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자 돌연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곳이 영월 청령포다. 청령포는 조선 6대 임금 단종과 얽힌 곳이다. 단종 이홍위(李弘暐)는 1452년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권력의 화신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주고 1455년 상왕(上王)으로 물러난다. 그것도 잠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청령포로 유배길에 오른다.
청령포는 남한강 지류인 서강이 동-북-서쪽을 휘감아 흐르고,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가로막힌 경이로운 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단종의 유배지를 청령포로 결정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탁견(卓見)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육지 속의 작은 섬으로 고립무원의 청령포를 무슨 수로 탈출할 수 있단 말인가?! ‘빠삐용’(1974)의 주인공 스티브 맥퀸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무슨 까닭인지 나는 이미 세 번이나 청령포를 다녀왔다. 한여름에도 봄철에도 청령포를 찾았지만, 가장 깊은 상념이 몰려든 시절은 삭풍의 한겨울이었다. 서강이 꽁꽁 얼어붙어 나룻배가 아니라, 걸어서 청령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칼바람이 얼굴과 귓전을 때리는데, 노산대(魯山臺)와 망향대에서 어린 단종을 떠올리려니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세조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김시습 평전’(2003)에서 심경호 교수는 단종의 사사(賜死)를 끝까지 주장한 이는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라고 기록한다. 단종이 세종의 아들 문종의 대를 이었으니, 단종을 죽이도록 세조를 교사한 인물은 두 할아버지였던 셈이다. 늙은이들이 무슨 연유로 혈족의 손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는 조선 왕조의 태생적 한계에 주목해야 한다. 이성계가 개창(開創)한 조선의 권력은 왕권과 신권(臣權)의 연합체였다. 양반 사대부의 협력에 크게 의지해야 했던 군왕들의 일방통행이 불가능했던 왕조가 조선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집현전을 통한 각종 제도개혁과 한글 창제 같은 대업을 이룸으로써 신권 강화의 기틀을 시나브로 만들어준 군왕이다.
문제는 병약한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왕권 약화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치적인 변곡점에 일어난 정변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양녕대군은 이 정변에서 일찍이 수양대군의 편에 섰고, 훗날 효령대군이 단종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왕권 강화에 일익(一翼)을 담당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란 요물(妖物)에 취해 인명을 살상하고, 제 한 몸과 일가 및 특정 집단의 편익을 도모한 자들이 적지 않다. 그 와중에 희생당한 이들의 통절(痛切)한 사연도 다채롭거니와 노산군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가슴 짠하다. 한 살 위인 정순왕후와 재회의 기약도 없이 헤어진 채 노산대에서 한없이 그녀를 기다렸다는 사연은 눈물겹게 다가온다.
요즘 세계는 전쟁광 트럼프로 인해 거대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린란드를 탐하고, 베네수엘라를 침탈한 것도 모자라 이란을 공습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더니 다음 차례는 쿠바라고 적시한다. 이런 사태의 출발점은 권력에 도취한 자의 지독한 과대망상과 정신착란 아닐까?!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