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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국힘, 민주당 견제할 리더 찾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이 지난 3일 8·22 전당대회의 첫 공식 일정인 후보자 비전대회를 열었다.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5명의 후보는 이날 핵심 공약을 발표하며 각자의 비전을 공개했지만, 혁신의 방향을 놓고 극명하게 입장이 엇갈렸다. 오는 8일부터 대구·경북에서 시작되는 후보자 합동연설회도 이런 식으로 흐를 경우, 전당대회가 오히려 당내갈등을 더 깊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날 비전대회에서 반탄(탄핵 반대)파로 분류되는 김문수·장동혁 후보는 예상대로 당의 혁신보다 ‘단일대오’를 전면에 내세웠다. 김 후보는 첫 마디부터 “지금은 단결하는 게 혁신”이라고 했고, 장 후보는 “당론을 따르고 열심히 싸운 사람이 혁신의 대상일 수는 없다. 싸울 때 피해 있던 사람들이 전투에서 피범벅이 된 동지를 향해 손가락질 할 자격은 없다”고 했다. 반면, 찬탄(탄핵 찬성)파인 안철수·조경태 후보는 ‘내부 쇄신’을 강조했다. 두 후보는 그동안 ‘인적 쇄신’을 내세우며 윤석열 전 대통령을 두둔한 의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안 후보는 “당내 극단 세력과의 단절이 혁신의 시작점”이라고 했고, 조 후보는 “극우의 손을 못 놓는 후보가 당 대표가 되면 민주당이 국민의힘 해산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반탄파를 공격했다. 송언석 비대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발표에 앞서 “더 이상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편 가르기를 하거나 낙인을 찍는 언사를 자제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지만, 우려한 대로 발표회장은 계파 간의 갈등으로 얼룩져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지난 2일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첫 여당 대표가 된 정청래 의원은 국민의힘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 “헌법을 파괴하고 실제로 사람을 죽이려고 한 데 대한 사과와 반성이 먼저 있지 않고서는 그들과 악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입법이나 예산책정 과정에서 야당을 파트너로 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국민의힘이 이번 전당대회에서 ‘야당 해산’까지 거론하는 정 대표를 상대로 국정운영을 견제할 수 있는 리더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2025-08-05

계곡에 숨은 위험… 숫자가 경고하는 여름철 물놀이 사고

경북의 계곡과 강, 해변은 여름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물속을 향한 발걸음은 가볍고, 물가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런 풍경 뒤에는 예측하지 못한 사고가 도사리고 있다. 물놀이의 즐거움은 늘 위험과 맞닿아 있고, 사고통계가 알려주는 숫자들은 이를 침묵 속에서 경고하고 있다. 최근 5년간 전국에서 발생한 물놀이 사망자는 112명에 달한다.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장소는 하천과 강에서 39명, 계곡에서 33명, 해변과 바닷가에서 40명이었다. 사고의 주요 원인은 구명조끼 미착용 41건, 수영 미숙 38건, 음주 수영 19건, 급류에 휩쓸린 사례가 8건이었다. 대부분 충분히 예방 가능한 인적 요인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경북소방본부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수난사고로 인한 출동 건수는 각각 1142건, 1522건, 1006건에 달했다. 올해 2025년 상반기에도 이미 231건의 구조 요청이 있었고, 이 가운데 74명이 구조됐다. 특히 안동, 문경, 청송은 계곡과 하천이 발달한 지역으로 가족 단위 피서객이 많이 찾는다. 이러한 특성은 구조 요청의 빈도를 높이는 동시에 사고 가능성 또한 크게 만든다. 현장에서 구조활동을 수행하는 대원들의 목소리는 무겁다. 한 구조대원은 “출동 횟수가 줄었다고 해서 방심해선 안된다. 사람들의 경각심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익숙한 장소, 평소 자주 찾던 계곡이라도 그날의 기상 상황, 수온, 수위 변화에 따라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북소방본부는 여름철 휴가철에 대비해 해수욕장 13곳, 하천과 계곡 4곳에 시민수상구조대원 318명을 배치했다. 이들은 단순한 인명 구조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응급처치, 심폐소생술 교육, 해파리 제거, 미아 찾기 등 다양한 활동을 병행한다. 한 구조대원은 “사람들이 수영복과 물놀이 용품은 철저히 준비하면서도 안전 수칙엔 소홀한 경우가 많다. 우리 역할은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대원에게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은 한 시민은 “구명조끼 덕분에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안전 교육을 받고 나니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물놀이 사고를 막기 위한 예방 수칙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그 실천이 관건이다. 출발 전 준비운동을 철저히 하고, 음주 후 수영이나 단독 수영을 절대 하지 않으며, 구명조끼 착용을 생활화하는 것이 기본이다. 어린이들은 반드시 보호자와 동행해야 하며 장시간 수영은 자제하고 상황 발생 시에는 119에 즉각 신고하고 구조도구를 활용해야 한다. 이런 작은 실천이 생명을 지키는 시작점이 된다. 숫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속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다. 아무리 맑고 고요한 계곡일지라도, 자연은 결코 인간의 예측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수영복도, 튜브도 아닌 안전 의식일지도 모른다. 경북의 청정 자연은 사람들에게 쉼과 평온을 제공하지만, 그 속에서 안전을 지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은 위태롭게 흔들릴 수 있다. 진정한 피서는 안전에서 시작된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5-08-05

프레임 씌우기

지금 한국의 민심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가 ‘프레임 씌우기’인 것 같다. 프레임(frame)은 원래 틀이나 구조 등 가치중립적인 말이지만, 요즘은 주로 굴레나 낙인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인다. 그런 프레임은 그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 사고의 틀을 고정하고, 감정의 방향을 정하며, 여론과 제도까지 바꾸어 막강한 정치적 무기가 될 수도 있다. 프레임 씌우기는 일거에 폭력적으로 사태변혁을 노리는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흔히 자행되는 수단이다. 중세 가톨릭의 마녀재판, 히틀러 나치의 유대인 학살, 스탈린 소련의 대숙청 등. 일단 프레임을 씌어 명분을 만들어 주면 일말의 죄책감이나 망설임도 없이 잔혹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수십 년간 주로 좌파 진영에서 프레임 씌우기를 투쟁과 선동의 기본 전략으로 삼아왔다. 독재 프레임, 친일 프레임, 국정농단 프레임, 세월호 프레임, 광우병 프레임, 민주화운동 프레임, 촛불혁명 프레임, 극우 프레임, 후쿠시마 핵오염수 프레임에서 내란 프레임까지. 이러한 도식화된 선전 전술은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 양심을 자극해 상대 진영을 악마화 하고 자신들은 정의의 대변자로 포장하는 데 크게 성공해왔다. 그래서 손쉽게 우파 대통령들을 탄핵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권은 물론 언론, 학계, 문화예술계,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특정 진영의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확대·재생산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특히 이념에 경도된 식자층과 문화 권력자들이 진영논리의 나팔수가 되어 자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모순적 현실이 심화되고 있다. 프레임 씌우기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진실을 가리고, 생각의 자유와 토론의 공간을 봉쇄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건도 다양한 해석과 복합적인 배경이 있을 수 있는데, 프레임은 그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고, 흑백논리와 감정적 구호로 사태를 단순화한다. 그 결과 복잡한 사회현상은 이해와 공존이 아닌 증오와 편가르기의 소재가 되고, 민주주의의 기본인 다양성과 상호존중은 설 자리를 잃는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프레임 정치가 권력을 쥔 자들의 면죄부로 악용된다는 것이다. 정권의 비리나 정책실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 그것을 ‘반민주’, ‘극우’, ‘가짜뉴스’ 등의 프레임으로 되치기하면서 논점을 흐리고, 비판자에게는 사회적 낙인을 찍는다. 국민의 알 권리는 말살되고, 언론은 자기 검열에 빠지며, 야당은 의회민주주의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프레임 씌우기는 일종의 정신적 폭력이다. 그것은 대중의 감정을 인질로 삼아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고, 이견을 범죄시하며, 합리적 토론 대신 선동과 감정몰이로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 이런 방식이 반복될수록 국민은 피로감을 느끼고, 결국 정치 혐오로 이어져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가 붕괴된다. 프레임 씌우기 같은 선동과 폭거로 탈취한 권력은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 과정에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는 것도.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8-04

자유의지 VS 법적 책임

자유의지란, ‘개인이 외부의 강제나 내적 필연성 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위를 하는 능력’을 말한다는 정도로 대충 정의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정의가 그럴듯하여 보여도 자유의지를 제대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자유의지는 ‘자유’와 ‘의지’라는 두 단어의 철학적 함의는 물론, 양자의 의미가 결합 된 이후의 뇌과학적 분석까지 필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유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왔던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 범죄를 저지른 자의 범죄 행위는 자유의지로 인한 것이었으므로, 뒤따르는 법적 책임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인간의 행위는 자유의지의 결과물로서 발생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인류는 오랜 기간 신앙처럼 지켜왔다.(슬프게도 자유의지는 종교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기도 하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 그 중요 구성 요소는, ‘선택 가능성, 자기 결정성, 도덕적 책임’이다. 그런데 그 범죄가 범죄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저질러진 것이라면 우리는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하여야 할 것인가? 도덕적 비난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현대 뇌과학계에서 자유의지 긍정론에 반대하는 상당수의 뇌 과학자들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자유의지 긍정론과 부정론의 비율이 정확하게 조사되어 보고된 통계는 없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자유의지란 없다’라고 주장하는 뇌과학자들은, 우리가 내린 결정은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며, ‘자신이 결정하였다고 생각(의식)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라고 한다.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때,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마음의 발생 기관인 우리의 신체, 그 중 특히 뇌가 ‘물질로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고려하여야 한다. 행위의 근원인 마음은 물질인 신체(대부분 뇌)에서 발생 되기 때문이다. 현대 뇌 과학에서도, 마음이란 ‘전기적 신호 전달로 인하여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물리 화학적 작용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다수설이다. ‘마음이 물질의 결과물’이라는 선언에 대하여, 우리의 순진하고도 전통적인 영혼 수호자들은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떡하랴! 물질의 작용이 잘못되면 마음도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가 결정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질(시냅스)에서 발생(창발)한 마음이 물질이든 아니든 그것은 그다음 문제이다. 범죄자의 행위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이에 대한 법적 처벌은 달라져야 한다. ‘도덕적 비난’보다는 ‘사회 유지와 재범 가능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바보라고 부르되 죄인이라고 부르지 마라!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한 표상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이것들 사이에는 인과의 수레바퀴가 돌지 않는다!’라고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했다. ‘그냥 처벌하면 될 일’을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 두 번 죽이지 말라’는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탁월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 것이다. 과연 누가 창백한 범죄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공봉학 변호사

2025-08-04

윤석열 전 대통령의 어깃장

수의를 벗고 내의 차림으로 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드러누웠다고 한다. 종일 방송된 뉴스와 특검의 관련 발표로 이 소식을 접한 상당수 국민들이 혀를 찼다. 국회에선 법무부장관을 향해 이와 관련된 질문이 쏟아졌다. 국회의원도, 장관도 서로 묻고 답하기를 낯뜨거워했다. 외신도 가만있을 리 없다. 소식은 실시간으로 세계를 향해 타전됐다. “전직 대통령이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비등했다. 지난 8월 1일 발생한 사건(?) 이야기다. 그날 특검은 법원에서 발부된 체포영장의 집행을 위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수감된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그러나, 계속된 특검의 설득과 요청에도 윤 전 대통령은 요지부동, ‘잡아갈 테면 잡아가 봐라’는 식의 어깃장을 놓았다고 한다. ‘조폭 수준의 행태’라는 극단적 말까지 나왔다. 반면 윤 전 대통령의 변호사들은 폭염으로 인한 체온 조절 때문에 수의를 벗고 있었고, 영장 집행 과정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공개한 건 의도된 전직 대통령 망신 주기라며 반발했다. 영국의 정치가 존 스튜어트 밀은 “법은 가진 자에겐 든든한 방패지만, 가지지 못한 자에겐 심장을 겨눈 창끝”이라 말했다. 법 집행의 평등하지 못함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실상 19세기 영국 법은 부자와 권력자에겐 관대하고,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가혹했다.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21세기. 심플하게 묻자. 한국은 어떤가? 19세기 영국보다 나은가? 법을 다루며 일생을 살았고, 법의 준수를 약속하며 대통령에 올랐던 사람의 위와 같은 행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윤 전 대통령은 ‘법 앞에선 만인이 평등하다’란 문장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8-04

국민의 회초리가 나라를 살린다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는 ‘깨어 있는 국민’이다. 정치인은 주권자의 감시와 비판을 두려워하지만, 국민이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권력을 남용한다. ‘권력은 마약’일 뿐만 아니라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주권자는 여차하면 정치인에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권력을 위임한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여당의 행태를 보라. 민주당은 이미 12년 전에 ‘을(乙)’의 목소리를 듣고 ‘갑질’을 근절하겠다고 ‘을지로위원회’를 만들었고, 이재명 대통령은 새 정부의 국정철학이 ‘억강부약(抑强扶弱)’에 있다고 역설했다. 그래놓고서는 제자의 논문을 ‘표절’한 이진숙을 교육부장관에, 그리고 보좌진에게 온갖 ‘갑질’을 일삼은 강선우를 여가부장관에 지명한 것은 전형적인 표리부동이요 자가당착이다. 국민의 비판이 점점 커지자 대통령은 이진숙의 지명을 철회했고, 강선우는 임명을 강행하려했다. 민주당 지도부까지 나서서 강선우를 적극 비호했으나 국민들은 결코 회초리를 내려놓지 않았다. 야당과 언론은 물론이고,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강선우의 갑질’이 ‘이진숙의 표절’보다 더 나쁜데 왜 측근이라고 두둔하느냐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후 처음으로 떨어지자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의 매서운 회초리가 마침내 대통령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다. 한편 야당의 정치행태는 어떤가? 국민의힘은 야당의 책임인 여당 견제는커녕, 제 살 길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정권을 잃고 나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니 어이가 없다. 윤석열에 대한 판단은 이미 헌재 판결과 대선 결과로 법적·정치적으로 모두 끝났음에도 아직도 ‘윤 어게인’을 주장하는 전한길 같은 극우 선동가에 휘둘리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심지어 당 지도부는 윤희숙 혁신위원장이 혁신의 일환으로 요구한 친윤 4명(나경원·송언석·윤상현·장동혁)의 거취표명에 대해 ‘다구리(뭇매의 속어)’를 가했으니 제정신이 아니다. 국민의힘이 더 이상 혁신을 거부하고 퇴행을 계속한다면 국민이 결단을 내려야한다. 작은 회초리로 반성하지 않으면 큰 회초리를 들어야 하고, 그래도 혁신을 거부한다면 ‘회초리가 아니라 몽둥이’가 약이다.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는 정당이라고 판단되면 버릴 수밖에 없다. 시대착오적인 ‘가짜 보수’가 죽어야 민심을 받들어 혁신하는 ‘진짜 보수’의 시대가 열린다. 이처럼 정치인들에게는 국민의 회초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제는 ‘국민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에 ‘국민의 이성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자 아렌트(H. Arendt)가 “사유하지 않는 천박함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했듯이, 이성이 깨어 있지 않은 사람은 회초리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다. 나라를 살리는 회초리는 ‘진영인의 회초리’가 아니라 ‘이성인의 회초리’다. 깨어 있는 국민은 결코 진영정치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 ‘공정한 심판자의 회초리’가 나라를 살린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08-04

K-스틸법 발의, 철강산업 회생 돌파구 되길

오랫동안 기대했던 철강산업 지원특별법이 발의돼 위기에 빠진 철강산업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국회 철강포럼 공동대표인 더불어민주당 어기구 의원과 국민의힘 이상휘 의원은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녹색철강기술 전환을 위한 특별법안’(일명 K-스틸법)을 대표 발의했다고 4일 밝혔다. 이 법안에는 철강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탄소중립시대에 부응하는 녹색철강 기술전환과 산업구조 개편, 불공정 무역에 대한 대응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았다. 이 법안이 정식 발효되면 내수시장 장기침체와 중국산 철강재의 국내시장 침투, 미국발 관세협상 등으로 삼중고에 빠진 국내 철강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이 법을 대표 발의한 어기구 의원은 “한국의 철강산업을 지키는 입법”이라며 “국민의 삶을 지키고 국가 경쟁력을 살리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했다. 철강산업이 주축인 포항의 경우는 철강산업의 불황으로 지역경제계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포항철강공단 입주 기업의 20%가 가동을 중단하거나 휴폐업 중이다. 대량 실직이나 구조조정의 위기감이 나돌아 시민단체들이 나서 철강산업에 대한 특단 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철강산업은 산업의 쌀이라 부를 만큼 타 산업과의 연관성이 큰 산업이다. 자동차, 조선, 건설, 기계뿐 아니라 우주항공 등 미래산업과도 연계되는 국가 핵심 산업이다. 이번 특별법 발의가 만시지탄은 있으나 국내 철강산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가 신설돼 지원키로 함으로써 철강산업이 국가기간 산업으로서 확고한 자리잡기를 기대한다. 반면에 철강업계도 글로벌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수소환원제철 등 탈산소 기술을 통한 경쟁력 확보에 나서야 한다. 또 해외 생산기지 확보와 고부가제품으로 수출전략을 전환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특히 이번 법안은 100여 명의 여야 의원들이 공동 발의해 위기에 빠진 철강산업 살리기에 나섰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025-08-04

증오를 버려야 실용주의가 성공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실용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이재명 정부는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필요하고 유용하면 구별 없이 쓸 것”이라며 “진보의 문제도, 보수의 문제도 없다. 오직 국민의 문제만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 이전부터 그는 여러 차례 실용주의를 언급했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를 기존의 어떤 이념적 틀로 묶기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운동으로 보면 유도도, 태권도도 아니고, 잡초 같은 투지를 가진 싸움꾼의 싸움에 가깝다. 이 대통령이 자신을 ‘실용주의’라고 강조한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가장 잘 포장한 표현이다. 그는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기 위해 어려운 길을 걸었다. 기존의 민주당 주류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경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때는 혹독한 압박 속에 정치적 위기를 넘겼다. 정치생명이 끝날 것처럼 보였다. 윤석열 정부 때도 어려웠지만, 문 정부 때가 더 위험해 보였다. 당권을 장악한 뒤 지난해 총선 공천에서 이재명 대표는 “떡잎이 져야 새순이 난다”라는 말로 과감하게 물갈이했다. ‘비명횡사’(이재명계가 아니면 죽는다)가 유행어가 됐다. 문재인 정부 때 당한 설움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다. 호남 출신도 아니고, 이념 성향이 분명한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 지역 변호사로 싸우면서 시장, 도지사를 거치며 중앙당과는 다른 통로를 지나왔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이념 성향으로 특징짓기는 쉽지 않다. 최대 공통점은 그와 함께 일을 한 적이 있고, 충성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과 위주로 움직이는 실용주의가 그에게는 적절한 목표가 될 수 있다. 과거 대통령 중에 실용주의를 강조한 이는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등이 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자기 철학이 더 강하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예상치 못한 행보가 여럿 있다. 그의 행보에 따라 민주당 내부에서도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특정 이념이나 지지 기반의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고, 실질적인 맥락은 이해하고, 따지고, 결정하려 들었다. 최근 다시 논란이 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그 한 예다. 그를 지지한 정당이나 유권자는 전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고정관념을 넘어서려 노력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면서도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의 회고록 ‘운명’에 기록해 놓았다. 그는 한·미FTA 체결을 결정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미FTA에 반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이론과 견해를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그분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방과 관련된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라는 것이다. 그가 믿고, 강연도 했다고 밝힌 ‘외채 망국론’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세계무역기구 (WTO) 가입, OECD 가입에 대해 “나도 야당 시절 안줏거리처럼 비판했다”라면서, “가입하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되물었다. 지금 민주당의 주류조차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다. 하지만 그는 실용을 취했다. 이 대통령도 실용주의를 실현할 조건을 갖췄다. 과거의 다른 정치지도자에게 빚이 많지 않다. 지지 기반 내에서 카리스마를 갖췄다. 정부는 물론 당도 확실하게 장악했다. 습관처럼 방향을 정해버렸던 과거의 틀을 깨기 위해 지지자를 설득할 능력과 힘을 가졌다. 남은 것은 본인의 결심과 냉정한 판단이다. 우리와 수교할 1992년만 해도 중국이 매우 힘들었다. 반만년 역사에 한국보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유일한 시기였다. 덩샤오핑(鄧小平)이 홍(紅)·전(專) 투쟁을 계속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수십 명의 명멸한 야심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라졌을 게 뻔하다. 실용주의가 성공하려면 증오를 버려야 한다. 이 대통령은 이제 다시 선거를 치를 일이 없다. 남은 것은 역사의 평가다. 증오에 사로잡히면 모든 일을 진영으로 보게 된다. 우리 편은 무조건 감싸고, 상대는 타협이 아니라 척결 대상이다. 다시 ‘내로남불’로 갈 건가. 이 대통령은 다른 길을 선택할 능력이 충분하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8-03

헐크 호건은 안 죽어

초등학생 시절 토요일 방과 후 티브이 채널을 2번으로 돌려놓고는 못 알아듣는 영어 방송을 보며 두 시가 되기만 기다렸다. 화질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투성이고 비 오는 날엔 수신 상태가 더 나빠 옥상에 올라가 안테나를 만지면서 거실의 동생에게 “나와?” 외치며 화면 조정을 해야 했던 그 채널은 AFKN 주한미군방송이다. 볼거리 놀거리가 많지 않던 그때 AFKN에서 토요일 오후에 방영해주던 미국 프로레슬링 WWF(현 WWE)는 신세계였다. 뱀 사나이, 경찰관, 이발사, 백만장자, 장의사 등 다양한 캐릭터의 거구들이 펼치는 승부는 ‘뽀뽀뽀’나 만화에 없는 짜릿함을 느끼게 했다. 비디오대여점에도 프로레슬링 테이프들이 있었다. 몇 년 지난 과거 경기 영상을 녹화한 것이지만 미디어 속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던 지라 실시간인양 실감났다. 지난주 AFKN에서 ‘홍키통크맨’에게 졌던 ‘마초맨’이 어제 빌려본 테이프에서는 설욕했다며 친구들에게 떠들면 비디오를 먼저 보고 AFKN을 나중에 본 친구는 반대로 홍키통크맨이 설욕했다고 주장하다가 서로 감정이 격해져선 책상을 밀어놓은 교실 뒤편을 링 삼아 레슬링을 했다. 순수하고 멍청해서 귀여운 시절이었다. 우리의 영웅은 단연 헐크 호건이었다. 탈모로 정수리가 비었어도 한 올씩 애써 치렁치렁 늘어뜨린 금발의 뒷머리와 그에 대비되는 풍성한 수염이 멋있었다. “캘리포니아 출신 몸무게 303파운드 월드레슬링페더레이션 챔피언 헐크 호건!”이라는 아나운서 멘트와 함께 등장곡 ‘Real American’이 울려 퍼지고, 터질 듯한 근육으로 노란 셔츠를 찢으며 그가 링에 오를 때 도파민이 폭발했다. 따라한다고 찢어먹은 ‘난닝구’가 여러 벌이다. 아무리 당겨도 안 찢어져서 가위로 미리 잘라놔야 했고 그럴수록 헐크 호건의 괴력은 아이들 사이에서 더욱 신화가 됐다. 헐크 호건은 1980~90년대 어린이들에게 “꿈을 위해 기도하고, 비타민을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말하면서 정의, 강함, 용기를 가르쳐주었다. 티브이 화면 속 프로레슬링의 단순하고 강렬한 서사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배웠는데, 선악이 교묘한 지금과 달리 흑과 백처럼 뚜렷하던 그때 매번 정의의 편에 서서 승리하는 그를 보며 ‘선한 사람이 결국 이긴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악당의 공격에 초죽음이 되어 패배하기 일보직전 ‘헐크 업’이라는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해 기적적으로 이기는 그는 ‘불멸’이라는 단어의 완벽한 인간화였다. 어느 날 악역으로 전환해 충격을 주기도 했고, 인종차별 발언 등 실제 사생활에서의 논란도 있었다. 바위 같던 근육은 노년이 되어 쭈글쭈글해졌다. 영웅의 이상적 기억과 현실의 실존이 충돌할 때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걱정 근심 없이 마음껏 꿈꾸던 유년기,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영웅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어릴 적 혼자 놀이터에 남겨졌을 때, 학교에서 속상한 일을 겪었을 때 티브이 화면을 뚫고 나오는 그의 강함에 위로 받은 날들이 있었다. 동시대의 전설적인 레슬러 ‘브렛 하트’는 “그는 수없이 많은 병든 아이들, 혹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탈의실에서 불려 나갔다. 본인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쉬고 싶었겠지만, 아픈 아이들을 위해선 언제나 시간을 냈다. 그들에게 진정한 영웅이 되어주기 위해서였다”라고 회고한다. 결코 안 죽을 것 같던 영웅이 세상을 떠났다. “헐크 호건의 죽음”이라는 수사가 말도 안 되는 형용모순으로 읽힌다. 이제 세상은 복잡하고 각박하며 링 위의 선악이 구별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영웅을 만나는 일도 드물다. 헐크 호건의 죽음은 그저 한 인물의 퇴장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던 어떤 정서, 시절, 추억, 촌스럽고 낡은 ‘선한 영웅’에 대한 신뢰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가 노란 셔츠를 힘차게 찢을 때 어린 소년은 ‘나도 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돕겠다’는 기특한 용기를 품었다. 그 소년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아직 내 안에 있을까. 소년은 사라져도 영웅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디오가게에서 빌린 ‘레슬매니아3’ 테이프에서 헐크 호건이 ‘앙드레 자이언트’를 들어 메치던 순간은 기억 속에 계속 살아 있다. 그가 8090키드들에게 남긴 유산,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그 통쾌하고 짜릿한 믿음은 지금도 누군가의 삶의 선택과 가치관과 방향에 스며 있다. 그렇게 영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리고 영웅이 살아 있는 한 소년도 계속 있다. /이병철(시인)

2025-08-03

시와 운동

최근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헬스장에 가면 자전거와 런닝머신 밖에 하지 못했기에 매번 꾸준히 다니지 못했지만 이젠 정말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야겠단 생각이 간절해져서, 결국 헬스 트레이너 선생님과 함께 하는 PT 수업을 받게 됐다. 처음 수업은 제자리에서 걷기, 다리를 위로 올려 복부를 접는 동작 등 아주 간단한 운동부터 시작했다. 숨을 쉬는 법을 몰라서 늘 힘이 들면 숨을 참기 바빴고, 아주 적게 움직이는 동작에서도 땀이 비오듯 났기에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던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음날이 되면 근육통이 심하게 찾아와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괴로웠고,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것도 꽤나 고통스러워했다. 그랬던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맨몸 운동의 다음 단계인 기구를 쓰게 되고, 무게를 들게 되면서 전에 혼자 운동했을 때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자극점과 운동의 기쁨을 알게 됐다. 유튜브 영상으로는 상세히 알 수 없었던 디테일한 동작이라든지, 올바른 자세와 호흡을 유지하는 것도 선생님을 통해 더 자세히 알게 되면서 더욱 잘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운동은 하나의 동작을 일정한 자세와 힘을 들여 단순히 반복한다는 점에서 꽤나 큰 만족감을 줬다. 멈추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동작을 완료하게 되고,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경지에 다다라 팔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와도 어찌 됐든 그 고비를 이기고 나면 결국 미세하게 달라지는 몸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 챌 수 있단 점이 마음에 들었다. 변화하기 위해선 몸과 마음이 함께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아무리 마음의 다짐이 아주 먼 계획까지 그럴 듯하게 나아가 봤자 몸이 움직이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몸을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결코 쉽지 않지만 어떻게든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다시 헬스장까지 가기만 한다면 그 하루는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동작을 반복하며 만들어 내는 단순한 리듬을 유지하며 성공과 실패로 하루를 정의하는 것이 아닌, 해냄과 해내지 않음으로 하루를 착실히 쌓아간다. 10kg를 겨우 들던 무게를 이제는 40kg로 추가해서 동작을 해내거나 말랑하고 흐물거리던 피부가 조금은 단단해 졌단 몸의 변화를 느끼거나, 특정 부위의 자극을 잘 느낄 때면 노력 대비 커다란 기쁨을 느낀다. 어깨와 등, 팔을 자극하는 동작은 30회씩, 스쿼트와 런지는 60개씩, 복부 운동은 100회씩, 유산소 30분 정도를 마무리로 곁들어 진행하는 고작 한 시간 남짓한 간단한 운동이지만, 괴로움 속에서 꾸준히 나아가는 힘과 집요함을 얻게 된다. 단순하고도 정직한 움직임은 결국 내가 나에게 주는 다정한 관심이 되어 머지않아 보상처럼 돌아온다. 운동을 가기 전 후, 여름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좋아한다. 초록으로 가득 물든 나무 사이에서 한 포기의 풀잎처럼 흔들리다 올려다보는 푸른 하늘은 드높고 광활한 기쁨을 안겨다 준다. 매미 소리와 함께 풍경의 일부가 되어 아주 먼 곳까지 내다보면 무겁던 마음과 짓눌리던 스트레스도 가볍게 날려보낼 수 있다. 밤으로 향하는 저녁 하늘을 보는 것도 큰 기쁨을 준다. 주홍으로 가득 물들었던 하늘이 오분도 채 지나지 않아 어둠으로 잠기면 내 마음이 가라 앉아 있다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과 상관없이 시간이 흐른단 광경은 조용한 위로가 되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껏 웅크려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시간은 흐른다. 잘려나가는 손톱을 보는 것처럼 붙잡을 새도 없이 허망하게, 또는 모래 위에 쓴 잘 살아보겠단 다짐의 글자들을 자꾸만 파도가 채어간 대도, 나는 또다시 자라나는 손톱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손톱깎이를 꺼내들어 잘라내고 또 연인의 손을 잡고 바다로 나아가 사랑한다는 글자를 계속해서 쓴다. 주변을 둘러보며 나를 받드는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의 대상들이 나를 보고 있음을 계속해서 몸으로 느낀다. 그럼 하루를 살아내야만 하고, 나는 더 건강해야만 한다. 정해진 정답은 없지만 어찌 됐든 아주 사소한 것에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고 더 절망하지도 않고, 실패와 과거에 기웃거리지도 않고 오늘을 살아 낸다. 이왕이면 단순하게, 반복적으로 즐겁게. 그리고 시를 쓴다. 한동안 멈춰 있던 시쓰기였지만 이제는 누군가 부탁하지 않아도, 궁금해하지 않아도 시를 쓴다. 이것이 계속해서 쌓여서 머지않은 날에는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단 생각을 했다. 반복적으로 써내어야만 탄생하는 시와 일정한 움직임을 통해 같은 곳의 근육을 자극하여 만들어 내는 몸의 리듬, 나는 하루를 살아낸다기보단 하루를 만들어 가며 지내고 있다. /윤여진(시인)

2025-08-03

보행자 신호 작동기 앞에서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여유를 두고 집을 나섰다.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보행자 신호 작동기를 눌렀다. 둥근 기계의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며 ‘작동기를 눌렀습니다’라는 안내가 나온다.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한 아저씨가 묻는다. 그렇게 눌러야 하는 거냐고? 신호가 바뀌지 않고 있어 당황했다고 하신다.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면 횡단보도의 불이 초록 불로 바뀐다고 이야기했더니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몰랐다고 한다. 굉장히 놀라셨나 보다. 나도 그랬다. 이 년 전이었다. 낯선 동네를 처음 가는 날이었다. 앱을 통해 노선을 찾아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렸다. 길을 건너야 해서 횡단보도 앞에 섰다. 퇴근 무렵의 강변로는 끊임없이 달리는 자동차로 넘쳐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지 않는다. 이런 때는 아무리 여러 번 확인을 하고 왔어도 마음 한편은 늘 수선스럽다. 족히 20분은 서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한 사람이 전신대 옆에 있는 둥근 물체를 눌렀다. 잠시 후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길을 건널 수 있었다. 나중에 자세히 둥근 물체를 보니 보행자 신호 작동기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처음으로 알게 된 신문물이었다. 보행자 신호 작동기는 보행자가 직접 버튼을 눌러 횡단보도 신호를 바꾸는 장치이다. 통행이 적은 도로나 교차로에서 차량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버튼을 누른 후 약 20초 정도를 기다리면 초록 신호로 바뀌어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누르지 않으면 마냥 기다리고 있어도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다. 철저히 보행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작동기는 우리의 삶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고 하거나 변화를 원할 때 그 결정을 하고 안 하고는 온전한 나의 의지이다. 작동기를 눌러야 신호등의 색이 변하듯이 내가 결정하고 움직여야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이곳으로의 이사 결정이 그런 거였다. 연고가 없는 낯선 곳이라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말에 생각은 많아지고 길어졌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주변의 만류도 강경했다. 오랜 동안 아니 거의 전 생애를 살아온 도시를 떠나 낯선 장소로 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커다란 변화 앞에서 오랜 시간 고민 후 마음을 굳혔다. ‘잠시만 더 기다려주세요’ 라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변화는 시작되고 있지만 바로 결과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옆의 아저씨는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눈길을 자꾸 주고 있다. 타고 갈 버스가 올 시간이 여유있는 나는 비교적 느긋하다. 이사를 하고 새로운 생활에 젖어들고 적응하기 까지는 여러 달이 걸렸다. 가끔은 향수병에 다시 돌아갈까도 생각했고, 많아진 시간 앞에 놓여있는 무료함에 우울감이 들기도 했다.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수필반에 등록했는데 강사분이 대학교 선배셨다. 그렇게 새로운 만남과 변화가 시작되었다. 선배님을 통해 시조 쓰는 분들을 만나고 삶의 반경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살아가면서 보행자 신호 작동기를 누르듯이 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크고 작은 문제 앞에 놓이게 된다. 변화의 결과를 알 수 없기에 그 선택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책임은 오롯이 본인이 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좋은 변화가 나타나면 다행이지만 늘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동기를 누르지 않으면 좋은 쪽이든 아니든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때론 늦게 눌러서 타고 가야 할 것을 놓칠 때고 있었고, 일찍 건너가 여유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드디어 ‘건너가도 좋습니다’ 라는 신호가 들렸다. 아저씨는 급한 걸음을 옮겼다. 막 정류장을 출발하려는 버스에 간신히 탑승하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쓰고 있던 양산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타고 가야할 버스가 저만치서 오고 있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8-03

생활인구에서 찾은 내일의 희망

지금 대한민국은 낮은 출생률로 심각한 인구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국민의 수는 국가경쟁력과 연결되는 것으로 인구감소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사회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다. 지방자치단체의 주민등록 인구는 지역 민심을 대변하는 선거구와 정부가 지원하는 보통교부세, 광역지자체 조정교부금의 기준이 되는 등 지역발전의 원동력이라 볼 수 있어 청도군도 인구 유입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출생 장려금 지급, 신혼부부 지원 등 적극적으로 청년층에 구애를 펼치고 있다. 주민등록 인구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것이 생활인구다. 생활인구는 특정 지역에서 거주·체류·활동하는 인구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주민등록 인구 외에 통근·통학·관광·업무 등 목적으로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과 외국인을 포함한다.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에 근거해 2023년 1월 시행된 법정 개념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인구 유출 대응을 위해 도입되었고 생활인구는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예측할 좋은 자료로 청도군에는 귀중한 힘이 되고 있다. 청도는 인구로 인해 ‘낙담과 희망’이라는 두 단어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청도군은 인구소멸지수 전국 8위에 고령화율 40%를 초과하는 초고령사회 구조로 행정안전부가 지난 2021년 지정한 인구감소지역에 포함돼 지방소멸 대응 기금을 받고 있다. 청도군의 지방소멸 위기는 단순한 인구감소 문제가 아니라 지역 생존의 문제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정주 여건 개선과 생활인구 유입, 청년 정착, 출산 장려 등을 키워드로 수립한 대응 전략으로 2022년 10월부터 자연적 감소의 악재에도 전입자가 전출자 수를 웃도는 순수 유입인구의 영향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군은 2022년 70억 8300만 원의 지방소멸 대응 기금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확보한 대응 기금 472억 3800만 원은 지역 변화를 이끄는 귀중한 자원이 되었다. 청도군의 지방소멸 대응 투자는 체류형 관광 활성화로 관계 인구 극대화와 지역 공간 상품화로 생활인구 활성화, 도시공간 개선과 귀농 귀촌을 통한 정주 인구 증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주민등록 인구 증가와 청도의 생활인구는 지역에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난해 7월 행정안전부와 통계청이 전국 89개 인구감소지역을 대상으로 조사한 생활인구에서 3월 체류 인구가 32만 8000명으로 주민등록 인구 4만 1000명의 7.8배에 달해 전국에서 7위, 경북도 내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등 평균 30만 명의 생활인구가 지속으로 청도를 방문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인구의 청도 방문은 인접 도시 430만 명의 생활인구가 청도를 찾을 환경을 조성하고 고부가가치화 관광산업을 육성하는 청도의 3대 비전 중 하나인 ‘문화·예술·관광 허브 도시’ 조성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지방소멸 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의 결과다. 군은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특히 신혼부터 임신·출산, 영아, 학생, 청년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1인당 최대 2억 5000만 원 상당을 지원하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지원정책은 군민의 삶을 높이는 동시에 인구 유입과 정착을 유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다. 또 생활인구의 지역 정착을 위해 인구소멸 대응 기금의 최대 확보와 함께 각종 공모사업으로 지역의 모습을 변화시키며 청년의 정착과 출산을 장려하는 등 최대의 노력을 하고 있다. 청도군이 지난해 37건 1566억 원을 확보한 공모사업은 국·도비의 비율이 73%에 이르는 우량 공모사업으로 군의 재정압박을 줄여주었고 올해도 23건 147억 원의 공모사업에 선정돼 군의 끊임없는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청도군은 이러한 노력과 함께 청년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주거 문제 해결과 문화생활 영유에도 적극적이다. 정기적으로 청도를 방문하는 생활인구 유입을 위해 월 10만 원대 임대주택 136호와 빈집을 활용한 월 1만 원 주택 10호 등과 자연 드림파크와 산림치유 힐링센터 내 숙박시설 조성, 700석 규모의 아트홀과 전시 공간을 갖춘 생활문화복합센터, 예술인을 위한 창작공간도 조성 중으로 생활인구의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 청도는 이러한 노력에 안주하지 않고 지역민 모두가 경쟁력을 갖춘 지역으로 자리매김해 인구소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2025-08-03

아부하는 정치인

이솝우화 ‘까마귀와 여우’편에서 여우는 고기를 물고 있는 까마귀에게 이렇게 말한다. “까마귀님의 아름다운 목소리 듣는 게 소원”이라고. 그러자 우쭐해진 까마귀가 “까악”하며 소리를 내자 고기가 땅에 떨어진다. 여우는 잽싸게 이를 물고 달아난다. 듣는 이에게 이득이 되면 칭찬, 아부하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게 과장된 칭찬을 하면 아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정확한 대답은 아닌 것 같다. 칭찬과 아부의 경계가 모호하다. 역사를 보면 정치인에게 아부는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보여진다. 아부를 해서 손해를 본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부를 한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요, 아부했다고 고소를 당할 일은 더 없다.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를 받는 사람도 자신을 칭찬하는 소리를 아부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을 안목 있는 이로 생각한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미화하거나 칭찬하는 법안들이 줄줄이 상정돼 논란이라 한다. 미 일부 하원의원이 미국 건국 250주년을 맞아 250달러 지폐를 만들고 거기에 트럼프 초상화를 넣자는 법안을 상정했다. 또 일부는 100달러 지폐에 들어 있는 미국의 건국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 초상화 대신 트럼프 대통령 초상화를 넣자는 법안도 만들었다 한다. 워싱턴 덜레스국제공항 이름을 트럼프 공항으로, 트럼프 대통령 생일을 기념일로 지정하자는 법안까지 등장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정치인에게 아부가 출세의 중요한 수단이라고는 하지만 도를 넘은 법안들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를 “비열한 충성 경쟁”이라 꼬집었다. 정치인의 아부는 동서양이 따로 없는 모양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8-03

‘정청래의 국회’, 국민의힘 상대할 수 있겠나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지난 2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60%가 넘는 득표율로 당권을 거머쥐며 이재명 정부 첫 여당 대표 자리에 올랐다. ‘강성 친명계’로 분류되는 정 대표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의 4선 중진이다. 그의 당선으로 민주당은 이 대통령의 친정 체제가 더욱 굳어지게 됐다. 신임 민주당 대표는 임기가 비록 1년으로 짧지만, 여당의 내년 지방선거 공천권을 행사하는 자리여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아왔다. 정 대표가 내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게 되면 연임에 도전해 차기 총선까지 당을 이끌 가능성도 있다. 정 대표는 경선 과정에서 국민의힘 해산을 공공연하게 밝혀 왔기 때문에 앞으로 정국 경색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강력한 ‘개혁 당 대표’가 돼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을 추석 전에 반드시 마무리하겠다”고 했고, 야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야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란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앞서 국민의힘 해산을 겨냥해 국회가 본회의 의결로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 대표의 향후 과제는 국민 여론 관리다. 지금처럼 강성 지지층을 지나치게 의식해 야당과의 관계에서 강경 일변도로만 흐르게 되면, 향후 중도층 이탈로 지방선거에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여당 대표로서의 품위도 지켜야 한다. 야당의 잘못을 따지고 공격할 수 있지만,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관행과 절차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안타까운 것은 무기력한 국민의힘이다. 국민의힘은 이제 정 대표와 맞서 싸울 힘마저 잃어버린 것 같다. 정 대표의 당선 직후 국민의힘 지도부가 “야당 협박을 멈추고 국정의 동반자로 존중하길 바란다”고 했지만, 너무나 공허하게 들린다. 오는 22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국민의힘은 여전히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두고 ‘찬탄파’와 ‘반탄파’로 나뉘어 내홍을 겪고 있다. 정 대표가 야당의 명줄을 끊겠다며 압박할 수 있는 것도 국민의힘이 리더십을 상실한 채 집안싸움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5-08-03

폭염(暴炎)과 자연

날마다 이어지는 폭염경보가 언제 수그러질지 궁금한 시점이다. 내가 경험한 가장 극심한 더위는 1994년 7월 21일 낮 최고기온 39.4도를 기록한 대구에서다. 그해 대구의 7월 평균기온은 30.2도로 우리나라 역대 최고기온으로 기록돼 있다. 가구마다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았기로 한밤중에 잠을 깨는 것이 시민들의 다반사(茶飯事)였던 기억이 아직 새롭다. 우리가 겪고 있는 폭염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는 40도를 넘는 지역이 날마다 속출하고 있다. 일본 중부지역의 효고현과 교토부 그리고 오카야마현 같은 지역에서는 40도를 넘어서는 고온이 기록되고 있다 한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같은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도 기록적인 폭염이 일상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한낮에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저녁 어스름 무렵 산책을 하노라면 경이로운 장면에 걸음이 절로 멈춰지곤 한다. 불같은 땡볕을 자양분 삼아 날마다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기세로 왕성하게 성장해나가는 초목이 그 주인공이다. 한두 달 전에 모내기한 논을 진초록색으로 장식하는 벼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이 현저하다. 어제와 그제 오늘이 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요즘에는 학(鶴)과 왜가리를 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벼가 어른 허벅지 높이까지 자란 탓에 그들이 즐겨 먹는 개구리며 미꾸라지, 붕어 같은 먹잇감을 구하기 어려워진 까닭이다. 이제 녀석들은 무릎 높이까지 낮아진 청도천 인근에서 잠행하고 있다. 거의 삼 미터 높이까지 자라난 달맞이꽃은 마치 관목처럼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며 거리를 수호한다. 이따금 만나는 주황색 능소화(凌霄花)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계절이란 표정이 역력하다. 한낮의 살인적인 열기를 무색하게 하면서 능소화는 지상으로 천상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에서 심었다는 능소화의 기상과 인내를 보면서 자연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지독한 혹서(酷暑)와 혹한(酷寒)에도 강인한 생명력을 선사하는 자연이 놀랍기만 하다. 한여름 폭염과 폭우 그리고 태풍을 뚫고 풀과 나무는 생장을 거듭한다. 젊은 시절 내가 여름을 가장 좋아했던 까닭도 거기 있었다. 여름은 약한 것은 모질게 죽여버리고, 강한 것은 지극하게 살려낸다. 노자는 이것을 일컬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했다. “천지자연은 인하지 않아서 만물을 종이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도덕경' 5장)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자연과 인간이 다른 점은 약한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에 있다. 인간은 아무리 모질어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와 실천궁행을 근본이념으로 삼는다. 가족과 사회를 대행하는 강력한 조직으로 근대국가가 등장한 이후 이런 상황은 날로 개선돼 가고 있다. 자연도태와 문명사회의 이율배반적인 공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자연의 폭력적인 양상을 가속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의 가혹한 역습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자연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망각하지 말아야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8-03

치의학연구원 입지, 정치 도구가 돼선 안돼

오는 9월 보건복지부의 국립치의학연구원 설립 타당성 및 기본계획 연구용역 결과 발표를 앞둔 가운데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보다 치열해지고 있다. 국립치의학연구원은 연구개발(R&D), 기술표준화, 산업진흥, 정책개발 등을 총괄하는 정부 기관이다. 앞으로 설립이 되면 국내 치의학 산업의 사령탑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예상이 된다. 대구는 국립치의학연구원 유치를 위해 2014년부터 유치위원회를 결성하고 11년째 뛰고 있다. 대구가 이렇게 일찍부터 유치에 나선 배경은 치의학연구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곳이란 자신감 때문이다. 우수한 인재 배출과 전통 있는 치과대학, 치의학 산업, 치의학 관련 인프라가 전국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대구유치위원회의 뜻에 동조해 국내외 많은 치과단체와 의사들이 지지의사를 밝힌 바도 있다. 2024년에는 대만 타이난 치과의사회가 대구 유치를 지지하는 성명도 냈다. 현재 대구 외에 부산과 광주, 충남이 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다. 특히 충남은 대통령의 공약을 앞세워 경쟁이 아닌 정부의 직접 지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와 부산, 광주는 공정한 공모 절차를 통한 입지 선정을 주장하고 있다. 대선 공약을 이유로 정치적 판단이 개입된다면 객관성을 잃게 되고, 무엇보다 설립 취지에 벗어날 수 있어 결과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균형발전을 언급하고 있다. “균형발전은 선택이 아닌 생존전략”이라고도 말했다. 정부의 연구원 설립이 지방에 설립 근거를 둔 배경도 균형발전이라는 정부 정책에 부응하자는 취지다. 특히 주목해야 것은 산업과의 연계성을 통해 연구원의 기능이 산업의 경쟁력으로 연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균형발전에 맞는 지방경제 효과를 이룰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고려는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충남 천안은 서울의 전철이 오가는 사실상 수도권이나 다름없다. 공정한 평가를 통해 전문가와 국민이 납득할 결과를 통해 입지를 선택하는 것이 국가나 유치희망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2025-08-03

빈집에서 살아남기

빨갛게 부은 눈으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입술은 뭐라고 말하고 싶은 말을 삼키려는 듯 꼭 다물어져 있다. 그리고는 손에 든 휴지를 눈가로 가져가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녀는 마치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빈 집에서 혼자 살아 보셨어요?” 며칠 전 출근 준비를 하며 틀어놓았던 TV에서 또 부모 없이 빈 집을 지키던 자매가 화마에 생명을 잃었다는 뉴스를 봤다. 비슷한 뉴스를 본 지 채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지며 몇 년 전 내게 빈 집에서 혼자 살아봤느냐고 묻던, 한여름에도 긴 팔 셔츠를 입고 어깨까지 늘어뜨린 파마머리로 햇빛을 못 봐 창백해진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쭈뼛쭈뼛 상담실로 들어왔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서른 초반의 그녀는 청소년기 이후 내내 혼자 살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는 이른바 고립은둔 청년이었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적응을 못해 잘리기 일쑤였고 상담실에 내원할 당시에는 심한 우울과 언젠가부터 가지게 된 척추추간판탈출증 등 건강문제까지 겹치며 경제활동을 전혀 못 하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연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밤마다 돈 벌러 간다며 밥상 위에 엄마가 바가지에 부어놓고 간 쌀뻥튀기를 집어먹으며 TV를 보다 잠이 들곤 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의 찬모였던 엄마는 밤이 늦거나 아침이 되어야 휘청휘청 돌아와서는 한낮까지 코를 골며 잠을 자야만 했다. 엄마가 깨기를 기다리며 그녀는 동네 문구점 앞 오락기계 앞에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거나 가끔은 엄마가 준 천 원짜리 지폐가 동전이 되어 다 없어질 때까지 오락을 하며 놀았다. 엄마의 일터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여전히 혼자인 밤이 많았던 초등학교 4학년 가을쯤이었다고 했다. 라면을 끓이려는데 그날따라 가스렌지가 말을 잘 안 듣고 불이 잘 안 붙더란다. 불이 붙는지 보려고 가스 화구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가 머리카락과 입고 있던 셔츠에 불이 화르륵 붙으며 왼쪽 옆얼굴과 겨드랑이 쪽 피부를 데었다고 그녀는 무심히 말했다. 엄마는 다 큰 것이 조심성이 없다며 짜증을 냈고 병원에 두 번 다녀온 후에는 그냥 상처가 아물도록 기다렸다고, 그녀는 살기 퍽퍽했을 엄마가 그래도 자신을 버리지 않아준 건 참 고마운 일이라고 일찍 세상을 뜬 엄마 얘기를 할 땐 흠뻑 젖은 목소리가 되고 눈이 빨갛게 붓도록 울었다. 아직도 우리는 돌봄에서 소외된 아이들, 아이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내몰린 부모들을 외면하며 살아야 하나. 그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심란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전히 빈 집에서 혼자 살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그녀 앞에서 함께 눈시울만 붉힐 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담사로서의 무력감이 나를 짓누른다. 세상이 미래의 주인인 아이들을 지켜내는 걸 최우선 순위로 두지 않고서는 가장 좋은 방법,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 상황이 해결되기는 어려울 거란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답답함은 두통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 어른들 모두가 방법을 찾아 머리를 맞대고, 합의하고, 실천해 나가면 지킬 수 있지 않겠나, 꽃보다 더 귀한 어린 주인들을. 눈을 감고 가만히 두 손을 모은다. /신현자 라온재심리상담연구소장·재활심리학 박사

2025-08-03

노후 준비, 누구의 책임인가?

작년 12월부터 다시 가계부를 쓰고 있다. 2년 전 금융감독원에서 재무 컨설팅을 받기 위해 반짝 열심히 쓰고 나서는 다시 손을 놓고 있었다. 그때부터라도 가계부를 꾸준히 쓰지 못한 것은 평생의 습관 고치기가 쉽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가계부 관리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도 크다. 수입이 많지 않기도 하고 가정 경제 관리를 잘 못해서 그런지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때가 많아 딸들의 도움을 받아 가계부를 다시 쓰게 된 것이다. 2025년 1인 가구 중위소득이 256만 원이고, 1인 가구 적정생활비는 192만 1천 원이며, 최소필요노후생활비는 월 136만 1천 원이라고 한다. 이 기준에 비하면 내 소득은 중위소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지출이 큰 항목인 주거비 지출이 없으니 내 지출 목표가 어마어마하게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항상 지출이 수입을 넘는 달이 많다. 이럴 때는 무조건 안 쓰는 것이 답이라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더 나이가 들면 지금보다 수입이 더 줄어들 텐데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결국 8월부터 연금을 수령하기로 했다. 작년부터 연금 수령 자격이 되었으나 미루다가 받을 돈은 일찍 받는 쪽이 유리하다는 주위 말을 믿고 결정했다. 임의가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잘 몰라서 뒤늦게 가입한 데다 수입 불안정으로 최소 금액으로 납부한 터라 금액만 따지면 최소필요노후생활비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지금은 수입이 있으니 그런대로 살 수 있지만 수입이 줄어들면 낭패인지라 최대한 은퇴를 늦추는 수밖에 없다. 어느 기사를 보니, 2024년 12월 이다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이 보고한 ‘1인 비임금 근로자의 국민연금 인식에 대한 심층 면접조사’에서도 “대체로 ‘노령’이라는 사회적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노동 기간을 최대한 늘리는 것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나도 딱 그 경우에 해당하는 셈이다. 올해 발표한 국민연금 개편안에서는 내년부터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3%로 올렸다. 그러나 국민연급 가입자 월 평균 소득 309만 원인 사람이 40년간 보험료를 납부한다는 전제로 나온 수치라서 해당 안 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2025년 기준 월 평균 연금수령액은 67만 원이니, 현실적으로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이렇게 노후 준비를 못한 것은 1차적으로 개인 책임이 크다. 내 경우만 해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경각심이 부족했다. 노후 준비를 위한 정보가 국민 모두에게 닿을 수 있게 정부가 더 노력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도 연금을 납부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현재 일정 소득 이하의 농어업인에게나 두루누리사회보험료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러 영역에서 보완이 필요하다. 이다미 연구위원은 소득 변동성과 불안정성을 반영하여 보험료 부과 체계를 개편할 것을 주문하면서 특수고용직 같은 실질적 사용자가 사회보험을 부담할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민들의 노후가 안정되는 데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8-03

아버지가 없어진다

이율곡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다. 어머니는 신사임당이라고 코흘리개 애들도 안다. 우리나라 최고 고액의 지폐의 모델이기도 하니깐 그 위세는 대단하다. 하지만 이원수라는 아버지는 어디 가도 찾을 수 없다.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인물이어서 그런가? 조선은 분명 유교 문화의 시대이다. 그래서 조선은 부계 중심의 사회로 형성되어 있다. 자식 제사는 없어도 할아버지, 아버지 제사는 당시 풍습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 영향이 이어져 온다. 제사를 합치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 중심으로 제사를 합치지 할머니나 어머니 기일에 맞춰 합치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에 대해 누구도 반론하지 않는다. 마치 외손자보다 친손자가 더 끌린 듯 부계의 전통은 우리 몸 깊숙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유교의 대가인 이율곡 집안은 달랐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중심의 사회이었음에도 아버지 이원수의 존재감은 간데없다. 심지어 아버지가 계모 권 씨와 재혼하자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율곡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란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다. 그 영향인가? 불교는 이상하게도 어머니 중심의 효를 강조한다. 모계를 중심으로 효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부모은중경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후에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이었던 양주동 박사가 부모은중경 내용을 보고 어머니 은혜라는 노래를 만든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전부 어머니 찬양가이다. 불교에는 오역죄(五逆罪)라는 다섯 가지 아주 큰 죄가 있다. 오역죄를 범하면 저승에서 가장 지독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진다. 불교의 여러 경전에 묘사된 이 지옥의 고통 받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하는 극심한 형벌이다. 다섯 가지 죄 중 맨 처음 나오는 것이 어머니를 해한 인간이 나온다. 아버지는 두 번째이다. 어머니가 더 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머리가 좋다는 것은 노벨상 수상자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증명이 되고 있다. 그들이 애들을 키울 때 머리를 때리지 않고 대신 귀싸대기를 때릴 정도로 머리를 중하게 여겨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유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권위가 대단한 민족이다. 부모에게 물을 가져가야 할 때 아버지에게 먼저 가져간다. 어머니에게 물을 먼저 가져가도 바로 아버지에게 물을 건네기에 아버지에게 먼저 가져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고 그 권위는 자라면서 체득되고 있다. 그 결과물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요즘 대한민국 아버지의 위치가 너무 비참하다. 평생 돈 벌어 먹이고 입혔건만, 돈 안 벌어 오니 대접이 영 신통찮다. ‘부모’란 단어가 ‘모부’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상한 징후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딸이 제 엄마만 데리고 외국 여행 간단다. 나만 고양이랑 집을 지켜야 한다. /노병철 수필가

2025-07-31

'햇빛연금'

올여름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극한 강우와 ‘대프리카’라는 별명을 실감케 하는 폭염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재난이 되었다. 이러한 기후위기의 근본적인 해답은 바로 ‘탄소중립’에 있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전 세계적인 노력 속에서, 재생에너지 확대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제가 되었다. 최근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햇빛연금’ 정책이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이 재생에너지 생산의 주체가 되어 기후위기 대응에 직접 참여하고, 안정적인 연금 소득까지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햇빛연금’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려 한다. ‘햇빛연금’이란,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전기 판매 수익을 매달 연금처럼 돌려받는 모델을 말한다. 핵심 원칙은 ‘에너지 민주주의’와 ‘이익 공유’이다. 즉, 과거 대규모 발전소가 독점하던 전력 생산을 시민의 손으로 가져오고, 그 혜택을 지역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것이다. 재원은 주로 시민들의 투자나 조합 출자금 그리고 정부의 정책자금 융자 등으로 마련된다. 물론 초기 설치 비용 부담이나 발전수익의 변동성 같은 문제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투명한 정보 공개와 공공 주도의 금융 지원을 통해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 특히 대구경북은 연평균 일조시간이 2200시간을 넘어 전국 최고 수준의 태양광 발전 잠재량을 자랑하며, 넓은 산업단지와 농촌 유휴부지가 많아 ‘햇빛연금’의 최적지로 꼽힌다. ‘햇빛연금’의 성공 사례는 국내·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재생에너지 강국’ 독일은 시민들이 직접 발전소를 운영하는 ‘시민발전소’가 전체 재생에너지 생산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국내에서는 전남 신안군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햇빛연금’을 통해 섬 주민 1인당 분기별로 최대 60만 원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는 “태양광이 노인들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지역 소멸 위기 극복의 성공 모델로 자리 잡았다. 이 사례들은 주민 수용성 확보와 투명한 이익 분배가 성공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구는 아파트 베란다, 공공기관 및 학교 옥상, 서대구·성서 산업단지 등 공장 지붕을 활용한 ‘도심형 햇빛연금’을, 경북은 ‘영농형 태양광’이나 유휴 산지를 활용한 ‘농촌 상생형 햇빛연금’ 모델을 적극 도입할 수 있다. ‘햇빛연금’의 성공적인 확대를 위해서는 복잡한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초기 투자 부담을 줄여줄 금융 지원책을 마련하는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수적이다. 또한, 사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주민 갈등을 예방하고 상생 방안을 모색하는 ‘갈등 조정 메커니즘’ 구축도 시급하다. 이제 대구경북이 국가의 ‘햇빛연금’ 정책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데 그치지 말고, 우리 지역의 강점을 살려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이다. ‘햇빛연금’은 단순히 전기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 지역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고 새로운 소득을 창출하며 기후위기 시대의 진정한 주역으로 거듭나는 길이다. 우리 집 지붕에서 시작되는 작은 변화가 대구경북의 탄소중립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끄는 위대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7-31

말이 화(禍)가 돼

설화(舌禍)란 경솔한 말 한마디로 재앙을 불렀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 진시황의 한 부하가 미인을 조롱하는 말을 했다가 집안 전체가 망하는 멸문지화를 당한 일화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은 함부로 말을 하지 말고 항상 언행을 신중히 하라는 의미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속담 역시 사소하지만 적절한 말 한마디가 큰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교훈을 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 한마디로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말 한마디로 벼락출세도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교묘히 말을 잘하고 얼굴 빛을 화려하게 꾸미는 자 중에는 어진 이가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고 말했다. 여기서 아첨하거나 알랑거린다는 뜻의 교언영색이란 말이 유래됐다고 한다. 또 설저유부(舌底有斧)란 어려운 사자성어가 있다. “혀 밑에 도끼가 있다”는 뜻이다. 무심코 한 말이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으며 때로는 도끼처럼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의미다. 삼사일언(三思一言)과 연결되는 교훈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보면 과거 자신이 한 말이 되돌아 와 설화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에 임명된 최동석 인사혁신처장은 자신이 뱉은 말들을 감당하지 못해 곤욕을 치르는 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주 먼 옛날 일인 줄 알았던 말들이 도돌이표처럼 되살아나 구화지문(口禍之門)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말 중 문재인 대통령은 “멍청한 사람”, 이재명 대통령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란 말이 막말의 백미다. 말이 화(禍) 된다는 걸 몰랐을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07-31

李 대통령 균형발전 의지, 공공기관 이전부터

이재명 대통령의 국가균형발전 정책에 대한 비전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구소멸 등으로 위기에 빠진 지방도시로선 정부의 획기적인 균형발전 정책이 나오지 않으면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고 있기에 새 대통령의 균형발전과 관련한 발언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충청권 타운홀 미팅에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발전방향은 수도권 일극이 아니라 전국이 골고루 함께 발전해 나가는데 있다”고 말했다. 고도 성장기에 불가피하게 생긴 부작용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균형발전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부산 타운홀 미팅에서도 이 대통령은 “수도권은 넘쳐나고 지방은 소멸위기에 있다”며 “균형발전은 선택이 아닌 생존전략”이라 언급했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이나 동남투자은행 신설 등은 균형발전정책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30일 열린 비상경제점검 TF 회의에서도 이 대통령은 “불균형 성장 정책의 폐해가 대한민국의 지속적 성장을 저해하는 상태까지 왔다”고 밝히고 지역균형발전을 대한민국 성장 전략으로 삼겠다고 또다시 말했다. 이날 기획재정부는 국가정책 체제를 ‘지방우대’로 전면 개편하는 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국가균형발전은 역대 정부가 국가 주요 시책으로 삼고 온갖 정책안을 내놓았지만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가 시작한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만이 유일하게 가시적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후 10여 년이 지났으나 2차 공공기관 이전은 아직도 요원하다. 그동안 몇 번의 대통령이 바뀌었음에도 이를 실천한 정부는 없다. 그러는 사이 수도권은 더 비대해졌고, 지방의 소멸 위기는 더 심각해졌다. 국토 면적의 11%에 불과한 수도권에 국내 인구의 절반이 몰려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수도권에 집중돼 블랙홀처럼 지방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다. 이 대통령이 밝힌 균형발전의 방향에 공감하는 지방정부가 많을 것이다. 이 대통령의 균형발전에 대한 의지가 역대 대통령과는 다름을 실천적으로 보일때다.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 바로 시험대다.

2025-07-31

‘영일만 대교’ 예산복원 약속 꼭 지켜달라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29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포항 영일만 횡단대교 건설 사업’ 예산을 복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정재 의원(포항북)이 “지난 6월 21일 정부가 제출한 제2차 추경안에서 예산이 전액 삭감된 영일만대교 건설사업은 벌써 시작한 지 17년이 지났다. 김 후보자가 장관으로 임명되면 예산이 꼭 복원되도록 해 달라”는 요구에 대한 답변이다. 30일 여야 합의로 청문회를 통과한 김 후보자는 민주당 내 국토교통 분야 ‘정책통’ 이자 친명(친이재명)계 핵심으로 꼽히는 인물이어서, 그의 답변에 무게는 실린다. 이날 청문회에서 민주당 맹성규 국토위원장도 “영일만대교는 포항지역 발전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사업이다. 잘 챙겨보시길 바란다”며 김 후보자에게 각별히 당부하기도 했다. 김정재 의원이 밝혔듯이, 정부는 지난달 제2차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포항~영덕 고속도로 건설 예산 2043억원 중 영일만대교 구간 공사비 1821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표면적인 삭감이유는 대교 예산의 ‘불용’ 가능성이었지만 ‘민생회복 소비쿠폰’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때문에 TK지역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을 자축하기 위한 ‘국민용돈’을, 십수년을 기다려온 지역 숙원사업 예산으로 돌려막겠다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예산 삭감이후 TK지역 반발이 거세지자 당시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국회에 출석해 “영일만 대교 사업을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강조했었다. 영일만 대교 건설사업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에는 국토종합계획, 2021년에는 국가도로망종합계획, 2022년에는 2차 고속도로 계획에 포함된 주요사업이다. 이 대통령도 후보 시절 ‘포항의 가장 중요한 사업인 영일만대교 적극 추진’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공약집에도 포함시켰다. TK지역민들은 영일만 대교 예산을 칼질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새 정부가 이 사업을 좌초시키려 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대교 건설사업비가 내년 본예산에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

2025-07-31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8세의 말자씨를 남 몰래 좋아하던 세 살 많은 남성 노 씨는 어느 날 할 말이 있으니 잠시 만나자며 말자씨 집을 찾아왔다. 거절해도 한참을 집 앞에서 버티고 있던 노씨가 그럼 가는 길이라도 알려달라고 조르자 그를 빨리 보내기 위해 말자씨는 집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큰 길까지 함께 걸어갔다. 으슥한 골목 어귀에서 별안간 노씨는 “키스만이라도 하자”라며 말자 씨를 덮쳤고, 넘어진 말자씨의 입을 강제로 맞췄다. 반항하는 과정에서 말자씨는 노씨의 혀를 물고 말았고 노씨의 혀는 1. 5센티미터가량 절단되었다. 말자씨의 행동은 정당방위일까, 중상해죄의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이는 1964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다. 당시 검찰과 법원은 말자씨를 중상해죄의 범죄자로 판단했다. 심지어 말자씨는 노씨보다 더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 노씨는 강제추행 또는 강간 미수의 혐의가 적용되지도 않은 채 특수협박 및 주거침입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되었지만, 중상해죄로 기소된 10대 소녀 말자씨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말자씨를 조사하던 검사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책임져야지, 결혼해야겠네” 법원은 한 술 더 떴다. 남자가 덮친 데엔 길을 같이 걸어가 준 말자씨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했다. 이 최말자씨 사건은 당시 우리 사회의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과 성차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중상해죄 전과범으로 60년을 살아 온 말자씨는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단지 자신에 대한 불법적 폭력과 성범죄에 대항해 자기 몸을 지키려 했을 뿐이었던 10대 소녀는 자신에게 내려진 부당한 법의 잣대에 순응하지 않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며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성범죄에 대한 정의가 변해갔다.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했지만 성범죄에 저항하다 남성의 혀를 절단하고 만 여성들은 모두 정당방위로 무죄 판단을 받았다. 78세가 된 말자씨는 ‘56년 만의 미투’를 단행해 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고, 5년의 쉽지 않았던 재심 청구 과정을 거쳐 결국 대법원의 재심 결정을 받아냈다. 지난 7월 23일 열린 재심 재판의 마지막 변론에서 검사는 말자 씨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그리고 검사는 “성폭력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을 최말자씨에게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사죄드린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1960년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사건들이 말자씨의 사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용기 있는 여성은 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결백함을 위해, 또 후손들은 성폭력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조금이나마 실현하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성폭행 당한 사건이 자신의 이름을 딴 사건으로 불리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고 재심 개시를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결국 재심 재판과 검사의 무죄 구형을 받아냈다. 살다 보면 저렇게 늙고 싶다 생각이 들게 하는 멋진 할머니들이 있다. 최말자 할머니 같은 멋진 할머니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일그러진 편견을 여전히 품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김세라 변호사

2025-07-31

여름은 가고 또 여름이 가도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채근했지만, 엄마는 말이 없었다. 행여 한마디라도 할까 귀를 대고 지켜보았던 마지막 사흘이 지금도 명치에 앉아있다. 엄마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며 병원에 갔다. 의사는 위암이 초기라 수술만 하면 괜찮아 질 거라고 했다. 우리는 눈곱만큼의 의심도 없이 수술실 앞에서 기다렸다. 수술이 시작된 지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나왔다. 속을 열어보니 암이 마치 밀가루를 흩뿌려놓은 것 같아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길어야 6개월이라는 말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원에 필요한 것을 가지러 집으로 가야했다. 허정거리는 걸음으로 차에 오른 나는 대성통곡 했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걱정이 울음을 삼켜버렸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남편이 운영하는 공장으로 출근했다. 대충 사무실 일을 마무리한 후, 친정으로 갔다. 아버지가 며칠 동안 병원에도 오지 않아서였다. 이제 괜찮아질 거라 믿고 있는 엄마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몇 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지신 적이 있어 두려웠다. 밥상을 차려 두고 나는 병원으로 가야 했다. 엄마 곁에서 살갑게 살아왔던 날들이 사라져간다. 갑자기 허물어져 가는 둥지를 붙잡고 허둥거린다. 엄마가 없는 세상이 나는 무서웠다. 닥치면 다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남편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표정과 행동은 평소처럼 했지만, 내 속은 떨고 있었다. 안타까움과 애살스러움은 처음 얼마간이었다. 병원 생활이 가면 갈수록 말하지 않아도 손이 먼저 알아서 했다. 씻어주고 닦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는 점점 말이 없어져 갔다. 여동생이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들고 왔다. 한나절 동안 옆에 앉아 입에 넣어주고, 물수건으로 손도 발도 닦아주었다. 그녀 앞에서 엄마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종알종알 수다 속에 엄마가 웃었다. 그 시간에 나는 친정으로 갔다. 병원에서 대충 식사를 때우는 아버지의 생활이 궁기에 절은 듯했다. 가져간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집안 대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상을 차렸다. 엄마가 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속옷과 양말까지 챙겨두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여동생이 방금 간 듯 했다. 엄마가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숙이는 진정성이 있데이”라고. 나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었다. 그럼 나는? 이라고 그때 장난처럼 말했어야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점점 아기가 되어가던 엄마는 내가 당신에게 소홀하다고 여긴 것이었을까. 추석날 아침이었다. 시댁 주방에는 사촌동서까지 차례상에 낼 음식 준비로 바빴다. 온 집안 식구들이 시끌벅적한 틈 사이로 남편이 나를 찾았다. 엄마가 위독하다고 했다.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 차에 올랐다. 친척들의 걱정이 길게 따라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널브러진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명절이라고 와 있던 삼촌과 숙모가 나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잠시 비빌 언덕도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내가 결정해야 하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모두가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 가는 그 길이 서러웠다. 일본에서 연구원으로 있던 남동생 내외가 왔다. 며칠 머무는 동안 오롯이 엄마의 아들이 되게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고 엄마가 말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옆 침대에서 같이 잤다고. 모두가 잠든 밤에 엄마는 아들이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엄마 손에 떨어지더라고 했다. 엄마는 당신이 깨어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울음을 삼켰다. 아들이 잠들고, 엄마는 밤새 이불을 덮어주고 또 덮어 주었다고 했다. 의사가 말했던 6개월이 지나고 2년도 더 지난 여름날, 엄마가 눈을 감고 입도 다물었다. 먼 길 떠나기 전에 어떤 말이라도 해 보라고 졸랐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다. 엄마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했을까. 말없이 사흘이 지나고 엄마의 맥박이 멈추었다. “희야, 아부지를 니한테 맡겨서 미안테이” 엄마는 그 말 한마디 하기가 그리 주저되었던가. 여름은 가고 또 여름이 가도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있는데. /윤명희 수필가

2025-07-30

대구 제2국가산단, 유망기업 유치가 관건

대구 제2국가산업단지가 예비타당성 조사 문턱을 넘어서면서 대구 미래를 위한 새 성장 동력 확보에 청신호를 주고 있다. 대구시는 29일 달성군 화원읍과 옥포읍 일대 조성되는 제2국가산단이 기재부 예타를 통과했다고 밝히고, “이곳을 인공지능(AI) 기반의 미래모빌리티와 첨단로봇을 중심으로 한 미래 스마트기술 선도거점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16년 만에 대구에 조성되는 제2국가산단은 255만㎡ 규모로 국비 1조8000억원이 투입된다. 대구시는 2030년 적기 조성을 목표로 후속 조치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기존의 제조 거점인 성서, 달성, 제1국가산단과 연계한 산업벨트 구축으로 지역경제의 산업화 효과를 극대화해 나가는데 중점을 둘 생각이라고 했다. 이번에 조성될 제2국가산단은 인근 산단 대비 70%의 분양가로 저렴하고, 단지 내 산업용지 비율도 65%여서 기업활동에도 적합하다. 특히 도로·철도 등 교통·물류면에서 탁월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연결되고 광주대구고속도로, 외곽순환고속도로, 국도5호선과 인접해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확보하고 있다. 또 도심내 주거·교육·문화생활까지 영위할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하고 있어 산단으로서 우수한 경제성을 인정받았다. 문제는 대기업과 유망기업들을 얼마나 잘 불러들이느냐 하는 점이다. 전국에서 국가산단이 동시에 건설되면 지자체 간 경쟁이 심해지기 때문에 대구시의 기업 유치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대구시는 법인세, 취득세, 투자보조금 확대 지원 등 다양한 인센티브가 제공되는 기회발전특구 지정에 주력해야 한다. 대구시의 역량과 정치권의 도움도 필요하다. 대구상의가 발표한 지난해 지역 100대 기업의 실적을 보면 전년보다 부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제조업 분야의 하락 폭이 컸던 것으로 나타나 대구지역 산업구조 전환이 절실하다는 분석이다. 제2국가산단은 미래모빌리티와 첨단로봇 중심으로 산업을 육성한다는 면에서 대구산업 대전환의 기폭점이 될 수 있다. 유망기업을 유치해 대구가 미래산업의 선도거점으로 도약하는 데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다.

2025-07-30

TK신공항 사업도 정부 주도로 추진해 달라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29일 국회 국토교통위 인사청문회에서 “대구·경북(TK) 신공항 이전 사업을 추진할 대통령실 직속의 TF(태스크포스)를 만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윤재옥 국민의힘 의원(대구 달서을)이 “지난달 26일 민주당 대구시당과 대구시의 당정협의회에서 ‘대구도 TF를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다”며 김 후보자의 추진의진을 묻자 “대통령실 직속 TF를 만들도록 하겠다”고 확답했다. 전북지역의 대표적인 ‘친명(이재명)’계 의원인 김 후보자는 전주 출신 3선 중진이며, 지난 대선 때 이재명 후보 선대위 조직혁신단장을 맡았다. 지난 2021년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에는 전북지역 국회의원 가운데 이재명 대표 지지 의사를 처음으로 공식 표명했었다. 윤재옥 의원이 이날 “10조원 이상 들어가는 사업을 지방에서 어떻게 하느냐“며 정부 차원의 해법을 촉구했듯이, TK신공항 사업은 자금조달 문제로 표류하고 있는 상태다. 대구시는 연내로 자금 조달 방안이 확정되지 않으면 2030년 개항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TK지역에서는 이 대통령이 광주와 부산 타운홀 미팅에서 약속한 것처럼, TK신공항도 정부가 주도해 추진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5일 부산 타운홀 미팅 자리에서 가덕도 신공항 사업과 관련해 “부산시민들이 좌초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실 수 있는데 우리 정부에서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지난달 열린 광주 타운홀 미팅에서는 대통령실에 전담 TF를 만들어 광주 군공항 이전 해법을 찾겠다고 약속했으며, 대통령실은 곧바로 정부·지자체가 참여하는 6자 협의체 가동에 들어갔다. 이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있는 광주 군공항 이전과 가덕도 신공항 사업을 지켜보는 TK 지역민들로선 상대적 박탈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정권 실세인 김 후보자가 공항 건설사업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 장관에 임명돼, 광주와 부산처럼 TK신공항 사업도 정부 주도로 해법을 모색해주길 바란다.

2025-07-30

명품 수난 시대

명품. 말이 좋아 ‘럭셔리’, 실은 골치 아픈 부담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명품을 들었다 하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게 되는 시대. 명품이 문제일까, 그 명품을 쓰는 사람이 문제일까, 아니면 명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문제일까. 사람에 따라 이름난 브랜드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 건 자연스러운 욕망일 수 있다. 디자인이 예쁘니까, 품질이 좋으니까, 혹은 유명인들이 들고 다니니까. 각자의 판단이며 선택이다. 문제는, 명품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이 곧 명품이 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명품이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 수난을 겪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파면당한 전직 대통령 부인의 명품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한다. 처음에는 ‘받은적 없다’고 했다가, ‘받았지만 빌렸었다’고 했었고. 이제는 ‘모조품’이란다. 결국, 공직자 재산으로 신고하지 않았거나 출입국 시 세관에 신고하지 않은 물품들이 문제가 되니, ‘ 명품이 아니고 가짜였다’는 해명이 등장했다. 웃지못할 코미디다. 이쯤되면 그 명품도 억울하겠다. 처음엔 공직자의 부적절한 수령으로 시비에 휘말리더니, 뒤늦게는 ‘그건 짝퉁’이라는 말 한 마디에 자존심이 짓밟혔다. 진품이든 모조품이든 처음에는 ‘있는 척’ 하다가, 나중엔 ‘없는 척’ 하기 위해 명품의 위신까지 끌어내렸다. 진품이든 아니든, 문제의 본질은 ‘품격’이다. ‘사람이 명품을 만드는가, 명품이 사람을 만드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답은 자명하다. 아무리 값비싼 명품을 걸쳐도 품위와 진정성 없이 행동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장식물에 불과하다. 반대로 검소한 옷차림 속에서도 곧은 인품과 당당한 태도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명품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바로 그것이 ‘사람의 품격’이다. 명품을 소지한 사람이 아니라, 명품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가짜를 구입해서 오빠에게 선물했다가 자신이 필요해지자 오빠에게 빌려서 출국했다.’ 설명이 길다. 이렇게 발뺌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된 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 그에게는 그 어떤 명품을 둘러줘도 어울리지 않는다. 대통령 해외순방에서 버젓이 사용했었다는 허영과 기만에서 국민의 자존감은 여지없이 흘러내린다. 명품을 통해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가방과 시계, 옷과 구두, 의상과 장신구. 명품이 늘어가면서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듯한 착각. 명품은 결국 소유자의 태도와 언행에 의해 평가받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명품을 걸치는 순간, 명품은 더 이상 명품일 수 없다. 명품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당신이 걸친 그 명품이 부끄럽다’고 말해야 한다. 명품의 가치는 가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걸치는 사람의 ‘품격’에 있다. 물건보다 사람을 보아야 한다. 명품이든 무명이든 상관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명품인간’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명품에 휘둘리는 시대,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시간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7-30

유치한 용비어천가

말을 한 사람 외엔 대부분의 국민이 낯이 뜨거워 실소를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나 조선 같은 봉건시대 왕에게도 이런 말을 면전에서 한다는 건 칭송이 아닌 결례가 될 게 뻔하다.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느냐.” “그가 이 시대에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커다란 축복이다. 5년은 너무 짧다. (대통령을) 10년, 20년을 해도 될 사람”…. 얼핏 조선 왕조 최고의 혼군(昏君)이라 불리는 연산군 앞에서 간신배의 전형인 임사홍이 한 아첨처럼 들린다. 그러나 천만에. 위에 인용된 건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한신대학교 석좌교수 김용옥과 이 정부 인사혁신처장 최동석이 한 말이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의 명령으로 그의 선조인 목조에서 태종까지 여섯 명 통치자의 행적을 기려 만든 서사시(敍事詩). 헌데, 사전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현대사회에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아랫사람들의 언행을 “용비어천가 부르고 있네”라며 비꼬기도 한다. 한 대학의 석좌교수고, 차관급 공무원이라면 사인(私人)이 아닌 공인에 가깝다. 자기 생각엔 칭송의 대상이 세상 최고라 느껴져도 말은 가려 해야 하는 법이다. 특히나 칭송을 받는 상대가 정치·경제적 힘을 가졌을 때는 더 그렇다. 그런 금도(襟度)를 지키지 못한다면 자칫 나잇살 먹고 아부나 일삼는 철부지로 오해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의 힘은 장황함이 아닌 간결함에서 온다. 무엇이건 넘치는 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우리 선조들은 그걸 과유불급이라 했다. 김용옥 교수와 최동석 처장에게 정중히 권한다. 이제 그러지 마시라. 대통령도 위와 같은 언사를 좋아할 리 없으니.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