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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국정협의체 현안’이 곧 TK지역의 숙제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이후 ‘휴업’ 상태였던 여야정 국정협의체가 다음주 재가동된다. 여야는 지난 4일 국회에서 국정협의체 실무회의를 열고,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과 우원식 국회의장,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참여하는 4자회담을 이르면 10일 열기로 했다. 국정협의체에서는 반도체특별법과 고준위방폐장법을 비롯한 경제·민생 법안처리가 주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향해 “2월 임시국회에서 주 52시간 예외 조항이 담긴 반도체특별법과 ‘에너지 3법’부터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에너지 3법은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법, 해상풍력 특별법이다. 제1차 추경편성도 주요의제가 될 전망이다.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국정현안은 모두 TK(대구경북)지역의 핵심과제와 직결돼 있다. 먼저 포항 앞바다 유전개발 사업인 ‘대왕고래 프로젝트’ 시추작업이 원활하게 추진되려면 올해 본예산에서 민주당이 전액삭감(497억원)한 관련예산을 추경에서 복원해야 한다.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적정성을 의심하며 시추예산을 책정하는데 적극 반대하고 있다. 원전 11개가 있는 경북으로서는 에너지 3법에 포함된 고준위방폐물 처분장법 역시 긴급 현안이다. 현재 국내 대부분 원전은 고준위 방폐장이 없어 사용후 핵연료 등 고준위 방폐물을 원전 내에 임시로 쌓아두는 실정이다. 구미에 집중돼 있는 반도체 소재 산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미래먹거리법’으로 불리는 반도체 특별법도 하루빨리 제정돼야 한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국정 공백이 길어진 가운데, 여야정이 국정협의체를 가동하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정부·여당 입장에서는 긴급현안을 추진하려면 거대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조기대선을 의식해서 우클릭하고 있다는 비판은 나오고 있지만, 최근 이재명 대표가 실용주의 노선을 강조하면서 국정협의체 가동에 대한 접점이 마련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2025-02-05

민주주의는 문화다

장규열 고문 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치체제나 법적 시스템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좁은 시각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규정되며, 삼권분립을 통해 작동한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부의 운영방식이기만 하다면, 이는 외형적 발견에 불과하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제도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로 터를 잡아야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체제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안에 깊이 스며들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 선언하고,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다. 표현만으로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추상적인 개념에 멈출 위험이 있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삶과 실질적 일상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헌법이 공허한 선언을 한 꼴이 되어버린다. ‘민주주의가 문화로 자리잡는다’는 건 국민들이 민주적 가치와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 권력자의 결정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자세, 공적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토론에 참여하는 습관 등이 민주적 문화의 부분이 아닐까. 단순히 선거에 투표하는 일을 넘어,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길거리와 모든 일상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민주적 태도를 익히고 실천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문화로 정착된다. 민주주의를 문화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종종 민주주의를 선택가능한 여러 체제 중 하나로 이해하게 된다. 상황에 따라 민주주의가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이라고 여길 수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권위주의적 체제를 선호하는 태도로 나아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민주적 제도를 도입했다가 권위주의로 회귀한 사례가 수다하다. 단순히 정치인들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의 문화로서 민주주의가 충분히 정착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문화로 자리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2016년 촛불혁명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는 단번에 종결적으로 확립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제도뿐 아니라 공동체의 문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부적절한 비상계엄같은 반민주적인 사태가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다. 민주주의를 문화로 자리잡게 하려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토론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공동체 안에서 자율적으로 집단적으로 의사결정과정을 경험하면서 민주적 가치관과 경험치를 쌓아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구성원 간 관계가 민주적이어야 한다. 권위적인 가정에서 민주적 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언론과 미디어도 민주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 다양한 의견이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고, 비판적 사고를 키울 수 있는 보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공동체의 문화로 뿌리내려야 한다.

2025-02-05

지역기업, 수출구조 재편으로 活路 뚫어야

대구상공회의소는 4일 미국 트럼프발 관세정책에 먼저 타격을 받게 될 지역기업을 두가지 측면에서 분류했다. 하나는 멕시코와 캐나다에 생산시설을 두고 우회적으로 미국으로 수출하는 기업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중국 의존도가 높은 기업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대구상의 관계자는 “특정국가에 대한 수출 의존도를 낮추고 수출선을 다변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같은 날 한국무역협회 대구경북지역본부도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구경북 수출구조의 변화 분석과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구와 경북의 제1 수출국인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지난 25년간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지난해 기준 대중국 수출 의존도는 대구 23.6%, 경북 32%였다. 이는 전국 평균 19.5%를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라고 했다. 2위 수출국인 미국도 못지 않다는 분석이다. 대미 수출 의존도는 대구 23.4%, 경북은 16.2%다. 전국 평균 18.7%와 비교하면 높은 편에 속한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는 수출 구조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지적을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다만 오랜 무역관행과 신개척지 발굴 과정이 쉽지 않아 개선이 잘 안 되고 있다.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도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지면서 수출구조 개편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지금도 같은 문제로 고민한다. 5년 전 한국경제연구원이 조사한 자료에서는 우리나라는 수출품목과 수출 대상국의 집중도가 주요 수출국 가운데 1위라고 했다. 대구경북지역 기업도 다를 바 없지만 대구상의와 무역협회 조사에 의하면 전국 수준을 웃돌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기업의 수출 활로의 다변화 모색은 선결과제다. 특히 집중도가 높다는 것은 대외 변화에 민감하는 의미여서 수출선 다변화를 위한 노력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곧 닥칠 트럼프발 관세 위기에 대응할 종합적이고 장기적 대책이 서둘러 나와야 한다. 기업과 정부 그리고 지자체 모두가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활로를 찾아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2025-02-05

한의학으로 부종 해결하기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몸의 붓기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겪는 증상 중 하나다. 특히 장시간 앉아 있거나 짠 음식을 과다하게 섭취했을 때 혹은 호르몬 변화로 인해 쉽게 발생한다. 붓기는 단순히 외형적인 문제를 넘어 몸의 불균형을 나타내는 신호일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붓기를 수음(水飮) 또는 습담(濕痰)의 증상으로 보는데 이는 몸속의 수분 대사가 원활하지 않아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비위 기능이 약화되거나 기의 순환이 막혀 생기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습한 환경과 스트레스, 불규칙한 식습관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붓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먼저 체질에 맞는 식이 요법을 고려해볼 수 있다. 개인의 체질이나 건강상태에 따라 붓기를 줄이는 식품을 먹는 것이 좋다. 습한 체질의 경우 팥이나 보리 연근 무 등을 섭취해 습기를 제거할 수 있고 몸이 약한 체질은 대추나 생강 계피 등으로 기운을 보충하고 혈액 순환을 돕는 것이 도움이 된다. 찬 성질의 체질은 따뜻한 성질의 음식인 생강차나 율무차를 섭취해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다. 혈자리 자극을 통해 몸의 기혈 순환을 촉진하고 붓기를 줄이는 방법도 있다. 특히 삼음교나 족삼리와 같은 다리의 혈자리를 자극하면 수분 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붓기가 심한 경우에는 한의사와 상담해 증상과 체질에 맞는 한약을 처방받을 수도 있다. 오령산이나 방기황기탕과 같은 처방을 기본으로 증상과 체질에 맞게 처방하면 몸의 건강과 더불어 수분 배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일상에서 붓기를 줄이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우선 짠 음식을 줄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나트륨은 체내 수분을 붙들어 붓기를 유발하기 때문에 가공 식품과 인스턴트 음식을 피하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좋다. 특히 국과 찌개류는 완전히 금하는 것이 좋다. 간단히 먹는다고 국에 밥을 말아 먹거나 찌개에 밥만 먹는 것은 내 몸에 독을 타 넣는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하고 음식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가벼운 스트레칭이나 걷기는 혈액 순환을 촉진해 붓기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다. 혈액순환이 안 되면 붓고, 잘 되면 붓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주 걸어주자. 마사지와 족욕도 붓기를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다리와 발을 부드럽게 마사지하거나 따뜻한 물에 소금을 넣고 족욕을 하면 혈액 순환이 개선되고 붓기가 가라앉는다. 스트레스를 조절 하는 것도 붓기를 줄이는 데 중요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율신경의 균형이 무너지고 기의 순환을 막아 붓기가 더 심해지기 때문에 명상이나 호흡 조절 또는 충분한 휴식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 좋다. 붓기는 단순히 물을 많이 마셔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니다. 몸의 균형이 깨졌을 때 나타나는 신호로 한의학적 접근과 음식조절과 운동으로 효과적으로 관리가 가능하다. 만약 붓기가 지속되거나 너무 심한 경우 또는 통증이 동반된다면 전문가와 상담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한 생활습관과 한의학적 지혜를 통해 붓기 없는 편안한 몸을 만들어보자.

2025-02-05

호(號), 또 하나의 이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같이 활동하시던 소당(素堂) 조철제 선생님께서 누군가에게 호를 지어주고 다같이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에게도 호를 지어주실 수 있는지 조심스레 여쭈었다.그때도, 한참 후까지도 답이 없어 ‘네가 무슨 호가 가당키나 한가’ 생각하시는가 보다며 내심 서운했다. 내 위인됨이 변변찮다고 생각하시는가도 여겨 나도 입을 다물었다. 몇 년 후였다. 아마도 향토문화연구소의 정기모임이었을 것이다.조 선생님께서 마치 오다가 주웠다는 듯이 무심하게 종이 하나를 건네주셨다. 펼쳐보니 ‘의당(宜堂)’ 두 글자가 반듯하게 한자로 적혀있었다. ‘의(宜)’는 마땅하다, 화목하다. 온화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시경의 시 ‘도지요요(桃之夭夭)’에서 따왔다고 하셨다. 몇 년 동안 지켜봤는데, 언제 어디서나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 제 역할을 다하는 사람, 또 그곳을 화목하고 기쁘게 해주는 사람으로 보였다고도 하셨다.앞으로도 항상 이 교수가 있는 곳이 어디든, 마땅히 그 자리를 복되고 빛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정한 호라며 분에 넘치는 말씀도 함께 주셨다. 호는 많이 알려서 자꾸 불려야 한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공표하고 축하연도 조촐하게 열어주셨다. 그 후부터 경주문화원엘 가면 나는 의당 선생이라 불렸으나 항상 좌불안석이었다. 50살도 안된 내가 감당하기 어렵고 버거운 이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드러내놓기엔 쑥스러워 SNS의 닉네임으로 숨겨 쓰곤 했다. 몇 년 후 2005년으로 기억한다. 지역신문의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연구실에서 기자와 장시간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그만 호를 말해버렸다. 며칠 후 신문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 : 경주에선 문화전문가, 포항에선 여성단체장, 안동에선 내방가사 전문가….” 참 기자님은 어찌 그렇게도 호를 적절하게 사용했나 놀라면서도 부끄러웠다. 대신 그렇게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내 직분을 다하리라. 어디서든 필요하다 부르면 달려갔고, 소용 닿는다고 역할을 주면 마다않았다. ‘마땅한’ 소명이라 여기며 정말 치열하게도 살아냈다. 한글서예공부를 한 지 햇수로 1년이 훨씬 넘었다. 핑계가 많아 썩 열심히 하지 못했고 여러 모로 모자라 수연(秀硏) 최민경 선생님을 애태웠다. 같이 공부하는 다른 분들이 글씨를 완성해 호와 이름을 쓰고 낙관을 찍는 것이 못내 부러웠다. 최근에야 모자란 글씨인데도 격려해 주시려는지 한 장씩 연습한 글씨 아래 호와 이름자를 쓰기를 허락하셨다.이미 호가 있지만 새로운 호를 직접 지어주시면 고맙겠다고 간청 드렸더니 한참 후에야 답을 주셨다. 글을 연구하고 글씨를 연마한다는 뜻의 ‘서연(書硏)’. 더구나 선생님의 아호에서 한 자를 나눠주시니 황감하기 이를 데 없다. 좋은 글을 연구하고 글씨도 열심히 쓰니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과분한 말씀에 은근한 독려도 곁들이셨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이름이 생겼다. 얼마나 여러 날 심사숙려해서 지어주신 귀한 이름인가. 내 나이 칠십, 남은 생 다하도록, 이름값하면서 사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

2025-02-05

겨울에도 꽃은 핀다

배문경 수필가 올겨울 젤 추운 날 겹겹의 마음이 모였다. 차에서 내리자 저편에서 S가 손을 흔든다. 추운데 얼른 차를 옮겨타라고 손짓한다. 배낭을 차에서 꺼내 친구 차로 옮기자 데워둔 차 안이 따뜻하다. 오랜만에 봐도 어제 본 듯 반갑다. 그새 좀 수척해진 걸까. 희고 눈부신 피부는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밝게 빛나는 화이트 리시안 같다. 가까이 살아도 이렇게 모임을 따로 갖지 않고는 얼굴 보기가 힘드니 핸드폰으로 일상을 묻고 답을 하며 미루어둔 만남이 오늘이다. 이번 만남을 주체적으로 만들고 스케줄을 엮은 친구이기도 하다. 오랜 교직생활을 명예퇴직했다. 그의 집 뜨락에 푸르게 빛나던 화초처럼 나날이 빛난다. 날마다 포항 북부 해수욕장 근처에서 운동할 그녀가 반갑다며 손을 내민다. 곧이어 K가 차 문을 열고 앉자마자 대구까지는 본인이 운전을 하겠다며 나선다. 나는 속으로 안심이 되었다. 대구에서 운전하다 신호등이 헷갈려 사고 날 뻔한 경험이 있어 흔쾌히 고맙다고 했다. 제제벨 스프레이 장미처럼 화려한 그녀다. 선글래스가 언제나 잘 어울리고 어디서든 걸림이 없는 당당함과 거침없는 입담은 매력 만점이다. 스무 살에 그녀 손에 있던 카메라는 삶이 되었다. 웨딩 촬영 사진과 우리가 그녀의 손에서 재탄생되곤 했다.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온전히 사진 속에서 시작되고 사진으로 연결된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걸려있던 무수한 사진들이 그녀의 삶이다. 근래는 십여 년을 추구해온 요가로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제 셋이 출발해서 동대구역으로 올 친구를 만나러 간다. 도착시간에 맞춰 그녀를 픽업해서 목적지로 향해가리라. 함께 하기로 했던 두 명의 친구 중에 한 명은 참석이 어렵다는 전화를 먼저 했던 모양이다. 다섯 명이 모여 가기로 한 여행이기에 미리 알았다면 나는 참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프지 말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던하고 고요한 L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돋보이게 한다. 누구보다 배려심이 많은 그녀를 보기 위해 만나러 간 적이 있다. 이 겨울 더 추워졌을 평창에서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다. 아프지 마라. 다섯이 아니라 넷이지만 옆자리 하나는 그녀의 몫으로 비워두었다. 그리움은 두 배가 되어 다음 만남에서 온전히 손을 잡고 기쁨을 노래하리라. 이전에 꼭 참석하겠다던 말이 떠 올라 마음이 짠하다. 작은 나비 같은 A가 환한 얼굴로 다가온다. 역으로 간 우리의 마중으로 함께 모닝커피와 도넛을 한입 베어 문다. 달콤쌉사름한 쵸코도넛과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우리의 아침을 맛나게 만든다. KTX를 타고 오느라 애썼을 그녀의 얼굴이 볼그레하다. 오늘 일정과 내일 일정을 공유하며 우린 떠났다. 겨울 구례 쌍계사의 옛 추억을 더듬었고 화계장터를 구경하며 생강청을 사고 옛 장터같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아점을 먹었다. 바로 앞 강에서 잡았다는 재첩이 든 부추전과 재첩국과 빙어 튀김으로 모두 만삭이 되었다. 그곳에서 먼 경남 산청으로 어둠을 뚫고 달려 동의 한방촌에서 구들목 같은 따뜻한 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물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새벽의 신선한 기운은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가벼운 세상의 나로 태어나길 기대했다. S가 삶의 고마움으로 일인 오만 원이 넘는 한정식을 예약 주문했다. 약선으로 만들어진 소갈비찜과 하나하나 공들인 음식을 우리에게 건강으로 선물했다. 덮개를 한 나무 터널을 지나며 사는 이야기들로 꽃을 피웠다. 엄청나게 큰 기가 센 바위 앞에서 각자의 안녕과 삶을 위해 기도했다. 보이지 않는 큰 힘이 우리를 소원하는 곳으로 이끌어 주리란 마음 한 자락을 바위 구석구석에 새겼다, 빠듯한 일정으로 지치자 K가 족욕과 십전대보탕으로 짧고도 좋았던 이번 여행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두 손을 모았다. 어둠 같은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다발처럼 함께 아름답게 뭉쳐 피어나자꾸나. 환갑이란 나이가 우리를 노을처럼 무르익게 만들지만, 아프지 마라, 그리고 다시 뭉칠 그날을 기약하며.

2025-02-05

오일장 나이키 -오천 장날 2

장세(場稅)를 못 낼 형편이라외곽 담벼락 아래, 여기는햇살이 참 따끈해요그냥 모여 질끈 징검다리 놓아요종일 기다려 몇 단 판 봄나물파장 무렵, 눈길 끄는 저 신발 손주 생각기술력이 좀 떨어진다고나쁜 신발은 아니라네요식구들 거 다 챙겨요서울 것들, 눈여겨 보지도 않을 테지만임대료 유통마진 브랜드 파워세금까지 후려치고도 거뜬하다네요서민경제 기여한다고도 하고,그래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더라도가야 할 길, 조여매고 가고 싶어요꼭 가요이류(二流)라도 일류 흉내 내면서결국에 가장 하류가 되면마음 편할 거라 생각해요나는 가당찮은 희망을 꿈꾸지 않아요옆 난전에서팬티도 몇 장 사서집으로거침없이달려볼까나.나이키도 닳는다. 오일장 나이키도 마찬가지다. 벤츠도 차가 막히면 속수무책이다. 모든 술은 다 취한다. 사람은 결국엔 죽는다. 나는 실용을 추구한다. 가난한 변명에 불구하지만 외형에 현혹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별로 쓸모없지만 말이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2-05

‘유치원서 TOSEL 숙제’ 이게 사교육 현실

심충택 ​​​​​​논설위원 최근 TV채널을 돌리다가 ENA(연예 전문채널)가 방영하는 ‘내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인기 연예인 부부의 아이들이 해외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내용이었다. 부모 품을 떠난 아이들이 외국인과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여행하는 모습이 신선한 문화충격이었다. 아이들의 영어실력에 감탄하는 내 모습을 본 와이프는 ‘영어 유치원’ 얘기를 꺼냈다.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에서도 요즘 젊은 부부들은 아이들을 일찌감치 영어유치원에 보내 영어로 일상생활을 하는 언어습관을 들인다는 것이다. 영어 사교육 실상은 최근 EBS가 보도한 내용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상당수 MZ세대 맞벌이 부부들은 기저귀도 못 뗀 영유아기부터 영어 사교육을 시작하고 있으며, 월 사교육비가 평균 182만9000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 사교육비 금액은 지난해 한 국책연구기관이 만 2세와 3세, 5세 자녀를 둔 엄마 약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6세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낸다는 한 엄마는 EBS와의 인터뷰에서 “유치원에서 영어단어 테스트를 보고, 일주일에 한번씩 토셀(TOSEL) 숙제도 계속 나온다”고 했다. 유치원에서부터 토익과 토플 같은 유형의 영어능력 시험을 치른다는 얘기다. 자녀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빚내서라도 따라할 수밖에 없다는 게 요즘 젊은 부부들의 생각이다. 우리나라 초중고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가 매년 신기록을 갈아치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최근 자료는 아니지만, 지난 2023년 통계청이 조사한 결과, 국내 초중고 학생의 79%가 사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비 총액도 27조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학생 수가 주는 데도 사교육비는 오히려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55만3000원으로 집계됐지만, 서울 강남구 교육 특구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평균 185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초중고 12년간 약 2억7000만원을 사교육에 쓴다는 계산이다. 초중고 자녀 2명(4인 가구 기준)의 사교육비가 가계 월평균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4%까지 늘어났다.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사교육 열풍은 중·고등학교 단계에서 심각한 양극화 현상으로 표출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서열구조가 자녀의 고교 서열구조(국제고-특목고-자사고-일반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얼마 전 BBC(영국방송공사)는 “한국은 중세 유럽의 흑사병을 능가하는 인구 감소 상황에서도 사교육비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고 했다. 한국의 사교육문화가 세계 최저수준의 합계출산율 기록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실제 천문학적인 사교육비 부담은 젊은 부부들의 출산기피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사교육비 문제는 학벌주의와 과도한 입시경쟁이 주원인이긴 하다. 그러나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양극화, 공교육의 질적 수준과도 연결되는 구조적인 병리현상인 만큼 정부, 학교, 학부모, 학생 모두가 함께 해결책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2025-02-04

울릉에도 유전 가능성, 野 ‘산유국 꿈’ 외면말라

울릉분지에 최대 51억7000만 배럴 규모의 석유·가스가 매장돼 있다는 용역 보고서가 한국석유공사에 제출됐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지질탐사전문 컨설팅 업체인 액트지오사가 작성했다. 액트지오사는 지난해 6월 정부가 최대 140억 배럴의 석유·가스가 매장돼 있을 수 있다고 발표한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탐사 분석을 진행한 회사다. 석유공사는 “현재 용역 결과만 제출받은 단계여서 전문가들과 추가 검증을 정밀하게 진행해야 더 구체적인 매장량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검증작업은 국내 전문가 위주로 진행 중이며, 3월중 완료된다. 탐사 성공률은 대왕고래 프로젝트와 비슷한 20% 수준으로 분석됐다. 최소 7000만t에서 최대 4억7000만t의 가스, 최소 1억4000만 배럴에서 최대 13억3000만 배럴의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14개 구조 중 탐사자원량이 가장 많은 곳의 이름은 ‘마귀상어’다. 문제는 액트지오사에 대한 야당의 불신과 탐사재원이다. 포항 앞바다 석유·가스 부존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사업적정성을 의심해왔던 민주당이 울릉분지 유전 탐사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민주당은 2025년 예산심사에서 대왕고래 1차 시추 예산 500여억 원을 전액 삭감해버렸다. 현재 석유공사가 회사채를 발행해 1차 시추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추가 시추가 정상적으로 추진될 지는 미지수다. 정부가 2차 시추부터는 해외 투자유치를 통해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대통령 탄핵정국 속에서 해외 투자유치가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이철우 경북지사가 그저께 밝혔듯이, 동해 유전개발 사업은 에너지 안보차원에서 정파를 떠나 차질없이 진행돼야 한다. 대왕고래 프로젝트에 이어 울릉분지 유전 탐사가 성공하면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4%에 달하는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립국이 된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산유국에 대한 국민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이번 1차추경에 관련예산을 반드시 책정하길 바란다.

2025-02-04

노인 빈곤율 38%

우정구 논설위원 최근 통계청이 밝힌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38.2%다. 65세 이상 한국 노인 10명 중 4명꼴로 빈곤층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소득은 2023년 중위소득 기준의 50%로 보았을 때 연간 1879만원 이하 소득자들이다. 놀라운 것은 76세 이상 노인의 경우 2명 중 1명이 빈곤층이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대한상공회의소는 ‘GG마켓 공략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GG란 Grand Generation의 앞머리 글자를 딴 말이고, 1950년~1971년생 시니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왕성한 경제, 사회, 여가활동으로 초고령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란 것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다. 통계청이 밝힌 10명 중 4명이 가난하다는 노인 빈곤율과 매우 대조되는 결과여서 노인 빈곤층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과연 장수시대를 맞아 노인들이 주도적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세상이 열릴 것인지 긴가민가하다는 생각이다. 올들어 우리나라는 초고령사회인 65세 이상 노인인구 1000만명 시대를 열었다. 통계청 발표대로라면 2050년에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00만명(노인인구 비율 40%)에 이를 것이라 한다. 그야말로 초고령사회가 아닌 인구의 절반이 노인인 사회가 도래할지 모른다. 노인은 모든 세대의 미래 모습이란 말이 있다. 노인이 잘살면 자라나는 모든 세대도 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1위. 미국과 일본의 거의 두배 수준이다. 노인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더 많은 투자와 연구가 필요하다.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노인 빈곤의 문제를 하루빨리 치유해나가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2-04

불경기 한파에도 나눔의 정신은 뜨거웠다

매년 연말연시 전개되는 희망나눔 캠페인이 혹독한 불황 경기로 목표액 달성이 어려울 것이란 우려를 딛고 올해도 목표액을 초과 달성하는 성과를 냈다. 대구시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경북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108억7000만원과 213억원의 모금액을 각각 달성했다고 밝히고 3일 폐막식 행사를 가졌다. 특히 경북도는 1988년 이웃돕기 캠페인을 시작한 이래 최초로 200억원을 돌파하는가 하면 모금액 사상 가장 큰 금액을 달성했다고 했다. 지난해는 고금리, 고물가, 경기침체라는 경제적 악재로 어려운 상황이 지속돼 온 한해였다. 게다가 계엄사태와 탄핵정국에 따른 정치적 혼란까지 겹쳐 기업이나 개인의 기부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분위기였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 목표를 초과하는 성과를 낸 것은 어려운 이웃에 대한 우리 고장 주민들의 적극적인 사랑의 마음이 있었던 때문이다. 올해도 기업 기부는 물론 개인의 기부도 줄지 않고 이어져 왔다. 경북도의 경우 개인의 기부가 전체 모금액의 절반을 넘어서는 놀라운 개인 참여도를 보인 것이다. 희망나눔 캠페인은 처음에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모금을 시작했다. 이후 2007년부터는 희망나눔 캠페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단순히 기부를 넘어 기부자가 우리 사회 투자자의 일원으로서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자는 데 목표를 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회적 나눔의 연대에 동참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적 공감대를 통해 모두가 발전하는 사회동력을 삼자는 뜻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기부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배분하는 역할을 한다. 시·도민이 십시일반 정성으로 모금한 성금이 다양한 복지사업에 사용되어 어려운 이웃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또 그들에게 전달된 성금이 우리 사회가 각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들이 재기하는 희망의 빛으로 작용했으면 한다. 나눔 캠페인의 가치가 더 잘 알려져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과 기업이 동참하는 성과가 있길 기대한다. 기부는 거창한 결심이 필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2025-02-04

구절판, 조화와 정성을 담은 한국의 미학

전통 한국 음식의 우아함과 손끝의 깃든 정성을 가장 잘 담아낸 한국요리를 꼽으라면, 단연코 구절판이 떠오른다. 구절판은 우리 고유의 황, 적, 흑, 백, 청의 오방색이 잘 구현되어 담은 식재료와 오미(五味)의 적절한 조화를 아낌없이 보여 주는 음식으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철학을 잘 실천하고 있는 음식이 바로 구절판이다. △미의 조화와 오미(五味)의 균형 궁중이나 반가에서는 유두절의 시절식으로도 활용되었던 구절판은 아홉 칸의 담긴 다양한 재료들이 개별적인 맛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먹었을 때 조화를 이루며, 이는 한국요리의 깊은 미학을 나타낸다. 특히, 그릇의 한가운데 위치한 밀쌈은 각 재료를 감싸는 화합의 상징으로, 개별적이면서도 어우러지는 조화를 통해 하나의 완성된 맛을 이루게 한다. 이러한 구절판은 시각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맛과 철학까지 담아내며 전통과 조화를 추구하는 한국 음식문화의 정수를 보여 준다. △숫자 9의 상징성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9’는 재수를 상징하는 좋은 숫자로 여겨왔다. ‘9’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완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구절판의 구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구절판은 9칸의 그릇에 각가의 재료를 담아내며, 음식을 먹을 때는 조화로운 맛을 느낄 수가 있다. 이러한 화합의 상징성 때문에 구절판은 국빈만찬 또는 국가의 행사 등 정성과 품격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자주 등장했다. △한국 전통의 정수, 구절판 외국 귀빈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전통 음식을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한국의 정성을 담아낸 요리로 구절판이 자주 상에 오른다. 구절판의 조리법은 1931년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 1940년 홍선표의 ‘조선요리학’ 에도 등장한 구절판은 신선로와 함께 이후 한국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대표 요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눈과 입으로 즐기는 구절판 구절판은 단순히 음식을 담은 그릇을 넘어선 예술적 아름다움과 맛의 조화를 보여준다. 눈으로 즐기고, 입으로 즐기며, 그 깊은 맛과 정성을 통해 마음 까지 사로잡는 구절판은 그 자체로 한국 음식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재료 하나 하나에 정교한 손길이 중요하다. △재료 하나하나가 만드는 조화 구절판의 조화로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료 선정이 중요하며, 재료 하나 하나에 정교한 손길이 중요하다. 소고기, 미나리. 오이, 달걀지단, 석이버섯, 표고버섯, 도라지, 느타리버섯 등 계절과 기호에 맞춰 선정한 8가지 재료를 길고 가늘게 썰어내고, 각기 다른 색감과 조화를 이루도록 조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계절과 기호에 따라 봄나물 위주로 담아도 좋고, 더덕이나 우엉 같은 향긋한 뿌리채소를 다양하게 활용해 보는 것도 센스있는 선택이다. △색감과 맛을 더하는 쉐프의 선택 돌려 담는 재료만 다양하게 응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병의 색감도 다양하게 응용이 가능해서 요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루가 지나도 촉촉한 전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 반죽에 약간의 찹쌀가루를 섞어주면 된다. 여기에 다양한 색감을 내기 위해 반죽 물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오이를 잘라 믹서에 갈거나 강판에 간 후 채에 걸러 반죽 물로 사용하면 은은한 파스텔톤의 초록빛과 오이의 향긋한 향이 솔솔 퍼지는 전병을 만들 수가 있다. 또한, 치자 물을 사용하거나 노란 파프리카를 갈아 넣으면, 노란빛 전병을 얻을 수 있으며, 비트, 당근, 홍 파프리카 등을 활용해 붉은빛 전병을 만드는 것도 요리하는 재미와 다양성을 더해준다. 이처럼 색감과 맛이 조화를 이룬 얇게 부친 전병에 여덟 가지 색색의 채소, 고기, 버섯을 싸서 먹으면, 한입 가득 오묘한 맛의 하모니가 퍼져나간다. 이처럼 구절판은 단순히 먹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육류와 식물성 식품이 잘 어우러져 영양 면에서도 조화를 이루는 건강 요리로 평가받는다. △구절판 만들기 재료 ·오이 1개, 애호박 1개, 당근 2/1개, 계란 2개, 새우살 50g, ·목이버섯 10g, 건표고버섯 4장, 소고기 200g, ·소금 1큰술, 식용유 1컵, 밀가루 1컵, 찹쌀가루 1큰술 ·만능 간장 양념 (간장 3큰술, 설탕 1큰술, 물엿 3큰술, 참기름 1큰술, 후추 약간) 만드는 방법 1.버섯 불리기 : 목이와 표고는 뜨거운 물에 불려 부드러워지면 물기를 제거한 뒤에 얇게 채 썰어 만능 간장 양념 한 큰술씩 넣어 조물 조물 양념해 준다. 2. 야채 채 썰기 : 애호박은 껍질 부분만 돌려 깍아 채 썰고, 당근도 최대한 비슷한 길이로 채 썰어 준다. 3. 새우살 데치기 : 작은 새우살은 끓는 물에 데친 후 반으로 썰어 준비한다. 4. 소고기 손질 : 얇게 썬 소고기를 만능간장 양념 3큰술로 양념해 준다. 5. 전병 반죽 : 오이 물 3/2컵, 밀가루 1컵, 찹쌀가루 1큰술, 물 2/1컵을 섞어 반죽한다. (반죽물은 채에 걸러주면 멍울 없이 매끄럽게 사용할 수 있다) 6. 계란지단 :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각각 잘 저어준 후 약불에서 팬에 얇게 부쳐 4cm 길이로 곱게 채 썰어준다. 박정남 전통음식칼럼니스트 7. 전병 부치기: 지단 할 때와 마찬가지로 팬에 기름 코팅을 하여 주고 반죽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듯 원을 그리며 얇게 부쳐 준다. 8. 재료 볶기 : 채 썬 호박과 당근을 기름 1큰술 두른 팬에 재빠르게 볶아 펼쳐 식혀준다. 이때 소금간 살짝 뿌려준다. 버섯, 고기도 같이 볶아 준비 한다. 9. 마무리: 재료들을 조화롭게 돌려 담아낸다. ※Tip : 구절판에 겨자장을 곁들이면 더 맛있게 즐길 수가 있다. 겨자장 소스 : 식초 3큰술, 설탕 2큰술, 물 1큰술, 발효 겨자 2/1술, 참기름 2/1술을 잘 섞어 준비한다. 박정남 전통음식칼럼니스트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외식산업학 박사 △안동 1호 조리기능장 △안동종가음식체험관 연구원장 △대구가톨릭대학교 산학겸임 교수 △(주)예미정별채 수석셰프 겸 대표

2025-02-04

기업 혁신 왜 실패하는가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현대 기업은 대부분 혁신을 도입하여 추진하고 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고 혁신 성공 수준이 그 기업의 발전 정도를 가름하기도 한다. 많은 기업이 혁신을 도입하지만 성공한 기업은 많지가 않다. 부분적 성공한 기업은 많으나 일하는 사고, 일하는 방법이 조직문화가 되는 정도의 성공한 기업은 드문 것이다. 기업 혁신이 실패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비전 설정, 전략 수립, 목표 설정 및 목표 달성을 위한 혁신의 방법론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운영 제도를 최적화 하기도 한다. 혁신을 오래 한 기업들이 나타나는 증세가 매너리즘에 젖거나 ‘혁신을 위한 혁신’을 하는 경우 실패하게 된다. 기업 혁신 분야는 제조기업이 주로 하는 프로세스 혁신, 제품 혁신, 비즈니스 모델 혁신이다. 이중에서 생산 프로세스 혁신이 일반적인 활동이다. 기업들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혁신을 시도했고, 혁신 전담 부서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많은 기업의 혁신 성과는 기대만큼 좋지 않다고 하고 혁신 피로감 등 저항감에 부딪쳐 실패하기도 한다. 2012년 취업포털 사람인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직장인의 74%가 혁신에 피로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 사유는 무엇인가. 첫째, 혁신을 위한 혁신이기 때문이다. 혁신의 필요성은 누구든 인정하지만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 ‘혁신을 위한 혁신’의 타성에 젖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혁신에 대한 절박감이 없어 부가적인 업무로 취급한다. 경영자의 관심 부족과 구성원의 역량 미흡, 보여주기식 혁신 행정이 어우러져 존재감 없는 ‘혁신 쇼’를 연출하는 것이다. 혁신이 조직문화에 스며들지 못하면 혁신 반감만 키우게 된다. 둘째, 발등에 불을 끄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미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경영자는 없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대응하다 보면 경영 현안과 단기성과에 매몰돼 미래 준비에 소홀하게 된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임원들이 단기 성과에 집착하게 되어 미래 준비에 관심이 적게 마련이다. 셋째, 한 번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조직문화이다. 혁신이 쉽지 않다. 원래 본질이 그렇다. 사람의 속성도 강한 동기부여 없으면 변화를 저항하게 되고, 억지 추구하다 보면 부족하거나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실패를 미래 성공의 밑거름으로 활용하는 끈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넷째, 전임자의 혁신을 인증하지 않는 것이다. 혁신을 제대로 성과를 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혁신을 조직문화로 승화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CEO의 퇴임과 함께 색깔이 바뀐다. 동물적 역사를 쓰고 마는 것이다. 국내 전문 CEO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3.6년에 불과하다. 전임자의 정책을 이어받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렇듯 기업의 혁신은 다양한 변수로 흔들리거나 실패하게 된다. 혁신 성공의 길은 지속성에 있다. 전문 경영인 체제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경영 비전을 제대로 설정하고 과정의 목표 달성을 위한 제도화, 시스템화 하여 반복과 지속성이 이어지면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조직문화가 되어 혁신 성공의 길로 가는 것이다.

2025-02-04

가족의 소통과 가훈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긴 설연휴 끝에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마냥 기다려지고 설레기만 하던 설날의 감흥이나 명절의 풍속도도 어언간에 많이 바뀌고 달라진 것 같다. 길게 이어지는 ‘황금 연휴’에 해외여행이나 국내여행을 떠나는 것은 예사이고, 모바일 생활환경의 변화로 사이버 세배나 영상통화, 보드게임 등의 형태로 가족과 만나지 않고도 명절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가족들과 함께 전통적인 음식을 만들고 차례를 지내며 전래놀이를 하는 풍습이 유지되는 곳도 많아서, 요즘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명절문화로 자리잡아 가는 듯하다. 설이나 추석 같은 민족 대명절에도 가족이나 친지들의 만남이 뜸하거나 아예 없다보니 덕담이나 근황을 나누고 소통하는 마음도 서먹하고 성글어질 수밖에 없어지게 된다. 가족과의 소통과 만남은 단순히 말을 나누고 그냥 얼굴 보는 것을 넘어, 서로의 존재가치를 깨달으며 아껴주고 챙겨주며 확인하는 소중한 계기가 아닐까 싶다. 소통이나 대화의 시간이 줄어들고 단절되면 그만큼 가족 구성원 간의 도타운 정을 느끼기도 어렵고 가족애도 갈수록 식어지게 될 것이다. 그 이면에는 희대의 총아같은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적잖이 한몫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한 측면에서 현대사회에 있어서 가족의 의미와 가훈이 시사하는 바는 생각 이상으로 다소 희석되고 퇴색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가족의 친밀함과 따스한 정은 서로 부대끼며 스스럼없이 소통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배어나듯이, 가훈 역시 가족 구성원들의 한결 같은 마음과 따스한 인식으로 수긍하고 되새기면서 지켜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선 가족 간의 원만한 소통과 대화, 융화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른바 가훈(家訓)이란, 한 집안의 어른이 그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주는 가르침으로서 지켜야 할 근본 도리를 짧게 또는 설명을 곁들인 문장으로 전하는 훈화라 할 수 있다. 즉, 가훈의 내용은 주로 훈계, 자녀교육, 마음가짐, 몸가짐, 건강관리, 대인관계, 재산관리, 관혼상제, 관직생활 등의 내용을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가훈은 우리들의 가정을 화목·단란하고 건실하게 하기 위한 전통적인 집안 교훈으로, 우리 선조들은 그 자손들의 장래, 행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신중하고 정성스레 가훈을 지어 가르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핵가족 중심의 사회에서는 가훈이 뭔지도, 아예 없는 가정이 많아 자녀 훈육과 관련된 전통의 소중한 가치가 점차 사라지는 듯해 아쉽기만 하다. 그러한 차제에 애써 가훈을 보급이라도 하듯이 설날부터 가훈을 붓글씨로 써주며 두루 알리고 나눔을 실천한 곳이 있다. 지난 설날 낮부터 포항문화원 주관의 ‘2025 설맞이 포항전통문화한마당’ 행사장에서 포항서예가협회와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이 합동으로 포항의 명소 영일대 누각 주변을 찾은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새해 소망과 가훈 써주기 재능기부활동을 펼친 것이다. 묵향 머금은 가훈을 어린 자녀들과 함께 받아들며 흡족해하는 가족이 가훈을 통해 가족애를 느끼고 자녀들에게 꿈과 사랑을 심어주어, 가정에 온화함과 희망의 가풍이 가득하길 기대해본다.

2025-02-04

한파특보

남도의 어느 외로운 섬의 빈 절로 훌쩍 내려간 어느 벗이 동영상으로 마당에 쌓인 눈을 비춰준다. 작년 여름 위암수술을 하기도 했던 그다. 올 한해 건강했으면 한다. 서울에 올라오면 일주일도 채 안 돼 내려가는, 이제는 섬사람이 되어버린 벗은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끼 발동이다. 나이 들면 반드시 필요한 병원도 마트도 먼 첩첩산중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그가 약간은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럽다. “어서 마당에 쌓인 눈이나 좀 쓸어”하니 “곧 녹을 텐데 뭐”하며 게으름을 떨려한다. 어제는 서울에서 재를 마치고 나오는데, 손발이 얼어 깨질듯 한 강추위를 더는 참지 못하여 재빠르게 돌아왔다. 오늘 중으로 아마 벗은 심심하여서든, 생활에 불편을 느껴서든, 빗자루를 들것이다. 그는 쌓인 눈을 쓸다가 숨을 고르며 우두커니 서 있을 것이다. 빗자루를 세워두고는 지난 세월이 그립거나 지우려고 곧 녹을지도 모르는 눈 위에 누군가의 이름 석 자를 쓸지도 모른다. 얼은 제 몸이나 화르르 군불에 녹이려 군고구마를 굽고 쉰 김치에 막걸리 한 병에 얼큰히 취해서 허무와 고독에 몸부림 칠 지도, 살아가며 나이를 먹어가며 얻어낼 수 있는 건 딱 혼자라는 사실밖에, 살아간다는 건 결국은 버리는 연습이다. 명예도 권세도 가족도 지인도 사랑도 증오도 더 버릴 것이 없어질 때엔 홀가분하게 내 몸조차도 버리는 것이 인생의 수순이다. 이렇게 다 버리면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흘러가는 강물 같은 과거와 그리고 현재, 미래도 어느 날 모두 허무의 바다로 첨벙 사라질 터이다. 나는 사랑하여서 집착하지만, 떠나려는 너를 잡아두는 미련은 접자라는 공식을 비로써 깨칠 때, 한 세월이 더없이 홀가분해 질 테지.

2025-02-04

경북형 광역비자, 인구소멸 막는 해법되길

경북도가 제안한 외국인 광역비자제가 올해부터 본격 시행된다. 광역비자는 중앙정부 대신 지방정부가 지역별 특성에 맞춰 외국인에게 비자를 발급하는 제도다. 지역실정에 밝은 지방정부가 이민정책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법무부는 지난해 12월 1일 “광역지자체가 지역 특성에 맞춘 비자 요건을 설계하면 승인하겠다”면서 광역형 비자시범사업을 공고했다. 사업방식은 지방정부가 지역 특성에 맞는 비자 발급 요건과 모델을 설계해 제출하면, 법무부 심의위원회를 통해 시범사업 대상 지역과 비자쿼터를 확정하는 형태다. 법무부는 앞으로 외국인 이민이나 고용 정책에 시·도지사협의회장,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장을 심의위에 참여시킬 계획이다. 경북도는 조만간 시·군, 경제단체, 기업을 대상으로 설명회와 수요조사를 한 뒤 이번주내에 법무부에 공모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광역비자를 받고 입국한 외국인은 기업의 전문·기능인력, 노인복지시설 요양보호사, 관광·요식업 분야에 취업한다. 광역비자제도는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민선 8기 취임과 함께 처음 제안한 이후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으며, 외국인 인력고용과 지역별 배분 등을 포함한 비자사무를 지방정부가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경북글로벌학당, K-드림외국인지원센터 등 외국인의 지역 적응과 취업·정착을 지원하는 조직을 구축하고 있는 경북도로서는 광역비자제도가 시행되면 외국인 인력이나 유학생 유치에 있어 타 시도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 광역비자제도 도입 목적은 비수도권 지방정부의 인구소멸을 막아보자는 것이다. 경북도를 비롯해 우리나라 비수도권 지방정부의 인구 소멸위기는 심각한 상황이다. 중소도시 소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인구정책 패러다임을 외국인 유치 쪽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곧 초등학교가 없는 기초자치단체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광역비자 도입이 경북도의 미래 성장동력이 되려면 경북도가 철저한 수요조사와 함께, 외국인 노동인력이나 유학생들의 안정적인 정착 방안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2025-02-03

신념, 독선 그리고 민주주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를 흔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고 한다.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잘 갖추어졌으나 다수 국민의 ‘이기적·극단적 정치의식’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 붕괴와 히틀러(A. Hitler)의 국가사회주의 출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떤가? 정치인과 국민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민주주의 보루인 언론과 사법부는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불행하게도 진영정치와 여야의 극한 대결, 증오와 적대의 광장정치, 언론의 진영화, 사법의 정치화, 시위대의 법원 난동 등은 한국 민주주의의 총체적 위기를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독선에 빠진 신념의 양극화’이다. 보수와 진보는 정치사회문제를 인식하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그럼에도 진영정치에 매몰된 극단주의자들은 사이비종교의 광신도처럼 행동한다. ‘정치의 종교화’는 ‘정치적 신앙인’을 낳고 맹신(盲信)을 부추긴다. 고야(F. Goya)가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고 했듯이, ‘광신’이 ‘이성’을 지배하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신념’과 ‘독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간은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신념의 절대화’가 독선이다. 나에게는 신념이지만 남에게는 독선이 될 수 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독선은 배타적 흑백론이다. 나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의 신념을 배척하는 것이 바로 독선이다. ‘생각의 차이’를 통일하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민주주의는 서로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작동할 수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랫(D. Ziblatt)은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운 제도”라고 하면서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감정의 양극화’, 즉 독선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고 했다. 때문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핵심규범인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위해서는 신념이 극단화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늘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타인의 견해를 존중하고 소통할 수 있는 ‘정신적 유연성’과 ‘균형감’이 중요한 까닭이다. ‘극단’과 ‘광기’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반지성주의를 선동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독선의 광풍’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 독선에 빠진 ‘광신과 광신의 충돌’이다. 문재인 정권도, 그리고 윤석열 정권도 ‘독선에 빠진 신념정치’로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 두 정권은 똑같이 독선과 아집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자는 ‘나의 신념’을 강변하기 전에 먼저 ‘나의 독선’을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흑백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회색의 농도’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흑백의 순수성’을 고집하지 않고 ‘회색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꽃피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민주공화국’ 구성원들이 가져야 할 ‘공화(共和)의 정신’이다.

2025-02-03

포항·구미도 관세 위기, 총력 대응 절실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캐나다·멕시코산 수입품에 25%, 중국산에 10%의 추가 관세를 물리면서 예상됐던 미국발 관세 전쟁이 시작됐다. 캐나다와 멕시코가 즉각 반발해 25%의 보복관세를 선언했고, 중국도 세계무역기구(WTO)에 미국을 제소키로 하는 등 맞서면서 글로벌 시장 경제가 대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의 배경은 불법 이민자 등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웠지만 내용적으로는 미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내는 나라를 대상으로 한 무역전쟁 선포다. 캐나다, 멕시코, 중국은 미국 무역흑자 상위 3위국이다. 한국은 대미 무역흑자 8위국으로 다음 타깃의 대상이다. 미국은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거대시장이다. 특히 많은 국내기업들이 멕시코 등에 공장을 차려 우회 수출하고 있어 미국의 관세정책이 본격화 될 경우 한국경제에 미칠 파장이 심상찮다. 대구와 경북도 트럼프발 관세 폭탄이 비켜갈 수 없는 곳이다. 포항경제의 중심인 철강과 이차전지, 구미의 반도체 산업도 미국의 관세 정책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이미 반도체, 철강, 자동차 부문에 대해서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바도 있다. 지금 포항의 철강산업은 저가제품 공세에 시달려 현대제철 2공장의 가동이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트럼프 관세 정책이 발표되면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수도 있다. 또 포항지역 수출 1위 품목인 이차전지까지 타격을 받게 되면 포항경제는 매우 심각해질 수 있다. 구미 전자와 반도체 산업도 비상이기는 마찬가지다. 자동차 부품산업이 많은 대구의 제조업 전반에도 트럼프발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발 관세 폭탄에 대응할 대책이 나와야 하나 탄핵정국으로 정부가 어수선해 걱정이다. 정부는 단단한 각오로 미국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 지방정부와 상공계 등 지방경제 주체들은 위기의식 속에 함께 지혜를 모아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한다. 특히 기업은 혁신적 기술 개발로 독자적 경쟁력을 갖추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

2025-02-03

정치 불안 속 지갑 닫는 서민들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지난해 12월과 올 1월 사이 갑작스런 비상계엄 선포와 연이은 국회의 대통령과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 국방장관과 육군의 고위 장성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어수선함 속에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시작되는 등 정치권에선 극도의 불안이 지속되고 있다. 국민들은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로 갈려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선 난동에 준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비정상적이고 상식을 벗어난 상황이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 현실이 이러하니 사람들의 소비심리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서민들은 가뜩이나 얇아진 지갑을 닫고, 식당이나 옷가게를 운영하는 소상공인들은 “코로나19 사태 때보다 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한숨을 쉰다. 최근 통계청은 ‘2024년 12월 및 연간 산업활동 동향’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재화 소비를 뜻하는 소매판매액이 2022년 이후 3년 연속 줄어들었고, 감소 폭 역시 커졌다. 1995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장 기간의 감소라고 한다. 소매판매지수는 재화의 소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소비재별 판매는 다양한 분야에서 모두 줄었다. 승용차 등 내구재가 -3.1%p, 음식료품 등 비내구재는 -1.4%p, 의복 등 준내구재 또한 -3.7%p의 감소폭을 보였다는 게 통계청의 설명이다. 높은 물가와 고금리라는 경제적 악재에 더해 정치적 혼란까지 겹친 2025년 2월. 입춘이 왔음에도 꽁꽁 얼어붙은 땅은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다. 매서운 삭풍 앞에 선 한국의 정치·경제 상황. 봄소식은 언제 전해질 것인지. 국민들은 답답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2-03

정치와 어떤 감정들

허민문학연구자 설 연휴에 정치 토론 프로를 우연히 봤다. 마침 공방이 격화되는 시점이었나보다. 한 토론자가 열변을 토했는데 상대 패널은 감정적이라고 일축했다. 논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들리진 않았는데 반론하기 어려웠나 싶었다. ‘감정적’이라는 언사는 이처럼 ‘논리’와는 반대되는 뜻으로 동원되곤 한다. 하지만 감정과 논리는 그렇게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어떤 정책도 대중의 감정에 우선 어필하지 않으면 실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현실정치의 이권은 감정과 논리를 매개하는 설득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의 확산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정치가 인간의 어떠한 마음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악감정에 의거한 정치’의 출현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인간에겐 누군가를 돕거나 아껴주고 싶은 좋은 마음이 있는 반면, 타인을 질시하거나 미워하는 나쁜 감정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 좋은 마음의 확산을 지지하고 나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일 텐데, 이와는 반대로 흐르는 경향이 사회를 지배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는 자기의 피폐한 처지를 납득하기 위해 원망할 상대를 찾아 나설 뿐이다.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자명하게 수용하고,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차원의 지평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멀리하는 태도가 팽배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꼭 그런 것 같다. 가령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자는 의견이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주장이다.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명목이지만 내용의 실상은 다르다. 구체적인 분석에 입각해 있기보다는 그저 청년 남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사회의 몫이 여성가족부에 의해 빼앗기고 있다는 추상적인 피해의식의 확산일 뿐이다. 물론 국가 기구나 정부 부처 등의 형평성을 따질 수는 있다. 그러나 형평에 맞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없애버리면 된다는 식의 해결이 전부일 순 없다. 적어도 제대로 된 정치라면 무언가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처지를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파악하고, 이를 살피기 위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란 무언가를 빼앗을 수도 무언가를 나눌 수도 있게 한다. 과연 오늘의 정치는 어떤 감정에 의거하고 있나?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계급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의 폐단을 우리는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 그러다 이제는 세대로, 성별로 갈라치기 하는 정치가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권력 쟁취와 유지를 위해 사람들의 악감정에 어디까지 편승해갈지 모르겠다. 이번 서부지법 폭동 사태도 우연이 아니다. 사법 체계와 헌정질서의 근간을 위협하는 집단적 폭력행사에 엄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도 부족할 판에 그들의 삐뚤어진 감정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라. 시라이 사토시는 ‘악감정에 의거한 정치’란 ‘파시즘’에 다름 아니라고 정의했다. 정확한 진단이라 생각한다. 역사의 문전 앞에 당도한 파시즘에 저항해야 한다. 부디 혼란스러운 최근의 정세를 계기로 한국의 정치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나약한 본성’으로부터 빠져나오길 기원해 본다.

2025-02-03

사회과 부도 5-6

강길수 수필가 업무차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 갔다. 1주 정도 낮에 네댓 시간씩 머물며 해야 할 일이다. 학교 당국의 허락을 얻어 한 교실을 임시 사무실로 쓰게 되었다. 첫날, 교실 창가에 ‘사회과 부도 5-6’이라 고 제목이 적힌 빨간색 커버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교육부 검정(2022년 8월 31일)을 마친 ‘비상교육’이 발간한 책이다. 평소 지도에 관심이 있던 터라 책을 열어보았다. 뒤표지에는 책 주인의 학년과 이름이 적혀 있고, 내부는 깨끗했다. 세계지도, 우리나라 지도가 비교적 상세하게 잘 나와 있다. 뒷부분에는 사회와 관련된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실렸다. 초등학교 5, 6학년의 책인데도 성인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70쪽부터 91쪽까지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그림과 함께 요약, 소개하고 있었다. 내용을 어떻게 서술했을까. 호기심에 살펴보았다. 그 결과, 주목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나타났다. 첫째, 삼국 건국 기술을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순으로 했다는 점이다. 건국연대 순은 신라(BC57), 고구려(BC37) 백제(BC17), 가야(AD42)이다. 왜일까. 둘째, ‘일제의 침략과 광복을 위한 노력’(2쪽)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조선의 개항과 근대 개혁운동’(1쪽)이나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6·25 전쟁’(1쪽)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일제 침략, 광복 노력에는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국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 ‘광복을 위한 노력’이 작은 제목으로 들어있다. 셋째,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6·25 전쟁’이 과소 평가되고 있다, 남북한 각각 정부수립의 배경이 되는 38선 분단과 소련군의 북한 진주, 미군의 남한 진주, 군정, 건국 같은 역사가 없다. 또, 6·25 전쟁이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군의 불법 남침이란 사실도 없다. 넷째,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서 6·25 전쟁 직후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현실 기술이 없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며 새마을 운동으로 국민을 계몽하고, 경제발전을 이끈 탁월한 지도자의 역할, 산업화 세대의 피땀 어린 희생,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 같은 서술이 없다. 경제발전이 저절로 된 것 같이 착각하게 한다. 왜 경제발전에 반쪽, 경제성장 문제점 해결 시민운동에 같은 반쪽을 배분했을까. 다섯째,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에는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 신군부를 반민주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시대를 학생, 산업일꾼으로 살아온 필자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때가 서민 살기에는 민주화 이후보다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귀족노조도 없고, 정규직·비정규직 차별도 안 심했으며, 시민들 삶의 불안도 훨씬 덜했으니까. 이 사회과 부도는 왜 백제를 1순위로 잡았을까. 또, 일제 침략에 맞서는 활동 서술에 홍범도와 김좌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만 크게 다루었을까. 아동도서에 어떤 정치적 보이지 않는 손이 스민 게 아닌지 모르겠다. 솔직한 독후감은, 우리 역사가 자랑스럽다는 마음이 안 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역사책이 나라와 민족의 자긍심과 희망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찌 될까….

2025-02-03

불안하십니까

불안하다. 항상 불안하다. 나는 왜 불안한가.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나의 불안에 대해 생각해본다. 첫 번째, 나의 불안은 늘 무언가 해야 한다는 데서 온다. 매주, 격주, 매월 신문에 글을 쓰는 생활을 10년 넘게 하고 있다. 원고를 하나 완성하고 나면 다음 마감까지 여유가 생기지만 시한부다. 항상 무언가 써야 한다는 것, 쓰지 않아도 될 때조차 써야만 한다는 강박. 그것이 내 불안의 제1근원이다. 논문을 쓰면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 시를 쓰면 논문을 써야 한다는 초조함이 나를 갉아먹는다. 두 번째, 나의 불안은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무언가 되어야만 하지만 무언가가 되는 것에 계속 실패하고 있다는 데서 온다. 변변히 자리를 잡지 못한 계약직 비전임 강사 생활은 세월이 쌓일수록 불안을 키운다. ‘이대로 실패한 루저가 되어 한번 뿐인 생을 망칠지 몰라’, ‘지금껏 잘못 걸어왔고 계속 가봤자 이 길 끝엔 아무것도 없을 거야’ 따위 내 생에 대한 거시적 불안부터 ‘방학 때는 급여가 지급되지 않는데 이번 달 대출이자는 어떻게 갚지’, ‘이번 학기를 마치면 계약이 종료되는데 가을부터 당장 뭘 해서 먹고 살지’ 같은 생계 관련 미시적 불안까지 나를 감싼다. 만성화된 불안은 건강, 대인관계, 연애와 결혼 등에도 전이되어 불안의 합병증을 일으키고 있다. 홍국, 오메가3, 밀크시슬, 프로폴리스, 비타민, 양배추진액, 홍삼, 차전자피 등등을 챙겨먹는 건 과도한 건강염려 탓이다. 불안에 잠식당하면서 사람을 대할 때도 활달함과 당당함을 잃어가는 듯하다.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전화를 기피하는 이른바 전화공포증이 나한테도 있는 모양이다. 카카오톡이나 SNS 메신저 등 타인과 대화창이 열리는 것 자체를 꺼린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백 개다. 지금 아무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무언가 되어야만 하지만 무언가가 되는 것에 계속 실패하고 있는 내 처지에 스스로 위축되어 연애와 결혼을 아예 포기했다. 그러니까 그 포기가 또 불안하다. 이렇게 혼자 살아도 될까. 이대로 늙어 죽으면 누가 내 장례를 치러줄까. 내가 자주 꾸는 꿈이 있다. 꿈에서 나는 종종 공연이 바로 내일인데 아직 대본을 하나도 외우지 못한 배우이거나 무대 연습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연출자가 된다. 그 꿈을 꾸는 날엔 꿈속에서도 식은땀이 흐른다. 어제는 그 꿈이 살짝 다른 형태로 변주되어서, 시합이 내일인데 라이트급 한계 체중 70kg으로 감량을 하지 못한 격투기 선수가 되어 있었다. 라이트급으로 감량을 하려면 20kg 이상을 하루만에 빼야 하는데, 패딩을 입고 주섬주섬 줄넘기를 집어 들면서 너무 불안했다. 그 불안의 감각은 꿈에서 깨고 나서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요양병원으로부터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작년 12월 19일이다. 그날부터 할머니가 돌아가신 새해 1월 14일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언제 전화가 울릴까 노심초사하며 불안해했다. 장례를 마치고 한 달간 붙잡혀 있던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도쿄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코로나 이후 첫 해외 여행이었다. 우에노 동물원과 도쿄 근교 시골마을인 하코네를 걸으면서 마음이 편했다. 불빛 하나 없는 산 중턱의 료칸에서 쏟아질 듯 글썽거리는 별들을 바라봤다. 아무 근심 없이 밤하늘의 별을 본 게 얼마만인가. 비록 5박6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여행하는 동안만큼은 불안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열차 시간에 늦을까봐, 점찍어둔 음식점이 문 닫았을까봐 불안했는데 그런 불안은 사실 설렘에 가깝다. 그렇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감량 실패한 격투기 선수의 꿈을 꿨다. 다시 생각해보자. 도쿄에서 하코네로 가는 로망스카 특급열차를 타러 가던 아침과 요코하마의 이름난 노포 키후네 스시로 가던 저녁의 불안 혹은 설렘을. 그래!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불안을 설렘으로 바꾸면 된다. 불안을 불안으로 느끼는 대신 떨림으로 감각하자. 아직 쓰이지 않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내 안에 꿈틀대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혼자 늙어 죽을 게 불안하면 사랑을 하자. 사랑을 하려면 우선 전화를 잘 받고 카톡을 확인하자.

2025-02-03

사랑의 형태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언스플래쉬 이번 설엔 본가에 내려 갔다 왔다. 내 본가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11km 떨어진 영암으로, 현대삼호중공업 옆에 위치한 작은 사원 아파트다. 서울 용산역에서 ktx 열차를 타고 두시간 반, 그리고 차를 타고 삼십여분 더 들어가야 하는 거리.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자취방에서 출발한다면 총 세시간은 너끈히 걸리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쉽게 먹어지지 않는 터라 자주 내려 가지 않지만, 이번 명절엔 꼭 내려오라는 부모님의 안부 전화에 나와 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집을 내려가게 되었다. 2년여만에 찾은 집, 집 또한 나이를 먹는 탓인지 세월의 흔적이 집 곳곳에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깔끔한 성격의 어머니가 잘 닦고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욕실 문이 낡았다던가 하얗던 안방 벽지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등의 흔적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젠 부모님의 드레스룸으로 변한, 내가 쓰던 방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집이 얼마나 포근하고 안락한 지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어린 날에 새긴 나만 아는 낙서 자국들이라던가, 베란다 벽면에 붙어 그대로 시멘트처럼 굳어버린 껌 등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그 순간 타지에서 지니고 있던 모든 긴장감들, 가슴 한 가운데에 얹혀 있던 책임감과 답답했던 모든 것들이 몸 아래로 묵직하게 내려갔다. 동시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몸의 불필요한 힘들을 내보낼 수 있게 되었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어떠한 소음을 내지 않으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주 조용한 시골. 새 소리와 닭 소리와 창문을 열면 간간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몸을 맡기고 정말 오랜 만에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정리정돈이 깔끔한 탓에 이 년 만에 찾은 집이지만 필요한 물건을 한 번에 잘 찾을 수 있고, 방마다 좋은 냄새가 나며, 풍부한 식재료, 건강하게 만들어 먹는 집밥,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나누는 대화 등.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요새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퍽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작은 거실에 둘러 앉은 우리 다섯 명의 식구를 보며 다시금, 우리는 어떤 지점에서 서로 상처를 받는지, 어떤 특정 말투와 뉘앙스에 불편함을 느끼는 지에 대해 다시금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부터 함께해온 가족이기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쉽게 느끼지만 그만큼 연약하고 불안정하고 완전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종종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입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간섭을 하고, 관여를 하고, 어느 때엔 또는 지나치게 방관한다. 부모님은 날이 갈수록 세월의 흔적이 얼굴과 몸에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여전하시고 나와 동생들은 계속해서 어리기만 한다. 부모님은 우리가 자식으로서의 기대감과 의무를 늘 생각하시며 바라고, 나와 동생들은 늘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있거나 또는 무의미한 반항을 계속 한다. 집에 머무른지 삼일 차가 되면 화기애애하던 우리의 관계는 또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뭉스러운 사랑의 형태. 또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언행과 불필요한 행동 등은 어딘가 삐뚤삐둘한 날이 잔뜩 서서 서로를 찌르기 바쁘다. 다시금 처음부터 옳은 방향으로 되돌리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대화의 내용으로 결국 또 서로에게 무안함을 주기 위해 불같은 싸움이 던져지지만 민망하게도 다시금 쉽게 식고 만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값비싸고 좋은 음식 앞에선 다시 서로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 좋은 부위의 고기를 내어주며, 집에 있는 신선한 식재료를 내 가방에 넣어주고, 간간히 나의 안녕과 건강을 빌어주는 부모님의 말에는 또다시 진실된 사랑을 느낀다. 어딘가 서툴고 이상하고 요란하지만 어찌됐든 존재하는 사랑의 형태. 너무 어설퍼서 가까이에 갈 때마다 서로의 가시로 마음을 쿡 쿡 찔러대고 나는 한 번 찔린 가시에 또다시 지나친 엄살을 부리지만 그래도, 이 순간이 있어 타지에서의 삶의 원동력이 생기고, 다시금 출근을 하며, 내 생활과 나를 보살 필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무엇이든 늦은 때는 없다. 일도, 꿈도, 사랑도 지금 내가 원하는 때가 있다면 결코 늦은 때란 없다. 그러니 이 의아한 사랑의 형태 속에서 더는 의문스러워한다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 부모님의 어설픈 사랑을 인정하며 솔직해질수록 내 삶의 원동력은 더욱 선명해지고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금 용산에서 서울 자취방으로 가는 지하철 안이었다. 수시로 변하는 창문에서 쓸쓸히 웃고 있는 나의 표정의 언뜻 비쳤다. 올해도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

2025-02-03

풍금

소리는 잠자는 풍경을 깨운다. 옛 노래를 들으면 세포들이 서서히 돌기를 세운다. 그것은 나를 추억이라는 간이역으로 데려간다. 과거와 오늘의 내가 만나는 접점, 그 플랫폼에 내리면 유년 시절에서 출발한 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 풍금이 있네.”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폐교가 된 모교를 정리하다가 풍금 하나를 발견했단다. 풍금? 순간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음표들이 술렁거렸다. 잠시 통화하는 동안 마음은 벌써 신발을 신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 운동장에 들어섰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운동장에는 손질 안 된 잡풀들이 무성했다. 이순신 장군의 긴 칼은 반 토막이 나 있고 비바람에 살이 튼 폐타이어는 모래 군데군데 힘없이 박혀 있다. 그네는 무료함에 지쳤는지 저 혼자 바람에 흔들린다. 녹슬고 망가진 폐허 속에서도 담 모퉁이를 따라 들국화는 방긋 피어 나를 반겼다. 문짝이 사라진 교실 입구에는 2학년 2반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짝 잃은 실내화, 아이들을 긴장 시켰을 회초리와 교재, 검정이 내려앉은 부러진 분필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산산조각이 나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유리와 잡다한 것들이 흩어져 교실은 을씨년스러웠다. 다 떠나고 홀로 남아 무섭다는 듯 풍금이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풍금에는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이들이 붙어 이 반 저 반으로 옮겨 다니던 자신의 인기를 잊은 듯 조용하다. 오랜 시간 자신의 이름은 물론 목소리조차 잊었을 그것. 풍금의 뚜껑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열었다. 두려움을 토해내듯 뿌연 울음을 쏟아냈다. 손 때 묻은 건반 위에 내 손을 포갰다. 검은 건반, 하얀 건반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자 잠자던 음표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음표들은 도돌이표를 돌아 어린 시절로 날아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총각 선생님은 인기가 좋았다. 축구도 잘 하고 여러 과목도 잘 가르쳤다. 그런데 음악 시간이면 나에게 건반을 맡겼다. 선생님은 풍금을 켜지는 못했던 것이다. 풍금 의자에 앉으면 내가 선생님이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졌다. 발판을 있는 힘껏 꾹꾹 밟았다. 선율이 교실에 가득 퍼지면서 70명의 아이들은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반주가 멈추면 아이들의 노래 소리도 멈추고 반주가 시작되면 노래 소리는 풍금의 선율을 타고 느티나무를 돌아 담장을 넘었다. 나는 음악 시간마다 탈피를 끝낸 나비처럼 날개가 돋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성악을 전공하며 이곳저곳에 초청을 받아 노래를 불렀다. 졸업 후에는 지역합창단원으로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숨표에서 숨을 고르고 쉼표에서 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탓일까. 가을비가 내리던 아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큰 돌이 박힌 듯 목이 갑갑했다. 일주일을 버티다 병원에 갔다. “노래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경아 작가 성대를 잘라 냈다. 목소리가 갇히자 마음의 문도 조금씩 닫혀갔다. 모든 것들이 그늘져 보였다. 뻐꾸기 울고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음침하게 들렸다. 합창단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돌아서는 나를 배웅 하는 건 커튼이 내려 온 텅 빈 무대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공연장을 찾았다. 구석진 객석에 숨어 앉았다. 막이 열리고 합창단원들은 앞줄부터 무대를 채웠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첫 곡이 울렸다. 동료들의 목소리가 다 모인 자리에 내 목소리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노래책을 끄집어냈다. 성냥을 그었다. 그 후 오래도록 음악과는 결별했다. 풍금을 집으로 옮겼다. 반질반질 닦았다. 건반 하나하나에 잠자는 소리를 깨우고 싶었다. 다리를 모으고 발판 위에 발을 올렸다. 페달을 밟으며 건반을 눌렀다. 소리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 한 곡을 불렀다. 폐허 속에서도 꽃이 피듯 내 마음도 환해졌다. 풍금은 내가 잃어버린 소리를 15년 만에 찾게 해 주었다. 집안 가득 내 마음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김경아 작가

2025-02-03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제가 사는 숙소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고마바 공원 내에는 일본근대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일본 근대문학과 관련한 17만 점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데요. 한국근대문학이 전공인 저는 이곳을 틈나는 대로 방문하고는 합니다. 일본근대문학관에서는 방대한 소장 자료를 바탕으로 정기적으로 기획 전시도 이루어지고, 문학전문가들이나 현역 인기 작가들의 따끈따끈한 강연회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2024년 11월 30일부터 2025년 2월 8일에 걸쳐서는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가 개최되는데요. 너무나도 문제적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이 전시는 참으로 풍성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전시는 크게 ‘三島愛(미시마에 대한 사랑)’, ‘書物愛(책에 대한 사랑)’, ‘日本愛(일본에 대한 사랑)’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三島愛’에서는 미시마가 지인들과 나눴던 편지, 서명이 들어간 헌정본, 명함이나 엽서 등을, ‘書物愛’에서는 아름다운 책에 대한 미시마의 관심과 그 결과로 탄생한 미시마 유키오의 멋진 책들을, ‘日本愛’에서는 미시마의 일본 사랑을 드러낸 자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온 P대학의 K교수, K대학의 S교수와 일본근대문학관을 방문한 2025년 1월 13일에는, 전시와 함께 미시마 유키오 생의 마지막 6년 동안 너무나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시인 다카하시 무쓰로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문학관에서 다른 기획전시를 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전시와는 달리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문학관이 꽉 찬 느낌을 줄 정도였는데요. 한국인에게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부로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익숙하지만, 일본에 머물면서 느끼는 실감으로는 보통의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얼마 전 이즈반도 최남단의 시모다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갔을 때는, 미시마 유키오가 사랑했던 마들렌을 전면에 내세운 가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작품은 물론이고, 충격적인 삶의 방식으로 정신의 광기를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사실 미시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1925년 도쿄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황족과 귀족의 교육기관인 학습원을 수석 졸업하여 천황으로부터 직접 시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1947년에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엘리트 관료들만 간다는 대장성에서 9개월간 근무한 후에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숱한 명작을 발표하며, 일본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뜨거운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의 첫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미시마 유키오가 될 거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랬던 미시마 유키오가 행동의 광기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1970년 11월 25일, 할복이라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일을 말하는데요. 그는 자신이 조직한 사병단체 ‘방패회’ 회원 네 명과 자위대 총감실을 찾아가 총감을 인질로 잡고, 자위대원들을 연병장에 집합시킵니다. 그리고는 ‘절대 천황제’의 부활을 위해 자위대가 궐기할 것을 주장한 후에, 자위대 총감실에서 자살한 겁니다. 미시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천황폐하 만세”였다고 하는데요. 이 충격적인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한국인은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2018)이었습니다. 그는 도쿄대 연구원으로 일본에 도착한 3일 후에 도쿄대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TV 중계방송으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하는데요.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김윤식은 다음 해에 곧바로 미시마의 죽음을 다룬 ‘정치적 죽음과 문학적 죽음’이라는 글을 ‘현대문학’(1971.5)에 투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 글에서 김윤식은 미시마의 죽음이 “20여 년에 걸친 미국 점령 의식의 정신사적 극복의 의미”를 지닌다고 규정하였는데요. 이러한 ‘미시마식의 극복’이 패전 이후 경제 대국으로 새롭게 부상한 일본의 달라진 국제적 위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미시마는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정체성을 잃고 “무기적(無機的)이고 공허하며, 중성적인 중간색의 나라”(‘지키지 못한 약속’(산케이신문, 1970.7.7.)로 변질되어 간다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막는 방법으로 미시마는 ‘문화방위론’(중앙공론, 1968.7)을 비롯한 여러 글이나 강연에서 ‘절대 천황제의 부활’을 주장했는데요. 미시마의 논의가 무엇보다도 경악스러운 것은 천황에게 ‘국화(문화)’는 물론이고, ‘칼(무력)’까지 쥐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미시마의 주장대로라면 자위대도 천황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건데요. ‘천황이 직접 군대를 총괄하는 일본’이란, ‘황군(皇軍)’의 군홧발 아래서 피눈물을 흘렸던 우리에게는 상상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에 참석한 일본인들로 북적이는 일본근대문학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과거의 일본과 2025년의 일본이 놓인 거리(차이)를 강박적으로 재어 보는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2025-02-03

진실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김진국 고문 아직도 진실이 살아 있을까.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가 어려운 시대다. 미국의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가 2017년에 쓴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탈진실)라는 책은 한국에서까지 큰 공감을 일으켰다. 그때 이미 미국에서도, 진실이 위기에 처했다. 한국도 그렇다. 매킨타이어는 “과거에도 진실 개념 자체가 흔들리는 심각한 위기는 존재”했지만, “현실을 정치적 상황에 끼워 맞추기 위해 그런 위기를 대놓고 전략처럼 이용하는 경우는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탈진실 문제가 심각한 진짜 이유는…정치적 우위를 공고히 하려는 매커니즘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렵고, 복잡한 주장이 아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정치꾼은 허위사실을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지지자들은 그것을 믿는 상황이 고착되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는 진실을 찾기보다 우리 편이 이기는 게 관심이다. 정말 진실을 찾아내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유리한 ‘거짓’(대안적 진실)을 진실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주장한다. 이런 ‘자기기만과 망상’에 빠진 사회에서는 진영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보수건 진보건, 모든 주장이 진실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라도 자기 진영과 다른 말을 하는 순간 ‘반대편’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린다. 모두 홍길동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렇게 믿어버린다. 조국 사태가 그랬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갈라져 서로 다른 ‘대안의 진실’ 속에 살았다.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왜 조국을 기준으로 평가돼야 하나. 조국 수호(혹은 타도)가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역사적 사명이라도 된다는 건가. 정말 고약한 세상이다. 요즘 기준은 윤석열 대통령이다. ‘친윤’ 아니면 ‘반윤’이다. 윤 대통령이 언제부터 보수의 중심이었나. 민주당에서는 이재명 대표가 기준이다. 그에게 유리한 말을 해야 진보고, 개혁이다. 윤 대통령은 관저를 찾은 손님들에게 “요즘 신문과 방송은 너무 편향돼 있다. 유튜브에서 잘 정리된 정보를 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관저 주변에서 시위하는 지지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실시간 생중계 유튜브를 통해 여러분께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통 언론 대신 유튜브에 빠져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말이다. 부정선거에 대한 확신 때문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그의 말에서도 유튜브 냄새가 난다. 개인 미디어가 전통 미디어를 뒤집기 시작한 것은 팟캐스트 ‘나꼼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이던 2007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명박 후보에 대한 원색적인 조롱으로 반이명박 세력의 배설 욕구를 만족시켰다. 이제 진보 진영을 쥐고 흔들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민주당 총선 예비후보들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가 큰절을 했다. 보수 유튜버들의 영향력도 커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인데도 개인 유튜버만 골라 인터뷰했다. 김건희 여사가 유튜버에게 그렇게 당했는데도, 윤 대통령도 유튜브만 본다.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정부의 공식 보고보다 극단적인 일부 유튜버의 주장을 더 믿는다. 기자 활동을 시작할 때 복잡한 문제는 돈의 흐름을 보라는 말을 들었다. 복잡한 민·형사 사건뿐만 아니다. 일본이나 한국의 과거 복잡한 파벌정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름길도 돈이었다. 탄핵 국면에서 한 유튜버는 ‘슈퍼챗’으로 하루 만에 3천만 원을 벌었다고 한다. 자극적인 말을 할수록 돈이 쏟아진다. 서부지원 난동 때도 유튜버가 앞장서서 돌격했다. 갈등이 심하고, 민주주의가 무너질수록 흥분한 구독자가 돈을 쏜다. 진영마다 다른 ‘대안의 세상’에 산다. 민주주의가 위기다. 답이 없다. 유튜버는 돈을 벌려고 떠들어도, 유권자는 냉정해야 한다. 대안이 아니라 진짜 진실을 가려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알 일이다. 이재명 대표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윤 대통령이 재판받는다고 상상해 보라. ‘춘풍추상(春風秋霜)’과 ‘내로남불’은 상대편이 아니라 나를 경계하는 거울로 써야 한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2-02

지역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장치, 주택용 소방시설

심학수 포항북부소방서장 주택용 소방시설은 화재 발생 시 초기 진압과 대피를 돕는 소화기와 단독경보형 감지기를 말한다. 이는 화재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각 가정에 필수로 설치해야 한다. 최근 경북 지역에서는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로 인한 화재 예방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2023년 5월 경상북도의 한 농촌 주택에서 단독경보형 감지기가 새벽 시간대 화재를 감지해 거주자들이 경보음을 듣고 신속히 대피했다. 이로 인해 인명 피해는 없었으며 초기 진화로 재산 피해도 최소화했다. 같은 해 김천시의 한 주택에서도 단독경보형 감지기의 경보음으로 이웃 주민이 화재를 발견하여 초기 진화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2024 소방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경북 지역의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율은 2020년 52.7%에서 2023년 68.9%로 크게 상승했다. 같은 기간 화재 발생 건수는 약 7.3% 감소했으며,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전국적으로 15% 줄어들었다. 주택에 소화기와 단독경보형 감지기를 설치한 가정은 설치하지 않은 가정보다 화재 사망률이 현저히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택용 소방시설은 설치가 간편하고 구매가 쉽다. 주요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다양한 가격대의 소화기와 단독경보형 감지기를 판매하고 있다. 일부 온라인몰에서는 ‘선물하기’ 기능도 제공하는 곳이 있다. 이를 활용하면 가족이나 지인에게 직접 안전을 선물할 수 있다. 단독경보형 감지기의 경우 구획된 실마다(거실, 부엌 등) 설치하고, 소화기는 세대별, 층별 1개 이상 설치해야 한다. 주택용 소방시설 보급의 확산은 화재 예방과 피해 최소화에 효과적인 대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화재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고 재산 피해를 예방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화재 예방은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주택용 소방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개별 가정의 안전을 지키는 동시에 지역사회 전체의 안전망을 강화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안전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기에 이번 겨울이 끝나기 전 주택용 소방시설이 없다면 설치하자. 또한 주변 소중한 사람들에게 안전을 선물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2025-02-02

조선시대 시험 합격 발표, 환희와 탄식이 교차한 그 날!

1846년(헌종 12) 2월 12일, 이틀 전에 치른 회시(會試)의 합격자 발표날이었다. 돈화문 밖은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서찬규도 그들 사이에 있었지만 몸이 불편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족형, 덕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을 때, 급히 전갈이 도착했는데 덕우가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다른 이름은 없었으므로 서찬규는 족형과 자신이 낙방했다고 생각하며 허탈한 마음으로 마루에 나왔다. 조금 뒤에 서찬규의 자형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고는 합격 소식을 뒤늦게 전해주었다. 순간 서찬규는 꿈을 꾸는 마냥 어리둥절한 채로 잠시 굳어버렸다. 그러다 곁에 있는 족형을 보았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말끝을 삼켰다. 이 내용은 서찬규(徐贊奎·182 5~1905)의 일기에 기록된 것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재구성한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서찬규의 일기는 필사본 형태로 17년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작성 기간은 21세 때인 1845(헌종 11)년부터 37세 때인 1861년(철종 12년)까지이다. 그는 대구 달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臨齋)이다. 그래서 서찬규의 일기를 ‘임재일기’라 부른다. 1846년 2월 21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고, 이후 문과(文科)에 부단히 응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벼슬에 뜻을 접고 향촌에 은거하면서 수동재(守東齋)를 지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했다. 1883년(고종 20)에 경상도관찰사의 추천을 받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서찬규의 일기.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https : //diary.ugyo.net/)’ 서찬규의 과거 응시는 일기가 시작되는 1845년부터 확인된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 시험은 대구부(大邱府)에서 시행된 정시(庭試) 문과의 초시였다. 원래 정시 문과는 궁전의 뜰[殿庭]이나 혹은 문묘(文廟)에서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하는 한 차례의 시험으로 최종 급제자를 선발했지만, 영조대 이후부터는 1차 시험 격인 초시(初試)를 도입해 서울에서 시행했고 헌종대 부터는 초시를 지방까지 확대 설치해 시행했다. 그래서 서찬규가 이 시험을 대구에서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러나 서찬규는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 젊었고 이제 시작이었으며 비정기적으로 마련된 문과 1차 시험이었는데다가 시험장소도 자기가 사는 대구였기에 참가만으도로 도전과 경험의 측면에서 의미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서찬규는 낙방 후 불과 며칠 만에 새로운 장소를 찾아 과거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째로 도전한 시험은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생원진사시였는데, 1846년(丙午年)에 회시(會試)를 치르는 식년시(式年試)였다. 그 1단계 시험인 초시를 전년도인 1845년 8월 19일과 21일에 마침 대구부에서 시행했다. 서찬규는 19일 있었던 진사시 초시와 21일 있었던 생원시 초시에 모두 응시했으나 생원시에만 합격했다. 합격 발표가 있었던 8월 25일, 서찬규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과방(科榜)이 발표되었다. 함께 공부했던 8명 중 6명이 모두 종장(終場)[생원시 초시]에 합격했다. 나와 족형 명재씨, 족인 덕우, 구정로씨, 구상천씨, 구사로씨가 함께 응시해 합격했다. 우리 고을에서는 모두 18명이 합격하였고, 그중 우리 집안에서만 5명이었다. 오후에는 덕우가 부모님께 합격 소식을 전하러 떠나는 길을 전송하였다. 저녁이 되자 방노(榜奴)가 와서 시지(試紙)를 가져다주었다. 방성(榜聲)이 거리와 마을에 울려 퍼지니, 양친께서도 크게 기뻐하셨다.” 족형과 덕우도 1단계 시험을 합격했으므로, 서찬규는 이들과 함께 이듬해 2월 10일 서울에서 시행되는 최종 시험 회시(會試)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마침내 시험 날, 서찬규는 족형, 덕우와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 정신없이 답안지를 작성했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먼저 시험장을 빠져나와 밖에서 시험장의 풍경을 바라볼 때 그는 갖은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1846년 2월 12일, 서찬규는 회시 합격 소식을 듣고도 기뻐할 수 없었다. 함께 공부했던 족형이 낙방했기 때문이다. 같은 길을 걸었지만 결과가 갈린 현실 앞에서 그는 말을 잃었다. 환희와 탄식이 교차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기쁨이 상대의 아픔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 국학기반본부장 이 장면은 매년 연말연초마다 반복되는 현대의 입시 결과 발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합격자는 환호하고 낙방자는 아쉬움을 삼키지만 시험 결과는 끝이 아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길이 있듯이, 시험 결과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합격은 앞으로 다가올 도전의 출발점이며 낙방은 더 단단해질 기회를 제공한다. 시험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승부는 그 결과 이후의 시간에서 시작된다. 삶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며 환희와 탄식의 순간은 앞으로도 여러 번 찾아온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다음 걸음을 내딛는 힘이 된다. 매년 반복되는 입시와 결과의 풍경 속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각자가 얻은 경험과 배움이다. 서찬규의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나아갈 길을 찾는 태도가 필요하다. 결과는 지나가지만 앞으로의 길은 우리의 선택과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 국학기반본부장 최은주 경북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국학기반본부장을 맡고 있다.

2025-02-02

청년이 머물고 싶은 도시에 大邱 미래 걸어라

대구시가 지난주 대구광역시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올해 첫 회의를 개최했다. 청년정책조정위는 대구시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청년정책 전문가 등 20명으로 구성된 민간협력 네트워크다. 여기서는 지역특성에 맞는 청년사업을 발굴하고, 청년정책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마다 이와 같은 기구가 만들어져 있고 관련 정책들도 비슷한 것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수도권 집중으로 청년들이 빠져나가는 지방도시들은 청년들을 붙잡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발표된 정책만큼 청년들의 호응이 좋은 것은 아니다. 정치, 경제 등이 집중된 수도권으로 쏠리는 청년들의 마음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지역 청년들이 떠나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대구시는 청년이 찾는 젊고 역동적인 대구 건설을 위해 2017년에는 청년정책과를 신설해 각종 청년정책 개발에 힘을 쏟아왔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민선 8기에는 대구시의 산업구조를 신산업 구조로 대폭 개편해 젊은이가 선호하는 일자리 생태계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그 결과, 민선 8기 3년동안 결혼 적령기 30∼34세 청년인구가 1만여 명이 늘어난 성과를 냈다. 매년 2000∼3000명씩 줄어들던 30대 청년인구가 23년만에 증가세를 보인 것은 놀라운 변화다. 지난해는 전국 지자체 일자리 대상에 대구시가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는 청년이 있고싶어하는 도시라 말하기 어렵다. 청년들이 주목하는 대구가 되기 위해선 획기적인 정책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청년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주인공이다. 그들이 안정적으로 사회에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지방도시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대구가 전국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기발한 청년정책을 만들 수 있어야 대구의 미래도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구시는 올해 일자리, 주거, 교육, 복지문화 등에 1691억원의 예산을 들여 청년정책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전국 지자체가 추진하는 비슷한 수준의 예산과 정책으로는 승부를 낼 수 없다. 대구만의 종합적이고 특별한 청년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2025-02-02

역사교육 어쩔 것인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년 1월이 휙 하는 소리 내며 지나간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닐진대 서둘러 사라지는 시간을 생각하노라면 인생살이가 매우 덧없어 보인다. 영생불사하는 존재도 아닌 인간군상이 만들어내는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의 근저에 자리하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독성을 새삼 반추한다. 비상계엄으로 초래된 내란 사태가 어언 두 달을 넘어가고 있다. 지난 두 달 동안 거의 모든 것에 손과 마음을 놓고 사태 추이를 따라가는 자신을 보면서 무력감과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계엄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식민지의 빈곤과 무지의 상황을 이겨내고 경제 번영과 민주 제도를 안착시킨 최초의 나라. 문학과 예술로 세계를 경탄하게 하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라니?!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했을까. 민주주의는 싫든 좋든 다수결이 지배하는 정치구조에 기초한다. 문제가 생겨나면 총칼이나 공권력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렇기에 최고 행정 권력을 틀어쥔 자가 그릇된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국회를 무력화하려 했다는 사실은 묵과할 수 없는 범죄 행위다. 사태가 진행되는 가운데 서부지법에 대통령을 지지하는 폭도들이 난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국민 저항권’이란 미명으로 저질러진 폭도들의 만행은 평균적인 한국인의 의식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피비린내 진동했던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의 계엄군에 목숨 걸고 저항했던 광주 시민들은 단 하나의 방화나 난동도 저지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서부지법에 난입한 다수의 폭도가 2∼30대 ‘루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보다 더 주목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포기하다시피 한 역사교육이다. 수학능력 시험이 끝나면 수험생 전원이 까마득한 망각의 강으로 내팽개치는 역사교육. 공무원 시험을 볼 때나 다시 달달 외우는 역사교육이 문제다. 국가의 역사에는 숨기고 싶은 것과 드러내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인간의 장단점처럼, 긍정과 부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러하되 우리는 긍정과 자긍심, 자랑과 자부로 넘치는 역사보다 부정과 열패감, 우울과 패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마련이다. 치욕적인 임진왜란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기에 굴욕적인 병자호란을 당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60년 남짓한 시간대에 물질적인 풍요와 제도적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놓치고 빼먹고 눈감아버린 것 또한 부지기수다. 물질 만능과 승자독식, 지역주의와 학벌 중심주의, 이기적인 가족주의가 우리가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공동체 의식과 정신의 숨통을 조여온 것이다. 이런 상황의 근저에 자리하는 것이 입시 위주의 역사교육과 불철저한 역사의식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패배한 역사, 치욕적인 사건과 인물, 처절한 피의 살육과 정권 장악 같은 역사의 아수라판을 생생하게 교육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패-무능-타락-패거리주의’로 무장한 자들이 다시는 득세하지 못하도록 철제관에 그자들을 묻고 ‘쾅쾅’ 대못질을 해야 할 때다.

2025-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