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라는 이름의 긴 계절을 우리는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건너왔다. 마스크는 어느새 외출을 위한 준비물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처럼 여겨졌고 숨을 쉰다는 가장 본능적인 행위조차 의식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아침마다 현관에서 차 키와 휴대폰을 챙기듯 마스크를 집어드는 손놀림은 무심했고 자동적이었다.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것을 불편함이라 부를 새도 없이 우리는 하루를 살아냈다. 삶이란 대체로 그런 것이어서 견뎌야 할 것들은 늘 습관의 얼굴로 다가왔다.
마스크 안에서의 숨은 언제나 조금씩 모자랐다. 깊게 들이마셔도 폐 끝까지 닿지 않는 느낌, 내 숨이 다시 내 얼굴로 되돌아와 맺히는 습기, 말소리가 마스크에 걸려 흐릿해지는 순간들. 그러나 그 답답함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그 시절 불평보다는 침묵을 택했다. 모두가 같은 불편을 감내하고 있다는 사실은 묘한 연대감을 만들었고 그 연대는 우리를 하루하루 앞으로 밀어냈다.
어느 순간, 마스크에서 해방되었다. 얼굴을 가린 막을 벗는 일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숨을 들이마시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다는 것, 공기가 폐로 곧장 흘러들어온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낯설었다. 우리는 자유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잠깐의 해방감을 누렸다.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뒤에야 하늘의 높이를 실감하는 것처럼.
하지만 삶은 늘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최근 수업을 받던 아이가 독감에 걸렸고 다시 마스크를 꺼냈다. 둘 다 마스크를 쓴 채 마주했다. 예전보다 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천이 두꺼워진 것도, 공기가 더 나빠진 것도 아닌데 유독 갑갑했다. 한 번 맛본 해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불편에 익숙해질 수는 있어도 자유를 경험한 뒤의 제한에는 더 예민해지는 존재였나 보다.
마스크 너머로 아이의 눈만 보였다. 표정은 읽기 어려웠고 말소리는 마스크 안에서 부서졌다. 숨소리와 숨소리가 천을 사이에 두고 섞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문득 우리가 지나온 길을 떠올렸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가린 채 살아왔던가. 서로의 표정에 어린 온기를 완전히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무사함을 확인하는 것으로 안도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 답답함도 견딜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시간들 때문에 더 답답해진 것인지 쉽게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리는 어려운 길을 마스크를 쓰고 지나왔다. 숨이 가쁘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이었지만 멈추지 않고 걸었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하루를 이어갔고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금씩 희생했다.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았고 지금의 공기를 신선하게 마실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도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말을 삼키고 마음을 숨기며 숨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시간이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 답답함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필수적 거리다. 마스크는 얼굴에 붙어 있는 굴레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시적인 태도다. 견디지 않고서는 다음 계절로 갈 수 없고 더 넓은 호흡을 얻을 수 없다. 마스크는 영원한 감옥이 아니라 성숙을 향해 통과해야 할 과정이다.
마스크를 쓴 채 수업을 마쳤고 아이를 보낸 후 차가운 공기를 맞았다. 숨이 깊어졌다. 우리의 호흡은 당연하기 보다는 지나온 답답함의 총합이라는 것. 자유는 견딤의 반대편에서 비로소 도착하는 것임을 다시 깨닫는다. 언젠가 또 다른 형태의 마스크를 써야 하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 길을 건너온 사람들이다. 숨이 막히는 시간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고 결국 우리는 다시 호흡을 되찾았다.
마스크 너머의 시간들은 지나갔지만 그 시간들이 남긴 사유는 여전히 우리 안에 머문다. 숨이 막힐 때마다 그 끝에는 다시 맑은 공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간다. 삶은 늘 그렇게 답답함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깊은 호흡을 허락한다.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