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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플리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은 과도한 신분상승 욕구 때문에 타인에게 거짓말을 일삼다 결국에는 자신마저 속이고 환상 속에 살게 되는 유형의 인격장애 현상을 뜻한다. 거짓말이 탄로 날까 봐 불안해하는 거짓말쟁이와는 다르다.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진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 특징이다.1955년 미국의 작가 하이스미스가 쓴 범죄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씨’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톰 리플리가 재벌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구를 살해하고 자신이 그의 인생을 대신해 사는 내용을 줄거리로 했다. 담대한 거짓말과 행동으로 살던 리플리는 어느 날 친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인생도 막을 내리게 된다.1960년 알랭들롱이 주연한 ‘태양은 가득히’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해 크게 흥행하면서 리플리 증후군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이 리플리 증후군을 알린 사건으로 유명하다. 신씨가 예일대 박사학위와 학력을 위조해 대학교수와 국제비엔날레 총감독에 지원하다 가짜임이 드러난 사건이다. 영국의 한 언론은 당시 이 사건을 두고 능력보다 학벌이 중요시되는 한국사회의 병폐가 드러난 사건이라 꼬집었다. 심리학자들은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욕구가 극에 달해 발생된다는 점에서 시대혐오의 ‘사회병’이란 분석도 내놓는다. 양극화 등 갈수록 불평등해지는 우리 사회의 구조가 리플리 증후군에 노출돼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말이다.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을 둘러싼 후폭풍이 일파만파다. 사법부 수장이 거짓말 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적 거부감이 크다. 국민의 다수가 이 사건으로 사법부에 반감을 갖게 된다면 리플리 증후군처럼 우리 사회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2-07

자동차산업에서 제조업 혁신을 선도한다

최영조 경산시장경산은 칠곡∼경산∼영천∼경주∼포항을 잇는 자동차부품산업 밸리의 중심지역이다. 자동차부품 주력업종 업체는 240여 개나 된다.자동차 130년 역사에도 큰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기후 협약에 따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각국이 친환경 차 혁신에 박차를 가함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전기차, 장기적으로는 자율주행차라는 변화를 추구하며 자동차 산업의 경계가 무한 확장되고 있다.정부도 지난해 말 ‘2050 탄소 중립 추진전략’에서 친환경 차의 전면적인 대중화와 자율주행차량 보급의 확대를 발표하는 등 친환경, 디지털 전환 등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있다. 또 IT와 제조, 서비스 업종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산업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가치를 향상시키는 일이 큰 흐름으로 되고 있다.자동차산업은 소재·전자산업은 물론 유통·운수산업에 이르기까지 전후방 연관 효과가 크고 미래혁신기술이 모두 연관되므로 ‘산업 중의 산업’이라 불린다.지역에는 완성차업체에 직접 납품하는 1차 부품업체의 비중은 작고 1차 부품업체 등에 납품하는 2·3차 부품업체의 비중이 매우 높아 미래 차를 대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경산시는 미래형 자동차산업의 기술 분야별 육성책을 여러모로 매진하고 있다.탄소소재 기술지원을 위한 탄소 복합설계 해석기술 지원센터가 준공을 앞두고 있으며 자율형 자동차 소재 부품을 개발하는 연구기관인 청색기술 선도연구센터가 운영되며 고강도 셀룰로오스 나노섬유, 습기 제어 소재, 능동 차체제어 기술 등을 개발하고 있다. 탄소소재는 가볍고 튼튼해 기능성 의류나 테니스 라켓에서부터 자동차, 항공기, 풍력 발전용 블레이드와 수소차 연료탱크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시장을 가진 ‘꿈의 소재’다. 자동차의 경량화를 위해서는 가장 적합한 대체 재료로 인식되고 있어 완성차 업체와 소재업체, 부품업체 간 공동대응이 시급하다. 차세대 차량융합부품 제품화지원 거점센터와 도심형 자율주행부품 연구지원센터, 사물무선충전 실증 센터, 무선전력전송센터 등 제조업의 혁신을 이끌 국책사업이 활발하다. 특히 태양광선을 차단·제어해 차량 냉난방 효율을 높이는 스마트 윈도우 필름을 개발하는 사업이 지난해 과기부 공모에 선정돼 장기적으로는 신재생 에너지 산업과 더불어 미래형 친환경 자동차 시장을 주도하는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S/W기반 지능형 시스템반도체(System on Chip) 모듈화 지원사업으로 시스템반도체 개발에도 참여한다. 시스템반도체는 중앙처리장치(CPU)처럼 데이터를 처리하는 비메모리 반도체로서 고도로 기술집약적이며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수요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자율주행 시스템과 관련해 데이터 저장·분석, SW서비스 등으로 기업 지원을 수행할 클라우드 데이터 인프라 구축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지난해부터 진행되는 모빌리티 플랫폼 구축은 전통적인 교통수단에 정보기술(IT Information Technology) 등을 결합해 효율과 편의성을 높이는 개념으로서 이 플랫폼이 완성되면 기업들은 대규모 데이터를 확보하고 분석해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동차산업이 제조업에서 융합산업으로, 자동차의 개념이 소유에서 이용·공유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경산시의 제조업혁신은 산업단지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의와 소통의 인프라를 구축해 뒷받침하기 위한 사업도 추진된다. 10개 대학, 16개 전문 연구기관 및 산업단지를 가진 지역의 장점을 살려 중소벤처 기업육성의 최적지를 만들려고 역세권에 지식산업센터와 스타트업파크, 컨벤션센터를 조성하며 청년 창업, 네트워크, 문화기능이 집적된 복합공간으로 경산 청년 지식놀이터를 구축하고 청년희망 Y·STAR 프로젝트도 추진한다.기술은 알고 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졌을 때, 제품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갈 때 빛이 난다.경산시는 새롭게 개발된 기술을 활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자동차산업의 전진기지가 될 것이다.

2021-02-07

오후의 홍차

오후 4시, 홍차를 주문했다. 홍차 세계에 오래전 입문한 S가 문외한인 나에게는 스리랑카에서 자란 우바를, 함께 간 M에게는 중국산 기문을, 자신은 인도산 다아즐링을 시켰다. 이렇게 세 가지 세계 3대 홍차를 우리에게 소개했다.홍차 전문 카페답게 실내는 앤틱하게 꾸며 놨다. 주문한 차가 나오기 전에 손님이 우리밖에 없기도 해서 돌아다니며 소품들을 구경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그린 그림, 노란 조명이 켜진 장식장, 차가 담긴 모양이 다양한 틴 케이스가 한쪽 벽면을 장식해서 하나하나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했다.그러는 사이 따뜻한 털옷을 입은 티팟이 홍차를 품고 우리 테이블에 놓였다. 먼저 찻빛이 싱싱하고 홍차의 샴페인이라 불리는 다아즐링을 맛보았다. 시간을 길게 우렸는지 떫은맛이 약간 느껴졌다. 함께 곁들여 나온 스콘을 한입 머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 다음으로 루비처럼 진하고 붉은 색이 돋보이는 우바를 음미했다. 내 취향은 우바였다. 그 다음엔 영국인들을 매료시킨 동양적인 향의 기문을 기품 있는 찻잔에 따랐다. 투명한 적색의 깊은 맛이 느껴졌다. 이 차도 좋았다. 차를 마시는 오후 내내 오래된 가구와 레이스 장식의 조명 아래에서 오묘한 홍차의 전설을 들었다. 들으며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라는 영국홍차문화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왜 오후에 홍차를 마실까 궁금했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인들은 식사할 때만 차를 마셨다고 한다. 안나 마리아라는 공작부인이 점심은 먹었고 저녁은 아직 먼 오후 4시 전후에 매우 허기를 느꼈고, 참다못해 하녀에게 홍차 한 잔과 간단한 음식을 요청해 먹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애프터눈 티의 기원이 되었고 최상류층 귀족들 사이에서 하나의 유행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이 관습의 시작이었다는 설이다. 1890년쯤 수입량도 충분히 늘어나게 되고 가격도 많이 낮아져 부자들의 애프터눈 티 문화를 부러워하던 서민들도 이 무렵이 되어서는 홍차를 부담 없이 마시면서 애프터눈 티 문화를 마음껏 즐기게 된다. 영국에 차가 처음 소개된 지 거의 250년 만에 홍차는 진정으로 영국 국민들을 위한 일상음료가 되었다. 헨리 제임스라는 작가는 “애프터눈 티 라고 불리는 모임에서 보내는 시간 보다 더 아늑한 순간은 삶에서 그다지 많지 않다”라고 적었다. 홍차하면 떠오르는 ‘얼 그레이’라는 단어도 ‘그레이 백작’이라는 뜻으로 총리를 지낸 영국 정치가 이름에서 따왔다. 총리부터 일반 사람들까지 모든 영국인이 즐기던 영국 애프터눈 티 문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서서히 영국인의 일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홍차를 엄청나게 마시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차와 티 푸드를 여유롭게 즐기기에는 현대의 삶이 너무 바쁘고 팍팍해진 탓이었다.김순희수필가우리도 오래전부터 스스로 홍차를 만들어 마시던 민족이었다. 선덕여왕 때부터 이미 차 재배를 한 하동 차도 녹차가 아니라 발효차인 홍차라고 한다. 일상다반사라는 말은 차를 마시는 일이 밥 먹듯 늘 있는 예사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명절 때 차례(茶禮)를 지낸다. 원래 차를 올리던 의식인데 차례가 어느 정도 보편화하면서 이 차를 구하기 어려우니까 술로 대신한 거라고 한다.“언니, 저는 나중에 영국할머니들처럼 늙고 싶어요.” 영국할머니가 어떻게 사는데 M이 그런 말을 할까 궁금했다. 유학 가서 어렵게 공부하느라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없던 그녀가 진짜 오랜만에 카페에서 친구와 한국말로 수다를 떨던 오후, 하얀 머리의 할머니 세 분이 차를 마시며 두런거리다, 뜨개질도 하다,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있기도 하며 오후를 마음껏 즐기더란다. 그날만 특별히 하는 행동이 아니라 매일 찾아오는 오후 그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내는 삶이 부러웠단다.지인들과 영국할머니들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감미로운 차향이 우리를 스리랑카로 인도로 중국으로 또 영국 어느 골목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붉은 홍차에 오후의 해 그림자가 드리운다.

2021-02-07

장학금에 관하여

장학금이라는 말을 써넣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옛날 일이 떠오른다. 서울 상경하는데 어머니가 거기 무슨 신문사를 찾아가 보라고 하셨다. 외할머니 고향이 면천이시라 했고, 그 신문사 집안으로 시집 간 분이 계시다고 했다. 몇 년 지나 막내 동생이 또 서울로 오게 되자 어머니는 또 한 번 그 말씀을 하셨다.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식 셋 대학 공부 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우실지 깨닫지도 못했고, 내 의식과 안 맞는 곳에 가 손을 빌릴 수 없는 알량한 자의식이 문제였다.사립대학과 국립대학은 등록금 차이가 예나 지금이나 크다. 그래도 사정은 제각각이다. 나 또한 다른 친구들 전액면제며 기성회비 면제 같은 혜택을 받을 때 속이 쓰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테다. 그러면서도 학점에 악착을 부리지 못했다. 마냥 강의실 바깥으로만 떠도는 부실하고도 미련한 학생일 뿐이었다. 고등학교 교사 자식은 생활형편으로도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다. 오로지 학업 성적으로나 가능성이 있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공부할 생각이 안 났는지, 터무니없이 낮은 학점을 받고도 정신은 온전히 다른 데 팔려 있었다. 이제 학생들 장학금의 추천서를 쓰는 처지가 되고 보니 여러 생각이 아니 날 수 없다.가장 많이 바뀐 점은 생활형 장학금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소득분위라는 것이 있어, 일정 소득 기준 이하 학생들에게는 어느 정도 먼저 배분해 주는 돈이 있다. 또, 옛날에 비해 확실히 여러 종류의 장학금들이 생겨났다. 나라에서 주는 돈, 학교에서 주는 돈 말고도 많은 장학재단들이 있다. 서울에도, 학생들 고향에도 있어 어떻게든 혜택을 받는 학생들이 있다.또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세월 바뀐 요즘도 ‘못 사는’ 집 학생들이 여전히 적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가정 형편도 안 좋은데 몸까지 안 좋은 학생도 있고 보면 건강은 확실히 빈부문제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가난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건만 세월 흘러도 이 ‘계급’이라는 것은 여전히 문제다. 그리고 요즘 학생들은 받느냐 안 받느냐에 훨씬 더 민감하기도 하다. ‘줌’(zoom)으로 수업을 할 때도 세수 안 해서가 아니라 자기 사는 형편을 보여주기 싫어 화면을 켜놓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는 시절이다.그럼 어떻게 남들 ‘다’ 받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나? 가만 살펴 보면 비결이 있으니, 무엇보다 잘 준비하는 성실함이 중요하다. 같은 값이면 뭔가 제때 성의를 보인 학생에게 차례가 가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옛날의 나는 어지간히 모자란 학생이었던 것 같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1-02-04

단체기합식 방역

단체기합은 구성원 일부의 잘못으로 구성원 전체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유래는 알 수 없다. 군대나 학교와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벌 형태의 하나이다.군대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면 단체기합이 주는 효과에 대해서 잘 안다. 군에서 하는 얼차려나 선착순 구보 등은 단체기합의 대표적 유형이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구성원 모두가 어쩔 수 없이 함께 받아야 하는 체벌이라서 불공평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조직 전체의 기강을 세우는 데는 단체기합 만큼 효과를 내는 것도 드물다.군에서는 얼차려 문화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훈육방법의 하나다. 전쟁이라는 비상시를 가정한 군부대의 훈련 특수성 때문이다. 군에서 하는 훈련은 전시 상황을 전제로 한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으로 군부대 전체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세운다. 군이 기강을 생명으로 여기는 데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그러나 2005년 모 부대의 중대장이 훈련병에게 단체기합을 주는 과정에서 인분을 억지로 먹인 사실이 드러나 단체기합 등 병영문화 전반에 대한 쇄신 분위기가 일기도 했다.최근 열린 코로나 방역 전문가 토론에서 우리나라가 시행 중인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고 한다. 특히 어떤 시설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하면 같은 유형의 시설 전부를 문 닫게 하는 조치에 대해 단체기합과 같다는 비판이 나왔다.우리나라의 거리두기 기준이 획일적이고 행정 편의주의적으로 운용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온 국민이 1년 이상 지속된 거리두기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보건당국의 방역기준이 확진자 수 감소에 매몰돼 국민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살펴봐야 할 때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2-04

국민의힘, 눈 멀고 귀 먹었나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오는 4월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를 앞둔 국민의힘 행보가 너무 느긋하다는 지적이 따갑다. 국민들이 국민의힘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는 지 알고나 있을지 의심스럽다.총선 패배후 행보는 눈 멀고 귀 먹은 듯 싶다. 여당에 180석을 내주고 개헌저지선인 100석을 갓넘긴 103석(미래한국당 19석 포함)을 얻은 국민의힘이 법안심의나 예산심사에서 여당의 수적우세에 밀릴 것이란 우려는 너무 당연했다. 다수결원칙이 지배하는 국회 속성상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국회 원구성 협상에서 야당 몫으로 법사위원장을 내놓으라며 고집 피우다 관철되지 않자 아예 상임위원장을 여당에 모두 내주는 ‘벼랑끝 전술’을 펼친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여당인들 국회 원구성 관례를 무시하는 것이 어찌 찜찜하지 않았겠는가.‘이왕 이렇게 된 것, 나도 모르겠다’는 심사로 상임위원장을 모두 독식한 여당은 21대 국회 첫 해 달콤한 성과를 거뒀다. 공수처법을 통과시켜 공수처를 출범시켰고, 공정경제3법과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포함한 2차례의 추경도 무사통과시켰다. 초선의원이 대부분인 아마추어 야당, 국민의힘은 그제서야 ‘아차’하며 무릎치며 후회한다.내년 대권 향방을 가를 수 있는 서울시장 선거에 임하는 국민의힘 경선전략 역시 형편없다. 국민의힘이 앞서 4번의 큰 선거에서 번번이 패배한 이유가 변화를 안했기 때문이란 진단이 나왔는 데도 경선과정에서 변화하려는 노력이 엿보이지 않는다. 신뢰를 잃었는데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을 않는다는 얘기다.일례로 지난 해부터 ‘야당, 어떻게 재집권할 것인가’란 주제로 매주 세미나를 열어온 국민의힘 전·현직의원들의 연구모임인 ‘마포포럼’이 서울·부산시장 예비후보들을 ‘미스 트롯’같은 오디션 프로그램 형식으로 토론경쟁을 붙여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는데도 당 지도부는 오불관언이다. 눈길 끌만한 이벤트 하나 없이 그저 판박이처럼 여론조사 경선에 이어, 본경선 후보 토론회로 인지도 높은 후보에 유리한 경선을 택했다.바람이 불어야 파도가 치고, 변화가 있을 것 아닌가. 설연휴가 다가오는 데도 당 지도부가 별다른 충격요법없이 밋밋한 경선일정을 진행시키려 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한 예비후보가 나섰다. 서울 25개 구청 가운데 유일한 야당소속 현직 구청장으로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조은희 예비후보가 설 연휴 전 모든 후보들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리얼리티 쇼 형식의 토론회를 설연휴 전과 기간중에 개최해 국민들의 이목을 끌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우리 민족 최고의 명절인 설 연휴 밥상민심을 장악하는 측이 보궐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판단아래 내놓은 ‘기습전술’ 내지 ‘이슈선점 전략’이다. 당에서 나서지 않더라도 본경선에 오를 후보끼리라도 합의해 설연휴 전에 후보토론회를 열어 설밥상 민심을 주도하자고 했다. 국민의힘이 경선을 드라마틱하게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국민의힘이 눈 멀고 귀 먹었나 두고 볼 일이다.

2021-02-04

지역 대학의 위기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금년 개교 35년을 맞는 포항의 포스텍도 “수도권에 세웠으면 더 좋지 않았는가?”라는 논의가 있은 적이 있다.그러나 설립 당시 박태준 설립이사장이나 김호길 초대 총장 모두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도 초일류 대학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길 원했다.동국대 이사회가 최근 경주캠퍼스 이전을 거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주 지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위기상황을 인식하고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도권 등 캠퍼스 이전을 포함한 장기적 발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학생들은 자체 투표에서 대다수 학생들이 이전을 희망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경주 시민들은 캠퍼스 이전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주시는 동국대 경주캠퍼스의 이전에 반대하며 일체의 논의를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대학 측은 캠퍼스 생존을 위한 이전 계획을 장기적 관점에서 이전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지만, 지금은 대학 경쟁력을 높여 경주와 함께 지속 발전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지역대학(필자는 개인적으로 ‘지방대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은 지역의 사랑을 받으며 전국으로 또는 세계로 뻗어나가야 한다. 미국의 명문대학 스탠퍼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를 세운 것은 지역을 사랑한 명문대학의 노력이고 또한 그 실리콘밸리는 그 지역의 자존심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대학 이름을 언급하면 그 타운이나 지역과 연관 시킨다. 카네기멜론과 피츠버그, 보스턴과 하버드와 MIT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세계적인 대학이지만 그 지역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1994년 포스텍이 최고경영자과정(PAMTIP)을 만들 때 반대가 꽤 심했다. 연구중심대학이 그러한 대중적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코드가 맞느냐는 논쟁이었다. 그러나 세계적 공과대학 MIT는 최고경영자 과정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그러한 과정들이 오히려 지역을 사랑하고 공헌하는 대학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디지스트(대구경북과기원)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대학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졸업 퍼레이드를 개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학이 위치한 대구 달성군 중고교 졸업생들과 재학생, 교직원, 지역주민 등이 참여한 가운데 교수, 졸업생이 한 줄로 걸어가는 모습은 지역과 함께하는 대학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전국적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아주대가 수원과 화성에 퍼져 있는 기업들과 산학협력을 밀접히 하고 있는 것도 좋은 예이다. 수원도 지역에 위치한 전국적 대학이라는 인식을 심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한국에서 지역에 위치한 대학들이 지역과 함께 호흡하면서 지역의 사랑 속에 전국으로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서울로 몰리는 대학 인구를 지역으로 분산하고 각 지역의 대학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각개약진을 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2021-02-04

입춘 무렵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우리나라는 12월부터 석 달 동안을 겨울이라 한다. 그 때가 연중 가장 추운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기상으로는 2월 초에 입춘(立春)이 들었다. 우수와 경칩을 지나 실지로 봄이 시작되는 3월 초순과는 한 달가량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월급을 가불해 쓰듯이, 겨우살이가 혹독했던 시절에 봄이란 절기라도 미리 당겨 온 게 아닐까 싶다. 봄이 선다는 입춘은 태양이 지나가는 길이라는 황도(黃道)를 24등분해서 만든 24절기 중 하나다. 그런 절기는 설이나 단오, 한가위 같은 음력을 기준으로 한 명절과는 맞지 않는다.계절로는 아직 한 달이나 남은 겨울이지만 입춘 무렵부터 봄의 기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기후에 가장 민감한 곳인 들판에 나가보면 알 수 있다. 얼핏 보아서는 달라진 게 없는 겨울들판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은 듯 숨죽이고 월동하던 풀들이 조금씩 깨어나는 기척을 느낄 수 있다. 논둑길 양지쪽에는 벌써 봄까치꽃도 피었다. 검불 사이로 얼굴을 내민 작고 가냘픈 꽃이 전해주는 생명의 메시지는 참 시리고 환하다. 영하 십 몇 도까지 내려간 혹한에도 살아남아 피워낸 풀꽃을 들여다보면 삶이 절로 숙연해진다.일 년 열두 달 날마다 들길을 걷다보면 계절의 아주 미세한 변화까지 감지하게 된다. 계절의 추이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감각이야말로 때 묻지 않은 생명감이라 할 것이다. 어제와 오늘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있다는 건 그 작은 변화를 건너뛰기 때문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충실한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들 한다. 하루하루가 다 종요로운 날이라는 말일 것이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이라 해서 싫고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들길을 걸어보면 안다. 매서운 삭풍의 겨울이나 산들바람이 부는 봄날이나 어느 날이든 그 하루에 담긴 삶의 비중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아직은 한두 차례 더 한파가 닥칠지 모르지만 입춘인 오늘은 날이 좀 풀린 것 같다. 매서움이 덜한 바람도 그렇지만 동지를 한 달 넘게 지난 햇빛도 고도가 높아진 만큼 더 가까워졌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 철새인 청둥오리와 고니들의 분위기도 좀 달라 보인다. 이번 겨울엔 고니들이 지난해보다 많이 왔다. 다 모일 때는 50마리도 넘는 것 같다. 연간 수십 종의 동물이 멸종한다는데 이 들판을 찾은 고니의 수가 늘어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적막하고 황량한 겨울 들판이 저들 때문에 소란하고 활기가 넘치기도 한다.코로나19 팬데믹 시국이나 암울한 정치적 현실에도 아직은 봄이 먼 것 같다. 입춘방(立春榜)이라도 써 붙이고 이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 지만 겨울이란 그저 참고 기다리기만 하는 계절은 아니다. 삼동의 혹한도 살고 입춘의 낌새도 사는 것이 겨울이다. 겨울이 지나가야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살아야 봄이 되는 것이다. 겨울을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는 겨울들판에 나가보면 안다. 거기 얼어붙은 땅과 매운바람에 월동하는 풀과 새들은 봄을 기다리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게 아니다.

2021-02-04

커피 가루 딱지 치료

강길수수필가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자전거가 황급히 멈추면서 몸이 고꾸라지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살기(殺氣) 등등한 괴물로 달려들던 청백색 승용차가 아슬아슬 코앞을 스치며 달아났다.본능적으로 일어나 엎어진 자전거를 세웠다. 아무 느낌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절로 바라본 문제의 차는 벌써 저만치 뺑소니치고 있다. 아스팔트 노면에 부딪힌 왼쪽 무릎이 아파졌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황당했다. 일방통행 이면도로의 작은 교차로에서 당한 아차 사고…. 기겁하여 자전거와 함께 자빠지며, 급발진 차량처럼 돌진해오던 차를 속수무책 쳐다만 보던 순간이 되살아나 머리를 아찔하게 하였다. 운전자가 미웠다. 그는 멈춰서야 했다. 멍한 상태의 내 눈엔 저 멀리 사라지던 차량의 뒷모습만 아련했다. 그 차가 일방통행로를 역주행으로 달려왔던 사실도 비로소 알아챘다.욱신거리는 무릎의 아픔을 참으며, 가까운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파출소에 가서 뺑소니 신고하고, 폐쇄회로 텔레비전이라도 보아 달아난 자를 찾아볼까’하는 마음이 끓어올랐다. 사무실에 와서 아픈 왼쪽 무릎을 살폈다. 초겨울이라 두꺼운 바지를 입었는데도, 팥을 간 듯 벗겨진 피부에 피멍이 들기 시작하고 있다. 작은 핏방울도 몇 개 송골송골 맺힌다.사무실엔 있는 줄 알았던 구급약도 없다. 화가 부글거렸다. 만일 곁에 누가 있었다면, ‘무슨 놈의 사무실에 구급약도 없냐?’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이리저리 상처에 쓸 만한 것을 찾아봐도 책상 서랍에 있는 오래된 일회용 밴드 한 개가 전부였다. 황야에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떡할지 생각했다. ‘약방에 갈 정도는 아니니, 다른 방도를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어릴 때 무릎이나 손바닥, 팔꿈치 같은 곳에 가끔 팥을 갈았다. 그 비방(秘方)이 찰흙이었다. 마른 찰흙 가루를 상처에 뿌리면 딱지가 앉아 잘 나았다. 찰흙 대체품 찾기를 궁리했다. 머릿속에 커피가 떠올랐다. 얼른 커피 통을 열어 알갱이 몇 개를 백지 위에 부었다. 알갱이를 손톱으로 눌러 가루로 만들어 상처에 뿌렸다. 흩뿌려진 커피 가루를 손가락으로 상처에 고루 폈다. 분 바른 듯, 상처는 커피 가루로 곱게 코팅되었다. 입자가 더 작으니 산소접촉면적은 더 커졌을 것이다.무릎 상처에 생긴 커피 가루 보호막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상처 나면서까지 몸을 지탱한 덕분에, 돌진하는 차와 부딪치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다. 무릎아, 고맙다!’ 의문이 꼬리 물었다. 달려드는 차가 처음 눈에 보일 때, ‘앗! 큰일 났다’하는 놀람뿐이었다. 한데 어떻게 그 찰나에, 자전거가 멈추고 몸이 고꾸라졌을까. 내가 모르는 순간, 손가락이 자전거 브레이크를 꽉 잡은 것이다. 왜 그럴까. 학자들이 말하는 자기보호를 위한 무조건반사(無條件反射)작용 때문인가. 그렇다면 눈이 포착한 차량 급습의 긴박한 정보는, 대뇌를 거치지 않는 척수반사(脊髓反射)로 우선 작동하여 큰 사고를 면하게 하였으리라.커피 가루 코팅 막을 비집고 진물 몇 방울이 송골송골 올라왔다. 휴지로 훔쳐내자 멎었다, 바지를 걷어 올린 무릎과 장딴지가 싸늘해지자, 부글거리던 홧김도 진정되었다. 경찰을 찾아가도 아차 사고로 끝난 이상, 어찌 할 방도는 없다는 현실 인식도 돌아왔다. 곧 딱지가 앉으리라 믿으며 바지를 내렸다. 바지 천 무릎 부위에 마찰 흠이 제법 크게 생겼다. 헛웃음이 나왔다. 두세 주 후, 갈색 커피 가루 딱지가 떨어지며 상처도 말끔히 나았다. 커피 가루 딱지 치료 성공이다. 운전자에 대한 미움도 거두었다.악착스럽지도 민첩하지도 못해, 늘 어눌하게 세상을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커피 가루 딱지를 통해 또 만났다. 군대 생활 3년, 오랜 직장생활에서의 업무와 교육 훈련, 언론매체와 온라인을 통한 재난대비 훈련 등이 실제상황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날, 봄바람 같은 겨울바람이 등 뒤에서 귓볼 사이를 간질이며 유혹하더라도 조심했더라면, 아차 사고는 당하지 않았을 터. 살랑대는 바람에 업 된 기분으로 발걸음도 가벼운 자전거 페달을 밟다가 변을 당할 뻔했다. 호된 대가를 치른 안전훈련 한번 잘 받았다.

2021-02-03

장가 가고 시집 가고

남녀가 부부로 맺는 일을 결혼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화촉을 밝히다’, ‘백년가약을 맺다’로 말하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혼인(婚姻)이라는 용어가 더 친숙했다. 혼인을 한자의 풀어보면 ‘女+昏’+‘女+因’이다. 女는 여자, 因은 근본으로 이는 모계사회의 흔적이다. 昏은 해가 저물 때로, 혼인은 해가 저물면 부부의 인연(因緣)을 맺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신랑은 장가(丈家)에 들어 일정 기간 머물렀다. 첫 아이를 얻으면 비로소 독립하거나 본가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신부는 새로운 부모를 모시기 위해 시집으로 오게 된다. 그래서 ‘장가 가고 시집 가고’라는 말이 생겨났다.사람이 모이는 행사답게 혼례에는 사람과 관련된 재미있는 용어가 많다. 용어를 가만히 곱씹어보면 우리말 답게 토속적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다.함진아비 : 혼인 때, 신랑집에서 채단을 넣은 함을 지고 신부집으로 가는 사람.기럭아비 :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집에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하는 전안 의식을 할 때, 기러기를 들고 신랑 앞에 서서 가는 사람.꼭지도둑 : 혼인할 때 신랑을 따라가는 어린 여자 하인을 일컫는 말.열두하님 : 혼인할 때 신부를 따르던 열두 명의 여자 하인을 높여 일컫는 말.족두리하님 : 혼인한 새색시가 시집으로 갈 때 신부를 따라가는 여자 하인을 높여 일컫는 말.하님 : 여자 하인을 높여 부르는 말.고이댕기 : 서북 지방에서 혼례를 올릴 때 신부가 드리는 2가닥 댕기.혼인이 성사되면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의 집으로 간다. 마부를 앞세우고 그 뒤를 청사초롱을 든 하인과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든 기럭아비를 비롯해 꼭지도둑도 따라갔다. 꼭지도둑은 혼례상에 놓인 꼭지숟가락을 훔치는 일을 맡았다. 꼭지숟가락은 어린아이가 쓰는 작은 숟가락으로 자루 끝에 동글납작한 꼭지가 달려있다. 훔친 꼭지숟가락은 나중에 다시 신부에게 돌려주는데, 여기에는 하루빨리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의미가 숨어있다.혼례가 끝나고 며칠 뒤, 불편하고 거추장스런 의장을 풀어 놓고 가벼운 복장으로 어른을 뵈었다. 이 만남을 ‘풀보기’라고 일컫는다. ‘댕기풀이’는 신부의 댕기를 푼 신랑이 친구들에게 한턱내는 일로 ‘자리보기’라고도 말한다. 자리보기에서는 짓궂은 성적 농담이 오고 갔다. 자리보기는 첫날밤을 지내는 신랑 신부의 잠자리를 구경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날밤 신방은 사람이 보아 주지 않으면 귀신이 먼저 엿본다고 하여, 사람들은 신방의 문 창호지에 침으로 구멍을 내어 들여다보았다.친인척이나 친구들이 모여 신랑을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때렸는데, 이를 ‘족장(足掌)’이라고 한다. 한의학에서 발바닥을 때리면 기혈이 순환해 정력이 향상된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신부와의 잠자리에서 힘을 쓰라는 뜻도 숨어 있다. 신랑을 골탕 먹이는 행위를 ‘신랑 다루어 먹기’ 또는 ‘장가 턱’이라고 하는데, 이는 재미이기도 하지만 신랑을 괴롭혀 인성을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한다.오다가다 우연히 만나 동거하는 예비 부부를 ‘뜨게 부부’라고 한다. ‘뜨게’는 ‘본을 뜨다’에서 나왔는데, ‘흉내내다’라는 뜻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고 부부처럼 행세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에는 이를 ‘동거’ 또는 ‘혼전동거’라고 말한다.뜨게 부부와 비슷한 말이 있다. ‘두더지혼인’이 그것인데, 정식이긴 하나 남몰래 하는 결혼이다. 옛날 두더지 처녀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상대와 결혼하기 위해 이런저런 동물을 전전하다가 결국은 동족인 두더지 총각에게 시집가고 말더라는 우화(寓話)에서 비롯된 말이다. 과분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부정한 결혼을 지칭하는 말로 ‘보쟁이다’가 있다. 부부가 아닌 남녀가 은밀한 관계를 계속 맺는 행위로, 요즘으로 말하면 내연(內緣) 관계이다. 보쟁이다가 들킨 남녀는 ‘덕석말이’를 하였는데 이는 멍석을 말아서 매를 때리는 벌로 촌락의 자치적 통제방식였다.이미 결혼한 남녀를 핫아비, 핫어미라 불렀다. ‘핫’은 ‘홑(홀)’과 대조되는 말이다. 핫은 배우자가 있고, 홑은 없다는 뜻을 가진 접두어이다. 그래서 홀아비, 홀어미는 짝 잃은 외톨이를 지칭하며 이들의 독신 생활을 ‘홀앗이’라고 했다.홀앗이하는 외톨이들도 다시 짝을 만나 새 가정을 꾸렸다. 재혼 또는 재취(再娶)인데 이를 속현(續絃)이라 했다. 續絃은 거문고(琴)와 비파(瑟)의 현이 끊어진 것을 다시 잇는다는 뜻이다. 끊어진 금슬(琴瑟)의 현이 다시 이어졌으니 그 선율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문화가 바뀌면서 옛 결혼 풍속도 대부분 사라졌다. 이에 따라 용어도 몇 가지만 살아남았다. 우리말이 물러간 자리를 웨딩, 웨딩드레스, 턱시도, 스튜디오 촬영, 리허설 촬영, 웨딩앨범, 피로연파티, 메이크업 같은 외국어가 차지했는데, 이러한 용어가 더 고급스럽고 품격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 안타깝기도 하다.시대의 변화에 따라 쓰지 않는 언어는 도태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연지곤지, 족두리, 댕기풀이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문학평론가 김이랑

2021-02-03

문과도 이과도 거짓말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문송이라던가. ‘문과여서 죄송합니다’라는 자조적 표현 속에는 문과는 이과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이과적 성향과 문과적 성향이 생각처럼 그렇게 다른 것일까.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여 사람을 생각하는 게 바람직한가. 고등학교 중반부터 우리는 사람을 구분하여 바라본다. 아니 그런 성향을 어릴 적부터 찾아내려 애쓰기도 한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서조차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며 관심을 쏟는 과목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 문과는 수학과 과학을 멀리하고 이과는 문학과 역사를 가벼이 본다. 문과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계산과 분석에 약하고 이과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정서와 감흥에 뒤떨어져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문제는 유형별로 생기지 않는다. 기업경영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가정살림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상황은 언제나 복합적으로 발생한다. 균형잡힌 통합적 사고가 날마다 필요하다. 사람을 읽어야 하고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느낌을 짚어야 하고 비용에도 밝아야 한다. 배경지식도 필요하고 미래예측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사람들 사이에 칸을 치고 벽을 만들어 서로 오가는 일마저 막는다. 문과와 이과는 함께 나눌 이야기거리마저 궁핍해져서, 사회는 또 다른 양극화를 겪는다. 넘나들기 어려운 섬들이 생긴다.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능력을 따로따로 구분해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이제 접어야 한다. 공교육을 받는 우리 학생들이 균형잡힌 인성을 형성해가도록 도와야 한다. 문학과 역사, 수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폭넓게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유네스코(UNESCO)는 21세기에 가르쳐야 할 네 가지 필수영역들로 분석적 사고 (Critical Thinking), 창의(Creativity), 협력(Collaboration), 소통(Communication)을 들었다. 놀랍게도 문과나 이과의 구분이 보이지 않는다. 개별 과목의 이름도 적지 않았다. 전통에 따라 구분된 과목의 이해를 넘어 통합적으로 균형잡힌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에서마저 지나친 세부 전공영역의 구분을 경계한다. 전문지식 심화의 필요를 인정하더라도 인성의 널푼수는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마침,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문·이과 통합형으로 치른다고 한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교육이 바뀌어 가는 신호로 보인다. 다음세대가 창의와 혁신으로 가득한 내일을 만나려면 다르게 배우고 새롭게 가르쳐야 한다. 문과와 이과 구분에 길들여진 습관을 벗어야 한다. 과학자가 문학에 능하고 역사가가 과학에 밝은 날들이 와야 한다. 새로운 상품개발에 인문학적 경험과 불편함이 스며들고 철학자의 논변에 과학의 발자취가 녹아들 때 비로소 학문 간 균형과 인성 간 조화도 가능할 터이다. 문과와 이과 성향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따뜻해지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에는 배려와 상생의 기운이 돌지 않을까. 포용과 협력이 시대의 기운이라면, 문과와 이과의 구분부터 사라져야 한다.

2021-02-03

변이 바이러스의 공포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남아공발·영국발·브라질발 3종으로 변이를 일으키며 진화하고 있어 걱정스럽다.특히 우리나라는 세가지 변이 바이러스 감염 사실이 모두 확인된 전 세계 9국 가운데 하나란 게 질병관리청의 보고다. 현재 영국발 바이러스가 71개국에서 확인돼 가장 많고, 남아공발은 31개국, 브라질발은 13개국에서 확진이 보고된 상태다. 보건 당국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세가지 변이 바이러스 감염 사례는 총 34명(영국발 23명, 남아공발 6명, 브라질발 5명)이다. 영국과 남아공 변이 바이러스는 약 1.5배 전파력이 증가된 것으로 보고돼있으며, 브라질 변이 바이러스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보고다. 특히 브라질 변이 바이러스는 높은 재감염률이 특징으로 알려졌다. 실제 브라질에서는 남아공발과 브라질발이 동시에 감염된 사례까지 나왔다. 기존 코로나19보다 전파력이 강한 변이 바이러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 집단면역에 필요한 기준이 60~70%에서 70~80%로 올라간다는 게 문제다.더군다나 변이 바이러스의 경우 현재 접종이 실시중인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저항력도 가진 것으로 알려져 불안감을 더해주고 있다. 화이자·모더나·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현재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효과가 조사 되지 않은 상태고 얀센·노바백스 백신은 예방 효과가 49~57% 수준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달부터 백신 접종에 들어가 상반기 중 1천30만 명에게 백신을 맞힌다는 계획이지만 변이 바이러스 확산까지 겹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철저한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변이 바이러스의 유입과 확산을 막아야 할때다. 아울러 오랜 사회적 거리두기로 힘겨운 영세소상공인들에 대한 지원책이 더욱 시급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2-03

학생 여러분, 여러분이 정답입니다!

이주형산자연중학교 교감2월이다. 학교에서는 사회 달력으로 치면 12월에 해당하는 달이다. 학교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달 2월. 지금은 아니지만, 2월의 가장 대표 행사는 졸업이었다. 코로나 19 전에도 1월에 학년을 마치면서 졸업식도 같이하는 학교가 많았다. 그래도 그때는 졸업생과 재학생이 한자리에 모여서 석별의 정을 노래했다. 아쉬움 가득한 눈물은 새 출발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졸업식을 상상하는 것조차 죄가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상상을 하는 학생은 물론 교사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교사는 방역을 핑계로 졸업식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귀찮은 졸업식 어떻게든 빨리 끝내버리고 2월 휴가를 즐길 생각뿐이다.“철든 학생과 철없는 학교(교사)!”이 말은 2020년을 보내면서 필자의 마음 깊이 새겨진 말이다. 스승이 사라진 학교에는 월급쟁이 직장인만 남았다. 그들에게 있어 학교는, 수업은, 학생은 자신들의 생계유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 교사에게 사랑, 희생, 배려 등이 있을 리 만무하며, 그런 학교에 희망은 사치다.희망이 부재한 학교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말도 안 되는 온라인 수업이다. 학생이 스스로 동영상을 보고 과제를 하는 것을 어떻게 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교사들도 그것이 수업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하지만 교사들은 입을 닫았다. 만약 전 국민 고통 분담 차원에서 단방향 온라인 수업 시간에 코로나19 극복 봉사활동을 하자고 하면, 교사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뭐라고 할 것이다. 필자부터 입 닫은 교사로서의 철없음에 용서를 빈다.2020년부터 학교는 온라인에 중독되었다. 독불장군으로 돌변한 정부와 교육부의 밀어붙이기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중독이 너무 심하다. 이제 학교에서 온라인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 온라인 졸업식이 대표적인 예이다. 졸업식마저 형식뿐인 온라인에 갇혀 버렸다.그래도 부디 부탁한다, 온라인 졸업식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 가득한 학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졸업식이 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최선을 다해 주기를! 그리고 기원한다, 최선을 다하는 마무리가 새로운 시작을 위한 행복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학생들이 느끼는 졸업식이 되기를! 하지만 안다, 바람은 바람뿐이라는 것을!졸업식을 맞이하는 자세를 보면 학생들은 스스로 철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온라인에 철을 잃은 학교(교사)와는 달리 학생들은 2월의 의미를 되새기며 아직도 눈물로 졸업을 말한다.“ (….)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죄송하기만 한데, 너무나 많은 사랑과 믿음을 주셨기에 제가 남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항상 저를 응원한 가족들과 도움 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저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산자연중학교 3학년 졸업생, 「감사장」)학생의 눈물에 답한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한 이 나라의 정답입니다.”

2021-02-03

윤석열 검찰총장도 정치를 할 것인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윤석열 검찰 총장 만큼 유명해진 역대 검찰총장은 드물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역대 검찰총장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윤석열 총장은 지난 1년간 이 나라 뉴스의 중심인물임은 분명하다. 국회에서 추미애 장관을 향해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의 부하가 아니라’는 저돌적 발언은 한동안 회자됐다. 추 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요구와 직무정지 신청은 두 사람 간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검찰총장의 징계처분에 대한 행정 법원의 중지결정은 그를 업무에 복귀시켰고, 추 장관은 결국 사퇴했다. 윤 총장의 처신에 대해 정치권과 여론은 확연히 양분됐다. 여권은 윤 총장의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는 검찰조직의 기득권 옹호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진보 진영의 여론도 윤 총장의 권력 핵심부를 향한 수사는 반정부적이며 반(反)검찰 개혁적이라고 낙인찍었다. 심지어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 총장이 문재인 정부를 궁지로 모는 것은 배은망덕이라고 질타했다.결국 민주당 일각에서는 검찰총장을 국회에서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문 대통령의 ‘윤석열 총장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 총장’이라는 기자 회견 답변은 이런 기류를 덮어 버렸다.야당과 보수층은 윤 총장의 정경심 사건 수사에 이은 월성 원전수사, 울산선거 개입 수사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 지난 대선과 총선 패배로 무기력해진 야당은 윤 총장의 소신 있는 검찰권 행사를 적극 지지하였다. 보수 중도층은 추 장관의 위압에 저항하는 윤 총장의 소신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윤 총장의 대선 후보 지지도가 급격히 상승한 것도 그의 이러한 저항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중도 보수층의 민심은 윤 총장의 처신에 대리만족하면서 그가 내년 대선이라는 큰 정치판에 뛰어들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윤 총장은 이러한 여론에 따라 과연 정치판에 뛰어들 것인가. 그는 국회 답변에서 ‘퇴임 후 국민을 위한 봉사 문제’를 생각하겠다는 묘한 여운을 남겼다. 현재로서는 그가 정치의 길을 택할지는 아무도 모르고, 윤석열 본인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윤 총장이 임기 후 대선전에 뛰어든다 해도 성공하기는 어렵다. 과거 고건, 반기문 등 거물 관료들이 대선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정치는 조직이 뒷받침되고 이슈를 선점해야 하는데 윤 총장은 처음부터 정당 선택 딜레마에 처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 보수 지지층의 깜짝 지지율만으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총장의 임기는 이제 6개월 남았다. 윤 총장은 총장 사퇴 압박의 굴레에서 용케 잘 살아남았다. 그의 권력에 굴하지 않는 맹호출림(猛虎出林)식 처신에 여론이 일시 동조하는 것이지 그에 대한 항국적 지지는 아니다. 윤 총장의 다급한 책무는 대선을 향한 정치가 아닌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철저한 수사이다. 동시에 그 자신이 검찰 조직 이기주의에 함몰된 총장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한다.윤 총장이 문재인 정부의 권력형 비리의혹에 대한 공정하고 철저한 수사를 완수할 때 그에 대한 신뢰는 굳어질 것이다.

2021-02-03

표리부동

사람에게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는 평가는 매우 인격 모독적 발언이 된다. 표리부동이란 사람의 마음이 겉과 속이 같지 않다는 말인데,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을 신뢰할 사람은 없다. 표리부동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면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도 치명상을 입는다.표리부동과 비슷한 말로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 배속에는 칼을 지녔다”는 뜻이다.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고 속으로 딴 마음”을 먹는 면종복배(面從腹背)나 “양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의 양두구육(羊頭狗肉)도 비슷한 말이다.표리부동은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속이는 좋지 않은 일이나 사람에게 쓰이는 용어다. 인격적으로도 매우 모욕적이지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간관계도 점차 나빠진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로 살아가기에 표리부동적 행동보다는 언행이 일치하는 행동을 보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공자는 논어에서“말 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사람이 말을 하는 데에는 뛰어난 웅변술보다는 진심을 전달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북한원전 추진 문건을 둘러싸고 여야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하다. 만약 야당의 주장대로 정부가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려 했다면 국내적으로 탈원전을 선언한 정부의 태도는 그야말로 표리부동한 행동이다.야당의 공격에 대해 청와대는 혹세무민한 정치 발언으로 북풍 수준의 무책임한 태도라고 쏘아붙였다.산자부가 급기야 관련문건을 공개하고 나섰지만 진실공방은 여전히 베일 속이다. 표리부동이냐 아니냐 국민의 이목이 쏠린 큰 사건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2-02

‘시인보호구역’

김규종 경북대 교수2020년 10월 5일부터 대구 문화방송국에서 ‘시인의 저녁’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언뜻 들으면 생뚱맞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세상에 누가 시를 읽는다고 ‘시인의 저녁’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시사와 인문학이 있는 저녁’의 줄임말이다. 대략 40분 남짓한 시간 앞부분에는 시사를, 뒷부분에서는 인문학을 다룬다. 다채로운 손님을 모셔다 여러 가지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시간이어서 호응도 제법 좋은 편이다.지난주에는 인문-예술공동체 ‘시인보호구역’의 대표인 정훈교 시인과 함께 대구와 경북의 인문학, 특히 시를 둘러싼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았다. 요즘에는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뿐 아니라, 자가 출판한 사람도 시인으로 인정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등단 여부와 무관하게 시인으로 인정받고 활동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의미다. 문제는 시를 읽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그나마 소설은 어느 정도 호응이 있지만, 시나 희곡 분야는 그야말로 설한풍(雪寒風)이 불고 있다 한다. 하기야 나 같은 사람도 시집을 산 지가 꽤 오래전 일이니까 문자 그대로 유구무언이다. 나는 우리나라 독자들이 시를 읽지 않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문학 전반에 관한 독자들의 처절할 정도의 무관심과 냉소일 것이다. 대학입시에 필요한 정도의 독서가 끝나면 책과 멀어지는 염량세태가 사태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다수 대중은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도 텔레비전의 ‘막장드라마’와 철 지난 트로트 열풍에 휩쓸린다. 왜냐면 단순하되 재미있고, 시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며, 화제로 삼기에 이것보다 더 좋은 질료(質料)가 없기 때문이다. 화제가 궁한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가볍고 유쾌하며 부담 없는 오락 프로그램 아닌가.그에 비하면 문학, 특히 요즘의 시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 명색이 문학 교수라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구절과 문맥과 사유와 감성이 차고 넘치는데,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친구 안사람이 시인으로 등단해서 상까지 받았다고 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몇 편 읽다가 던져버렸다. 내가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윤동주와 이육사,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편 가운데 정말 이해되지 않는 시가 있는가?! 한국의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시인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일찍이 ‘장한가(長恨歌)’의 시인 백거이는 ‘노구능해’라는 전범을 선보였다. 뒷집에 사는 늙고 문맹인 노파가 이해할 때까지 퇴고를 거듭했다는 백거이. 그런 자세를 진즉에 잃어버린 한국 시인들의 자승자박 자업자득 사필귀정이 독자의 상실이리라.그러나 21세기에도 시인은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마땅한 귀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소멸하면 인간세(人間世)도 끝장이다. 자연 생태계의 깃대종처럼 시인은 저잣거리의 난잡함과 번다함을 저지하는 최후의 보루일 것이다. 시인을 ‘시인보호구역’에서 해방할 그 날을 고대한다.

2021-02-02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김현욱 시인정재찬 교수와 정재승 교수를 착각하여 지난 글에 정재승 교수의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이라고 오기를 했다. 정재찬으로 정정한다. 정재찬 교수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베스트셀러가 있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은 2020년 2월에 출간했다.책은 ‘밥벌이’, ‘돌봄’, ‘건강’, ‘배움’, ‘사랑’, ‘관계’, ‘소유’로 나누어 모두 7장으로 쓰여졌다. 정재찬 교수가 생각하는 ‘인생이라 부를 만한 것들’의 목록이다. ‘토요일의 인천공항’이 재미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SNS 속 텍스트에 나타난 감정 어휘를 위치 기반 정보에 입각해 분석해보면, 언제나 행복도가 가장 높게 나오는 특정 지역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인천국제공항. 토요일의 인천공항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곳이다. 그러면서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글을 곁들인다. 밥벌이의 비애와 토요일의 인천공항이라니. 토요일의 인천공항은 일상에서 가장 멀어진 시공간이 된다. 먹고살기 위해 매일같이 일하는 일상이 없다면, 토요일의 인천공항 같은 특별한 시공간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천공항이 밥벌이의 터전인 사람들도 수 천명은 될 테니까.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은 학생들에게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가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재찬 교수는 “우리의 꿈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 무엇은 명사겠지요. 의사, 교사, 공무원, 회사원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가령 명사 ‘교사’는 이삼십 대 안에 되든지 안 되든지가 결정이 납니다. 하지만 가령 형용사 ‘존경스러운’ 교사는 정년까지도, 아니 평생토록 이루기 힘듭니다. 생의 목표는 그런 게 되어야 하지 않을는지요.”라고 조용히 일러준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시, 낭만, 아름다움, 사랑이 넘치는 삶이기를 바라는 것이다.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인생은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롱숏으로 보면 희극이다.”가 된다. 느낌이 달라진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누구나 각각의 사연으로 아픔을 품고 산다. 누구나 소소한 기쁨으로 삶을 살아간다. 정재찬 교수는 행복하려면 자기 자신을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좀 더 객관적 시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대상에 대한 적당한 거리와 시간의 간격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목표가 이끄는 삶처럼 거창할 필요는 없다. 소소한 행복의 즐거움과 삶의 감사함을 아는 일상을 사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행복의 비밀인지 모른다. 마음만 바꿔먹으면 일상이 토요일의 인천국제공항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꽉 막힌 퇴근길, 차창 밖 노을이 한 편의 근사한 미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처럼.

2021-02-02

포항 연구의 이정표가 될 두 권의 책

김도형'THE OCEAN'편집위원한때 책 만드는 일에 종사했고, 그후로도 책과 관련된 일을 소소하게 이어온 터라 출판 동향에 대해 관심을 접을 수 없었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처지여서 지역과 관련된 책에 눈이 더 가기 마련인데, 근래 만난 두 권의 책은 각별히 반가웠다.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이 낸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글항아리, 2020)은 1935년 10월 발간된 ‘포항지’를 번역하고 해설과 주석을 덧붙인 것은 물론, 일제강점기 포항의 발자취를 다룬 다양한 사료를 담아냈다. 일제강점기 포항의 성장 과정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이 책의 발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김진홍 부국장이 서문에 밝혔다시피 이 책은 일제의 식민정책 성과를 과시하는 수단이자 포항에 정착한 일본인들의 성공담이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과 역사·설화·산업·언론·의료·관광 등의 분야별로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정리된 ‘지방 종합지’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1930년대 일본어로 된 책을 번역하는 것도 쉽지 않거늘 해설과 주석, 관련 자료를 덧붙인 것은 김진홍 부국장이 포항사 연구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몰두해 왔는지를 입증한다. 특히 수도산 저수조에 새겨진 ‘수덕무강(水德無疆)’이라는 휘호를 누가 남겼는지를 조사한 결과, 당시 총독 사이토 마코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밝혀낸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게 한다.‘조선수산개발사’(민속원, 2019)는 1954년 일본학자 요시다 케이이치가 낸 책을 박호원, 김수희 두 분이 번역했다. 김수희 박사가 해제에서 밝힌 대로 이 책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어장 개발 ‘대성공’을 축하하고 총독부의 노력을 기념해 출판했기에 식민사관에 입각해 있다. 하지만 한국 수산업사 연구에 참고할 내용이 분명히 있고, 특히 수산업이 전통적인 주요 산업인 포항에서는 면밀히 살펴봐야 할 가치가 있다.포항과 구룡포에 축항이 이뤄진 배경, 세계적으로 발전한 정어리 어업, 수산시험조사기관의 설치 등은 눈여겨봐야 할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포항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잠수기 어업의 근거지였고, 1903년 돗토리현의 한 형제가 지예망(地曳網)으로 포항에 온 이래 이주자가 증가했으며, 1904년 사가현의 이주 어촌이 학산동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이 책은 밝히고 있다. 또한 포항은 1917년부터 운반선이 내항해 급속히 발전했고, 1923년 이래 청어 제조의 중심지였으며, 정어리 어업의 발전으로 동해안 굴지의 어항이 되었다. 요컨대 이 책에는 포항이 일제강점기에 수산을 중심으로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담겨 있다.두 권의 책은 포항과 포항의 본질인 수산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이정표가 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포항사와 수산업사 연구가 더 활기를 띠게 되기를 바라며, 포항에 귀한 선물을 안겨준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1-02-02

게임스톱 사태의 본질

미국 주식시장에서 벌어진 게임스톱 사태의 본질은 공매도 세력과 개미투자자들간의 한판 승부다. 1차전은 미국의 개미투자자, 일명 ‘로빈후드’가 이겼다. 사태의 전말은 이렇다.게임스톱은 가정용 콘솔게임기 프로그램을 파는 소규모 점포들의 체인 스토어로, 미국내에 약 6천여곳의 점포를 갖고있다. 미국인 대부분이 알 만큼 친숙하지만 사양업종에 해당하는 이 업체는 우리나라에서 책 대여점이 사라졌듯 경영이 악화돼 주가가 2~4달러 까지 떨어졌다. 첫 출발 테이프는 미국의 커뮤니티사이트인 ‘월스트리트 뱃’이란 게시판 이용자들이 끊었다. 추억의 장소인 게임스톱 주식이 앞으로 온라인방식으로 전환하니까 주가가 많이 오를 것이라고 매수를 독려하면서부터였다.약 2달전 10달러이던 주가가 40달러까지 올랐다. 주가가 크게 오르자 공매도 세력들이 이유없는 주가상승이라며 곧 반값으로 떨어질 거라고 예고하며 공매도에 나섰다. 그러자, 개미투자자들이 똘똘 뭉쳐서 공격적인 매수에 나서 주식가격을 500달러까지 올려버렸다. 실제로 이번에 공매도세력이 개미투자자들의 반격으로 입은 피해는 22조원에 이른다. 공매도는 주식을 빌려서 주식을 판 다음에 나중에 주식을 사서 되갚아야 하기에 주가가 아무리 많이 올라도 강제적으로 사야되는 ‘숏스퀴즈’상황이 벌어진다. 개미투자자들이 뭉쳐서 계속 주가를 끌어올려 공매도세력이 숏스퀴즈 상황에 몰리게 한 게 바로 게임스톱 사태의 내막이다.우리나라에서도 공매도 잔고 1위인 셀트리온이 1일 현재 약 15% 가까이 폭등해 한국판 ‘게임스톱’이 아니냐며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게임스톱 사태는 기관투자가들을 중심으로 한 공매도 세력이 개미투자자들에게 패배한 증시 역사상 초유의 사태여서 항후 여파가 궁금해진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2-01

물아일체는 없다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평화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에서는 ‘물아일체’라고 하여 내가 대상에 몰입하여 나를 잊어서 나와 대상의 경계가 사라진 경지를 진정한 평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인들은 자연의 풍광 속에 흠뻑 빠져 자신을 잊은 경지를 노래했다. 그러나 그런 경지는 잠깐 동안의 흥취일 뿐 언제나 몸은 여기에 있고 자연은 저기에 있을 뿐이다.대상과 내가 구분된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준 화가는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이다. 파리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반복해서 수십 점 그렸다.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던 세잔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과가 있는 정물을 그릴 때도 사과 배치에 몇 시간씩 걸리고, 붓질 한 번 하고 몇 시간씩 관찰하느라 그 사과가 썩을 만큼 시간이 오랜 시간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을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그런 세잔이 ‘나 자신은 생트 빅투아르산의 의식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나는 생트 빅투아르 산이다’라고 해석하고 산과 합일되기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물아일체 사상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게 자의적으로 ‘의식’이라는 단어를 생략해서는 안 된다.‘세잔의 사과’는 현대 여섯 사상가들이 세잔을 해석한 책이다. 그저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이나 ‘사과가 있는 정물’ 정도의 그림만 알고 있다가 세잔에 대한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분석과 그의 작품에 담긴 풍부한 의미를 보니, 세잔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사물을 보는 눈이 한 꺼풀 벗겨지는 느낌이 든다.이 책에 메를로 퐁티가 빠질 수 없는데, 그는 세잔의 그림을 탐색하며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 역시 “풍경이 내 안에서 그 자체를 생각하고, 나는 그것의 의식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이 위 세잔의 말을 부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메를로 퐁티의 이 말을 참고하여 세잔의 말을 해석하면, ‘외부 세계는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나는 생트 빅투아르 산에 대한 의식으로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나 자신은 생트 빅투아르 산에 대한 의식’이라는 말의 의미는, 세잔이라는 존재는 생트 빅투아르 산에 대한 의식 현상이라는 말이다. 세잔은 산과의 합일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생트 빅투아르 산의 본질을 화폭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이렇게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세잔은 인간은 의식이라는 현상으로 존재하며 그렇기에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존재라고 답하는 듯하다. 그렇게 완성된 산은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는 존재로 저 멀리에 우뚝 서 있다.처음에는 털끝 하나만큼 빗나가도 나중에는 천리만큼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무엇이 정답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세잔에게서 그 단서를 조금이라도 얻고 싶다면 단어 하나라도 허투루 지나칠 일은 아니다.

2021-02-01

대인관계에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조금 야박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새해 들어 나는 대인관계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 더 친절히 이야기 하자면 이제 내가 진정으로 보고 싶은 사람과 나를 정말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만 만날 것이라는 거다. 안본지 너무 오래됐으니까, 볼 때 되었으니까, 이러다 영영 안 보고 지내게 될까봐 누굴 만나는 건 이제 그만 둘 생각이다. 그동안 친구와 지인 사이를 애매하게 부유하는 관계들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았다. 사람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의무감에 전화를 걸고 밥을 먹고 술을 먹느라 청춘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 노력을 그만 둘 생각이다. 이러한 선언을 하게 된 것은 문득 내가 애매한 관계들을 챙기느라 나 자신과, 내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들에게 충분히 나의 삶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기 때문이다.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는 것과 피부로 느끼는 것은 다른 문제인가보다. 서른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서 나는 이십 대 때에는 무한할 것 같던 것들이 사실은 유한한 것이었다는 걸 조금씩 깨닫고 있다. 몸이야 아직 쌩쌩하긴 하지만 작년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전히 술을 좋아하지만 이십대 때 만큼 잘 마시지는 못 하게 되었다. 무한할 것 같았던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며, 제 인생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와 동갑인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와 두 살 많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신체능력이 하락세에 접어들었다고 들었다. 밥 먹고 운동만 하는 그들도 그런데 하물며 맨날 앉아서 글이나 쓰는 나야 오죽할까. 그들은 효율적이고 영리한 플레이로 여전히 정상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나도 이제 그것을 참고 해 보려고 한다. 효율적이고, 영리한 플레이.단지 신체적인 한계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갈수록 책임져야 할 것들도 많아진다. 책임질 게 많아진 동시에, 진작에 느껴야 했을 책임감을 뒤늦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정신적 에너지와 시간은 한정적인데 책임이 늘어나고 있으니 당연히 이제는 절약을 해야 한다.효율성 있게 체력과 시간과 정신을 절약하며 살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카톡이나 이메일로 절연장을 날릴 정도로 나는 냉정하지 못하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노력을 그만두는 것이다. 애써 연락하지 않으면 만나지지 않는 사람, 그렇게 만나지 않으면 멀어지고 마는 사람, 붙잡지 않으면 관계가 끊어지고 마는 모든 사람들을 더 이상 붙잡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실오라기처럼 위태롭던 관계에 빨간 불이 켜졌을 때 말고 정말로 누군가 보고 싶을 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진실로 보고 싶어 할 때 만남을 시도할 거다. 아마 그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겠지. 새로운 만남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언젠가 읽겠지’하는 막연한 마음으로 책장에 꽂아둔 오래된 새 책 같은 사람들을 더 이상 늘리지 않으려 한다. 딱히 내키지 않는 이에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함부로 다음 만남을 약속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절약된 에너지는 나 자신에게 사용하고, 절약된 시간은 자주 봐도 또 보고 싶은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는 데 사용할 거다.이 글을 읽게 될 나의 지인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우리가 볼 때가 되었는데 안 보고 있다거나, 단지 멀어진 것 같다는 이유로 내게 애쓰지 않기를. 그렇게 멀어지면 멀어지는대로 두다가, 어느 날 뜻밖에 진정으로 보고 싶어진다면 그때 부담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서로의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누구보다 소중한 자신에게 에너지와 시간을 쏟을 수 있기를 바란다.

2021-02-01

세상을 보는 창 혹은 창으로 보는 세상

집에 있는 날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시간 역시 길어졌다. 친구와의 대화는 통화나 문자로 하고 얼굴이 그리우면 영상으로 마주 보는 것도 가능하다. 직접 만나지 못해 답답하고 서운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다양한 비대면 만남이 가능하다니, 참 발전된 세상이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감탄도 인다. 어린 시절 공상 만화에서 보았던 최첨단 미래 기술이 바로 지금 실현되고 있는 기분이다.인터넷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 있다. 밖으로 나가야만 할 수 있었던 많은 일이 네모반듯한 스마트폰 하나면 충분하다. 이 작은 화면을 통해 친구들을 만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다. 배가 고프거나 카페인이 필요하면 클릭 한 번으로 음식과 커피를 시켜 먹는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워런 버핏의 인터뷰를 시청하고 프리먼 다이슨의 저서를 읽는다. 세상에는 늘 새로운 사건사고가 벌어진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일련의 사건에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가 저물어있다. 이 모든 것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러니 스마트폰 화면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렇듯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인터넷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지식을 장악하고 있다는 오만에 빠지기도 한다. 나부터가 그렇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앞서 검색창부터 연다.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원하는 정보가 와르르 쏟아진다. 인터넷은 맞춤옷처럼 내게 딱 맞는 답을 선사한다. 가끔은 인터넷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내가 그 정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고 있기 때문이다.‘에코 체임버(Echo Chamber) 효과’가 그 대표적인 예다. 에코 체임버는 방송이나 녹음 시 닫힌 방 안에서 인공적으로 메아리를 만드는 기계를 뜻한다. 이러한 효과가 현재의 우리 삶에도 적용되고 있다. 내 의견에 동조하는 의견이 메아리처럼 반복되면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이러한 에코 체임버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우리는 페이스북에서 내가 원하는 사람들을 팔로우한다. 그들은 내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손쉽게 끊어낼 수 있다. 정치적 성향이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또는 그런 기사나 댓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내가 옳을 줄 알았어! 강력한 확신과 동시에 자기 의심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유튜브 역시 마찬가지다. 유튜브는 실행과 동시에 가장 먼저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보여준다. 보기 싫은 것을 볼 필요가 없다. 알고리즘이 알아서 필터링해주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광고로 상영된다. 엊그제 최저가를 검색했던 보디로션, 수면 잠옷, 강아지 사료까지. 우리는 이렇게 작은 화면에 갇힌 상태에서 더 넓은 시야를 확장하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에서 ‘라푼젤’의 서사를 가장 좋아한다. 높고 좁은 탑에 갇혀 있던 여성이 안온함을 박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라는 점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라푼젤이 작은 창으로 내려다본 세상은 닿을 수 없는 비밀로 가득 차 있다. 그녀의 계모는 밖은 온통 위험한 것뿐이며 탑에 머무는 지금이 가장 안전한 방식이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그녀는 기꺼이 현실과 마주한다. 두려움과 슬픔, 상실의 감정을 만나며 좌절에 빠지기도 하지만 멀리서 관조했던 빛의 풍경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창문으로 보는 풍경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회의 안전을 위해 좁은 탑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요즘이다. 이런 때일수록 화면 너머에 존재하는 삶을 기억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을 존중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2021-02-01

미술에 던지는 ‘질문 위의 질문’

현상(現狀)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메타적 물음’이라고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등의 질문이 메타적 물음에 속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개별 현상이다. 주운 물건의 주인을 찾아주면 뿌듯함을 느끼고, 타인을 도와주면 정의를 실천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는 정의에 대한 일상적 경험이다. 메타적 물음은 관점을 전혀 달리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남을 도와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하는가?’ 더 나아가, ‘정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미술에도 적용된다.미술가들은 개별적인 미술작품을 창작하며, 감상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개별 미술작품이다. 어떤 작품은 아름답게 보이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분명히 있다. 미술의 일상적 경험은 시각적 자극이지만, 메타 차원에서의 질문은 ‘무엇이 미술을 미술이게끔 하는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미술은 무엇인가?’ 등과 같이 근원과 본질에 닿아 있다. 그래서 메타적 물음을 ‘질문 위의 질문’이라고 한다.미술가는 물론 감상자들 역시 미술을 메타적 층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메타 질문을 던질 때는 성급히 답을 얻겠다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명확한 답이 없으면 말장난에 불과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을 당한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다. 메타 성격의 질문은 하나의 답에 이르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메타 질문이다.사전은 미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간 및 시각의 미를 표현하는 예술로 그림, 조각, 건축, 공예, 서예 등을 가리키며, 공간 예술 혹은 조형 예술 등으로 불린다.” 이런 식의 사전적 개념정리는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미술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예컨대 미술은 자기를 표현하고 무언가를 창작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관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들은 대부분 생존을 위해 발달되었다. 그런데 미술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지 않은 미적 유희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미술 행위는 본능적 욕구이기는 하지만 생존과는 무관한 순수한 유희인가?’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혹은 다른 입장을 취해 미술 행위 역시 생존을 위한 본능일 수 있다는 반론도 가능할 것 같다. 다산을 기원하며 제작했던 조각상이나, 풍요로운 사냥을 기원하며 동굴 벽에 그린 동물 그림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집을 짓는 행위도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집을 짓는 행위와 새들이 둥지를 짓는 행위 사이에 차이는 무엇인지 물음이 생긴다. 사람과 동물 모두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집을 짓는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집 짓는 행위는 인간 고유의 창작 활동이 아닐 수 있다는 또 다른 의문에 도달한다.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미술을 인간 고유의 창작 행위로 본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닐까? 한때 그림 그리는 침팬지가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었고, 지금은 AI가 거장들의 화풍을 학습해 그림을 그린다? 인간만이 미술을 할 수 있고 인간의 창작 행위만이 미술로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미술가가 그린 그림과 침팬지가 그린 그림 혹은 AI가 그린 그림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이렇게 메타 질문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관점과 관점을 넘나드는 사고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질문들을 계속 이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지식 덩어리가 형성된다. 이것이 메타 질문을 통한 인식의 확장이다. 메타 질문을 던지다 보면 미술의 문제가 미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메타적 차원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관찰되는 현상은 다를지 몰라도 본질은 매우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이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1-02-01

신라 이전의 역사, 사로국 2

중국 삼국지(위촉오 삼국사, 184~280년)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역사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조조, 유비, 손권이 세운 삼국뿐만 아니라 혜성같이 잠깐 스쳐 지나간 여러 나라와 인물들도 대부분 기억할지도 모른다.그런데 위나라가 낙랑군, 대방군을 통해 삼한의 여러 국들에게 인수(관직이 표시된 도장과 끈 장식)를 전해줬다거나 교역 대상을 임의로 바꾼 탓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 말하는 기록은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사 기록 ‘삼국지’에 실려 있는 같은 시대 우리나라 역사이다.사로국이 건립된 지 200여 년이 지날 무렵부터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 예가 강성해져서 군현이 능히 통제하지 못하자 백성들이 삼한으로 이탈해 나간다.’ 위 기사는 중국 후한 말기(147~189년)의 기록으로 혼란스러운 중국의 상황과 사로국을 포함한 삼한 사회의 성장을 전해준다.이 시기부터 삼한 사회에서는 ‘목관묘’(널무덤)를 대신해 ‘목곽묘’(덧널무덤)를 무덤 구조로 채용하여 넓어진 부장 공간에 훨씬 많고 희귀한 유물들을 매납한다.이전 시기보다 풍족해진 경제적 기반이 무덤 구조에 반영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부(富)를 과시하는 현상이 유행할 만큼 당시의 상황이 변했던 것이다.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사로국은 또 다른 과감한 선택을 감행한다.진한 교역망에서 낙랑군, 대방군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입수하는 비중을 줄이는 대신, 사로국 브랜드의 철기 제품을 주변 국들에게 집중적으로 유통하면서 빠져나올 수 없는 소비 구조를 구축해 나간 것이다.이런 조치는 교통망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과 흔들리지 않는 진한 맹주국의 사회적 지위가 뒷받침된 결과였다. 진한 연맹체에서 사로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동해안 해로와 내륙 육로를 이용할 수 없었고, 의존적인 철 공급 시장에서 특화된 철기로 패권을 장악한 사로국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다.최근, 가야가 철의 왕국이라고 선전되지만, 그 원조는 사로국이라 할 수 있다.사로국은 영역 경계에 있던 달천 광산으로부터 원료를 공급받고, 중심지 주변의 황성동 유적 등지에서 철기를 생산했다.한반도 남부에서 대규모로 손꼽히는 철광석 산지가 사로국 수중에 있었으며, 발달된 제철 기술과 전문적 운영 시스템도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발굴 조사된 황성동 유적은 요즘으로 치면 포스코의 1차 하청 업체로 추정되는데 고도로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구조로서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설계됐다.시간이 흘러, 사로국의 철은 실용적 용도와 경제적 가치를 넘어 사회 통합의 상징으로 활용되기에 이른다.사로국으로부터 철을 공급받는 주변국들은 점차 무덤 구조와 장례 절차를 사로국의 기준에 맞추게 된다.장기명학예연구사당시 특징적인 사로국의 장례 풍습은 시신이 안치되는 목관 바닥에 철창을 비롯한 다양한 철기들을 빈틈없이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런 장례 의식은 유례없이 많은 철기가 요구됐음에도 주변국의 상류 사회에서 경쟁적으로 채택되고 공유된다.사실, 철기를 과소비하는 사회 현상은 우연한 유행이라기보다 주변국들을 ‘신라’라는 영역 국가로 통합하기 위해 기획된 노림수의 결과였다. 사로국은 진한 연맹체의 맹주로서 주변 들과 힘의 우열 차이는 뚜렷했지만, 기존 질서를 무시한 급진적 무력 복속을 택하지 않았다. 주변국들이 오랫동안 유지한 독립적, 자치적인 내부 구조를 단기간에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대신에 기울어진 진한 교역망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압박을 가중시키는 한편, 상류 사회가 사로국의 장례 의식을 통해 일반 구성원과 차별되어 내부 분열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결국, 진한 사회에서는 사로국을 중심으로 ‘철’이 매개된 공동 이데올로기를 이끌어냈고, 경제적 위기에 빠진 주변국들은 내부 분열을 거듭한 채 헤어 나오지 못했다.설상가상으로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고구려가 낙랑군, 대방군을 몰아내고 한반도 북부를 장악했다는 국제 소식이 들려왔다. 기존의 무역 체제는 무너졌고,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내부적 단합이 필요했다. 역사적 순간은 점점 다가왔다. 드디어 사로국이 이끌던 진한 연맹체는 역사 무대 뒤로 퇴장했고, 고대 국가 ‘신라’가 탄생했다.

2021-02-01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류영재포항예총 회장구랍 13일 밤늦은 시간까지 포항중앙아트홀 전시실에는 훤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화가로서 절정의 기량을 꽃피울 무렵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난 이병우의 유작전(遺作展) 설치작업이 늦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밤 10시가 훌쩍 지난 늦은 시간이었지만 의미 있는 전시회를 정성껏 준비하던 포항미술협회장을 비롯한 회원 친구들이 디스플레이를 마치고 흐뭇한 마음으로 전시장을 한 바퀴 휘돌아 보던 중 포항문화재단 관계자로부터 전시장 폐쇄 통보를 받았다. 코로나 감염의 재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적용 단계의 전국적인 격상이 발표된 까닭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로부터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불 꺼진 전시장의 컴컴한 벽면에 매달린 채 사랑하는 가족이며 친구, 선후배, 관람객들을 기다려왔다.생전의 그는 늘 웃음 가득한 모습으로 주변의 어려움을 살피는 다정다감한 이웃이었고, 사랑으로 가르치는 멋쟁이 선생님이었으며, 미술협회장을 맡아서는 성심껏 봉사하는 사람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각인되어 있다. 동빈항과 죽도시장 등 지역의 소재를 화두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온 화가로 50년을 불꽃처럼 살다간 예술가이기도 하였던 그가 떠난 지 벌써 4년의 세월이 지났다. 병상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가 불귀의 길을 떠나기 며칠 전, 통증이 몹시 심하였을 상황에서도 그는 본인의 아픔이나 먼 길 떠날 걱정보다는 필자에게 포항 미술계의 미래를 염려하는 말을 하였다. 그와의 생애 마지막 약속, 이제 그를 작품으로 만나게 된다. 과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일까.‘등대처럼 살다간 화가 이병우’라는 타이틀이 붙은 유작전이 포항중앙아트홀에서 열리고 있다. 포항문화재단이 매년 지역의 우수작가를 선정하여 전시회 개최를 지원하고 있는데, 작고 화가의 전시기획은 이번이 처음이다. 코로나 사태의 확산으로 폐쇄되었던 전시장이 조건부로 개관이 허용되어 다시 열리게 된 것이다. 미망인은 이번 전시를 통해 큰 작품들은 공공기관에 기증하겠다는 의향을 밝혀왔다. 생전에도 그는 아내와 협의해 포항교육청에 여러 작품을 기증한 바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이 전람회가 화가 이병우의 삶과 예술을 제대로 조명하는 계기가 되고, 그의 소중한 유작들이 고인과 미망인의 뜻대로 의미 있는 장소에 잘 보존되어 각박한 세상을 밝히는 부표가 되고 등대가 되기를 소망한다.예술가들은 자존을 먹고 산다.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나버린 코로나사태는 여전히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생업조차 내려놓은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의 아픔에 비하면 문화 예술계의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절박함이 덜할 것이라 생각하면 인식의 오류다. 예술인들은 예술활동이 바로 생업이며 예술이라는 ‘정신’과 생업이라는 ‘물질’의 간격 때문에 상공인들이 호황을 누릴 때도 어려움을 감내하여왔고, 지금은 더욱 절박하다. 다만 어려움의 눈물을 삼키고 내면에 천착하여 예술적 깊이를 더하며 인내할 뿐이다.화가 이병우가 남긴 유작을 망라한 이번 전람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어 예술가들의 자존을 밝히는 또 하나의 등대가 되기를 바란다.

2021-02-01

입춘별곡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내일이 새해의 첫 절기인 입춘이다. 여전히 매서운 추위와 성가신 코로나19 감염증의 재확산으로 요원할 것 같은 봄날이 이날부터 서막을 알리게 된다. 동안거에 들었던 풀과 나무들이 움을 준비하고 세상이 동토의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때, 남녘에선 벌써 때이른 홍매화 개화 소식도 있지만 진정한 마음의 봄은 어느 날에나 오려는지 몹시도 기다려진다. 입춘이 되면 농경의례와 기복적(祈福的)인 의미로 입춘방(立春榜)을 대문이나 문설주 등에 붙인다. 춘축(春祝)·입춘서·입춘첩이라고도 하는 입춘방은 한 해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며 봄을 송축하는 글귀다. 주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등의 한문을 세로형태의 화선지에 붓으로 쓰지만, 요즘은 순 우리말로 ‘들봄 한볕, 기쁨 가득’ 등의 문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캘리그래피 서체에 색채를 가미하거나 삽화를 곁들여 다양하게 쓰고 그리기도 한다.필자는 매년 입춘에 즈음해 입춘첩을 붓으로 써서 이웃과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현관문 입구에 붙이곤 한다. 설날이 다가오면 연하장도 정성껏 써서 함께 전해주곤 했는데, 외곬스러울지 몰라도 그렇게 해온 지 벌써 이십 수년이나 됐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해마다 당연한듯이(?) 연하장이나 입춘첩을 기다리기도 하고, 어떤 지인은 연례적으로 받은 연하장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지런히 간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오기도 한다. 크게 대수로운 일도 아닌데 주위의 기다림과 소중한 챙김을 생각하고 자락(自樂)으로 삼으며,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쓰고 보내고 나눠왔는지도 모른다.그러한 습성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연하장을 쓰고 입춘첩을 나눴다. 어서 빨리 악질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물러가고(疫病消滅),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편안하며(國泰民安), 만복이 구름처럼 흥해지기를(萬福雲興) 바라는 마음을 차곡차곡 담아 열성을 다해 썼다. 입춘첩은 특히 입춘이 드는 절입시간에 붙여야 적실(適實)하다기에 최소한 입춘 1~2일 전에 전달해줘야 하는 시의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연하장이나 입춘방을 쓰는 것도 그렇지만 나눠주고 보내주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그러나 친분과 받는 이의 표정을 떠올리면 주저없이 연락을 하거나 우편물로 보내게 된다. 비대면으로 소원해진 때지만 미미한 소통이나마 반가움과 미더움으로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입춘이라지만 바로 봄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계절의 변화는 기운의 변화이다. 겨울의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땅 속에서는 새 생명이 움트고 있으니 봄의 기운이 서서히 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차례의 꽃샘추위와 잎샘추위가 지나가야 비로소 봄이 오는 것이다. 멀지 않아 오게 될 봄날을 기다리는 것도 새로운 희망의 기운과 다시 시작하는 설레임이 있기 때문이다. 혹독한 추위와 시련의 고통을 이겨낸 뒤에 맞이하는 봄날이 한결 환해지지 않을까 싶다.봄은 많이 보라고 봄이라 했던가. 이곳저곳 주변을 자세히 바라보면 정말 어느새 조금씩 달라지고 눈에 띄게 보이는 것들이 많다. 풀과 싹이 흙을 간지럽히고 홍매화 등걸에 망울이 맺히듯 차츰 봄날이 부스스 실눈을 뜨며 입춘별곡을 노래하는 듯하다.

2021-02-01

3D 바이오프린팅을 활용한 맞춤형 인공장기

김도영포항테크노파크 첨단바이오융합센터장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심장, 간, 피부, 각막, 혈관 등을 생성해 인간에게 이식하는 기술을 3D 바이오 프린팅이라고 부른다.기존의 3D 프린팅이 치과 보철, 의족·의수 등 신체를 지지하는 인공 보철물 제작에 그쳤다면 바이오 프린팅은 줄기세포를 이용해 장기와 같은 체내 이식물까지도 맞춤형으로 제작할 수 있어 국내·외에서 3D 바이오 프린팅을 통해 인공장기를 개발하려는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최초의 바이오프린팅 기술은 2008년 일본 도야마 대학의 마코토 나카무라 교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잉크젯 프린터의 입자 크기가 사람 세포의 크기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 인체 조직이나 장기를 만드는 3D 바이오프린터를 개발했다.2013년 미국의 바이오벤처기업 오가노보(Organovo)에서는 수만 개의 세포로 구성된 바이오잉크를 사용해 1㎝ 크기의 인공 간을 제작했으며 제약회사에 판매되어 신약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약물 독성시험 검사에 쓰이고 있다.2016년 중국의 레보텍사에서는 원숭이의 지방층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로 인공혈관을 제작해 원숭이에게 이식했는데 이는 영장류에 대한 최초의 바이오프린팅 성공사례이다.같은 해 미국의 웨이크 포레스트의대 재생의학연구소의 앤서니 아탈라 교수 연구진은 3D 프린터로 만든 귀를 쥐에게 이식해 내부로 혈관이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2018년 영국 뉴캐슬대 연구진은 사람들에게 기증받은 각막 줄기세포와 알긴산염(Alginate), 콜라겐(Collagen)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바이오 잉크를 만들어 사람의 인공각막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그리고 2019년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환자 세포를 이용하여 세포, 혈관, 심실 등을 모두 갖추고 있는 체리 1개 크기의 인공심장을 3D 프린터로 출력하는 데 성공했다.3D 바이오프린팅에서 잉크로 사용되는 물질은 일반적인 3D 프린팅의 재료와 완전히 다르다. 장기를 출력하는 3D 바이오프린팅 기술은 살아있는 세포를 사용하여 세포를 원하는 형상이나 패턴으로 적층해 인체의 조직이나 장기를 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포를 활용하는 3D 바이오프린팅 기술은 의학계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공장기를 환자에게 이식했을 때 장기가 제 기능을 해야 하고, 면역거부반응 등 환자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3D 바이오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인공장기는 실제 환자 본인의 세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적고, 환자 몸의 일부로 생착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장기 이식이 가진 수많은 단점과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다.바이오프린팅 시장은 최근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세계 바이오프린팅 시장규모는 2019년 3억 620만 달러에서 연평균 복합 성장률(CAGR) 35.4%로 확대되어 2024년에는 14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BCC Research, 2019). 최근에는 대기업들의 참여로 상용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미국의 존슨엔드존슨(Johnson Johnson)과 같은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LOREAL), 미국 생활용품 기업인 프록터갬블(PG), 독일 화학회사 바스프(BASF) 등은 화장품이나 화학물질을 시험할 피부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어 많은 과학자들은 5년 내 인체 대상 임상시험이 가능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2020년 8월 정부 관계부처 합동으로 ‘제2차 3D 프린팅산업 진흥 기본계획(2020~ 2022)’을 수립하고 3D프린팅 글로벌 5대 강국을 달성하기 위한 비전과 추진과제를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2018년 0.4조원 규모의 국내시장을 확대하여 2022년 1조원 달성(연평균 27% 성장)을 실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중소제조기업의 지속적 혁신성장 지원을 통해 2022년까지 연매출 100억 이상 글로벌 기업을 10개사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산업현장과 기업을 연계할 수 있는 3D 프린팅 실증지원센터와 같은 실증기반을 구축할 계획이다.국내에서도 3D 바이오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인공장기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특히 포스텍 조동우 교수 연구진은 바이오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인공장기 개발 분야의 선두주자로 손꼽힌다.2016년 세계 최초로 3D 세포 프린트를 이용하여 인공 근육을 제작했으며 2018년에는 포항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하여 세포배양기판을 제작하며 체내 근육과 더욱 비슷한 인공 근육 재생기술을 개발했다. 포스텍과 한동대학교 등 지역의 대학에는 줄기세포와 오가노이드(organoid) 분야의 핵심기술을 보유한 연구진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어 향후 포항을 중심으로 바이오프린팅 기반 인공장기 산업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아직은 대학과 공공 연구기관 주도로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3D 바이오프린팅 인공장기 제품개발과 세계시장 선점을 위해서는 산학연병간의 컨소시엄을 통한 상용화 기술 조기 확보와 중소벤처기업 지원을 위한 실증지원센터 등의 인프라 구축, 산업 밀착형 선도인재 육성, 법·제도 재정비 등 다각적으로 추진돼야 할 것이다.

2021-01-31

수도권집중, 이대로 괜찮나

윤대식영남대 교수·도시공학과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 ‘서울 도심 집값 세계 2위, 홍콩 다음으로 비싸다’라는 기사를 읽었다.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 언론을 통해 접한 기사들을 보면 서울시민들의 통근소요시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기사는 물론이고, 서울의 비즈니스 비용이 세계적인 대도시들 가운데 매우 상위권에 속한다는 내용까지 다양하다.모두 서울과 수도권의 과밀로 인한 문제점을 적시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언론보도를 볼 때마다 전 인구의 50%가 몰려 살고 경제력 집중이 심각한 수도권집중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함을 새롭게 느낀다.오래 전부터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수도권집중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수도권집중은 국가균형발전을 저해하고 수도권의 과밀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로 수도권의 경쟁력마저 저하시킬 것이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있다.수도권집중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논자들은 수확체증(increasing returns to scale)의 원리로부터 경제성장의 동인(動因)을 찾는다. 그리고 밀도가 높고 경제활동의 근접성이 있으면서 집적이 많이 이뤄져 있으면 수확체증이 발생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한 공간정책의 방향은 수확체증현상을 감안한 경제원리에 역행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면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공간영역으로 수도권을 육성해야 함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일리가 있으며, 수도권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대도시권으로 육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수도권집중의 바람직한 수준은 수도권집중으로 인한 과밀의 사회적 비용(주거 및 교통 혼잡비용)이 집적이익(agglomeration economies)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정된다.현재와 같이 수도권에 산업과 인구가 집중하는 현상은 시장원리의 산물이라고 많은 논자들이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중앙정부가 주도해온 관치경제의 산물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특히 수확체증현상은 고급기술이나 지식을 많이 이용하는 산업에서 발생하는데, 수도권의 경우 지금까지 중앙정부가 주도해온 관치경제(官治經濟)에 의해 고급기술이나 지식이 많이 축적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지리적 공간상에서 나타나는 4가지 흐름은 인구이동, 자본이동, 의사결정, 혁신의 확산이고, 이들은 상호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우리 나라의 경우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권력(의사결정)이 집중되는 곳에 자본과 인구도 함께 집중함으로써 수도권집중이 나타났고, 이러한 집중현상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관성(慣性)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의 입지요인으로 생산요소(원료와 노동력), 시장, 집적경제(agglomeration economies), 환경요인, 정부의 영향력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금까지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관치경제의 요소를 걷어내고 수도권의 선발이익(initial advantages)이 사라진다면 산업생산 공간으로서 수도권의 입지적 장점이 계속 존재할까 의문이다.그러나 선진국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의 예를 보면, 첨단산업의 입지요인으로 권력에의 접근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워싱턴 D.C. 주변에 첨단산업이 집중하지 않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오히려 미국의 첨단산업은 명문대학과 국립연구소에의 접근성 및 기후 등의 환경적 요인이 중요한 입지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입지경향이야말로 시장원리의 결과로 볼 수 있다.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비용뿐만 아니라 현재 수도권에서 볼 수 있는 주거 및 교통 혼잡비용까지 고려할 경우 일극(一極) 집중의 공간적 독점이 아닌 다극(多極) 집중의 공간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 국가 전체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한 국가 내에서 일극 집중이 심각할 경우 공간적 독점으로 인해 성장의 한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한 국가 내에서 특정 도시 혹은 지역이 산업생산 혹은 삶의 공간으로서 경쟁상대가 없을 때, 국내 도시 혹은 지역 간에 질적인 경쟁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수도권이 오직 규모의 경제로 인해 경쟁력을 가질 때 수도권의 질적 성장이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이렇게 될 때 외국 대도시와의 경쟁력이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경제원리를 따른다면, 한계생산성이 높은 지역에 대한 지원과 투자가 바람직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이야말로 수도권의 한계생산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성찰과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이제 경제적 효율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되는 지방 대도시의 육성과 이들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초광역경제권의 형성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가 우선되어야 한다.이렇게 될 때 국가 전체의 경쟁력 향상도 가능할 것이다.수도권문제의 인식과 대안의 선택은 글로벌 경제의 관점에서 조망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바로 눈앞의 경제적 득실이 아니라 먼 장래의 국토공간구조와 국가경쟁력을 바라보는 중장기적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고려한 중앙정부의 구체적인 정책수립과 실천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1-01-31

‘판관(判官)’들의 수난

안재휘 논설위원1952년, 자신을 살해하려는 육군 대위를 사살한 야당의 맹장 서민호(徐珉濠) 의원에 대해 1심 재판부가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하고 국회가 석방결의안을 통과시켰음에도 이승만 정권은 막무가내였다. 이때 안윤출(安潤出) 부장판사가 ‘구속집행정지’ 결정으로 서 의원을 석방한다. 그러자 ‘백골단’, ‘땃벌떼’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법원으로 몰려와 “안윤출을 죽이라”며 난장판을 벌인다.안윤출 판사는 그 후 3개월간 경기도 지방의 처가로 피신해 있었다. 대신 배석 판사들이 특무대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이승만 정권은 기어이, 1958년부터 안윤출을 비롯한 연임 대상자의 4분의 1 이상인 20여 법관들을 잘라냈다. 4·19혁명 직전의 풍경이었다.지난해 21대 총선에서 국회 의석 절대다수를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의 힘자랑이 그 끝을 알 수 없도록 점입가경이다. 아무래도 거대 여당은 다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해볼 기세다. 이번에는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가 현직 판사들을 ‘탄핵’ 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그 첫 번째 타깃이 된 인물은 임성근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다. 임 판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던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에서 담당 재판장에게 유죄가 선고될 수 있도록 재판 진행을 지시하고 판결문을 미리 받아 직접 수정했다는 혐의를 받는다.직권남용 혐의의 재판에서 1심 재판부는 임 판사에게 재판개입은 인정되지만, 형사책임을 묻긴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지금은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임 판사 탄핵을 추진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1심 판결문에 6차례 등장하는 ‘위헌적 행위’라는 대목이다.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여 인사들에 대해 한사코 ‘법적으로 무죄’라고 우겨오던 지금까지의 주장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또 다른 아시타비(我是他非)로밖에 읽히지 않는다.임 판사가 죄를 지었다면, 굳이 그를 두둔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야당의 비판대로 만약 민주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한 하나의 정략으로서 이 일을 벌인다면 심각한 문제다.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 집행정지 인용, 정경심 동양대 교수 징역 4년,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 의원직 상실형 선고 등 여권에 불리한 법원의 판결이 이어지던 끝이다. 행여라도 사법부를 겁박해 길들이겠다는 의도의 불장난이라면 이는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가뜩이나 ‘협치’·‘소수의견 존중’ 등 민주주의의 참다운 미덕이 모조리 사라져가는 시대에 ‘삼권분립’이라는 대들보마저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민주당은 이제 ‘할 수 있는 일’만 들여다보지 말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더 살펴보기를 바란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야당의 맹장 서민호 의원을 용감하게 풀어준 안윤출 판사는 “나는 석방 결정에 도장을 찍을 때 죽음을 각오했다”고 회고했었다.

2021-01-31

묵식(默食)

“침묵은 금”이라는 것은 말을 많이 하면 실언을 할 수 있으니 신중히 하라는 뜻이다. “말 한마다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격언이다.말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그 사람의 교양과 인격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잘못된 말 한마디로 망신을 당하는 일도 흔하게 발생한다. 말을 잘못함으로써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그 말로 인해 명예가 훼손돼 법적 다툼도 한다.불교에서는 말로 짓는 죄를 반성한다 하여 묵언수행을 한다. 아무런 말도 않고 참선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하는 불가에서 행하는 수행 중 하나다. 마음속으로 묵묵히 기도하는 것을 묵상이라고 표현한다.말을 신중히 해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요즘처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혀야 할 때가 있는데, 무조건 말을 아낀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특히 식사문화는 음식을 먹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과의 대화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생활양식이다. 대화없는 음식문화는 앙꼬 없는 찐빵과 비슷하다. 음식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는 대화만큼 훈훈한 분위기도 잘 없다.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일본에서는 묵식식당이 등장했다. 코로나로 고객이 감소한 식당 주인이 감염병 예방 차원에서 고안한 고육지책이다. 식사 도중 침방울이 튀는 것을 막고 고객의 보건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의도다.말을 못해 불편할 것 같았던 묵식식당이 의외로 고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관광협회가 홈피에 묵식 안내문을 올리고 식당마다에 권장도 한다. 코로나가 많은 분야에서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있지만 말않고 먹는 묵식의 등장은 충격이다. 말 없는 식사문화는 비정상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