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은 만남을 약속하고도 늘 아프다. 우리 집에서 친구들과 2박3일을 보냈다. 마지막 날 공원 산책을 하고 친구들은 역으로 나는 집으로 향했다. 학창 시절에 만나 지속되어온 우정이라도 이별 앞에선 늘 마음이 소란스러워진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거리는 아름다운 색의 전시장이 되었다. 봄의 통통 튀는 화사함 대신 진중하고 깊은 색감을 띈 나무들이 제각각 마지막 발걸음을 하고 있다. 친구를 보낸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아파트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 예쁘게 조경이 된 돌 틈 옆 빛바랜 초록의 나무가 서 있다. 평범하고 수수한 잎들이 미처 단풍들지도 못한 채로.
죽단화였다. 일반적으로 겹황매화로 더 불리는 꽃이기도 하다. 무더기로 많이 자라고 관상수로 키우기도 하지만 크게 매력이 있는 나무는 아니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다. 옆에는 아직도 초록의 싱싱함을 자랑하는 연산홍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장미처럼 화려한 모습도 아니고 백합처럼 은은한 향기로 시선을 끄는 것도 아닌 길 가의 들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나무를 알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이었지만 지나치면서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초록이 짙은 여름에는 죽단화도 옆의 꽃이나 나무와 함께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아도 조화를 이루며 있었던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며 옆의 나무나 꽃들이 겨울 준비로 자신을 치장할 때에 죽단화는 빛바랜 모습의 자신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런 죽단화를 보면서 헤어진 친구들이 떠올랐다. 젊었던 한 시절은 푸른 여름의 초록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화려한 삶을 추구하고 성공을 향해 달려야 했기에 함께 했던 시간들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모두들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만을 보고 달려간 시간들이었다.
전업주부로 살며 자녀 교육에 열중했던 친구. 재력을 키우기 위해 경제 공부를 열심히 한 친구. 직장 생활을 오랜 시간 하며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은 친구들. 때론 보이지 않는 경쟁의 심리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열정에 쌓였던 날들도 있었으니까.
나이가 들면서 각자 사는 장소가 달라졌다. 과거의 크고 잘 되기 위한 일에 대한 관심사에서 벗어나 근래에 들어서는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어느 때보다 자주 모였다. 명예나 재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건강에 대한 것, 하루를 보내는 것에서 느끼는 행복감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우리의 시간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옛날 같은 경쟁의식이나 비교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소소한 것을 나누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소용돌이치던 젊음의 그 한 때에서 벗어나 욕심을 조금 내려놓은 지금의 조용해진 삶이 서로 편안하다고 느낀다. 그러다보니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서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푸른 초록의 시절은 지나갔지만 늘 그 자리에 존재감이 없어도 있었던 죽단화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 귀퉁이에서 살아온 죽단화를 보며 누구의 눈에 잘 띄지 않아도 피어야 할 때 필 줄 알고 져야할 때 질 줄 알며 스스로의 때를 살아가는 황매화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잠시의 화려함도 없고 시선을 끄는 향기도 적지만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있는 황매화의 그 모습이 나를 위로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지금의 작지만 변화없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으로 족하다고 가만히 말해주는 것 같다.
죽단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랜 잎마저 시들 것이다. 그리고 또 꾸준한 인내의 시간을 갖고 다시 모습을 드러낼 날을 기다릴 것이다. 자신의 계절을 알고 자신의 온도를 알고 피어날 때를 순수한 마음으로 황매화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들은 또 작지만 따뜻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친구를 보낸 허전한 마음과 이제는 조금 작아진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애틋했던 마음이 죽단화를 보며 욕심을 죽이고 현재에 충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다시금 느꼈다. 역으로 향한 친구들의 마음에도 이런 따뜻함이 함께 했으면 한다.
/전영숙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