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회의 지배층은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신전을 비롯한 궁궐과 사원을 지었고 건물의 지붕은 기와를 덮어 마감하였다. 그리고 용마루의 양쪽 끝에는 장식기와인 치미(鴟尾)가 올려졌다. 기와는 방수성과 방화성, 그리고 방한성이나 내구성 등의 기능 외에도 목조건물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는 미관성과 길상과 벽사를 의미하는 상징성 등을 지니고 있다.
용마루의 양쪽 끝에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아 있는 치미는 용마루의 미관을 강조하며 사악한 기운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벽사(辟邪)적 역할을 하였다. 중심 건물에만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형태와 문양이 달라,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국가, 지역 혹은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발전하였기에 당시 시대상과 사회상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일반기와보다 대형이므로 제작이 어려워 숙련된 장인들의 고차원적인 기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치미는 당시의 건축술과 공예수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의 사료에 치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보이고 있고, 한대(漢代)의 화상석, 벽화, 석관 등에 고대 치미와 유사한 형태의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늦어도 중국의 한대 이후에는 건축물의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건축의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해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우리나라에서는 4세기 고구려고분벽화에서 치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357년의 묵서명이 있는 안악3호분에 치미가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세기 중엽 전부터 치미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경에 고구려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치미는 6세기경에 백제와 신라까지 파급되어 지역에 따른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의 당(唐)과 고구려, 백제의 영향을 받아 문양과 기종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습이 보이며, 일부 지역에선 이런 형태가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치미의 제작은 일반기와의 제작보다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형의 소성물(燒成物)이다 보니 재료(점토)의 성질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가마에 구워낼 때 자유롭게 불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여 완성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발판삼아 더욱 발전된 기술을 터득하였을 것이다. 경주 황복사지에서 출토된 치미와 같이 외면에 녹유가 발려진 치미의 제작을 위해서는 기와를 제작하는 집단뿐만 아닌 유약을 제작하는 집단과의 협업도 필요할 것이다. 당시 최고의 기술간 협업을 통하여 치미가 만들어지고 건물의 지붕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치미의 제작과정은 일반기와의 제작과정과 마찬가지로 성형→건조→소성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치미의 성형을 일어나는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세분하면, 첫 번째 작업은 뼈대를 형성하는 공정으로 일정한 두께의 점토를 테쌓기하여 전체 틀을 구성하게 된다. 두 번째 작업은 갖추어진 뼈대에 각 부위별로 양감을 표현하며 형체를 형성하게 되는 공정. 세 번째 작업은 형체가 갖추어진 치미의 내외면을 전면적으로 정면 처리하여 다듬는 공정이며,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문양을 표현하여 치미를 장식하게 되는 공정이다. 성형작업 후 치미는 건조과정을 거친 후 가마에서 소성해 완성된다.
요즘 과거의 문화재 제작기술을 파악하기 위해 과학적인 분석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치미와 같이 흙으로 제작한 문화재를 분석하는 경우, 문화재 내부 구조 파악을 위해 X-선 투과분석과 X-선 CT 분석법을 문화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파악하기 위해 형광 X선 분석법, ICP 분석법 등을 이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X선 회절분석법, 주사전자현미경분석법, 열 분석법 등을 분석에 이용한다. 최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분황사·사천왕사지·인왕동사지 등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8세기대 치미의 제작기술을 파악하기 위해 과학적인 분석을 이용한 바 있다. 내부 구조 파악을 위한 X-선 투과분석과 소성 온도를 파악하기 위해 X선 회절분석 및 열분석 등을 하였다. 분석 결과 점토를 테쌓기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가마에서 570~900℃ 사이의 소성온도를 경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치미는 용마루의 양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꼬리를 치켜든 새의 형상과 같기도 하고 물고기의 형상 같기도 하다. 치미의 모습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후한대(後漢代)의 화상석이나 건축명기의 용마루 양쪽에 올려진 상상의 새 봉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치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보는 것이다.
즉, 치미라는 명칭이 새의 꼬리 인 것에 중점을 둔 것이다. 두 번째는 후한대 역사서 ‘오월춘추(吳越春秋)’의 기록에 주목하여, 소성의 남문 양쪽에 올려진 용의 뿔을 닮은 반우(反羽), 즉 물고기의 모습을 띤 예묘(鯢鱙·범고래)가 치미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고대 인도에서 전래된 상상의 물고기 마카라(摩伽羅·MaKara)의 모습이 치미라는 것이다. 마카라는 고대 인도신화 속의 해중괴수로 당나라에서 출토되는 마카라 무늬와 치미가 닮았기 때문에, 치미가 이 마카라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치미의 형상은 대부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치미는 길상(吉祥)·벽사(辟邪)·장엄(莊嚴)의 용도로 제작되어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이한 형태를 띠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위치하여 가장 먼저 하늘의 소리를 듣고 사람들을 지켜주길 바라는 고대인의 간절한 바람이 치미 제작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