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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

등록일 2026-03-15 17:20 게재일 2026-03-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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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숙 시조시인

수은주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며 언 땅을 살살 만지고 있다. 그럼에도 차바퀴 자국이 선명한 산 초입의 길은 아직 질퍽질퍽하다. 봄은 여린 것으로 시작된다. 양지 바른 곳에는 연초록이 살짝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피고 있다. 나무들은 줄기 끝에서 겨울을 서서히 털어내고 있지만 봄 숨결이 미처 닿지 못한 산자락이다.

계곡을 끼고 걷다 경사진 비탈길을 천천히 올랐다. 쌀쌀한 날씨에도 사람의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 여러 명의 사진작가들이 거의 바닥에 엎드려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고 있다. 부러져 누워있는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 사이를 잘 살펴보면 가냘픈 하얀 꽃과 눈이 마주친다. 바람꽃이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하고 하늘하늘한 모습이다. 무심히 지나치면 밟고 갈 수도 있어 발걸음이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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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 /전영숙 시인

초봄이면 바람꽃을 보러 다녔다. 사람의 손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에 봄을 불러들이듯 군데군데 무더기로 피어있는 꽃. 앙증맞은 꽃잎과 가녀린 줄기 사이로 바람이 불면 온몸이 흔들린다. 겨울의 강하고 거친 추위를 유연함과 부드러움으로 뚫고 일어서는 것이 그 꽃의 매력이다.

늘 강하고 싶었다. 그래야 거칠고 풍파 많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남들 앞에 드러내지 않고 태연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내 목소리를 높여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 단단한 겉모습으로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강함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작은 시련 앞에 그 강함은 쉽게 무너졌다

돌 지난 둘째를 유모차에 앉히고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갑자기 쿵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유모차째로 아이가 넘어졌다. 안전띠를 묶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일어선 것이었다. 타일 사이 매끄럽지 않게 돌출된 부분에 부딪힌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숨넘어가게 우는 아이를 안은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갔다.

이마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수건으로 이마를 누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유를 타 입에 물렸다. 금세 수건이 빨갛게 변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원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집을 나섰다. 4살 된 큰아이는 데리고 갈 수가 없어 경비아저씨께 부탁한 뒤 놀이터에 두었다.

집 근처에 보이는 병원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외과가 아니었지만 부탁을 드렸다. 다른 환자분들이 양보해주셔서 바로 의사선생님은 아이의 이마를 꿰매어 줄 수 있었다. 병원을 나오는데 그 때서야 놀이터에 두고 온 큰애 걱정에 가슴 한켠이 타들어갔다. 다행히도 큰애는 잘 놀고 있었다. 그날 밤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혼자 엄청 울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강함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람꽃은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모습인데 그 이름에 바람을 담고 있다. 금방 흩어지고 무너질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지만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지 않고 바람의 세기만큼 유연하게 같이 움직인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강함은 결국 단단함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같이 흔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살면서 뜻밖의 말들에 상처 받고 예고 없는 이별이나 아픔에 중심을 잃을 때도 있다. 열심히 계획하고 실행하던 일들이 어그러져서 실망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고 일어서야 한다.

연약해보이지만 아픔과 시련에 꺾이는 것이 아닌 유연함 속에 강함은 숨어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나 단단함 커다란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기다린 인내심 속에 그 본질은 숨어 있다.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시련 속에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 바람에 온몸이 휘어지더라도 꺾이지 않는 것. 강한 추위 속에서 고통의 긴 시간을 지나더라도 뿌리를 깊게 내리고 꽃을 피울 봄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 바람꽃이 내게 말해주는 것들이다. 진정한 강함은 유연함과 인내 속에 함께 하는 것이라고.

유난히 무리 지어 있는 하얀 꽃들이 나를 반긴다.

/전영숙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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