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세 얼굴’이란 영화가 있다. 다중 인격을 소재로 한 아주 오래 된 흑백영화로 우연히 TV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작품이었다.
이브 화이트는 소심하며 소박한 모습의 현모양처이다 어려운 살림을 현명하게 잘 꾸려 나간다. 어느 날 그녀에게 제2의 인격이 나타난다. 처녀 적의 이름인 이브 블랙을 사용하며 사치스럽고 방탕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두 인격이 번갈아 나타나 많은 사건을 겪다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조신한 모습의 제인이 나타나며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한 사람 안에 둘 또는 그 이상의 각기 구별되는 정체감이나 인격 상태가 존재하는 것을 다중인격이라고 한다.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현재에 쓰이는 병명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이다. 어린 시절 심한 신체적, 성적 학대를 받았을 때 자기 방어 기제의 한 방편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여성에게 특히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빌리 모리건이라는 사람은 24개의 인격이 드러난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인격으로 나타날 때에는 본인이 배운 적이 없던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동안 이브의 삶을 보며 영화가 주는 묵직한 무게만큼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상시에도 우리는 갑자기 화를 내거나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이중인격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으니까.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조금씩은 그런 모습이 숨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현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존 기술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도 여러 명의 이브들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직장에 다녔을 때나 모임이나 행사에 가 있을 때는 영락없는 이브 화이트이다. 적당히 사회적 규범이나 규칙을 따르며 타인의 무례한 언행이나 태도에 미소로 응대할 줄 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눈을 살짝 감고 넘어가기도 하고 무의미한 농담이나 필요 없는 시시한 화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기도 한다. 현모양처처럼 적당히 남을 배려하며 나를 죽이는 것에 익숙하다. 이 인격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잘 맞추어져 있다. 때때로 이런 원하지 않는 웃음과 교제 뒤에는 극심한 피로감이 자리 잡기도 한다.
집에 돌아온 순간 깨어나는 것은 이브 블랙이다. 그녀는 이브 화이트의 깊숙이 감춰진 내면이다. 화장을 지운 민낯과 활동하기 쉬운 헐렁한 차림의 그녀는 거칠 것이 없다. 가장 편안하고 늘어진 모습으로 TV를 보며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도 잊지 않는다.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다.
이브 블랙이 가장 현란하게 드러나는 곳은 아마도 여행지일 것이다. 적당한 책임감과 도덕심, 사회인으로 포장된 나라는 존재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곳. 그동안 만들어놓은 나를 버리고 가장 원시적이지만 자신에게 가까운 모습이 나타날 수 있는 곳이다.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을 크게 느끼며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평소라면 절대 소화하지 못할 옷에 도전할 수도 있고 충동적인 행동도 과감히 해 볼 수가 있다.
오래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도시로 왔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그런 익명성이주는 자유로움이었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나를 보이고 그것을 토대로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새롭고도 꽤 신나는 모험이었다. 무수히 잠자고 있었던 내 안의 이브들을 깨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평상시와 다르게 보이고 싶어 했던 내면에는 우유부단하고 소심했던 자신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었다. 나를 벗어나고 싶고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꿈꾸다 이브 화이트와 이브 블랙을 잠재우며 드러난 제인을 주목하게 되었다. 순종과 반항, 절제와 방탕, 배려와 이기심을 조화롭게 아울러가는 우아한 여인을 말이다.
내 안에 살고 있는 다양한 모습의 이브들을 본다. 가끔은 튀어나오고 싶어하는 인격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잘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 다양성들이 나의 한 파편들임을 인정하고 잘 아우를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로는 비겁하게 세상과 타협하는 나를 나무라기도 하고 때로는 대담한 나를 타이르기도 하면서 제인처럼 우아하고 현명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 영화처럼 완전한 해피엔딩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소란스럽고 조금은 어설픈 나의 다양성을 사랑하면서 말이다.
/전영숙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