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경은 내외를 구분하는 외성(外城)이 없어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신라 당대에는 자연 지형이나 환경 등이 그 구분을 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울러 사찰, 왕릉, 산성과 같은 국가적 중요시설 등도 그 경계로 이용한 듯하다. 신라 왕경의 사찰은 그 분포양상을 보았을 때 중고기 때에는 서천 주변, 6세기 중엽 월성 주변, 7세기 후반 낭산 일원과 토함산 북록, 8세기 중엽 형제산, 토함산 남록, 8세기 후반 이후에는 오늘날 경주시 외곽지역까지 단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찰의 분포양상과 입지는 신라 왕경의 형성 과정과 방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신라 중고기 사찰의 분포는 당시 경주 분지의 고지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비롯해 서천 동안에 분포하는 중고기 사찰은 대부분 구하도나 습지를 피해 미고지(微高地)에 건립됐다. 이러한 양상은 마랍간기 경주 분지 내 적석목곽묘가 용천천이나 습지를 피해 축조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6세기 초까지 신라 왕경의 중요시설은 수해로부터 피해가 적은 안전한 장소를 선택해 입지했다.
진흥왕 14년(553)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지으려고 시도했다. 이때의 신궁은 단순히 기존의 왕궁인 월성에 더해지는 의미보다는 지리적 한계가 있는 월성을 극복하고 대신하기 위한 시설이다. 진흥왕은 신궁 건설을 통해 왕경의 새로운 구도를 개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성 동북쪽에 습지로 남아 있던 넓은 공간을 신궁 조성의 대상 부지로 선택했고, 이곳을 매립하고 개간했다. 비록 왕궁을 짓지 못하고 사찰, 즉 황룡사로 고쳐짓게 되었지만 분명 진흥왕의 신궁 건설은 왕경의 대대적인 개발을 염두 한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조성 후 왕경의 도시기반시설과 중요 건축물은 월성과 황룡사 주변에 집중되었고, 천주사, 분황사와 같은 국가사찰이 주변에 건립되었다. 이후 왕경의 개발은 황룡사 동편인 낭산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낭산은 7세기 전반 선덕여왕릉이 입지하면서 주변 개발이 점차 이뤄지고, 사천왕사(679년), 황복사(구황동 삼층석탑·692년 조성)와 같은 중요사찰이 조성될 무렵 낭산은 왕경 중심부에 완전히 포함되었다.
신라 중대 전반 왕경의 사찰은 낭산 일원에서 가장 활발히 조성되었다. 이 시기 낭산은 왕경의 내외의 경계를 짓는 장소로 인정되며, 이 경계지점에 호국사찰의 상징인 사천왕사가 조성된 것은 매우 의도적인 입지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사찰 분포의 변화는 7세기 후반 문무왕대 대규모 토목공사에 따른 왕경의 재개편과 관련된다. 또한 682년 감은사 조성 이후 왕경과 동해안을 오가는 경로가 활성화 되는데, 이 경로는 낭산 북쪽을 지나 명활산, 천군동사지, 고선사, 기림사로 이어져 동해안 감은사로 연결된다. 특히 이러한 사찰들은 왕경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지에 입지하고 있어 각 사찰의 역할이나 기능이 매우 다양했을 것이다.
신라 중대 후반에도 여러 사찰이 새롭게 조성되었지만, 가장 주목되는 것은 토함산의 불국사일 것이다. 앞선 시기 낭산 주변으로 분포하던 사찰은 토함산 일원까지 그 분포 범위가 확대 되었다. 이는 성덕왕 21년(722) 축성된 모벌군성(毛伐郡城·722년), 즉 관문성과 관련될 수 있다. 즉 관문성 축성 이후 오늘날 경주 외동일대까지 안전한 방어체제가 구축되었고, 이에 왕경의 중요시설은 토함산 일원까지 확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이 경로에는 신라 중대 후반부터 여러 사찰과 함께 왕릉(성덕왕릉, 원성왕릉 등)이 조성된다. 한편 이 무렵에는 동해안으로 오가는 또 하나의 길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토함산 남록을 통한 길인데, 이 길에는 불국사(740년경)와 장항리사지(8세기 중엽)와 같은 사찰이 입지한다.
신라 하대에는 왕경 전역에 중·소규모의 사찰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주변 산지에 들어선 소규모 불교유적(마애불 등)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훨씬 많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하대가 되면 지방 호족의 후원이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지방에서 많은 불사가 있었다고 하는 인식과는 차이가 있다. 경주지역 신라 사찰의 분포 현상을 참고한다면 신라 하대에도 왕경 외곽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문무왕대 이어 애장왕7년(806)에 사찰 창건과 불사에 대한 금령(禁令)을 제정한 것은 신라 하대 들어서 그만큼 많은 사찰이 새롭게 건립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 중고기나 중대에는 비교적 특정 지역(서천 주변, 월성주변, 낭산 주변, 왕경-토함산 일원)을 중심으로 사찰이 분포했었다. 또한 신라 중대까지 왕경 내 주요사찰의 분포를 살펴보면 가장 북단은 현곡면의 나원리사지(7세기 후반·북단)이고 가장 남단은 토함산의 불국사(8세기 중엽·남단)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 하대에는 사찰의 분포가 왕경 외곽으로 보다 더 넓게 퍼져있다. 즉 왕경 중심부를 기준으로 사방에 모두 사찰이 들어서는 변화를 보인다. 왕경 북쪽은 오늘날 현곡면을 넘어 안강읍, 강동면 일대까지 사찰이 분포하고, 동남쪽은 외동읍, 남쪽은 내남면 일원까지 사찰이 건립되었다. 동쪽에는 주로 토함산, 운제산, 함월산 등 동해안 경로 상에 사찰이 추가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서천을 지나 오늘날 서악동, 효현동, 율동, 건천 일대까지 사찰이 분포하는 양상이다.
신라 왕경의 사찰은 신라 중고기 서천주변에서 시작해, 6세기 중엽 월성 주변, 7세기 후반 낭산 일원과 토함산 북록, 8세기 중엽 형제산, 토함산 남록, 8세기 후반 이후에는 오늘날 경주시 외곽지역까지 단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찰의 위치나 분포만으로 왕경의 범위나 발전의 전 과정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찰의 분포양상은 신라왕경의 형성과정과 순서, 그리고 경로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