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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관봉권

조선시대에도 뇌물이 성행했던 모양이다. 왕조실록에도 지방의 수령이 백성으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조정의 대신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지금처럼 화폐 유통이 원활하지 않아 뇌물로는 귀금속이나 포목 그리고 지역 특산물 등이 주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해 관계가 얽힌 사람이 사는 사회에 뇌물이라는 부정한 거래는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든 있었던 악습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전직 대통령 영부인의 옷 구입비에 관봉권이 사용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관봉권에 대해 궁금해 하는 국민이 많다. 일반인에게는 낯설게 들리는 관봉권은 말 그대로 “관에서 봉인한 지폐”다. 금융권에서는 “조폐공사가 한국은행에 신권을 보낼 때 액수와 화폐 상태에 이상이 없음을 보증하는 의미로 십자 형태의 띠를 두르고 비닐로 싸서 보내는 지폐”라고 설명한다. 이런 관봉권은 은행이 개인에게 인출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VIP고객이나 대기업이 명절 때 임직원에 지급할 목적으로 은행에 요구하면 지출되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고 한다. 또 과거에는 청와대가 관봉권의 유통 경로였다는 얘기도 들린다. 5만원권 5000만원 뭉치의 크기는 각티슈 정도라고 한다.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될 때 일각에서는 뇌물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는 만원권에 비해 부피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청와대 시절 지불한 옷값이 4억원에 달한다는 경찰 조사가 있었다. 옷값으로 결제된 현금이 관봉권이라 한다. 개인이 소지하기 어렵다는 관봉권이 옷값으로 사용된 경위를 경찰이 조사한다는데, 그 결과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06

여성 없는 21대 대선, 이대로는 안된다

이번 6·3 조기 대선은 단순한 대통령 교체가 아니라 정치적 혼란 이후 국민이 어떤 리더십을 원하는가를 가늠하는 시험대다. 대선 후보들은 최근 잇따라 정치·경제·사회 분야 공약들을 발표하면서도 ‘여성의 삶과 경험’을 의제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윤석열 정부 집권 1년여 만에 우리나라 ‘국가성평등지수’는 2010년 이후 처음으로 하락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17일 2023년 우리 국가성평등지수가 65.4점으로 전년(66.2점)보다 낮아졌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특히 감소 폭이 가장 큰 지표는 ‘가족 내 성별 역할 고정관념’ 인식 수준(60.1점→43.7점)이었다. ‘경제적 부양 및 가족의 의사결정은 남성이 하고 가사·가족 돌봄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성별 고정관념에 동의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이 문제는 국가의 인구 정책, 노동시장 구조, 경제성장 전략과도 직결된 요소라 할 수 있다.   지난 4월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주최로 열린 ‘모두의 성평등 다시 만난 세계’ 간담회에선 많은 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은 “집담회의 부제이기도 한 ‘여성 없는 21대 대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정치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절박한 외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계엄 사태 이후 지난 몇 달간 광장과 거리의 중심엔 청년 여성들이 있었다”면서 “이번 조기 대선에 임하는 정당이나 후보들은 그들의 목소리와 의제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다. 여성 의제들은 저출생·노동시장·고령화 사회 돌봄 이슈 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에도, 대선 후보들은 최근 잇따라 다양한 공약들을 발표하면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여성 의제에 침묵하면 여성 유권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는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성부를 폐지하고 가족 관련 사무를 보건복지가족부로 이관했다가 이후 2010년 3월에 다시 개편된 역사를 갖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양성평등 실현, 청소년 및 가족 지원, 다문화 및 한부모 가족 지원, 여성 폭력 예방 및 지원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역할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는 여성의 권리와 가족의 복지를 향상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부족하고, 성평등 정책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가족의 복지를 위협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여성과 가족의 복지 향상은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제다. 이를 위해 정부와 정치권은 성평등과 가족 복지를 위한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은 이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높여야 한다. 가정의 달 5월에 여성들은 여성, 젠더, 성평등, 가족, 질적인 여가부 기능을 확대하고, 그에 따른 예산 수립에 힘써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윤희정 편집부국장 대우

2025-05-06

산불피해 복구, 희망과 베풂의 씨앗

극명한 대조였다. 밭두렁이나 길, 개울이나 둔덕, 골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토록 판이한 양상이 나타나다니, 참으로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게 희비가 엇갈리는 현실이 비탄스럽게만 여겨졌다. 대지는 파릇파릇 생기를 더해가며 무채색의 황량함을 초록으로 채워가는데, 지척의 산야에서는 불에 탄 흔적이 검버섯처럼 칙칙하고 시커멓게 멍들어가며 신음하는 듯하니 3월에서 4월, 불과 한 달새 이다지도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친 초대형 산불로 경북 북동부지역이 초토화되면서 사상 최악의 피해가 속출했다. 일상을 삼켜버린 화마에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하루 아침에 잃고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들이 3000명을 넘는다 하니, 막막하고 암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실의에 찬 이재민들을 위한 온정의 마음과 피해복구의 손길들이 각계각층에서 더해지고 있어서 그나마 안도스럽지만, 피해지역이 워낙 광범위하고 상흔이 깊어서 일상회복과 정상복구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작은 관심이 큰 희망이 되듯,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고 위로하는(患難相恤) 상부상조의 양속이 예나 지금이나 주변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며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것 같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산불피해성금을 전달하는 어린이나 기업체 등의 기부, 자원봉사자들의 한결 같은 복구활동 참여, 지자체 공무원들의 발 빠르고 체계적인 복구계획 시행·지원 등으로 피해복구에 다소 속도를 내고 이재민들의 임시거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거기에 휴일까지 반납하고 복구작업에 적은 일손이나마 보태며 피해 당사자들을 위로해주는 미담이 전해져서 훈훈하게만 여겨진다. 휴일 아침 일찍 영덕군 지품면 수암리의 한 과수원엘 가서 불에 탄 사과나무와 복숭아나무, 감나무 등을 베어내고, 소실물 잔해 정리작업에 팔을 걷은 이들은 포스코 포항제철소 사진ㆍ붓글씨봉사단원들이다. 주로 사진촬영과 붓글씨 나눔활동을 실시해온 재능봉사단원들이 이날만큼은 카메라와 붓 대신 톱과 낫을 들고 산불피해가 심각한 과수농가에서 복구작업을 펼친 것이다. 봉사단원들은 과수원 주인의 안내와 요청에 따라 불에 탄 사과나무 등의 피해목 30여 그루를 전동톱으로 베어내고 잔가지를 정리, 포터차량에 실어 폐목 임시보관장소로 운반하는 등의 작업을 실시했다. 또한 농가 2채와 농막, 저온창고, 차량 2대가 전소된 건조물 바닥의 소실물을 정리하고, 일부 불에 타고 찢어져 썰렁하게 일렁이는 그물망을 제거하는 작업도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과수 정리작업을 마치고는 한 봉사단원이 사비로 마련한 양말, 수건 등의 생필품을 과수원 주인에게 전달하면서 산불피해의 아픔을 달래 드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복구작업은, 포스코 1%나눔재단에서 최근 산불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의 조속한 피해복구를 위해 ‘Change My Town’ 지원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자발적인 봉사활동이다. 기부자인 임직원이 지역사회의 개선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봉사활동까지 직접 실행하는 참여형 ‘체인지 마이 타운’ 나눔 사업은 2019년부터 시행돼 수혜처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포스코의 상생협력 나눔활동이 희망과 베풂의 씨앗이 되길 기대해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06

정치와 막말

“과거 ‘여자는 밤에만 쓰는 것’, ‘주막집 주모’ 등 발언한 적 있느냐” “대통령 앞에서 깐죽거리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도대체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쏟아지는 막말들 말이다. ‘춘향이’ 운운한 어떤 발언은 입에 담기도 어려워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내란 정국 때는 ‘계몽’과 ‘요원’이란 단어가 히트(?)더니, 근래엔 ‘깐족’과 ‘아부’, ‘키높이 구두’와 ‘눈썹 문신’이란 말이 유행인가보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나 국정철학은 없고 오로지 ‘비아냥’과 ‘조롱’만 남은 모 정당의 토론회를 보고 있자니, 저들에겐 과연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통령 파면으로 시행되는 엄중한 대선인데, ‘비상계엄’과 ‘탄핵’마저 희화화되고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공론장에서의 말(Lexis)과 행위(Praxis)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말과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수행적인 힘을 대의하는 자리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의 생산과 교환은 일정한 언어 자본을 갖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징적 권력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고 논한 바 있다. 언어 교환의 권력 관계는 제도적이든 아니든 그들이 집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따라 상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 말할 수 있고, 명령의 의미를 발화할 수 있지만, 필요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는 자에게 그것은 ‘행위’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말’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말은 수행적인 힘을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거다.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발화가 ‘언어의 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담론은 언제나 ‘완곡어법’이자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잘 말하려는’, ‘적절하게 말하려는’ 전략적 수정의 결과이기에 ‘완곡어법’이며, ‘말해야 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화 형태가 결정되기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의식적인 계산으로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의 영역이라 수용가능성에 대한 감각,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언어생산물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능한다. 이점을 비춰볼 때 막말을 해대는 정치인의 언어 감수성이 어느 레벨에서 작동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토론을 겨우 ‘말싸움’ 정도로 여기는 천박한 권위 의식과 경쟁심이 결합 된 언어적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예전의 보수는 나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이라도 부렸다. 위선이란 적어도 세간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남들 눈치 정도는 보기 때문에 가능한 가식이다. 그럼에도 즉물적 감정에만 휩싸여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 오만한 권력이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토론 자리를 상대 ‘망신주기’의 기회 정도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막말이 계속되는 한, ‘천박한 정치’에 대한 ‘고상한 대중’의 심판도 오래고 지속될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5-01

관식이 타령

집안에 음기가 너무 세게 흐른다. 집안에 남자라곤 나 혼자이다. 첫애가 딸이라고 했을 땐 그래도 둘째는 아들이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에 불과했다. 삼신할머니에게 그만큼 빌고 빌었건만 둘째도 달지 않고 나왔다. 딸 둘에서 멈췄다. 딸 셋이 되면 내가 집을 나갈 것 같아서다. 삼 형제를 두신 우리 아버지의 업적에 큰 누를 끼치고 말았다. 집안의 대가 끊어졌다. 여자들의 세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네들의 세상은 여태 내가 겪지 못한 사건의 연속이었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 안다고 하기엔 많이 역부족이다. 여자들의 심리는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 혹은 ‘본부장’이란 타이틀은 대체로 재벌가 아들이 걸치는 직책이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다. 아는 것도 많고 매너나 에티켓도 좋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구석은 다 갖춰져 있다. 이렇게 설정해 놓고 가난한 여자를 좋아하게 만들면 그 드라마는 대박이 난다.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의 구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는 모든 여자는 가난한 여자가 되어 꿈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가 언제 적 이야기인가. 일제 강점기 때 조종환의 ‘장한몽’에 나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이런 이야기가 AI 시대에도 먹히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김중배의 다이아에 심순애는 이수일을 차버리지 않는가. 결국 돈 앞에는 사랑이고 뭐고 없다. 냉혹한 돈의 현실만 있을 뿐이다. 난 여태 돈 많은 남자 싫어하는 여자는 잘 보지 못했다. 우리 집 여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졸지에 돈을 잘 벌어오지 못하는 나는 평생을 죄인처럼 눈치만 보면서 살았다. 오랫동안 실장이나 본부장에게 몰입되어 있던 여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이란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지고지순’이란 단어를 남자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양관식. 거의 외계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현실 세계에선 극히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이다. 대부분 부상길, 아니 ‘학 씨 아저씨’란 인물이 현실 속 전형적인 한국 남성 모습이 아닐까 싶다. 졸지에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 관식이 때문에 참 피곤하다. 오직 한 여자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는 한 남자의 순애보는 모든 여자의 로망이 되었다. 덕분에 나 같이 여자가 많은 집에선 전부 양관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곁눈질로 나를 보면서 ‘학 씨 아저씨’보다 더 한 꼰대 인간 취급을 한다. 세상이 개벽했다. 여자들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이 정도로 변화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돈 없는 관식이가 돈 많은 본부장을 밀어내고 말았다. 걱정은 둘째 딸이다.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데 아직 관식이를 찾고 있다. 세상에 관식 같은 남자는 없다. 대부분이 학 씨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고 귀에 따까리가 앉도록 말했건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관식이 타령이 끝이 없다. 제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해 줬으면 싶은데, 그 드라마 한 편이 정신을 흐려놓았다. 그 전에 자기 남편감은 경제력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돈 많은 양관식.” 이다. ‘히떡’ 자빠질 뻔했다. 이번 생애에 둘째 사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노병철 수필가

2025-05-01

스페인 대정전

블랙아웃(Black Out)은 앞이 캄캄해진다는 뜻이다. 발전 용어로는 모든 전력공급이 중단된 최악의 정전사태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 국어 순화사전에는 이를 대정전이라고 부른다. 특정 지역 혹은 특정 도시가 불랙아웃되는 일은 가끔 있었으나 한 나라가 통째로 블랙아웃되는 일은 세계적으로 극히 드물다. 지난달 28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동시에 블랙아웃 현상이 벌어졌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리스본 등 대도시 곳곳에서 관광객과 시민들이 기차와 지하철,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문제는 국가적 대정전에도 아직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력 복구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알아야 할 정전 원인은 오리무중이라 한다. 때문에 정전 원인에 대한 각종 관측이 난무한다고 한다. 사이버 테러 등도 거론이 되나 현재로선 재생에너지원의 과부하가 가장 유력한 원인일 것으로 관측이 되고 있다. 스페인은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의존도가 유럽에선 독일 다음으로 높은 나라다. 날씨 변화에 따라 전력 생산이 급격히 변동될 수 있는 전력 환경이다. 이번 사태도 불안정한 전력 공급이 전력 시스템에 부담을 주어 대규모 정전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으로 외신은 전한다. 아직도 정확한 정전의 원인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재생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위험하다는 교훈은 주목할만한 평가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전력 사용을 위해 지금의 전력 생산 패러다임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세계가 반면 교사할 블랙아웃 사태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01

가정의 달 의미 새기며 어려운 이웃도 함께

1일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 19일 성인의 날, 21일 부부의 날 등 5월은 가족과 함께하는 행사가 많아 가정의 달이라 부른다. 바쁜 일상을 이유로 등한시했던 가족과의 시간을 이런 기념일로 하여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가정의 달 제정의 의미를 살리는 좋은 기회가 된다. 유엔은 1993년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해 가정을 위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적극 참여하자는 취지로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정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지금은 전 세계가 5월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가정의 달로 많은 행사로 분주하다. 가정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 단위다. 가족의 건강한 마음과 정신이 바탕이 된 가정 위에 국가도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건강한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간의 건전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고, 상호간 신뢰와 존중이 존재해야 한다. 또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가정으로 나아갈 때 건강한 가정도 성립이 된다. 그러나 급변하는 세상 속에 시간에 쫓기고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홀로 사는 노인들이 증가하는 이유는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인가구 1000만명 시대란 것은 가족관계 측면에서 보면 가정해체 현상의 한 단면이라 할 수도 있다. 경제적 이유로 또 취업난을 이유로 사회와 단절하고 사는 그들의 아픔을 되돌아 보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할 일이다. 이달을 가정의 달로 제정한 취지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노인인구 중 22%는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다. 함께 사는 가족이 없어 외로움이나 우울감을 많이 느껴 독거노인의 자살률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다. 올해 맞는 가정의 달은 산불로 피해를 입은 경북도내 많은 이웃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더 소중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산불 피해지역으로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다.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다. 모든 사람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몸으로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2025-05-01

이준석의 ‘정치적 산실’은 어쨌든 보수진영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후보에 대한 보수진영의 단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이번 대선을 보수·진보 대립 구도로 치르려면 보수진영 후보 단일화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후보를 향한 보수진영의 러브콜은 서로를 향한 불신과 감정적 골이 생각보다 크고 깊다는 사실만 확인시킨 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후보는 지난달 3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도 “요즘 제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빅텐트 단일화에 참여할 뜻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 그럴 일은 전혀 없다”고 쐐기를 박는 발언을 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단일화와 ‘빅텐트’라는 단어가 40여 차례 등장했다. 이 후보는 대구·경북(TK) 지역을 방문할 때 특히 보수진영 후보단일화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보수텃밭인 TK지역에서는 ‘반(反)이재명 빅텐트’에 이 후보가 들어와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돼 있다. 이 후보는 현재 청년세대 공약을 무기로 제3지대를 형성해 대선을 완주한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 제22대 총선 때 경기 화성을 지역구에서 민주당·국민의힘 후보와 3파전을 벌여 극적인 승리를 한 경험이 있다. 이 후보는 당시 1위인 민주당 공영운 후보와 30%포인트대로 벌어졌던 초반 격차를 뒤엎고 당선됐다. 이 후보가 국민의힘 후보와의 단일화에 손사래를 치는 상황은 이해가 간다. 국민의힘 친윤(윤석열)계가 그를 당에서 몰아낸 당시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화가 치밀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 대세론에 맞서 보수진영이 대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려면 후보 단일화는 반드시 성사돼야 한다. 이번 대선이 이재명·이준석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 3파전으로 치러지게 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후보가 보수진영 후보 단일화를 위한 빅텐트에 들어와 4년 전 국민의힘 대표에 선출될 당시처럼 새바람을 몰고 오길 기대한다. 지금의 낡고 고루한 보수정당을 혁신하려면 이 후보처럼 젊음과 열린 사고를 가진 정치인이 꼭 필요하다.

2025-05-01

새로 생긴 공중협박죄와 공공흉기휴대죄

2023년 7월 온라인상에 길이 30센티가 넘는 칼을 구입한 구매 내역과 함께 “수요일에 신림역에서 여성 20명을 죽이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신림역 흉기 난동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신림역 인근 주민은 물론 전 사회가 공포에 떨었다. 글을 올린 용의자가 긴급체포되어 구속기소 되었지만 올해 1월 대법원에서는 최종적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이 확정되었다. 기소된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협박죄 일부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언을 반복적으로 도달하게 하면 성립하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피해자에게 해악을 고지함으로써 공포감을 일으키게 하여 성립하는 협박죄는 피해자별로 성립하는 범죄인데 ‘신림역 인근 상인들 및 주민들‘이 피해자라고 하기엔 너무 범위가 넓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한국인 여성을 대상으로 혐오와 증오를 표출하는 글을 1700여 건 작성한 것도 ‘한국인 여성’의 범위가 넓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 다만 해당 날짜 신림역 인근을 방문하거나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20~30대 여성들을 살해할 목적과 특정성은 인정되어 이들에 대한 협박 및 살인예비 혐의만이 유죄로 인정되었다. 어쨌든 피고인은 실형을 면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온라인상에는 이런 범죄를 예고하는 글들이 일 년에도 수백 건 이상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협박이나 범죄 예고를 해도 피해자가 특정되어야 하는 기존 범죄들의 구성요건적 한계 때문에 처벌이 어려운 면이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흉기를 소지하거나 드러내어도 경범죄 처벌법으로 밖에 처벌하지 못해 법정형이 벌금 10만원 이하로 처벌 수위가 낮고 현행범 체포나 긴급체포 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최근 형법에 공중협박죄와 공공장소 흉기휴대죄가 신설되어 지난달부터 시행되고 있다. 신설된 형법 제116조의2 공중협박죄는 불특정 또는 다수의 사람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할 것을 내용으로 공연히 공중을 협박한 사람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처하는 죄이다. 실제 지난달 라이브 방송 중이던 유튜버가 “누구 한 명 죽이고 싶네”라고 말했다가 이 공중협박죄로 입건되었다. 형법 제116조의 3의 공공장소 흉기소지죄는 정당한 이유 없이 도로·공원 등 불특정 또는 다수의 사람이 이용하거나 통행할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사람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흉기를 소지하고 이를 드러내 공중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킨 사람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죄이다. 이 죄 시행 첫날 서울에서 행인을 향해 흉기를 꺼내 든 중국인이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설 범죄들이 생긴 이상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묻지마 범죄와 모방범죄를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수사기관도 적용 대상과 한계를 명확히 하는 적절한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불의의 피해와 혼선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05-01

수리온 헬기 야간 투입이 산불 조기진화 주효

지난달 경북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로 도내 5개 시군의 산림이 초토화되는 과정을 우리는 목격했다. 매년 발생하는 산불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인명은 물론 막대한 재산 피해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경북 북부지역 산불이 도내 5개 시군으로 퍼져 대형화된 데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강한 바람이 불고 건조한 날씨가 산불을 키웠다는 기상 조건도 해당되고, 임도 부족, 소방 장비 부족 등도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 중 산불을 조기에 진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헬기 교체 문제가 늘 가장 큰 이슈였다. 산불이 더 커지기 전에 기동력 좋은 헬기를 바로 투입해야 하나 헬기 노후와 용량 부족, 야간 투입 불가 등의 조건으로 조기 진화에 장애가 됐다는 것이다. 특히 야간 진화작업에 헬기를 동원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금상첨화인데도 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경북 북부지방 산불 진화에도 헬기의 야간 투입은 물론 없었다. 날이 새고 나면 진화율이 다시 올라가는 비효율적 상황이 반복되는데도 안전 등을 이유로 헬기 활용을 못한 것이다. 그 사이 피해가 커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대구시 북구 함지산 산불이 23시간 만에 주불을 진화했다. 축구장 364개 면적을 불태웠지만 인명과 재산 피해없이 빠른 시간 안에 수습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함지산 산불 조기 진화의 주인공으로 수리온 헬기가 주목받고 있다. 수리온 헬기는 우리 군이 보유한 노후 헬기를 대체하기 위해 국내서 만든 다목적용 신형 헬기다. 함지산 산불에 산림청은 두 대의 수리온을 처음으로 야간 투입키로 하고 임무를 부여했다. 두 대는 밤사이 3만6000L 상당의 물을 투하하면서 전날 밤 8시 19%이던 진화율을 다음날 오전 6시 65%까지 끌어 올리는 성과를 냈다. 산림청도 “수리온 헬기의 야간 투입으로 큰 성과를 봤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산불이 연중화·대형화되고 있다고 한다. 노후 소방헬기 교체가 가장 시급하다. 당국은 수리온 헬기의 야간 투입으로 확인된 효과를 바탕으로 신형헬기 도입에 나서야 한다.

2025-04-30

국힘, 3차 경선은 ‘비전제시’로 승부 겨뤄라

국민의힘이 29일 발표한 대선후보 2차 경선 결과, 김문수·한동훈 후보가 3차 경선에 진출했다. 탄핵 반대파인 김 후보와 탄핵 찬성파인 한 후보 간 1대1 맞대결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김 후보에겐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한 강성 당원들의 표가 결집했을 것이고, 한 후보에겐 탄핵에 찬성하는 당원과 중도층 표심이 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두 후보는 그간 토론에서 탄핵 찬반을 두고 난타전을 벌였지만, 결선 진출 후에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탄핵 문제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똑같이 했을 것이다. 2차 경선 후 김 후보는 “우리는 뭉쳐야 이긴다. 누구라도 손잡고 반드시 이재명 독재를 막아내겠다”고 했고, 한 후보는 “저와 김문수 후보는 조금 다르지만, 2인 3각으로 이재명에 맞서야 한다”고 했다. 보수 진영이 탄핵 찬반으로 분열된 채로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두 후보가 절실하게 인식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국민의힘은 5월 1, 2일 이틀간 당원과 국민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해 3일 대선 후보를 선출한다. 3차 경선 투표는 2차 경선과 마찬가지로 당원 선거인단 투표(50%)와 국민 여론조사(50%) 합산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투표 결과를 보면, 3차 경선 선거인단도 아마 ‘누가 이재명 후보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를 잣대로 투표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후보는 남은 기간 보수 진영을 통합하면서 중수청(중도층·수도권·청년) 외연 확장을 할 수 있는 미래 청사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김 후보는 집권비전을 제시하면서 ‘윤석열 아바타’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하고, 한 후보는 젊은 정치인답게 새로운 보수의 가치와 정책을 통해 당원과 중도층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만약 두 후보가 최종결선에서도 2차 경선 때처럼 탄핵 찬반을 두고 정면충돌할 경우, 국민의힘에 대한 중도층 민심은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뽑힌 최종후보가 한덕수 대통령 대행과 후보단일화를 한들, 위력적인 효과를 내기는 어렵다.

2025-04-30

어린이를 생각한 사람, 오늘 우리가 할 일

5월 5일, 우리는 ‘어린이날’을 맞는다. 아이들을 위해 행사를 벌이고 선물을 주며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간다. 이 날은 단지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그 날이 담고 있는 정신이 온 사회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방정환 선생을 새롭게 떠올리게 된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문학의 선구자 또는 아동 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넘어,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1923년 5월 1일이었다. 일제의 서슬 시퍼런 억압이 거셌지만, 3·1운동 이후 우리 사회에는 잠시나마 ‘문화정치’라는 명목으로 자치와 표현에 작은 여유가 생겼다.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가 독립을 도모하던 때에 청년 방정환은 ‘나라를 되찾은 다음은 누구의 날들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고, 그 답으로 ‘어린이’를 들어 올렸다. 어린이를 단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를 넘어, 어린이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율성과 존엄성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했다. 이 땅에 되찾을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다음 세대 ‘어린이’라 믿었다.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진정한 해방과 독립의 열매는 어린이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나 ‘아이’ 같은 단어 대신 ‘어린이’라는 낱말을 지어내었다. 아주 작은 차이였겠지만 ‘어린이’에는 깊은 소신과 철학을 담았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하며 목소리를 키우고자 했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쳤다. 어른 중심의 세상에 어린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새기려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며 파격적인 시도였다. 우리는 방정환 선생이 바라던 미래를 살고 있다. 해방을 맞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했으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참으로 그가 꿈꾸던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는 세상’이 실현되었는지는 아직도 질문으로 남는다. 경쟁과 입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얼마나 안전하고 존엄하게 자라고 있을까. 새 정부가 들어선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의 문이 또 한번 열린다. 청년 방정환의 생각을 되새길 때다. 어린이는 가르침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어른들의 생각을 이끄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어린이의 일상을 중심에 두고 설계되어야 하며 정책과 제도의 뿌리에는 언제나 ‘어린이를 생각하는 세상’이 자리잡아야 한다. ‘어린이날’을 하루 기념일로만 여길 게 아니라, 일 년 365일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영그는 날들로 만들어야 한다. 100년 전 방정환이 하루라도 어린이를 귀하게 생각하자 떠올렸다면, 오늘 우리는 어린이는 날마다 소망과 기대가 열리는 꿈나무로 여겨야 한다. ‘어린이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어느 청년의 꿈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으로 어린이를 키워야 한다. 당장 투표하지 않아도 내일 나라를 이끌 기둥 ‘어린이’를 나라살림의 한 가운데에 두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4-30

스님의 소고기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를 얘기했다. 나는 문제를 풀어 볼 요량으로 남편 입장에 서서 그녀가 해 주었으면 좋을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는 이미 다 해 보았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친구를 위해 한 말이 괜한 화를 불렀다. 입을 다문 그녀의 표정에 예전의 내가 보였다. 서른 즈음, 다섯 살인 딸애와 갓 두 돌 지난 아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나날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대문을 나서면, 골목 마루에 앉아 담소 중이던 아주머니들이 오늘도 시댁에 가느냐고 묻곤 했다. 나의 일상은 집과 시장을 맴돌이 하는 것과 시댁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내게 폭탄이 터졌다. 남편의 공장이 부도가 났다. 예상치 못한 연쇄부도에 그는 우왕좌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난 거래처의 전화를 받는 것뿐이었다. 밀린 자재 값이 무엇인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댁과의 작은 오해가 부도보다 더 크게 나를 휘몰아쳤다. 풀려고 해도 꼬인 매듭의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댈 남편마저 채권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든 잘못은 이미 내 것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아이들을 친정엄마께 맡기러 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엄마는 내일 밭에 일할 사람들을 불러놨으니 아침 일찍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대답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엄마의 불안한 눈빛이 골목으로 따라 나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팔공산은 어스름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십대에 자주 갔던 곳을 찾아가는 발길이 자꾸만 허방을 짚었다. 작은 절은 여느 때와는 달리 불빛 하나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요사채 마루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았다. 친정에 두고 온 아이들도 내 머리 속에는 없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돌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스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지 앉았다. 그를 보자 눈물이 먼저 말했다. 나는 두서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게 그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다 내 업이라고.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는데 다 내 탓이란 말인가. 내겐 혈육과 상관없이 오빠처럼 지낸 스님이었다. 딸과 아들도 외삼촌이라 부르는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엉뚱하게 법문처럼 들렸다. 절에는 스님만 있을 뿐 오빠는 없었다. 그 밤이 오래오래 지나갔다. 나는 여명 사이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산을 내려왔다. 내 하소연이 원하는 것은 ‘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한마디였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내 생각의 서랍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먼 길을 찾아 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는 혼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길가에 앉아 집으로 가는 첫차를 한참 기다렸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점점 잊어가던 어느 날,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뜬금없는 소고기 식당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약속 장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이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리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스님과 소고기는 뭇사람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했다. 고기를 굽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고기가 익기 바쁘게 남편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서 먹어라’는 채근에 마지못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소고기가 입에 살살 녹는 듯 했다. 접시는 빠르게 비었고, 또 채워졌다. 목에 찰 때까지 먹고 나서야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는 얇은 스님의 주머니를 바닥냈다. 그가 말했다. ‘힘내야지’라고. 나는 그제야 스님이 상추쌈만 몇 점 드셨다는 것을 기억했다. 내 인생에서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싱싱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친구에게 했다. 너만큼 하기 쉽지 않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는 내 추임새에 한참을 더 속을 풀어냈다. 나는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주었다.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2025-04-30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

밀물이나 썰물, 조수간만의 차라는 단어는 머릿속 지식수준이요, 지구와 달의 인력에 의해 생긴다는 상식으로만 알 뿐이다. 그러다 보니 바다가 갈라지고 육지와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긴다는 뉴스는 저세상 이야기인 듯 그저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은 유독 수심이 낮은 바다란다. 수심이 얕은 바닷속 지형이 썰물 때 해수면 위로 드러나면 육지와 섬 또는 섬과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겨 마치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다 갈라짐 현상이 많다고 했다. 이를 ‘신비의 바닷길’이니 ‘모세의 기적’이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로 떼지어 들어가는 뉴스 속 영상은 정말 신이했다. 평소 사람 많은 축제장에 휩쓸리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내 평생 한 번쯤은 나도 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는데 며칠 전 이뤘다. 언젠가 이화회 모임에서 그곳을 가고 싶다는 얘기를 비쳤다. 엘라 할머니께서 간 적이 있다고 하셨고 우리 언제 한 번 가요 입을 맞췄다. 바닷길이 열리는 날이 정해져 있다며 숙소까지 예약하셔서 4월의 말 이화회 세 명은 무창포 여행을 감행했다. 무창포는 충남 보령의 바닷가였다. 해변에서 눈앞에 보이는 석대도까지 1.5km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하다고 했다. 대구에서 세 시간도 넘어 걸리는 다소 먼 길이었지만 설레며 나선 길이라 내내 신났고 들떴다. 바닷가 바로 앞 숙소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파도 넘실대고 있었다. 서해니까 얕은 바다겠지 짐작할 뿐 물색으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잘디잔 모래와 작고 둥근 색색의 자갈이 뒤섞여 있는 해안은 길었고 꽤 아름다웠다. 해안에서 머잖은 곳에 작은 섬 몇 개가 떠 있었다. 그 중 한 섬으로 바닷길이 생기고 내일 아침이면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 열린 바닷길을 걸어 저 섬으로 걸어갈 수 있다니 반신반의할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숙소 베란다에서 바다를 살폈더니 모래밭이 더 넓어지고 어젯밤엔 보이지 않던 암초 같은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간대별로 비교해 보고자 사진을 찍는데, 해안가에서 섬 쪽으로 기다란 띠 같은 길이 어슴푸레 보였고 흥분이 밀려들었다. 과연 물때가 되자 해안가로부터 길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엎드려 조개 잡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작은 바구니도 하나 들고 그들에 합류했다. 바닷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위엔 연초록의 해초가 미끌거렸고, 돌 위엔 작은 고둥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물 빠진 바다 위에서 돌을 헤집고 모래를 파며 제법 조개 따위를 찾아내느라 열심이었다. 올리브 할머니와 나는 지금 우리 바다 속에 있는 거 맞죠 연신 확인하며 흥분해했다. 조심히 딛는 발 아래 돌에 붙어있는 따개비 따위가 보였고, 떼어 바구니에 담기도 했지만 바닷길을 걷고 있다는 신기한 마음에 그저 섬으로 섬으로 걸어들어 갈 뿐이었다. 물결무늬가 선명한 모래 위를 디디면 단단해서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동안의 경험은 기이했다. 해변 가득 품어 안았던 저 바닷물은 어디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까. 물결무늬 선명하게 남긴 채 빠졌다 어디서 다시 들어오나.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솟아오르나. 의문은 신비로 남을 뿐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4-30

한약의 과학적 효능, 어디까지 밝혀졌을까?

한약은 수천 년간 동아시아인들의 건강을 지켜온 전통의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그 효능과 안전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얼마나 검증되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전통 지식이 현대 과학의 언어로 얼마만큼 설명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최근 한약의 과학적 연구로 그 효과가 객관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황기(Astragalus membranaceus)는 대표적인 예로 한의학적으로 기를 보강하고 면역을 높이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현대 연구에 따르면 황기에는 폴리사카라이드, 사포닌, 플라보노이드 등의 활성 성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이들이 면역세포인 대식세포나 자연살해세포의 활성을 촉진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부 연구는 암 환자의 보조 치료제로 황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작약(Paeonia lactiflora)은 진통 및 진정 효과로 널리 쓰여왔으며 근래에는 그 안의 파에오니플로린 성분이 항염증 및 신경 보호 작용을 한다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이는 류마티스 관절염, 생리통, 신경통 등의 질환에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작약의 효능을 현대적으로 설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감초는 거의 모든 한약 처방에 등장하는 약재다. 감초의 글리시리진 성분은 항염, 항바이러스 작용뿐 아니라 간 보호 효과까지 보고된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일부 연구자들이 글리시리진이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실험실 단계의 결과이며 임상적으로 안전하고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유명한 약재들인 천궁, 당귀, 인삼, 오미자 등 다수의 약재들이 혈액순환, 항산화, 스트레스 조절, 간 기능 개선 등 다양한 생리 작용과 관련해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검증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곧바로 임상에서 적용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약은 단일 약재보다는 복합 처방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개별 약재 간의 상호작용이나 복합적 효능을 분리해서 연구하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존재한다. 같은 약재라도 산지나 채취 시기 가공 방법 등에 따라 성분과 효과가 달라질 수 있어 표준화된 품질 관리를 위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한다. 최근 주목할 점은 최근 연구들이 단순히 개별 약효를 밝히는 것을 넘어서 약리 작용 메커니즘을 분자 수준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경험과 관찰에 기반 했던 한의학의 이론이 현대 과학과 접목되어 구체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동물실험, 세포실험, 임상시험 등을 통해 한약재의 효과가 재확인되면서 의학적 신뢰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한약의 과학적 효능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본격적인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전통의 지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인류의 지식 자산이며 이를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은 앞으로도 큰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한약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 의학과 건강 산업의 미래를 풍요롭게 할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4-30

정치 무대에서 내려선 홍준표

1954년생. 올해 일흔한 살이니 ‘노정객’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이를 악물고 사법 시험에 도전해 검사가 됐다. 강력부 현역 검사 시절엔 거물 조직폭력배와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줄줄이 구속시켜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았고, 그걸 발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1996년 그의 나이 마흔둘에 치러진 15대 총선 당선을 시작으로 국회의원만 5번을 했고, 경남도지사와 대구시장을 지냈으며,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원내대표와 당 대표를 맡았고, 비록 패했지만 2017년엔 대통령선거에도 나왔다. 정치인으로선 안 해 본 게 거의 없는 셈이다. 이쯤 되면 드라마틱한 한 편의 소설이나 흥미진진한 영화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위엔 언급한 요약·설명을 읽었다면 많은 이들이 자연스레 그의 이름을 떠올릴 게 분명하다. 맞다 홍준표다. 2025년 4월 29일 홍준표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이제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패배한 직후였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직설화법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진하는 특유의 저돌적 스타일로 인해 때론 곤경에 빠졌고, 여러 차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던 홍준표.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솔직담백했던 정치인으로 홍준표를 기억할 듯하다. 어쨌건 이제 홍준표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치’라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범부(凡夫)로 귀환한 그가 30여 년간 겪었던 한국 정치판의 혼란과 불화를 다 잊고 자신의 바람처럼 ‘평범한 시민’으로 유유자적하기를 바란다. 누구라 특정할 것도 없다. 고희(古稀) 넘긴 사내에겐 풍파 없는 평화로운 삶이 어울린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30

에도의 출판왕, 츠타야 쥬자부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일본 만화는 전세계에서 1년 동안 대략 10억 부가 출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만화 이외에도 일본은 ‘출판 대국’이자 ‘독서 대국’으로 불릴 만큼 책으로 유명한데요. 지하철 안의 모든 이가 책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지만, 여전히 출판 문화가 발달하고 독서 인구가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책과 친한 일본 문화를 낳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이로 ‘에도 시대(1603-1867) 출판왕’ 츠타야 쥬자부로(蔦屋 重三郎, 1750-1797)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NHK에서 2025년 대하역사드라마로 츠타야 쥬자부로의 일생을 다룬 ‘べらぼう-蔦重栄華乃夢噺(베라보-츠타쥬의 파란만장한 꿈 이야기)’를 방영하면서, 작년 연말부터 도쿄 시내 곳곳에는 츠타야 쥬자부로 관련 문화 행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츠타야 쥬자부로와 관련된 우키요에나 주변 인물들에 대한 행사가 열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빠짐없이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한 책을 출판해 놓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는 자료를 찾으러 간 일본국회도서관에서도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을 정도였는데요. 4월 22일부터 6월 15일에는 일본 최대의 박물관인 도쿄국립박물관에서도 츠타야 쥬자부로(줄여서 츠타쥬)가 유통시켰던 우키요에를 대거 전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에도 막부의 유일한 공인 유곽인 요시와라에서 태어나 자란 츠타쥬는 일곱 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고, 아무런 배경도, 재산도 없이 오직 타고난 독창성과 감각만으로 ‘에도의 출판왕’이 된 인물입니다. 에도 막부에 밉보여서 재산의 절반을 압수당하는 처분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원하고 꿈꾼 문화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간 츠타쥬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베라보’였던 것입니다. 츠타쥬가 활약한 18세기 후반에는 목판인쇄로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그 책들에는 대부분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콘텐츠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작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가 협업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를 전체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하여 출판 및 판매하는 역할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한 이가 바로 츠타쥬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18세기 말 에도(江戸, 도쿄의 옛날 이름)는 인구 백만의 세계 최대 도시였습니다. 우에노 국립박물관 전시 포스터에는 “잠재고객은 에도사람 100만인(潜在顧客は、江戸の衆、百万人.”이라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요. 츠타쥬는 날카로운 감각과 창의적 안목으로 대중들의 욕망을 읽어내고, 그에 바탕해 수많은 문화 콘텐츠들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츠타쥬는 1773년에 요시와라 정문 앞에 고쇼도(耕書堂)라는 서점(本屋)을 내고 처음에는 책 대여를 했지만, 곧 본격적인 출판에 나섭니다. 그는 거의 모든 문화 콘텐츠를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요시와라 안내서, 쿄카에혼(狂歌絵本), 기뵤시(黄表紙), 우키요에(浮世絵)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대중이 읽고 싶은 책과 보고 싶은 그림을 대중보다 먼저 알아채고서는 이를 콘텐츠로 구체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츠타쥬는 최고의 연출자처럼 당대 최고의 재능들을 조합하여 멋진 무대를 만들어 냈던 것인데요. 츠타쥬의 손발이 되었던 천재들로는 산토 교덴, 기타가와 우타마로, 가쓰시카 호쿠사이, 도슈사이 샤라쿠, 교쿠테이 바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츠타야는 단순히 책만 편집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재능을 편집하여 최고의 콘텐츠와 시대를 창조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츠타쥬가 새로운 예술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창조적 재능을 장려하고, 그들의 후원자 및 멘토 역할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미인화의 대가 기타가와 우타마로, 일본 역사에 남는 인기작인 ‘南総里見八犬伝’을 남긴 교쿠테이 바킨, 골계본이라는 장르를 낳은 ‘五十三次膝栗毛’의 짓펜샤 잇쿠처럼 무명의 재능을 발견하여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우뚝 일으켜 세우기도 했습니다. 츠타쥬는 그들에게 의식주를 보장해주었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선물과 접대 정도가 전부였던 시대에, 원고료를 지불한 것도 츠타쥬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명작은 물론이고 새로운 장르와 미디어를 낳은 츠타쥬는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고 시대와 문화를 선도해나갔습니다. 이러한 츠타쥬의 활약이 오늘날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본 망가나 출판의 기본적인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츠타야 쥬자부로는 채 오십이 되지 않은 1797년 5월 6일 저녁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한 인간의 본질은 삶의 마지막 순간이나 유언에 압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요. 츠타쥬는 연극이 끝났음을 알리는 박자목(拍子木) 소리를 기다리며 죽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연기로 보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자신을 활발하게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며, 자기 삶을 대상으로 한 예술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츠타쥬는 수많은 명작과 예술가들을 낳았지만, 그가 창조한 최고의 콘텐츠는 아마도 츠타야 쥬자부로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4-29

보호자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멈칫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 유년의 집은 늘 어두웠고 나는 늘 혼자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불 꺼진 거실과 차가운 공기만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 집의 문을 여는 게 두려웠다. 마치 어두움 속에 함께 동거하는 무언가가 나를 짓누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바빴다. 사는 일이 바빴고 생계를 지키는 일이 하루를 삼켜버렸다. 붙들어야 했던 삶의 동아줄을 잡고 버티느라 내 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 분주함과 비워진 시간의 계절은 어린 나에게 ‘부재’로 느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어두운 집에 혼자 앉아 텅 빈 소리와 싸웠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히 내 마음 한 구석을 적신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숙제를 하고 혼자 TV를 보았다. 누군가 내 옆에서 밥 먹어라, 숙제해라, 드라마 보자 등등의 말을 걸어주며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내 가슴의 작은 불마저 식으며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옆 집에 환하게 불을 켜고 숙제를 하는 친구가 부러웠고 그 시끌벅적함이 나도 갖고 싶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부모님의 부재가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그럼에도 나는 나를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나를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고, 내 이름을 불러줄 보호자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아무 것도 변하게 하지 않았다. 불안은 습관처럼 내 안에 자리 잡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일이 어른이 되는 과정인 줄 알았다. 누구에게도 무게를 기대지 않고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눈물을 잘 삼키는 연습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쪽에서는 늘 작은 빛 하나 반짝이는 희망 하나를 품었다. 언젠가는 부모님의 삶의 동아줄이 더 견고하고 단단해지는 날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줄 거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사람은 남편이었다. 가끔 일이 늦어져 늦게 오는 날이면 아파트의 불을 환히 밝혀 나를 맞아 주었다. 큰 수술을 몇 번이나 할 때마다 주저없이 남편의 이름을 보호자 란에 적었다. 어린 시절 내겐 늘 보호자가 있었지만 보호받지 못했던 공허함이 자리잡았지만 남편으로 인해 마음 속 빈 의자 하나가 조용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처럼 내 안의 결핍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래된 바람 하나를 접어 작은 종이배로 띄운 것처럼 마음의 틈이 매워졌다. 휘청거리던 내 안의 외로움도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것 같던 그리움도 서서히 시간의 질서와 함께 잔잔한 물살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결핍을 탓하지 않고 사랑으로 채워가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며 나 역시도 오래도록 기다렸던 보호자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부모님에게 내 이름은 보호자로 저장되어 있다. 지금, 나는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내 곁을 지켜주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부모님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 때로는 병원 복도에서, 때로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또 낯선 서류 앞에서. 나는 묵묵히 ‘보호자’라는 이름을 지켜나간다. 살아간다는 건, 어릴적 바라던 것들이 결국 삶의 무대가 되어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하지만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불빛 하나를 지피며 살아간다. 삶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보호의 노래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삶이 내게 말한다. “누군가의 기다리던 사람이 되어주라고”. 내 유년의 윗목은 먼 시간 끝에서 지금의 내 마음을 데워주는 아랫목이 되었다. /김경아작가

2025-04-29

포항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나라의 꿈

우리는 지금, 격동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험난한 국면을 넘어 조기 대선이라는 전례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혼란의 와중에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치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정치는 국민을 편 가르지 않고 하나로 묶어야 하며,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국가를 튼튼히 세우는 도구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치 현실은 어떠했나? 당리당략에 갇혀 민심을 외면하고, 국가의 미래보다 정파적 이익을 좇은 결과, 대한민국은 분열과 갈등, 불신의 늪에 빠졌다. 이제 우리는 이 흐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고, 오직 국민과 국가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필자는 그 출발점을 포항에서 찾고자 한다. 포항은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신의 힘으로 일어선 도시이다.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포항의 정신에서 오늘 우리가 다시 일어서야 할 이유와 방법을 엿볼 수 있다. 포항은 위기의 순간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온 도시이다. 아무것도 없던 벌판에 제철소를 세우고, 세계적 산업도시로 성장시킨 포항의 역사야말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포항의 정신이다.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이 스스로 성장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포항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졌던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지역이 주체적으로 설 수 있을 때, 나라 전체가 튼튼해질 수 있다. 수도권 일극 체제는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사람이 떠나는 농어촌, 고령화로 활력을 잃어가는 중소도시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음하고 있다. 포항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때는 산업화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미래를 다시 고민해야 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렇기에 포항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중앙의 틀에 갇히지 않고, 지역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지방은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터이며, 꿈과 희망이 싹트는 터전이다. 교육이 살아야 하고, 경제가 돌아야 하며, 문화가 숨 쉬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가 돌아오고, 아이들이 웃으며 자랄 수 있다. 그러면 포항이 살아나고, 경북이 살아나고, 대한민국이 새로워질 것이다. 화려한 구호나 거창한 약속은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은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지역 주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포항에서부터 시작하자! 작은 변화부터 만들어 가자! 지역의 자존심을 세우고, 시민이 주인이 되는 지방자치를 실질적으로 실현해 보자! 절대 쉽지 않겠지만, 꼭 걸어야 한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포항이, 그리고 모든 지역이 스스로 빛나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 믿음을 지키며, 오늘도 묵묵히 나아간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04-29

이재명의 통합행보… 선거용이 아니길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이재명 전 대표의 첫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그는 28일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예정에 없던 박태준 포스코그룹 초대회장의 묘역까지 참배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정국 때 선보였던 ‘우클릭’에 다시 시동을 거는 모습이다. 이 후보는 대선 경선에 나섰던 8년 전 성남시장 시절엔 두 전직 대통령 묘역 참배를 거부했었다. 이 후보는 이날 선대위 인사를 하면서도 ‘보수 책사’로 불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상임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전날 당 후보 수락 연설에서 ‘국민 대통합’을 강조한 그는 “최대한 넓게, 친소관계 구분 없이 실력 중심으로 사람을 쓰겠다”고 했다. 그는 첫 공약으로 반도체 특별법 제정을 제시하면서 이날 첫 현장 방문일정으로 반도체기업을 찾기도 했다. 중요한 건 진정성이다. 그는 지난 2월 21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우클릭 같은 얘기들에 대해서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전제하면서 “최근에 (반도체 특별법 관련) 주 52시간제 문제로 많은 분이 우려하시는데 저나 민주당의 입장은 명확하다. 우리 사회가 노동시간 단축과 주 4일 근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 후보의 발언 직후 “노란봉투법(쟁의행위 범위 확대와 파업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제한이 핵심) 재추진 등을 앞으로도 당론으로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최근에는 주 52시간 예외 허용 내용이 빠진 반도체 특별법 제정안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했다. 이 후보가 사회통합을 이번 선거의 최대이슈로 내건 이유는 뻔하다. 지난 대선에서 0.73%p 차이로 석패한 것을 뼈아프게 생각하면서, 공격적인 중도층 외연 확장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 후보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는 여전히 강하지 못하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수시로 말을 바꾼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야당인 개혁신당 천하람 의원조차 “반대파를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숙청한 이 후보가 통합을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라고 말했다.

2025-04-29

‘계엄의 늪’속에서 이재명을 이길 수 있을까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가 지난 27일 대선 후보 경선에서 89.77%의 누적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6·3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득표율은 반올림하면 90%다. 진보대통령의 대명사 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새정치국민회의·77.53%)도 달성하지 못한 수치다. 민주 당원과 지지층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그만큼 똘똘 뭉쳤다는 방증이다. 국민의힘은 “조선 노동당에서 볼 수 있는 득표율”이라고 했지만, 이를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이 후보가 얻은 표 중에는 진보지지층 뿐만 아니라 중도층까지 포함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경선에서 권리당원·대의원·재외국민선거인단과 국민선거인단 투표율을 50%씩 반영하는 룰을 적용했다.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역선택 방지조항’을 적용하긴 했지만, 중도층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90% 득표율이 나올 수 없다. 지난해 8월 당 대표에 연임된 이 후보는 핵심 과제로 ‘중도 공략’을 내걸었다. 진보층이 천박한 욕망이라고 비난했던 ‘먹사니즘(먹고사는 게 최고 가치)’을 그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했다. 그는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후에는 통합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이 후보의 이러한 변신에 반신반의하는 시선이 많다. 민주당은 그동안 국회를 장악한 이후 사실상 국정을 마비시켰다. 재계가 반대하는 상법 개정안 등 셀 수 없는 많은 법안을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강행처리했다. 30번의 탄핵안과 33번의 특검법을 남발했다. 헌정사 초유의 감액 예산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제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대통령실이 당권과 입법권에 이어 예산권까지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은 2028년 4월 총선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재명 대세론 속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사실상 대선출마 뜻을 밝히면서 각 당의 대선 구도에 변수가 생긴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한 대행은 개헌에 동의하는 세력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대국민선언을 하면서 국민의힘 대선후보,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 이낙연 전 총리 등과 ‘반(反) 이재명 빅텐트’를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힘이 이 빅텐트의 주축이 되려면 우선은 ‘계엄의 늪’에서 벗어나 미래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주에는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의 윤희숙 원장이 ‘당을 떡 주무르듯 한 윤석열 전 대통령과 이러한 패권적 행태를 방관하거나 지지한 친윤 그룹의 책임’을 지적한 당의 정강·정책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윤 원장의 지적처럼 국민의힘은 지금 계엄과 탄핵이라는 ‘윤석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어떤 공약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 태연하게 탄핵정국에 머무르면서 중도층 민심 흐름을 외면하다가는 지난 4·2 재보궐선거에서 나타난 ‘TK지역만의 승리’라는 성적표를 또 받게 된다. 재보선에서는 TK(김천시장)를 비롯해 PK(거제시장), 서울(구로구청장), 충청(아산시장), 호남(담양군수) 5곳에서 기초단체장 선거가 치러졌는데, 국민의힘은 TK에서만 이겼다. 이게 불과 한 달 전의 민심이다.

2025-04-29

위험천만 도시형 산불, 다각적 대응력 갖춰야

28일 오후 2시 1분께 대구시 북구 노곡동 경부고속도로 북대구 나들목 인근 함지산에서 발생한 산불은 도시지역과 인접한 곳에 발생한 산불이란 점에서 일반적인 산불과는 양상이 다르다. 산림과학원은 함지산 산불을 35년만에 발생한 도시형 산불이라고 했다. 도시형 산불이란 불길이 도시민이 사는 아파트 단지 등으로 옮겨 붙을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를 경우 인적 물적 피해가 상상 이상으로 커질 수 있다. 또 불길이 도심으로 옮겨질 경우 소방당국의 대응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함지산 산불은 구암동, 서변동 등으로 번져가면서 수천 가구의 아파트단지와 공공시설물들을 위협했다. 다행히 불길이 잡혀 더 큰 피해는 없었지만 아찔한 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000여 명이 긴급 대피하고 인근 학교들이 휴교했다. 산불이 꺼질 때까지 밤잠을 설치며 노심초사했던 주민들이 많았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2013년 3월 포항시 용흥동. 우현동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은 도시형 산불의 대표적 사례다. 도시가 확장되고 야산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산불 발생의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된 경우다. 산에서 일어난 불길이 아파트 꼭대기 가정집으로 옮겨 붙고, 20여 명의 인명 피해도 냈다. 도시형 산불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전국적으로 위험성이 내포된 지역이 많아졌다고 보아야 한다. 도시형 산불의 또 다른 특징은 대기오염이다. 주택이나 각종 시설물이 불타면서 발생하는 중금속과 유기화합물 등이 대기 중으로 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함지산에서 시작한 산불은 다행히 주택 등의 피해가 없었으나 곳곳에서 매케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기오염의 위험성을 증명한다. 도심 주변 산의 수종을 활엽수 등으로 바꾸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올들어 경남 산청과 경북 의성에 이어 함지산 산불 등 대형 산불이 잇따르고 있다. 산불에 대한 주민들의 경각심 고취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당국의 재난 대응력도 고도화돼야 다양한 재난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4-29

IMF의 경고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 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1997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경제는 IMF 관리체제로 들어갔다. 당시 한국경제는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면서 단기간에 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고, 대량의 실직사태까지 발생했다. 빚 독촉에 시달린 일가가 음독자살을 하는가 하면 회사 중견간부가 졸지에 집을 잃고 노숙자 신세로 돌변했다.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 등 내로라하던 재벌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증권회사도 파산하는 전대미문의 일들이 벌어졌다. 한국 재벌기업들의 과도한 부채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 달러가 고갈됐고, 국내 은행들도 무리한 대출을 해주면서 존폐 위기에 내몰렸다. 급기야 IMF 관리로 들어서면서 기업과 은행들의 통폐합 혹은 폐쇄가 속출한다. 국민의 삶의 질은 물어볼 것도 없이 핍박해졌다. IMF는 국제간 금융질서 확립과 균형발전 등을 목적으로 1947년 설립된 국제금융기구다. IMF의 지원을 받는 나라는 경제적 구조조정은 필수다. 한국의 IMF를 두고 국가 경제 주권이 빼앗긴 날로 부르는 이유다. 최근 IMF가 한국을 향해 잇단 경고를 보내 주목된다. 4월 세계 경제 전망 발표에서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1%로 낮추었다. 한달 전보다 1%포인트가 더 낮아졌다. 같은 기간 세계 경제성장률 하락치의 배다. 또 한국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내년부터 대만에 역전당할 것이란 전망도 내놓았다. 한국을 향한 부정적 경제 수치들이 쏟아지는 분위기다. 한국경제의 불길한 징조일까 걱정스럽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29

주택 취득세 감면, 생활인구 유입 마중물 되길

대구시는 무주택자 또는 1가구 주택자가 인구 감소지역인 군위군에서 3억 원 이하 주택을 구입하면 취득세를 최대 50% 감면해 준다. 작년 8월 정부가 지방세법 관계법 개정안을 통해 수도권과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감소지역 83곳을 대상으로 주택 취득세를 50% 감면해주기로 한 것의 후속 조치다. 도시의 1주택자가 소도시의 세컨하우스를 구입토록 독려해 지방 중소도시의 생활인구 유입을 늘리고, 지역경제도 활성화해 보자는 정책의 일환이다. 셍활인구란 교통과 통신 발달로 이동성과 활동성이 증가하는 생활유형을 반영하기 위해 현지 주민이 아닌 체류하는 사람을 포함시킨 새로운 인구개념이다. 2023년 인구감소지역 지원특별법을 시행하면서 도입된 이 개념은 월 1회, 하루 3시간 이상 체류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작년 1월 행안부와 통계청이 경북 영천 등 7개 지역을 대상으로 생활인구 표본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대상 시군 모두가 등록인구보다 생활인구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관광유형에 속하는 충북 단양의 경우는 체류인구가 등록인구보다 8.6배가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도 우리의 생활인구와 유사한 관계 인구를 통해 지방소멸 극복에 나서고 있다. 특정 지역에 거주하지 않고 그 지역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을 일컫는 개념이다. 전직 직장 근무자, 부모의 고향 등 이주나 관광이 아닌 일상 생활권 속에 관계가 유지되는 사람들이다. 18세 이상의 관계인 수가 전체 인구의 20% 정도 되면서 일부 지방에서는 인구소멸을 극복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인구감소지역에 주택을 구입하면 취득세를 감면해주는 것만으로 생활인구가 늘거나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소속 자치단체 차원의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도로, 교통, 의료, 교육 등 생활 기반 확충을 통해 만족할만한 환경을 만들 때 귀농 인구 유입도 기대할 수 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의 문제는 정부와 지자체가 힘을 함께 모을 때 성과도 낼 수 있다. 이번 취득세 감면 조치가 생활인구 유입의 마중물이 되었으면 한다.

2025-04-28

교단 떠나는 초등학교 교사들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에게 존경받는 시대는 끝난 것 같아요. 여건이 허락한다면 다른 일을 찾으려는 동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는 건 학생들만이 아닌 모양이다. 초등학교 교사들 중 3/4 이상이 교직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사가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물음에는 겨우 4.5%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보수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도 2%만이 긍정적 답변을 내놨다고. 교사노동조합연맹은 지난해 전국 유·초·중등·특수교사 1만1359명을 대상으로 ‘전국 교원 인식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위는 그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교사 스스로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숭고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현실 탓일까? 교단을 떠나 다른 일을 찾고 싶어 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에 의하면 현직 초등학교 교사 중 42.5%가 ‘기회가 된다면 이직하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직을 희망하는 이유는 낮은 직무만족도와 생활만족도, 거기에 더해 성취감과 보람이 갈수록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최근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의 합격 점수가 낮아지고, 지원자도 줄어드는 추세까지 보인다. 현직 교사는 교단을 떠나려 하고, 교사를 꿈꾸는 입시생은 갈수록 적어지는 상황이 온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변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케케묵은 말만으로는 교사를 포기하려는 이들을 붙잡을 수 없다. 미래 세대의 교육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특단의 대책이 나와야 한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28

‘이재명이냐 아니냐’로 굳어지는 대선판세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예상대로 이재명 전 대표가 27일 최종 후보로 선출되면서 6·3 조기 대선 본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후보는 이날 89.77%의 표를 얻어 역대 민주당 대선후보 가운데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후보로 확정됐다. 이제 대선 판세는 ‘이재명이냐 아니냐’라는 구도가 명확해졌다. 현재 4강전이 진행 중인 국민의힘은 오늘(29일) 2차 경선 결과가 발표된다. 만약 과반득표자가 있으면 후보로 확정되고, 그렇지 않으면 1·2위 후보 간 최종 경선을 거쳐 5월 3일 후보가 선출된다. 현재로선 국민의힘 어떤 경선 후보도 여론 조사상 지지율에서 이 후보에게 크게 밀리지만, 최종후보가 선출되면 컨벤션 효과가 발생하면서 판세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변수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출마 선언과 후보단일화다. 국민의힘 경선 후보들이 모두 한 대행과의 단일화에 긍정적인 입장이라, 한 대행이 무소속 출마를 하게 되면 단일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김문수 후보는 “이재명 후보를 이기려는 모든 세력과 손을 잡겠다”고 했고, 안철수 후보도 “한 대행이 출마한다면 경선을 통해 최종 단일후보를 뽑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홍준표 후보는 “내가 최종후보가 되면 한 대행과 단일화 토론을 두 번 하고 원샷 국민 경선을 하겠다”고 했고, 한동훈 후보도 단일화에 긍정적 입장을 밝혔었다. 경선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국민의힘 후보 모두가 외부 인사와 후보 단일화를 하는 데 찬성하는 것은 의외다. 당장 2차 경선을 앞두고 당내 단일화 요구가 거세진 것이 주원인이겠지만, 이재명 정권 탄생에 대한 당내 불안감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일 수 있다. 이번 대선결과를 흔들 또 다른 변수는 ‘빅텐트’ 성사 여부다. 만약 한 대행과의 후보단일화에도 불구하고 보수후보 지지율이 지지부진할 경우,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나 민주당 출신 비명계 인사 등과 함께하는 빅텐트가 절실해진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개헌’을 명분으로 빅텐트를 구축할 경우 ‘반 이재명 연대’가 가능할 수도 있다.

2025-04-28

국민의힘, 민심을 직시하라

국민의힘이 ‘탄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대선은 코앞인데 민심에 역행하는 행태들이 가관이다. 탄핵된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는커녕 부아만 돋우고, 친윤 후보들은 계엄옹호와 극우행태로 민심이반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파면된 대통령과 친윤 후보들이 ‘이재명 당선 도우미’로 나선 것인가? 민심이 두렵다고 비겁하게 외면하지 말라. 잘못했으면 사죄하고 고치는 것이 진정한 보수다. 대선은 ‘우리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다. 내 편 목소리만 듣고 ‘이것이 민심’이라고 우기는 ‘바보들의 행진’이 무슨 소용인가? 각종 여론조사는 “대통령 파면 결정이 잘됐다”는 응답이 70% 안팎으로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파면된 대통령은 사저로 돌아가 지지자들에게 “이기고 돌아 왔다”, “대통령 5년 하나 3년 하나”라고 했다니 어이가 없다. 당과 보수를 궤멸의 위기에 빠뜨려 놓고서는 이게 도대체 대통령 했다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 게다가 후보들은 탄핵 책임을 둘러싸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자해소동을 벌이고 있다. 비상계엄이 “2시간 해프닝이었다” 또는 “책임은 민주당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후보들이 본선에 진출한다면 국민들이 지지하겠는가? 최근 여론조사(리얼미터, 4월 21일)에 의하면 국민의힘 5강 후보들의 지지율 합계(35.9%)가 이재명 후보 한 명(50.2%)보다 작다. 또한 대선후보 가상 양자대결에서도 국민의힘 4강(김문수·안철수·한동훈·홍준표)과 한덕수 권한대행의 지지율은 이재명 후보(최소 52% 이상)에 비해 14%∼21%의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한국갤럽, 4월 24일). 이처럼 심각한 민심을 외면하고 경선토론회에서는 ‘네 탓 타령’에 ‘키높이 구두’나 물어보고 있으니 제정신이 아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낡은 보수와 단절하고 새로운 보수의 길을 열어야 한다”면서 “살가죽을 벗기는 수준의 고통스러운 변화가 수반되지 않으면 보수 재건은 요원한 과제”라고 했고, 유승민 전 의원도 “보수 대통령이 연속 탄핵 당했음에도 당은 제대로 된 반성과 변화의 길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면서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중도확장성이 크고 탄핵에서 자유로운 두 사람이 경선에 불참했다는 사실은 민심을 외면한 당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중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선은 다가오고 당이 가야할 길은 멀고 험한데 아직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고 있으면 어쩌겠다는 말인가? 민심의 응징을 받고 난 후에 비로소 후회하면서 ‘탄핵의 강’을 건너려고 하는가?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은 “권력에 줄서는 정치가 계엄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고 하면서 “깊이 뉘우치고 국민께 사죄드린다”고 했는데, 왜 당 지도부는 아무 말이 없는가? 이제라도 제발 정신 차리고 분노한 민심을 직시하라. 파면된 대통령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자숙해야 하며, 당과 후보들은 민심을 받들어 철저히 환골탈태해야 한다. ‘민심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똑바로 보라. 민심을 받들면 살고 외면하면 죽는다.

2025-04-28

평균의 종말

결론부터 말해 보자. ‘평균은 없다!’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측정하고 줄 세우는 이 시대를 보라. 평균점수, 평균신장, 평균소득…. 평균. 평균. 평균…. 모든 것이 평균을 중심으로 수치화되고 평균은 규범처럼 기능한다.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잠재력의 파괴를 담당한 ‘평균주의’라는 우상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 없이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 숭배해 온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평균적인 인간’이란 개념은 통계적 편의에 불과하며, 실존하는 누군가를 정확히 대표하지 못한다. 미국 공군이 조종사의 평균 신체 치수를 기준으로 조종석을 설계했으나, 결과적으로 그 평균에 부합하는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종석을 개별 조정한 이후에야 비로소 사고율이 현격히 낮아졌다는 점은, 평균이라는 기준이 얼마나 위험한 오판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교육, 의료, 노동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맹활약 중인 평균은 중립적 기준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도 정확히 맞지 않는 기계적 틀일 뿐이다. 시험 점수, IQ, 학점과 같은 수치들을 기준으로 한 서열화는 인간 개개인의 특별함과 다양성을 파괴하는 폭력일지도 모른다. 평균주의 사촌 ‘능력주의’를 보자. 능력주의는, ‘출신과 배경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받고,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다는’ 얼핏 보기에는 매우 그럴싸한 슬로건을 내세운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평등하였는가를! 교육 기회, 정보 접근성, 사회적 자본의 분포가 공평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눈치챌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 채, 성공을 개인의 탁월성으로, 실패를 개인의 무능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평균주의가 능력주의를 만나면 수치화, 표준화된 인간을 탄생시킨다. 고유한 재능과 가능성을 지닌 개인은 사라지고, 정해진 기준에 맞는 소수만이 ‘합당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그런 사회가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당신은 평균 이상인가? 그렇다면 근거를 제시하라. 아마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돈, 외모, 학벌, 직업의 세계에서 평균 이상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오랫동안 환상 속을 헤매어 왔다. 사람은 재단 되어서도 안 되며, 재단될 수도 없다. 당신은 능력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가진 능력 이외의 능력을 보여달라.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노력조차도 능력일지도 모른다. 평균이 없으니, 평균 이상도, 이하도 없다. 능력 없는 사람 일지라도, 그에게 발굴되지 않은 능력이 있을 수 있다. 일류대 출신, 높은 스펙의 허상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성공은 평균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성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토드 로즈('평균의 종말' 저자)의 목소리를 기억하자. 밤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줄 세우는 사람은 없다. 빛나지 않는 별은 없다. 크기와 밝기와 거리와 관계없이 그저 아름답다. 당신의 장점은 평균과의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고유성에 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평균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설계했기 때문이며, 진정한 발전은 개별성을 존중할 때 이루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각자 다른 꽃이 피는 세상, 저 마다의 소질을 인정받는 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에 달렸다.

2025-04-28

김문수와 이재명

이번 대선정국에서 여당과 야당의 선두 주자인 김문수와 이재명은 후보들 중 가장 대척점에 있는 두 인물이다. 정치 성향뿐 아니라 삶의 역정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소년 김문수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부를 잘해서 지방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 결국 중징계를 받은 것이다. 입시 준비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정의감과 패기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반면, 이재명은 일찍부터 학업을 잇지 못하고 소년공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때를 회상하며 2006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꼬맹이 여자애가 나이를 두 살이나 속여 나로 하여금 ‘누나’라고 부르게 하여 머리끄덩이를 잡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주고, 점심시간에 힘 약해 보이는 동료에게 식판을 집어 던지는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공장 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나이를 속였다고 여자애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버르장머리를 가르치고, 힘이 약해 보이는 동료에게 식판을 던져서 기세를 제압하는 ‘만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김문수는 그 어려운 일류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장래가 보장되는 대학 생활을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71년 위수령반대 시위와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제적을 당하자, 한일도루코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노조위원장을 지내는 등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출세 영달보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사회정의실현이 우선이었다. 이 역시 오로지 신분 상승을 위해 독학으로 대학에 들어가고, 고시공부에 전념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재명과는 대조가 되는 행적이다. 두 번의 경기도 지사와 세 차례 국회의원 등 오랜 공직생활 중에도 김문수는 한 번도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적인 없는 그야말로 청백리였다. 경기도 지사 시절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도내 전 공무원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청렴의 중요성을 강조 했으며, ‘부패즉사(腐敗卽死), 청렴영생(淸廉永生)’ 슬로건을 내걸고 부패공직자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퇴출이란 원칙을 적용하는 등 청렴문화 확산을 실행했다. 이 부분도 두 사람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재명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로 재직하는 동안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지금 재판 중인 사건만도 공직선거법위반, 위증교사혐의, 대장동·성남FC·백현동 개발 특혜, 대북송금,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등 다섯 건이나 된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가진다. 누가 대통령직을 맡느냐에 따라 국운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을진대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이 절실한 시점이다. 가장 훌륭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판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나라를 위태롭게 할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먼저라야 한다.

2025-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