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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양군, 지방소멸대응 정책으로 ‘머무르고 싶은 도시’ 도약

오도창 영양군수 영양군의 큰 화두는 지방소멸이다. 이는 영양뿐만 아니라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다양한 지원 사업을 통해 지방소멸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젊은층이 양질의 일자리나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찾아 수도권 및 대도시로 떠나는 모습이 어쩌면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얀마 난민 정착 시범사업은 타지자체와 차별화된 정책이다. 정부가 5년 내 체류 외국인 300만명 시대를 전망하고 있다. 이에 영양군은 농촌지역 최초로 ‘재정착 난민 안정 정착 시범사업’으로 유엔 난민기구(UNHCR)와 협력해 미얀마 난민 40여 명을 영양군에 정착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재정착 추진 대상은 미얀마 내 소수민족인 카렌족이다. 법무부와 협의하고 있으며 이르면 올 하반기 실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영양군이 그들에게 제2의 고향이 될 수 있는 하나 된 사회를 만들겠다. 인구소멸 대책 일환으로 교통망 확충도 서두르고 있다. 교통망을 만드는 것은 지역 간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고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도로 인프라는 인구 유출, 공기관 유출, 경기 침체, 의료시설 부족 등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는 환경 개선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방치돼 있던 남북9축 고속도로(영천∼강원)를 뚫고 여기에 영양군이 포함돼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을 확보해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다. 고속도로는 영양이 가진 잠재력 넘치는 관광지를 더욱 보여줄 수 있는 기회와 단절의 벽을 넘어 지역발전의 새로운 변화와 희망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 정주여건 개선에도 힘을 쏟고 있다. 해가 지날수록 거듭되는 인구 감소로 현재는 지자체 존립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렀다. 인구 절벽의 벼랑 끝에 서서 영양군은 나름대로 이곳이 살기 좋은 지역으로 변화되는 것을 꿈꾸며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다. 살기 좋은 동네가 돼가는 것은 나 혹은 내 가족이 머무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에 우선적으로 정주여건 개선과 도시민들의 급증하는 귀농·귀촌 의향에 따른 맞춤형 공급 대책으로 바대들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영양읍 동부리 일원에 계획 중인 영양형 자연·친화신도심 조성사업 일환이다. 주거 단지 390여 세대가 들어설 수 있는 기반을 닦고, 사업 핵심인 도로 및 상·하수도 시설을 담아내는 것이다. 영양군의 주택노후 문제에서 탈피할 수 있는 근간이 된다. 특히 청년 인구가 선호하는 양질의 주거 용지를 공급해 청년 인구 유출을 막고, 인구를 유입하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복합문화센터를 건립해 대규모 모임이나 예식 등을 위한 컨벤션센터와 여성가족센터를 입주시킬 계획이다. 지금 영양군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지역민의 애향심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분들이 지역에서 삶을 이어가는데 큰 무리가 없도록 새로운 공간을 활용하고 형성해 나가겠다. 지역특성을 고려해 대중교통시설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시외버스터미널 공영·복합화 사업의 효율적 추진을 통해 접근성을 높이고, 활용도를 증대시킬 계획이며 수변공원 둘레길을 포함한 동부리 일대에 지방 정원도 조성한다. 그리고 영양초등학교에 지하공영주차장을 조성해 지역주민들의 교통 복지 여건을 개선하겠다. 올해 우리군이 추진할 인구 유입 방안으로 지난해 영양군은 양수발전소 유치라는 쾌거를 이뤘다. 이를 통해 150여 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건설공사에 많은 인력이 투입돼 숙박시설, 식당 등에 활기를 불어넣고 최근 개서한 영양소방서도 상주직원 106명으로 정주인구 증가에 큰 변곡점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활용해 조성하는 체류형 전원마을과 정주형 작은 농원은 귀농·귀촌 수요 증가에 따른 출향인과 은퇴자 중심의 새로운 정착시설이다. 결혼비용 지원, 결혼장려금, 출산장려금도 모두 대폭 확대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정주인구는 물론 생활인구도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머무르고 싶고, 다시 오고 싶은 영양을 위해 천혜의 자연을 활용한 ‘생태관광의 메카’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다져 나가겠다. 자연·친화적 관광 모델의 대표적인 영양 자작나무숲에 숙박동, 다용도 시설, 공원을 포함한 3만㎡ 규모 에코촌을 조성할 계획이며 국제밤하늘 보호공원과 반딧불이 등 지역특화 생태자원을 활용한 성장 동력을 구축해 나가겠다. 영양군은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에 지친 이들이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자작나무의 꽃말처럼 지금 ‘당신을 기다린다’.

2025-03-30

객관과 중립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두어 해 무렵부터 가깝게 지낸 사람이 있다. 전공만 다를 뿐, 같은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며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교수다. 예전에도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지만, 퇴임을 앞두고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는 관계로 진척된 것이다. 그러나 삶은 결국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란 작은 깨달음을 일깨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2·3 내란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2시간짜리 내란 말입니까?” 하는 카톡이 날아왔다. 그 후에 이어지는 내용이 “가난한 한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진보와 작별해야 하고, 부자 감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며, 계엄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이의 현실 인식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는 언제나 보수가 견인했고, 현 정권의 종합부동산세 감세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는 데에는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온 국민이 노력해서 이룬 성과다. 연금 생활자인 나의 건강보험료가 1년 만에 50% 넘게 인상된 이유를 정부는 아직도 내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12·3 비상계엄 선포는 내남없이 위헌-위법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왜 그런 비상식적인 내란 행위가 우리 모두의 책임이란 말인가?! 우리 국민 대다수는 범죄와 무관하고, 법 없이도 살아가며,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존중하며 살고 있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국회와 선관위, 민간 유튜브 방송을 무력으로 침탈하는데 찬성하지 않는다. 중대 사태가 터지면 나오는 말이 객관과 중립이다. ‘객관’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판단기준과 호오(好惡), 선악의 기준이 있다. 까닭 없이 미운 놈도 있지만, 이유 없이 고운 사람도 있는 법이다. 주관과 객관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 침투하면서 자리를 잡아나가는 것이다. 순수객관이나 완전한 주관은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잖은 사람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라는 말을 숨 쉬듯 편하게 말한다. 그것은 자기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견해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의 탈을 쓴 자들이 주장하는 또 다른 가치는 중립이다. ‘중립’의 의미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간적인 입장을 지키는 것”이다. 중립을 내세우는 자들은 진실과 거짓도, 아름다움과 추악함도, 정의와 불의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의 유일 가치는 가족주의다. 알리기에리 단테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공간이 마련돼 있다고 일갈했다. 사회·정치적 위기 국면에서 객관과 중립을 주장하는 자는 가진 자들 편에서 다수의 판단을 호도한다. 인간 세상에는 중립도 객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역사와 후예에게 당당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물려주려면 중립과 객관의 허울을 던져 버려야 한다.

2025-03-30

소방 영웅들

우정구 논설위원 의성산불이 7일째 계속되던 날. 한 소방관이 SNS에 올린 사진이 화제가 됐다. 사진은 야외 주차장 땅바닥에 얼굴을 감싼채 누워있는 소방관의 모습이다. 다른 하나의 사진은 아스팔트 바닥에 지쳐 누워있는 또 다른 소방관 모습이다. 계속된 화마와의 사투에 지쳐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몸을 바로 눕힌 듯한 소방관들의 모습이다. 사진은 70만 건 조회를 기록했고 누리꾼들은 “몸조심 하시라”는 등 소방관의 안전을 걱정하는 댓글들을 올렸다. 최악의 산불로 기록된 의성산불 진화의 주인공은 역시 소방관이다. 괴물처럼 신출귀몰하는 산불과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의 헌신적 노력은 직업정신을 논하기 전 그들의 숭고한 희생봉사정신에서 모두가 감동한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그들이 있기에 국민의 안전이 지켜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최근 10년간 통계를 보면 한해 5명꼴로 소방관들이 재난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번 산불 진압과정에서도 소방헬기가 추락해 조종사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소방업무는 늘 사고를 곁에 두고 있다. 한 소방관의 말처럼 “죽을 뻔했다”는 말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체험으로 느끼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소방을 전담하는 금화도감이 있었다. 그곳에 근무하는 이를 금화군으로 불렀고, 이후에는 불을 멸한다는 뜻에서 멸화군으로 불렸다. 비록 이름은 달라졌지만 화재와 재난에 대응하는 소방관들의 소임은 지금도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위험에서 달아나지만 누군가는 위험으로 달려간다. 우리는 그들을 영웅이라 부른다”는 말이 생각 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30

‘초격차’로 위기돌파… 포스코에 변화바람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이 지난 27일 그룹 기술전략회의에서 “초격차 기술로 대내외 위기를 돌파하고 초일류 소재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고강도 메시지를 냈다. 철강과 이차전지 소재 분야 불황을 기술력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포스코는 최근 핵심사업과 신사업 분야(철강, 에너지소재 등)에서 혁신을 통해 미래 경쟁력 확보가 가능한 주요 기술들을 ‘초격차 그룹혁신과제’로 선정했다. 철강 분야는 고부가 제품의 생산기술을 초격차로 고도화하고, 에너지소재 부문은 최근 가동(아르헨티나, 광양 리튬 공장 등)한 이차전지소재 공정을 조기 안정화하는 한편, 원가를 절감해 캐즘(일시적 수요감소) 극복을 위한 기술적 기반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포스코는 장인화 회장 취임이후 철강과 이차전지 소재산업의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왔다. 철강은 중국산 물량 공세와 고환율 등 비우호적 경영환경에 미국의 관세 폭탄까지 겹쳤고, 신사업인 이차전지 소재는 전기차 캐즘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앞으로 비핵심 자산과 수익이 낮은 프로젝트를 정리해서 2조7000억~2조8000억 원의 현금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불필요한 자산을 정리해서 꼭 필요한 미래투자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미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업환경이 극도로 불확실해지자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기업들이 생존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기업들의 초격차 기술 확보경쟁은 현재 분초를 다투고 있다. 승자독식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번 뒤처지면 경쟁력은 순식간에 추락하고 기업 생존이 위협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포스코가 철강과 에너지소재 분야에서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려면 파격적인 연구개발 지원과 창의적인 인재 양성이 필수적이다. 그룹이 운영하기로 한 ‘초격차 혁신과제’팀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정부와 정치권도 이젠 ‘대기업 특혜’ 프레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세제금융 지원·규제 완화 등을 통해 기업들이 초격차 기술 개발을 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2025-03-30

최악의 산불 피해, 이재민 보듬고 빠른 복구를

경북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이 7일만인 28일 주불을 잡았다. 이번 산불로 경북에서만 사망자 26명과 부상자 33명 등 총 59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피해면적은 서울시 면적에 가까울 만큼 컸다. 중앙재해대책본부 집계에 따르면 경북의 재해면적은 4만5000여 ha, 시설물 피해는 주택 약 3360곳, 농업시설 2110곳이다. 산불 확산으로 대피했다가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은 약 6000여 명에 이른다. 산불 피해액은 정확한 조사를 해야 밝혀지겠지만 역대 최대였던 2022년 울진·삼척 산불피해(약 1조3463억 원)보다 훨씬 클 것으로 짐작이 된다고 한다. 한덕수 대통령 대행은 29일 재난대책회의에서 “산불로 피해를 본 분들의 상처가 빨리 치유될 수 있도록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산불로 일시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에게는 당장 먹고사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다. 맨몸으로 대피하고 돌아왔지만 집과 농지는 전소되고 마을은 폐허로 변해버렸다. 뭘 먹고 살아야 할지 캄캄해 하는 주민이 한둘이 아니다. 이제 곧 농사철이 시작되나 콤바인괴 트랙터 등 겨울내내 손질해 놓았던 농기계가 몽땅 불에 타버렸다.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임시숙소인 마을회관에 삼삼오오 모여 한숨만 내쉴 뿐이다. 재난으로 희생당한 피해자 가족에 대한 위로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을 보듬는 정부와 지차체의 지원이 절실하다. 부서진 집을 복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농기계 등도 지원해 주민들의 재기를 돕는데 행정력을 집중해야 한다. 이번 산불은 때마침 내린 작은 비가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잔불이 남아 방심은 금물이다. 산불 방지에 끝까지 신경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산불을 통해 우리나라 재난방재 시스템에 문제점이 많이 노출됐다. 취약한 방재 체계를 다시 검토하고 장비와 부족한 인력은 더 늘려야 한다. 또 낡은 헬기를 교체하는 등 시스템 개선에 노력해 또다른 재해를 막아야 한다. 이재민의 아픔을 보듬는 국가와 민간 차원의 범시민적 구호활동도 서둘러야 한다.

2025-03-30

세계 시조의 날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미국인 학생들이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30여 명 정도 되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도 있었다. 복도에는 한국인 여럿이 김밥, 잡채 등의 한국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손님 대접에 분주했다. 2018년 2월 8일, 미국 유타주 프로보의 브링검영 대학교(BYU)에서 개최된 ‘제5회 유타주 시조 낭송대회’. 세미나실을 가득 채운 청중 중엔 한국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학교의 미국인 학생과 교수님들이었다. 대회의 주최자이신 마크 피터슨 교수님의 짧은 개회사와 심사위원 소개 후 학생들의 시조 낭송이 시작되었다. 준비된 PPT엔 한글로 쓴 시조가 뜨고 학생들은 화면을 보면서 낭송했다. 시조 아래엔 영문 시가 있었다. 아마도 한글을 모르는 청중을 배려한 듯했다. 두 시간 남짓 발표가 진행된 시조 대회에서 학생들은 시종 진지하고 긴장한 듯했지만 심사하는 나로서는 얼마나 재밌고 감동스러웠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한국인 청중들도 감격의 웃음이 동반된 큰 박수를 치며 즐기는 듯했다. 당시 BYU에 연구교수로 가 있었던 나는 피터슨 교수님의 초청으로 가서 연구실도 하나 얻었고, 이따금 한국문학 강의도 했다. 연구년이 끝나 귀국할 무렵 시조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조낭송대회는 유타의 한국 교포들께서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운영한다고 했다. 매년 4월 학기 말에 개최한다길래 참석 못해 안타깝다고 했더니, 피터슨 교수는 한국고전시가 전공교수가 심사하는 것이 학생들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될 거라며 행사 일자를 나의 귀국일 전으로 앞당기겠다고 했고, 나는 귀국 하루 전에 이 행사의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유타 한글학교 교장선생님과 재미교포 소설가와 같이 심사하고, 심사평과 수상자 발표는 내가 하였다. 학생들의 시적 착상과 이미지는 발랄하고 참신하였고, 시조에 대한 지식도 꽤나 단단해 감동적이었으며, 한복을 갖춰 차려입는 성의도 고맙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시조의 율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을 가려 뽑아 수상자로 정했다. 그때 피터슨 교수의 개회사가 뜻깊었다.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俳句)가 미국에 알려져 창작 유행이 있다면서, 한국의 시조도 전통과 역사가 하이쿠에 밑질 것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시카고의 한인단체 세종문화회 중심으로 시조 창작이 매우 활발하며, 심지어 우주선에 시조를 실어 보냈다 했다. 피터슨 교수는 이 시조 대회를 시카고의 시조 유행과 접목시키고 싶다고도 했다. 그 말이 현실이 될 줄이야…. 지난달 피터슨 교수님의 유튜브 채널 ‘우물 밖의 개구리’로 2월 7일, ‘세계 시조의 날(World Sijo Poetry Day)’ 선포식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이 기념식을 유튜브로 전 세계에 중계했다. 왜 2월 7일일까 궁금했는데 고려말 시조 시인 역동 우탁 선생의 기일이라는 것이었다. 족보 연구의 대가이신 피터슨 교수님다운 발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2006년 8월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식에서 ‘겨레 시 시조가 세계만방에 천둥처럼 울리게 하겠다.’는 선언이 무색한 날이었다.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날이기도 했다.

2025-03-27

경추 디스크와 담결림의 치료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현대인의 고질적인 통증 중 하나가 경추 통증과 담 결림이다. 특히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거나 스마트폰을 장시간 사용하는 습관은 목과 어깨 근육에 과부하를 주며 점차적인 변형을 초래한다. 많은 사람이 목을 돌릴 때 날개뼈 주변에서 통증을 느끼거나 경추 부근이 뻐근하고 결리는 증상을 호소한다. 이는 주로 견갑배 신경이 지나가는 부위에서 나타나는데 견갑배 신경은 경추 5번 신경에서 분지되어 나오기 때문에 경추의 문제가 심화되면 신경 압박으로 인해 팔이 저린 증상까지 나타날 수 있다. 거북목, 굽은 등, 둥근 어깨와 같은 불량한 자세는 경추와 어깨 주변 근육의 불필요한 긴장을 유발하며 신경 압박을 증가시켜 통증을 더욱 심화시킨다. 거북목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은 머리가 몸통보다 앞으로 빠지면서 경추의 전만이 사라지고 이에 따라 경추 5번 신경 부근의 압력이 증가한다. 둥근 어깨는 흉곽을 닫히게 만들어 호흡에도 영향을 미치며 견갑골의 움직임을 제한하여 디스크와 담 결림 증상을 더욱 악화시킨다. 이러한 증상의 치료 방법 중 하나로 초음파를 이용한 초음파 가이딩 약침 치료가 효과적이다. 초음파를 보면서 정확한 부위에 약침을 주입하면 견갑배 신경과 경추 5번 신경을 약침으로 신경완해 방식으로 박리할 수 있다. 이는 신경 주변의 유착을 풀어주고 염증을 완화하며 신경이 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단순한 마사지나 물리치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깊은 층의 문제까지 접근할 수 있어 많은 환자들에게 좋은 효과를 보인다. 직접적으로 신경이 눌리는 현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많은 임상 사례에서도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한약 치료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경락의 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처방과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고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한약재 등을 잘 조합하면 경추 디스크에 효과적이다. 한약은 단순한 통증 완화가 아니라 몸 전체의 균형을 맞추고 면역력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초음파 가이딩 약침 치료와 병행하면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수 있다. 효과적이고 재발 없는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한약처방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치료만큼 중요한 것이 예방과 관리다. 거북목과 둥근 어깨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자세 유지가 필수적이다. 컴퓨터 모니터는 눈높이에 맞추고 스마트폰은 눈높이에서 사용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장시간 앉아 있을 때는 중간중간 스트레칭을 하며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좋다. 흉추와 어깨를 펴는 스트레칭과 등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은 자세를 바르게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치료와 관리가 병행될 때 경추 통증과 담 결림뿐만 아니라 거북목, 굽은 등, 둥근 어깨로 인한 다양한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대인의 생활 습관 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통증일지라도 적절한 치료와 꾸준한 관리로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통증을 방치하면 장기적으로는 만성 질환으로 발전할 위험이 크므로 증상이 나타났을 때 조기에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2025-03-27

날로 커지는 산불… 낡은 산불헬기부터 바꿔야

의성산불이 발생한지 닷새째 되던 26일 낮 12시 51분쯤 의성군 신평면 교안리 야산에서 진화작업에 투입된 헬기가 추락하면서 조종사 1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헬기는 강원도 인제군 소속의 S-76B 기종으로 의성산불을 지원하러 왔다가 사고를 당했다. 헬기는 사고 현장에서 소화수를 담는 과정에 추락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사고 원인은 조사해 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사고헬기의 기령이다. 이 헬기는 1995년에 생산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노후헬기 교체 문제가 또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통상 헬기는 운항기간이 20년이 넘으면 경년 항공기로 분류해 국토부가 특별관리를 한다. 당국이 안전관리를 강화하고 있지만 노후문제가 여전히 논란이 된다. 2000년 이후 국내에서 산불을 진화하던 헬기가 추락한 사고는 12건이며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회 신정훈 의원(민주당)이 산림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의하면 2023년 기준 산림청 보유 헬기의 가동률은 67%다. 각종 고장과 정비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산림청 보유 헬기 48대 중 31대는 20년을 초과한 헬기로 밝혀졌다. 기후변화로 산불 발생은 빈도가 잦고 대형화 추세를 보이나 산림헬기의 노후화와 기체 결함 등으로 산불진화 작전이 효율적으로 수행되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일부 지자체가 임대한 헬기 가운데는 기령이 50년이 넘은 것도 있어 노후 헬기교체를 위한 정부의 종합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 또 차제에 소형 헬기를 대형 헬기로 점진적으로 바꿔 진화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 중앙재난대책본부 회의에서 “작은 헬기로는 초기진화가 어렵다”며 대형 살수가 가능한 2∼3만리터의 선진형 수송기 도입을 요청한 바 있다. 산불이 대형화되면서 피해액도 천문학적으로 커졌다. 피해금액을 생각하면 신형헬기 도입이 오히려 경제적이다. 산불 진화에 대한 패러다임부터 바꿔 효율성을 높일 때다. 그래야 노후 헬기사고도 줄일 수 있다.

2025-03-27

기우제

우정구 논설위원 기우제는 가뭄이 오래가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비는 국가나 마을 단위의 제례 의식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왕이 몸소 기우제를 올렸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나 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음력 매년 4월에서 7월 사이에 기우제를 거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에는 기우제가 중요한 의식의 하나로 여겨졌다. 기우제 기간에는 국왕과 백관들은 근신을 했다. 국왕은 정전이 아닌 바깥에서 정무를 보고, 임금의 수라상 반찬 가짓수도 줄였다고 한다. 도룡뇽 기우제라는 게 있었다. 도룡뇽을 비바람을 일으키는 용의 일종으로 보고 그를 향해 기도 드리는 방식이다. 단지에 도룡뇽을 담아놓고 아이들에게 “비를 내리게 해주면 풀어준다”는 식의 주문을 하게 하는 의식이다. 벼농사를 주업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는 기우제를 어떤 제례의식보다 중시했다. 그 종류도 많고 제사 대상의 신도 많다. 묘파기, 디딜방아 훔치기, 물병 거꾸로 달기 등이 기우제에 동원된 풍속물이다. 디딜방아는 곡식을 찧는데 쓰는 농기구지만 사람의 힘이 가장 많이 축적된 기구란 뜻에서 의식의 도구로 잘 활용된다. 마을에 따라서는 훔친 디딜방아를 마을 입구에 거꾸로 세워두고 악귀와 질병을 쫓았다고 한다. 미국 인디언들이 지내는 기우제는 반드시 비가 온다는 속설이 있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게 아니고 기우제를 한번 시작하면 비가 올 때까지 하기 때문이다.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이 경북 북동부 산간 농촌마을을 초토화 시켰다. 비가 와야 불길을 잡을 것 같은데 온 국민이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 형편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27

의대생 제적 임박… 醫協이 나서서 해결하라

지난 21일 경북대에 이어 영남대와 서울대, 부산대 의대 등이 27일까지 의대생들에게 1학기 등록을 하도록 했다. 계명대, 대구가톨릭대,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등 이 지역 다른 의대들은 이달말까지가 복학신청 마감 시한이다. 현재까진 전국 모든 의대의 학생 복귀가 순조롭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등록시한을 넘긴 경북대와 고려대, 연세대 등은 절반 정도가 복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북대는 지난 21일까지 복학원을 제출하지 않은 의대생들에게 최근 제적 예정 통보를 했다. 학교측은 해당학생들에게 문자메시지를 통해 “오는 4월 8일까지 등록을 하지 않거나, 수업일수 4분의 3선(5월 26일)까지 질병·육아·군휴학을 신청하지 않으면 제적에 관한 행정 절차가 진행된다”고 통보했다. 경북대는 현재 복학원을 제출한 학생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연세대도 전체 의대생(881명) 중 398명에게 제적 예정 통보서를 보냈으며, 고려대는 오늘(28일) 제적처리를 할 방침이지만, 학부모들의 복귀문의가 쏟아져 복학신청을 한시적으로 받아줄지를 검토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생들은 지난 26일 복귀 여부를 놓고 투표를 진행했는데, 65.7%의 ‘등록찬성’ 결과가 나와 다른 대학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의대 학장단이 최근 학생들에게 보낸 편지처럼, 전국 모든 의대가 이달말까지 복학신청을 하지 않으면 학교 측은 학생들의 제적을 막고 싶어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정부방침과 학칙, 학사운영 규정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료계 요구사항이 모두 관철되진 않았지만, 정부가 내년에는 의대증원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만큼 학생들도 이제 강의실에 복귀하는 것이 맞다. 특히 의대생 집단행동을 이끄는 의사협회와 전공의 협의회도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학생들을 도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의사협회 내에서도 “의협회장과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이 아무것도 안하면서 ‘탕핑(드러눕기)’만 한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는가. 자기 자식이 의대생이라면 이러한 무책임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2025-03-27

‘괴물 산불’에 당하고 보니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예기치 않았던 대형 산불이 영남지방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 21일 경남 산청에서 발생한 산불은 지리산 기슭까지 파고들었고, 22일 경북 의성에서 성묘객의 실화로 시작된 대형 산불은 6일째 강풍을 타고 안동 청송 영덕까지 산과 마을을 까맣게 태우고 있으며, 25일 울산 울주군에서 일어난 2건의 산불은 거의 진화된 상태이다. 이들 산불로 인한 인명 피해는 진화 대원을 포함한 사상자가 50명을 넘었고 피해 면적 또한 역대 최고로 기록되었다. 산불을 진화하던 헬기가 추락하여 기장이 순직한 안타까운 일도 있다. 지난주에는 폭설이 쏟아져 붉은 설중매가 아름다운 봄날을 노래했었는데 이번 주에는 강풍을 타고 ‘괴물 산불’이 영남지역을 할퀴고 있으니 이 무슨 난리인가! 산불은 70% 이상이 소소한 실수로 인한 화재이다. 이번 산불도 비가 적게 내린 3월에 바싹 마른 낙엽이 쌓인 숲을 태풍급 바람을 타고 넘어 마을을 덮쳐 인명 피해도 엄청나다. 산림청은 산불 재난 위기경보 ‘심각’ 단계를 발령하고, 정부는 해당 지역에 ‘재난 사태’를 선포하여 헬기 130여 대와 진화인력 4600여 명을 투입하여 산불 끄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불길은 커졌다 줄었다하며 마음을 태운다. 가장 심한 곳은 경북지방,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고운사의 가운루 등을 전소시키고 강한 남서풍을 타고 안동까지 타들어 가서 하회마을과 문화유산을 화재 위험에 빠트리며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문화유산 대피작전’을 펴게 했다. 산청 산불은 하동의 900년 된 은행나무를 불태웠고 영양 답곡리 산불에 400년생 만지송은 무사했지만 국가 자연유산 피해도 크다. 의성 산불이 안동까지 번지는 데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 등 불붙은 나뭇가지나 솔방울 같은 도깨비불 비화(飛火)에 대한 행정 당국의 대응이 미숙했을 수도 있다. 수시로 안내문자를 보내어 주민 대피를 유도했지만 대피 장소의 알림이 확실하지 않고 주로 학교, 경로당, 마을회관이지만 먼 곳일 수도 있어 인명 피해가 큰 듯하고 거의 기동이 힘든 7080대 노인들이다. 이웃을 구하려던 영양군 이장 부부, 영덕 매정리 실버타운 입소자 3명이 이동 중 화염에 차량이 폭발하여 사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약 2만8000명의 주민들이 대피소에서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있으며 안동과 영덕은 전 주민에 대피명령이 내려져 있고, 건물도 300동 이상이 타버렸다. NASA 위성 관측 사진에도 우리나라 3곳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선명하고 산불 현장 항공 사진에는 산이 온통 새까맣다. 이렇게 산불이 확산하는 이유를 건조한 기후, 숲의 발화성, 지형적 요인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숲 가까운 건축물의 난연성 구조도 고려해 봐야 될 것이다. 또 주민들이 고통을 겪는 정전과 단수(斷水), 휴교, 철도와 고속도로 운행 중단에 대한 신속한 대응 지침도 마련되어야 한다. 산불 발생을 막아주는 큰비 소식은 거의 없고 다음 주부터는 맑은 날들이 계속된다니 반갑지만은 않다. 곳곳에 예정된 봄꽃 축제도 이번 대형 산불로 마냥 힘을 잃을 것만 같아서 좀 섭섭한 마음이다. 하늘이시여, 봄비를 흠뻑 내려주소서….

2025-03-27

불 켜진 창

윤명희 수필가 안막커튼까지 쳤다. 옅은 빛마저 사라지자, 시간의 소리도 멈추었는지 고요하다. 새벽 2시가 지나갔는데도 감은 눈이 아프다 못해 시릴 뿐이다. 잠이 들어야 할 자리에 뜬금없이 그녀가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프로필에서 만났던 앳된 모습도, 그녀가 쓴 소설의 제목 또한 기억에 없다. 단지 조금은 특이했던, 아니 내 취향과는 다른 디자인의 책 표지만 생각날 뿐이다.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불을 켜자 싸늘한 기운이 덮친다. 겨우내 난방을 하지 않은 그 방은 서재라기보다 창고에 가깝다. 책장 앞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그 표지를 찾아 책 사이를 더듬었다. 그녀는 30년도 더 전, 대학생이었던 막냇동생의 동기생이었다. 얼굴 한 번 마주 한 적이 없었지만, 동생이 건네준 책의 저자라는 이유로 꽂아두었다. 다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 그녀의 열정이었던가 보다. 대학생이 장편소설책을 낼 만큼 뜨거웠던 그녀를 내 마음만큼이나 차가운 방에서 찾고 있다. 찾는 것은 보이지 않고, 손끝에 낡은 책 세권이 걸린다. 여고 때, 해마다 받아 둔 문예지다. 표지가 세월에 끌려 다니느라 나달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책을 펼쳤다. 빛바랜 책장이 누렇다 못해 짙은 갈색으로 가고 있다. 간신히 붙어있는 책갈피가 흩어질까 조심스레 넘기다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걔가 문예부였던가. 갈래머리 여고생이었던 우리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가을 산은 나무마다 꽃불이 난 것 같았다. 온 산을 뒤덮은 붉은 색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을 쏟아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이 단풍을 타고 산을 올라갔다. 나의 언어는 너무나 빈약했다. “아!”라는 단발마적인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을 뿐, 다른 어떤 표현도 하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눈물을 퍽 쏟았다. 나는 발까지 동동 구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깊은 곳에 있던 감성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보다도 더 명확한 감정 표현이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설악산과는 뗄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다. 책 세권을 다 훑어봐도 그녀의 이름이 없다. 그녀가 문예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인터넷을 뒤졌다.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소설책이나마 꼭 찾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맨 아래 한 귀퉁이에 기억속의 표지가 보였다. 프로필의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인터넷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헤맸다.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지, 단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설 외에 더 이상의 책은 없었다. 내가 이 시간에 그들을 찾는 이유를 생각했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봄이 올해는 유난히 더 어지럽기 때문일까. 이 밤, 훅 치고 들어오는 봄을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게 이유였을까. 나이 든다는 게 익어간다고들 하지만, 내겐 그 홍시 같은 말랑함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다. 설악산에서 울었던 그녀가 생각나는 건 내 속에서 꺼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서일까.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 퇴근하면 소파에 누워 자반뒤집기나 하는 내게 무슨 열정이 찾아들겠는가. 그나마 있었던 것도 시나브로 빠져나가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된 것 같다. 지금 나는 그 동그라미로 세상을 참 힘겹게 굴러가고 있다. 책장 앞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기 소리를 내지 않으려 걸레를 빨아 책장을 닦는다. 엎드려 방을 닦다 문득 그녀들도 나처럼 사그라져가는 것들을 아쉬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멈췄다. 감성과 열정의 그녀들을 나와 동격화 시켜 놓으니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책상을 닦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밤, 불이 오래 켜져 있었다. 짙은 어둠이 골목 사이로 물러날 때까지.

2025-03-26

송도 방파제

파도를 탓할 수 없으니 아울러 바다도 탓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경계가 아니라 이어짐이다 다만 본질에 충실하면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송도바다 방파제 잠방잠방 윤슬과 대화하며 가장 독한 소주로 가장 황홀한 해산물을 얻어먹던 놀이터가 없어졌다 생업에 충실하며 눈매가 선한 그 아지매는 공부하라고 눈 흘기며 그래도 늘 다독여 주었다 아마 세상의 다른 곳에서 여전히 생선을 썰고 있을 것이다 죽도록 반성해야 할 일이다 포항제철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송도는 송도인데 송도 아님이 상심스럽다, 그리운 송도. 스무 살 무렵 송도 방파제에는 포장마차가 많았다. 방학 때마다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셨다. 가난한 주머니를 우려한 단골집 아지매는 넘치게 해산물을 썰어주셨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많이 베풀며 살라 하셨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다. 매운 칼질 솜씨며 선한 눈매가 가끔 그립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26

좀비, 괴물, 악마로 변한 산불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사실 관계를 다루는 신문 사회면 기사는 어지간해선 은유나 상징, 비유의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게 묵시적인 불문율이다. 그럼에도 발생한 사고나 사건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야기하는 경우엔 간혹 그 약속이 깨지기도 한다. 5일 넘게 경상북도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는 ‘의성 산불’은 산림 파괴와 주택 소실이라는 재산 피해와 함께 적지 않은 인명 피해까지 낳았다. 인간의 목숨은 무엇보다 귀한 가치다. 화마에 희생된 사람의 가족들 심정을 떠올리면 참담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의성에서 시작돼 인근 안동시와 청송군, 거기에 영양군과 영덕군까지 위협한 이번 산불을 신문과 방송에선 ‘괴물’ ‘악마’ ‘좀비’ 등으로 지칭하고 있다. 기자들이 의인화(擬人化·사람이 아닌 걸 사람에 빗대 표현하는 것)된 문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이 짧지 않은 시간 계속됐다. 불이 난 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어려움 속에서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대원과 공무원을 무시로 겁박하고 있었으니 경북 일대를 공포와 공황 속에 빠뜨린 이번 산불을 좀비, 악마, 괴물로 부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화재로 인한 매캐한 연기와 살인적인 열기는 피어나는 화사한 꽃들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설계해야 할 경북민들의 봄까지 빼앗아갔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은 없는 법. 조속한 진화와 철저한 재발 방지책의 수립으로 다시는 이런 절망과 피폐의 시간이 오지 않길 바라는 게 우리 모두의 간절한 바람이 아닐까.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26

이재명 항소심 무죄… ‘정치적 날개’ 달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6-2부는 26일 오후 2시 이 대표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11월 15일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지 131일 만이다. 이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인용되고 조기대선이 치러질 경우 이제 홀가분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유죄로 인정한 이 대표의 발언 모두를 무죄로 봤다. 1심과 마찬가지로 항소심에서 검찰이 허위사실 공표혐의로 기소한 이 대표의 발언은 3가지로 요약된다. 2021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 국토교통부 협박으로 백현동 부지용도를 상향조정했다고 한 부분, 2021년 12월 방송에 출연해 ‘고 김문기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처장을 성남시장시절 몰랐다’ ‘2015년 호주출장때 김씨와 골프친적 없다’고 말한 부분이다. 법원은 이날 3가지 모두에 대해, ‘허위사실 공표죄가 아니다’ ‘단순한 의견표명’ ‘사진이 조작됐을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에서는 정치인의 거짓말은 사소한 것이라도 선거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고, 특히 국정감사장에서 한 거짓말을 법원이 허용한다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흔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높은 형량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는 이를 모두 무죄로 판단한 것이다. 이 대표에 대한 선고결과는 앞으로 윤 대통령 탄핵사건과 맞물려 정국에 큰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음에 따라 이 대표는 이제 ‘정치적 날개’를 달게 됐다. 윤 대통령 탄핵안이 인용돼 조기대선이 치러질 경우 사법리스크 없이 선거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선거법 사건 외에도 대장동,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등 8개 사건 12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조기대선 후보자격과는 무관하다. 특히 그는 ‘일극체제’라 불릴 정도로 당을 장악하고 있어, 이번 재판결과로 당내 다른 대선주자들이 동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2025-03-26

상식이 무너진 나라, 누가 구해야 하나

장규열 고문 법관이 법을 구부려 판결을 내렸다. 국민이 법을 믿을 수 있을까. 검사가 본분을 저버리고 범죄를 외면했다. 그 검사가 지킨다는 정의를 신뢰할 수 있을까. 관료가 법률을 위반하고도 파면되지 않는다. 나라의 일머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헌법수호를 선서한 대통령이 헌법을 가벼이 보고 국민을 힘들게 한다.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을까. 나라가 휘청인다. 법과 정의가 무너지면 국민은 절망과 불안의 나락에 떨어진다. 공인이 사익을 위해 법을 어기는 순간, 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제멋대로 법을 해석하고 운용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국민을 주권자라 적었던 헌법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법은 나라의 기둥이지만 상식의 최소한이다.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하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법관이 권력이나 사익에 따라 판결을 달리한다면, 법을 지키는 것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특정 세력에 유리한 판결이 계속된다면, 법이 신뢰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검사는 범죄를 단죄하는 자리다. 본분을 저버리고 불법에 눈을 감으면 정의와 상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검사가 권력의 비리를 덮고 특정세력에게만 법의 칼을 휘두른다면 국민이 공정을 기대할 수 없다. 검찰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국민이 바라는 법치는 무너져 내린다.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법과 제도를 따라야 할 행정기관이 오히려 법을 왜곡한다면, 나라의 행정이 온당하게 돌아갈 수가 없다. 편법과 일탈이 용인되면서 그릇된 관행이 자리를 잡고 결국 법치행정은 허울만 남는다.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을 따르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르라면,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정점에 선 대통령이 헌법을 어겼다면 어찌 되는가. 국민 앞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했던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하려 했다면 나라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민주공화국의 뿌리가 흔들리고, 국정운영의 원칙이 무너지지 않을까. 대통령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법을 지키라 요청할 수 있을까. 이런 일들이 중첩되면서 국민은 좌절과 체념을 겪는다. 냉소가 퍼지고, 불법과 비상식 일상이 되어간다. 공정한 사회를 기대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국민도 점차 불법을 용인하고 불공정을 감내하게 된다. 헌법과 법률이 있지만 작동은 멈춘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산천에 불길이 솟는다. 국민의 분노가 불길처럼 솟구쳐 오른다. 비정상이 계속되면서 상식이 사라지고 공정한 세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몰아치는 산불에는 비라도 기다린다. 불공정과 비상식에는 비마저 기대할 수가 없다. 국민이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부정과 불법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와 사회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면 주권자 국민이 깨쳐야 한다. 불법과 비리를 용인하지 않고 법과 정의를 지키려는 국민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나라를 지켜낸 위인들을 역사에서 찾지만, 실은 이름없는 국민들이 스스로 지켰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다시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의 역사를 구해야 한다. 나라가 역대급 기로에 섰다. 국민이 편안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국민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2025-03-26

의성산불 총력 대응해 인명 피해 막아야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5일째 이어지면서 안동과 청송, 영양, 영덕, 봉화까지 불길이 번지면서 핼기 조종사를 포함 경북도내서만 16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26일 중앙재해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경북에서 16명, 경남에서 4명 등 이번 영남지역 산불로 모두 20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현재 19명으로 파악되나 시간이 지나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작은 부주의에서 시작한 산불은 건조한 날씨에 강한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져 26일 오전 경북 북동부지역에서만 주민 2만7000여 명이 대피하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인구 2만3000명의 청송군은 1만여 명의 주민이 대피해 군민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집을 빠져 나왔다. 그 밖에도 영덕, 안동, 의성, 영양 등에서도 수천 명이 대피소를 찾는 바람에 수용 시설이 부족할 지경이다. 이번 산불로 의성의 천년고찰 고운사가 전소되고 영덕의 천연기념물 소나무 만지송도 전소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6일 오전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안동 하회마을 앞 5㎞ 지점까지 화선이 도달해 당국이 비상 대기 중이라 한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불길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와 천연자원들이 마구잡이 파괴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특히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대피 등 당국의 신속하고 세밀한 대응이 필요하다. 한덕수 대통령 대행 국무총리는 26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산불 피해가 우려된다”며 “이번 주 남은 기간 산불진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불법 소각 등은 법령에 따라 엄벌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은 그동안 헬기 100여 대와 1만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해 산불 진화에 나서고 있으나 의성 산불의 진화율은 아직도 60% 정도에 그치고 있다. 27일 약간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고돼 이날 완전 진화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사망자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들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문자를 받더라도 자력으로 대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노인들의 안전관리에 특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

2025-03-26

길을 잃을 용기

어른이 된 후로는 지도를 보며 길을 찾을 일이 별로 없다. 내비게이션이 알아서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늦을 일도, 위험한 일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머릿속 지도는 점점 길을 잃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교회 수련회가 있던 날이다. 겨울 수련회였기 때문에 바깥의 날씨는 매서웠다.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숨을 들이마시면 폐속까지 시린 기운이 퍼졌다. 하지만 고등학생 아이들은 세상의 방향과 늘 반대인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생각과 어긋나고 가야 할 길 위에선 되돌아가기가 일쑤고 자기만의 셈법으로 어른들과의 갈등을 자아내는 아이들과의 수련회 날이었다, 도착지에 와야 할 4명의 아이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단체로 이동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온다는 아이들이었다. 잠시 후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경찰이었다. 아이들은 교회 선생님도, 부모님도 속이고 30km가 넘는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다. 추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라는 듯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낄낄대며 출발했다. 목적지만을 보고 열심히 달렸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완벽한 일탈을 즐기며 젊음의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안전한 길’이 아닌 ‘빠른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다.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아이들은 한껏 내려간 수은주만큼 꽁꽁 얼어붙었다. 한편으로는 마치 어른들만의 전유물인 도로를 자신들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 여기 맞아?” “모르겠어! 근데 지금 돌아갈 수도 없어.” 순식간에 사태는 심각해졌다. 차들은 경적을 울려대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앞만 보고 달렸다.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경찰이 출동했다. 아이들은 갓길에서 붙잡혔다. 지나가는 차들은 경악했고 경찰은 잔뜩 굳은 얼굴로 아이들을 쏘아봤다.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희 무슨 생각으로 여기로 들어온 거야?” 녀석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수련회 가려고요….” 경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행히 경찰의 에스코트 덕분으로 아이들은 큰 사고 없이 상황이 잘 정리되었고 녀석들은 무사히 도착하여 교회 목사님과 선생님들, 부모님들의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무모한 일이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의 그 무모함이 부러웠다. 어른이 된 나는 어느새 익숙한 길로만 다니고 확실한 길만을 선택한다. 실수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안전을 택한다. 내비게이션이 인도하는 길 위에선 길을 잃어버릴 기회마저 잃어버린다. 길도 모르면서 페달을 밟고 어른들에게 혼날지언정 목적지에 닿고 싶다는 마음을 앞세우는 저 무모한 아이들의 젊음이 닮고 싶었다. 김경아 작가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 길이 위험한지도,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될 것이다. 이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고 가슴 뛰는 순간이었는지. 그리고 어쩌면 또 한 번 무모한 도전을 해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 순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떠올리며 어른이 된 그들은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용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결국, 삶이란 크고 작은 모험들의 연속이니까. 언젠가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날을 기억하며 가끔은 길을 잃을 용기를 내보기를 바란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을, 때로는 그 길에서 소중한 순간들이 탄생한다는 것을 이 겨울날의 기억이 그들에게 오래도록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길을 잃는 법을 잊는다. 길을 잃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할 일도 없다. 때때로 길을 잘못 들어서야만 진짜 나아가고 싶은 길이 보이기도 한다. 길을 잃을 용기가 점점 사라져 가는 나는 새로운 길을 향해 페달을 밟고 가는 저 아이들의 무모함에 박수를 보낸다. /김경아 작가

2025-03-25

오스만제국 치하 그리스 독립 ①식민시대와 그리스 정교

1453년 5월, 비잔티움이 오스만투르크 메메트 2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그리스는 물론 발칸반도에 오스만투르크 통치시대가 도래했다. 그리스는 로마 500년에 이어 400년 가까이 침묵의 역사를 경험해야 했다. 오스만투르크는 합스부르크왕가 지배에 들어 있던 발칸반도 북쪽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기독교 교권에서 이슬람 교권으로 탈바꿈시켰다. 발칸반도 내 이슬람 압제하의 기독교는 대내외적으로 몸을 사리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몸은 통제할 수 있어도 믿음과 사상만은 어쩔 수 없었다. 식민지인 마지막 자존심이 종교였고, 목숨을 건 신앙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여느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민족 종교를 인정하면서 관대함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슬람화 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식민지 백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상은 무거운 세금과 신분차별은 감수해야 했다. 제국 내 교회 건물 역시 이슬람 사원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었다. 이교도에 대해 굴욕감을 주기 위해 교회 출입문은 지상에서 높이 1m이상 만들 수 없다는 조항까지 달았다. 식민지배 종교인만큼 기어서 들어가고 기어서 나오란 뜻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면을 1m 낮춰 교회를 올리면서 드나드는 문을 2m 높이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스만제국은 군인이라면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공평하게 땅으로 보상을 해주었다. 그렇게 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스는 물론 세르비아 명문가들조차 개종에 동참한다. 토착종교와 뒤섞인 느슨한 기독교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특히 이슬람으로 개종이 많이 이루어졌다. 같은 민족이지만 종교가 달랐고, 이웃 간에도 종교가 달랐으며, 같은 핏줄을 가진 친족 간에도 종교가 뒤엉키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훗날 가공할만한 아비규환의 판이 깔리고 있었다. 발칸반도 오스만투르크 식민지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든 안하든 병역의 의무는 공평하게 졌다. 침략전쟁에는 식민지 백성이라도 피해갈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자원이었을 법했다. 오스만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변모시킨 여세를 몰아 동쪽 페르시아와 아랍세계를, 남쪽으로는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를 평정한 후 본격적으로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유럽은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가 크고 작게 치고받으며 유럽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진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오스만제국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과 계속된 전쟁에서 귀족의 힘이 막강해지자 반대로 술탄 권력은 초라해져갔다. 더구나 러시아마저 오스만제국 등에 칼을 들이대는 형국으로 변하고, 1571년 스페인 함대를 중심으로 베네치아공국-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과 ‘레판토 해전’에서 맞붙어 궤멸되면서 오스만제국은 종이호랑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귀족들은 손에 쥔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신이 팔려 르네상스를 경험한 서유럽의 경제발전과 가공할 무기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특히 오스만 직업군인 에니체리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 와중에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개신교도들 반란을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 공격에 나선 것이 결정적 패착이었다. 난공불락 빈을 포위했지만, 위기를 느낀 인근 폴란드를 중심으로 가톨릭국가 연합군 8만 명이 빈을 돕기 위해 출정했다. 1683년 칼렌베르크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은 결정타를 맞고 말았다. 이 승리를 계기로 연합세력은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대 이슬람전선을 펼치게 된다. 오스만제국은 안간힘을 썼지만, 뒤이어 1798년 나폴레옹과 한 판 전투에서 단 일주일 만에 이집트를 통째로 내줘야 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그리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 정교 전통을 지켜가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더구나 부동항 확보라는 목표에 국운을 건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은 툭하면 치고받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틈새를 공략하며 국제정세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18세기 말이 되면서 불길처럼 번진 민족주의가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고, 19세기 초가 되자 그리스 사람들은 경제력이 높아지는 동시에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큰 물줄기에 합류하면서 독립에 대한 욕구가 더욱 물밀듯 밀려왔다. 민족이란 깃발 아래 종교와 언어, 문화를 앞세워 흩어지고 새롭게 뭉치면서 비장미 넘치는 기운이 샘솟았다. 민족이라는 의기 앞에 헤쳐 모여의 동기가 부여되면서 독립 열망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는 초승달(사실 그믐달이지만)제국 오스만이 지배하고 있는 땅덩어리를 더 많이 가지려 불쏘시게 역할을 자처한 제국주의 소산이었다. 대제국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도 위협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발칸반도 나라들 역시 독립 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그 선두에 그리스가 있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3-25

일월문화원의 발돋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완연해진 봄의 길목에서 난데없는 산불로 국토가 신음하고 있다. 지난 주말, 건조한 날씨 속에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불이 발생해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있다. 산청과 의성, 울주 등 하룻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이 29건으로, 강풍을 타고 번져 나간 불길이 좀처럼 잡히질 않고 연기와 매캐함이 동해안 일대에서까지 느낄 정도였으니 심각함에 우려를 금할 길 없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이 무슨 화마의 변고란 말인가? 하늘이 온통 스모그 마냥 희뿌연 장막을 드리운 듯한 현상을 접하다 보니 초읽기에 들어간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안개정국과 뒤엉키면서 예측불허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아 때아닌 산불의 연무로 연상됨은 필자만의 억측일까? 어쨌든 봄은 왔고 산불은 곧 진화될 것이며 베일 같은 안개는 사라질 것이다. 널뛰기하듯 잎샘추위에 3월의 폭설까지 내리다가 화마의 엄습까지 봄은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시련과 위협 속에서 오는가 보다. 나무에는 이미 물이 올랐고 꽃은 앞다투어 피어나고 있으며 새순이 앙증스럽게 돋아나는 파릇함 속에 새들은 지저귀고 온갖 생물은 생명과 성장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겨우내 찬바람을 견디며 이기려고 몸에 힘을 줬다면 이제는 나른함을 이기려고 애를 써야 될 때, 문화의 새바람으로 봄보다 부지런히 심신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곳이 있다. 그곳은 해와 달의 고장 답게 일월의 의미를 되새기며 독특한 문화적인 아이템으로 지역의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일월문화원이다. 전통문화의 전승, 보급의 사회교육과 문화유산 보호활동으로 지역민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2012년 설립된 (사)일월문화원은, 일월문화아카데미와 문화유산답사 등의 다양한 문화강좌와 문화사업 추진으로 현재까지 매년 200여 명의 회원과 수강생이 동참해 역사와 종교, 철학 등에 대한 인문학적인 소양과 의식을 함양한 문화시민을 육성하며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강의나 답사가 아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문화 인프라를 구축해 실질적인 문화사업 운영으로 주체적이며 지속가능한 문화발전을 담보하는 의미와 가치가 큰 문화활동이라 할 수 있다. 즉, 고품격 인문학 강의와 문화유산 방문교육·문화재 지킴이 봉사단 운영·문화유산 해설사 양성·감성계발 문화교실 등 일련의 사업을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기획하고 펼침으로써 문화의 융성과 건실한 내일을 기약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비전과 역량으로 일월문화원은 2019년 제1회 장기유배문화축제를 주도적으로 개최했으며, 재작년에는 삼일문화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설립 15주년을 맞은 일월문화원은 올해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포항에 터전을 둔 포항사람임을 부각시키며 일련의 추모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문화이며, 문화예술의 품격이 그 도시의 품격이고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우리 지역 전통문화의 발굴, 보존과 정체성을 탐구, 정립하여 문화유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전승으로 현대화·미래화하는 일들은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상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융합·전파시키며 문화시민 저변확대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나가는 일월문화원의 기여와 발돋움이 사뭇 기대된다.

2025-03-25

기업 혁신 조건은 무엇인가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제조기업 통계를 보면, 기업에 혁신을 도입하여 중장기적으로 성공한 기업은 드물다. 그 이유는 분명히 있다. 필자가 17년여 기업 혁신 연구와 컨설팅을 하며 본 것은 기업 CEO나 조직의 수장은 혁신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부분적으로 알지만 종합적으로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혁신은 백 명의 필하모니로 복잡한 구성을 갖고 있다. 한 사람만 피리를 잘못 불어도 음악은 제 소리를 못 낸다. 이것이 기업 혁신이다. 회사가 나아갈 방향, 자사에 맞는 혁신체계(Frame) 구성, 계층별 역할 정립, 실행 운영제도 등이 기업 혁신의 밑그림이다. 다양한 변수가 있는 혁신이기에 속 그림은 실행 과정에 발생되는 이슈를 개선하면서 함께 그려가야 한다. 이런 복잡한 기업 혁신의 조건과 성공요인은 무엇인가. 기업 혁신의 구성요건은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지며, 일반적으로 혁신의 조건과 혁신의 성공요소로 구분 할 수 있다. 먼저 혁신의 3가지 조건은 첫째,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기술 발전, 소비자 요구 변화, 경쟁 환경 등 혁신을 촉진하는 외부 요인을 보는 것이다. 연구개발 지원, 세금 혜택, 지적 재산권 등 정부 정책과 규제도 볼 필요가 있다. 둘째, 조직적 조건이다. 도전과 실험을 장려하는 기업 문화와 경영진의 중장기 비전 설정과 의사 결정력의 리더십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활동 동기부여, 혁신 인재 확보 등 인적,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셋째, 기술적 조건이다. 동종 업계 한 발 앞서갈 수 있는 최신 기술 도입의 투자 및 활용 효용성과 AI, 빅데이터 등 기술 활용 능력을 갖춰야 한다. 기업이 혁신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필요한 요소는 하나, 혁신의 목적과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고 장기적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단기적 성과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혁신을 위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둘, 사내외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맞춤형 혁신을 구성하는 것이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신속한 피드백 및 소통하는 애자일(Agile) 접근 방식 활용이다. 셋, 실패를 용인하고 도전적인 시도를 장려하는 조직문화,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조직구조이다. 경직된 조직문화는 모든 것에 시너지를 내지 못 한다. 넷, 신속한 실행, 성과 측정 및 피드백을 통한 지속적인 개선이 이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조직 전체 공감대 형성이 필수 요소다. 이외에도 훈련되지 않은 야생코끼리를 목적하는 산 중턱까지 정해진 시간 내에 이르게 하는 끊임없는 변화관리가 필요하다. CEO, 임원층, 직책보임자, 일반 등 하나의 생각 흐름이 이어지는 계층별 마인드와 실행에 맞는 방법을 가이드 해야 한다. 변화관리를 멈추면 혁신도 멈춘다. 혁신은 생물이기에 다듬어 지지 않은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기업 혁신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환경적, 조직적, 기술적 조건이 조성되고 명확한 목표, 현업 중심 사고 및 기획, 유연한 조직문화, 실행력과 개선 노력이 결합될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2025-03-25

‘尹 선고’ 후폭풍, 정치권이 도발하지 말라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안이 그저께(24일) 기각된 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사건 선고일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법조계에서는 빠르면 이번 주 후반 선고가 가능하지만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4월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전직 대통령 탄핵심판이 모두 금요일에 선고된 점과 선고 전후 안전 문제 등을 고려하면 금요일인 28일 선고될 가능성이 크긴 하다. 그러나 헌재가 한 총리 선고 당일에도 평의를 열어 윤 대통령 사건을 논의한 점으로 미루어, 선고일이 기약 없이 늦춰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윤 대통령 사건 선고가 미뤄지면서 우려되는 점은 보수·진보세력 간의 시위형태가 격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서울에서는 탄핵 찬반집회가 진지전(陣地戰)을 연상케 할 정도로 험악해지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주 들어 헌재가 윤 대통령 파면을 선고할 때까지 국민과 함께 싸우겠다며 광화문에 천막당사를 만들었다. 당 지도부가 여기에 상주하면서 헌재를 압박해 탄핵 인용 결정을 이끌어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법원이 집회를 불허하긴 했지만, 전국농민회 총연맹 산하 ‘전봉준 투쟁단’은 트랙터와 트럭을 동원해 서울 시가지에서 시위를 하겠다고 했다. 국민의힘도 거칠어지고 있다. 여당 의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탄핵 기각·각하’ 집회에 직접 참석하고 있다. 지난 주말 집회에서 한 중진 의원은 “반(反)국가 세력과의 전쟁 선포”라고 했고,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여야 정치권 모두 격화하고 있는 진영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앞장서서 충돌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 총리가 직무에 복귀하면서 정부기능이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사실상 지금도 국정은 마비상태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리더십을 상실한 여권은 정국을 수습할 역량이 없고, 야권은 거리집회와 탄핵공세를 강화하면서 경제·외교·안보 위기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북한도발에 대처할 국군통수권도 실제 공백상태고, 금융시장은 연일 휘청거린다. 우리사회가 지금의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정치권이 냉정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결과에 대해 여야는 물론 국민이 모두 승복해야 한다. 그렇지만 아직 윤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헌재의 탄핵선고에 승복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윤 대통령은 앞선 탄핵심판 변론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에게 잘못이 없음을 항변했다. 이 대표는 지난 22일 전남 담양에서 “윤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섬뜩한 말로 들린다. 이러다 정말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경제안보 위기와 나라 미래를 진심으로 염려한다면 이제라도 두 사람은 국민통합을 위해 헌재와 법원의 판단에 대한 승복 의사를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여야 의원들도 그간의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같은 테이블에 앉아 협상하는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헌재 선고 결과에 대한 불복을 정치권이 오히려 부추겨서야 되겠나.

2025-03-25

산불, 기후변화가 주범

우정구 논설위원 올 1월 7일 미국 LA에서 발생한 산불은 같은 달 31일까지 불길이 이어졌다.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산불로 기록된 화재다. LA 카운티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이 산불은 긴 시간만큼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불탄 면적이 샌프란시스코 면적을 능가할 정도였고, 불탄 자리는 핵폭탄을 맞은 히로시마에 비견되기도 했다.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재민만 20만명이 넘었다. 미국의 한 미디어그룹은 피해 규모를 2750억 달러(한화 400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산불로 LA 전역은 심각한 대기오염이 유발됐으며 예정된 스포츠 경기 등은 모두 연기됐다. 산불을 틈타 빈집털이가 성행해 경찰이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산불이 몰고 온 사회경제적 손실은 천문학적이며 복잡했다. LA뿐 아니라 지금은 북미와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산불이 자주 일어나 나라마다 골머리를 앓는다. 2023년 하와이에서는 산불 발생으로 100명이 숨지고 1300명이 실종되는 일도 벌어졌다. 산불 발생의 직접적 원인은 사소한 부주의에서 일어나지만 발화한 산불이 급속도로 커지는 데는 기후변화라는 숨은 이유가 존재한다. 지구 온난화 후 일어나는 폭염과 가뭄 등 이상기후 현상이 사실상 산불 발생의 주범이다. 가뭄에 말라버린 식물은 불쏘시개가 되고 강력한 강풍은 화마를 걷잡을 수 없이 키우게 된다.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군 등에서 발생한 산불이 며칠째 불길이 잡히지 않은 것도 건조한 대기와 강한 바람 때문이다. 지구환경에 순응하는 인간의 진실된 노력이 없다면 인간은 감당키 어려운 재앙에 직면할지 모른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25

헌재 내란죄 판단회피… ‘尹 운명’ 오리무중

헌법재판소가 지난 24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의 탄핵안을 기각하면서 12·3 비상계엄의 위법성 여부를 판단하지 않음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 선고방향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졌다. 헌재는 이날 선고에서 윤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가를 결정적인 쟁점인 ‘내란 행위’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법조계에서는 한 총리의 ‘내란 공모’ 사유가 윤 대통령의 ‘내란 행위’ 사유와 연관돼 이날 헌재 결정에 따라 윤 대통령 사건 선고 방향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었다. 헌재는 이날 ‘내란죄 철회’ 논란에 대한 판단도 피했다. 여권에서는 헌재가 비상계엄의 위법성에 대해 판단을 하진 않았지만, 한 총리 사건에서 헌법재판관 8명 의견이 ‘5(기각)대 2(각하)대 1(인용)’로 나뉜 점에 주목하면서, 윤 대통령 사건이 기각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재판관 3명만 인용에 반대하면 윤 대통령 사건은 기각된다. 반면 야권은 한 총리 사건 기각 결정문에 ‘한 총리가 비상계엄 선포의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하는 등의 적극적 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증거나 객관적 자료는 찾을 수 없다’고 한 부분을 언급하면서, 전원일치 의견으로 윤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보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헌재가 한 총리 탄핵심판 선고를 한 직후에도 평의를 연 것으로 미루어, 윤 대통령 선고일을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주류다. 아직 정치적으로 민감한 각종 쟁점과 절차 부분에서 재판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탄핵안은 헌재에 접수된 지 100일이 넘었고, 11차례의 변론을 거쳐 지난달 25일 탄핵심판 변론을 종결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헌재는 윤 대통령 탄핵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증언을 들었고, 다양한 수사자료도 확보했다. 이제 재판관들이 판단을 내릴 근거가 충분하다고 본다. 한 총리가 그저께 직무에 복귀하면서 내각 기능이 회복된 만큼, 윤 대통령 탄핵 사건도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2025-03-25

반복되는 산불 수종변경 등 근본대책 세워야

지난 주말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 등 영남권 5개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은 엄청난 피해를 내고 있으나 나흘이 넘도록 진화를 못하고 있다. 건조한 기후와 강한 바람 등으로 불길이 잡히지 않고 산불은 오히려 불씨를 타고 인근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피해를 키우고 있다. 중앙재해대책본부에 따르면 25일 오전 현재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 등 5개 지역의 산불 영향구역은 1만4000여 ha다. 그 중 의성군이 8490ha로 가장 넓다. 이번 산불로 15명의 사상자와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재앙에 가까운 산불이 봄철만 되면 반복된다. 지난해까지 최근 10년간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은 총 5456건이다. 연평균 546건 꼴로 그중 3∼5월 사이 발생하는 산불이 절반을 넘는다. 2022년 3월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에서 발생한 산불은 불을 끄는 데 9일이 소요됐다. 산불 피해면적이 울진 4개 읍면, 삼척 2개 읍면에 이르렀다. 불 탄 면적만 서울시의 40%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피해가 매년 반복되는데도 뾰쪽한 대책이 없다. 산불 발생의 원인은 대개 입산자의 사소한 부주의로 밝혀지나 한번 발생한 산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봄철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으로 불길 잡기가 쉽지 않아서다. 초동 대응과 감시망 강화 등 산림당국이 매번 대책을 내놓지만 산불 발생은 줄지 않고 대형화로 이어진다.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내화력이 있는 수종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지적을 한다. 우리나라 산림면적의 40% 가까이가 소나무 중심의 침엽수림이다. 소나무는 휘발성이 있는 송진을 함유해 산불이 나면 불을 급격히 확산시키는 특징이 있다. 불에 탄 소나무 가지와 솔방울은 강한 바람에 날리어 멀리 날아가면서 이곳저곳에 불씨를 옮긴다. 복원사업을 추진할 때 활엽수 같은 수종으로 점차 바꿔가는 정책이 필요하다. 지구촌 기후변화로 산불 발생은 세계적으로 더 증가하는 추세다. 불이 나 대처하는 사후대책도 중요하지만 수종변경과 같은 근본 대책을 세우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2025-03-25

‘국가물산업클러스터 2.0’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후변화가 일상이 된 시대, 물은 더 이상 흔한 자원이 아니다.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고, 해마다 여름철에는 하천과 호소에 녹조가 과다 번성하며, 신종유해물질로 인한 수질오염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낙동강의 수질 저하와 미량유해물질 검출, 취수원 이전 논란 등 시민의 물 안전과 직결된 이슈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물은 생명이며, 삶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중함을 종종 간과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물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산업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정부는 지난 2019년 9월, 대구 국가산업단지 내에 ‘국가물산업클러스터’를 조성하였다. 물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개발과 기업 육성, 나아가 물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적 투자였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는 정수 및 하·폐수처리, 물재이용, 수질 모니터링 등 물 전 분야에 걸친 기술개발과 실증을 지원하며, 국내 물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촉진하는 통합지원 플랫폼이다. 2023년 말 기준 110여 개 물기업이 입주하였고, 지난 5년간 총매출 5조537억 원, 총수출액 3189억 원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예컨대 (주)아쿠아웍스는 고효율 산기관 기술을 바탕으로 2년 만에 매출을 7배 이상 성장시켰으며, 블루센(주)은 스마트 수질측정 기술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여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이는 대구에서 출발한 물기술이 세계 물시장에서도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는 ‘국가물산업클러스터’가 제1기 운영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2.0 시대’의 원년이다. 단순한 기술개발을 넘어,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 실현, 청년 일자리 창출 등 다양한 정책과제와의 연계가 요구된다. 대구시는 이미 ‘물관리기술 발전 및 물산업 진흥계획’과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국가물산업클러스터 2.0’은 이러한 지역 전략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물기업 육성, 청년 창업 지원, ESG 기반 기술개발 등으로 이어지는 지역형 물산업 생태계 조성에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다. 지난 3월 22일은 유엔이 지정한 제33회 ‘세계 물의 날’이었다. 이날을 계기로 물을 둘러싼 갈등이 아닌, 물을 매개로 협력과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자 전 세계가 함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2.0’은 이러한 의미를 살리기 위해 단순한 기술개발 공간을 넘어, 갈등을 줄이고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물산업을 통해 지속가능한 물순환을 실현하고, 지역 간 상생과 협력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물은 도시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며, 동시에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기준이다. 대구경북은 낙동강이라는 생명의 수계를 품은 만큼, 지속가능한 물관리와 물산업 발전을 통해 대한민국 녹색전환의 선도 지역으로 도약할 것이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2.0’은 그 중심에 있다.

2025-03-24

한 표 차

강길수 수필가 “할아버지, 한 표 차로 떨어졌어요!” 시외버스 안에서 다짜고짜로 받은 손전화 말이다. 이달 초등학교 2학년이 된 큰 손자의 전화였다. ‘한 표’라는 말로 반장선거에서 낙선했음을 알아듣고, 그래도 2등 했으니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며칠 뒤, 집에 온 손주 녀석에게 반장선거 결과를 물어보았다. 같은 반 학생 28명 중 반장선거에 나온 학생이 10명이고, 1등이 10표, 2등인 손자가 9표였다고 했다. 속으로 손주 녀석이 대견해 보였다. 남들 앞에 나서기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같은 반 학생 모두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 건 물론이다. 이 반장선거 결과를 따져보면, 3등이 2표, 나머지는 7명은 1표가 된다. 그러니까 득표율은 반장으로 뽑힌 1위 아이가 35.7%, 2위 손자는 32.1%, 3위 아이가 7.1%, 나머지 출마 아이 7명은 각 3.6%다. 득표율 계산 결과를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2학년 손자 녀석의 반 아이들의 반장선거가,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선거 결과를 냈다는 마음이 들었다. 대통령과 차점자의 지지율 차가 적으면, 여·야가 서로 무시할 수 없으니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의회도 마찬가지다. 여·야 의석 비율 차가 크지 않다면 여당은 야당을 무시할 수 없고, 야당도 여당과 대화와 타협을 안 할 수 없다. 의석 차가 적으니 대화와 토론, 타협의 길로 가야 하고 이럴 때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정책이 나오기 마련일 터다. 한국의 제22대 국회는 여당 108석(36.0%), 1야당 175석(58.3%), 2야당 12석(4.0%), 군소 3개 정당 도합 5석(1.7%)으로 구성되었다. 1야당이 과반수 이상이다. 이에, 야당 폭주가 지나쳐 ‘의회 독재’란 말이 나온다. 현 정부 출범 이후 2년 10개월 동안, 1야당 주도로 30회의 공직자 탄핵소추 발의를 한 사실만 봐도 의회 독재가 분명하다. 한데, 국민의 절반 이상이 한국에 부정선거가 있다고 알게 되었다는 보도다. 부정선거 세력은 결국, 영구집권으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전복을 획책할 것이다. 큰 비극이다. 지난 5년 가까이 한국의 부정선거를 선관위 발표 선거 데이터들을 통계학 대수의 법칙을 적용 분석, 추적한 G 박사는 지난 1월 28일 22대 총선 분석 결과를 종합 발표하였다. 그 결과에 따르면, 여당의 진짜 의석수는 최대 57석이 늘어 168석(56.0%)이라 한다. 그렇다면, 1야당은 118석((39.3%)이다. 국회가 G 박사의 연구 결과대로 구성된다면, 야당의 의회 독재는 아예 불가능할 일이다. 우리 사회가 선거에 컴퓨터와 전자개표기를 쓰지 않고 초등학교 반장선거처럼 수작업으로만 한다면, 부정선거 시비는 없어질 것이다. 선관위는 개표 정확성과 시간 단축을 위해 전산 개표 시스템을 쓴다고 하리라. 선거는 공명성이 생명이다. 대만이 수작업만으로 선거 개표를 해도 8시간이면 끝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기필코 벤치마킹해야 할 사안이다. 나라의 선거 개표제도를 초등학교 반장선거같이 ‘수개표’로 바꾸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5-03-24

믿음과 정치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사람의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부모·자식 관계는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는 관계일 테다. 때로 부모·자식 간에도 돈이나 그 밖의 것으로 서로 외면하고 심지어 살상을 벌이기까지 한다. 그런 것들은 예외로 치부된다. 친구 관계도 고등학교 다닐 때쯤부터 깊이 사귄 이들끼리는 우정으로 평생을 지켜가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동창은 시골 동창 아니면 너무 어려서, 삶이 갈려서 오래가기 어렵고, 대학 동창은 머리가 커진 뒤라 순수한 관계를 만들기 어렵다. 고교 동창 정도면 한두 사람씩은 평생의 관계를 맺어나갈 수도 있다. 그 친구들은 정의감이 같아서가 아니요 기질이 맞고 정이 들어서 길게 진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사회 나가서나 대학에서도 대학원 같은 곳에 가서는 정말 믿고 통하는 관계는 이루기 어렵다. 무엇보다 자기 존재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경쟁이 되고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여겨지기 쉽다. 나이 엇비슷한, 아래위 5년 정도의, 같은 세대 사람들은 평상시 친해도 끝내 상대를 불신하고 저버리기 쉽다. 이렇게 서로 믿고 의지하기 어려운 사람 관계 속에서 어쩌다, 정말, 저 친구는, 저 선배는, 저 상사는, 그리고 저분은 믿을 수 있다고, 따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아주 드물게 얻어질 수 있다. 희귀하게 그런 관계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계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세상은 거칠고 인생은 험난해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 괴로움, 외로움을 많이 덜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라면 어떨까? 글쎄다. 꼭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고교 동창이 한둘 있고, 대학에 믿고 의지할 선생님이 또 그만큼은 계시고, 대학 나와 문단과 학계에서 이런저런 관계로 얽힌 좋은 선후배들, 친구들이 또 몇 사람은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숫자를 너무 많이 ‘잡은’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한다. 더구나 지난 삼 개월여 동안 나는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다. 어떤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고, 이유는 비교적 간단명료해 보인다. 무엇인가, 내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형이, 선생님이, 당신이 그렇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나는 또 나대로 오랫동안 숙고해 온 데다 특히 지난 3개월은 사태가 엄중한 만큼 별일 아니라고 쉽게 의견을 접어버릴 수도 없다. 이런저런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혹은 자기 확신의 적개심에서 쏟아내는 말들이야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픔도 없는 까닭이다. 굳게 믿는 사람들이 걱정 반, 실망 반의 반응을 보일 때는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 마음 아픈 것을 감추기도 쉽지 않다.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다고 애써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믿음이란 세상의 정치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정치적 견해란 얼마나 ‘쉽게’ 변하는 것이던가. 세월을 조금이라도 길게 돌아보면 이미 우리들이 그런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 않던가.

2025-03-24

1천만원 써서라도 키 큰 자식으로?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훤칠한 외모와 큰 키도 사회생활의 경쟁력”이란 이야기가 세간을 떠돈 것은 이미 꽤 오래전이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를 이야기하면 고루하다는 말을 듣는 시대가 됐다.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것이니 함부로 상하게 하거나, 애초의 형태를 바꾸지 않는 게 효도의 시작’이라는 지난 시대의 가르침이 부모들에서부터 먼저 무너지고 있는 듯하다. 24일 세계일보에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세칭 ‘키 크는 주사’로 불리는 성장 호르몬 치료제의 시장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보도다. 작년에만 키 크는 주사가 27만 회 처방됐고, 이는 3년 전과 비교하면 2배가 늘어난 수치라 한다. ‘서울에서 1만1444명이 처방받았고, 경기도 7164명, 대구시 2947명, 부산시 2346명 등 전국적으로 성장호르몬 치료제가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고 기사는 이어진다. 성장 호르몬 주사의 비용은 만만찮다. 1년에 1000만원 안팎이 사용된다. 거기에 어린아이가 길게는 3년 동안 일주일에 6번 주사를 맞아야 하는 고충도 따른다. 짐작하다시피 주사 맞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부모는 적지 않은 돈을 쓰고, 아이는 두려움과 울음을 참으면서까지 ‘키가 큰 어른’이 돼야 하는 걸까? 의구심을 가지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나폴레옹이 키가 커서 유럽 대륙을 집어삼킨 건 아니다. 그는 오척단구였다. 또한, 존경할 만한 과학자나 의사가 되는 게 키와 무슨 상관이 있나. 중요한 건 ‘몸의 높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연민하는 ‘마음의 넓이’가 아닐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24

‘줄탄핵’ 100%기각… 野 국정공백 책임져야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12·3 비상계엄의 후폭풍으로 탄핵심판에 넘겨진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안이 기각됐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의 의견은 엇갈렸다. 5명은 기각 의견을, 1명은 인용 의견을, 2명은 각하 의견을 냈다. 한 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던 지난해 12월 27일 국회에서 탄핵 소추됐다. 탄핵소추 87일 만에 직무에 복귀해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게 됐다. 한 대행은 이날 오전 10시 헌재가 기각을 선고하자 정부서울청사에 출근해 “미국과의 통상문제 등 급한 일부터 추스려 나가겠다”고 밝혔다. 헌재는 이날 논란이 돼 왔던 탄핵 절차와 관련해선 “문제 없다”고 판결했다. 6명의 재판관이 국회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탄핵하려면 대통령 기준(200석) 의결 정족수가 적용돼야 하는데 총리 기준(151석)이 적용됐으므로 소추를 각하해야 한다는 한 총리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형식·조한창 재판관만 탄핵안 가결에 필요한 의결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한 총리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공모하거나 묵인·방조했으므로 파면돼야 한다는 국회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총리가 국회에서 선출된 조한창·정계선·마은혁 재판관 후보자의 임명을 보류한 것과 관련해선 “헌법과 법률 위반”이라고 판단했지만, 파면을 정당화하는 사유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공동 국정 운영 체제’를 꾸리려 했다는 탄핵사유도 인정하지 않았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 주도로 발의된 탄핵소추안(29건) 중 헌재가 결정을 내린 9건 모두 기각됐다. 탄핵이 얼마나 마구잡이로 추진됐는지를 여실히 말해주는 부분이다. 헌재가 탄핵 여부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판단하는 것은 사건의 중대성과 위법성이다. 위법한 사안이라도 탄핵해야 할 중대한 사유가 아니라면 대부분 기각된다. 국회는 앞으로 소추권을 행사할 때 이를 염두에 두고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 탄핵을 남발하면서 국정을 마비시킨다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25-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