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긴 연휴였다.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서울로 향했다. 연로한 부모님을 뵙고 그간 만나지 못한 친구들,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인사동이나 청계천을 가고 싶다는 동생의 말을 듣고 하루 인사동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집 앞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주로 지하철로만 다니던 길을 버스 타고 가니 풍경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길 가 오래 된 가게의 눅진하게 쌓인 시간의 흔적들이 눈길을 끌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대로인 길 가의 종묘상들, 음식점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대도시에서 옛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건물과 가게를 보는 일이 즐거웠다. 마치 어린 시절 보물찾기에서 작은 보물 하나를 찾아낸 것처럼. 옆에서 말을 붙이는 동생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하며 내 눈은 바깥의 모습을 담기 바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총총히 머릿속에 되돌아와 박히면서 나는 버스 속에서 세월을 하나씩 거슬러 가고 있었다.
길옆으로 낙산공원의 성벽이 보였다. 요즈음 세계적으로 인기몰이 중인 애니메이션의 배경 중 한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온다고 한다. 낯선 말과 낯선 복장의 여성들이 버스 정류장을 배경으로 한껏 행복한 웃음을 폰에 순간 포착하고 있다. 여러 명의 다른 외국인들도 보인다. 저들의 기억 속에 오늘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버스는 어느덧 종로3가였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인사동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한적했던 길을 벗어나니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한국어에 섞여 들리는 여러 언어가 이곳이 외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거리임을 더욱 실감 나게 해 주었다.
몇 년 전만 하여도 인사동에 오면 실망을 하고 발길을 돌리곤 했었다. 한국적인 물건을 전시, 판매하는 곳도 있었지만 조잡한 외국의 물건을 가져다놓고 파는 노점들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랜 만에 보는 인사동은 그야말로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독특하면서도 한국적인 냄새가 가득 나는 물건들이 좁은 골목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조그마한 부스들이 모인 곳에서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찾아냈다. 놋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접시와 숟가락, 포크였다. 한 외국 어린이가 물고기 접시를 붙잡고 엄마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접시를 구입하였다.
온 김에 삼청동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길을 건너니 악기 소리가 우리를 부른다. 두 명이 버스킹을 하고 있다. 맞은 편에는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색소폰 소리가 부슬부슬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빗속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채롭다. 저절로 리듬에 흔들리는 몸을 추스른다. 삶의 자그마한 여유가 쉼을 가져다주는 시간이었다.
빗줄기가 조금씩 거세지고 있어 카페를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특색을 가진 음식점, 문구점, 옷가게 등이 보였다. 개성을 내보이는 가게들을 보는 것 또한 색다른 경험이고 즐거움이었다. 한동안은 내국인이나 외국인들이 즐겨 찾던 삼청동 거리도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끔씩 임대를 붙여 놓은 가게들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예전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K-POP이 세계를 흔들고 뒤이어 한류라는 이름으로 문화가 수출되고 있다. 그 흐름을 타고 관광객의 수효가 늘어나는 때에 인사동이나 삼청동은 고유한 우리의 문화를 보여줄 많은 장점을 가진 곳이라 생각되었다. 한국적인 특색을 가졌지만 현대화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과 음식들.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오늘의 이 보고 들은 일도 내 기억의 한 페이지에 얌전히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많은 것을 보고 담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경복궁 옆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서로의 자태를 돌아보는 외국인들 사이로 연휴의 마지막 자락이 가랑비와 함께 접히고 있었다.
/전영숙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