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놀이터를 갔다. 두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타던 자전거는 던져둔 채 바닥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다. 폰으로 하는 게임을 보고 있는 듯하다. 바닥은 넘어져도 다치지 않게 우레탄을 깔아놓아 푹신하다.
어릴 때는 몸을 많이 쓰고 놀아야 한다고 들어 왔는데,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는 그 역할을 잃은 듯하다. 손녀가 팔을 신나게 흔들고 뒤뚱거리며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다칠까 염려되어 함께 계단을 올랐다. 계단 위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 둘이 앉아 있다. 손에는 어김없이 휴대폰이 들려 있다. 주고 받는 말도 없이 서로의 폰으로 눈이 빨려들 듯하다.
“내가 먼저야.”를 외치며 손녀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갔다. 나도 뒤따라 원통형의 틀에 몸을 던져 넣었다. 밑에서 기다렸던 아이는 다시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작은 몸을 흔들며 달린다. 간간히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뒤뚱대며 걷는 모습이 귀여워 혼자 웃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놀이터에서 아이 혼자 신났다. 아이와 미끄럼을 타면서 초등학생 시절의 나로 돌아갔다.
그 당시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 놀이를 많이 했었다. 점심 시간이나 방과 후 운동장에는 군데군데 무리지어 고무줄을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줄을 잘 넘는 아이들은 인기가 있어 서로 자기편을 만들려고 때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었다.
그럴 때 꼭 등장하는 것이 짓궂은 남자 아이들이었다. 날카로운 것을 들고 와 놀고 있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던 그 시절의 유치함이란. 그런 아이들을 잡겠다고 씩씩대며 따라 뛰었던 내 모습이 살포시 떠올랐다. 장난감이 많지 않았던 시절의 놀이였다.
요즈음 아이들은 주로 휴대폰을 가지고 논다. 남자아이들은 게임을 많이 하고 여자 아이들은 SNS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셀카도 자주 찍어 올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셀피(selfie)라는 용어가 영어책에 등장하고 있다. 셀피는 폰으로 자신의 자화상이나 짧은 영상을 찍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생일을 맞아 모인 아이들도 함께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각자의 폰을 보고 있다. 혹 폰이 없는 아이들은 친구 옆에 붙어 앉아 같이 들여다보고 있다. 이게 현재 학생들의 놀이문화라고 한다.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 속에 염려가 담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바뀌어가는 시대를 무시할 순 없지만 게임이나 폰에 지나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어서 적절한 폰 사용 시간을 두고 아이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집이 많다고 한다.
집 근처의 육아지원센터에서 아이들 교육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다. 당선작 중 옛 놀이문화를 재현해서 발전시키기로 한 것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실뜨기였다.
어린 시절 엄마는 긴 털실을 묶어 원을 만들고 두 손을 이용해 혼자 실뜨기를 하셨다. 손끝에서 다양한 무늬가 만들어지면 만화경을 보는 것 같이 신기해서 배우고 싶었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 동생과 둘이 실뜨기를 하면서 놀던 기억이 새로웠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하기 위해 먼저 혼자 하는 실뜨기 영상을 보았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던 놀이를 동영상으로 보며 익힐 수 있으니 기계의 발달을 무시할 수만도 없는 현실이다. 원활한 놀이를 위해서는 계속 보고 익혀야 했다.
지역아동센터에 실뜨기 놀이를 하러 갔다. 실뜨기실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가장 쉬운 방법부터 천천히 설명하였다. 곧잘 따라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저학년 여자아이들은 손에 힘이 없어서인지 자꾸 실패했다. 가는 손가락에 힘이 실리지 않으니 실이 처지면서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공한 아이들의 입가에 웃음이 가득이다. 되풀이해 보면서 못하는 옆의 아이에게 진지한 모습으로 가르쳐준다.
건전하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 역시 우리 어른들에게 주어진 숙제다. 변화하는 시대를 따르되 건전한 놀이 문화를 형성해야 하는 것은 교육 현장 뿐 아니라 각 가정에서도 심각히 생각해 볼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용한 놀이터엔 아이의 웃음만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었다.
/전영숙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