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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동심원

J는 베트남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의 학생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운 환경 탓에 베트남에서 엄마와 십여 년을 살다가 13살이 되어서야 한국에 왔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언어였다.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지만 원활한 소통이 어려웠고 쓰기는 더욱 힘든 문제였다. 학교를 다녀야만 했기에 자신의 나이에 맞는 학년보다 두 학년을 낮춰서 들어갔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다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어가 잘 이해되지 않으니 모든 과목에 문제가 생겼다. 그 학습을 도와주기 위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낮은 자존감도 큰 문제였다. 문득 중3 때의 일이 생각났다. 도덕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앞에 나와 발표를 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숙제를 내주셨다. 그 당시 난 굉장히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학생이었다. 앞에 나가서 무엇을 하는 것이 겁이 났고 자신감도 없었다. 한 마디로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다음 수업 시간에 발표자로 내 번호가 지목되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나며 온 몸이 떨려왔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가 덜덜 떨면서 발표를 했다. 그런 내게 선생님은 말을 아주 조리 있게 잘 한다고 이야기하시며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추천해주셨다. 나도 놀랐지만 반 아이들은 더 놀란 거 같았다. 다들 ‘늘 말없고 존재감도 없는 애가 할 수 있다고’하는 눈빛이었다. 긍정적인 선생님의 한 마디 말이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일 이후 친구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받는 일이 생겼다. 다가와 말을 시키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 자신도 조금 변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일을 해도 할 수 없을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서 시작도 못한 일이 많았는데. 아주 미세하지만 해 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서서히 피어올랐다. 선생님은 별 다른 생각 없이 한 칭찬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내 삶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여름 방학을 지나면서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고 계획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세우며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J에게도 긍정적이며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나처럼 작은 불씨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커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아버지는 연세가 많고 엄마는 자신보다 한국어를 못하니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대학도 가고 싶단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너는 한국어를 앞으로 잘 하게 될 거고 또 베트남어를 할 수 있으니 그런 면에서 유리한 면도 있다고. 더구나 베트남어는 배우기 어렵다고 하는데 두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않냐고. 거기다 학교에서 영어도 배우니 열심히만 하면 3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좋은 점을 가지고 있다고. J는 활짝 웃으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그렇다면 열심히 해 보겠다고 한다. 다음 만남을 가졌을 때 자신의 꿈을 스튜어디스로 결정했다고 한다. 5월은 많은 만남이 주어진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 다른 때보다 많은 교제와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연결하는 것이 말이다. 말은 성능 좋은 자동차와 같다고 생각한다. 목적지를 정하고 도로 규칙을 지켜 운전을 하면 안전하고 편안하게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지나치게 과속을 하거나 거친 운전을 한다면 사고가 나거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할지라도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조심하고 상황을 살피며 대화를 하면 그 만남의 시간은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 될 수 있지만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대화는 상대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한 선생님이 툭 던졌던 한 마디 말이 한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줬던 것처럼 말은 무한한 힘을 가졌다. 3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격려했던 말이 그 아이의 마음에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한 기회가 되었다. 큰 칭찬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늘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 다음 언젠가 당당한 사회인으로 선 J를 만날 날을 상상해본다. 다양한 만남이 있는 이 한 달 오늘도 누군가의 작은 격려의 말이 누군가를 일으키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면서. /시조시인 전영숙

2025-05-18

출렁다리 위에서

4월, 봄이 휘청거린다. 여름과 겨울의 시샘이 예사롭지 않다. 하루는 패딩을 입어야 활동할 정도로 온도가 낮아졌다가 다음 날은 초여름 날씨로 훌쩍 건너뛴다. 꽃들도 적응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봄꽃이 순차적으로 피었다. 매화, 동백이 피고 나면 삼월 들어 개나리와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었다. 목련이 순수함으로 벚꽃이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뺏고 나면 라일락이 뒤를 이었다. 오월이 되어 아카시아가 온 산에 향기를 뿜고 난 뒤 밤꽃이 피면 아 여름이 오겠구나 생각했었다. 요즈음은 동백과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한꺼번에 우르르 나온다. 날씨가 왔다 갔다 하니 꽃들도 나올 자기 순서를 찾아 나오기가 어려운가 보다. 혼란은 날씨나 계절 뿐만은 아니다. 우리 일상생활도 더 빠르고 다양하고 발전해서 따라가기가 벅차다. 새로운 것을 계속 익혀야 하는 현실에 머리가 복잡하다. 평생학습관에서 강좌 하나를 듣고 있다. 인기가 많은 수업이어서 빨리 신청하지 않으면 등록이 어려웠다. 수강 신청은 온라인과 현장 접수로 양쪽이 가능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나이가 있는 분들이어서 현장에서 접수하는 쪽을 선호했다. 어느 날, 공지사항이 떴다. 앞으로 현장 접수는 없애고 온라인 접수만 받는다는 것이었다. 수업 후에 휴대폰을 꺼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다음 수업 때 물으니 아들이나 딸이 대신 신청해줬다는 분들이 꽤 있었다. 하나를 배우고 나면 그 다음 배울 것은 몇 배로 늘어나는 느낌이다. 지프리 프사, 즉 지브리 스타일의 프로필 사진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SNS 프로필을 지브리 캐릭터로 꾸미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는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그 배경에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감성과 매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챗GPT의 이미지 생성 기능에 대한 사용자 반응은 매우 긍정적인데 이 기능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배워야 할 것이 또 늘었다. 얼마 전 경주에 지인들과 놀러갔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 같이 챗GPT앱을 깔았다. 사용법을 배워 시험 삼아 챗GPT에 경주, 모화를 넣은 시조 한 수를 부탁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구체적인 정보를 주면 더 나은 시조가 나올 거라고 하기에 서정주풍에 고급 어휘를 넣어 달라고 했다. 즉시 시조 한 편이 올라왔다. "눈은 잠시 내려앉아 흰빛을 품은 산길 푸른 소나무 한 그루 천년을 껴안았다 바람 끝에 묻은 숨 신라의 꿈을 적시네" 아주 잘 썼다고는 할 수 없으나 주어진 정보에 충실한 시조가 한 편 완성되었다. 뒤늦게 글을 쓰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끔은 쓴 글을 문예지나 잡지사에 보내야하는 일도 있다.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메일을 통해 원고를 보낼 수 있으니 편리한 세상이다. 주위에 나이 들어 글을 쓰는 분들이 있다. 컴퓨터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던 분들은 급하게 메일을 만들어야 했고 원고를 보내는 일이 힘들 때도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점차 발전하면서 작가라는 직업도 위협을 받고 있다. 몇 년 전에만 해도 AI가 나와도 없어지지 않을 직업에 작가가 있었다. 아무리 컴퓨터가 발전해도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깊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대세였다. 지금은 초기 형태의 챗GPT이지만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고 스스로 진화한다면 과연 우리가 쓴 건지 컴퓨터가 쓴 건지 구분이 가능한 시대를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어쩌면 많은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글이 더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게 되지 않을지 고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할까? 삶은 출렁다리 위를 건너는 것 같다. 심란한 마음에 TV를 켰다. 벚꽃의 화사한 웃음 위에 눈이 소복한 장면이 눈길을 끈다. 생경한 아름다움이다. 정말 드물게 보는 4월의 벚꽃과 눈꽃이다. 그래, 꽃은 어쨌든 저리 피어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어쩌랴. 질서가 흩어지고 변화가 두드러진 시대를 사는 우리지만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걱정은 저만치 밀어두고 오늘, 지금 그래도 글을 써야겠다. /시조시인

2025-04-27

기다림

벚나무 한 그루가 겨울 거리에 서 있다. 바싹 마른 가지 끝의 파르르 떨림이 눈에 보일 정도다. 거친 바람의 야유에 그저 흔들릴 뿐이다. 가지 끝을 희롱하던 성난 바람은 잠시 머무르다 휙 하니 떠나버린다. 학원 출근 첫날이었다. 옆 반 선생님이 우리 반의 K를 잘 지켜보라고 한다. 태도도 불량하고 무엇보다도 욕을 너무 많이 해서 수업 분위기를 자주 망친단다.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교실에 들어서니 다들 헤드셋을 끼고 바른 자세로 앉아 오디오를 듣고 있었다. 헤드셋을 한 쪽은 귀에 다른 한 쪽은 머리에 삐딱하게 쓴 채 옆으로 거의 눕다시피 한 아이가 있었다. 금방 K인지 알 수 있었다. 광대가 좀 나오고 눈이 작고 가늘며 우락부락한 느낌이었다. 힘도 좀 쓸 것 같았다. 옆으로 가서 반듯하게 앉으라고 했더니 대뜸 욕이 날아온다. 아들 둘을 키워 남자아이들의 반항쯤이야 하던 나도 순간 당혹스러웠다. 한동안 K를 관찰했다. 6학년인 그는 친구들에게도 굉장히 짜증을 잘 내었고 쓰는 단어의 반 이상이 욕이었다. K와 나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달래도 안되고 야단쳐도 안되고. 쉽지 않았다. 억지로 수업을 시켜도 효과가 없을 건 자명한 일이었다. 어느 날 K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집안 얘기는 또 술술 잘 한다. 엄마가 집에서 일을 하셔서 학교 갔다 와도 집에 있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중학생인 형은 공부를 무척 잘 해서 특목고나 자사고를 가려고 한단다. 당연히 부모님의 관심은 입시를 앞둔 형에게 쏠려 있었고 공부가 썩 뛰어나지 않은 K는 뒤로 좀 밀려 있는 것 같았다. K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나름 이해가 되었다. 형도 엄마도 자랑스러워했지만 본인도 인정받으며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이 강한 아이였다. 그에게는 기다려주는 것이 꼭 필요할 것 같았다. 그 후 K와 나는 그런대로 잘 지냈고 중학교에 가면서 헤어졌다. 때때로 그 아이를 생각하면 겨울나무가 생각났다.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잎을 떨어뜨려 수분 손실을 최소화한다. 물관에 공기방울을 형성해 물의 이동을 막아 얼음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다. 기본 에너지를 제외하고는 양분들을 뿌리로 이동시킨다. 혹독한 환경에서의 적응과 생존을 위해 성장을 멈추고 에너지소비를 최소화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갖는다. 새봄의 새 잎을 틔우기 위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반드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 시간 속에는 아픔이 있다. 아픔을 안으로 삭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모습이 때로 밖으로는 오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혹한을 견디고 새봄을 맞을 준비를 저마다의 다른 방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전영숙 시조시인 학기 초에 학원 근처 학교 앞에서 홍보지를 나누어 주고 있을 때였다. 어떤 학생이 다가오더니 학원 선생님이시죠 한다. 얼굴은 눈에 익었는데 누구인지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모른 척 할 순 없어서 어 잘 지냈니 하고 어물쩍 대답했다. 그 순간 그 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 K였다. 3년 만이었다. 키가 훌쩍 크고 단정한 모습이 많이 낯설어 금방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선생님이 보여 왔다고 하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K는 나름 잘 보낸 것 같았다. 사랑을 덜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환경에 대처한 방법이 다소 불량스럽고 공격적이었어도 그것을 잘 극복한 것 같았다. 욕을 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살짝 웃음도 나왔지만 의젓해진 그가 너무 기특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며 웃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앞으로 멋있는 청년으로 성장할 그가 기대되었다. 홍보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나뭇가지 끝이 약간 분홍빛을 띄고 있다. 몽글몽글 앙증맞게 꽃눈을 틔우고 있다. 며칠 있으면 연분홍의 꽃잎이 활짝 그 손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꽃구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 피우는 꽃은 아름다울 것이다. 모른 척하고 가도 되는데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K의 뒷모습에 그 봄꽃이 오버랩된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4-13

엄마의 뜨개질

전영숙 시조시인 홈쇼핑에서 니트 카디건 광고가 한창이다. 쫀쫀하고 촘촘하게 짠 니트는 화려한 원색이다. 호스트의 쨍하는 소리가 눈을 끌어 모은다. 실 값이나 나올까 싶은 가격이어서 마음이 살짝 동한다. 가을이 시작되면 엄마는 늘 뜨개질을 시작했다. 어릴 적 우리 삼남매의 겨울옷 준비였다. 엄지와 검지에 실을 감고 대바늘을 움직여 코를 만들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 어느덧 마름모가 만들어지고 꽈배기 무늬도 옷에 도드라졌다. 신기했다. 완성된 옷에는 가끔 목둘레에 방울을 만들어 달아주기도 했다. 공들여 짠 옷은 2년 이상 입기는 힘들었다. 키가 크면서 옷이 작아지기 때문이었다. 작아진 옷은 동생이 입다가 또 물림이 되어 막내 동생에게 갔다. 막내도 입지 못하게 되면 옷을 몽땅 풀어냈다. 중간에 실이 끊어질까봐 백열등 아래에서 조심스레 풀던 모습이 떠오른다. 풀어낸 털실들을 섞어 새로 짠 옷은 때로 오묘한 색을 지니게 되었다. 아무리 모양을 만들어 니트를 짠다고 해도 전문가가 아닌 엄마의 옷 모양은 단조로웠다. 소매는 고무뜨기로 조이고, 몸통은 일자에 목둘레는 거의 둥근 모양이었으니까. 내복을 입어도 털실은 몸으로 파고들어 가끔은 가렵고 따갑기도 했다. 두툼하고 투박한 그 옷보다는 알록달록한 기성복 입던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굳이 고생하며 뜨개질한 옷을 입히려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털실을 살 돈에 돈을 조금 보태 예쁜 옷을 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중에 파는 알록달록한 옷들이 내 눈에는 훨씬 더 좋게만 보였으니까. 툴툴거림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 후로 손자들이 태어나서도 엄마의 뜨개질은 계속 되었다. 아이들이 조금 커 할머니가 짜 준 목도리와 조끼를 입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가차없이 그 옷들을 처분하였다. 내가 엄마처럼 대바늘을 들고 무엇인가를 떠 본 것은 아들들이 직장으로 학업으로 내 곁을 떠난 후였다.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아이들이 떠난 빈자리는 꽤 컸다. 삶은 허전했고 그 허전함은 마음속에 깊은 우물을 만들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서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것이 뜨개질이었다. 엄마처럼 잘 할 자신이 없어서 목도리를 떠 주기로 했다. 마음을 먹고 털실을 구입해 열심히 짜, 곧 아이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그 해 겨울은 다른 해에 비해 추웠다. 큰 아들은 외출할 때 목도리를 두른 인증샷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 뒤로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기성품이 더 가볍고 따뜻했으며 모양도 더 예뻤기 때문이리라. 몇 년이 지나고 그 목도리들은 어느덧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섭섭했다. 몇 번을 버릴까 하다가 지금은 상자 안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다. 얼마 전 엄마는 가지고 있던 대바늘을 어떻게 해야 하냐며 혼잣말을 하셨다. 구순의 엄마가 뜨개질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너 가져갈래 하셨다. 이미 나도 눈이 나빠져 더 이상 뜨개질은 무리였고 내게도 꽤 여러 개가 있었지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값이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 대바늘과 몇 개의 털실 뭉치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값이 별로 나가지 않는 바늘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했다. 별로 예쁘지 않은 목도리를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는 내 마음과 함께. 내가 목도리를 뜬 것은 나의 헛헛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면 엄마의 뜨개질은 자식에 대한 애정과 생존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고비고비 다가오는 삶의 어려움 앞에서 굴복하고 싶지 않은 엄마의 의지가 대바늘을 잡게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아진 옷을 버리지 못하고 올올이 풀고 다시 뜨는 그 속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야 한다는 엄마의 절박함이 숨어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서툰 솜씨로 짠 목도리는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으면서 엄마가 짜 주었던 손뜨개 옷 어느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함이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가져온 대바늘과 털실은 갖고 있던 대바늘과 함께 장롱 깊숙한 곳에서 쉬고 있다. 엄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고여 있는 채로. 여전히 TV에서는 니트를 선전하는 호스트의 목소리가 뜨겁다. /시조시인

2025-03-30

환상 방황

전영숙 시조시인 어제도 그 남자 곁을 지나갔다. 집을 나서면 거의 매일 보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인지 찌든 쉰내가 코를 스친다. 장시간 이발을 하지 않은 머리는 이리저리 엉켜 어깨 뒤로 늘어져 있다. 다행히 검은색 두툼한 패딩점퍼를 입고 신발도 방한화를 신고 있다. 빈 가게 앞 계단에 손을 가슴 위로 모으고 누워 있다. 겨울치고 날이 따스해서 해바라기라도 하나 보다. 그 남자가 움직이는 행동반경은 비교적 일정한 듯 했다. 자주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과 큰 사이즈의 콜라를 먹고 마셨다. 우리 집 근처 약국에서 시작해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재래시장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본 것만 3년이 넘었는데 노숙의 삶이 몸에 익었나 보다. 노숙에 익숙해지면 좀처럼 그 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 삶을 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붕괴된 기족 관계, 무너진 가정 경제, 실직 등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한다. 요즘은 실직으로 젊은 노숙자의 수가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 남자가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 동네에서 그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지 궁금했다. 문득 환상 방황, 윤형 방황으로 풀이되는 링반데룽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산에서 등반 중 본인은 어떤 목표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방향감각을 잃고 큰 원을 그리며 같은 지역을 맴도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간다고 믿고 움직이지만 같은 자리를 맴돌다 보면 사고력이 둔해지고 이런 행동을 무리하게 하면 조난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한다. 특히 눈보라나 안개가 많이 끼었을 때 일어나기 쉽고 해나 달 같은 방향을 알려주는 기준점이 없을 때 더 심하게 나타난다는 연구보고서도 있다. 위기에 처하면 생각이 흐려지고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은 늘 평탄한 길만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안개나 눈보라, 폭풍 같은 것도 만날 수 있다. 그런 어려움이 닥치면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힘든 일이 반복되며 더 깊은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면 방향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삶에서 이런 환상 방황을 크게나 작게나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엘리베이터에 갇힌 일이 있었다. 단순히 엘리베이터가 멈춘 것이 아니라 불까지 몽땅 나가서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에 놓여 있었다. 손을 얼마만큼 뻗어야 비상 호출을 누를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방향도 거리도 측정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같이 탔던 고등학생과 나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잠잠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같으면 휴대폰이 있어서 밖으로의 연락이 가능했겠지만 그 당시엔 휴대폰이 일상화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처음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어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진한 무력감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 누군가는 문을 열어 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있어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노숙의 삶을 살다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 존 폴 디조리아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두 번이나 노숙자 생활을 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늘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스스로 믿었다고 한다. 두 바퀴 스케이트보드로 유명한 강신기 대표도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사업을 하던 중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 후 식구들은 처가로 보내고 서울역에서 노숙을 했었다. 그러나 인력시장을 나가면서 희망과 긍정적인 마음이 늘 마음에 남아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부모나 주변의 격려도 일어서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고백했다. 오늘도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원을 그리는 삶을 사는 그 남자를 지나쳤다. 요즘은 몸이 많이 힘든지 걸어 다니는 시간보다는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 마음 가운데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마음이 작은 불씨로 일어났으면 좋겠다. 자신의 환상 방황을 끝내고 평범하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삶으로 돌아가기를 빌어본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웠으면 싶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말끔해진 그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시조시인

2025-03-16

산수이발관

이발관. /네이버 제공 가끔씩 그리운 곳이 있었다. 고교 시절 살던 집으로 여러 번 꿈에서도 나타났었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언덕길이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구멍가게 하나와 낮은 높이의 집 몇 채, 왼쪽으로는 이발관이, 언덕길 끝에는 교회가 있었다. 그 옆으로 난 세 갈래의 길 중에서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가다보면 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잘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꽤 넓은 마당이 있던 집이었다. 동생이 좋아하던 강아지를 키웠다. 하교 길에 사온 병아리도 가끔씩 삐약거리고 있었다. 화단에는 나팔꽃과 분꽃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잘 꾸며진 잔디가 있거나 조경이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정감 가는 곳이었다. 밤에 마루에 누우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눈길을 사로잡던 곳. 별을 보며 막연히 목성을 여행하는 꿈도 꾸고 달의 여신 셀레네의 전설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글도 쓰곤 했다. 많은 것을 상상하며 꿈꾸던 시절이었다. 나만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나 싶어 동생에게 물었다. 역시 그 집이 그립다고 했다. 우리 자매는 틈을 내어 그 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왜 진작 가 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서로를 탓하면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가서 기억 속의 그 언덕길을 올라갈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같이. 언덕길 중간 왼쪽 편에 이발관이 보였다. 어린 시절에 봤던 그 이름 그대로이다. 산수이발관. 몇 십 년의 시간이 훅 되돌려 감아졌다. 기대감이 들었다.오른쪽 편에 있던 자그마한 구멍가게는 그 자취도 남기지 않고 다 없어져버렸다. 언덕 위에 예전에 있었던 교회가 보였다. 기억 속의 모습이다. 비 오는 날 분홍색 우산을 들고 교회를 다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우리가 살던 집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교회에서 눈을 돌린 순간 우리는 ‘아’하는 소리만 냈을 뿐이다. 기억 속의 골목은 사라지고 쭉 뻗은 길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갈 때는 둘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갔었다. 키우던 강아지 얘기, 피어있던 꽃들, 아버지에게 혼났던 일들을 주고 받으며 킥킥거렸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서로 얼굴만 가끔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 날 살던 곳을 갔다 온 다음부터 그 집에 대한 꿈을 다시는 꾸지 않는다. 재건축되어 정비된 깨끗한 아파트의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 나의 아름다웠던 한 시절이 몽땅 옮겨져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외국인들이 배워 익숙하게 쓰는 한국어 중에는 빨리빨리가 있다. 가전 AS도 빠르고 인터넷 설치나 배달이 세계적으로 알아 줄 정도의 빠름을 한국은 자랑한다. 그것이 우리나라가 지금의 발전을 이루는데 작은 원동력도 되었다. 그만큼의 적극성과 부지런함, 추진성이 있었으니 말이다. 전영숙 시조시인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사동과 종로의 오래 된 곳을 찾아가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 방영되었다. 인사동의 백 년이 넘은 최초의 필방에서는 옛 선조들이 쓰던 대나무 벼루, 옥으로 된 이동용 벼루를 소개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오래 된 설렁탕집이 마지막으로 3대째 이어온 한의원이 소개되었다. 그 프로를 보면서 옛것을 잊지 않고 지켜가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한 시대의 작은 역사가 그 가게 안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무형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문득 산수이발관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이용했었고, 많은 서민들이 이용하며 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고여 있을 그곳. 대부분의 가게가 영어와 외국어를 섞어 쓰고 있는 요즘에 몇 십 년의 이름을 그대로 쓰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발관의 뚝심을 배우고 싶다. 발전을 위한 빠른 변화도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대를 넘어가며 그 자리를 지켜가는 그런 가게들에서 연륜과 지혜와 역사를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조만간 그 이발관을 다시 가보고 싶다. 어쩌면 아름다운 추억 한 토막이 다시 떠오를 것도 같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2-23

졸업식

졸업식 풍경. 그날, 2월의 햇살은 화사해서 슬펐다. 눈가를 찡그리며 터덜터덜 걷는 뒤로 졸업을 서로 축하하는 가족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졸업장 하나만 들고 나서는 걸음이 무거웠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데 멀리에서 여동생이 작은 꽃다발 하나를 들고 뛰다시피하며 내게 오고 있었다. 하던 일이 잘못 되어 그 뒤처리를 하느라 부모님은 결국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옆집 아주머니가 뒤늦게 꽃다발을 사서 여동생에게 준 것이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또렷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나의 졸업식이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졸업은 내겐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누구의 졸업식을 가던 축하하는 마음을 듬뿍 가지고 갔다. 결혼을 하면서 내 아이들의 졸업식만큼은 크게 축하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큰 아이도 작은 아들도 자신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며 대학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그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졸업장 받아오는 것으로 끝이었다. 1961년에 개정된 교육법에 의해 2월 졸업은 꽤 오래 지속되어왔다. 그 당시의 졸업식은 졸업생이나 가족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후배들이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이란 노래를 불러주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졸업식 풍경은 점차 엄숙함과 경건함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때는 뒤풀이로 밀가루 뿌리기나 계란 던지기 등의 문화가 생겨났었다. 그것은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건전한 졸업 문화를 조성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코로나가 전국을 강타하면서 졸업식의 광경은 또한번 달라졌다. 운동장에서 하던 졸업식은 실내로 그 자리를 옮겨 비대면으로 시행되었고, 무겁고 엄숙하던 졸업식은 축하의 의미가 강한 축제의 느낌이 가미되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졸업식에 간다고 해서 놀랐다. 대부분의 졸업식이 2월이라고 생각했었는데, 1월에 하는 졸업식이라니. 학사 일정의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신학기 준비기간 조성 등으로 요즘 대부분의 초등학교는 12월말이나 1월 졸업식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집앞 강변 산책을 하며 대나무숲을 걸었다. 대나무는 일정한 크기가 되면 마디를 만든다. 그것이 대나무가 속이 비어 있음에도 곧고 바르게 높이 자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속이 텅 비었는데도 거센 폭풍에 휘어질 뿐 쉽게 부러지지 않는 것이 마디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것은 성장의 발판이자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생장점인 것이다. 졸업도 하나의 과정을 마치고 다음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매듭이며 마디이다. 한 과정에서 원하는 결과만큼 얻지 못했어도 그것을 하나의 마디로 매듭짓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 과정에서 성취한 것이 있다면 축하하며 새로운 시작을 응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인간의 지혜가 졸업식이다. 전영숙 시조시인 우리는 여러 번의 졸업식을 거치면서 살아간다. 공식적인 배움의 장을 지나가면서 맞는 졸업식도 있다. 사설기관에서 일정 기간을 채워 무엇인가를 배우고 끝내는 일도 있다. 집 근처의 평생대학이나 주민센터를 통해 다양한 취미나 운동에 몰두하며 분기별로 수료를 하고도 있다. 그런 작고 큰 졸업식을 거치면서 우리는 삶의 크고 작은 마디를 만들면서 살고 있다. 어떤 마디는 다소 빈약하고 어떤 마디는 좀더 단단하게 맺으면서. 무엇보다도 인생의 가장 커다란 졸업식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맞게 될 것이다. 졸업하는 주인공은 나이지만 그 축하를 직접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 얼마나 진정으로 나를 아꼈던 사람들이 찾아오는지에 내 졸업식 점수가 매겨질 것 같다.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평가되는 중요한 시간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와도 괜찮을 것 같다. 참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같이 축하해주면 참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마지막 졸업식을 바라보며 하루하루의 작은 매듭을 지어가는 평범한 삶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산책을 마쳤다. 강물에 반사되는 햇살이 눈부시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2-09

행주

어디선가 탄내가 난다. 누가 뭘 태우고 있나보다. 베란다 창을 타고 넘어오나 보다 생각한 나는 보고 있던 TV에 눈을 고정시켰다. 냄새가 점점 더 심해졌다. 퍼뜩 머릿속에 경보기가 울렸다. 벌떡 일어나 싱크대로 뛰어가서 가스렌지를 껐다. “어휴, 또 태웠다.” 빨래 삶는 솥에 행주를 넣고 삶고 있었다. 5~6개의 하얀 행주는 절반이 바닥에 심하게 눌어붙어서 도저히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폭폭 삶아서 햇볕 아래 말리면 느껴지던 그 뽀송뽀송함이 너무 좋은데. 베란다와 부엌의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래도 매캐한 냄새는 빠지지 않은 채 마음 깊이 가라앉는다. 몇 달 사이 벌써 여러 번 행주를 태워버렸다. 사용해서 닳은 행주보다 태워버린 행주의 수가 훨씬 많다. 오후에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갔다.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입들이 분주하다. 경험담이 쏟아져 나온다. 한 친구가 웃으며 말한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폰 봤냐고 물었단다. 아이들이 쓰러질 듯이 웃으면서 엄마가 지금 폰들고 전화하고 있잖아 하더란다. 그런 것도 문제지만 가스불은 큰일이 생길 수 있다며 입을 모았다. 가스 밸브에 타이머를 부착하라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쓰니까 세상 걱정없다고 하면서. 다른 친구는 천행주를 쓰지 말란다. 어느 회사 제품이 좋다며 일회용 행주 쓸 것을 권한다.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천행주 대신 일회용 행주를 쓰면 편하긴 하겠지만 환경오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날 모임 화제는 치매, 경도인지 장애, 건망증 등에서 떠돌았다. 검사를 받아 봐야 한다든가, 아직 치매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자위 섞인 목소리. 서로 아마 건망증일 거야로 결론짓고 돌아서는 뒷모습들이 코끝을 찡하게 눌러왔다. 정말 건망증인가보다. 건망증이란,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기억하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일시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장애의 한 증상이다.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거나, 해야 할 일의 종류가 많은 상황처럼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저하될 때에는 더 잘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나이가 드는 정상적인 노화 과정에서도 늘어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면 치매를 유발할 수 있는 퇴행성 질환이 원인일 수 있기 때문에 감별을 위한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 날 저녁 퇴근한 아들이 물었다. “엄마, 왜 집에서 탄내가 나지?” 그때까지 환기를 시켰음에도 탄내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말했다. 아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타이머를 가스렌지에 부착하자고 한다. 전에도 몇 번 타이머 얘기를 하는데 픽 하고 웃고 말았었다. 이 날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전영숙 시조시인 밤에 침대에 누워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같이 나오던 길이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생활하는 친구는 나오기 전 노트 하나를 꺼내더니 집안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적혀 있는 것이 궁금해 보았더니 집안 점검 목록이었다. 가스밸브, 전등, 멀티탭, 커피 머신 전원 등등. 집안 곳곳에 놓인 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일종의 자가점검표였다. 왜 그렇게 하냐고 물으니 지방에 가다가 불안해서 다시 돌아온 적이 너무 많아 생각해 낸 것이라 한다. 굳이 천행주를 고집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익숙한 것을 버리기 싫은 마음이 아닐까. 낯섦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익숙한 것은 다루기 쉽고 편하니까. 건망증 또한 익숙함과의 이별 연습 아닐까. 잘 저장되었던 냉장고에서 재료를 하나씩 꺼내면 언젠간 저장된 것이 얼마 남지 않아 느낄 두려움. 그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익숙함만을 고집하는 건 아닌지. 다들 나름으로 건망증을 이겨나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는 자가점검표로, 또 다른 누군가는 수첩을 들고 다니며 모든 것을 메모하는 방법으로. 타이머를 달까 ? 아니면 일회용 행주를 조금 써 볼까? 무엇이라도 시도해봐야겠단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시조시인 전영숙

2025-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