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구운 냄새가 남아 있다. 계속 환풍기를 돌려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날이 선선해져 창문을 닫고, 초를 켰다.
요즈음의 향초는 다양한 향을 가지고 있다. 둥근 유리병 속에 든 초에 불을 붙였다. 반 정도 닳아 없어진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보랏빛 초가 타면서 옅은 라벤더향이 방 안에 흘렀다. 그 향을 타고 생각은 공주로 달려갔다.
무령왕릉을 갔었다. 처음 가본 왕릉은 기대 이상이었다. 여러 가지 껴묻거리(부장품)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무덤 안 군데군데 불꽃 무늬가 보였다. 촛불이 있던 자리란다. 무덤이 완성된 후 촛불을 켜 둔 채 밖에서 문을 닫았다. 초는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타고 그 수명을 다했다. 그 안은 그래서 진공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완벽한 형태의 부장품들이 발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초는 희생의 상징으로 많이 이야기들 한다. 스스로의 몸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초가 타면서 촛농이 흘러내리고 시간이 가면서 몸이 다 녹아내려 없어지는 것을 보면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1시간 정도 켜 놓았던 초를 끄기 위해 유리병의 뚜껑을 닫았다. 거므스름한 그을음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잠시 후 초는 꺼졌다. 산소의 공급이 끊긴 탓이다. 초가 자신을 태우고 주변을 밝히기 위해선 반드시 공기 중의 산소가 필요하다.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는 중거리 이상의 달리기 경주나 자전거 경기 따위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다. 특히 마라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뛰는 고된 운동이다. 이 페이스 메이커는 주자가 스스로 페이스를 잡기 어렵기 때문에 함께 달린다. 속도 조절을 시켜주고 주자의 긴장을 완화시키며 다른 선수를 견제해 경쟁을 대신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투입 된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남의 일등만을 위해 달린다. 그들의 결승점은 30KM이다.
함께 뛰었던 주자가 1등으로 결승선을 끊었다고 해도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기에 전혀 주목받지 못한다. 마치 산소가 있어야 초가 타지만 산소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어찌 보면 세상은 주인공들보다는 저런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손길로 이루어지고 만들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산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손녀를 데리러 어린이집을 갔다. 0세부터 2세까지의 어린이들이 다니는 곳이다. 말도 통하지 않고 기저귀도 떼지 못한 아이들이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 아침이면 이곳으로 모여든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마라톤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특히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를 돌보는 일은 더욱 쉽지 않다. 하루 종일 돌보다 보면 식사 시간을 챙기지 못해 끼니를 건너뛰거나 서서 간단히 먹는 일도 다반사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산후우울증, 독박육아 이런 말이 남의 말같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선생님들의 표정이 늘 밝다. 아침부터 저녁 시간까지 그 일을 감당하며 늘 환한 모습인 것이 존경스러웠다. 짧은 시간 한 아이만을 돌보아도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이 많은데 사랑과 그 일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선생님들의 수고 때문에 직장에서의 활동을 유지하고, 전업주부는 다시 가정을 꾸려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산소가 없이는 절대로 촛불이 자신을 태울 수도, 빛을 발할 수도 없다. 초도 산소도 스스로를 지워가면서 없어지는 것은 같지만 갈채는 초만 받을 뿐이다. 그러기에 보이는 자리의 주인공이나 1등도 무척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어쩌면 초보다도 산소 같이 도움을 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훨씬 많을 수 있다. 앞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삶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소중하고 의미 있다. 그들의 희생과 배려 속에 세상은 지금처럼 잘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향초를 태우고 초가 꺼진 자리엔 희미한 라벤더 향만이 주위의 공기에 섞여들고 있다.
/전영숙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