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매년 반복되는 봄철 산불, 경각심 높여야

지난 주말 전국 30여 군데서 산불이 동시다발로 발생하면서 국가에 비상이 걸렸다. 산림청은 22일 영남, 충청, 호남지역의 산불재난 국가위기 경보를 심각단계로 상향 발령했다. 행안부도 범정부 차원의 산불 총력 대응을 위해 울산과 경북도, 경남도에 재난사태를 선포했다. 22일 오전 11시 24분쯤 경북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야산 정상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성묘객이 묘지를 정리하던 중 불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이 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동쪽으로 8㎞가량 떨어진 의성읍 방향까지 번졌다. 진화대와 진화장비 100여 대를 투입했지만 다음날 오전까지 불길을 잡지 못했다. 의성읍 철파리와 신월리 주민 400여 명이 의성실내체육관으로 대피했다. 산불로 안동-경주 구간 열차 운행이 일시 중단됐고, 고속도로 서의성 IC-안동분기점 등 2곳이 한때 전면 차단됐다. 또 23일 오전 경북 경산시 남천면 산천리에서도 산불이 발생했다. 이보다 앞서 경남 산청에서는 이틀간 이어진 대형 산불로 진화에 나섰던 창녕군 소속 진화대원 4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숨진 진화대원들은 산불을 진화하러 갔다가 역풍으로 고립돼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봄철 산불은 연간 발생 건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반복되는 재해다. 당국의 예방 노력에도 피해가 줄지 않는 것은 기후변화 탓도 있으나 주민과 입산자의 부주의가 주된 이유다. 경북도내 최근 10년간 발생한 산불은 연평균 22.4건으로 화재 발생별 원인은 밭두렁 태우기 같은 소각이나 입산자 실화 등 사소한 부주의가 대부분이다. 주말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도 성묘객의 부주의가 원인으로 전해진다. 3∼4월이 되면 날씨가 풀려 등산과 농사일 등으로 야외활동이 많아지는 시기다. 특히 연중 산불 발생 우려가 가장 큰 청명과 한식을 앞두고 있어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할 때다. 산불은 한번 나면 진화도 어렵고 대형으로 이어지기 십상이어서 피해도 크다. 막대한 산림 면적을 불태워 국가가 부담할 비용도 많다. 쓰레기 소각 금지 등 산불예방 수칙을 잘 숙지하는 국민적 계몽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5-03-23

정치권력 뒤흔들 ‘운명의 일주일’ 시작됐다

여야 정치권의 운명을 가를 격랑의 일주일을 맞았다. 24일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 심판이 선고되고, 26일은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 선고가 예정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도 금요일인 28일 선고될 가능성이 있다. 사법부의 판단에 따라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이 바뀌는 메가톤급 파장이 예상된다. 관심의 초점은 24일 헌법재판소의 한 총리 탄핵 판결이 윤 대통령 선고에 미치는 영향이다. 한 총리의 주요 탄핵사유가 비상계엄 선포를 묵인하거나 방조했다는 것이니만큼, 이에 대한 헌재의 심판을 분석해 보면 윤 대통령 사건에 대한 헌재판단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윤 대통령 측이 탄핵심판의 기각 사유로 드는 ‘수사기관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 채택 문제’나, ‘내란죄 주장 철회 논란’ 등에 대한 헌재 판단도 이날 한 총리 선고를 통해 나올 가능성이 있다. 한 총리에 대한 탄핵 기각 결정이 나오면 윤 대통령 탄핵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헌재가 정치적인 부담없이 윤 대통령 탄핵 인용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권에서 헌재의 정치적 편향성을 문제 삼았지만, 한 총리 탄핵을 기각시킬 경우 일종의 정치적 균형을 맞췄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줄 수 있다. 헌재가 윤 대통령 선고기일을 늦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 야권에서는 한 총리 탄핵 기각이 오히려 좋은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이 있다. 여야는 지난 주말에도 장외여론전으로 세 대결을 펼쳤다. 여당 의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열린 ‘탄핵 기각·각하’ 집회에 참석했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야당 지도부는 서울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고 윤 대통령 탄핵 인용을 촉구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이날 방탄조끼를 입고 집회에 나왔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좌우 진영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정치지형을 뒤흔들 이번 한 주가 향후 국정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걱정된다.

2025-03-23

김민희와 홍상수, 그리고 그들의 아이

김세라 변호사 25여 년 전 필자는 쎄씨, 키키 같은 하이틴 패션 잡지를 즐겨 보던 여고생이었다. 어느 날 잡지에 서 하굣길에 길거리 캐스팅 된 매력적인 고등학생 모델을 보게 되었고,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서울에서의 생활과 그녀의 매력에 대한 동경을 담아 팬레터를 보냈는데, 놀랍게도 답장을 받았다. 귀여운 글씨체의 손편지엔 네가 먹어보고 싶다던 계란빵은 서울에서는 홍대에 놀러갔을 때 먹어보니 꽤 맛있었다는 이야기와 남자친구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모델은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바로 배우 김민희 씨다. 지금은 홍상수 감독과의 관계로 인해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필자는 여전히 그의 팬으로 남아 있다. 배우로서의 그녀의 재능뿐만 아니라, 한때나마 직접 소통할 수 있었던 첫 연예인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7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가 경쟁 부문에 진출해 화제가 됐지만 더 화제가 된 것은 홍 감독의 옆에 있던 임신한 김민희였다. 홍 감독의 아이를 임신한 김민희는 지금은 만삭으로 올봄 출산 예정이라고 한다.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 씨의 관계는 약 9년 동안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불륜으로 간주된다. 홍 감독에게는 배우자가 따로 있으며, 그는 2019년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우리나라 법원이 재판 이혼 시 유책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책주의는 배우자가 부정한 행위를 하거나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만 이혼 청구가 가능하며, 이러한 사유가 있더라도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원칙적으로 이혼 청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상대방 배우자가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거나 혼인 파탄의 유책성이 크지 않은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유책 배우자도 이혼 청구가 가능하다. 하지만 홍 감독의 아내는 이 예외 사유에 해당하지 않아 법원은 그의 이혼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9년간 동거하며 아이까지 갖게 된 지금 사실혼 관계는 인정될 수 없을까? 혼인생활의 실체를 갖추었더라도 중혼적 사실혼은 사실혼이 아니다. 법률상 배우자가 따로 있다면 부부 공동생활의 외관을 갖추었다 해도 사실혼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김민희 커플은 사실혼 부부도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 둘 사이에서 곧 아이가 태어난다. 부모의 관계가 법적 보호 밖에 있는 것과 다르게 이 아이의 경우는 홍 감독의 친자로서 법적 보호를 받는데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혼외자로 태어나겠지만 생부와의 인지 절차를 밟으면 친자 관계로 전환된다. 아이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면 모는 김민희, 부는 홍상수로 나올 것이다. 자녀로서 홍 감독 재산 상속도 받는다. 우리 법은 법률상 배우자가 있는 이상 그 밖에 있는 남녀 관계를 혼인제도라는 울타리로 보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불륜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권리는 외면하지 않는다. 김민희는 홍상수의 아내가 아니지만 태어날 아이는 홍 감독을 아빠라고 부르며 살 수 있다. 어른들이 문제지 아이에겐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말이다.

2025-03-20

오늘 의대생 복귀 여부가 ‘의정갈등’ 분수령

정부와 대학, 의과대학 학생들이 학교 복귀를 두고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어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우리 의료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질까 우려된다. 의과대학이 있는 전국 40개 대학 총장들은 지난 19일 영상간담회를 통해 의대생들의 휴학계를 즉시 반려하고, 유급이나 제적 등의 사유가 발생하면 학칙대로 엄격히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현재 대부분 의대는 개학했지만 학생들이 집단휴학계를 제출해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구권 4개대(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대구가톨릭대)를 비롯한 대부분 대학은 전체 학사일정의 4분의 1가량 되는 시점까지 복학신청이나 등록하지 않을 경우 유급·제적하도록 학칙으로 정하고 있어, 해당 시점까지 돌아오지 않는 학생에 대한 처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경북대와 고려대, 연세대는 21일을 등록 시한으로 정했으며, 영남대·계명대·대구가톨릭대는 구체적인 날짜를 못 박진 않았다. 40개 대학 총장들이 마지노선으로 정한 최종시한은 오는 28일이다. 허영우 경북대 총장은 지난 13일 이미 의대생들에게 보낸 가정통신문에서 “휴학 기간이 종료된 사람은 21일까지 복학 신청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의대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다. 다음주까지 학교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대규모 유급·제적이 불가피하게 됐다. 현재 대부분 의대생의 반응은 여전히 복귀에 회의적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의실로 돌아가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대학 측 조치에 대해서는 “학칙상 적법한 휴학계 제출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대교육 정상화 문제는 일부 대학이 의대생 복귀시한으로 정한 오늘이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 학생들이 많이 복귀할 경우, 타 대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의대증원 정책을 충분한 숙의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은 잘못이지만, 한발 물러서서 ‘2026학년 증원 제로’를 약속한 만큼 학생들도 의료교육 정상화를 위해 하루빨리 강의실로 돌아오길 바란다.

2025-03-20

軍 후적지 개발, 대구 미래100년 발전 토대로

대구시가 군부대 이전을 확정한 가운데 후적지 개발 청사진을 공개했다. 청사진을 공개한 정장수 경제부시장은 “후적지는 첨단산업과 의료, 교육, 국제금융 등 고부가가치 미래산업을 중심으로 개발하고 대구 미래발전을 견인할 목적으로 계획이 수립됐다”고 밝혔다. 제2작전사령부가 위치한 만촌동 후적지는 경북대병원과 경북대의과대학, 간호대학, 의료분야 기술연구소 등이 들어서는 종합의료클러스터로 조성하고 정부의 재정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또 제5군수지원사령부는 국제금융도시, 방공포병학교와 제1미사일여단 후적지는 국제수준의 교육 중심지로, 50보병사단 후적지는 대구·경북 신공항과 연계한 첨단산업단지로 조성한다는 것이 골자다. 대구 군부대 이전사업은 지자체와 군이 협력해 지역발전과 국방력 강화를 함께 도모하는 새로운 방식의 민군 상생사업이다. 대구의 군부대 이전은 5개 군부대가 한꺼번에 이전하기에 후적지 규모가 상당하다. 그동안 군부대가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아 도심개발에 장애를 주거나 지역 간 불균형 발전 초래 등의 문제가 있었다. 2030년까지 군부대 이전이 되면 이런 문제들은 모두 해소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후적지 개발 내용과 효과다. 대구는 미래신산업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는 한편 신공항 건설, 군부대 이전 등 굵직한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대구 역사 이래 가장 큰 대구 대개조 사업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구시민이 군부대 후적지 개발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런 사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군부대 후적지 개발은 대구 미래를 바라본 빈틈없는 계획과 준비로 짜여져야 한다. 시 계획대로 군부대 후적지가 개발되면 지역경제는 획기적으로 발전할 전기를 맞는다. 수조원 경제유발 효과와 고용창출 등이 일어나고 침체된 대구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홍준표 시장 공약대로 대구가 굴기하는 시대가 온다. 군부대 후적지 개발은 이전 규모가 큰 만큼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대구시와 정치권 등 지역의 지도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2025-03-20

치매사회

우정구 논설위원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행되면서 치매란 질병이 우리사회의 최대 고민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질병 관리에 대한 국가적 비용도 적지 않으나 치매환자의 가족이 부담하는 비용도 큰 짐이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의하면 치매환자 가족 10명 중 4명이 돌봄과정에서 부담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지금은 치매환자가 병원이나 요양원 등에서 치료를 받지만 그것이 환자를 위한 최상의 치료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치매환자 관리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사례를 보면 치매환자 치료에 대한 선진적 요법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네덜란드 호그백 치매마을은 환자들이 마을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치료진은 가운을 입지 않고 동네마트 점원이거나 지나가는 주민 역할을 한다. 환자들은 가능하면 치매 이전의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도록 모든 것을 설계했다고 한다. 호그백 마을은 “환자가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에만 머무르면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며 “치매환자도 일반인처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호그백 마을의 목적”이라 설명한다. 요양원에서 의학적인 치료에 집중하는 것보다 환자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복지 예산이 많은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치매 후 황폐해진 삶을 돌보는 치유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도 자성할 부분이 있다. 내년이면 우리나라는 치매환자 100만명 시대를 맞는다. 65세 이상 노인 10병 중 1명 꼴이다. 암보다 더 무섭고 두려움의 병으로만 여기지말고 호그백마을처럼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치유법을 강구해야 할때가 됐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20

설중매(雪中梅) 피어나듯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춘분(春分)을 이틀 앞둔 18일, 전국 대부분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졌었고 3월 중순의 늦은 폭설로 수도권과 강원 및 중서부 지방은 온통 백설로 뒤덮혀 대형 교통사고도 이어졌다. 이는 북극발 영하 40도의 소용돌이 제트기류가 몰려온 기상 이변으로 남해고속도로 42중 추돌사고를 비롯해 영동고속도로 8중 추돌사고 등 꽃샘추위 속에 출퇴근 길이 어려웠었다. 포항 경주 지역에도 대설주의보가 내려져, 빙판길 주의하며 차량을 서행 운전할 것과 도로 결빙으로 미끄러짐 주의 등 안전안내문자가 날아온다. 울릉도에는 대설경보가 내려져 적설량 36.5㎝로 최고기록을 보였고 크루즈 여행객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주말부터는 다시 평균기온을 회복하여 최고 기온이 15도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어저께 첫눈을 맞았다. 외출하려고 무심코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니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라 신기해서 손바닥에 받아보았는데 차가움보다 가벼운 감각이 봄을 느끼게 하는 듯 같았다. 앞 화단의 목련꽃 봉오리에도 매화꽃 잎새에도 내리고 있었지만 설중매(雪中梅)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곧 녹아버려 서운했다. 휴대폰에는 지인으로부터 보내오는 설중매 사진이랑 얽힌 얘기들이 쌓인다. 설중매는 굳건한 의지와 고결한 품격을 상징하며 옛 시인과 묵객들은 그 절개와 인내를 시와 그림으로 많이 남겼는데 상촌 신흠(象村 申欽)의 싯귀가 생각난다.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즉, ‘매화는 한평생 추운 겨울에 피어나지만 그 향기를 팔지않는다’는 뜻이다. 시골집 능수매화가 지난주 꽃봉오리를 맺었는데 이번 눈에 설중매가 되었는지, 또 오래전 봄날 통도사에서 보았던 빨간 자장매(慈藏梅)도 하얀 눈송이를 덮어썼을까? 춘분 지나 밤보다 낮이 길어지고 땅 온도가 오르면 봄이 완연해질 텐데, 1주일 전, 전남 영암과 무안에서는 뜬금없는 구제역이 발생하여 축산농가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고 화순에서는 조류인플루엔자도 발견되어 당국에서는 방역에 최선을 다짐하고 있다. 우리 정치판은 아직도 탄핵정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탄핵 될지 각하·기각될지 심판지연에 따른 여·야의 공방 속에 국민들은 봄 같지 않은 봄을 맞는 기분이리라. 윤 정부 들어 발의한 29번의 탄핵소추로 인한 정치 불안정의 파장은 국제적으로 퍼져나가며 미국은 우리나라를 민감국가(sensitive country)로 정할 것이라는 말도 떠도는데 만일 다음 달 15일 확정된다면 외교적 신뢰 저하는 물론 국가 이미지 추락이라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 민감국가는 1954년에 도입된 이후,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등 전 세계의 25개국에 낙인을 찍고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는 외교 문제가 아니고 과학기술관점에서 방첩, 첩보 등 에너지 보안이 허술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 모양이다. 따뜻한 봄은 곧 온다. 이제 하얀 눈에 덮인 설중매처럼 굳건한 의지로 국제 신뢰를 쌓고, 고결한 품격으로 국내 분열을 가다듬어 새로운 나라의 봄날을 맞도록 하자.

2025-03-20

어처구니가 없다

노병철수필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절이나 궁궐 같은 곳을 다니다 보면 지붕 위에 동물들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본다. 내 전공도 아니라 잘 모른다. 하지만 절 설명만 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간혹 절에도 보이기도 해 갑자기 질문할까 싶어 책을 통해 대충 외워두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해 생기면 신망을 잃기에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얼굴을 보니 낯이 익지 않은 것을 보아 새로 온 보살이다. 대부분 절에 다니는 노보살은 바로 잊어버리는 터라 칠정례 같은 것은 수십 번 설명해도 “그게 뭔데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아침 예불 때 일곱 번 절하는 것을 칠정례라고 한다. 송광사같이 여덟 번 절하면 팔정례이고, 동화사같이 아홉 번 절하면 구정례이다. 그런데 이것을 잘 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불자 한 분 왔다 싶어 기분이 좋았다. “범종은 새벽에 33번 저녁에 28번 칩니다.” “아닌데요. 아침저녁 전부 33번 칩니다. 바뀌었습니다.” 새로 온 보살이 치고 들어온다. 갑자기 당황스럽다. 내가 나이를 먹어 세상 바뀌는 것도 몰라 가장 기초적인 것도 몰랐다 싶어 바로 사과했다. 내가 몰랐다고. 집에 와서 왜 바뀌었는지 뒤졌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조계사에 스님에게 전화했다. 스님조차 뜬금없는 나의 말에 당황한다. 알아보고 전화해 주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는다. 이내 전화 와서는 그런 일 없단다. 확실하냐고 몇 번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다음 순례 때 바뀌지 않았다고 이야기해 주려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 후, 볼 수 없었다. 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을 절에 가면 많이 본다. 이걸 전문용어로 서수상(瑞獸像)이라고 한다. 서수상을 설명하면서 지붕 위에 있는 토우상에 대한 설명을 같이해 주었다. 저것을 잡상(雜像)이라고도 하고 ‘어처구니’라고도 한다고 설을 풀었다. 그러자 설명을 듣던 보살 한분이 어처구니가 아니란다. 맷돌을 돌리는 나무막대로 된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도 하고 이것도 어처구니라고 한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런데 맷돌 손잡이조차 어처구니가 아니란다. 어처구니는 뜻밖이거나 기가 막힐 때 하는 말인데 손잡이가 없으면 맷돌을 못 돌리지 않느냐 그래서 “어처구니없다”라는 말이 생겼다. 그리고 당 태종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귀신을 쫓기 위해 병사 모양의 어처구니 조각물을 지붕 위에 올린 데서 유래한 것으로, 기와장이들이 궁궐을 지을 때 어처구니를 깜박 잊고 올리지 않은 데서 비롯된 말이라는 설명도 했다. 난 분명 확신이 있었다. 집에 와서 나의 확신을 재점검해 볼 요량으로 뒤졌다. “‘어처구니’를 ‘추녀 끝에 올라가는 잡상’이나 ‘맷돌의 손잡이’로 볼 수 있는지는 문헌으로 검증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 점에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점 양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에서 이런 말을 내놓았다. 그럼, 우리가 여태 알고 있던 ‘어처구니’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기가 막힌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민망할 정도로 퍼부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 그녀를 보면 정중히 사과할 요량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 후, 볼 수 없었다.

2025-03-20

사교육 공화국

장규열 고문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지식전달을 넘어, 나라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한다.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년 초중고 사교육비가 29조원에 이르며 한 해 7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학생수는 8만명이나 줄었는데 사교육비는 팽창일로다. 교육이 경쟁수단으로 변질되어 학생과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저출산의 까닭이기도 하다.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과 공동체의 와해를 부른다. 대학입시 중심의 경쟁시스템, 공교육에 대한 신뢰저하, 학벌주의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일부 엘리트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교육을 활용하며, 교육이 사회적 계층을 고착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지불하는 고액의 사교육비는 가계에 큰 부담이다. 사교육을 받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며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공교육의 위기는 어디서 왔을까. 교사들이 과중한 행정업무와 학습지도 밖의 업무에 시달리면서 교육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은 창의적 사고와 인격형성을 위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아니라 주입식교육과 입시경쟁에 내몰린다. 교육의 본질적 가치가 지속적으로 훼손되고 있다. 교육이 무너지면서 공동체 정신이 스러진다. 이전에는 마을과 학교가 함께 학생을 돌보며 교육을 책임지는 구조였다면, 지금은 각 가정이 각자도생으로 교육문제를 해결한다. 엘리트교육을 받은 일부 계층은 사회적 책임보다 개인의 성공을 최우선시한다. 사회적 연대감을 약화시키고 공동체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사회계층 간 갈등을 초래하고 공동체 내 양극화를 부추긴다. 문제해결을 위해 교육에 공공선(public good)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교육이 개인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공존을 위한 필수요소임을 분명히 해야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교육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 교사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창의적 교육 방식이 자리 잡도록 지원해야 한다. 주입암기식 학습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와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도록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려면 공교육 내 보충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방과후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고 교육 수준별 학습지원을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경제적 형편과 관계없이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받도록 공교육 지원체계를 확대해야 한다. 교육이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도록 공동체 중심의 교육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지역사회가 학교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학교가 지역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도록 재편해야 한다. 다양한 사회계층이 가진 교육적 자원을 학교공동체와 공유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사교육 팽창과 공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가치관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문제다. 교육이 경쟁이 아니라 공존과 연대의 수단이 되도록, 공공선을 중심에 두는 교육정책이 서야한다. 교육이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위한 공공재로 기능하도록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5-03-19

동아시아 문화도시 안동, 이젠 세계 무대로

안동시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2026년 동아시아문화도시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뒀다. 동아시아문화도시 사업은 한중일 3개국이 각 나라의 독창적인 지역문화를 보유한 도시를 선정해 상호간 다양한 문화교류를 벌이는 사업이다. 2014년부터 매년 실시하고 있다. 올 하반기 중국에서 열리는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안동은 2026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포된다. 안동시는 ‘평안이 머무는 곳, 마음이 쉬어가는 안동’이란 슬로건으로 내년도 문화도시 행사를 준비할 예정이다. 안동이 가진 유교정신문화와 도덕적 가치를 한국의 정신으로 해외에 알리고, 한국의 문화유산을 통해서는 도시간의 문화적 이해와 교류 폭을 넓힌다는 구상이다. 안동은 독특하게 한국정신문화수도라는 브랜드를 가진 고장이다. 안동을 보면 한국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가장 한국적 문화가 잘 보존된 도시다. 또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하여 우리정부가 심사숙고하여 권한 지역이다. 정신문화적 면에서 안동은 지금도 전국에서 유교적 정신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을 이르는 추로지향이란 별명이 붙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병산서원과 퇴계 이황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도산서원을 당시 모습으로 구경할 수 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하회마을도 볼만하다. 불교문화도 곳곳에 산재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봉정사가 대표적이다. 문화유산, 무형문화유산, 기록유산 등 전국 최초로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고장이다. 각 시대별 역사와 고유문화가 잘 간직돼 한국문화를 알리는데는 안동만한 곳도 잘 없다. 한중일 2026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된 배경도 이런 풍부한 문화 인프라 덕분이다. 안동은 국제하회탈춤페스티벌 등으로 이제는 국제적 명성도 제법 쌓였다. 하지만 글로벌 문화관광도시가 되기 위해선 더 많은 국제교류가 필요하다. 이번 동아시아문화도시 선정은 이런 측면에서 세계무대로 나설 또 한번의 호기라 할 수 있다.

2025-03-19

배신자 프레임 갇힌 韓·劉, 여당의 자산이다

여당 강성지지층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힌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의원이 18일 대구를 찾았다. 대학 강연차 왔지만, 조기대선 가능성을 염두에 둔 행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이 임박한 예민한 시기에 두 사람이 보수안방인 TK(대구·경북) 지역을 찾은 것은, 정치적 장애물인 ‘배신자 프레임’을 정면으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이날 두 사람에게 집중된 기자들의 질문내용도 배신자 프레임이었다. 한 전 대표는 경북대에서 열린 청년토크쇼에 참석하기 전 기자들과 만나, 윤 대통령 탄핵소추 과정에서 형성된 배신자 프레임과 관련해 “12월 3일 밤 10시 30분부터 하루가 넘어가는 과정에서 제 생각은 굉장히 단순했다. 국민과 국가를 생각했다. 이걸 막지 못하면 대한민국이 후퇴할 것이고,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다”며 비상계엄 반대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날 경북대 강연에서는 신청자가 쇄도한 반면, 한 전 대표를 ‘배신자’로 몰아세우는 반대집회도 같이 열렸다. 한 전 대표에 대한 TK민심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유 전 의원은 이날 영남대 강연 전 국민의힘 대구시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오해를 풀고 지나간 것을 풀고 싶은 마음이 오래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 회고록을 꼼꼼히 읽어봤는데, 유독 저에 대해 오해도 많고 서운한 감정이 있구나 라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 이런저런 채널을 통해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한 전 대표나 유 전 의원 모두 국민의힘으로선 소중한 자산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일부 보수세력의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현직 대통령의 일방적인 통치행위에 대해 여당 지도부로서 견제를 해온 정치인들이다. 쉽지 않는 일이다. 윤 대통령 탄핵정국 속에서 살벌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두 동강 난 국가를 통합하고, 차기 대선에서 ‘보수 대통령’을 당선시키려면 여당에서는 중도외연 확장이 가능한 이러한 정치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2025-03-19

AI, 어떤 직업을 사라지게 만들까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10~20년 전. 스티븐 스필버그와 리들리 스콧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AI(인공 지능) 관련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에이, 저게 말이 되나. 감독의 상상력이 과도하군.’ 그런데 그게 말이 되는 세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도래했다. 인간만이 가졌다 믿었던 학습, 추리, 논증 따위의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이 생활 곳곳으로 이미 파고든 것. 세계는 자연 언어의 이해, 음성 번역, 로봇 공학, 인공 시각, 지식 획득, 인지 과학 등에 AI를 활용 중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형국이다. 인간을 대신하는 시스템의 개발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게 된다. 최근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가 낸 보고서는 ‘3년 이내에 산업 현장에서 서비스·물류·인사관리 영역은 AI가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세계 각국 기업 관계자 1400명에게 물어 대답을 받은 결과다. 대규모 해고 사태도 예언됐다. 응답자의 15%가 “서비스 직종 분야에 향후 3년 사이 총원의 20%를 초과하는 대규모 감원이 있을 것”이라 답했으니. 편리를 위해 개발된 컴퓨터 시스템이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서고 있는 듯하다. 세상의 변화는 이처럼 숨 가쁘고 예측을 불허한다. 좋건 싫건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더 큰 문제다. 상상력과 창의력 분야에선 아직 AI의 역할이 미미하지만, 그것도 앞으로는 알 수 없는 일. 터무니없어 보이던 영화가 명명백백한 현실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AI 발달의 미래는 누구도 함부로 예상하기 어렵게 됐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19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정미영 수필가 어둠을 가르며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소리의 서막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압지처럼 사이렌 소리가 빌딩숲 주변을 맴돌던 소음을 흡수해 버린다. 도시는 순식간에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는 곳과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나뉜다. 거리를 휘적휘적 헤쳐 나오는 사이렌 소리를 눈으로 살핀다. 마치 소리를 ‘보는 것’처럼 차창에 바싹 얼굴을 갖다 대기도 하고, 백미러로 후방을 주시하다가, 급히 달려오는 119 구급차를 발견한다. 나는 이런 경우에 갖게 되는 당혹감이 아니라 신중함을 가지고, 최대한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동차를 한편으로 옮긴다. 다행이다. 이 순간만큼은 운전자들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떨쳐버리고 이타심을 발현한다. 서둘러 구급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준 다음,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다들 제 갈 길로 간다.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환자에게 쏠린다. 얼마나 위중한 상태일까, 환자는 의식이 있을까, 사위스러움이 내 머릿속을 온통 부유한다. 몇 년 전, 스무 살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 군에 입대했다. 선발 시험에 통과해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앙소방학교에 입교했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시험을 치고 땀 흘리며 노력한 끝에 얻게 된 제복이라 그런지, 아들의 모습이 늠름하고 대견스러웠다. 강도 높은 교육을 마치고 무사히 수료식을 거쳐 소방서에 배치되었다. 아들이 소방서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그러자 내 온몸의 세포가 두 귀에 집중되어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소방차나 구급차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나의 신경줄이 팽팽해지며 아들에 대한 걱정이 배가되었다. 혹시나 아들도 화재 현장이나 산악 구조 현장에 출동을 나가지는 않았는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사명감과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무사안일과 안전을 기원했다. 그렇게 소리는 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는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기도 했다. 휴가를 나온 아들이 소방 공무원들과 동행해 산불 현장에 갔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즈음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내 눈앞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만 같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또한 아들이 구급차를 타고 나갔다고 하면 죽음의 그늘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역 특성상 노인들이 많이 계셔서 사고사보다는 심정지를 당하시는 분들이 많단다. 119에 접수된 응급환자의 심정지, 노인의 마지막 숨결을 손에 쥐며 슬픔에 잠겼을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인 나는 아들이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일상으로 접한다고 하니 가량없이 애가 탔다. 아들은 처음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들이 마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같아서,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자신의 마음이 변하자, 임종을 대하는 태도에도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하는 사람’만큼은 진짜 주체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타인이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서의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의 본질을 찾는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소방관의 삶은 끝없는 도전과 위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은 사이렌 소리가 전하는 희망과 함께 사람들에게 안전을 선사한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고난과 시련을 마주했을 때 현명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구급차는 병이 위중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라도, 살릴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사이렌을 울리며 최선을 다해 달린다. 소리에도 ‘경중’의 미덕이 있다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사이렌 소리는 밀도가 높은 진중함으로 구현되는 것이리라.

2025-03-19

지역언론인 혹은 문화적 정신적 개화기를 꿈꾸며

서울 갈 때, 터미널에서 한겨레신문을 구해 읽기가 쉽지 않아 잠시 당황스러웠을 때, 그래도 그 신문 지사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칭 지역언론인 후배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문화의 확장과 의식의 팽창은 작은 일에서부터, 사소한 일에서부터 챙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풀뿌리 노동운동도 했고 민주학교도 꾸려 마음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 뿌려진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 꽃피는 날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엎어지고 자빠져도 우리는 어깨동무 합니다. 글은 죽지 않습니다. 그것을 나르는 일도, 그 새벽의 의미만큼 청명할 것입니다. 가끔 지역적 한계에, 그것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부닥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벽에는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문을 두드리며 사람의 개벽을 기다립니다. 모두가 동참할 것입니다. 신문배달이라고 하자. 지국장이자 배달원이었던 후배는 여전히 그 직업을 사랑한다. 절망적인 판매부수에도 신문에서 손을 놓은 법이 없다. 새벽에 맡는 잉크 냄새는 뱃속의 기생충을 박멸할 정도로 자극적인 향기였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19

시험 치는 날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주인공은 영화감독 데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쓴다면서도 잠만 잔다. 낮 12시가 넘어 일어나서 밥을 차려 먹은 후에도 노트북에 다가가기가 힘들다. 평소 잘하지 않던 방청소를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히 청소하고 하릴없이 선풍기를 분해해서 깨끗이 닦는다. 더 이상 할 일이 눈에 띄지 않으면 그제서야 노트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켜고도 글자 폰트만 매만지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낮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밤이면 친구들과 술자리. 그러기를 며칠째 반복하고 나서야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극한직업’의 영화감독 이병헌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의 첫 부분이다. 어쩜 나랑 저리도 똑같을까 공감하면서 피식 웃었다. 논문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하는 습관이 있었다. 평소 어질러진 연구실을 대청소하는 일이다. 책장에 마구 꽂힌 책들을 장르별로 가지런히 챙긴다. 누워있는 책들도 일으켜 세운 후 물걸레로 책장의 먼지를 깨끗이 닦는다. 심지어 책상의 방향을 다시 바꿀 때도 있다. 넓지도 않은 연구실에서 그것은 거의 대공사에 가깝지만 강행한다. 창문 쪽으로 놓인 책상을 입구 쪽으로 틀어 돌려놓거나, 혹은 좌우를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낑낑대며 책상을 옮기고 나면 컴퓨터며 프린터 등의 부속품들도 자리를 바꾸게 되고 전선을 뺐다 꽂는 등 꽤나 작업시간이 걸린다. 책장 가까이 한 켠으로 배치되었던 소파의 위치도 연구실 가운데로 옮겨 보는 등 지치지 않고 일을 키우고 벌인다. 바닥 청소까지 멀끔하게 하고 난 후 재정리된 연구실을 휙 둘러보면서 잠시 만족감을 느낀다. 아차 할 일이 있었지 그제야 깨닫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켠다. 더 이상 피할 데가 없다. 이제부터 논문을 쓰자며 또 밤샘이다. 자주 이런 일을 벌이니 영리한 조교는 잘도 알아챈다. 교수님 논문 쓰셔야 되죠? 작년 11월부터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위해 인터넷 수강을 한다. 매주 8과목씩 15주를 듣는다. 수강하기만도 벅찬데 쪽지시험과 과제 제출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두 번의 시험이 가장 큰 스트레스다. 욕심 내지 말고 설렁설렁해서 80% 정도 성적이면 된다며 마음먹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비록 오픈북 형식이지만 시험은 시험이다. 시험일이 다가오자 긴장되고, 들었던 강의를 다시 들으며 시험공부라는 걸 하게 된다. 시험일이 닥치자 예전의 습관이 도졌다. 시험 친다고 컴퓨터를 켜 놓고는 책상 주변을 청소한다. 둘러보니 책장 정리가 필요하다. 이 방 저 방 흩어져 함부로 섞여있는 책들을 옮긴다. 내 책과 남편 책, 손주들의 책들이 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주방으로 가 그릇장을 활짝 열어젖혀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가 두 손 걷어붙이고 모두 꺼내 일을 벌인다. 화장실 바닥을 박박 문지른 후 대대적으로 물청소를 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까지 하고 나서야 젖은 손을 털면서 컴퓨터로 돌아온다. 아침에 켜 둔 컴퓨터 모니터엔 ‘장시간 사용하지 않아서 로그아웃되었습니다.’라는 사인이 떠 있다. 깊은 밤이다. 밤을 꼬박 새워 시험을 치고 나니 새벽 창밖이 푸르다. 예전 연구실의 창밖 풍경과 어쩜 저리도 똑같을까.

2025-03-19

소화불량과 체기의 예방과 치료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현대 사회에서 잘 체하고 소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단순한 식습관의 문제와 더불어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깨진 경우가 많다. 특히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작용은 소화 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서로 반대되는 작용을 한다. 교감신경은 긴장 상태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활성화되며 위장관 운동을 억제하고 위산 분비를 줄인다. 즉 소화 기능이 저하되면서 음식물이 위에 오래 머무르게 되어 속이 더부룩하고 체하는 증상이 발생한다. 부교감신경은 휴식과 소화에 관여하며 위장관 운동을 촉진하고 소화 효소 분비를 증가시킨다. 부교감신경이 원활하게 작용해야 소화 과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 습관으로 인해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되거나 부교감신경이 저하되면 소화 불량과 체기가 반복될 수 있다. 과식이나 야식,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 섭취 역시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깨뜨려 위장 기능을 더욱 저하시킨다. 한의학에서는 소화기 기능을 강화하고 자율신경계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침 치료와 한약 처방을 활용한다. 침 치료에서는 중완혈을 자극해 위의 기능을 조절하고 더부룩함을 해소하며 족삼리혈을 이용하여 위장의 기운을 보강하고 소화기계의 전반적인 기능을 향상시킨다. 내관혈은 교감신경의 과도한 흥분을 억제하고 위장 운동을 돕는다. 이러한 경혈에 침을 놓으면 자율신경계가 조절되면서 위장의 운동성이 회복되고 소화력이 향상된다. 최근엔 초음파를 활용해 등과 목에 있는 자율신경에 직접 약침을 놓아서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자율신경을 조절 하면 자연스레 위장기능이 돌아온다. 한약 처방으로는 위장의 습기를 제거하고 소화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약재와 위장의 기운을 북돋우고 소화력을 증진시키는 한약재 그리고 교감신경을 내리고 가슴에 울체된 화를 풀어 주는 약재들을 조합해서 처방을 하면 효과적이다. 이렇게 처방을 하면 자율신경이 조절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위장이 튼튼해지기 때문에 좀 더 입체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식이요법을 함께 병행하면 좋은데 따뜻한 성질의 음식을 섭취하고 찬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은 줄이는 것이 좋다. 소화 기능이 약한 사람들은 식사를 급하게 하지 않고 천천히 씹어 입에서 죽을 만들어 먹는 것이 중요하며 소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약 처방은 개인의 체질과 증상에 맞추어 적용되며 위장의 기능을 강화하고 소화 불량을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소화 불량과 체함은 단순한 위장 문제로 보기보다 자율신경계의 불균형과 관련하여 접근할 때 더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있다. 자율신경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침 치료와 한약 처방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규칙적인 식습관과 충분한 휴식을 통해 자율신경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벼운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명상이나 요가 같은 심신 안정법을 활용하면 자율신경 조절에 효과적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방치료와 함께 생활 습관을 개선하고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치료와 예방의 핵심이 될 것이다.

2025-03-19

일본에 남은 ‘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위한 기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 주인공은 바로 올해 1월 5일에 별세한 재일 한인 이회성 작가입니다. 이회성은 1935년 남과 북에 고향을 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3남으로 사할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947년 일본으로 이주하여 오무라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홋카이도의 삿포로시에 정착했는데요. 삿포로고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였고, 대학교 시절에야 본명 ‘이회성’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회성의 작품으로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다듬이질하는 여인’(1971)도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죽은 자가 남긴 것’(1970)을 가장 좋아하는데요. ‘죽은 자가 남긴 것’은 아버지의 장례를 계기로 민단(한국 정부가 공인한 재일 한국인 단체)에 속했던 큰 형 태식과 총련(북한을 지지하는 재일 조선인 단체)에 속했던 아우 명식이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양분된 재일 한인 사회의 화합과 나아가서는 민족의 통일에 대한 의지까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상가(喪家)에 모인 민단과 총련에 속한 한인들 역시 동식과 태식이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앉아 서로 상대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합니다. 동식은 그 모습에 마음이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한인들의 침묵이 자신과 형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동질의 것이고, 아니, 그보다 더 부풀어 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색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서로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죽은 자가 남긴 것’에서는 민단과 총련으로 나뉘었던 한인들이 친밀하게 되는 과정과 동식과 태식이 화해하는 과정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동식이 진정으로 화해하는 대상은 형 태식보다도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동식이 형인 태식에 대해 갖는 마음은 애증에 가까우며, 이러한 복합 심리의 근원에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식이 형을 좋아했던 이유가 아버지의 난폭함과 봉건적 사고방식에 대해 형이 강력하게 대항했기 때문이라면, 형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서 형이 점점 아버지를 닮아갔기 때문이니까요. 동식은 수많은 재일 한인들이 장례식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가 평생 보여준 폭력과 야만 뒤에는 아버지가 감내해 온 고단한 현실이 있었음을 감지합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낯선 땅에 끌려와 겪은 간난신고와 민족 차별, 해방 이후에도 분단으로 돌아갈 고향마저 잃어버린 상황, 일본에서 재현되는 남북 갈등 등으로 아버지의 인간성은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동식이 아버지의 고통스런 삶을 이해하는 모습은 죽은 아버지의 복사뼈를 만져보는 모습에서 절정에 이르는데요. 이 대목을 읽을 때면,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사뼈를 만지고 싶은 마음에 울컥해지고는 합니다. 오랜만에 ‘죽은 자가 남긴 것’을 다시 꺼내 읽은 저는, 동식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았던 재일 한인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공휴일인 2월 11일(일본 건국기념일)에 도쿄 근처에서 가장 많은 재일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을 찾아가 보았는데요. 가와사키는 도쿄에서 20킬로 정도 떨어진 게이힌 공업지대(京浜工業地帯)의 중심도시로서 1920년대부터 철강, 석유화학 등의 산업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그 결과 1930년대부터 노동을 하던 한인 커뮤니티가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에 형성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은 수많은 재일 한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일본의 대표적 한인 마을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에 도착하자, 오래된 낡은 집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는데요. 오랫동안 이 곳은 무허가 판자촌이었으며, 홍수가 나면 큰 물난리를 겪는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또 당시 일본인들이 먹지 않고 버리던 소와 돼지의 내장(放るもん)을 구워 팔았다는 야키니쿠집이 여기저기 보였는데요. 그 중에서도 1967년 김도례 할머니가 창업하여 손녀사위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쿠라엔이라는 야키니쿠집은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에는 1990년대 말에 재일한인 할머니들의 모임인 ‘도라지회’가 만들어져 큰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도라지회’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평생 고통을 겪은 할머니들이 모여 향수도 달래고 글자도 배우며 여러 가지 전통문화 체험도 하던 뜻깊은 모임이었습니다. 2010년대에는 우경화되는 일본에 맞서 반전·반헤이트스피치 데모 등에 나서 뜨거운 사회적 관심을 받기도 했던 모임입니다. 할머니들의 흔적을 찾아 동분서주한 결과, 여전히 가와사키 한인교회에서 화요일마다 도라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할머니들을 만나게 되길 기대하며 돌아오는 길에, 저는 두 손 모아 ‘죽은 작가 남긴 것’에 나오는 아버지나 ‘도라지회’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를 기도해 보았습니다.

2025-03-18

숨비소리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그의 이야기 속에 갇혀 숨 쉴 틈이 없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주변 이야기들을 쓰나미처럼 쏟아내 나를 덮는다. 내 속은 점점 깊이 잠겨 버린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내가 먼저 건 전화였다. 내 마음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안부를 묻는 가벼운 질문조차 없이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토해냈다. 자신의 아이들 일상을 풀면서 정작 내 아이들의 일상은 묻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의 문제만 존재하는 듯 쉴 새 없이 넘나드는 거친 파도처럼 쉼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참았다.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나는 듣는 사람으로 남았다. 익숙한 일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적절한 순간에 맞장구를 치고, 간혹 짧은 감탄사를 얹으며 존재감을 유지하는 일, 감정을 삼키고 하고 싶은 말도 접어두는 일, 그 소실점에서 묘하게 차분한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심연 속에서 조용히 견디는 느낌이다. 숨을 참고 버티며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끝내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잠깐 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친구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기 너머로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쉰다. 마치 해녀가 물 밖으로 올라오며 내뱉는 숨비소리처럼, 참아낸 숨이 길수록, 내쉬는 숨은 더 깊고 진하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작업한 뒤, 물 밖으로 나올 때 내뱉는 숨소리다. 깊은 바다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려면 숨을 최대한 참아야 하고,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강하게 내쉬는 숨이 바로 숨비소리다. 그것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생존과 인내의 증거이며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나는 지금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깊이 잠길수록 주변은 조용해지고 오직 나의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들린다. 숨을 참고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온몸이 묵직해지지만 나는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물 속에 오래 머물려면 급하게 숨을 쉬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면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살면서 숨을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아이가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감정을 숨기고 숨을 죽이며 아이의 마음을 감쌌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고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주었을 때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숨을 참았던 그 시간이 나와 아이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 시간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김경아 작가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켜야 할 때, 당장 도망치고 싶지만 버텨야 할 때,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기다려야 할 때, 숨을 참는 일은 힘들다. 하지만 그 순간을 이겨낼 때 비로소 물 위로 나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다. 해녀들이 힘겹게 숨을 내쉬며 다시 바다로 향하듯, 나 역시 삶에서 숨을 참고 견디는 과정을 반복하며 바닷속 보물들을 캐 나가는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의외로 물속은 신비롭다.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일수록 고요하지만,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문다. 물속에서 나의 감정들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조급했던 흐린 감정들이 잠잠해지고 내 수면 깊숙이 덮여있던 언어의 조각들을 꺼내어 가만히 듣는다. 오래 참을수록 숨을 내쉴 때의 해방감은 더 크다. 친구가 다 들어주지 않더라도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면 위의 공기는 더욱 달고 청량하다. 다시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숨을 참고 견디고 다시 떠오르기 위해. /작가

2025-03-18

여야의정協 나서서 의대생 복귀 매듭지어라

정부가 내년 의과대학 정원을 증원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겠다고 밝혔지만, 당사자인 의대생 대부분은 강의실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대구권 각 의과대학 강의실은 신학기 개강을 한지 20여 일이 됐지만 거의 텅 비어있다고 한다. 경북대·영남대·계명대·대구가톨릭대 등 대구권 의과대학들은 이 상태로 4월이 되면 1학기 학사 일정 운영에 차질이 생겨, 대규모 학생 유급 사태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허영우 경북대 총장은 최근 “복학신청 또는 질병, 육아, 군 휴학 신청을 하지 않으면 학칙에 따라 제적처리 됨을 알린다”는 가정통신문을 보냈고, 영남대 의대 교수들도 ‘의과대학 학생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나머지 해결 과제들은 선배 의사에게 맡기고 강의실에서 다시 만나자”고 호소했다. 계명대와 대구가톨릭대 의대도 최근 총장과 의대 학장이 의대 학생 대표들을 만나 수업 복귀를 설득했다. 서울대 병원을 비롯한 서울지역 의과대학들도 교수들이 나서서 학생들의 강의실 복귀를 호소하고 있지만 별 성과가 없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가 최근 24학번 이상 의대생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96.6%가 학교에 휴학 의사를 전했다고 했다. 전국 각 대학의 의대는 다음주 24~26일을 수업 복귀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단체·개별 상담 등을 통해 학생들의 복귀를 유도하고 있다. 의대생 교육도 문제지만, 2년째 계속되는 의정 갈등으로 전국 상급종합병원은 제기능을 하지 못한지 오래됐다. 끔찍한 의료 붕괴사태를 막으려면 정부와 의료계가 하루빨리 협상테이블에 앉아 출구를 찾는 방법밖에 없다. 올해 갓 들어온 신입생을 비롯해 전국 의대생 대부분은 전공의들과 함께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결국 필수의료의 최전선에 있는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으로 돌아와야 의료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여야 정치권과 의료계·정부는 민주당의 제안으로 이미 구성된 ‘여야의정협의회’를 가동해서 의대생·전공의들이 더 늦지 않게 복귀할 수 있도록 여러 쟁점을 매듭지어야 한다.

2025-03-18

서울은 급등하고 대구 집값은 68주째 하락

최근 서울지역 토지거래허가구역이 해제되면서 강남 3구를 중심으로 아파트 매매가가 크게 뛰고 있다. 강남 3구에서 시작한 서울 집값은 마포, 용산, 성동구 등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도 상승세가 이어진다. 당국이 집값이 뛰는 서울지역 부동산 거래 동향파악에 나섰고, 금융당국도 가계대출 선제관리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부산하다. 오랜 침체에 빠진 지방에서 보면 별천지 세상이다. 한국부동산원이 조사한 2025년 3월 둘째주 주간아파트 동향에 의하면 대구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 대비 0.10% 떨어져 68주 연속 하락세를 기록했다. 북구(0.16%)와 동구(0.15%) 등은 대구 평균치 보다 하락폭이 더 컸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 격차가 벌어지는 부동산시장의 양극화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지방의 투자 수요가 서울로 쏠리면서 서울 집값을 부채질할 수 있고 집값 격차를 바라본 지역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에 허탈해한다. 대구의 아파트가격이 이처럼 떨어지는 직접적 이유는 미분양 물량적체다. 2월말 현재 대구는 9900가구, 경북은 9100가구의 미분양 아파트가 적체돼 있다. 전국 순위에서 가장 많다. 대구와 경북에서 내년까지 입주할 아파트도 무려 3만8000 가구나 된다. 올해 대구서만 입주 예정물량이 1만2000 가구니 물량 해소가 난망이다. 정부가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LH를 통해 지방 악성미분양 아파트 3000가구를 매입키로 했지만 그 숫자로는 지역경기를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미분양 아파트가 해소되지 않으면 지방의 부동산경기는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다. 지방 실정에 맞는 지방단위의 주택정책이 있어야 한다. 광역지자체마다 지역실정에 맞는 주택정책 권한의 지방이양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부동산경기가 지방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대구 아파트가격이 68주째 하락했다면 지역경제 사정은 말 안해도 알만할 것이다. 지방 실정을 잘 아는 지방정부로 권한을 이양해야 지역의 부동산시장을 살릴 수 있다.

2025-03-18

네 탓 하는 정치

우정구 논설위원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에 포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네 탓 공방이 가관이다. 우리나라 여야 정치가 책임보다 책임을 전가하는 네 탓에 익숙한 분위기라지만 민감국가 지정을 둘러싼 여야간 네 탓을 보면 한심할 지경이다. 민감국가란 미국정부의 안보를 위협할 우려가 있거나 테러지원 등의 우려가 있는 나라를 대상으로 미국이 일종의 규제를 가하는 제도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 등이 이에 해당하는 나라다. 오랜 동맹관계의 한국을 민감국가에 올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의 입장에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더구나 미국이 민감국가 목록에 동맹관계인 한국 이름을 올린 배경에 대해 아직도 우리나라 외교당국이 정확한 사유를 모른다고 하니 국가 외교력에 공백이 생긴 것 같아 실망이 크다. 이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더 실망스럽다. 야당은 “계엄선포 탓”이라며 공격하고 여당은 “탄핵남발 탓”으로 응수하는 등 책임 떠넘기는 모습이 한국 정치 수준을 짐작케 하고 있다. “넘어지면 막대 타령”이란 우리 속담이 있다. 제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는 탓하지 않고 애꿎은 남탓할 때 쓰이는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내 탓이오”란 이름으로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혁신 운동을 벌였다. 남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되돌아보는 사람이 되자는 운동이다. 사람의 심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지만 정치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국가 이익과 국가 미래 앞에서 네 탓보다는 내 탓을 하는 책임있는 정치가 돼야 한다. 네 정치 이제는 끝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18

‘한국무시’하는 미국에 대응할 외교력 있나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우려했던 미국의 ‘한국무시’가 현실화 됐다. 아직 미국의 공식 발표가 나온 건 아니지만, 에너지부(DOE)가 산하 국책 연구기관에 다음 달 15일부터 한국을 민감국가(Sensitive Country)로 분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일종의 기피국가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을 정부도 몰랐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외교참사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세계 각국에 관세폭탄을 던지는 미국은 이제 한미자유무역협정(FTA)까지 재협상 대상으로 삼을 태세여서, 우리정부 공직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릴 때다. 작년까지 미국 에너지부의 ‘민감 국가 및 기타 지정 국가 목록’에 포함된 25개 나라는 심각성이 높은 순서로 테러지원국가(북한, 이란 등), 위험국가(중국, 러시아 등), 기타 지정국가(한국, 대만 등)로 분류된다. 이 목록에 오른 나라 중에서 미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은 동맹국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외교부는 지난 17일 밤 민감국가 지정에 대해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에 대한 보안관련 문제가 이유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했지만, 미 행정부는 아직 공식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지정 주체가 미 에너지부라는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3년 1월 국방부 업무보고 때 “대한민국이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자체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게 화근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은 당시 바이든 행정부에 큰 충격을 줬다. 미국이 우방국인 이스라엘과 대만을 민감 국가로 지정한 이유도 핵 비확산 문제 때문이다. 미 에너지부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민감국가 목록은 DOE 산하 정보방첩국이 관리한다. 민감국가 출신 연구자들은 DOE 관련 시설·기관에서 근무·연구하려면 엄격한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한국은 최하위 관리범주에 속해 제한이 크게 엄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외교가 이렇게 혼란한 상황인데도 정치권은 서로 남탓만 하고 있다. 민주당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은 정부와 여당이 초래했다고 공격했다. 이재명 대표는 17일 “민감국가 지정으로 인공지능, 원자력, 에너지 등 첨단 기술영역에서 한미연합과 공조가 제한될 것이 명백하다.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와 핵무장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에대해 “민주당이 국익, 미래가 걸린 외교까지도 정쟁 도구로 삼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 대표를 겨냥해 “이런 인물이 유력대권후보라 하니 민감국가로 지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정부의 대미외교 역량이다. 정부는 민감국가 지정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온 뒤에야 부랴부랴 상황 파악에 나섰다고 한다. 미국 에너지부가 밝힌 민감국가 적용 시한까지는 아직 한 달 남짓 남았다. 이번주 중 산업부장관이 미 에너지부 장관을 만나는 일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전에라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지정 경위를 명확히 파악하고, 한미간 동맹체제에 금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025-03-18

생각 변화가 삶의 질을 가름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처음 혁신을 도입하는 기업이나 도입한지 오래되어 혁신의 피로도에 젖어 매너리즘에 빠진 기업을 만나면 한가지 질문을 한다. ‘혁신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돈 버는 것’‘변화하는 것’‘가치창출’ 등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혁신은 편함을 바꾸는 것’이기에 거부감이 있고 저항이 따른다. 혁신은 생각에 변화를 주어 편함을 바꾸면 더 편해지고 일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원리이다. 이것이 참으로 어렵다. 혁신 경영에 생각이 있는 CEO를 만나면 회사 전반적인 분석과 의견수렴을 통해 하얀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린다. 속 그림은 실행의 주체인 현업과 함께 그린다. 기업의 혁신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 탐색해 본다. 혁신은 생각이다. 인공지능(AI)시대 생활문화, 과학 문명, 한강의 소설 등은 생각의 산물이다. 생각에 가치 더하기를 하면 혁신이 된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혁신의 정의를 ‘새로운 조합의 창출’이라고 하였고, 제품이나 서비스의 개발, 생산 방식, 시장 개척, 조직 형태의 도입 등이 포함 된다. 현대 경영학에서는 ‘가치 창출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 프로세스 최적화, 제품, 서비스 등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제조업의 혁신은 단순한 제품 개선을 넘어, 생산성 향상, 원가 절감, 품질 개선, 지속 가능한 경영 등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보면, 신제품 개발이나 기존 제품의 획기적인 개선 등의 제품 혁신, 낭비를 찾아 제거를 통한 생산 공정의 개선과 자동화, AI 적용의 공정 혁신, 새로운 판매 방식, 유통 채널 확장, 서비스 결합 등의 비즈니스 모델 혁신 등이 있다. 혁신을 통해 잘 나가는 기업을 따라 생산방식을 도입하거나 모방하면 실패 확률이 높다. 자사의 일의 속성, 설비 특성, 생산 프로세스 특징 등을 고려하여 적절한 혁신 방식을 선택하여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학습 진화의 관점에서 6시그마, TPS, TPM 등 혁신 기법의 수행 원리와 기능을 이해하고 자사의 생산 조건에 맞는 기법을 선택하여 문제를 푸는 것이다. 일과 생산 조건 변화에 적용성, 효과성이 있으면 혁신체계를 재정립시켜 지속성 속에 고유의 혁신 문화로 만드는 것이 성공의 길이다. 일반 가정에서 보면, 정리 정돈의 방법론을 적용하면 생활의 질이 높아 진다. 옷장에 안 입는 옷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옷을 또 사는 경우가 많다. 유행이 지났거나 오래 된 것을 과감하게 버려야 가치 있는 변화의 시작이 된다. 신발장도 아까워서 못 버리는 경우가 많고, 냉장고 냉동실에는 몇 달 전에 사놓은 음식 재료를 잊고 또 구입한다. 이러한 것은 생각에 정리 정돈을 못하기 때문이고 물건에도 정리 정돈이 안 되는 결과다. 변화와 혁신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크고 거창한 것에서 시작하려면 초기에 멈추고 마는 경우가 있다. 혁신은 거창한 이론이나 큰 변화보다 작은 생각의 변화에서 행동의 변화, 사물의 변화를 주고 가치 있는 행복한 삶으로 이어 진다.

2025-03-18

꿈나무에서 실버까지 피우는 묵향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오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은 듯 비바람과 강원 산간에 ‘봄눈 폭탄’까지 내리니 막바지 동장군의 심술(?)이 만만찮은 것 같다. 더욱이 이번 주부터는 영하권의 꽃샘추위로 남도에 피기 시작한 산수유나 홍매화가 화들짝 놀라며 가녀린 꽃잎을 짐짓 다물지 않을까 싶다. 한창 망울이 부풀어가던 벚꽃나무 가지가 찬 기온에 필 듯 말 듯 낭창거리며 개화시기를 가늠하고 있어도, 볕 바른 곳엔 이미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며 생동의 새봄을 부추기고 있다. 생동하는 봄날의 리듬을 먼저 타기라도 하듯 고사리 여린 손길에서부터 백발의 주름진 더벅손까지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갈고 붓을 잡는 모습들이 진지하게만 보인다. 사각거리며 먹이 갈리는 소리가 긴 겨울의 움츠림을 걷어내는 손끝의 기지개 같고, 붓에 먹물을 찍어 서툴지만 한 점 한 획 써내려 가는 운필(運筆)은 성글어진 마음의 밭을 일구는 쟁기질 같다. 마치 예전의 서당이나 글방처럼 지필묵(紙筆墨)을 가까이하며 은은하게 묵향을 피워가는 몸짓들이 사뭇 담담하고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광경은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 펼치고 있는 ‘함께하는 서예 나눔’의 테마별 재능봉사활동 장면들이다. 즉,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는 매월 지역의 아동센터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서예체험학습을 통한 정서순화와 감성계발에 도움을 주는 ‘찾아가는 서예교실’을 운영하는가 하면, 고령화사회를 맞아 노년기의 인지력ㆍ기억력 개선과 치매 예방 및 어르신들의 활력증진을 도모하는 ‘실버인지 서예치유’ 교육 프로그램을 매주 진행하고 있다. 서예 꿈나무들의 육성에서부터 황혼기의 어르신들께 인지학습 소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세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활기차고 유익한 서예 재능기부활동이 아닐 수 없다.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은 2021년 4월에 창단돼 서예재능 나눔으로 관내 취약·소외계층을 배려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재능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찾아가는 서예교실 30여 회, 포항다문화가정·탈북민가족 가훈 써주기, 사회복지시설 방문 부채작품 써주기, 포항문화원 주관 새해 가훈 써주기 등의 서예 나눔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했다. 어르신들의 말벗을 해주며 인지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이색적인 서예치유 프로그램은 올해 3월부터 실시돼 주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서예를 배움은 단지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만이 아닌, 그에 수반되는 유용한 가치와 활동으로서 심신의 건강과 의지의 단련, 심미안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는 고도의 정신수양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먹을 갈고 먹물의 농도를 조절해서 붓글씨를 순서대로 써내려 가는 과정에는 뇌의 여러 영역이 자극되고 교감해 뇌의 활발한 활동이 이뤄진다. 한글이나 한문 글자의 의미와 필순을 떠올리며 기억력과 표현력이 좋아지고, 글자의 대소강약이나 먹물의 퍼짐, 전체적인 구도를 생각하면서 붓을 움직이면 공감각적인 능력이 살아나는 등의 효능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음악치료나 미술치료, 웃음치료 못지않게 ‘서예 치유’가 실버세대들의 정신과 마음의 안정, 치매 예방과 건강을 유지하는 신 장르로도 주목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예 꿈나무 학생들이 붓을 잡는 것이 흥미와 설렘의 희망이라면, 실버들에게는 치유와 소일의 활력과 위안일 것이다.

2025-03-18

국공립 어린이집이 혐오시설?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최근 한국일보의 한 보도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지난해 말. 서울 종로의 어느 아파트에서 운영되던 민간 어린이집이 사정상 문을 닫게 됐다. 폐원된 어린이집을 대신할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렸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다양한 견해 표출이야 별반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국공립 어린이집으로의 전환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내뱉은 말들은 도가 지나치다. “우리가 사는 곳에 국공립 어린이집이 들어오면 저소득층, 장애인, 다문화가정 애들도 올 거 아니에요.” “영어유치원이면 괜찮지만 국공립 어린이집은 안 됩니다.” “일과 양육을 병행하기 어려우면 워킹맘을 때려치우세요.” 심지어 “너희들이 거지야?”라는 막말까지 나왔다. 특정 계층을 비하하고, 교육의 균등한 기회 제공이라는 대원칙을 부정하며, 심지어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원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이야기까지 오갔다는 보도에 많은 이들이 혀를 찼을 게 분명하다. 21세기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내 집, 내 식구, 내가 사는 동네다. 더불어 살아가는 걸 지향하는 공동체의 붕괴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가져왔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보는 경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특히 자기보다 경제적 형편이 좋지 못한 주변을 바라보는 눈길은 차갑게 식어간다. 요즘 아이들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하더라도 아파트 평수에 따라, 그 아파트가 임대냐 분양받은 것이냐에 따라 친구를 가려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장이거나 거짓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 서글퍼진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17

증오를 선동하는 정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판이 ‘증오와 저주의 굿판’이다. 진영으로 갈라선 정치는 이미 전쟁이 된 지 오래고, 광장의 탄핵 찬반집회에서는 비난·욕설·저주가 난무한다. 통합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은 갈등의 중심에 서있고, 여야 의원들은 자기편 집회에 참석해서 증오를 더욱 부추긴다. 온 나라가 총성 없는 심리적 내전상태다. 누가, 무엇을 위해 증오를 선동하는가? 국민을 빙자하여 권력투쟁을 벌이는 정치인들의 그 검은 속내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여야는 상대를 괴멸시키기 위해 ‘증오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상투적 수법은 ‘정의로운 우리’와 ‘무도한 그들’로 나누어 적개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증오정치로 ‘주체적 시민(市民)’은 점차 이성을 잃고 감정에 따르는 ‘종속적 신민(臣民)’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팬덤들은 자기 진영의 돌격대로 기꺼이 선봉에 선다. 게다가 편향적 언론과 극단적 정치 유튜버들도 증오의 선동에 가세한다. 정치권과 연계된 당파적 미디어들은 정치적 증오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 미디어와 정치권력의 공생관계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정한 보도’가 아니라 보수 또는 진보의 이념에 부응하는 ‘편향적 나팔수’가 되는 것이다. 정치 유튜버들은 혐오를 부추길수록 조회 수가 늘어나고 더 많은 돈을 번다. ‘증오의 확대재생산’으로 그들은 돈을 벌고 나라는 망해간다. 이처럼 망국적인 증오정치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성찰과 반성이 시급하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품격을 잃은 보수’나 ‘개혁성을 잃은 진보’는 똑같이 나치 독일의 선동가 괴벨스(P. J. Goebbels)를 닮았다. 이성을 잃은 권력은 괴물이고, 괴물이 된 권력이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정치가 바로 파시즘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증오의 프레임’에 갇히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증오는 편협을 초래하는 영혼의 타락’이다.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인들이 독선과 아집을 버릴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다시 회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정치인들에게 반성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주권자의 각성과 혜안(慧眼)’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학자 리처드슨(H. C. Richardson)은 “민주주의는 총구가 아니라 투표함에서 죽는다.”고 하면서 “유권자가 깨어 있지 않으면 정치인들은 히틀러(A. Hitler)처럼 대중을 선동해서 권력을 잡는다.”고 했다. 선동정치는 분노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국민들이 선동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다. 따라서 주권자는 ‘선동에 휘둘리는 감정’을 억제하고 ‘잘잘못을 가려내는 이성’의 눈을 밝혀야 한다. ‘비판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선동은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증오의 감정에 지배당하면 이성적 판단을 그르친다. 민주주의는 관용과 절제, 대화와 타협이라는 ‘이성의 작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선동정치에 휘둘려서 이성을 잃으면 ‘독재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025-03-17

대경선 효과, 대구권 동일 생활권으로 묶었다

작년 12월 개통한 비수도권 최초 광역철도 대경선의 개통 효과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최근 구미시가 대경선 개통후 2개월간 카드사별 실적을 분석해 보니 대경선 개통후 구미시내 소비가 258억원 증가해 소비율이 6.6% 성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초 우려했던 소비 유출보다는 역외에서 구미로 유입되는 소비가 더 많아 긍정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실례로 예년이면 연말특수가 끝나면 줄어들던 소비가 올해는 연말특수 후에 오히려 더 늘어 대경선 개통이 지역경제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분석했다. 또 구미 대경선 개통효과는 시내버스 이용에서도 나타났는데, 금오산에서 승차해 구미역에 내린 승객수가 작년 같은 기간보다 89%가 증가했다. 구미시는 금오산과 구미역을 오가는 시내버스 노선을 증편하고 관광객 유치를 위한 지원책도 별도 마련했다. 한편 대구시가 조사한 대경선 개통 효과도 긍정적이다. 개통 후 한달동안 87만여 명이 이용해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왔다고 판단했다. 출퇴근 시간대는 열차 안이 혼잡할 정도로 승객이 붐벼 증편 운행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 바 있다. 대구 원대역과 칠곡 북삼역이 추가로 신설될 예정으로 있으나 그밖에서도 역 신설을 희망하는 곳도 나오고 있다. 또 대구에서는 광역환승제가 시행되면서 도시철도로 유입되는 이용객도 늘었다. 동성로 등 대구 중심가 상권과 백화점 등에 수요가 늘어나고 대구, 경산, 칠곡, 구미 등의 역세권 경기가 살아나는 등 대경선의 파급효과가 대구권 전역에서 일어나는 분위기다. 비수도권 최초로 개통한 대경선은 당초 예상한대로 대구와 인근 시군 350만 주민을 동일생활권으로 묶는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출퇴근 근로자의 생활패턴이 달라지고 주민들도 교통의 편의성에 따라 생활반경을 넓혀가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교통의 혁명은 사람들의 이동시간을 단축시켜줄 뿐아니라 경제·사회적 파생효과를 반드시 가져온다. 대경선 개통이 대구권을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지역간 동질감을 높이는 동시에 주민들의 삶의 질도 향상시킨다. 대경선의 효과를 더 확대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때다.

2025-03-17

헌재, 尹 탄핵선고 이후의 사회적 파장 고려를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을 가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이번 주 중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로인해 서울 종로구 헌재 주위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경찰은 헌재 정문 방향의 인도 양쪽에 투명 차단벽과 질서유지선을 설치해 일반인의 통행을 막고 있다. 지난달 25일 변론을 종결한 뒤 3주 가까이 거의 매일 재판관 평의를 열어온 헌재는 그동안 쟁점별 검토를 마치고 결론을 도출하는 단계까지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헌재가 이번 주 후반인 20, 21일쯤 선고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결론도출에 난항이 계속되면 오는 26일 예정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 선고 이후로 판결이 미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재판관들이 현재 심리 중인 한덕수 국무총리 사건을 먼저 선고해야 한다고 판단하거나,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가 중도에 합류하는 것도 선고기일 지정에 변수가 될 수 있다. 헌재가 쟁점검토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국회와 윤 대통령 양쪽이 제기한 쟁점이 워낙 많아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을 도출하기가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자칫 법적 공정성과 절차적 완결성이 문제가 될 경우, 후유증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윤 대통령 사건은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재판관 간 전원일치 의견을 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헌재는 그동안 자료송달, 재판관 기피신청, 기일 변경 등 모든 사안을 만장일치로 판단해 왔다. 헌법에 따라 파면 결정에는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만약 재판관들의 의견이 엇갈린 채 선고가 내려질 경우, 그 파장은 심각할 것이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보수·진보 양진영에 불복여론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파면 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결정돼, 결정문에 소수의견이 없었다. 그리고 헌재가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윤 대통령 탄핵심판을 공정하게 했다는 것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2025-03-17

내란 정국의 역사 기술과 ‘전환기’라는 시대 의식

허민문학연구자 훗날, 오늘의 내란 정국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까? 국회와 선관위를 급습한 12·3 비상계엄의 발동, K-극우의 준동과 유튜브 수익 경쟁, 집권 여당의 부화뇌동, ‘야당 독재’라는 가짜 프레임과 다수 언론의 기계적 중립, ‘키세스 시위대’와 남태령의 트랙터, 아이돌 응원봉과 ‘다만세’ 제창, 내란성 불면과 우울증의 사회적 확산, 개헌 논의의 필요와 반동성 등, 분명 이 연쇄된 사건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과 성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고 대립·갈등하는 정치사의 주요 국면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남게 될 역사서술의 향방이 가장 궁금한 건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에 대한 구속 취소와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에 있다. 경호처 영장 반려에서부터 예견된 이 기괴한 판결과 의도된 무력한 수용에 대해 역사의 페이지에는 어떤 방식으로 작성해야 하나? 그야말로 남들 보기에 창피한, 특별한 교훈(?)이나 철 지난 의미조차 없는 이 사태를 그 자체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새삼 걱정된다. 물론 누가 작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언제나 중요하다. 반일종족주의나 뉴라이트 역사관을 봐도 그렇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비유한 ‘역사의 천사’는 역사의 진보를 믿기보다는 과거의 잔해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시간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으며 파열과 중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론 작가 한강의 말처럼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도,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도 있다. 파당 정치나 계급투쟁, 진영 대결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의 법정을 바로 세우는 길에 관한 과업이며, 그 문턱에서 말소되어선 안 될 진실한 기억에 대한 사수를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당치 않은 비상계엄의 정당성이 운위되는 작금의 사회적 대혼란이 누구에 의해 어떤 관점으로 역사에 남겨지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탄핵 심판은 역사의 갈림길이다. 어쨌든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할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흔히 ‘이행기’나 ‘전환기’라고 불리는 특정한 역사의 국면에는 과도기적인 현상이 관찰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 전후 시기의 단절과 연속, 상실과 회복의 교차를 비롯해 ‘과거의 잔여’와 ‘미래의 현현’이 ‘현재의 쟁점’ 속에서 충돌하거나 병행하는 복잡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의 방법이 필요하다. 이때 그 방법이란 역사학자들의 학문적인 고심으로부터 확보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대로 정치적 획책으로 도모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글로벌한 규모에서 횡행하는 우익 포퓰리즘의 바람에 말려 들어갈지 아니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가 아래로부터 다시 논의될 수 있는 극적 발판이 마련될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역사의 운명이 소수의 법비들에게 달려 있는듯한 요즘의 형국이 심히 불안하고 불쾌할 따름이다. 전환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과 가능한 데 불가능했던 일들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세상이 일거에 바뀔 수는 없다. 조금 지쳐도 더 나은 세계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고달픈 경로라 생각하고 모두 힘을 냈으면 좋겠다.

2025-03-17

값과 가치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인터넷으로 난(蘭)을 몇 촉 샀다. 구입한 난의 종류와 재배방법을 알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난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보기에는 잎의 모양이나 색이 조금씩 다를 뿐인데 판매 가격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몇 촉에 만 원 이하의 난이 있는가하면, 일견 비슷해 보이는 다른 종류의 난은 수십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값이 매겨져 있었다. 심지어 어떤 희귀종이라는 난은 20억 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었다. 풀 한 포기의 값이 보통사람은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이라니, 놀라움을 넘어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미술작품 중에도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작년까지 경매시장에서 팔린 작품 중에 가장 비싼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르도문디’라는 그림이라고 한다. 무려 4억5천30만 달러에 사우디 왕자가 낙찰 받았다고 하는데, 한화로는 5천억 원이나 되는 가격이다. 그 밖에도 폴 세잔, 폴 고갱, 잭슨 폴락 등의 그림이 3천억 원을 호가했고, 렘브란트, 앤디워홀, 마그로스코, 크림트 등의 그림이 2천억 원 상당에 팔렸다고 한다. 물론 경매시장에 나오지 않고 박물관 같은데 보관된 작품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값나가는 것도 많을 것이다. 난이나 그림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것을 그저 준다고 해도 마다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애호가들은 애지중지 수억 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희귀난도 김매는 시골 아낙네의 눈에는 그냥 귀찮은 잡초로 보이지 않겠는가. 극단적인 예로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수천억 원짜리 그림이 물 한 모금보다 나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흐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를 못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그림을 빵부스러기와 바꾸어 먹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 결국 요절하고 말았다 한다. 우주 만물에는 원래 차별이나 가격이란 게 없었다. 사람들이 자의로 구분하고 값을 매겨서 경중이나 귀천이 생긴 것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물의 고유한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가격의 형성은 보통 상품으로서의 가치, 즉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가령 예술 작품의 경우는 시대적·문화적 의미부여와 상업적 계산도 작용해서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수긍이 가는 가치일 수는 없을 터이다. 물론 세상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더 많다. 우선은 하늘과 바다, 해, 달, 별, 눈비와 바람 같은 자연이 그렇고, 생명과 영혼과 사랑과 진실이 그렇다. 인간 사회는 물질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위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가 삶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비관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마음먹기 따라서는 누구나 다른 가치관을 가질 수가 있다.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고, 그것으로 얼마든지 삶의 보람과 기쁨을 창출할 수가 있는 것이다.

2025-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