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지경으로 쇼츠를 내리다 보면, 나의 관심사와 멀거나 심지어는 내가 싫어하는 종류의 영상을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알고리즘이 일을 못 한다고 구시렁댔는데, 다시 생각하면 알고리즘이 일을 너무 잘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더는 너한테 보여줄 영상이 없으니 그만 보고 일어나’라는 뜻으로.
다람쥐 얼굴에 난 종기를 짜는 영상이나, 낯선 언어로 진행되는 결혼식 중계 영상을 볼 때쯤엔 이미 하루가 자괴감으로 점철된 후이다.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하루를 허무하게 날리고 말았다는 자괴와 오늘도 기어코 해야 할 일을 미뤘다는 죄책감이 소용돌이친다. 이럴 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운동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대신, 긴 영상을 보는 것으로 ‘쇼츠 속죄’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단(短)의 세계’에 살고 있다.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나 책까지 누군가 ‘3분 요약’을 해주기를 바란다. 이제는 3분도 너무 길다며, 30초로 요약하는 쇼츠들까지 나오고 있으니, 우리의 사고가 점점 짧아지는 게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나 또한 긴 영상을 배속 없이 보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 지루한 부분은 건너뛰고 도파민 터지는 핵심만 보고 싶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아주 긴 영상을 배속과 건너뛰기 기능 없이 보는 벌을 내리곤 한다. 그것이 바로 쇼츠 속죄이다.
열 살 무렵, 잠시 필리핀에 산 적이 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당시 내 유일한 즐거움은 열흘에 한 번 엄마와 함께 근처 한인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빌리는 것이었다. 실제 방영 날짜보다 늦게 볼 수밖에 없고, 엄마가 바쁜 날에는 감상이 며칠씩 미뤄질 수밖에 없었던 그 드라마를 보는 순간만을 나는 늘 손꼽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더 이상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게 되었다. 드라마의 긴 분량과 쪼개진 회차가 너무나 큰 숙제처럼 느껴진 탓이다. 그렇지만 내게도 유난히 좋아했던 몇 드라마들이 있었는데, 바로 미드 시트콤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모던 패밀리’를 사랑했다. 사람들이 ‘프렌즈’에 열광할 때도 한눈팔지 않고 ‘모던 패밀리’를 보고 또 보았다. 시즌 11까지의 긴 분량이었지만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쇼츠 속죄를 할 때 주로 보는 영상이 바로 이것이다. 쇼츠 속죄의 핵심은 ‘이미 아는 내용을 집중해서 보는 것’이다. 시트콤은 매회 흥미롭고 희극적인 에피소드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몹시 지루할 수밖에 없는 장르이기도 하다. 매회 같은 등장인물과 배경, 상황이 연속되는 데다 몇 회차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도 아니기 때문에 잠시 한눈팔기도 쉽다. 그런 의미에서, 시트콤은 여러모로 쇼츠 속죄에 최적화된 장르인 셈이다.
며칠 전, 어김없이 쇼츠 속죄를 하기 위해 ‘모던 패밀리’를 틀었다. 진지하게 스마트폰을 없애야 하나 고민하며 ‘모던 패밀리’를 두 시간쯤 봤을 때 속죄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 떠올랐다. 내가 왜 시트콤을 좋아하는지, 시트콤이 왜 쇼츠와 반대 지점에 있다고 여기는지 깨달은 것이다.
시트콤은 우리 삶의 장면을 압축해 놓은 것 같다. 기쁘고 슬픈, 즐겁고 우울한, 쓸쓸하지만 발랄한 삶의 순간들이 모두 담겨 있다. 인물들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깨달음을 얻거나, 혹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채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눈을 뜨면, 언제나와 똑같지만 조금은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가 쇼츠에 중독된 것은, 어쩌면 삶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가 아닐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잊기 위해 자극적인 영상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으니까, 그 순간만큼은 어떤 고민도 무용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모던 패밀리’의 클레어는 완벽한 엄마이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필은 쿨한 아빠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매번 망신을 당한다. 클레어의 아빠인 제이, 동생 미첼, 그들의 파트너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보는 이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처절한 모습이 내내 그려진다.
그럼에도 에피소드가 끝나면 이들은 어김없이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대단한 화해도, 그럴싸한 결론도 없다.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래도 오늘이 무사히 끝났다는 것, 그리고 내일도 비슷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만 남는다. 어쩌면 쇼츠 속죄란 그 장면을 보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건너뛸 수 없는 일상의 지루함을 배속 없이 견뎌내는 연습.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내일을 기약하는 것. 그것이 나의 하루에 보내는 작은 속죄이다.
/양수빈(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