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은 언제나 시리고도 투명하다. 작년 12월, 차가운 공기가 채 가시기도 전 아버님은 당신이 평생을 지탱해온 견고한 육신을 잠시 내려놓았다. 평생을 공직이라는 좁고도 곧은 길 위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걸어오신 분이다. 남들이 빠른 길, 쉬운 길을 택해 앞서나갈 때도 아버님은 정직이라는 무거운 보따리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당신의 진급은 늘 동료들보다 한 뼘씩 늦었고 그만큼 당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노을은 남들보다 조금 더 깊고 고즈넉했다.
아버님은 한 번도 그 ‘늦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인 남편이 사회라는 거친 파도 속에서 한 단계씩 위로 솟구칠 때마다 당신은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아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아들의 승진은 아버님에게 단순한 직급의 상승이 아니었다. 당신이 고집스럽게 지켜온 그 정직한 삶의 방식이 아들의 생(生)을 통해 비로소 만개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증명이었으리라. 아버님에게 아들은 당신의 인생이라는 문장을 완성하는 마지막 마침표이자 가장 화려한 수식어였다.
새해 첫 아침, 남편의 손에는 잉크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새 명함이 쥐어져 있었다. 아버님이 그토록 기다리셨을 아들의 성취가 오롯이 박힌 작은 종이 한 장,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게도 그 순간 앞에 깊고 어두운 강을 하나 놓아버렸다. 뇌졸중이라는 불청객은 아버님의 의식 속에 깃든 기억의 등불을 하나둘 꺼뜨렸고 이제 그 강 건너편에서 아버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요양병원의 창백한 조명 아래, 남편은 아버님의 초점 없는 시선 앞에 그 명함을 내밀었다. “아버지 저 진급했어요. 명함 새로 나왔어요.”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다 차가운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명함의 모서리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몇 번을 어루만지며 아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으셨을 분이다. ‘장하다 내 아들’그 인자한 웃음과 사투리 섞인 칭찬 대신 돌아오는 건 규칙적이고도 서늘한 기계의 숨소리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이 견뎌온 지루하고 올곧은 시간은 아들을 위한 밑거름이었다. 당신의 진급이 늦어졌던 것은 무능함이 아니라 타협하지 않는 영혼이 지급해야 했던 귀한 세금이었음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깨닫는다. 아들은 그 비옥한 정직의 토양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마침내 오늘날의 푸른 숲을 이루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쳐 기다려 주지만, 정작 자식이 부모의 갈채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늘 ‘조금만 더 있으면,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이라는 유예의 언어로 효도를 미룬다. 그러나 생의 시계추는 자식의 성공을 기다려 줄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아버님의 정직함이 아들의 명함 속에서 깊이 뿌리 내려 결실을 보았을 때 정작 그 뿌리의 주인은 자신의 꽃향기를 맡지 못하는 적막의 세계로 유배를 떠나버렸다. 이 지독한 비대칭성이 우리가 생에서 마주하는 형벌이 아닐까.
인생은 어쩌면 어긋나는 타이밍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모의 뒷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될 즈음 부모는 이미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노을 지는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 아들의 명함에 박힌 글자를 읽어줄 한 사람의 시선은 멈춰버렸다. 아버님의 침묵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남겨진 갯벌처럼 황량하고도 깊은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다. 아버님의 육신은 비록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당신의 깊은 심연(深淵) 어딘가에 남아 있는 영혼의 감각은 아들의 성취를 느끼고 계실 것이라고. 아들의 명함에 묻어있는 긍지가 당신의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을 것이라고.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 앞에서 자식은 늘 죄인이 된다. 하지만 아버님이 보여주신 강직한 삶의 궤적은 이제 아들의 삶 속에서, 또 손주들의 삶 속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 부자(父子)가 맞잡은 손등 위에 명함을 올려두고 바친 아들의 눈물 한 방울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버님의 따스한 시선에 바치는 마지막 헌사처럼 보였다. 비록 육신의 대화는 멈췄지만 아버님이 물려주신 따뜻한 영혼의 언어는 아들의 생애를 통해 메아리칠 것이다.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