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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이듦에 대하여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설날 아침에 떡국을 먹었다. 새해 차례상이나 밥상에 올리는 여러가지 음식 중 빠지지 않는 것이 떡국이다. 새해가 밝은지 두 달째지만, 세시음식인 떡국을 먹음으로써 진정 한 살 더 나이가 든다고 한다. 첨세병(添歲餠)이라고도 하는 떡국은 단순히 나이만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가래떡처럼 재산이 길게 늘어나고 엽전모양으로 동그랗게 써는 떡은 돈이 많아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한 떡국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으면서 새해 덕담도 나누고 일년 신수가 훤해지기를 바라기도 한다.해마다 대하는 떡국이지만 올해는 그저 단출하기만 하다. 여전히 계속되는 코로나19 감염증의 방역지침에 따라 이동과 모임을 자제하거나 최소화해서 설 명절 가족 간의 따스한 만남이 두드러지게 성글어진 것이다. 한 살 더 먹는 것도 서러운데(?) 가족이나 친지를 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씁쓸히 먹는 병탕(餠湯) 속에는 만두뿐만 아니라 여타의 생각이 섞이게 됨은 필자만의 과민일까?떡국을 먹지 않더라도 나이는 먹게 되고 시간은 나그네처럼 끊임없이(光陰百代之過客) 지나간다. 그러한 세월에 버물려 과세(過歲)를 하고 이제 또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는 길어도 일년이 짧다고 여겨짐은 세월에 대한 조바심일까? 호기심 많던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었는데, 젊음과 늙음의 중간지대쯤에서는 삶의 수레가 천천히 굴러가기를 바라고 있다. 인생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서 풀어낼수록 더 빨리 돌아간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무게감이 덧대어진다는 뜻이다. 나이듦은 가정이나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역할과 기여를 하며 경험과 지혜를 알려주고 이치와 순리를 밝혀주는 연륜이 깊어 간다는 것이다. 사람의 나이를 값으로 매기기는 모호하지만, 나이를 존중하고 적어도 나이값을 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술적인 나이의 숫자만 보태는 것이 아니라 원숙함을 더해가고 농밀하게 익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누구나 곱고 건강하게 나이듦을 바랄 것이다. 나이를 먹다 보면 결국 무채색 같은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지만, 노화는 모든 생명체가 겪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나이듦이 달갑지 않고, 늙어감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늙었다는 실감이 들 때는 암울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노년기의 풍부함과 가능성으로 얼마든지 유년기나 성년기의 다양성을 누릴 수 있다.꼰대 기질 같은 아집을 버리고 젊은 생각과 가치를 존중하며 눈높이와 공감의 소통으로 움직이고 어울릴 때 생체나이를 얼마든지 낮출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나이라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늙고 병약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을 가꾸고 다루기에 따라 외양은 눈에 띄게 달라질 수 있다. 꿈꾸는 삶과 노력하는 집념은 늙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지속적인 건강비법과 생활습관으로 젊게 나이 드는 것이 축복이 되는 연년익수(延年益壽)를 추구해보자.

2021-02-15

장모님, 우리 장모님!

권윤구포항 중앙고 교사‘장모님! 제가 누구인지 알아요.’ ‘누구세요 몰라요.’ 눈을 마주치지 않고 피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만다. 6남 1녀의 유일한 사위 권서방을 몰라본다. 지금까지 권서방! 권서방! 했던 장모님이 치매라는 판정을 받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필연적으로 치매 환자도 급증하고 있다. 치매는 고령화 시대의 숙명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빠른 속도로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어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현재 치매를 앓고 있다고 한다. 엄청 빠른 속도이다.칠십대 후반인 큰형님이 장모님을 모시고 있다. 하지만 농사를 짓고 계시는 형님은 치매인 장모님이 혼자 집에 계실 때 가스로 인해 여러 번 어려운 일이 생기고 집에서 150m 근처의 아주 가까운 노인 요양센터에서 생활을 하시게 됐다.2020년은 코로나19로 요양센터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것으로 인해 방문을 못하는 어려움이 생기게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k방역으로 대면서비스가 제한됨에 따라 요양센터를 방문하지 못하게 되면서 치매 환자들의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 특히 인지력·기억력 저하로 개인위생을 지키기 어려운 치매 환자는 치매 악화와 코로나19 감염증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한 달에 두 번은 찾아뵙고 있었는데 방문 자체를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번지게 됐다. 한 번은 창문을 열고 3분정도의 얼굴만 바라보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한없는 한숨과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나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이러한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로 발생했다. 2월 3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이런 글이 올랐다. “코로나 백신 접종 후 요양병원 환자 면회를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이다. 뇌졸중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연이 절절했다. 가족 중 치매를 가진 사람이나 요양병원에 가족이 있으면 인지상정으로 마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치매 환자는 인지기능이 급격히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지기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환자와 교류가 중요하므로 직접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나 가까운 사람을 통해 정기적으로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장모님께서 요즘은 요양센터에서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래서 조카가 옆에서 도와주어서 영상통화를 한다. 퇴근 후에 할머니에게 와서 통화를 할 수 있게 배려를 한다. 참 고맙다.‘장모님, 장모님! 제가 누구인지 알아요.’ ‘권서방이지.’ 미소를 지으신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픈 곳은 없으세요, 사위 보고 싶으시죠,’ 등 수다를 떤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시다. 말이 없고 잔잔한 미소와 잠뿐이시다. 가슴이 아프다. 97세의 고령이었지만 늘 ‘권서방!, 권서방!’ 하셨다. 사위 사랑은 장모님 사랑이라고 하였는데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온다. 나 권서방만의 아픔이 아닌 사회의 아픔이다.오늘도 병실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 해본다. 장모님을 불러본다. 장모님, 우리 장모님!!

2021-02-15

자화상들 그리십시다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4년 전 이맘때 연필로 인물화 그리기 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다른 수강생들은 배우자, 자녀, 손자, 아니면 친구를 그리는데, 나는 주야장천 내 얼굴만 그렸다. 문득 그때가 떠오르면서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자화상의 비밀’의 저자 로라 커밍에 의하면, 초상화든 자화상이든 인물화는 역사적으로 하위 장르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자화상은 초상화보다 더 하위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화가가 자기 모습을 그릴 때는 보여주고 싶은 모습대로 그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긴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그릴 때 대담하게 변칙을 했기 때문에 실제 모습과 많이 달라서, 그의 실제 모습은 다른 화가들이 사실적으로 그린 초상화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따지고 보면, 남이 그려준 초상화라고 해서 사실대로 그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조정래의 ‘어느 솔거의 죽음’이라는 중편 소설에서는 성주가 어느 화가에게 자기 초상화를 의뢰했다가 화가가 성주의 비열한 내면까지 표현하자 그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후원자나 권력가 같은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인물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미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기를 그린 자화상보다는 다른 사람을 그린 초상화가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은 많다.그렇기에 로라 커밍이 자화상의 가치를 강조하는 지점은 사실 여부가 아니다. 자화상은 다른 종류의 진실을 보여준다. 그녀는 아무리 못 그린 자화상이라도 이미지로 전환되기 이전의 인물과 마주하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실제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그의 자화상에서는 쉴 새 없이 바뀌는 변덕스러움, 하루하루 경험에 따라 수없이 바뀌는 인물의 성격과 같은 심층적인 진실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실대로 그린 초상화에서는 표현될 수 없는 진실이 표현되어 있다.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다고 해서 명예를 얻거나 돈을 만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화상은 대부분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나 감사, 사랑 등 내밀한 표현 욕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화가들의 표현 욕구는 결국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가 무엇을 표현했는가 하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고 보니, 4년 전 내가 그렇게 자화상을 그려댄 것은 세상과 어떤 모습으로 소통할까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었나 보다.이청준의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남의 자서전을 대필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진욱은 자서전 대필에 염증을 느낀다. 그는 스스로 쓰는 진솔한 자서전만이 영혼과 성찰을 담고 있다면서 결국 모든 대필 의뢰를 거절한다. 물론 자화상처럼 자서전도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자서전으로 우리는 그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이해한다.70이 넘어 처음 배운 한글로 삐뚤빼뚤 쓴 편지 한 장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훌륭한 자서전이 되듯이 나를 전혀 닮지 않은 서툰 자화상도 세상과 소통하는 멋진 통로가 된다. 그러니 우리 신축년에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세상과 만나기 위해 ‘자화상들 그리십시다.’

2021-02-15

유튜브 ‘공방’

유튜브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중계하는 ‘공부방송’, 일명 ‘공방’이 인기를 얻고 있다.공방은 영상 속 인물이 몇 시간씩 조용히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이다. 책장 넘기는 소리, 필기구로 종이에 뭔가를 적는 소리만이 들릴 뿐 별다른 미동도 없다. 어떤 경우는 공부하는 이의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공방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뜨겁다.미국 뉴욕에 사는 의사 제이미가 의학도 시절 시작한 공방은 현재 구독자 40만6천명을 자랑한다. 인도의 한 의학도가 개설한 공방은 구독자가 17만명이고, 네덜란드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또 다른 인도인의 공방은 구독자가 1만9천명이다.유튜브 미국 본사는 최근 문화와 트렌드에 관한 분석을 내놓는 웹사이트 ‘컬처앤드트렌드’를 통해 “공부 장면을 중계하거나 녹화해 보여주는 영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콘텐츠”라며 “2019년까지 비슷한 영상들이 2억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고 설명했다.공부방송을 하는 공부 유튜버는 대체로 교사 임용고시나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례로 지난해 임용고시에서 한 차례 떨어졌던 A 씨는 올해 긴장감을 갖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유튜브 공부 방송을 시작했다. 하루에 적게는 6시간, 많을 땐 1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공부하는 A씨의 모습을 수십, 수백 명의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보고, 방송 후 유튜브 채널에 올리는 녹화 영상은 매번 500명 안팎의 시청자가 본다.시청자들은 실시간 채팅창에 “오늘도 출석했다” “취업준비생들끼리 함께 힘냅시다” 등 격려 글을 올리며 소통한다. 힘든 공부를 함께 하는 느낌을 주는 공부방송은 또 하나의 비대면시대 문화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2-15

설 같지 않은 설날

윤영대수필가설 연휴도 지났다. 우리 민족의 최대명절인 설을 설 같지 않게 보내고 나니 누구에게도 탓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5인 이상 집합금지’라는 말에 주소지가 다를 경우라고 해서 아들 내외도 딸도 오지 않았다. 그들의 직장에서 에둘러 고향 가지 말라고 하는 듯해서 오지 말라고 했었다.아들이 오면 같이 목욕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며 얘기도 나누고 싶었는데…. 평소에도 목욕탕 감염 우려에 가지 말라고 자식들이 말렸지만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와서 우리 부부 둘이서만 설 차례상을 준비했다. 뭔가 허전했다.섣달 그믐날 까치설날엔 어린이들은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들은 묵은세배 한다며 이웃들을 찾아다녔으나 올해는 갈 곳도 없다. 또 ‘그믐날 밤에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에 졸면서 밤샘하려 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늦게까지 휴대폰으로 보내오는 연하 인사에 나 또한 비대면 감사말을 보낼 뿐이었다.‘설’은 ‘낯설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는데 여태 살아오면서 올해와 같은 이런 분위기의 설날은 처음이다. 참으로 낯설은 날이다. 또 ‘선날’ 즉 ‘새로 시작하는 날’의 뜻도 있다 하며 음력 정월 초하루를 원단(元旦), 정조(正朝), 세초(歲初) 등으로도 부르고 있다. 그래서 묵은해를 보내고 맞는 새해의 첫 아침에 마음 정결히 하여 현관 바닥을 쓸고 닦고 문 바깥도 말끔하게 청소하여 새롭게 마음을 세우고 한 해의 다짐을 해보았다. 신정-구정의 오랜 실랑이도 있었지만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내려오는 세시풍속은 버릴 수 없어 30여 년 전 ‘설날’로 정착하여 3일간 휴일을 즐기고 있다.‘설’은 또 ‘삼가다’의 옛말 ‘섧다’에서 어원을 찾기도 한다. 그래서 신일(愼日)이라고 하는데 코로나 역병의 창궐로 온 나라가 걱정 속에 모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신일의 이름 그대로 몸을 삼가고 사리며 잘 지키고 있는 셈이다.새 옷으로 갈아입고, 자식들이 오리라 생각하고 며칠 전부터 장만했던 음식들을 많이 줄여 정갈하게 차례상을 차렸다. 혼자서 향 피우고 술 따르고 떡국 한 그릇 올려 조상께 절을 하니 가가례(家家禮)의 절차다. 예년 같으면 차례 끝내고 음복하고 세배를 받으며 덕담하고 세뱃돈을 주었으나 올해는 오지 못한 자식들과의 스마트폰 영상통화로 세배를 받았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세뱃돈을 사진 찍어 보내주었다. 언택트 설명절 보내기, 참 희한한 풍속도다.민속놀이도 점점 그 맥이 사라지고 있는 듯한데, 세상의 변화로 많은 세시풍속이 퇴색되거나 단절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어릴 때의 추억을 더듬어 보면 꽹과리 두드리며 마을을 도는 지신밟기며 들판에서 손수 만든 연날리기도 했었다. 연을 날리며 즐기다가 대보름 전날에 연줄을 끊어 날려버리곤 했는데, 코로나는 태양 표면의 불꽃 이름이니 흰 꼬리연에 크게 그려 태양을 향해 ‘액막이 연’이나 날려볼까. 널도 같이 높이 뛰어도 보고, 여럿 모여 윷놀이도 즐기고, 복조리도 걸어두어 한해의 행운을 담아보고도 싶은데….설날의 적적함에 가족의 정을 맛보려고 남아있는 떡국을 아내와 둘이서 나눠 먹으며 ‘설도 설 같지 않은 설’을 보내는 참 낯선 명절을 보내었다.

2021-02-14

떠난 후에 남은 것

최미경동화작가내 이별의 처음은 7살 때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질 않아 외증조할머니 손에 맡겨진 나는 걸음을 떼자마자 할머니가 데리고 다녔다고 다들 나를 할머니 껌딱지라 불렀다. 초등학교 입학을 한 달쯤 남겨둔 어느 날 할머니는 옥상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뎠고 얼마 후 영영 내 곁을 떠났다.요즘도 가끔 내 말투를 들으며 고향이 어디인지 묻는 사람이 있는데 부산에서 왔다고 하면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신기해한다. 서울 분이셨던 외증조할머니의 고운 말투를 들으며 유년을 보낸 나에게 내 말투는 그녀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내게 두 번째 이별은 16살 봄이었다. 일요일 아침 고모라며 전화가 왔다. 부모님 결혼식 사진에서 본 게 전부였던 고모는 엄마를 찾았고 엄마가 없다고 하자 내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9살 때 아버지를 처음 본 나는 16살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던 날을 다 꼽아보아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계절에 한 번, 그러다 일 년에 한 번 쯤 아버지가 집으로 온 날은 약속이나 한 듯 엄마가 부재중이었다. 고모와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부엌에 세워져 있던 다리가 네 개인 양철 상을 펴서 반찬 몇 가지와 수북이 담은 밥을 올려 그가 들어간 방으로 들였던 기억이 떠올랐다.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가끔 도루코 칼로 연필을 깎던 아버지 이야길 했다. 가난으로 중학교를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에게 연필을 깎는 시간은 불요했다고 엄마는 말했지만 아버지가 쓰지 못했던 연필은 내 마음에 뾰족이 남아 쓰는 일에 심(心)이 옅어질 때마다 고스란히 묻어났다.그리고 2012년 가을, 셋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질 않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더 이상 카드 값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결혼 전부터 엄마는 나와 동생의 카드를 돌려쓰며 병원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해 학자금대출 받았다 생각하고 개인회생신청을 하자고 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간암 진단을 받았고 딱 1년 6개월을 버티고 떠났다. 서른여섯, 세 번째 이별이었다. 온전히 슬플 시간도 완벽하게 그리울 시간도 없었다. 내 모자란 경제력이 엄마를 너무 일찍 보냈다는 죄책감에 나는 그저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일만 했다.지금 이 시간, 이 공간, 내 모습 하나하나가 지나온 시간 안에서 부딪히고 스며들었던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부분은 간과할 수 없다. 기로마다 순간마다 오로지 내가 결정한 내 선택의 결과물이 나를 여기로 데려다 놓은 것이기에 지금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그렇다.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것도 그들이 남긴 것을 안은 것도 버린 것도 나였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그렇게 오늘의 나는 어떤 우연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런데 그런데도 말이다. 내 말투며 내 시심(詩心)이며 내 생활력을 부둥켜안고 오늘까지 살아내고 있는 내가 한없이 가없게 여겨 질 때가 있다.떠난 이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이 시간이자 꽁꽁 얼었던 겨울이 봄에 살살 풀리고 있는 이 계절이다.

2021-02-14

국가 해안쓰레기 모니터링과 울릉도

김윤배한국해양과학기술원 동해연구소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대장지난 2020년 연말 울릉도·독도 해양연구기지는 특별한 크리스마스트리를 제작했다. 울릉도 연안에 떠밀려온 중국산 플라스틱병 등 각종 해안쓰레기로 제작한 크리스마스트리였다. 울릉도 연안의 해양쓰레기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방편이었다. 동해안 최초의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동해 최외곽 도서인 울릉도가 해류와 바람에 실려 외부로부터 떠밀려온 해안 쓰레기로 매년 몸살을 앓고 있다.울릉도 주변해역은 대한해협을 통과한 후 동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울릉도로 향하는 해류인 동한난류 흐름 특성상 한반도 연안의 해양쓰레기가 주로 밀려오는 지역이다. 겨울·봄철에는 북서풍의 바람과 동해 북쪽에서 울릉도로 향하는 해류를 타고 동해 북쪽 연안의 다양한 해양쓰레기가 또한 밀려온다. 더욱 심각하게는 2004년부터 북·중 어업협정에 따라 동해 북한수역으로 진출한 매년 수천 척의 중국 오징어 조업 선박이 투기한 중국산 해양쓰레기 또한 울릉도 해안으로 밀려오고, 심지어 독도 해안가에서도 심심찮게 중국산 플라스틱병이 발견되기도 한다.해양쓰레기의 심각성은 비단 울릉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연간 70억t의 해양쓰레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해양쓰레기 감소 노력에도 매년 해양쓰레기 수거량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국내 해양쓰레기 수거량은 2015년 6만9천129t에서 2019년 10만8천644t으로, 2015년 대비 2019년에 1.6배 증가했다.해양수산부는 해안쓰레기의 종류와 양, 발생 원인별 비율변화, 외국기인 쓰레기의 종류와 양 등 해안쓰레기의 객관적 자료 파악을 통해 국가 해양쓰레기의 예방과 관리 정책 수립을 목적으로 2008년부터 전국의 주요 지점을 대상으로 국가해안쓰레기모니터링 사업을 수행 중이다. 2021년 현재 동해안 12개소를 비롯해 전국 연안의 60개소를 대상으로 2개월 간격으로 모니터링이 수행 중이다. 각 조사지역은 대상 해안의 100m 구간 중 5m 구간 4개소를 무작위로 선정해 해안쓰레기의 종류와 양, 그리고 외국기인 쓰레기의 양과 종류 등을 파악하고 있다.울릉도는 울릉도·독도 해양연구기지의 제안으로 2019년 12월부터 국가해안쓰레기모니터링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조사지점은 접근성과 해안 특성을 고려, 울릉도 북서쪽에 있는 울릉도·독도 해양연구기지 전면 해안 100m 구간으로 선정했고 현장조사는 2개월 간격으로 울릉도·독도 해양연구기지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2021년 1월 26일에 수행된 울릉도 해안쓰레기모니터링에서 5m 구간 4개소라는 짧은 지역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스티로폼 등 플라스틱 해안쓰레기와 함께 목재, 어선 깃발, 외국산 신발 등이 조사되었다. 총 170개의 플라스틱 해안쓰레기가 발견됐고 이 중 15%인 26개가 외국기인 플라스틱이었다. 외국기인 플라스틱의 경우, 대부분 중국 상표가 부착된 플라스틱병이었다. 외국기인 플라스틱을 제외하고, 발견된 플라스틱 중 30%가 스티로폼 형태였다. 이외에도 동해안 울진, 삼척의 명칭이 선명한 어구 깃발, 목재 등이 발견됐다.정해진 조사방법에 의한 조사를 마치고, 조사 구간을 포함한 약 200m에 이르는 해안선에 대한 해안쓰레기 수거작업을 진행한 결과, 약 2.5t 쓰레기 수거차량 3대 분량의 해안쓰레기가 회수됐다. 비록 이날 해안가 청소 작업이 진행됐지만, 며칠 후 해안가는 언제 청소 작업이 있었던 것 마냥 해류와 바람과 파도에 밀려온 쓰레기로 다시 가득했다. 울릉도 해안쓰레기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특히, 울릉도 해안의 경우 서·남해안과 다르게 해안이 모래 해변이 아닌 굵은 자갈 해변으로 이뤄진 지형적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 해안쓰레기가 굵은 돌 틈에 박혀 있어 해안쓰레기를 줍는 게 아니라 돌을 들춰 파내야 하는 실정이라 회수작업이 쉽지 않다. 더불어 실제 수거되는 플라스틱은 크기 5㎜ 이상의 중형 플라스틱이고, 스티로폼 등이 잘게 부서진 형태의 미세플라스틱 등은 사실상 회수가 불가능해 미세플라스틱으로 인한 연안 생태계의 피해 또한 우려되는 실정이다.해양수산부에서는 해양플라스틱 쓰레기 제로화를 목표로 해안기인 쓰레기 및 육상기인 쓰레기 발생원 줄이기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해안기인 쓰레기 발생원 줄이기를 위해 친환경부표(스티로폼 부표 대체) 및 친환경 어구(생분해성) 보급 촉진, 바이오플라스틱 어구·부표 개발과 함께 육상기인 쓰레기 줄이기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 규제, 수산물 친환경 포장기술 개발 등을 추진하고 있다.울릉군도 매년 지역 민간단체와 협력해 수중정화활동, 해양쓰레기 정화사업, 바다환경 지킴이 지원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경북도는 해양쓰레기 청소선인 울릉도(독도) 전용 청항선 건조 또한 추진 중이다. 이러한 해양기인 및 육상기인 쓰레기 발생원을 줄이게 하는 노력과 함께 울릉도(독도)의 정확한 해안쓰레기 실태 파악을 위한 더 정확한 조사가 또한 필요하다.매년 북한수역으로 진출하는 중국 어선의 쓰레기 배출 또한 대응이 필요하다. 동해안 최초의 해양보호구역인 울릉도가 해안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해류와 바람의 특성상, 우리나라 해양쓰레기 회수의 최후 보루인 울릉도 해양쓰레기 관리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2021-02-14

코로나19 백신(아스트라제네카) 논란

이재혁대구경북녹색연합 대표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의 고령자에 대한 효과와 안정성에 관해 국내외 안팎으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2월26일부터 의사, 간호사, 병원종사자 등 의료진 5만명에게 화이자 백신을 접종하고 65세 이상 고령층이 다수인 요양병원과 요양시설 종사자 등 78만명에게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해외에서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관해서 안정성과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핀란드는 70세 미만, 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스웨덴·노르웨이는 65세 미만, 폴란드는 60세 미만, 벨기에는 55세 미만 접종을 권고했고 스위스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승인 자체를 보류했다.한국정부는 고령자들에 대한 제한을 두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대한 다른 판단을 하고 있어 걱정스럽다. 1월 31일 식품의약품안전처 아스트라제네카 검증자문단은 안전성 프로파일이 양호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참여 대상자 중 고령자 수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고령자에 대한 투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어 고령자에 대한 접종을 제한하지 않았다.같은 날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만 65세 이상 고령층에게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해서는 안되며 식약처에서 만 65세 이상 고령자 접종 가능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대한의사협회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만 65세 이상 접종에 대해서는 자제를 권고한다”라는 입장을 발표했다.필자도 매우 우려돼 2월 2일 열린 대구광역시 코로나19극복 범시민대책위원회 19차 영상회의에서 유럽의 상황과 대한의사협회장 의견을 전하며 코로나19 백신 논란에 대해 대구시민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으니 대구시에서도 검증을 통해 시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대구시 감염병 관리지원단장은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전문가가 아니며 의사마다 전공분야가 다르니 예방접종전문위원회, 백신·예방·감염의 전문의 의견을 따라갔으면 좋겠다”라는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답변을 했다.이후 2월 5일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효과는 유럽과 동일하게 만 18세 이상으로 하되, 사용상 주의사항에 ‘만 65세 이상의 백신 접종 여부는 효과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를 반영하고 추후 미국 임상시험 결과에 대한 분석 자료를 제출할 것을 권고했다”고 밝혔다.2월 10일 3차 검증단계인 최종점검위원회에서는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에 대하여 추가 임상시험 결과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결정했고 사용상 주의사항에 ‘65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사용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라고 기재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 결정에서 중요한 부분은 국민은 접종을 하고 안전에 대한 확인은 나중에 하겠다는 점이며 의사가 접종 대상자의 상태에 따라 접종 유무를 판단해 결정하라는 식약처의 입장은 무책임의 극치이다.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까지 나서서 고령자에 대한 접종을 제한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결정이다.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국은 선진국들 대부분이 이용하지 않는 경로인 코백스로부터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했다. 코백스는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감염병혁신연합(CEPI)이 공동으로 코로나19 백신의 공정한 배분을 위해 운영하는 기구이다.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대부분 백신을 받지 않기로 했으며 코백스를 통해 1분기에 화이자 백신을 공급받는 국가는 대부분 개발도상국인 것으로 나타났다.태국에서는 코백스를 통한 조달 방식에 대해 비용 대비 효율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코백스를 통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최소 259만여회분, 화이자 백신 11만여 회분 총 271만여 회분을 받게 된다. 코백스 지원이 없었더라면 올해 1분기에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만 접종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매우 한심스러운 상황이다.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아랍에미리트 39.95%, 이스라엘 39.59% 영국16.89% 미국 10%인 가운데 한국은 접종 시작은 커녕 아스트라제네카 논란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으며 국제적 망신도 예상된다. 정부는 K방역 자화자찬에 도취되어 있다가 백신도입이 늦어졌으며 거듭되는 코로나19 방역실패로 인해 발생되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 못하여 이로 인한 고통은 오로지 국민의 몫이 됐다.해외에서는 공항 근처에서 이미 가짜 코로나19검사 진단지가 팔리고 있는 상황이고 세계 각국이 백신 접종이후 백신접종 유무 확인으로 출입국을 제한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현 정부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어떻게 지켜야할지 국민의 입장에서 대책을 내놓아야한다. 안전이 확인 안된 백신으로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지 말고 철저한 검증을 통해 단 1명의 국민도 희생되지 않게 지키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존재 이유이다.

2021-02-14

‘문비어천가(文飛御天歌)’는 왜?

안재휘 논설위원방랑시인 김삿갓이 환갑 잔칫집에 들러 시 한 수로 떡 벌어지게 한 상을 받아먹은 이야기는 ‘아부(阿附)의 힘’을 상징하는 일화다. 잔칫집에 들어선 김삿갓은 ‘저기 앉은 저 늙은이 사람 같지 않구나(彼坐老人不似人)’라고 시운을 뗀다. 노인의 아들들이 분기탱천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태연히 다음 구절을 읊조린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도다(疑是天上降眞人)’ 과장된 찬사에 주인들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냈다던가.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벌어진 웃지 못할 유명한 아부 역사도 있다. 광나루에서 낚시 중이던 이승만이 방귀를 뀌자 옆에 있던 당시 경기도지사 이익흥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하고 아첨했다는 기록이 1956년 8월 1일 자 국회 속기록에 남아있다.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1445년(세종 27)에 편찬된 조선왕조의 창업을 송영(頌詠)한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다. 한글로 엮은 책으로는 최초인 이 노래는 오늘날 극진한 ‘아부’를 빗대는 부정적 용어로 곧잘 동원된다.얼마 전 전남 신안군에서 열린 ‘세계 최대 해상풍력단지 48조 투자 협약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을 환영하는 전남도청 직원들이 들고 있던 플래카드 문구가 도마에 올랐다. 이들은 ‘대통령님은 우리의 행복’, ‘왜 이제 오셨어요ㅠㅠ’,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대통령님,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공무원들이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손팻말에는 ‘우주 미남’, ‘문재인 별로, 내 마음에 별로’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자발적’이라는 전남도청의 뒤늦은 해명이 더 초라하다.오는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트위터에 올린 “오늘 문재인 대통령님 생신, 많이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입니다”라는 글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다. 기사 댓글과 SNS에 조롱 비판이 잇따른다.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단어는 가장 낯간지러운 문비어천가(文飛御天歌)로 기록될 것 같다.정상적인 정치소통집단이 아니라 정의적(情誼的) 유대관계인 친문(親文) 조직의 확증편향과 절대다수 민주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빚어내는 의회독주는 이 나라의 심각한 걱정거리다. 주거안정 붕괴, 탈원전 패착, 일자리 실패…정치사에 기록될 문재인 정권의 실책은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팬덤과 진영정치에 기댄 끊임없는 ‘민심 갈라치기’로 권력의 벽을 구축해온 일은 치명적이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관을 29명째나 일방적으로 임명해 국회 인사청문회를 무력화시킨 오만도 그 역학의 결과물일 따름이다.문비어천가는 친문에 어필하기 위한 강력한 주문(呪文)이 됐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이 말도 안 되는 정치 수준을 대체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아부는 생사람을 잡을 뿐만 아니라, 군주의 눈을 멀게 해 나라를 망친다”던 소크라테스의 경고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요즘이다.

2021-02-14

기록과 평가

역사가 인류사회의 변천과 흥망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큰 사건만을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 전반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역사적 기록으로 남는다.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든지 기록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먼 훗날에는 역사란 이름으로 평가를 받는다.지금처럼 공적 또는 사적 기록물 보관의 영역이 넓어진 시대환경을 생각하면 역사 자료 보존의 공간은 무한대다.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사관에 의해 집필된 정사라면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는 민중에서 나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은 야사다. 두 서적은 정사든 야사든 상관없이 역사적 평가라는 관점에서 지금은 쌍벽을 이루는 역사 유산이다.기록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새로운 놀랄만한 성과나 성적을 세웠을 때처럼 신기록의 의미가 하나요, 다른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정확한 팩트가 중심이어야 한다. 이렇게 남겨진 기록들은 후대에 걸쳐 역사적 자료로 인용되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좀 더 정직하고 정의로운 기록이 남도록 하는 것이 역사 위를 걷는 선배 세대나 위정자가 취할 자세다.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야당 동의없이 29번째 장관을 임명했다. 이명박 정부 때 17명, 박근혜 정부 때 10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다. 청문회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과 문제점과는 상관없이 국회가 보고서를 채택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면 장관직은 시작된다.29번 야당을 패싱하고 임명한 것이 청문회 취지를 못 살렸다며 국민의 반발도 적지 않다. 법률적인 하자가 없다고 정치적 행위가 단순한 기록으로만 남지 않는다. 역사란 기록과 함께 평가가 항상 뒤따르는 법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2-14

지방소멸 위기 극복 총력전

백선기​​​​​​​칠곡군수‘지방소멸’이라는 섬뜩한 경고가 화두다.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핵심 과제가 바로 정주여건 개선이다. 정주여건이 개선되면 기관·기업 유치가 활성화되고 인구 및 세수가 증대해 주민 삶의 질이 향상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칠곡군은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첫 번째 과제로 산단과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 등을 통한 일자리창출에 매진해 왔다.이러한 노력의 결과 경상북도 일자리창출 평가에서 8년 연속 수상을 이어가는 등 과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또한 도시재생뉴딜사업, 문화도시, 칠곡U자형관광벨트 사업을 통해 주거·문화·관광 등의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한 단계 향상시켜 나가고 있다. 칠곡군은 주거환경의 개선을 위해 추진한 왜관읍 도시재생뉴딜사업이 지난해 9월 ‘국토교통부 2020년 1차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최종 선정됐다.왜관읍 도시재생뉴딜사업의 핵심축은 기존 왜관읍사무소를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행정문화복합플랫폼’으로 조성하는 것으로, 지하 1층에는 스마트 주차장, 지상 1층에는 행정복지센터, 2층에는 작은도서관과 생활체육시설이 마련된다. 또 마을숨길틔우기, 스마트가로등, 쓰레기분리수거함, 골목길 고보조명, 무인택배함, 슬레이트 지붕개량 등의 마을생활환경 개선과 노후주거지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이밖에도 △구상시인이중섭화가 거리조성 △인문학 목공소 운영 △소상공인 교육 및 창업지원 △청년활력공간 조성 △낙동지교사랑방 조성 △지역활성화 콘텐츠 운영 △주민역량 및 주민자치활동 지원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왜관읍 도시재생뉴딜사업과 왜관중심지활성화사업, 1번도로 전주·전선 지중화사업 등이 연계해 완료되면 왜관읍 구도심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 약목면과 동명면에도 도시재생뉴딜사업을 추진하고 북삼읍과 석적읍에는 수영장을 갖춘 군민체육센터를 건립해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지역균형 발전을 이룰 방침이다.칠곡군은 군민 문화생활 향유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다양한 문화도시 사업을 추진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는 예비문화도시에 선정돼 문화관광도시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됐다. 예비문화도시를 거쳐 법정문화도시에 최종 선정되면 5년간 15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문화사업 관련 종합적으로 지원을 받게 된다.‘인문적 경험의 공유지 칠곡’을 비전으로 지난 2년간 법정 문화도시 지정을 위해 지역 내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의견을 반영해 문화도시 조성계획을 수립하고 주민의 다양한 문화실험 활동을 통해 내실을 다져왔다. 예비도시 사업기간인 올해에는 문화도시 거버넌스 모델기반 마련하고 문화도시 확산 기반 마련 등 3개 분야 9개 사업으로 법정지정을 위해 준비해 나갈 계획이다.칠곡군은 2012년부터 지역 최대 역점 사업으로 칠곡U자형관광벨트를 조성했다. 칠곡U자형관광벨트는 자연과 생태, 호국과 평화, 역사와 문화, 예술 관람과 체험을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3㎢ 규모의 메머드급 복합 관광단지다. U자형관광벨트가 완성되면 호국 평화를 테마로 한 맞춤형 체험관광산업을 통해 지역 정체성 확보와 경제 활성화가 기대된다. 지난 9년 동안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칠곡보생태공원, 칠곡보오토캠핑장, 칠곡보 야외 물놀이장, 역사 너울길, 꿀벌나라 테마공원, 향사아트센터, 사계절 썰매장, 음악분수, 칠곡평화전망대 등을 준공했다.또 공예테마공원, 호국평화 테마파크 조성사업 등을 2022년까지 마무리하고 칠곡U자형관광벨트를 완성할 계획이다. 이러한 시설이 들어서면 관광 인프라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시너지 효과가 더욱 극대화 돼 관광산업 활성화와 정주여건 개선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칠곡군은 도시재생뉴딜사업, 문화도시, 칠곡U자형관광벨트 사업 등의 삼각편대를 통해 주거·문화·관광 등의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한 단계 향상 시켜 지방소멸의 위기를 모범적으로 극복한 지역으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확신한다.

2021-02-14

플라타너스가 말을 걸다

플라타너스는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 흉터를 만들지 않는다. 안으로 상처를 말아 넣어서 잘린 단면이 사라지게 한다. 흉터를 볼 때마다 떨어져 나간 가지가 생각나 가슴 아플까봐 그러는 것 같다.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듯 플라타너스는 어린 시절 내게 위로가 돼주었다.방송반이던 나는 매일 아침 명상시간에 읽을 내용을 그 전날 한 편씩 일지에 옮겨 적었다. 그날은 담임이 세 편이나 쓰게 했다. 청소 당번 아이들이 검사를 맡고 교실을 떠났고, 친구 미정이만 복도에서 내가 다 옮겨 적고 나오길 기다렸다. 어슬렁거리지 말고 집에 가라는 선생님의 큰소리에 우물쭈물하던 미정이의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집에 혼자 갈 길이 심심할 것 같아 내 글씨가 점점 휘갈겨졌다. 마지막 장을 옮겨 적을 때, 이층 오학년 교실은 내 연필 긁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선생님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만 쓰고 앞으로 나오라 했다. 한참 전부터 굳게 다문 입으로 서류 같은 걸 살피며 내겐 눈길도 주지 않더니 말이다. 내 책상에서 교탁까지 걷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뭔지는 모르지만 뒷머리에 닭살이 오소소 돋는 걸 느꼈다.그는 내게 다짜고짜 돈은 왜 훔쳤냐 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표정에 화를 내며 출석부로 머리를 쳤다. 두려운 마음에 애써 참았지만 눈물이 볼 위로 굴렀다. 뭐지, 무슨 돈, 어디서 훔쳤단 말인가. 숙직실에 걸린 선생님 옷에서 300원을 왜 훔쳤냐 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그는 훔치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다그쳤다. 몇 번인지 때리고 다시 묻기를 반복했다. 손목시계를 흔들며 뺨도 몇 대나 때렸고 그때마다 나는 교탁에서 멀어졌다 끌려 왔다. 억울함에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300원을 훔칠 정도로 궁하지 않았다. 매를 맞는 간간히 훔칠 이유가 없는 내 사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다가 설핏 고개를 드니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플라타너스가 뉘엿뉘엿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밖이 환할 때와는 또 다른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혼자 감당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훔쳤노라고 거짓말을 했고, 그는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이젠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운동장엔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던 아이들의 눈빛이 내 등에 꽂히는 걸 느꼈다. 눈시울 붉은 해가 교실 뒤로 뒷걸음을 치고 플라타너스만이 위로하는 듯 교문 앞까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나를 따라왔다.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랫동안 울었다. 이불호청이 젖었다 다시 마를 때쯤 할아버지는 대문을 열고 들어 오셨다. 벌게진 내 눈을 보고 무슨 일이냐 물으셨고 할아버지가 혼내줘요, 난 억울하다고 울먹였다. 한참을 듣기만 하던 할아버지는 “거 참 무슨 일이고.” 달래는 것도 위로도 아닌 그 한 마디뿐이었다. 선생님이란 이름이 부모보다 높았던 시절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날들이 흘러갔지만 나는 속앓이를 심하게 했다.오랫동안 혼자였다.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멀찍이 떨어져 품 넓은 플라타너스 그늘에 숨어 있었다. 그런 나에게 나무는 방울 모양의 열매를 떨궈주며 말을 걸어왔다. 버즘같은 껍질을 벗겨내며 잊어버리라고 하는 듯했다.나는 바보같이 나중에 선생님을 찾아가야지 했다. 내게 왜 그랬냐고, 왜 괴롭혔냐고, 궁금한 모든 것을 따지리라 다짐했었다. 사십 년이 흐른 지금 알았다. 나에게는 아직도 노을이 질 때면 가슴이 아리며 잊지 못할 일이지만 늙어버린 그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지금도 초등학교 운동장엔 나를 위로해주던 플라타너스가 서있다. 어른 손바닥 같은 잎을 누군가의 발 앞에 떨어뜨리며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김순희 수필가

2021-02-14

설, 복덕방, 제관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우리 조상들은 설이 되면 세배를 하고, 그림을 주고받고,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나누었다. 설날에 주고 받은 그림을 ‘세화’라고 하는데 복을 기원하고, 잡귀를 쫓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설날이 되면 이런 그림들을 출입문에 붙여 놓았다.또 우리 조상들은 유달리 제사를 많이 지냈다. 개별적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지만 부락 단위로 제사를 지내는 일도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부락제’라는 책에 의하면 전국의 부락제가 522개가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부락제가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당제였는데 설날에 이 당제를 빼놓지 않았다. 특히 설날에는 떡과 술을 빚어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그때 나누어 먹었던 음식을 ‘복덕’이라 했고, 복덕을 나누던 집을 ‘복덕방’이라 했다.이 제사의 특이한 점은 제관을 뽑는 일이었다. 보통 가정 제사의 제관은 가장 높으신 어른이 맡아서 했다. 그리고 풍어제나 기후제와 같은 제사는 무속인들이 담당했다. 그런데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제사의 제관은 무속인도 아니고, 마을 이장도 아니고, 마을의 가장 덕망이 높은 어른도 아니었다. 한 해 동안 마을에서 가장 죄 짓지 않고,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 가장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을 뽑아서 제관으로 삼았다. 복을 기원하는 당제의 제관은 반드시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우리 조상들의 마음속에는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죄 없는 사람, 가장 선한 사람, 가장 부정한 짓을 하지 않은 사람이 복을 나누어 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 했다. 그런 사람을 뽑아서 제관으로 삼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제사가 끝나면 복덕을 나누는 일을 하게 했다. 그래야만 그 마을에 한 해 동안 복이 있는 마을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결국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것은 그 마을에 죄 없는 제관이 있으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성경 시편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 했다. 우리로 치면 당제의 제관이다. 설날에 가장 자주 듣고 자주 하는 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덕담을 하기에 약간 쑥스럽다. 왜냐면 이 말은 원래 복덕방에서 복덕을 나누어 주면서 제관이 하던 말인데 나는 그런 제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설을 맞이 하면서 내년 설날에는 당제의 제관이 되어 복덕방에서 복덕을 나누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쑥스럽지 않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1-02-09

비대면 세배

민족 고유명절인 이번 설 연휴에는 가족 간 모임이 통제된다. 정부가 5인 이상 사적 모임을 금지한 사회적 거리두기 수준을 설 연휴 마지막 날까지 연장하면서 가족 간에도 4인까지만 만날 수 있게 했다.많은 자녀를 둔 집안의 경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한꺼번에 만나면 방역지침을 위반하게 돼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설에는 72%가 고향방문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라 아예 귀향을 포기했다고 한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설 인사는 영상 통화로”라는 당국의 캠페인성 구호가 곳곳에 나붙어 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다.고향을 떠난 자식으로서는 1년에 겨우 두 번 있는 명절인데 부모를 만나지 못한다하니 아쉬움이 여간 큰 게 아니다. 일부 집은 방역지침에 어긋나지 않게 시간과 날짜, 사람 수 등을 조정해 부모를 만나기로 했다고도 한다. 또 일부서는 방역지침에도 고향에 오라는 시부모의 말씀에 속앓이 하는 며느리도 있다고 한다.우리의 고유 명절이 어쩌다 바이러스의 침범에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게 된 것인지 안타깝다. 새해를 맞는 설날이 되면 우리는 윗사람에게 세배를 올린다. 올해도 건강하고 좋은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우리 민족의 예법이다. 윗사람도 아랫사람이 세배를 올리면 “소원성취 하라”는 덕담과 함께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술을 못 마시는 어린아이에게는 세뱃돈을 준다.세배는 집안 어른에 이어 친척과 동네 어른들까지도 일일이 찾아 문안을 드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이다. 만약 연초 바빠서 인사를 못 드렸다면 시기가 늦더라도 반드시 꼭 챙겨야 하는 것이 세배 예법이다. 이번 설에는 영상통화나 비대면 인사로 세배를 대신한다고 한다. 아쉬움이 크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2-09

손때와 설 명절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동네 집 사이로 난/좁은 계단 길에/부러진 목발 기대앉아 있네요/외로운 얼굴로 기대앉아 있네요//작은 목발이에요/손잡이에 감긴 하얀 헝겊에/뽀얗게 손때가 묻어 있어요/참 작은 목발이에요/부러졌네요”황인숙 시인의 시 ‘골목길’ 일부이다. 시인은 골목길,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 용산 해방촌의 골목길에 관심과 애정이 많다. 이 좁은 골목길 한 귀퉁이에 용도가 다했거나 과도한 사용으로 부러진 채 목발이 버려져 있고, 시인의 눈길은 목발의 손때 묻은 손잡이 헝겊에 머문다. 손잡이 헝겊에 묻은 손때가 눈에 띌 정도면 엔간히 사용된 목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손때는 목발을 사용했던 이의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애씀이 고스란히 드러난 자국이리라.사전은 손때를 ‘오랫동안 쓰고 매만져서 길이 든 흔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른 단어보다는 그래도 비교적 건조하지 않고 담담하게 풀이된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손때라는 단어는 이보다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따뜻함과 애틋함 그리고 세월의 눅진한 흔적을 담고 있는 말이 손때가 아닐까.지난 토요일 영등포 쪽방촌 봉사를 가면서 딸과 조카딸이 품고 놀던 인형들을 거둬 큰 비닐 봉투에 한가득 담아 갔다. 인형 나눔을 할 것이라고 진작에 이야기는 해뒀다. 그런데 늘 품고 있던 인형들 몇 개는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는 조카의 말을 깜빡 잊고 몽땅 가져가서 기증을 해 버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다음날 때마침 조카는 인형이야기를 꺼냈고,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기증하였다는 소식에 그는 몹시 서운해 했다.혹시라도 남은 인형이 있는가 해서 기증한 곳에 전화했더니 거의 다 가져가고 몇 개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것이라도 챙겨보려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깨끗하고 비싸고 좋아보이고 비교적 새 것같은 인형들은 이미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고 없었다. 남의 손이 많이 탄 더러운 인형을 가져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나 같았던 듯, 때가 묻어 꼬질꼬질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인형 몇 개만 남아 있었다.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하릴없이 남은 인형들을 가지고 돌아와 조카에게 보여주었다. 웬걸, 아이의 얼굴에는 대번에 화색이 돌고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자기가 간직하고 싶었던 인형이 그 중에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어릴 때부터 가슴에 품고 안고 주무르고 매만져서 더러워진 인형은 다른 사람에게는 쓰레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손때 묻힌 당사자에게는 애틋한 사랑과 추억의 덩어리이고 고갱이이고 ‘아카이브’(기록 보관소, 자료 저장고)였던 것이다. 아, 손때가 가져온 이 기쁨의 반전이자 역설이라니!곧 설이다. 아무리 모든 것들이 양력 시간으로 흘러간다 하여도, 설은 겨레의 손때 짙게 밴 새해 첫날이다. 한때는 이중과세 논란도 있었지만, 이제는 구정이라는 말도 사라지고 설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자리잡았다. 온 겨레의 손때 가득 묻은 설 명절을 뉘라서 버리자고 하겠는가.단지 이번 설은 또 한 번의 손때를 배게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향에 두루두루 손때 묻히기는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2021-02-09

뽕짝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대학시절을 돌이키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젓가락 장단과 거듭된 폭주(暴酒)다.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쪽지를 보낸다. ‘고모집, 6시!’ 술집 이름치고는 정겨운 고모집이 우리 학과 아지트 비슷한 곳이었다. 막걸리와 빈대떡, 김치찌개, 제육볶음 정도가 주된 안주였다. 제육볶음은 특별한 일이 있어야 먹는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에 고기안주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으니 말이다.자리를 잡으면 막걸리나 소주를 한 순배하고 누군가 흘러간 옛노래를 선창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노랫소리가 들리면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들고 술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당시 우리가 즐겨 부르고 따라 했던 노래는 예외 없이 뽕짝이었다. 요즘 고급스럽게 ‘트로트’라고 하지만, 나는 뽕짝이나 ‘도로토’ 같은 용어가 친숙하다.뽕짝은 4분의 2박자가 주조를 이루는데,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고복수의 ‘사막의 한’이나,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같은 노래는 ‘폭스트로트’이기에 속도감이 배가된다. 그런 노래가 나올라치면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기 마련이었다. 누군가는 운치 있게 ‘왈츠’나 ‘슬로 록’ 혹은 ‘탱고’ 같은 곡으로 분위기를 잡기도 했지만, 대세는 뽕짝이었다. 수준 높은 일부 선배는 ‘명태’ 같은 가곡으로 기를 죽이기도 했지만.뽕짝을 함께 부르고, 정치 얘기에 치열하게 몰두한 적도 많았다. 유신정권 말기에 학교를 다녔기로, 세상의 모든 것이 고깝고 부정적으로만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술을 먹고, 강의 빠지고, 여기저기 쏘다니고, 염세주의에 함몰되어 20대를 마구 살았던 시절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공부했던 극소수의 대학생이 ‘범생이’ 딱지로 소외되고 고립되어야 했던 희한한 시대. 그 시대를 위로했던 흘러간 옛노래와 젓가락 장단 그리고 막걸리의 추억.요즘 ‘트로트 열풍’이라고 한다. 일부 유튜브에서는 외국인 여성까지도 기막히게 트로트를 불러댄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K’로 시작하는 온갖 것이 세계 전역으로 팔려나가는 놀라운 시대를 경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와중에 뽕짝이 불러온 향수는 대단한 것이다. 어린 친구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흥얼거리는 뽕짝의 열풍은 분명 놀라운 시대상이다.20대 10년을 학교에 다녔던 까닭에 나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막걸리와 젓가락 장단과 뽕짝에 심취한 사람이다. 그 결과 수많은 노래와 곡조를 기억한다. 더욱이 남들의 노래를 듣기보다는 직접 노래하는 게 체질에 맞는다. 농촌에 사는 관계로 이웃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는 환경 또한 든든한 우군이다. 힘들고 지치고 괴로운 때가 오면 조용히 기타를 꺼내서 조율하고 노래한다.한동안 국민 뽕짝이었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을 3절까지 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맺혔던 울혈(鬱血)이 풀리는 느낌이다.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과 그이를 보내는 사람의 정한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시대의 명편(名篇) ‘눈물 젖은 두만강’. 여러분은 3절 가사를 아시는가?!

2021-02-09

(제안) 정치인 인성교육진흥법 발의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방역은 핑계 같다. 모이면 정부와 정치인 욕하니까, 욕 듣기 싫어서 모이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재보궐 선거가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국민이 욕하는 거 알기나 할까?”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중년의 손님들이 하는 말을 잠시 옮겼다. 물론 비속어들은 모두 제외했다. 단어 사이가 모두 비속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비속어도 그냥 비속어가 아니다. 감정이 최대한 고조될 대로 고조된 상태에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한이 서린 비속어! 말이 비속어지, 실제로는 울분이고 절규였다. 만약 청와대에 있는 사람과 여의도에서 파란 넥타이를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면, 분명 그들은 불안감을 넘어 살기(殺氣)를 느꼈을 것이다.그들에 의해 거리마다 내걸린 고향 방문 자제 가로펼침막은 거의 공해 수준이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있어 제일 큰 혼돈은 명절 풍습이다. 다음은 어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설 5인 이상 금지 신고는 어디에 하나요? 저희 시댁은 씨도 안 먹혀요. 자기네 가족들은 절대 안 걸리는 줄 알아요. 어이가 없어서, 벌금을 내야지 반성할 건가 봐요. (….)”이 글을 읽다가 필자는 현 정부는 시댁과 시댁 식구들을 범죄인으로 만들고, 나아가 가족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불순조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위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서 음식을 먹고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를 나누면 당연히 위험하다.”라고 덧붙였다.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조건 방역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방역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에 5인 이상 모이는 식당이나, 관광지 등에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방역을 걱정하는 이런 분들이 많은 이상 코로나19도 더 빨리 끝난 것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추석에 이어 설에도 제주 등 유명 관광지는 예약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코로나19 이후에 맞게 될 명절은 진짜 어떤 모습일지 걱정이다. 불 보듯 뻔한 명절 갈등을 정말 어이할까!명절을 앞둔 지금 인성교육진흥법이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 비록 믿지 못할, 또 편향된 언론이지만, 그런 언론에 비친 정치인의 모습과 혼돈의 정점에 있는 우리 사회 모습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인과 관계로 볼 때 우리 사회 혼돈 주범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치인이다. 말로만 국민이 하늘이라고 떠들어대는 위선 덩어리 정치인들은 그들이 만든 인성교육진흥법을 기억이나 할까! 나라의 진정한 주인인 이 나라 국민을 위해 더 이상 위선 덩어리 정치인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정치인을 위한 강력한 인성교육진흥법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혹시 바쁘다는 핑계를 댈 것 같아 그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만든 인성교육에 대한 정의를 적어 준다.“인성교육이란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공동체·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말한다.”(법 제2조1호)

2021-02-09

정확하게 사랑하기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창문을 본다. 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미세먼지가 잔뜩 낀 먹먹한 하늘이나 눈이 내리는 날은 만날 수 있는 확률이 극명히 낮아지기에 걱정이 앞선다. 반면 볕이 느껴지는 따뜻한 날에는 일렁이는 마음을 잠잠히 누르며 여분의 생수와 사료가 있는지 확인한다. 쾌청한 날 느지막한 오후에는 흰 고양이가 집 앞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몇 주 전 쯤 집 앞 화단에서 흰 고양이를 만났다. 평소 집 근처에서 자주 보이곤 했던 고양이였지만 사실 그간 별 감흥이 없었다. 어렸을 때 작은 사건으로 인해 동물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던 어느 날 지인을 기다리던 와중 흰 고양이가 나타났고, 한두 번 울음을 뱉더니 내 발치 아래로 와서 자신의 등을 비비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얼어붙은 내게 고양이는 돌연 자신의 배를 보여주었다. 마치 만져보라는 듯 이리저리 몸을 구르는데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씩 손가락을 펼쳐 흰 등을 쓸어보니 고양이가 대답에 응하는 듯 활발히 움직였다. 몸을 구부릴 때마다 뼈가 두드러졌고 고양이가 내뱉는 숨에 따라 손이 오르내렸다. 조금씩 옮겨져 오는 고양이의 체온에 한동안은 손바닥을 꼭 쥐고 있었다.흰 고양이는 자신의 구역이 있는 건지 볕이 좋은 날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날은 줄무늬 고양이 두 마리도 함께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재빨리 도망갔다. 아직까지도 줄무늬 고양이들과는 늘 일정 거리를 둔 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그럴 때 비어있는 두 손이 부끄럽기만 하다.길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없던 나는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영상을 찾아보며 정보를 습득했다. 길고양이를 만났을 때는 무작정 예쁘다고 만지거나 아무 먹이나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길고양이를 위한 급식소가 따로 있는데, 만약 급식소가 없는 곳에서 굶주린 고양이를 발견한다면 깨끗한 생수와 사료를 주어도 된다. 사료는 고양이가 한 끼 먹을 만큼만 주어야 하며 먹이를 주는 통은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또, 먹는 걸 천천히 지켜보다 다 먹은 그릇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그릇과 물통은 제때 치워야 한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자동차 엔진룸에 들어간 고양이를 확인하기 위한 라이프 노킹(Life Knocking)이나 밥을 챙겨주는 장소에서 TNR(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이 되지 않는 고양이를 파악하는 것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라이프 노킹이란 겨울날 따듯한 곳을 찾기 위해 자동차 엔진룸에 들어가는 고양이를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두드리거나, 차 문을 힘껏 닫아 소리로 확인하는 방법이다. TNR은 Trap(포획), Neuter(중성화 수술), Return(리턴)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도심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의 개채 수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중성화 사업이다. 인도적인 방법으로 고양이를 포획하여 중성화수술 후 원래 장소에 풀어주어 부상과 질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돕는다. TNR은 마친 고양이들은 왼쪽 귀 끝부분이 조금 잘려 있어 구분하기 쉽다.동물은 예쁘다고 마음껏 만질 수 없다. 안쓰럽고 가엽다는 이유로 길가에 놓인 고양이를 모조리 만지고 지나치게 먹이를 챙겨주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나의 능력으로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규칙이 필요하다. 다른 구역에서 넘어오는 고양이가 있을 수 있기에 제시간에 맞춰 같은 장소에 밥을 주기, 밥을 먹은 자리는 깨끗하게 유지하기, 너무 사람의 손을 타지 않도록 적당한 애정을 주는 등 분명한 기준을 통해 행해야 한다.고양이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면 싫어하는 이들 또한 있다는 걸 잊지 않아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의견을 존중하여 타협점을 찾아 나가야 하며 반려동물 등록제, 입양 문화, 반려동물 놀이터 확충 등 동물 보호 행정을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한다.무언가 급하게 쫓기는 날에는 볕 아래 몸을 만 고양이를 생각한다. 작고 하얗고 단단하게 놓인 고양이의 묵묵하고도 순수한 등을. 안네-소피 스웨친은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으로의 사랑도 깊어진다고 했던가. 조금만 눈을 돌리면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날이 흐려도 고양이가 있던 쪽을 계속해서 기웃거려 보는 이유다.

2021-02-08

집합금지와 소갈비찜

직계가족이라도 주소가 다르면 5인 이상 모일 수 없는 관계로 우리 가족은 각자 사는 곳에서 따로 명절을 쇠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한 일시적 이산가족인 셈이다. 아버지는 충남 당진에, 엄마는 서울 신림동에, 결혼한 여동생은 김포에, 나는 안양에 살고,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병원이야 면회 금지라 어쩔 수 없고, 동생과 매제, 조카까지 함께 모이면 6인이 되는지라 이 또한 별 수 없다. ‘핵가족’, ‘1인가구’라는 말이 등장한 지 꽤 오래 됐지만,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것마저 어렵게 되니 그 단어들에 함의된 고독감이 더 짙게 느껴진다.비록 한 자리에 모이진 못하지만 같은 음식을 먹을 수는 있다. 이번 설에 우리 집은 명절 음식을 준비한다. 축산업을 하는 친구가 한우 갈비 10kg을 선물로 줬고, 그동안 낚시 가서 잡아온 참돔이 냉동실에 여러 마리 있다. 이 귀한 재료들을 신림동 집에 가져다주고, 재래시장서 장을 보고, 엄마가 음식 하는 걸 옆에서 도왔다. 갈비찜, 도미찜, 소고기무국, 삼색전, 나물무침, 잡채, 조카가 좋아하는 백김치 등이 완성됐다. 양껏 나눈 음식을 스티로폼 아이스박스에 잘 포장해서 아버지께는 고속버스 택배로, 김포 동생네는 운전해서 직접 갖다 줬다.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이 한 데 모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간과 돈과 힘을 들여 명절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있느냐고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이때 가족이라는 말을 ‘식구(食口)’로 바꾸면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사전에서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한 집에서 함께”가 불가하니 “끼니를 같이”만이라도 함으로써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것이다.“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 뽁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백석, ‘여우난곬족’)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가족이 모일 수 없는 설을 앞두고 시 읽는 마음이 축축해진다. 아버지한테 택배 보내고, 동생네 갖다 주고 오니 남은 내 몫의 갈비찜을 엄마는 김치통에 담아 보자기로 싸뒀다. 어디서 많이 보던 보자기가 반가웠다. 어릴 적 ‘슈퍼맨’ 흉내 내며 육교 아래서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 망토처럼 목에 두르던 것이다. 엄마의 패션 스카프는 이제 음식 보자기가 됐지만 엄마 갈비찜 맛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 맛있는 걸 뿔뿔이 흩어진 우리 가족들은 각자 사는 곳, 사는 형편에서 먹으며 가족 해체 시대에 ‘식구’의 유대를 지켜낼 것이다.음식은 가족을 통합하고 외부 집단과 구별시키는 고유하고 내밀한 문화다. 음식의 향미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수용되는 양상이 천차만별인 주관적 감각 작용인데,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라든가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 또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의 맛은 ‘여우난곬’ 가족들에게 공통의 만족감과 유대감을 제공한다. 음식은 가족 집단의 특징적 취향을 넘어 유전 형질로까지 확장된다. 음식은 뼈와 살을 이루고, 나아가 DNA에 관여하기 때문이다.‘여우난곬’ 가족들은 한 솥에 끓인 ‘무이징게국’을, 우리 가족은 한 냄비에 끓인 소갈비찜을 나눠 먹음으로써 ‘혈육’, ‘식구’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특정한 음식의 맛과 냄새는 가족의 해체 또는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상황에서도 과거 온가족이 함께 지내던 시절을 재생시킨다. 오늘 저녁 한 그릇의 갈비찜은 내 어린 날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명절 음식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한 충남 당진과 서울 신림동과 김포와 안양의 식구들은 또 살아갈 ‘똑같은 힘’을 얻어 코로나 시대에도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2021-02-08

신라고분과 경주 쪽샘 유적

신라의 옛 고도(古都)인 경주에는 지금도 과거 신라인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고분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고분들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낭만을 느낄 수 있게도 해준다. 특히 신라 고분들 중 천마총 그리고 황남대총이 위치한 대릉원(大陵園)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직접 방문하거나 들어보았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다.한편 이와 같은 거대한 고분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공예품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더불어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화려하고 찬란한 신라인들의 고분 문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 바로 동쪽 편에는 현재에도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인 쪽샘 신라 고분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쪽샘 유적과 대릉원이 담장과 도로로 단절되어 있지만 본래는 하나의 묘역(墓域)에 속하는 곳으로 신라 왕경인들의 공동묘지로 이 일대가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쪽샘 유적의 고분들은 대릉원과 달리 과거 보존조치 구역으로 지정되지 못하였고 점차 상가와 민가들이 들어선 마을로 변하여 그 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었다.이후 유적의 중요성에 비해 관리와 보존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에 경주시는 ‘쪽샘 고분공원 조성사업’을 계획하고 2000년부터 이 일대에 대한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경주 쪽샘 유적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대릉원과 본래 한 묘역에 속하는 신라 왕경인들의 집단무덤 유적이다. 특히 신라의 대표적 묘제로 거론되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고 이외에도 목곽묘(덧널무덤), 석곽묘(돌덧무덤), 옹관묘(독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음이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쪽샘 신라 고분 유적의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적석목곽묘의 경우 봉분 직경이 30m 이상의 대형분(大形墳)이 있는 대릉원과 다르게 봉분 직경 10~20m의 중·소형분(中·小形墳)들이 집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그리고 일정한 묘역을 가지는 대형분들과 달리 쪽샘 유적의 적석목곽묘들은 서로 근접하거나 중복되게 축조된 모습이다. 이러한 규모, 입지의 차이는 무덤 주인공의 생전 신분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신라 사회가 무덤의 규모나 입지, 조성방식에서 일정한 사회적 규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이와 관련된 현상은 목곽묘 축조 양상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쪽샘 유적 일대에서 발견된 목곽묘의 입지는 적석목곽묘가 만들어지는 낮은 구릉 사면부(斜面部)나 주변부에 주로 위치하며, 그 규모도 길이 5m 이하의 것들이 대부분이다.또한 부장 유물도 적석목곽묘에 비해 양과 질에서 다소 떨어지는 것들이 많으며, 서로 중복되어 있는 양상이 뚜렷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적석목곽묘가 축조되던 시기 목곽묘는 아마도 적석목곽묘의 주인공 보다는 조금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묘제였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정대홍학예연구사쪽샘 유적에서는 석곽묘와 옹관묘도 확인되었는데, 전체 무덤 중 그 수량이 많지 않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마도 목곽묘의 주인공보다 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보인다.이러한 쪽샘 유적의 고분 분포양상은 얼핏 작은 무덤들 혹은 화려한 금공예품(金工藝品)이 없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신라 고분 연구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의 지배자들은 거대한 봉분과 다량의 부장품, 우월한 입지 등을 통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무덤의 주인공을 당시 사회에서 최상위 지배층일 것이다. 반면 이보다 규모, 입지, 부장품 등이 다소 떨어지는 쪽샘 고분의 주인공들은 당시 사회에서 이들보다 더 낮은 계층이었을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쪽샘 유적의 신라 고분들은 당시 신라 사회의 계층성과 이에 따른 일정한 규제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즉 고분에 투영된 입지, 규모, 부장품의 차이를 통해 당시 신라 사회의 신분적 차별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신라 왕경 내 중심 고분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경관 복원에 있 쪽샘 유적은 신라 고분 연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021-02-08

그들의 여름밤이 모두의 여름밤이 되는 시간

그들의 여름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의 여름밤에 가닿는다. 그들 각자의 어느 시절 여름밤이 우리 모두의 어느 한 때 여름밤으로 연결된다. 그해 여름, 더웠다는 것만을 빼고 특별한 일이 없었던 여름밤이 되살아나 화면 속에 펼쳐진다. 그것은 오래된 앨범을 펼쳤을 때, 잊고 있었던 추억과 이야기들이 되살아 오듯 세월의 먼지를 안고 다가온다.윤단비 감독의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가족앨범을 펼쳤을 때의 그 느낌으로 진행된다. 예전 살던 집을 배경으로, 막내가 태어나 한창 걸음마를 뗄 때의 모습으로, 꽃다발을 안고 있는 누나의 졸업식에서, 아버지의 생일날 모두가 모여 앉은 식탁 위에서.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들 속에서, 그 시절 그때 각자의 표정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나름의 고민을 살포시 들춘다.얼마 되지 않은 세간을 승합차에 싣고 더부살이를 하러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집으로 옮겨 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소녀(옥주)와 소년(동주), 아버지와 혼자 살고 계신 할아버지 3대의 결합 속에 어머니가 부재한다. 이혼한 아버지와 상처한 할아버지 모두 아내의 존재가 없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의 염려를 핑계로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은 고모가 이곳 이층집으로 피신하듯 들어온다. 고모 역시 누군가의 아내이지만 자식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니다.이러한 설정 속에서 펼쳐질 수난과 갈등, 화해의 과정을 짐작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 갈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의 생활고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깊은 고난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 사춘기 옥주의 고민과 사건이 존재하지만 극적인 상황으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우리들 모두의 기억 속에 하나씩 간직하고 있었을 그 여름날의 정서를 끄집어 낸다.사는 집과 가족 환경, 자라온 배경이 다를지라도 어느 한때 여름의 가족들이 지나왔을 그 지점의 희노애락을 포착하여, 낡은 앨범을 들추듯 회상의 분위기로 이끈다. 여기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도 한몫을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세월을 이고 있는 것들. 오래된 선풍기와 괘종시계, 그 시절 필수 혼수품이었을 전축과 재봉틀, 넓지 않은 마당을 정성스레 가꾼 텃밭, 할아버지의 집은 그 세대가 보편적으로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을 살림들이 그때 그 자리에 차분히 자리잡는다.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각자의 고민과 사연이 있듯이, 할아버지의 이층집과 살림살이들이 모두 보편적인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오래된 소품들이 ‘우리의 여름밤’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우리의 여름밤’이기도 하다.사건과 갈등, 고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깊고 어두운 골짜기로 향하지 않는 것. 영화 속 등장인물은 한때 우리 가족들 누군가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구구절절하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겐 없지만 그때 누군가에겐 있었을지 모르는, 혹은 우리도 하나쯤 가지고 있었을 살림살이의 모습.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등장인물과 풍경과 소품들이 모두 어울려 우리 모두의 어느 여름밤으로 조용히 내려 앉는다.영화는 큰 갈등없이 물흐르듯 흐른다. 그 시절 그때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 속에서 한 여름밤 모기향 피어오르듯 기억들이 피어오른다. 영화 속 풍경 모든 것이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세월의 때를 묻히고 묵묵히 자리잡고 있는 모든 소품들이 우리의 그때 그 모습이었다.할아버지의 이층 양옥집을 포함해 그 집에 가득 들어찬 모든 물건들이 추억을 소환하는 영화. 자잘한 갈등 속에 차분히 유년의 기억으로 가닿는 영화다. 대사와 설명 이전에, 언어로 전달하기 이전에 전달되는 그 무엇인가로 ‘남매의 여름밤’은 전달된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몸짓만 봐도 알’ 수 있는, 펼쳐지는 화면만으로 먼저 전달되는 공통적인 정서와 추억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영화의 시작과 늦은 밤 할아버지가 혼자서 전축을 듣는 장면과 엔딩에 신중현 작곡의 ‘미련’이 흐른다. 그 노래의 가사,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처럼 그 시절의 가족들과 그 속에서 일렁였던 갈등과 묵묵히 지켜봐왔을 우리집과 물건들이 “갈 수 없는 먼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한다.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1-02-08

맛과 정성의 밥상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을까, 먹기 위해서 살까? 이에 대한 논쟁은 수도 없이 해왔고 계속되고 있지만, 각자 나름의 취향이나 주관에 따라 받아들이고 추구해 나가면 편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을 비롯한 온갖 유기체는 생리구조 상 음식물을 섭취하고 배설하는 신진대사 작용이 있어야만 최소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적어도 먹어야 살 수 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먹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기력이 있어야 제반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먹는 것은 인간생활의 중요한 요소이며, 의식주와 함께 인류역사학적으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다지만 그것을 통칭하면 먹거리이고 달리 보면 음식문화나 정서적인 산물인 것이다. 그만큼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고 먹고 마시는 과정에는 많은 생각과 사연과 풍습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음식에는 지역적인 특색과 삶의 양식이 더해져서 독특한 맛과 향으로 눈요기를 자극하는지도 모른다.음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이자 정과 얼이 버무려진 고마운 양식(糧食)이다. 잘 먹어야 잘 산다는 말처럼, 우리는 음식을 먹고 자라며 음식을 통해 인심과 밥상머리 교육을 받아왔다. 단순히 배만 채우는 밥이 아니라 밥상을 통해 알게 모르게 인성과 예절을 배우고 터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어머니께서 차려 주신 두레밥상을 대하며 우리는 슬기를 발라내고 뚝심을 길러내며 가족을 위해 험난한 세상의 밥상을 온전하게 차려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평소 음식에 대해 많은 관심과 미식가를 자처하는(?) 필자로서는 일전에 방영한 ‘한국인의 밥상’ 특집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시청했다. 지난 10년간 전국의 방방곡곡을 돌며 80천여 가지의 향토음식을 소개한 대장정은, 기억마다 계절마다 사람을 만나고 음식에 얽힌 많은 얘기와 추억이 서린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그렇게 보듬고 장만한 음식에는 각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었고 정성을 더하고 아픔을 달래며 위로와 감사를 나누는 진정한 사랑의 손맛이었다. 건강과 장수에 직결되는 음식을 잘 먹어야 무병과 노화지연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과일, 채소, 생선, 견과류, 통밀, 올리브유가 풍부하고 건강과 장수에 이로운 식단으로 정평이 나 있는 ‘지중해식단’을 한국형 장수식단으로 특성화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먹는 것에 대한 연구와 건강식, 균형 잡힌 식단, 식이요법 등으로 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인류의 희망사항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산다는 것은 어쩌면 밥을 먹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밥 한끼에 얽힌 그리운 추억과 잊지못할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의 음식에는 큰 지혜가 배어 있고 추억의 맛과 향이 진하게 우러난다. 애틋해서 고마운 밥상, 힘들 때는 힘찬 응원가였으며 어려울 땐 가슴 찡한 위로로 다가오는 소중한 추억 나눔의 음식은 함께 했던 시간의 행복한 기억이 아닐까?

2021-02-08

줌, 휴대폰으로 하는 졸업식

권윤구포항 중앙고 교사세상은 바뀌었다. 신축년 2021학년도 새해는 코로나19로 졸업식이 온라인 졸업식으로 바뀌었다. 3년간 함께한 친구들과 대학 진학의 기쁨을 나누며, 부모님의 축하 꽃다발을 받으며, 친구와 함께 사진도 찍고, 담임 선생님과 이별의 인사도, 추억의 사진을 남겼던 축하의 졸업식이 바뀌었다.올해는 텅 빈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 혼자 인사를 하고 졸업식을 진행했다. 교장선생님의 인사 말씀도, 부모님의 축하인사도, 친구와 교정에서 마지막 나눌 이야기도, 선생님과 마지막 감사의 인사도, 강당에서 상을 받는 친구에게 보내는 큰 박수 소리도, 교복 입고 남길 추억의 사진도, 학교 앞 꽃다발을 파는 상인들이 줄지어 있던 모습도 없는 썰렁한 모습의 졸업식이 되어 버렸다.필자는 졸업식 날 정든 제자들에게 늘 편지를 낭독했었다.“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몇 날 동안 깊은 잠을 계속 들지 못했다. 잠결에 울컥 화가 나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며 1월이 시작되면서 생긴 새로운 현상이다. 새벽에 잠이 깨면 늘 이런 생각들을 한단다. 아! 이제 서서히 준비를 해야 겠구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하며 살아가는 모습 이길 진심으로 빌며 00학년도에 우린 같은 공간에 머물던 가족이었고 3학년 3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라. 너희들의 앞날에 좋은 일, 행복한 일, 기쁜 일만이 있길 바랄게. 그리고 그럴 땐 언제나 너희를 생각하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하여라. / 이별을 가슴 아파하는 아빠 같은 선생님이”이러한 편지를 낭독하게 되면 교실 뒤쪽에 계시던 학부모님께서 눈물을 훔치곤 하신다. 편지 속에는 간단하게 졸업생들에게 축하의 말, 당부의 말, 대학생활, 사회생활, 앞으로 시련과 고난을 이겨 내야 할 일 등 이런 저런 이별과 축하의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학생·학부모·교사 서로 졸업을 축하해 주고 함께 사진도 찍고 이별의 악수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축하와 격려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코로나19로 세상은 바뀌었다.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웃는 얼굴에서 마스크를 사용해서 웃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세상으로 교실은 바뀌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친구들과 함께 졸업사진 대신 각자 추억의 스냅사진 찍기가 요즘 유행을 한다.2020년은 온라인 수업으로 인하여 학교에서 서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던 한해였다. 그러나 졸업생들은 휴대폰 속의 줌 채팅창으로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나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상으로 변해 버렸다.정든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은 하루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어 모든 것이 멈춘 일상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두 번은 없어야 한다.2021년에 처음 경험해 보는 휴대폰 졸업식 풍경, 코로나19로 힘든 한 해를 보낸 친구들과 대학합격의 기쁨도 축하도 나누지 못한 채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첫 발을 내딛고 있다. 바라건데, 온라인 공간에서 이별의 정을 나누었지만 서로를 격려하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마음과 힘찬 전진을 약속하는 친구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

2021-02-08

화제의 ‘클럽하우스’

춤추고 노래하는 곳이 아니다. 클럽하우스는 초대를 기반으로 한 실시간 음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2020년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의 창업가 폴 데이비슨과 구글 출신인 로언 세스가 만들었다. 영상이나 글 등은 사용할 수 없고 음성으로만 대화한다. 사진이나 텍스트 기반의 기존 SNS와의 차별화가 뚜렷해 신선하다.보통 SNS는 이용자가 가입을 한 후 친구를 추가해서 사용하는데, 클럽하우스는 기존 가입자로부터 초대를 받은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희소성이 매력이다. 1인당 2장의 초대권이 주어지며,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 추가 초대권을 받을 수 있다. 초대를 받지 못했다면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승인을 기다려야 한다. 대화방을 만들어 사용자를 초대하면 방을 만든 모더레이터와 모더레이터가 지정한 스피커는 음성으로 대화할 수 있고, 나머지 청취자들은 이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구조다.이 소셜플랫폼은 초대 전용이라는 특성에 따른 클럽하우스만의 매력으로 오프라 윈프리, 마크 저커버그 등 미국 유명 인사들이 대거 가입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2월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인 엘론 머스크가 클럽하우스를 통해 미국 주식거래 플랫폼인 로빈후드의 CEO 블라디미르 테베브와 설전을 벌여 화제가 됐다.국내에서는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과 가수 호란 등 유명인들이 연일 클럽하우스의 채팅방을 찾고 있다.가입만 하면 채팅방에서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사연을 듣듯 편하게 접할 수 있고, 채팅방에 입장하면 참가자로서 목소리도 낼 수 있어 매력적이다. 사진이나 동영상, 텍스트 대신 오디오를 차세대 소셜미디어로 택한 클럽하우스가 과연 소셜미디어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2-08

국민의힘이 가야 할 혁신의 길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국민의힘’은 현재 비상체제다. 선거 4연패 후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해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모색하고 있다. 당의 간판을 바꾸고,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5·18묘역에서는 무릎을 굻고 눈물로 사죄했다. 잘못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물론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외관(外觀)이 아니라 내면(內面)’이다. ‘국민의힘’은 변화와 혁신에 대한 수용성이 부족하다. 게다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영입한 비대위원장을 자기들이 흔들어댄다. 여전히 변화를 외면하고 서푼 어치도 안 되는 권력놀음에 빠져있다. ‘영남당’이라고 조롱받는 상황에서도 ‘가덕신공항이라는 덫’에 걸려 TK와 PK가 자중지란(自中之亂)이다. ‘국민의힘’이 가야 할 혁신의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국민은 제1야당의 회생(回生)을 바라고 있다.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힘’이 되겠다는 정당이 ‘국민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혁신을 통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보수꼴통’이나 ‘진보꼴통’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중도층’이 “여당도 싫지만 야당은 더 싫다”고 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선거의 승패는 확증편향에 갇힌 좌우의 꼴통들이 아니라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의힘’은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혁신보수의 길’을 가야 한다.혁신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생각이 바뀌어야 변화가 일어난다. 보수는 수구(守舊)가 아니다.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이 없으면 보수의 생명력은 사라진다.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paradigm)을 가지고 새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소통할 수는 없다. 패러다임의 전환에 진보는 빠르고 보수는 느리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혁신에 인색하고 작은 권력에 취해있으니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정신이 없는 정당은 미래도 없다. ‘국민의힘’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싸움은 바로 ‘자신과의 싸움’이다.혁신의 길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열 수 있는 새로운 인재들이 필요하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노인은 과거에 살고 청년은 미래에 산다. 과거에 익숙한 사람들이 새 시대의 ‘혁신보수’를 이끌어 갈 수는 없다. 이제 기성세대는 보수의 미래를 젊은 세대에게 맡겨야 한다. 변화를 싫어하는 원로들이 기득권에 연연하면 할수록 혁신에 방해가 될 뿐이다.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끝나면 대선정국에 돌입한다. ‘국민의힘’은 선거에서 4전 4패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로는 혁신을 약속했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는 않았다. 국민이 명령한 혁신을 거부한 정당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똑 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2021-02-08

당신의 정신건강은 안녕하십니까?

사공정규동국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정신건강의학과를 선택했어요?” 정신건강의학과를 택한 나의 탁월함과 위대함(?)을 기대했을까? 아니면 ‘오죽하면 정신건강의학과를 택했을까’ 하는 위로와 동정심(?)이 내포되어 있을까?사람들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 묻고 싶어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정신건강은 어떻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내과 의사의 신체건강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 하는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정신건강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은 무슨 의미일까?일반적으로 가지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 대한 생각들 중 하나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매일 정신건강의학과 환자들만 상대하면 일종의 직업병처럼 의사도 환자와 비슷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우울증 환자를 계속 대하다 보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우울해지지 않을까?” 또는 “불안증 환자를 계속 대하다 보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불안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또는 “의사의 정신상태가 환자와 비슷해져야 치료가 더 잘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있다.마약 중독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마약 중독자를 상대하므로 일종의 직업병처럼 의사도 마약 중독 상태가 되거나 또는 환자 치료를 더 잘 하기 위해 마약 중독자가 되어야 할까? 물론, 아니다. 참고로 마약 중독의 치료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한다.또 한편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족집게’ 점쟁이나 역술인처럼 생각하기도 한다.‘황혼 이혼’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즈음의 일이다. 어떤 할머니가 진료실에 오셨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귀가 어두워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나 싶어 내가 큰 소리로 다시 물어 보아도 역시 아무 말이 없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생각하던 할머니가 던진 한마디는 “그걸 말하면 되나? 치료비를 받으려면 묻지 말고 맞추어야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이혼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가 점을 보러 가는 대신에 정신건강의학과로 왔다는 사실을 파악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진료 후 “가슴에 얹혀 있던 돌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다”며 밝은 표정으로 병원을 나섰던 그 할머니, 몇 달 후 부군과 잘 지내고 있다는 말씀으로 보아 점을 보러 가는 대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찾은 점은 탁월한 선택이었다.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자로 보는 이런 에피소드는 그리 드물지 않게 겪는 일이다. 일상의 만남에서 대화를 잘 나누다가도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줄 알고 나면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까봐 입을 굳게 다무는 분도 있다.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정신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자도 아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완전한 정신건강의 소유자도 아니다. 나는 환자를 만나면서 그 속에서 나 자신의 미숙함을 본다. 나의 건강하지 못한 점을 본다. 그 속에서 깨우친다. 그리고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우리 모두 완전한 정신건강의 소유자는 아니므로,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 환자이다.그렇다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문해본다. 굳이 말하자면,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부처님, 예수님 같은 성인들은 완전한 정신건강을 가진 분들이겠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란 요원한 꿈에 불과하다.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재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자신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점을 알고 있고, 그래서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인격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정신건강이다. 건강을 찾고 지키려는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건강하다는 말이다.어떻게 해야 정신이 건강해 질 수 있을까? 나는 정신이 건강해지는 그 출발점은 자신의 인격 성숙이 완전하지 못함을, 다시 말해 자신의 인격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전한 인격 성숙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우리의 정신은 더 나은 성장을 위한 여백이 남아있으니, 이 얼마나 축복인가! 누가 잘난 것도 없고 누가 못난 것도 없다. 기껏해야 ‘오십보 백보(五十步 百步)’이다. 남과 비교하기보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남과 비교한 성공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 자신의 성장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그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인생의 참다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이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묻겠다. 당신의 정신건강은 안녕한가? 당신은 당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건강에 대해서는 노력을 하고 있다. 왜 우리는 신체건강을 위한 노력은 하면서, 정신건강에 대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등한시 할까? 여태껏 우리는 정신건강을 너무 멀리서 찾았다. 그러나 진리는 평범한 데 있는 것처럼 정신건강도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그래서 일상 속의 정신건강에 대한 이야기와 그 처방을 ‘사공정규의 마음 처방전’이라는 칼럼으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사공정규의 마음 처방전’, 사공정규와 함께 하는 정신 건강 여행에 정중히 초대 드린다.

2021-02-07

정치 만능주의를 우려한다

윤대식영남대 교수·도시공학과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재보궐선거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았고, 새로운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한 공약들 가운데 국가와 지역을 살릴 수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들도 많이 포함돼 있고,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바람직한 것들도 있다.그러나 문제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오랜 기간 연구를 거치고 중장기 계획과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수립한 후에 추진돼야 하는 사업들이 정치인들의 공약으로 졸속적으로 추진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최근 정치적 이슈로 떠오른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공항 건설문제는 정치권이 이슈로 제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항건설과 관련된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행정부(국토교통부)가 국토종합계획, 항공정책 기본계획(중장기 국가 공항건설계획), 재원조달계획 등을 수립한 후에 국토 권역별로 입지 후보지를 선정해 시의 적절하게 추진하도록 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러나 지역의 요구에 따라 특정 입지후보지를 미리 정하고 입지후보지에 대한 검증절차나 타당성 검토 없이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모든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면 심각한 후유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특히 공항건설 주체가 중앙정부(행정부)이니 만큼, 중앙정부가 종합적인 국가공항정책을 수립하고 단계적 절차를 거쳐 공항의 입지후보지 선정과 구체적인 공항건설계획(공항의 규모, 공항철도 건설 등)을 수립한 후 추진해야 부실을 피할 수 있다.정치의 영역은 행정부가 종종 놓칠 수 있는 이슈를 부각시키거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면 총론(總論) 수준에서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체적인 사업내용(후보지 결정 등)까지 정치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행정부와 전문가는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정부 부처마다 수많은 심의위원회와 자문위원회가 있는 만큼, 이들 위원회가 합리적이고 건전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모든 길은 정치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정치 만능주의를 에둘러 표현한 말이고, 그 만큼 정치의 영향력이 크다는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우려스러운 표현임은 분명하다.권위주의 시대에는 소위 ‘수지형’ 의사결정이 많았다. 최고 의사결정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지형’ 의사결정이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했다. 그러나 1999년도에 대규모 국책사업의 추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도입됐고, 소규모 국책사업에 대해서도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지형’ 의사결정은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접근은 모두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고 정책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절차적 과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만큼 행정부의 역할과 기능은 법적 혹은 제도적으로 잘 정비돼 있고,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초를 두면서 최소한의 절차적 하자도 없이 모든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제도화돼 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정치의 영역은 매우 포괄적이다. 특히 지방자치제 하에서 모든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정당정치를 통해 선출됨으로써 지방자치단체들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정치의 힘은 원천적으로 막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막강한’ 힘을 발휘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고, 더 오랫동안 그들의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그런데 4∼5년의 임기를 가진 정치인들이 과연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고 정치를 할지는 의문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모든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 100∼200년을 바라보고 정책을 추진하고 계획을 수립할 필요는 없다. 어떤 정책과 사업은 매우 빠르게 추진해서 그 효과와 혜택을 빨리 누려야 하는 것도 있다.예컨대 현재 우리가 겪는 코로나사태와 관련된 것들은 그렇다. 그러나 어떤 정책과 사업의 영향이 100∼200년 혹은 그 이상의 먼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고 많은 비용의 지출이 수반되는 경우에는 신속한 추진보다는 멀리 보고 하나하나 따져보고 추진하는 지혜가 더욱 필요하고, 과학적 접근이 더욱 요구된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과 사업에 대해서는 더욱 더 과학적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종종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정치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 사이에 있는 것들은 사실이지만, 가능하면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이슈들은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높은 수준의 가치판단이 요구되거나 극명한 이해의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에 한해 정치가 개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 경우에도 다양한 집단과 지역의 이해를 조율하고 각론보다는 총론에 집중해 정치의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모든 사회적 이슈들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서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은 국리민복과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국민들과 정치인 모두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정치 만능주의의 폐해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2021-02-07

입춘첩(立春帖)을 붙이며

윤영대수필가지난 3일은 입춘이었다. 봄의 시작이고 한 해의 시작으로의 의미도 있다. 24절기 중 첫째, 주로 음력 정월에 드는 절기지만 올해는 아직도 경자년 섣달이다. 이렇게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든다고 쌍봉춘(雙逢春), 또 ‘봄을 다시 만난다’고 재봉춘(再逢春)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해에 결혼하면 좋다는 속설도 있다.입춘에는 대문이나 문설주, 기둥 등에 입춘첩을 써 붙이는데 올해도 졸필이지만 써봤다. 요즈음 나라의 상황을 보아서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라’는 국태민안(國泰民安) 등 큰 의미의 바람도 있지만 많은 글 중에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을 골랐다. 그런데 올해 입춘 절기가 드는 시간을 알아보니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 59분이라 그냥 붙이려다가 시간에 맞추어 붙어야 효험도 있다고 해서 재미 삼아 기다렸다. 자정이 다 되어 현관문을 열고 나가 여덟 팔자로 정성껏 붙이고 ‘봄이 되면 크게 길하고, 따뜻한 기운을 받아 좋은 일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마음으로 빌었다. 조용히 들어와서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마시니 가슴에 봄이 드는 듯 훈훈해진다.예전엔 각 지방마다 재미있고 뜻있는 의례와 행사들이 많았다지만 요즘 세태에는 절식 하나 정성껏 마련해 먹는 집도 드물 것 같다. 옛 궁중에서는 파, 냉이, 부추 등 맵고 신 맛의 채소들로 만든 오신반(五辛盤)을 수라상에 올렸고, 민간에서는 눈밭에 돋아난 햇나물을 뜯어다가 무친 입춘채(立春菜)를 먹었다고 한다. 마침 집에는 아내가 구해온 싱싱한 산미나리가 한 묶음 있어서 새싹은 아니지만 감식초에 무쳐 막걸리 한 잔 마시며 ‘봄이 드는 계절’을 맛보았다.옛날 의례에는 흙으로 만든 소나 나무로 만든 소로 잡귀를 쫓고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 하는데 올해가 마침 하얀 소띠해라 큰 마을 잔치라도 벌였으면 좋겠지만 집합금지의 어려운 시기이니 마음으로나마 우직한 소들의 뚝심을 품고 역병을 쫓아버려 주기를 다짐해보자.입춘에 맑고 바람 없으면 풍년이 든다 했는데 중부지방에는 눈발이 날렸고 기온은 영하권으로 내려갔지만 여기는 바람 없는 조용한 날씨여서 다행이었다. 보리 뿌리를 뽑아 보아 뿌리가 많으면 풍년이고 적으면 흉년이라는데 부근엔 보리밭이 없으니 멀리 호미곶 청보리밭에 가서나 알아볼까.기계면 시골집에도 입춘첩을 붙이려고 갔더니 화단에는 노란 납매가 피어있다. 섣달에 피는 꽃이라 납매(臘梅)라고 했겠지마는 나에게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꽃이다. 능수매화는 아직도 겨울잠인데 남쪽 지방에는 매화도 핀 모양이다. 오는 길에 봄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려고 창포동 마장지 못을 둘러 보았더니 버들강아지가 하얀 솜털을 부풀리고 있는 물가에 청둥오리 한 쌍이 정답게 물을 가르고 있었다. 집 베란다의 사랑초는 겨울에도 연분홍 꽃을 피우고 있지만 동양란 몇 포기는 잘 가꾸어 주지 않은 탓인지 아직도 꽃대를 올리지 않고 있다.이제 정녕 봄은 오리라. 엄청난 질병의 엄습에 움츠렸던 몸을 털고 기지개를 쭉 켜고 화창한 봄날을 맞자. 그리고 이번 설날에는 두루 세배는 못 다니겠지만 가까운 자식들의 큰 절을 받았으면 싶다.

2021-02-07

알코올 중독자에게 희망을

문가인참마음심리상담센터 원장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술 소비량이 증가하게 되면서 알콜중독환자도 늘어날 것이다.어린 시절 우리 집의 뒷집에도 술을 많이 마시는 한 남성이 살았다.그는 딸기코의 붉은 얼굴, 술 취한 목소리, 건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사람들이 알코올중독자라고 하였다. 그의 아내는 결국 도망가 버리고 외동딸은 외롭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 와서 내 여동생과 자주 어울리며 놀았다. 결국 딸기코의 붉은 얼굴의 그 남성은 어느 추운 겨울날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였다.내가 기억하는 알코올중독자의 첫 기억이었다.나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병원에서 임상심리사로 일하면서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50%이상이 술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40∼50대 남성이 주로 많았고, 간혹 20∼30대의 남성과 여성도 입원해 있었다.그 시절 의료진들은 알코올문제는 완치가 잘 안되며, 재발이 잘 된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심리상담과 약물치료로는 안 된다. 평생 관리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자조모임(A.A: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모임)이 그나마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퇴원한 날 병원 앞 슈퍼에서 환자들은 다시 술을 마시고 재입원을 하였다. 가족들에게도 철저히 버려져서 정신병원을 전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끔 교통사고도 내고 자기 몸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하였다.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그는 젊은 나이에 온 몸이 성한 데가 없고 자해 이외에도 자살과 같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망상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웬일인지 나와 상담하는 것을 좋아하고 나를 참 많이 따랐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위로해주고 희망을 주는 것에 그쳤을 뿐, 그를 완치시키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해주지는 못하였다.나는 병원을 퇴직하고 상담센터를 개업해서 다양한 심리적 문제를 치유했다. 그렇지만 알코올문제는 자신이 없었다. 알코올중독은 완치가 안 된다는 병원에서의 사고의 도식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최근에 알코올문제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내방하고 있고, 그들은 최면치료로 신기하게도 치유되고 있다.어렸을 때 우리 집 뒤에 살았던 그 남성도 나와 같은 임상심리전문가를 만났다면 가정이 깨지지도, 비명횡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딸은 할머니 품에서 외롭게 홀로 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독서를 좋아하던 그 아이는 잠재력이 있어보였다. 어디에서 좋은 일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니면 마음의 상처를 술로 위로하며 외롭게 살고 있을까?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사람을 욕을 한다.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술 문제는 우리나라의 빠른 경제 성장 과정에서 선택한 하나의 스트레스 관리방법임을 사람들은 알까?알코올중독자에게 욕하고 손가락질 하지 말라. 위로하고 격려하며 대화를 시작하라. 그리고 마음의 전문가를 만나보라.

2021-02-07

‘토착왜구’ 선동 망국론

안재휘 논설위원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스탠퍼드대 교수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수법’에 관한 정리가 진한 공감을 부른다. “전체 국민을 ‘진짜’와 ‘부패한 엘리트’로 양분한 뒤에, 반대편을 불법적이고 비애국적인 악마로 낙인찍는 전략을 구사한다. 다음은 사법부를 내 편으로 채운 뒤에, 언론의 독립성을 압박하는 한편, 공영방송과 인터넷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선거구와 선거제도를 유리하게 조작하고, 선거 주관 기관도 내 편으로 채운다.”지난해 10월,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과 벌인 ‘토착왜구’ 설전에서 이념에 찌들어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초라한 지식인의 민낯을 들켰다. 그는 등단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토착왜구,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라고 말했다. 진중권이 이를 ‘광기’라면서 “이분의 영혼은 아직 지리산 어딘가를 헤매는 듯하다”고 맹비판하자, 조정래는 “대선배 작가에 대한 무례와 불경”이라며 신경질을 냈다.조정래의 발언 중에 정작 놀라운 내용은 “반민특위를 설치해 인구의 150만, 160만에 달하는 친일파들을 처단하자”는 대목이다. ‘책 장사’를 위한 의도된 도발이라는 해석이 있다. 조정래가 꺼내 든 ‘친일파 처단’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먹히는 ‘선동언어’라는 현실이 끔찍하다. 헐렁한 민심의 틈새를 파고드는 선동정치와 국민의 단세포적 반응은 통한을 부른다.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가덕도’에 더해 제안한 ‘한일 해저터널’ 공약을 놓고 민주당이 또다시 ‘친일 프레임’을 꺼내 들었다. 해저터널이 우리보다는 일본에 더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 공약은 ‘토착왜구 행각’이라는 선동이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같은 정책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민주당은 곧바로 역풍을 맞았다. 뒤늦게 괴발개발 변명을 늘어놓지만 궁색하기 짝이 없다.문재인 정권의 악착같은 ‘친일 프레임’, ‘토착왜구’ 선동은 고질병이다.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있는 ‘식민사관’을 청산하는 일에는 모든 정권이 비겁했다. 역사교육 현장이 ‘식민사관’에 붙박인 ‘강단사학자’들로 장악된 현실 때문에 어느 정권도 학문적 수술을 감행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해야 할 일은 못하면서 상대방을 ‘토착왜구’로 몰아 때리는 유치한 선동에만 몰두하는 민주당의 행태가 참으로 고약하다.영남권 신공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오래고 지독한 영남권 갈등의 역사를 깡그리 뭉개고 ‘가덕도 신공항’ 광풍이 불고 있다. 맞서기는커녕 ‘원 플러스 원(1+1)’ 개념으로 ‘한일 해저터널’ 건설을 끄집어내야 하는 제1야당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게 됐다. 자기들도 숱하게 내놓고 검토했던 해저터널 공약을 ‘친일’로 몰아가는 민주당의 망국적 선동정치는 더 한심하다. 모두가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고 있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중우정치(衆愚政治) 한복판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로 끌려가고 있나.

2021-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