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은 예고 없이 찾아온 침략자였다. 처음엔 그저 목구멍 뒤편이 가늘게 떨리고 가벼운 오한이 있어 감기인 줄 알았으나 이내 고열은 육신의 성벽을 허물고 점령군처럼 들이닥쳤다. 자려고 누우면 기침은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물처럼 길어 올렸고 달아오른 이마는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버렸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 나의 세계는 오직 통증이라는 좁은 감옥 속에 유폐되었다.
열이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지독하게도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었다. 고열로 인해 시야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였으나 그 뒤편에 선명하게 각인된 아이들과의 수업 약속, 마감이 다가오는 원고들, 내가 부재함으로 인해 생겨날 공동체의 작은 균열들은 나를 잠시도 침대에 온전히 뉘어두지 못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기꺼이 아플 자유조차 반납해야 하는 일이었던가. 육신은 비명을 지르며 모든 기능의 정지를 선언하고 휴식을 갈구했지만 책임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나를 억지로 생의 현장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쉼 없이 나를 소진한 대가는 더딘 치료였다. 약은 잠시의 아픔을 유예시킬 뿐, 근본적인 치유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낫는 속도가 이토록 더딘 것은 단순히 면역력의 저하 때문만은 아니라 나의 영혼이 쉴 틈을 찾지 못해 스스로 치유의 동력을 꺼뜨려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픈 육신을 정신력이라는 가느다란 끈으로 억누르며 버티는 동안, 나의 회복은 정체되고 아픔의 유통기한은 지루하게 늘어만 갔다.
어른의 치유란 이토록 고단한 것인가. 자신의 상처를 돌보기에 앞서 타인의 기대를 먼저 수선해야 하는 삶은 마치 밑 빠진 독에 생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 느린 회복의 지체(遲滯)는 역설적으로 내가 삶을 얼마나 성실히 지탱해왔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정직한 통증의 기록이기도 했다.
문득 아이들이 부러워졌다. 아프면 그저 목놓아 울 수 있고, 차려주는 따뜻한 죽 한 그릇에서 세상을 다 얻은 듯 잠들어도 괜찮고,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오롯이 의탁하며 떼를 쓸 수 있는 그 투명한 권리가 부러웠다. 홀로 약봉지를 뜯고 스스로 물을 데우고 또 기침으로 보내는 어른의 밤은 차갑고 적막했다.
기침이 조금씩 멈춰갈 즈음, 거울 속의 수척해진 얼굴을 마주하며 또 깨닫는다. 내가 지켜내야 할 약속들은 나를 짓누르는 하중이 아니라 어쩌면 나를 생의 현장에 붙들어 매어주는 단단한 닻이었다는 것을.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담길 나의 존재를 생각한다. 내가 아픔을 이기고 수업하는 아이들을 만날 때 그들은 지식을 배우는 것에서 ‘삶을 책임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나의 고통은 타인에게 나누어줄 사랑의 부피를 가늠하는 성찰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이제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내 안의 겨울이 저물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대지는 혹독한 냉기를 온몸으로 품어내야 비로소 봄의 현(絃)을 울릴 자격을 얻는다. 지금 나의 이 무딘 회복세와 더딘 걸음은 결코 쇠락의 징후가 아니다. 오히려 생의 박동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고귀한 지체(遲滯)이자 어른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온전히 감내하며 얻어낸 시간의 훈장이다.
오랫동안 나를 유폐했던 방을 나와 다시 익숙한 일상의 소음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 때마다 가벼운 기침이 배어 나오지만 그것은 생의 엔진이 다시 가동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이들을 맞기 위해 다시 책상을 정리하고 해킹으로 자료가 몽땅 날아가 버린 노트북을 펴 다시 수업 자료를 만든다. 정갈하게 다시 문장을 다듬고 아이들의 눈을 비로소 맞출 때 나의 혈관 속에는 약 기운이 아닌 삶의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나의 몫을 다하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치유란 걸 또 알아간다.
내가 앓았던 겨울의 잔해가 저 산 너머에서 파릇한 새순으로 돋아나는 기적을 나는 믿는다. 비록 떼를 쓰며 쉴 수 있는 내 유년의 안온함은 멀어졌을지라도 나의 아픔을 숭고한 책임으로 치환해낼 수 있는 지금의 내가 더 충만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독했던 통증이 잦아든 자리마다 성숙이라는 이름의 깊은 향기가 배어날 것이다. 나는 이 길고 긴 독감의 끝에서 조우할 맑은 아침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