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에 내렸다. 도로변에 차들이 즐비하게 줄지어 섰다. 시장 안쪽을 보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다. 청하(淸河)가 ‘공진’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면서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 ‘갯마을 차차차’라는 순한 드라마 덕분이다. 억 소리 나는 액션도 대단한 기획 의도도 없는 요즘 보기 드문 소박한 드라마다. 포항 근교 어촌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사랑과 조연으로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정을 나누는 에피소드가 모여 따뜻하게 마음을 덥혀준다.
청하라는 지명은 육청에서 유래하여 ‘맑은 시냇물’ 때문에 지었다는 설이 있다. 시냇물은 삶을 거스르지 않고 순하게 흘러 바다에 몸을 맡기고, 그 냇물을 곁에서 보고 자란 사람들은 저절로 순하게 됐다. 그래서 드라마처럼 순박하고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우리의 마음에 맑고 시원한 물 한 잔처럼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청’하면 치아 사이에 말이 동굴을 빠져나가고 ‘하’소리에 온몸의 나쁜 기운도 덩달아 모두 밖으로 배출하는 모양새다. 고여 있던 마음이든 소리이든 한꺼번에 넓은 바다로 몰려나가 저 넓은 대양이 되는 것이다.
그런 청하라서 파도 소리도 순하다. 호미곶에 한 번 부딪힌 물결이 밀려와 은은하고 정다운 파도가 되어 모래펄을 훑고 사라락 부서진다. 파도를 응시한 바위 위 갈매기들은 퍼덕거리는 날갯짓으로 파도와 동무가 된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찬란히 빛나는 모래를 안으러 왔단다.’ 어릴 적 아이들과 손을 잡고 두 패로 나뉘어 왔다 갔다 하다간 틈을 봐서 상대를 잡아당기던, 아련한 추억처럼 파도는 가볍게 밀려와 모래펄 앞에서 나지막한 더미에 몸을 내맡긴다.
청하는 바람 소리 또한 착하다. 아름다운 관송전 숲을 통과한 바람은 푸른빛으로 가슴을 쓸어안는다. 아름드리 숲은 청하중학교와 기청산 수목원을 감싸고 있다. 마을 어디에서도 숲을 지나는 바람을 만날 수 있다. 나무와 꽃이 사시사철 피고, 다양한 새들이 향기에 취해 날아오고 매미와 잠자리, 벌 나비가 수시로 넘나드니 사람과 숲이 동고동락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엔 해가 걸리고 달과 별이 걸린다. 잠자는 시간에도 어둠 속을 지키느라 나무와 별은 밤새 호위무사가 된다.
착하고 순한 사람은 얼굴에 ‘나 착함’이라고 새겨져 있다. 내겐 삼십여 년을 함께 사는 순한 어른이 계신다. 시어머님이시다. 쉰 중반에 남편을 여의고 큰아들 가족과 지금껏 함께 산다. 오래전 기사 식당을 했던 솜씨로 만드는 음식은 예사롭지 않다. 더러 이웃에게 김치라도 나눠주면 어머님 솜씨 덕분에 내가 인사말을 늘어지게 듣기도 한다.
그 지극정성을 먹고 자란 손자 손녀 셋이 사회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낸다. 현관문을 열면서 “할머니, 할머니” 외치는 아이들에겐 어미는 없고 할머니만 있다. 음식을 오물오물 맛나게 먹으며 눈을 반짝인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반찬이 제일 맛있어.” 그 말에 힘이 나신다는 어머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챙기느라 하루가 부족하다. 오늘도 식탁 앞에서 막내는 갓 만든 김치를 맛보며 엄지 척을 한다.
이젠 칠순을 넘은 몸으로도 가족을 건사해주시는 모습에서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낄 때가 많다. 따뜻하고 정성들인 음식은 밖에 나가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란 착한 두드림이다. 힘내 살라고 말보다 몸으로 늘 응원해주시니 그 순한 눈빛에서 힘을 받는다. 이젠 좀 편히 쉬시라고 해도 그 일을 관둘 수 없다는 어머님의 얼굴이 ‘청하’하다.
맵지 않고 순한 드라마를 보다가 멋지고 황홀한 배경을 보면 어머님을 모시고 간혹 여행을 떠난다. 그곳을 찾아가서 배우가 연기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나도 어머니도 주인공의 순한 몸짓을 흉내 내어 본다. 우린 그 순간 그 누구나가 될 수 있으니까.
코로나로 답답한 나를 밖으로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코스모스를 흔드는 바람과 이제 막 머리부터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나무가 떨어뜨리는 잎새. 여행은 한쪽으로만 쏠려가는 나를 일으켜 세워 눈이 깊은 사람이 되게 한다. 10월, 아직 햇살이 눈부시다. 한나절 청하에서 홍반장이 되고 윤혜진이 되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