심심하면 자발적으로 글도 써보고, 뜨개질도 하고, 새로운 취미를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편안한 상태에 이렇게 쉽게 도달하기까지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청소라는 것을, 이제야 깨끗하고 명쾌해진 공간 속에 놓여 뒤늦게 깨달았단 사실이 조금은 허탈하고 또 피식 웃긴다. 집을 새로이 가꾸면서 나는 아주 작은 사소한 디테일에도 관심을 기울기 시작했다. 자주 먹는 약들은 약봉지에 담겨진 채로 하나씩 뜯어 먹는 것이 아닌, 불투명 상자에 칸칸이 약을 정리해서 바로 꺼내먹을 수 있게 만든 것, 휴지 케이스를 사서 두루마리 휴지가 방바닥에 마음 대로 굴러다니지 않도록 깔끔하게 정리해 놓는 것, 식탁 테이블 한 켠엔 언제든 따뜻한 차를 내려마실 수 있도록 깨끗하게 씻어 놓은 다기와 다구가 잘 정리되어 있는 것, 속옷 서랍을 열면 여유분의 속옷들이 말끔하게 개켜 있는 것 등등. 매일 조금씩 부지런히 해나가야 하는 집안일이라는 루틴이 없다면 절대 유지될 수 없는 일들, 하지만 조금만 움직인다면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마음의 평화를 찾는 데에 도움이 주는 아주 작은 요소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루티너리하게 움직이며 꾸준함의 힘에 대해 더욱 알게 되는 요즘이다. 동시에 하루에 시간을 내어 조금씩 집안일을 하다보면, 주말 내내 오랜 시간을 들여 청소를 할 필요가 없단 사실도 알게 됐다. 평일엔 일에 치여 집안일을 미루고, 주말에 몰아서 하는 편이었던 터라 주말만 생각하면 엄청난 가사노동에 시달릴 것이라 늘 지레 겁을 먹었지만, 이젠 조금씩 해나가는 덕분에 가사노동이라는 큰 부담감에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다. 또한 새로운 물건을 살 때에도, 지금 완벽하게 구성된 나의 작은 방 안에 이 물건이 꼭 필요한 것인지, 곧 후회하며 다시금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지, 꼭 필요한 것에 대해 나만의 기준점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꼭 필요한 물건만을 들이는, 이상적이면서 유용한 생활상을 쉽게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말을 남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아는 정리를 통해 스트레스를 없앨 수 있고, 집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삶에서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말했다. 또한 정리에도 철학이 있어야만 잘 할 수 있고, 정리를 통한 자기 변화, 자신감 회복, 그리고 버리면서 알게 되는 비움의 미학을 강조한다. 물론 정리해둔 상태가 그대로 쭉 유지되면 좋겠지만 또다시 바빠지는 일상과 상황 속에서 물건은 흐트러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곤도 마리에는 정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정리를 해야 하는 ‘정리 리바운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물건을 항상 그 자리에 두는 수납법만 유지된다면 일상을 더욱 윤택하게 유지할 수 있음을 말하기도 했다. 삶은 언제나 깨끗한 방처럼 완벽할 수 없다. 그건 작년 한 해에 내가 무수히 깨달은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니 올해는 조금 더 유연한 자세로, 단정한 일상을 위해 오늘도 집 안을 더욱 애정 어리게 가꾸고 있다.

2025-02-17

스스로 물러날 시간은 조금 남았다

김진국 고문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이 끝나가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일 10차 변론기일을 한 번 더 열기로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 조지호 경찰청장을 증인으로 부른다. 윤석열 대통령 측이 요구해 열리는 추가 변론기일이다. 더 이상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으면 3월 15일 전후 탄핵 심판 선고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가 모두 마지막 변론기일 2주일 뒤에 이루어졌다. 법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전례에 따라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으로선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할 것이라고 보는 법학자가 많다. 옳고 그르고는 잠시 옆으로 밀어놓자. 탄핵을 찬성하건, 반대하건 예측은 냉정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물러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파 진영에서부터 윤 대통령의 자진 사퇴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민주당 쪽이 오히려 자진 사퇴를 반대한다. 탄핵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도 자진 사퇴 의견이 있었다. 사과 요구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탄핵으로 갔다. 사과했지만 별로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일부 강경파가 사과하면 오히려 손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됐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도 사과에 인색했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다. 적기를 놓치면 진정성을 의심받고, 효과도 보지 못한다. 박 전 대통령은 번번이 적절한 시기를 놓쳤다. 야당에 총리 추천을 제안하는 것도, 대국민 사과도 언제나 뒷북을 쳤다. 자진 사퇴는 엄두도 못 내보고 탄핵으로 끝났다. 윤 대통령에게는 아직 스스로 물러날 기회가 있다. 가장 좋은 선택은 비상계엄이 실패했을 때 사퇴해야 했다. 그게 국가 지도자다운 처신이다. 국가적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대통령 부재는 국정 마비를 의미한다. 더구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국제 관계가 격랑 속이다. 우리만 손 놓고 있다. 윤 대통령에게는 좋은 기회다. 여론 흐름이 좋아졌다. 보수가 결집했다. 비상계엄 전 20%대에 머물렀던 윤 대통령 지지율이 최근에는 50%를 넘긴 조사까지 나왔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호전이다. 이런 결집 현상이 국민의힘에는 딱히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중도 확장에 걸림돌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 개인에게는 무척 고무적이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다. 바닥을 치던 윤 대통령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 앞으로도 이런 지지율이 계속되기는 쉽지 않다. 스스로 물러나는 게 지도자의 품격에도 맞는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의 원인이 야당 횡포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싸우더라도 법의 경계가 있다. 그 경계를 벗어난 사람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명령에 따랐을 뿐인 부하들과 그 책임을 다투는 모습은 너무 군색하고, 애처롭다. 스스로 물러난다면, 그동안의 언행을 모두 정리하고, 지도자답게 책임을 안고 갈 수 있다. 마지막 기회다. 윤 대통령은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욕심을 내려놓고 나면 생각이 가벼워지고, 설득력도 커진다. 탄핵이 끝이 아니다. 최근 민주당은 다시 ‘명태균 특검’을 꺼냈다. 형사재판과 특검이 차기 대통령 선거 이후까지 이어질 수 있다. 윤 대통령 내외에게는 고통이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탄핵 직전 사퇴했다. 제럴드 포드 부통령은 대통령직을 승계한 직후 “대통령이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혐의에 대해 기소 전 특별사면한다”라고 선언했다. 닉슨은 형사처벌을 면했다. 포드는 이 일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윤 대통령은 스스로 사임해도 닉슨처럼 곧바로 사면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정상참작은 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과 역사의 심판이다. 국민의힘은 더 문제다. 당 공식 입장이 아니라지만, 윤 대통령과 한 몸으로 움직이고 있다. 보수 결집 효과는 있겠지만, 중도 확장을 포기해야 한다. 이대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 이제 돌아서기도 어렵다. 가능성은 작지만, 윤 대통령의 결단이 가장 쉬운 길이다. 지도자다운 뒷모습은 국민의힘과 보수 유권자에게 최소한의 보답이 될 수 있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2-16

조기대선에 ‘한동훈 공간’ 있을까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머지않아 찾아뵙겠다”며 정계 복귀를 시사했다. 차기 대선 도전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여진다. 앞으로 여당내 경선구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한 전 대표가 정계복귀와 관련해 공식 입장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 입장을 밝힌 이후 당내에서 ‘탄핵 찬성파 책임론’이 거세지자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그 이후 잠행을 하며 ‘출사표’ 성격을 지닌 책을 쓰는데 주력해 왔다. 그는 잠행 중에도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 조갑제 닷컴 대표 등 보수·진보 진영 원로 인사를 두루 만나며 정치 행보에 관한 조언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친한계 정치인들도 최근 그의 등판 분위기를 조성해왔다. 그의 지지모임인 ‘언더73’(1973년생 이하 소장파)은 이달들어 유튜브 채널 ‘언더73 스튜디오’를 개설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김상욱·김소희·김예지·진종오·한지아 의원 등이 소속돼 있다. 관심사는 조기대선이 치러질 경우 그가 배신자 프레임을 극복하고 여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느냐다. 그는 당 대표 사퇴 전까진 당내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윤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 배신자 프레임에 갇히면서 지지도가 당내 군소후보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다. 국민의힘 경선룰은 민심(국민여론조사)50%, 당심(선거인단여론조사)50%를 반영해 후보를 뽑는 방식이다. ‘역선택’을 감안해 경선룰을 바꿀 가능성이 있지만, 민심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더라도 당심을 얻지 못하면 경선에서 이길 확률이 낮아진다. 그가 윤 대통령 탄핵에 동조한 이후 친윤계에선 그를 마치 원수 보듯 하고 있다. 경선이 시작되면 집단적으로 ‘배신자 프레임’을 씌워 공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선 유승민 전의원 사례와 닮았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16일 정치 복귀를 선언한 그를 향해 “윤 대통령이 탄핵과 구속을 당하고, 당이 분열되고, 보수가 이렇게 몰락한 계기를 만든 장본인”이라며 비난했다. 그의 정치적 중도성향이 오세훈 서울시장과 유사한 것도 핸디캡이다. 오 시장은 이미 조기대선에 깊숙하게 몸담은 상태다. 지금 국민의힘 지지율은 그가 대표직에 있을 때보다 상승추세에 있다. 계엄선포 이후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우호 기류가 퍼졌고, 일부 지지율은 민주당을 앞서는 결과까지 나왔다. ‘반윤’의 대명사처럼 돼 버린 한 전 대표가 끼어들 공간이 크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헌재 탄핵심판에서 윤 대통령 파면이 결정될 경우 ‘당심’이 요동칠 가능성은 있다. 그 시점에서는 ‘당선가능성’이 경선의 최대변수가 될 것이다. 한 전 대표가 여당의 취약지점인 중수청 (중도·수도권·청년) 지지세를 이어간다면,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등을 돌린 강성 보수층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