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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적에 남겨진 식물을 대하는 자세

옛사람들이 생활했던 흔적들이 땅속에서 발견되지만, 당시 모습 그대로 남겨질 수는 없을 것이다. 유적에서 발견되는 식물 또한 옛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다. 유적에 남겨진 식물의 흔적을 발굴하여, 그것의 성격과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면, 우선 현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가령 오늘 내가 섭취한 식물 먹거리는 어떤 형태로 흔적을 남기는 것들인지 생각해 보자. 나는 오늘 콩을 섞어 지은 밥과 미역국으로 식사를 했고, 후식으로 귤을 먹었다. 아몬드 한 줌을 간식으로 먹었고,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로 티타임을 가졌다.나의 일과 중에 발생한 음식물 쓰레기를 다른 사람이 들여다본다면, 귤껍질로 무슨 과일을 먹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 커피 원두의 찌꺼기를 보고 커피를 내려 마셨음을 아마도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쌀과 콩, 반찬으로 먹은 김치의 원료인 배추와 무, 아몬드를 섭취한 사실을 말해주는 흔적은 쓰레기통에 남지 않는다. 이렇듯 먹고 마신 것들은 이용 방법에 따라 잔해를 남기기도 하고, 남기지 않기도 한다. 심지어 쌀과 김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중요한 먹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이것들은 소비에 한정 시켜 살펴본 것인데, 우리가 이용하는 식물자원의 생산지에 관해 생각해 보면, 또 다른 복잡하고도 재미있는 사정이 있다.내가 마신 커피 원두는 에티오피아산인데, 생산지인 에티오피아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에 음료로 이용한 잔해가 남게 되는 것이다. 아몬드의 경우, 우리가 먹는 부분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가진다. 내가 먹은 캘리포니아산 아몬드는 미국의 가공 공장에서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만 수입한 것이므로, 한국에서 먹고 있지만, 그 흔적은 캘리포니아의 어딘가에 쌓여가고 있다는 점이다.다시 유적에 남겨진 식물 이야기로 돌아와서 생각해보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정밀 발굴 조사되고 있는 신라 왕성인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의 성벽 아래, 그리고 해자(성곽을 둘러 조성된 방어용 도랑)에서는 70여 종의 씨와 열매가 발견되고 있다.이렇게 발견되는 씨와 열매는 시간을 거슬러 1700~1600년 전의 당시 월성 및 주변 지역에서 이용된 식물이 남겨진 것이거나, 주변에 생육했던 식물이 남긴 흔적이다.우리는 이러한 자료를 통해 신라인이 식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생활해 왔는지, 유적에 남겨진 식물자료를 매개로 하여 알 수 있는 신라인의 생활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용되었던 모든 식물, 자랐던 모든 식물이 유적의 땅속에 남겨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퍼즐 맞추기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최근 월성 해자에서 지금까지 국내 유적에서는 출토된 적이 없는 피마자(‘아주까리’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씨가 출토되었다. 씨로 기름을 짜고, 잎은 나물로도 이용하는 유용 작물이다. 피마자는 과거부터 우리나라에 자생한 종이 아닌 아프리카 원산의 식물이다. 국내 고문헌으로는 조선 태조 7년에 간행된 ‘향약제생집성방’에서의 기록이 최초이기 때문에, 이번 출토 자료는 신라시대 경주지역에 피마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세계의 자료로 보면 피마자의 이동 경로는 실크로드를 통해 아프리카에서 인도, 또 중국으로 전해진 것이라 알려진다. 아마 이렇게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경유하여 우리나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시대 우리 땅에서 피마자가 재배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지금의 커피 이용 양상처럼 피마자는 월성에서 소비된 것이긴 하지만 생산지는 또 다른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식물 이름이 적힌 목간(다듬은 나뭇조각에 글을 써서 문서나 편지로 쓴 것) 또한 놓칠 수 없는 자료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문헌연구팀에 따르면 월성 해자 출토 목간에 적힌 천웅(天雄)은 미나리아재비과 식물의 덩이뿌리를 이르는 말로, 약재로 쓰이나 독성을 가진 식물 부위이다. 안소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또 와(萵)는 봄 채소 중의 하나, 상추류의 옛 이름이다. 이러한 잎채소, 뿌리 이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씨앗으로 남겨지지 않는 귀중한 정보가 되는 것이다.유적에 남겨진 동물, 식물로 고대인의 식탁을 복원해보려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유적에 남겨진 자료들은 운 좋게 남겨진 일부에 대한 정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시의 식문화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또한 식탁을 구성하는 먹거리의 생산, 유통, 소비에 대해 밝혀내는 일이 뒤 따라야지만, 식물 이용을 둘러싼 옛사람들의 동선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묘사해 낼 수 있게 된다. 유적에서 출토된 자료를 면밀히 조사하는 것에 더하여 문헌 자료의 조사, 전승되어 온 전통식물이용법에 관한 조사와의 협업을 통해 빠진 퍼즐을 채워나가야 한다.끝

2021-12-27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 쪽샘의 유리구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가 있다. 우리는 이 ‘작은 세계’를 통해 유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고,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작은 세계’는 보존과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우리에게 새롭게 밝혀진다. 쪽샘 유적에서 발굴된 1400년 전 유리구슬에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가 있다.유리는 흔한 물질이다. 하지만 고대에는 유리가 권력자의 사치품이었다. 유리는 화려한 색상, 특유의 광택과 투명함을 띠며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구성이 약해 깨지기 쉽다. 인류가 유리를 처음 만든 건 약 4500년 전. 학계에선 지중해 지역에서 유리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유리가 한반도에 처음 출현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중국의 철기문화와 함께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가 되면 다양한 유리제품이 등장한다. 특히 유리구슬은 고대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리제품 중 하나다. 고대의 유리구슬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 주로 장신구의 재료로 사용됐고, 이런 장신구는 권력자의 죽음과 함께 무덤에 매장됐다가 발굴이라는 학술적 행위를 통해 다시 빛을 보게 된다.발굴된 유리구슬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매우 작은 기포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기포는 유리구슬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단서다. 고대 유리구슬을 제작하는 방법은 크게 4가지였다. ①기다란 유리를 금속 봉에 스프링 형태로 감아서 제작하는 감은기법 ②넓은 판 형태의 유리를 금속 봉에 감아 열을 가한 후 양 끝 부분을 접합해 만드는 접은기법 ③유리 융액을 잡아당겨 유리 관을 만든 후 잘라서 제작하는 늘인기법 ④거푸집 중앙에 철심을 꽂은 후 작은 유리 조각을 넣고 가열하거나 유리 융액을 부어서 제작하는 주조기법 등이다.고대의 유리는 당시 제작 기술의 한계와 유리 융액의 높은 점성으로 인해 기포가 외부로 방출되지 못하고 유리 내부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구슬의 형태를 만들 때 사용되는 힘의 방향에 따라 기포의 배열이 다르다. 감은기법과 접은기법은 구슬을 꿸 수 있는 구멍의 방향과 교차하는 가로방향으로 기포가 배열되며, 늘인기법은 구멍의 방향과 평행하는 세로방향으로 기포가 배열된다. 그러나 유리 용액을 부어서 제작하는 주조기법은 기포의 방향성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쪽샘의 유리구슬은 어떤 방법으로 제작했을까? 발굴된 유리구슬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구멍의 방향과 평행하는 세로방향으로 기포가 길게 늘여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즉, 이 구슬은 늘인기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늘인기법으로 제작한 유리구슬의 경우 한반도에서 관련한 부산물이 보고된 바가 없고 기술적인 난이도를 고려하였을 때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걸로 추측된다.쪽샘의 유리구슬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에서 제작했을까? 유리는 모래나 석영광물을 넣어 용융(融解·고체가 열에 의해 액체가 되는 현상) 과정을 거쳐 만든다. 석영광물을 녹이기 위해서는 1700도에 육박하는 고온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저런 온도를 높이는 기술이 없었기에 용융온도를 낮추기 위해 융제(融劑·원물질의 녹는점보다 낮은 온도에서 융해하게 하는 물질)를 첨가한다. 융제를 첨가하면 화학적으로 불안정한 구조가 되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안정제를 첨가하고, 다양한 색상의 유리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착색제를 더할 수 있다. 융제로 사용한 재료는 나트륨(Na), 칼륨(K), 납(Pb) 등이 있는데 첨가되는 재료에 따라 유리 종류가 구분된다. 나트륨을 사용하면 소다 유리, 칼륨을 사용하면 포타쉬 유리, 납을 사용하면 납 유리로 분류한다. 한편 안정제로 사용하는 재료는 칼슘(Ca), 알루미나(Al), 마그네슘(Mg) 등이 있다. 소다 유리 중 알루미나 함량이 높은 경우 고(高)알루미나 유리로 분류하며, 함량이 낮은 경우 광물의 탄산소다를 사용한 네트론 유리와 해양 식물의 재를 사용한 식물재 유리로 다시 분류할 수 있다. 첨가된 융제와 안정제의 성분을 통해 고대 유리의 제작지를 추정할 수 있다. 포타쉬 유리는 인도나 동남아시아산 초석이나 식물의 재가 원료다. 고(高)알루미나 유리는 아시아의 특징적인 조성으로 주로 남아시아 혹은 동남아시아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네트론 유리는 지중해 지역의 원료로 제작했고, 식물재 유리는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원료로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김세희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쪽샘에서 발굴된 유리구슬은 감청색이 가장 많다. 그외 벽색, 청록색, 황색 등이 있다. 분석 결과 감청색 유리구슬은 초석을 사용한 포타쉬 유리와 소다 유리로 밝혀졌다. 많은 양을 차지하는 소다 유리는 고(高)알루미나 유리와 네트론 유리 계통이 확인됐다. 벽색과 청록색, 황색의 유리구슬은 대부분 고(高)알루미나 유리다.아직 한반도에서 발굴된 고대 유리구슬의 유통 경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최근 학계에선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제작된 유리구슬이 해양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됐다는 견해가 발표됐다. 아울러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리구슬의 성분 조성이 인도나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출토되는 유리구슬의 성분 조성과 유사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쪽샘 유적에서 발굴된 유리구슬 역시 아직까지 제작지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최근 연구 성과를 고려한다면 교역이나 교류를 통해 외국에서 유입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현재 쪽샘 지구에 대한 발굴이 진행 중이다. 출토된 유리구슬에 대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기에 쪽샘 유리구슬의 ‘작은 세계’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

2021-12-20

그 모습을 되찾은 신라시대 청동 삼환령

경주 쪽샘 지구 신라 고분유적은 신라 귀족들의 집단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은 2007년 3월부터 현재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14년 이상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고대 왕국 신라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그 노력들로 인해 수년 간의 조사로 700여 기가 넘는 많은 무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덤 속에서는 부장품으로 사용된 다양한 종류의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발굴자와 연구자들의 땀이 이뤄낸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은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기도 하지만, 대다수가 깨지고 부서지고, 부식된 상태로 출토된다. 긴 세월의 흐름에 따른 것이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손되거나 부식된 신라시대의 유물들 중 상당수는 보존과학실로 옮겨져 보존처리 작업이 이뤄진다. 여기서부터 유물의 과학적 분석이 시작되는 것이다.쪽샘 41호 고분(2010~2013년 발굴)에서 발굴된 청동 삼환령 역시 부식이 상당히 진행되고 파손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였으니 주변의 작은 편까지 모두 수습하여 보존과학실로 옮겨와 보존 처리와 과학적 분석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가장 먼저 청동 삼환령의 처리 방법과 전반적인 처리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상태 조사를 실시하였다. 상태조사는 유물의 구조와 형식, 형태를 먼저 서술하고 부식 상태와 녹의 색상, 파손 부위, 유기질 유무, 재질 성분의 특이점 등 세부적인 것을 상세하면서 자세하게 기술하였다.철저한 상태 파악과 기록 조사 이후에는 삼환령 표면에 붙어있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유물 표면에는 몇 가지 부식층이 확인되었는데, 동합금 유물의 부식물과 삼환령 구슬 내부의 철환에서 생성된 철제부식물 두 종류가 표면에 두텁게 고착되어 있어서, 두텁게 생성된 부식물은 실체현미경을 보며 메스나 소도구를 이용하여 물리적인 방법으로 신속히 제거해 주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고대 유물 연구에 유용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이물질을 깔끔하게 제거하는 작업이 끝나면 유물 내부의 부식인자를 제거해주는 안정화 처리와 부식으로 인하여 재질이 약화되어 있는 유물에 강화제를 주입하고 표면을 코팅해주는 강화처리를 해주어 보존처리 과정을 완료하였다. 서두르지 않고 순차적으로 작업은 진행됐다.이러한 세세한 보존처리 과정 이후에는 다시 전체적인 조사를 통해 수정할 부분이 있는지, 혹은 처리 후에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의 여부를 정리하는 ‘처리 후 조사’를 하고 보존처리를 마무리 하게 된다. 보존처리가 완료된 삼환령의 모습은 둥근 고리에 세 개의 방울이 달린 매우 특징적인 유물로 확인되었다.흥미로운 점은 기존의 삼환령은 둥근 고리에 정삼각형 형태로 방울이 달리는데 반해 쪽샘 삼환령은 한 개의 방울이 파손되어 제작 혹은, 사용 당시 리벳으로 수리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이처럼 보존처리 후에 해당 유물의 재질 확인, 내부 구조와 결합 방법, 수리한 흔적을 더 알아보고자 다양한 분석연구를 실시하는데, 삼환령의 경우는 재질을 확인하기 위해 X선 형광분석기(P-XRF)라는 장비를 이용하게 됐으며, 내부 구조와 결합 방법 등을 파악하기 위해 X선 촬영과 실체현미경 등을 사용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첨단의 과학기술이 과거 유물들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그렇게 분석을 진행한 결과 삼환령의 성분은 구리, 주석, 납이 주성분인 청동합금으로 밝혀졌는데, 구리의 함량이 다소 높게 확인되었다. 한편 X선 촬영을 통해 삼환령 방울 내부에는 작은 구슬이 있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특히 기존에 발굴된 삼환령은 대부분 방울 안에 작은 돌이나 청동 구슬을 넣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인데, 쪽샘 출토 삼환령의 경우는 철로 만든 구슬(철환)이라는 것이 새롭게 밝혀졌으며 이 수리된 방울에만 철환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속적이고 면밀한 연구의 결과가 현실에서 도출된 것이다. 김은정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마지막으로 삼환령의 용도에 대해서는 각각의 연구자마다 이견이 있다. 말에 매달아 장신구로 사용했다는 견해와 사람이 착용한 장신구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는 것이 그것이다.발굴된 신라 무덤 속에는 말과 관련된 다양한 용품이 확인되고 있다. 물론 발걸이나 안장과 같이 기능적인 유물도 있고, 말을 꾸미기 위한 장신구도 있다. 삼환령은 말에 매달아 소리를 내는 말방울의 기능을 하면서 말을 꾸미는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 중에는 무덤에 매장된 사람의 허리 위치에서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사람이 착장한 장신구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신라 무덤 유적에서 발굴된 깨지고 부서진 보잘것없는 유물이 보존 처리와 보존과학의 노력으로 1500년 전 신라인의 문화와 기술을 전해주는 보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일이다.

2021-12-13

1500년 전 잠든 말 갑옷, 쪽샘에서 깨어나다

쪽샘 고분 유적은 4~6세기 축조된 신라 왕경인들의 집단 무덤군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7년부터 쪽샘 유적에 대한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2009년 4월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쪽샘 유적 내 C-10호라고 부르는 무덤에서 거의 완벽한 형태의 말과 장수의 철제갑옷이 동시에 발굴된 것이다.1600년 전 신라시대 갑옷이 출토된 것만으로도 드문 일인데, 말과 장수의 두 갑옷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발굴되었다는 것에 당시 학계나 관련연구자, 그리고 언론에서 주목했었다. 두 갑옷은 비늘 모양의 작은 쇠 조각(小札)을 엮어 만든, 소위 찰갑(札甲)으로 부르는 형태였다. 이러한 찰갑은 넓은 쇠판으로 제작한 판갑(板甲)보다 발전된 기술로 이동성에 있어 훨씬 용이하다. 이러한 완벽한 형태의 찰갑, 그것도 말과 장수의 갑옷이 동시에 발굴된 것은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사례이다.발굴 당시 말 갑옷은 목·가슴-몸통-엉덩이를 가리는 한 벌이 펼쳐져있고, 말 몸통 갑옷 위에 장수의 갑옷 일부가 깔려있었다. 주변에는 장수가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투구, 목가리개와 긴 칼 등이 놓여있고, 말 얼굴을 보호하는 갑옷 부분(馬5191)은 별도의 나무곽(副槨)에 넣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발굴된 말 갑옷은 당시 부식 상태가 심각해 긴급하게 현장에서 보존처리를 진행했다. 하지만 흙 속에 묻혀 있던 말 갑옷이 노출되면서 상태변화로 인해 손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손상을 줄이기 위해서는 발굴 현장보다는 안전한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발굴 현장에서 연구소 보존과학실로 이동해 오래시간 동안 정밀 보존처리가 이뤄졌다.말 갑옷에 대한 본격적인 보존처리는 발굴된 유물을 별도 마련된 처리실로 옮기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발굴된 원형대로 말 갑옷을 이동하는 것이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였기 때문에 안전한 이송을 위해 먼저 국내·외 유사 사례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아울러 모의실험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한 후, 이동계획이 수립되었다.먼저 말 갑옷이 부서지거나 흐트러지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강화제를 도포하여 임시 강화처리를 하고, 충진재가 직접 닿지 않도록 한지를 덮고 석고붕대로 드레싱을 한 후 우레탄폼으로 유물(갑옷)을 보호했다. 말 갑옷 아래쪽은 흙을 깊게 파고 바닥과 주변에 목재프레임으로 벽을 세운 후 빈곳을 우레탄폼으로 채워 보강하고 크레인을 이용하여 들어 올려 이송하였다. 즉, 발굴된 갑옷만 수습한 것이 아니라, 갑옷에 고착된 흙을 비롯해 주변 흙을 통째로 이동한 것이다. 작은 철판 하나하나가 부식이 심해, 하나씩 수습하는 것은 유물에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유물에 대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더라도 주변 흙을 통째로 떠서 원형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보존실로 옮겨온 말 갑옷은 현장에서 포장한 방법과 반대로 포장재를 해체하는 작업부터 실시했고, 이후 갑옷의 내면부터 보존처리를 진행했다. 이송 중 파손을 줄이기 위해 보강된 우레탄폼, 임시강화제 등을 제거하고, 에어브러시브를 이용해 표면의 이물질과 부식화합물 등을 클리닝했다.분리가 가능한 편들은 X-ray 촬영을 실시하고 가죽, 목질, 섬유 등 남아있는 유기질에 대한 자료 등을 기록했다. 이물질 제거 후 파손되거나 결실된 부분은 접착제로 접합하고 복원재로 결실부를 제작했고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입혀 실제 유물과 어울리도록 복원했다. 그리고 더 이상 부식이 진행되지 않도록 내면에 불소계 수지(V-flon 10%)를 2차에 걸쳐 도포하여 전면을 코팅했다.내면 처리가 완료된 후 외면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유물을 다시 뒤집어야 했다. 말 갑옷은 약 740매의 작은 철판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뒤집을 시 각각의 철판이 움직이거나 유동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사전에 유물의 유동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여러 보호 장치를 설치해야 했다. 먼저 말 갑옷 주변부에 유토를 사용해 높이를 맞추고, 그 위에 한지를 덮었다. 말 갑옷 표면에는 얇은 주석박지를 밀착시켜 다시 보호한 후 유리섬유, 거즈 등을 덮고 실리콘으로 도포했다. 그 위에 우레탄폼으로 1차로 층을 만들고 목재 격자프레임을 설치한 후 격자 안에 2차로 우레탄폼을 다시 채웠다. 전체 중량 때문에 혹시라도 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벌집형구조체를 덮어 보강했다. 전상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안전하게 말 갑옷을 뒤집은 후 우레탄폼과 한지 및 강화제, 흙, 자갈 등을 차례로 제거한 후 말 갑옷 표면에 남아있는 이물질을 에어브러시브로 클리닝 해주었다. 내면과 마찬가지로 표면에 수착된 가죽, 목재 등 유기질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고, X-ray촬영도 함께 했다. 이후 이동이나 뒤집기 과정에서 파손된 편을 접착제로 접합하고, 결실된 부분은 주변부와 이질감이 없도록 복원했다. 기타 부가적인 처리작업은 내면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었고, 말 갑옷은 발굴되었을 때와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새롭게 탄생했다.‘문화재 보존처리’는 발굴된 유물에 묻어 있는 흙과 먼지를 털어내고, 때로는 깨지고 부서진 부분은 다시 수리하고 복원하는 기술이다. 문화재 보존처리는 오랜 시간과 공력이 필요한 작업이며, 각 분야 전문가의 세밀한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다. 박물관 유리장 안에 화려하게 전시된 문화재 역시 대부분 이러한 보존처리 과정을 거친 유물들이다. 지난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이 공동으로 개최한 특별전시 ‘말, 갑옷을 입다’에 출품된 말 갑옷은 이러한 지난한 문화재 보존처리의 과정과 수고가 있었기에 전시가 가능했다.

2021-12-06

고대 와전(瓦塼)기술의 결정체 ‘치미’

고대사회의 지배층은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신전을 비롯한 궁궐과 사원을 지었고 건물의 지붕은 기와를 덮어 마감하였다. 그리고 용마루의 양쪽 끝에는 장식기와인 치미(鴟尾)가 올려졌다. 기와는 방수성과 방화성, 그리고 방한성이나 내구성 등의 기능 외에도 목조건물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는 미관성과 길상과 벽사를 의미하는 상징성 등을 지니고 있다.용마루의 양쪽 끝에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아 있는 치미는 용마루의 미관을 강조하며 사악한 기운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벽사(辟邪)적 역할을 하였다. 중심 건물에만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형태와 문양이 달라,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국가, 지역 혹은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발전하였기에 당시 시대상과 사회상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일반기와보다 대형이므로 제작이 어려워 숙련된 장인들의 고차원적인 기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치미는 당시의 건축술과 공예수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의 사료에 치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보이고 있고, 한대(漢代)의 화상석, 벽화, 석관 등에 고대 치미와 유사한 형태의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늦어도 중국의 한대 이후에는 건축물의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건축의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해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우리나라에서는 4세기 고구려고분벽화에서 치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357년의 묵서명이 있는 안악3호분에 치미가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세기 중엽 전부터 치미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경에 고구려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치미는 6세기경에 백제와 신라까지 파급되어 지역에 따른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의 당(唐)과 고구려, 백제의 영향을 받아 문양과 기종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습이 보이며, 일부 지역에선 이런 형태가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치미의 제작은 일반기와의 제작보다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형의 소성물(燒成物)이다 보니 재료(점토)의 성질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가마에 구워낼 때 자유롭게 불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여 완성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발판삼아 더욱 발전된 기술을 터득하였을 것이다. 경주 황복사지에서 출토된 치미와 같이 외면에 녹유가 발려진 치미의 제작을 위해서는 기와를 제작하는 집단뿐만 아닌 유약을 제작하는 집단과의 협업도 필요할 것이다. 당시 최고의 기술간 협업을 통하여 치미가 만들어지고 건물의 지붕에 설치되었을 것이다.치미의 제작과정은 일반기와의 제작과정과 마찬가지로 성형→건조→소성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치미의 성형을 일어나는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세분하면, 첫 번째 작업은 뼈대를 형성하는 공정으로 일정한 두께의 점토를 테쌓기하여 전체 틀을 구성하게 된다. 두 번째 작업은 갖추어진 뼈대에 각 부위별로 양감을 표현하며 형체를 형성하게 되는 공정. 세 번째 작업은 형체가 갖추어진 치미의 내외면을 전면적으로 정면 처리하여 다듬는 공정이며,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문양을 표현하여 치미를 장식하게 되는 공정이다. 성형작업 후 치미는 건조과정을 거친 후 가마에서 소성해 완성된다.요즘 과거의 문화재 제작기술을 파악하기 위해 과학적인 분석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치미와 같이 흙으로 제작한 문화재를 분석하는 경우, 문화재 내부 구조 파악을 위해 X-선 투과분석과 X-선 CT 분석법을 문화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파악하기 위해 형광 X선 분석법, ICP 분석법 등을 이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X선 회절분석법, 주사전자현미경분석법, 열 분석법 등을 분석에 이용한다. 최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분황사·사천왕사지·인왕동사지 등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8세기대 치미의 제작기술을 파악하기 위해 과학적인 분석을 이용한 바 있다. 내부 구조 파악을 위한 X-선 투과분석과 소성 온도를 파악하기 위해 X선 회절분석 및 열분석 등을 하였다. 분석 결과 점토를 테쌓기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가마에서 570~900℃ 사이의 소성온도를 경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도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치미는 용마루의 양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꼬리를 치켜든 새의 형상과 같기도 하고 물고기의 형상 같기도 하다. 치미의 모습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후한대(後漢代)의 화상석이나 건축명기의 용마루 양쪽에 올려진 상상의 새 봉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치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보는 것이다. 즉, 치미라는 명칭이 새의 꼬리 인 것에 중점을 둔 것이다. 두 번째는 후한대 역사서 ‘오월춘추(吳越春秋)’의 기록에 주목하여, 소성의 남문 양쪽에 올려진 용의 뿔을 닮은 반우(反羽), 즉 물고기의 모습을 띤 예묘(鯢鱙·범고래)가 치미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고대 인도에서 전래된 상상의 물고기 마카라(摩伽羅·MaKara)의 모습이 치미라는 것이다. 마카라는 고대 인도신화 속의 해중괴수로 당나라에서 출토되는 마카라 무늬와 치미가 닮았기 때문에, 치미가 이 마카라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치미의 형상은 대부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치미는 길상(吉祥)·벽사(辟邪)·장엄(莊嚴)의 용도로 제작되어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이한 형태를 띠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위치하여 가장 먼저 하늘의 소리를 듣고 사람들을 지켜주길 바라는 고대인의 간절한 바람이 치미 제작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하여 본다.

2021-11-29

출토 금속유물과 보존처리의 역할

금속은 청동기시대·철기시대처럼 역사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언급될 만큼 고대부터 친숙하게 사용된 재료이다. 출토되는 금속유물들은 주로 금·은·동·철·납·주석 등의 재료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만든 장식품이나 무기, 생활도구들이다.아주 오래전부터 고대인들이 만들어 사용한 이러한 물건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되어 유물이 되고, 관련 역사학자들이 이를 연구함으로써 당시의 금속 제작 기술 수준이나 문화의 발전 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경주를 예로 들어보면, 신라가 천년 동안 유지되면서 생산한 다양한 문화 유적지들이 즐비한 곳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되는 금속유물의 수량 역시도 매우 많고, 다양하다. 이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경주에서는 사람이 생활하던 주거지부터 죽은 자의 무덤, 각종 건물이나 사찰 등 유적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금속유물들이 출토된다.각종 생활도구들 중에는 지금도 사용되는 솥이나 망치와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는 것도 있지만 의례행위 도구나 무기, 장식품들 중에는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유물이 상당수를 차지한다.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유물의 모양을 되찾아주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금속은 흔히 ‘녹이 슨다.’라고 하듯이 쉽게 부식되고, 깨지거나 변형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금속유물은 출토되는 수량은 많지만 온전한 모습이 거의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금속유물들을 연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보존처리를 진행하게 된다. 이건 일종의 선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출토되는 금속유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은 크게 보면 ‘기록-처리-기록’의 과정을 거친다. 보존처리 과정 전반에 걸쳐 유물을 가까이 놓고 관찰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정보들을 최대한 기록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발굴보고서에 반영되고, 전시나 교육, 관련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된다.보존처리 기록에는 보존처리 전과 후의 유물 사진, x-ray 촬영을 통한 보이지 않는 균열과 문양들, 분석 장비를 이용한 유물의 성분분석 결과, 유물의 무게나 크기의 변화, 보존처리에 사용한 약품의 종류 등이 포함된다.이러한 정보를 이용하면 발굴현장에서 출토되는 비슷한 모양이나 상태의 유물을 보존처리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또한 관련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유물을 관리하는 담당자들에게도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수장고에 보관하면서 금속유물에 손상이 발생하는 것을 억제하면서 안정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기초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이처럼 금속유물을 보존하고 처리하는데는 조심스러운 여러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금속유물을 보존처리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고대 사회의 기술 수준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금속유물의 보존처리는 단순히 녹이 슨 부분을 제거하고, 지저분한 곳을 닦아주며, 깨진 부위를 붙이거나 복원해주는 것만이 아니다. 단순한 기술적 보존처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유물의 크기나 상태에 따라 처리기간은 다르지만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1년 이상을 계속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실체현미경과 전자현미경을 통해 유물을 관찰하다보면 과거의 조상들이 이 유물을 어떻게 만들었고, 어떠한 기술을 적용하였으며, 얼마나 정교한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역사는 복원되고 연구되는 것이다.이러한 관찰을 통해 고대 사회의 제철기술, 장식기술과 같은 금속 가공기술부터 금·은·동·철·청동 등의 재료 특성과 같은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이렇게 확보된 정보들은 고고학, 미술사, 공예사 등의 관련 학문에서 더 다듬어져서 고대사회의 모습을 유추하는데 활용된다. 고대 금속유물의 연구 과정은 이처럼 체계적이고 정밀하게 진행된다. 심명보학예연구사 지금은 금속을 생산하고 제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리하며, 더욱 정밀한 물건도 많기 때문에 박물관이나 책에서 보는 낡고 보잘 것 없는 녹슨 철기 유물 한 점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하지만 고대 사회에서 금속제품은 부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들이 사용했던 화려하면서 섬세하고, 강인하면서도 실용적인 금속제품은 긴 시간이 지나 다소 빛을 바래서 우리 앞에 유물로 나타났지만 그 가치는 여전히 빛나야 하는 소중한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우리 역사의 찬란했던 과거 흔적을 찾아 가고 조상들의 금속공예, 더 나아가 당시의 생활문화가 재조명 받을 수 있도록 연구하고, 공유하는 것이 보존처리의 역할인 것이다.

2021-11-22

‘삼국유사’ 속 경주 남산의 스님들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보물 제2071호)과 ‘삼국유사’ 탑상편 ‘생의사석미륵’조에 기록된 미륵불상은 동일한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최근 이 상과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었는데, 불상의 도상(미륵의좌상)과 석실(석굴) 봉안과 같은 특징을 고려했을 때 이 불상은 선관 수행(禪觀修行)의 목적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승려의 수행법 중 하나인 선관은 특정한 대상을 관(觀)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선관은 몇 가지 수행단계를 거치지만, 결국 부처(미륵불)의 친견이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남산 불적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선덕왕 때 생의(生義)라는 스님이 항상 도중사에 거주했다. 꿈에 스님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 풀을 묶어서 표를 하게하고, 산의 남쪽 마을에 이르러서 말하길, “내가 이곳에 묻혀있으니 스님은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주시오”라고 했다. 꿈을 깬 후 친구와 더불어 표시해 둔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보니 석미륵이 나오므로 삼화령 위에 안치했다. 선덕왕 13년(갑진)에 절을 짓고 살았으니 후에 생의사라 이름하였다”이야기 속 생의스님은 평소 도중사에 거주했었다. 그는 꿈에서 알려준 대로 남산에 올라가 석미륵상을 찾은 뒤 삼화령 위에 불상을 봉안하고, 선덕왕13년(643 혹은 644) 그곳에 생의사라는 사찰을 만들었다. 생의스님은 원래 왕경의 ‘도중사’ 승려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남산에 ‘생의사’를 짓고 거처를 옮긴 것이다. ‘생의사’라는 사명(寺名)에서 알 수 있듯 이 절은 생의스님을 위한, 생의스님에 의한 사찰임이 감지된다. 이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삼국유사’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로 이어진다.“3월 3일(765년)에 왕이 귀정문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 분이 배회하고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를 입고 앵통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맞이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가 들어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는 충담이라고 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승려가 답하기를 “소승은 매해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이 이야기는 충담스님이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기 위해 남산에 갔다가 돌아오고 있는 장면이다. 충담스님은 매해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하러 남산에 다녀온다고 했다.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것 역시 하나의 수행과정. 이야기 속에서 충담스님은 남산에 기거하는 것이 아니라, 왕경 사찰에 거주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즉 스님의 본사(本寺)는 왕경의 평지사찰이었고, 남산에는 특정시기에 수행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구성에서 평지사원과 남산 불적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기사에는 남산과 관련한 승려의 모습을 수행자처럼 묘사하고 있다.“한 거사가 행색이 남루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 광주리를 이고 와서 하마대 위에서 쉬고 있었는데 광주리 안을 보니 마른 생선이 있었다. (경흥법사의) 시종이 그를 꾸짖어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그 살아 있는 고기를 양 넓적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과 삼시의 마른 생선을 등에 지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라고 하고, 말을 마치고는 일어나 가버렸다. ~중략~ 남산 문수사의 문 밖에 이르자 광주리를 버리고 사라졌다. ~중략~ 경흥은 그것을 듣고 한탄하여 “대성(大聖)이 와서 내가 짐승을 타는 것을 경계하였구나”라고 하고 죽을 때까지 다시 말을 타지 않았다.” 김동하​​​​​​​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8년 정유에 (망덕사)낙성회를 베풀었는데 왕이 가마를 타고 와서 공양하였다. 한 비구가 있었는데 외양이 남루하였다.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또한 재를 보겠습니다”라고 청하였다. 왕이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장차 재가 끝나려 하니 왕이 그를 희롱하여 말하였다. “어느 곳에 주석하는가?” 중이 비파암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제 가면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하지 말라”라고 말하니 중이 웃으며 “폐하도 역시 사람들에게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마치고는 몸을 솟구쳐 하늘에 떠서 남쪽을 향해 갔다. ~중략~ (남산의) 비파암 밑에 석가사를 세우고, 모습을 감춘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를 나누어 두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삼국유사’ 감통 ‘경흥우성’조에 기록된 내용으로 경흥법사의 사치스러움과 비교해 남산에 기거하는 거사는 남루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두 번째 역시 ‘삼국유사’ 감통 ‘진신수공’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망덕사 낙성회에 참석한 효소왕과 비교해 남산 비파암으로 떠난 비구(석가진신)의 모습은 남루하다. 앞서 소개한 충담사의 이야기에도 위의(威儀) 있는 승려와 비교해 충담사는 초라한 모습이다.세 이야기들 속에서 감지되는 남산과 관련한 승려의 모습은 유사하다. 이야기 속 승려들은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는 당시 남산 불적이 가지는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남산은 승려의 공간이면서, 수행의 공간이었다. 당시 승려는 험한 산지계곡에서 공덕을 쌓기 위해 조탑과 조상을 통한 수행을 감행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불적은 산림수행의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2021-11-15

경주 남산, 수행의 공간

경주 남산은 최고봉의 이름 따 금오산, 고위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남산 앞에 ‘신라불교문화재의 보고’, ‘천년고도의 노천박물관’, ‘민중 신앙의 산’ 등의 다양한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계곡 곳곳에 산재한 다수의 불적(불상·석탑 등)은 남산이 이러한 별칭을 얻는데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 때문에 생긴 막연한 기대와 경외심은 오히려 남산의 역사적 실재를 알아가고 증명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남산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무엇일까? 남산은 신라 당대 사람에게 어떤 장소였고,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불적이 조성되었을까?남산 불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왕경 가까이에 위치한 단일 산록에 다수의 불적이 밀집·분포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계곡에 다수의 불적이 짧은 거리를 두고 각각 위치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특히 어떤 불적의 경우는 도저히 사람이 거주하거나 생활하기 어려운 장소에 입지한 예도 있다. 실제 발굴로 확인된 삼릉계나 열암곡 불적은 많은 사람이 장기간 머물면서 예불을 드릴 수 있는 환경조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산의 불적은 왜 평지가 아닌 험한 산지를 선택했고, 왜 하필 남산에 그 많은 탑상을 조성했던 것일까?남산의 불적은 개개의 사찰로 이해하더라도 그 곳에 많은 사람이 거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험한 산지계곡이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대규모 사역을 형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하다. 이러한 주변 환경을 고려할 때 남산의 불적은 매우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또한 속세와는 분리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산의 불적이 단순히 예불목적으로만 조성했다면, 한 계곡에 많은 불적이 입지할 필요는 없다. 즉 불자는 기왕에 만들어진 탑상(塔像)에 예불을 드리면 되지, 굳이 가까운 거리에 새로운 탑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남산의 수많은 불적은 끊임없이 탑상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에 의해 생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황룡사, 사천왕사, 분황사와 같은 왕경의 사찰을 발굴하면, 흙으로 만든 작은 탑(小塔)이 종종 출토된다. 발굴된 소탑 중에는 매우 정성스럽게 만든 탑도 있지만, 거칠고 투박한 모습을 한 탑도 적지 않다. 이러한 소탑은 그 조형성이나 예술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거 같다. 즉 공덕을 쌓기 위한 조탑 행위 자체가 핵심이므로, 그 모양이 다소 투박하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조탑 신앙은 680년경에 한역된 ‘조탑공덕경’이나 704년에 한역된 ‘무구정광대다리경’의 영향을 받아 실제 왕경 내 많은 탑을 조성하게 한다.한편 ‘삼국유사’ 의해 ‘양지사석’조 말미에는 향가 ‘풍요(風謠)’가 전해진다. ‘풍요’는 영묘사의 장육상을 조성할 때 성 안의 성인남녀가 진흙을 나르면서 불렀던 노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장육상을 만들기 위해 그 불사에 참여하는 것을 공덕을 닦는 행위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산의 수많은 탑상을 수행의 과정·결과로 생각한다면, 산지나 계곡의 험한 환경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의 종교적 염원이나 깊은 불심은 최소한의 공간만 허락해도 그 장소에 탑상을 조성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이 될 수 있다.남산은 ‘돌산’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수행자가 저비용으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매우 적합한 장소라 할 수 있겠다. 즉 조탑(造塔), 조상(造像)을 위한 재료가 산천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종교적 염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된다. 더불어 산은 속세와 분리되어 있어 수행의 장소로서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조건이다. 이러한 환경과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남산에 형성된 수많은 탑상 중 상당수는 수행자가 공덕을 쌓기 위한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하​​​​​​​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최근 일본학계에서는 수행과 법회를 위해 산속에 지은 불당, 사원을 ‘산림사원’이라 부른다. 이 산림사원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하는데, 첫 번째는 불교적 수행이고, 두 번째는 평지가람과의 유기적인 관계이다. 즉 평지가람에서는 수학(修學)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산림사원에서는 깨달음을 위해 불교적 수행이 행해졌다. 평지가람에서의 수학과 산림사원에서의 수행이 각각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돼 있다. 일본의 산림사원은 기본적으로 당탑을 가지고 있으며 회랑을 갖춘 사찰이 많다. 하지만 카스가 산중(春日山中)의 호산 이존석불, 지옥곡의 성인굴마애불, 나라시대 일부 산악의 석불이나 마애불과 같은 유적 등은 그 입지나 주변 환경이 경주 남산의 불적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학계에서는 이러한 불상 역시 산림수행과 관련한 존상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경주 남산의 불적도 일본의 산림사원과 같은 승려의 수행과 관련한 장소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9년(587) 기사 속에는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에 대한 세속의 외면과 그들의 깨달음에 대한 염원 등이 감지된다. 대세는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그는 명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神仙)을 배우려고 했다. 그는 친구를 구하다가 처음 담수(淡水)를 만났지만 끝까지 같이하지 못했고, 이후 그와 같은 뜻을 품은 구칠(仇柒)을 만나 바다로 향해 함께 떠났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두 사람이 처음 찾아간 곳이 바로 ‘남산의 절(南山之寺)’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곳에서 그들은 각자 품은 뜻을 서로 확인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서 수행의 직접적인 행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를 비춰볼 때 이야기 속 ‘남산의 절’은 배움과 관련한 수학(修學)의 장소라기보다는 깨달음과 관련한 수행의 장소에 더 무게를 둘 수 있다.

2021-11-08

황룡사지 발굴조사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공사를 시작해 30년(569)에 경역을 마련하고 1차 가람을 완료했다. 진흥왕 35년(574)에 약 5m 이르는 장육존상을 비롯해 금동삼존상을 조성했고, 진평왕 6년(584)에는 이 불상을 모셔두기 위한 금당을 새롭게 건립했다. 선덕여왕 12년(643)엔 자장스님의 건의로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조성하고자 했다. 목탑을 조성하기 위해 백제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하고, 이간 김용춘은 장인 200명을 인솔해 착공 3년만인 선덕여왕14년(645) 구층목탑을 완공했다. 구층목탑은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높이가 약 80m 정도다. 바닥의 면적이 약 150평이고 기단 한 변의 길이가 약 22.2m로 당대 왕경 내 최고 높이의 건축물이었다. 이렇게 황룡사는 신라 4대왕(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을 거쳐 93년 걸린 대역사를 통해 국찰로서 그 면모를 갖추게 된다.사적 제6호인 황룡사 터는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황룡사지를 비롯해 신라시대 절터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구황동(九黃洞)’ 이라는 명칭도 ‘皇(黃)’자가 들어가는 사찰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1238년 몽골군에 의해 황룡사는 소실되었고, 이후 7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유허(遺墟)만 남고 그 터는 민가의 대지나 전답(田畓) 등으로 변모했다. 발굴조사 이전 황룡사 터에는 구황마을이 있었다. 조사 직전 촬영된 사진을 보면 목탑과 중문지 근처에 가가호호 들어선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제법 규모가 큰 돌담장도 눈에 들어온다.황룡사 터는 1971년 11월 수립된 ‘경주관관종합개발계획’을 일환으로 1976년 4월 발굴조사가 착수된다. 사역 내 마을을 이루고 있는 민가 100여호를 철거하고, 연차적으로 56,700여 평의 주변 토지를 매입해 최초 3차년 계획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1983년 11월까지 8차년 사업으로 발굴조사는 마무리 됐다. 8년간의 조사 기간 동안 현장 작업일수만 2,000일에 가까우며, 발굴 현장에 동원된 연인원은 무려 78,000여 명에 달한다. 발굴조사 결과 25,000여 평에 이르는 황룡사 경역의 범위와 1탑 3금당식의 가람배치가 새롭게 밝혀졌다. 또한 금당, 목탑을 비롯해, 중문, 강당, 회랑, 종루, 경루 등의 사찰 내 중요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은 와전류, 용기류, 불상류, 금속유물 등 총 45,000여 점으로 대부분 신라와 고려시대 만든 것이다. 특히 강당지 북편에서 발굴된 치미 파편들은 모두 수습되어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약 180㎝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큰 치미로 알려져 있다.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우리나라 고대 사찰 연구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황룡사지 발굴 중 드러난 유구와 출토된 유물은 모두 기록으로 남겨져 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자료로 관리되고 있다. 먼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 학술적·역사적 중요도가 높은 유물은 국가에 귀속시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국가귀속대장은 6권이며, 여기에 수록된 국가귀속문화재는 모두 45,656점이다. 발굴조사 중 중요한 유구나 유물이 발굴되면 즉각 사진촬영을 한다. 발굴 당시는 모두 필름사진이었기 때문에 사진 한 컷이 매우 중요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황룡사지 발굴 관련 필름은 슬라이드필름, 흑백필름, 칼라필름 등 3종류. 슬라이드필름 24,934컷, 흑백필름 51,859컷, 칼라필름 1,983컷 등 모두 합해 78,776컷을 연구소에서 현재 보관 중이다. 유구나 유물을 실측한 도면은 2,845장, 그 외 발굴조사기록카드(589장), 유물분류카드(7,182장), 유물카드(2,144장), 유물조사카드(3,999장), 유물처리기록카드(4,784장) 등도 함께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황룡사지 발굴이 남긴 또 다른 역사이자 기록인데, 최근 연구소에서는 이 자료들을 모두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김동하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장기간 이뤄진 사업이었다. 예상치 못한 유구들이 발굴에서 확인돼 조사 자체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지만, 실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그 넓은 경역 전체를 꾸준히 발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황룡사처럼 경역 전체를 발굴한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1971년 11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정부에서 발표되고, 그 일환으로 경주지역 내 많은 유적의 정화사업이 착수된다. 이에 1973년 3월 문화재관리국은 ‘경주미추왕릉지구발굴조사단(이하 왕릉조사단)’을 임시로 구성하고, 대릉원 내 천마총, 황남대총 등을 발굴한다. 이후 1975년 10월 경주지역 유적 발굴조사의 지속성을 위해 기존 왕릉조사단을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으로 개편한다. 당시 부족한 예산과 인력에도 불구하고 경주 안압지, 황룡사지, 월성해자, 신라왕경 등의 대형발굴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경주 유적 발굴조사를 전담할 수 있는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단은 1990년 1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기관 ‘경주문화재연구소’로 정식 인가됐고, 이후 200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한다.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에 왜곡되었던 황룡사의 가람배치가 1970년대 우리의 발굴기술로 명확하게 밝혀졌다는 점에서 자부와 긍지를 가질 수 있다.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사단원들이 흘린 땀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나라 초창기 문화재 발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 시작점에 경주 황룡사지 발굴이 자리한다.

2021-11-01

신라 사찰의 분포와 왕경의 형성과정

신라 왕경은 내외를 구분하는 외성(外城)이 없어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신라 당대에는 자연 지형이나 환경 등이 그 구분을 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울러 사찰, 왕릉, 산성과 같은 국가적 중요시설 등도 그 경계로 이용한 듯하다. 신라 왕경의 사찰은 그 분포양상을 보았을 때 중고기 때에는 서천 주변, 6세기 중엽 월성 주변, 7세기 후반 낭산 일원과 토함산 북록, 8세기 중엽 형제산, 토함산 남록, 8세기 후반 이후에는 오늘날 경주시 외곽지역까지 단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찰의 분포양상과 입지는 신라 왕경의 형성 과정과 방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신라 중고기 사찰의 분포는 당시 경주 분지의 고지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비롯해 서천 동안에 분포하는 중고기 사찰은 대부분 구하도나 습지를 피해 미고지(微高地)에 건립됐다. 이러한 양상은 마랍간기 경주 분지 내 적석목곽묘가 용천천이나 습지를 피해 축조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6세기 초까지 신라 왕경의 중요시설은 수해로부터 피해가 적은 안전한 장소를 선택해 입지했다.진흥왕 14년(553)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지으려고 시도했다. 이때의 신궁은 단순히 기존의 왕궁인 월성에 더해지는 의미보다는 지리적 한계가 있는 월성을 극복하고 대신하기 위한 시설이다. 진흥왕은 신궁 건설을 통해 왕경의 새로운 구도를 개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성 동북쪽에 습지로 남아 있던 넓은 공간을 신궁 조성의 대상 부지로 선택했고, 이곳을 매립하고 개간했다. 비록 왕궁을 짓지 못하고 사찰, 즉 황룡사로 고쳐짓게 되었지만 분명 진흥왕의 신궁 건설은 왕경의 대대적인 개발을 염두 한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조성 후 왕경의 도시기반시설과 중요 건축물은 월성과 황룡사 주변에 집중되었고, 천주사, 분황사와 같은 국가사찰이 주변에 건립되었다. 이후 왕경의 개발은 황룡사 동편인 낭산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낭산은 7세기 전반 선덕여왕릉이 입지하면서 주변 개발이 점차 이뤄지고, 사천왕사(679년), 황복사(구황동 삼층석탑·692년 조성)와 같은 중요사찰이 조성될 무렵 낭산은 왕경 중심부에 완전히 포함되었다.신라 중대 전반 왕경의 사찰은 낭산 일원에서 가장 활발히 조성되었다. 이 시기 낭산은 왕경의 내외의 경계를 짓는 장소로 인정되며, 이 경계지점에 호국사찰의 상징인 사천왕사가 조성된 것은 매우 의도적인 입지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사찰 분포의 변화는 7세기 후반 문무왕대 대규모 토목공사에 따른 왕경의 재개편과 관련된다. 또한 682년 감은사 조성 이후 왕경과 동해안을 오가는 경로가 활성화 되는데, 이 경로는 낭산 북쪽을 지나 명활산, 천군동사지, 고선사, 기림사로 이어져 동해안 감은사로 연결된다. 특히 이러한 사찰들은 왕경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지에 입지하고 있어 각 사찰의 역할이나 기능이 매우 다양했을 것이다.신라 중대 후반에도 여러 사찰이 새롭게 조성되었지만, 가장 주목되는 것은 토함산의 불국사일 것이다. 앞선 시기 낭산 주변으로 분포하던 사찰은 토함산 일원까지 그 분포 범위가 확대 되었다. 이는 성덕왕 21년(722) 축성된 모벌군성(毛伐郡城·722년), 즉 관문성과 관련될 수 있다. 즉 관문성 축성 이후 오늘날 경주 외동일대까지 안전한 방어체제가 구축되었고, 이에 왕경의 중요시설은 토함산 일원까지 확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이 경로에는 신라 중대 후반부터 여러 사찰과 함께 왕릉(성덕왕릉, 원성왕릉 등)이 조성된다. 한편 이 무렵에는 동해안으로 오가는 또 하나의 길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토함산 남록을 통한 길인데, 이 길에는 불국사(740년경)와 장항리사지(8세기 중엽)와 같은 사찰이 입지한다.신라 하대에는 왕경 전역에 중·소규모의 사찰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주변 산지에 들어선 소규모 불교유적(마애불 등)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훨씬 많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하대가 되면 지방 호족의 후원이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지방에서 많은 불사가 있었다고 하는 인식과는 차이가 있다. 경주지역 신라 사찰의 분포 현상을 참고한다면 신라 하대에도 왕경 외곽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문무왕대 이어 애장왕7년(806)에 사찰 창건과 불사에 대한 금령(禁令)을 제정한 것은 신라 하대 들어서 그만큼 많은 사찰이 새롭게 건립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동하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신라 중고기나 중대에는 비교적 특정 지역(서천 주변, 월성주변, 낭산 주변, 왕경-토함산 일원)을 중심으로 사찰이 분포했었다. 또한 신라 중대까지 왕경 내 주요사찰의 분포를 살펴보면 가장 북단은 현곡면의 나원리사지(7세기 후반·북단)이고 가장 남단은 토함산의 불국사(8세기 중엽·남단)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 하대에는 사찰의 분포가 왕경 외곽으로 보다 더 넓게 퍼져있다. 즉 왕경 중심부를 기준으로 사방에 모두 사찰이 들어서는 변화를 보인다. 왕경 북쪽은 오늘날 현곡면을 넘어 안강읍, 강동면 일대까지 사찰이 분포하고, 동남쪽은 외동읍, 남쪽은 내남면 일원까지 사찰이 건립되었다. 동쪽에는 주로 토함산, 운제산, 함월산 등 동해안 경로 상에 사찰이 추가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서천을 지나 오늘날 서악동, 효현동, 율동, 건천 일대까지 사찰이 분포하는 양상이다.신라 왕경의 사찰은 신라 중고기 서천주변에서 시작해, 6세기 중엽 월성 주변, 7세기 후반 낭산 일원과 토함산 북록, 8세기 중엽 형제산, 토함산 남록, 8세기 후반 이후에는 오늘날 경주시 외곽지역까지 단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찰의 위치나 분포만으로 왕경의 범위나 발전의 전 과정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찰의 분포양상은 신라왕경의 형성과정과 순서, 그리고 경로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2021-10-25

문두루비법을 행하다, 사천왕사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대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문헌기록에는 유독 신성스럽고 기이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3년(919년)에 사천왕사의 흙으로 만든 불상(塑像)이 들고 있던 활의 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소리를 냈는데 마치 짓는 것 같았다”.삼국유사 권2, 기이2, 문무왕법민(文武王法敏)에는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자, 갑작스런 풍랑이 일어 당나라군의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이 구절은 어느 소설에 등장할 법한 말은 아니다. 바로 사천왕사와 관련된 기록이다. 사천왕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앞서 사찰이 위치한 낭산(狼山)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할 것 같다.낭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남북방향으로 긴 능선을 이루는데 삼국사기 권3 실성이사금조에는 “12년(413년) 가을 8월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났는데 바라보니 누각과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마땅히 이곳은 복 받은 땅이다’라고 하였다.이때부터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처럼 낭산은 신라왕실은 물론 신라인들에게도 신성한 신유림(神遊林)으로 인정받았고 그래서인지 사천왕사의 창건은 물론 주변으로 망덕사지, 황복사지, 선덕여왕릉 등 다수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이렇듯 낭산은 당시 신라사람들에게 복된 땅이자 신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사천왕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닐까?사천왕사와 관련된 창건기록으로 이야기를 되돌아가 본다. 삼국유사 기록처럼 사천왕사는 당나라군의 침입을 물리친 영험을 계기로 창건되었다. 당나라군이 침입한다는 소식에 왕은 여러 신하들과 방어책을 논의했는데 명랑법사(明郞法師)가 아뢰길 “낭산 남쪽 신유림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그러나 사찰을 짓기에는 급박하자 명랑은 다시 “채색 비단으로 절을 임시로 지으십시오”라고 답한다. 이에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지으니,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싸우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의 배가 모두 침몰하였고,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문무왕 19년·679년)라고 했다 한다.문두루비법은 산스크리트어 무드라의 음을 딴 밀교의 비법으로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의 재난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급박하게 임시로 만든 후 탄생한 사천왕사는 고려시대까지 문두루비법과 관련된 단석(壇席)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혹시 이 흔적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동·서 단석지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사천왕사와 관련해서는 기록뿐 아니라 발굴조사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발굴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이루어졌고 강당지-금당지-탑지 등의 가람배치를 밝히는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금당지 앞에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 서 있었을 탑지이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쌍탑의 석탑으로 정착되는데 목탑에서 쌍탑의 석탑으로 변화하는 가교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사천왕사이다.흔히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 한국은 석탑이 많은 나라라고 하는데 물론 한국에서도 목탑과 전탑이 있었다. 황룡사 구층목탑과 목탑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사찰이 여러 곳 존재한다.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아 삼국시대 목탑의 원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목탑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탑지에 심초석과 사천주가 있느냐에 따라 알 수 있는데 사천왕사에서는 동·서 탑지에서 모두 목탑지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발굴조사 당시 주목된 것은 탑지 기단면에서 확인된 벽전이다. 바로 녹유신장벽전이다. 이 벽전은 명칭부터 논란이 있었는데 사천왕상, 신장상, 신왕상, 소조상, 팔부중상 등 어떻게 불러야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여기에서는 녹유신장벽전으로 부르고자 한다. 정여선 ​​​​​​​학예연구사 녹유신장벽전은 목탑 기단부 한 면에 6점씩 모두 24점이 배치되었고 따라서 동·서 탑지를 합하면 모두 48점인 셈인데 얇은 녹유를 시유한 것으로 복원결과 높이 90cm, 너비 70cm, 두께 7~9cm로 확인되었다. 이 벽전은 아치형의 감실에 갑옷을 입은 눈을 부릅뜬 신장상으로 두 악귀위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매우 실감 있고 자세하게 표현된 부조상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각각의 벽전 모습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얼굴의 모양과 바라보는 방향, 머리에 쓰고 있는 관(투구)의 모양, 갑옷의 모양, 앉아있는 자세 등이 달라 총 3종류로 구분된다. 특히, 목탑지 한면의 중앙에는 계단이 있고 이 계단을 기준으로 3종류가 1세트를 이루어 한 면에 2세트씩 배치된 것인데 이 상들의 얼굴 방향이 첫 번째는 좌측, 두 번째는 중앙, 세 번째는 우측을 응시하고 있다. 이는 조각에 있어 뛰어난 불교예술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배치에 있어서도 매우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녹유신장벽전은 통일신라시대 우수한 조형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이처럼 목탑기단면에 장식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혹시 녹유신장벽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세 종류의 벽전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각각 어떻게 다른 자세와 모양을 취하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사천왕사를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2021-10-18

문무왕이 시작해 신문왕이 완성한 사찰 감은사

불교는 고대 삼국이 공통으로 받아들인 종교이며, 신라시대 경주지역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興輪寺)로 554년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륜사를 시작으로 경주지역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는데 초기에는 주로 평지를 중심으로 세워지다 점차 구릉부로 입지가 변화되어가는 것으로 파악된다.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중심인 감은사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이 대부분 평지나 구릉에 세워진 것과는 달리 바다에 인접해 창건된 흔치 않은 사찰이다.감은사(感恩寺)가 바다 근처에 위치한 것은 사찰의 창건이유와 관련된다. 동해안에 위치한 감은사는 문무왕이 창건을 시작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 뜻을 이어받은 신문왕이 682년 완성하였다. 그 뜻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동해안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불력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한 바람에서 시작된 호국의 이념에 매우 강하게 투영된 사찰임과 동시에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한 마음이 함께 담긴 사찰이기도 하다.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감은사에서 직선거리로 약 1.4㎞에는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이라는 유언에 따른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 위치하고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을 바라보고 그리워했다는 이견대(利見臺)도 인접하여 위치한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감은사 창건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문무왕이 창건하고 신문왕이 완성했다. 그렇다면 그 뜻은 언제까지 이어졌을까? 감은사 창건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폐사된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그 시기를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감은사에 대한 조사는 195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차적으로 발굴한 바 있고, 이후 전체 가람구조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정비하기 위해 1979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추가조사를 실시하였다.그런데 당시 서회랑터 조사를 위한 트렌치에서 예상하지 못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바로 청동반자(靑銅飯子)가 그것인데 글자만 보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무슨 용도인지 금방 와 닿지 않는다.청동반자는 사찰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북으로 금구(禁鼓) 또는 금고(金鼓)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감은사에서는 의도적으로 매납 된 반자 위에 청동풍탁이 함께 출토되었다. 청동반자는 지름 32.2㎝로 표면에 연꽃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테두리는 당초무늬를 돌렸는데 무엇보다도 뒷면 구연부 둘레에 명문 77자가 음각되어 있었다.특히 “至正 11년”이라는 명문은 고려말기 공민왕 즉위년인 1351년으로 이를 통해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명문의 내용 중에는 반자의 제작 동기가 해적이 감은사의 반자, 소종, 금구 등을 훔쳐갔기 때문에 재차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어 당시 고려 말에 동해안에 해적이 시시때때로 출몰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감은사는 강당지-금당지-중문지가 일직선을 이루고 금당지 앞에 삼층의 동·서 두 탑이 서 있는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式)임이 밝혀졌다. 특히 석탑은 높이 13.4m로 1959년 석탑 보수를 위한 해체시 서쪽 탑 3층에서 청동사리장치가 확인되었고, 1996년 동탑 해체시에는 금동사리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정여선학예연구사 감은사 건물지 구조 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금당의 구조이다. 금당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하부는 지하구조를 이루고 있다. 구조는 방형의 석재를 일정한 간격으로 놓고 이 석재와 석재 사이에 남북방향으로 길다란 장대석을 걸쳐 끼웠다. 그리고 장대석 위에는 다시 동서방향으로 길게 장대석을 직교하도록 잇대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마치 마루바닥처럼 돌바닥을 깔아 초석 아래에 약 60㎝의 지하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이 시설은 당시 일반적인 금당지의 구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로 ‘感恩寺 侍中記(감은사 시중기)’에 보이는 “문무왕이… 금당 밑의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도록 구멍을 내었으니 이 구멍으로 용이 금당으로 들어와 서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2021-10-11

신라불교의 정점 불국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토함산에 자리한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시작해 혜공왕 10년(774년) 완성한 사찰이다. 불국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대성(金大城)이 현생의 부모를 위하여 지은 사찰이다. 그러나 김대성은 사찰의 완성은 보지 못하고 그 뒤에 국가에서 이어받아 완성하였다.불국사에 대한 발굴조사는 복원을 위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불국사의 법등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가탑과 다보탑, 조선후기에 지은 대웅전, 자하문, 범영루 등 다수의 건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루어진 발굴조사는 무설전(無說殿)과 대웅전(大雄殿) 영역 내 회랑, 익랑, 비로전(毘盧殿), 관음전(觀音殿)에 대해 이루어졌고 백운교 남쪽으로 연지(蓮池)의 흔적을 확인하는 성과가 있었다.불국사는 신라사람들이 염원한 불국의 세 가지를 구현했다고 한다. 첫째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 둘째는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마지막으로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로 불국사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일대와 비교된다.불국사는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백운교, 연화교·칠보교,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등 다수의 불교문화재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 대웅전, 무설전, 극락전과 안양문 등 건물지도 우수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계단이라 할 수 있다.극락전 앞에는 안양문, 대웅전 앞에는 자하문이 있고 문 앞으로는 2단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안양문과 연결되는 연화교(계단에 큰 연꽃잎이 새겨져 있음)와 칠보교는 합하여 18단이고, 자하문과 연결된 청운교(푸른 청년의 모습)·백운교(흰머리 노인의 모습)는 33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아래쪽에서 우러러보아야 하는 이 계단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높디높은 불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명칭을 살펴보면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로 즉 다리를 의미하는데 ‘다리는 물을 건너는 구조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의 불국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전에는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어 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청운교·백운교 사이 하단에는 다리에나 있을법한 아치형의 홍예구조를 볼 수 있다.불국사에서 수려함을 자랑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또 어떤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잘 알려져 있는 탑이다.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이 충실히 구현된 석가탑은 비례와 균형미가 뛰어난 탑으로 인정받고 있고, 사방에 계단과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화려한 상륜부를 자랑하는 다보탑은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인들의 미적감각과 돌을 다루는 기술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두 탑은 후대에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다보탑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체되었고 탑 안에 봉안되어 있던 사리장엄구는 현재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석가탑은 1966년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석가탑은 해체·보수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때 신라인들의 불교예술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2층 탑신석 상면 중앙 사리공에서 금동제 방형 사리합, 소형의 은제 사리합, 초록색유리병, 곡옥, 수정 및 각종 구슬 등의 사리장엄구가 확인된 것이다. 정여선학예연구사 특히, 사리공에서는 세계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어 깜짝 놀라하게 하였다. 다라니경은 길이 약 600㎝, 너비 8㎝의 두루마리 형태로 금동제 사리 외함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금동제 사리 외함의 바깥쪽에서는 묵서지편(墨書紙片)도 발견되었는데 고려시대에 필사된 ‘보협인경’의 잔편과 약 10×13~15㎝ 크기의 고려시대 중수문서 3종 등이 밝혀졌다. 특히, 중수문서에는 고려시대에 석가탑이 서석탑으로 불려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려주었다. 이렇듯 불국사는 신라사람들이 바라는 불국세계를 현세에 펼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예술과 기술을 동원하여 통일신라시대 불교예술의 정점을 이루었다.경주는 수학여행지, 답사지, 여행지로써 손색없는 곳이다. 경주를 여행하다가 간혹 오랫동안 운영된 식당 벽에 기와지붕이 올려진 오래된 건물과 그 아래 축대처럼 쌓인 돌 그리고 계단이 보이는 흑백사진을 보게 될 수 있다.‘저 사진이 왜 여기에 걸려있을까?’ 하고 처음에는 참 의아했는데 그 사진이 불국사의 옛 모습임을 알게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기는 경주이고 경주의 대표적 유적은 불국사이니 저 사진이 걸려있는 건 당연하다는 공감의 끄덕임이다.

2021-10-04

황복사, 신라 왕실의 염원을 담다

낭산의 북동쪽 산록에는 석탑 하나가 서 있다. 어딘가 모르게 이 탑이 익숙하고 친근하다면 아마도 불국사 대웅전 앞에서, 감은사지에서 혹은 경주 박물관의 정원에서 이와 닮은 탑을 이미 마주한 적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국사 석가탑처럼 완벽하지도, 감은사지 석탑처럼 웅장하지도 않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 탑은 놀랍게도 국보에 등록된 보물 중의 보물이다.1937년 이 탑이 위치한 낭산의 동쪽 기슭에서 ‘황복(皇福)’,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이 기와편이 정식 조사를 통해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이전까지는 막연히 기록으로만 전해왔던 ‘황복사’의 실체가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드러난 것이며, 이로써 이 탑은 ‘황복사지 삼층 석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황복사와 관련한 문헌 기록은 매우 불친절하다. 이 절을 누가, 언제, 어디에,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면서 신라의 고승(高僧) ‘의상’이 29세에 머리를 깎고 출가한 절이라고만 ‘삼국유사’가 넌지시 알려줄 뿐이다.의상의 출생 시점은 ‘부석본비’와 ‘해동고승전’을 통해 625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의상이 출가한 나이 29세를 더하면 653년 즉, 진덕(여)왕 7년이 된다. 이는 황복사가 최초로 창건된 시기는 아니다. 하지만 늦어도 7세기 중엽 진덕왕이 신라를 통치하던 시점에는 황복사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한편, ‘부석본비’에서 전하는 의상의 전기에 따르면 “‘관세’에 출가(4E31歲出家)하여 영휘 원년 경술년(650)에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에서 어려움에 직면하여 돌아왔다.”고 전한다. 여기서 관세(4E31歲)는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나이 즉, 20세 미만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의상이 29세 이전에 이미 출가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의상의 출가 시점은 653년보다 더 빨라질 수 있으며, 의상이 출가한 황복사의 건립 시기 역시도 더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7세기 무렵에 건립되었으리라 막연히 추정할 뿐이다.황복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1933년 간행된 ‘동경통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황복사는 낭산의 동쪽에 있으며, ‘팔부중상’이 새겨진 삼층 석탑이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동경통지는 17세기 조선 현종 무렵 간행된 ‘동경잡기’를 수정, 보완한 것으로 동경잡기 역시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동경지’를 참고한 후대의 기록이다. 황복사지 삼층 석탑이라 전하는 이 탑이 낭산의 동쪽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지는 않아서 이 기록 역시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1942년 6월 어느 날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서 2층 지붕돌 내부에 조성된 사리공이 확인된 것이다. 사리공에는 많은 양의 유리구슬과 사리함, 금동제, 은제 제기 등이 확인되었다. 사리함 뚜껑 내면에는 탑을 만든 시기와 경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마침내 탑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탑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천수 3년(692) 효소대왕이 어머니이신 신목태후와 함께 임진년(692) 7월 2일 승하하신 부왕 신문대왕과 종묘(宗廟)의 신성한 영령(聖靈)을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어 “성력 3년(700)에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나시고, 대족 2년(702)에는 효소대왕도 승하하시어, 신룡 2년(706)에 지금의 대왕(성덕왕)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의 2층에 안치하였다.”고 밝히며 이를 통해 신문대왕과 신목태후, 효소대왕의 명복을 기원하고 있다.탑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대목이다. ‘종묘’란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또 ‘선원가람’이란 고요히 앉아서 참선(기도)을 주로 하는 사찰이다. 비록 이 탑이 전하는 기록에서 사찰의 이름이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성스러운 영령의 위패를 모신 종묘의 기능을 수행한 사찰임은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다. 강승규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2016년 낭산 일원의 문화재를 정비하고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황복사지 삼층 석탑과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지만, 탑 앞에 펼쳐진 넓은 들에서 금당으로 추정되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건물지의 남쪽에는 탑으로 추정되는 방형의 건물지 2동이 대칭을 이루며 확인됐다. 두 개의 탑에 하나의 금당을 갖춘 감은사나, 불국사와 유사한 구조다. 이 외에도 12지신상을 기단으로 사용한 건물지, 회랑, 연못 등이 확인되었으며, 다수의 금동불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절터의 동편에는 완성되지 못한 왕릉급의 무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21-09-27

신라 최초 여왕의 염원이 깃든 곳 분황사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되어 지금까지도 법등(法燈)을 이어온 사찰이며, 오랜기간 유지되었던 사찰인 만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다양한 기록을 접할 수 있다. 특히 분황사는 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 중 한 곳이기도 하다.신라는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타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등 호국불교의 면모가 강하였다. 칠처가람 역시 신라 전 영토를 불국토로 여기는 것으로 그 가운데 분황사가 포함되었다는 점은 당시 신라 사회에 큰 영향력 있는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분황사는 황룡사·황복사 등과 같이 신라 왕실을 의미하는 ‘皇’자를 사용한 왕실사찰이다.또한 문헌기록에는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하였다. ‘분(芬)’자가 향기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의미로 풀이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향기로운 임금’은 바로 분황사의 창건주인 선덕여왕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 하듯 1915년 발견된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리함에서 금바늘과 바늘통 그리고 실패와 가위 등 여성들이 주로 사용한 물건들이 사리장엄구에 포함되어 있었다.이렇듯 분황사는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7세기 중엽부터 지금까지도 사찰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분황사는 정문을 지나면 일제강점기(1915년)에 수리된 모전석탑,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 우물,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건립된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해 석등과 많은 초석,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만이 남아 있다. 고찰(古刹)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람 영역은 불국사, 해인사와 비교하면 좁게만 느껴진다.특히, 사찰의 주요 구조는 부처를 봉안한 금당(金堂)과 사리(舍利)를 모신 탑(塔)이므로, 탑과 금당이 일직선에 놓이도록 배치된다. 그런데 현재 분황사에는 금당인 보광전의 입구가 서쪽으로 향하여 전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특이하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분황사에 대한 궁금증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를 통해 해소할 있었다. 발굴조사는 20년간 이어져 2012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결과 분황사는 창건 당시 품(品)자형의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사찰에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 세 곳에 법당을 배치하는 방식) 가람(伽藍)으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일탑삼금당식의 가람구조는 고구려에서 시작되었지만, 분황사의 가람배치는 고구려의 것과 똑같은 구조는 아니었다. 신라만의 품(品)자형 일탑삼금당식이 등장한 것이며, 분황사에 이것이 적용된 것이다. 창건 당시 3금당은 모두 남향으로 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후 통일신라시기에 일탑일금당식으로 변화했고, 조선시대에 들어 현재 모습의 분황사 가람이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또한 분황사 경내 위치한 모전석탑(방형모전석탑·方形模塼石塔)은 신라 유일한 전탑형식의 석탑으로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석탑은 분황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이외에도 분황사 남북 외곽지역에서 당간지주·담장·축대·건물지·배수로 등이 확인되어 분황사 전성기의 사역 범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들을 확보하였다. 고소진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분황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가로 15줄, 세로 15줄의 바둑판전(42×43㎝, 높이7.8㎝)과 동궁과 월지와 황룡사지 등에서 출토되었던 숟가락의 거푸집이 있다. 그리고 1차 중건 중문지에서 출토된 치미를 통해 전성기 분황사 건물 규모를 가늠 할 수 있다. 특히, 분황사에서는 고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연화문, 보상화문, 당초문, 용문, 비천문 등의 다양한 기와가 출토되어 기와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분황사가 위치한 구황동에는 황룡사지, 황복사지, 미탄사지 등 사찰들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황룡사를 제외하고는 그 창건과 존속시기가 명확하게 알져지지 않았으나, 분황사와 공존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찰은 유일하게 분황사뿐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또한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존재가 한국 역사에서 유일무이 하듯이, 분황사 역시 신라 최초의 품자형 일탑삼금식 가람양식과 모전석탑을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9년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는 사적 548호로 지정되었다.‘삼국유사’ 권1 기이편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에 나오듯 자신의 죽는 날까지도 미리 예측할 정도인 선덕여왕은 자신의 염원을 담아 분황사를 세웠으며, 그의 염원은 최초의 여왕인 자신이 신라와 이 땅에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 것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2021-09-13

월성 동쪽에 황룡사는 어떻게 지어졌나?

고려시대 시인 김극기는 시 ‘황룡사(皇龍寺)’에 ‘층층이 사다리 휘감아 하늘로 오르려하니 주변의 온갖 산수들 한눈에 들어오네...(생략)... 동도를 굽어보니 수많은 집들 벌집이나 개미구멍인양 더욱 아득하네’라고 표현하였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 구층목탑을 의미할텐데 구층목탑을 올라갈수 있는 사다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뒤로하고 얼마나 높았으면 집이 벌집이나 개미구멍처럼 보였을까 하고 궁금해진다. 신라 경문왕 12년(872년)에 황룡사 목탑을 중수하면서 심초석 사리공 사리내함에 새긴 기록 찰주본기(刹柱本記)에는 ‘(탑의) 철반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자이다’라고 하는데 지금의 기준으로 환산하자면 약 80m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구층목탑의 규모만 보더라도 황룡사는 신라사찰의 가장 큰 규모의 국가사찰이자, 호국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553년부터 고려 고종 1238년 폐사되기 전까지 약 680년 동안 이어진 호국사찰이었다. 단일 사찰이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몇백 년 동안 명맥을 이어져오기란 쉽지 않다. 황룡사가 오랫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 비결의 실마리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닐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 어떤 사찰보다 황룡사에 대한 창건부터 중수, 폐사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국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리라.창건과 관련된 기록에는 “553년 2월 진흥왕이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고자 했으나 황룡(黃龍)이 나타나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여 사찰을 짓고 황룡사(皇龍寺)로 했다”는 것이다. 즉, 원래 황룡사가 자리한 곳은 궁궐을 짓기 위함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찰로 사업변경이 이루어진 것이다.황룡사는 국가의 계획하에 국가 주도로 건립된 국찰이었고, 당시 불교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사찰로 백고좌회(百高座會·국가적 행사로 개최된 큰 법회), 연등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담당한 곳이기도 했다. 진흥왕의 염원을 품고 건립된 이후 안타까운 폐사를 맞이하기까지 신라인의 마음속에 황룡사는 단순히 종교적 의미의 사찰뿐 아니라 신라인들의 정신이 투영된 곳으로 고려시대로 왕조가 바뀌었어도 사찰이 갖는 의미는 쉽사리 사라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황룡사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불탔을 때 당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지.그렇다면 황룡사는 지금의 자리에 어떻게 건립되었을까? 지금의 황룡사는 위엄 있었을 건물지와 함께 금당에 자리 잡고 있었을 장육존상 그리고 구층목탑의 웅장함은 볼 수 없지만 큰 주춧돌과 대석을 통해 옛 황룡사의 전성기를 짐작할 수 있다. 발굴조사 결과를 통해 황룡사의 면적은 약 8만㎡ 이상으로 확인되었는데 면적만 보더라도 당시 황룡사가 얼마나 거대했을지는 상상이상일 것 같다. 그런 황룡사가 세워지기까지 단순히 건물을 짓기 위해서만 많은 공력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즉, 황룡사가 들어서기 위한 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수많은 인력과 재료 그리고 시간을 쏟아낸 대공사는 불가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1976~1983년 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황룡사가 들어선 일대는 본래 저습지였음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즉, 군데군데 늪지처럼 물이 고여 있어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버리진 땅을 당시 사람들은 흙과 돌을 날라 채워가며 지금의 황룡사 부지를 조성하였다. 이를 황룡사 ‘대지조성층’이라 부르는데 성토된 깊이가 2m가 넘는 곳도 있다. 조성방법 또한 주목 할 만하다. 건물을 세울 때는 건물지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기반을 다지는데 주변의 흙을 깎아 평탄화 시키거나 부족한 흙은 가져와 기초를 다진다. 황룡사는 습지였기 때문에 군데군데 웅덩이처럼 모여있는 물 위로 돌과 흙을 부어 성토하였다. 성토 방법은 다양하지만 황룡사는 주로 비스듬하게 경사지도록 흙을 부어 점차적으로 대지를 넓히는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의 경우 경사성토된 곳을 다시 굴착한 후 수평으로 다시 흙을 반복하여 판축하여 건물을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정여선 학예연구사 이런 방식으로 황룡사는 건물지의 중요성과 규모에 따라 성토된 흙을 되파기 하여 다시 채우거나 경사로 성토된 위에 건물을 건립하였다. 또한, 회색니질의 습지층 위에는 솟아올라오는 물을 다스리기 위함인지 자갈이나 사람 머리만한 돌을 깔거나 채운양상이 확인되기도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당시 기계의 힘을 빌려 대지를 조성한것도 아니었을텐데 그 거대한 면적을 오롯이 인간의 힘으로 완성했다는 것에 놀라울 뿐이다.지금도 황룡사를 가보면 금당지, 목탑지, 중문지 등 주요 건물지는 주변보다 높게 주춧돌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큰 주춧돌을 통해 그 위에 기둥과 지붕의 규모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 아래 습지를 메우고 건물을 세운 많은 신라시대 사람들의 노력이 스며있음을 기억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1-09-06

불교로 문화 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다

김동하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5세기 신라는 도시 중심에 적석목곽분이라는 큰 무덤을 축조했다. 무덤의 주인공은 최상위 지배층인 마립간(王)과 권력자로 추정한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 허리띠, 귀걸이, 목걸이 등의 금제품이 다량 발굴되었으며, 각종 마구류와 토기가 출토되었다.신라는 가야를 비롯해 주변의 작은 소국을 병합하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다. 경주지역의 대형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금제공예품이 현재의 대구, 경산, 창녕 등에서 발굴되고, 경주 양식 토기가 인근 지역에서도 출토된 사실은 신라의 영향력이 주변지역까지 넓게 미친 것을 알려준다.신라는 국가의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를 차근차근 갖추어 나갔고, 비로소 법흥왕(재위 514~540) 때 율령을 만들고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명실공히 중앙집권국가로 성장·발전한다. 신라 왕경의 중심부에는 도시계획이 새롭게 수립되어,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와 같은 왕실의 큰 사찰이 들어선다.이 무렵부터 신라에는 다양한 문화적 변화가 나타난다. 무덤은 앞 시기와 달리 경주 분지 밖에 입지하고, 그 구조는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바뀐다. 무덤의 구조가 교체되면서 규모도 축소되고, 무덤에 들어가는 부장품도 매우 간소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대신 왕경 중심에 축조된 사찰에는 황금의 불상과 화려한 장식의 불교 의례용품이 가득하고, 사찰 내에서는 각종 생활용기가 제작·사용되었을 것이다. 마립간 시기 각종 부장품을 위해 사용했던 황금은 이젠, 불상과 사찰을 장엄하는데 소비되었다. 다양한 문양의 와전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 와전(瓦塼)은 사찰 건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조영된 사찰에는 다수의 승려가 생활을 하며, 때로는 나라를 위해 때로는 왕실과 개인을 위해 불사가 이뤄졌다.7세기에 이르러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왕위를 계승했고, 불교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마련한다. 높이 80미터에 달하는 황룡사 구층목탑은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신라 최고의 건축물이자,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신라인의 원대한 꿈을 반영한 것이다.삼국 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백제(660년 멸망)와 고구려(668년 멸망)를 병합하고,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호국불교를 바탕으로 한 신라인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삼한일통의 위업(676년)을 달성한 신라는 안정된 국가 기반을 바탕으로 최고의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는 황금시기를 맞이한다. 경덕왕(재위 742-765) 때 세워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불교의 이상향과 종교적 숭고함을 담아 완성된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다.이는 동아시아 불교 문화권 속에서 신라불교문화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다. 또한 이 시기 신라에서는 비단길과 바닷길 등을 통해 중국, 일본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신라의 독창적인 문화는 발전·성장하게 된다. 178,936호의 왕경인(王京人·왕이 살고 있는 수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신라 수도 경주는 1,360방과 55리의 행정 단위로 구성된 계획도시였다. 또한 왕경에는 35개의 화려한 금입택(金入宅·귀족이 살던 저택)도 마련되어 있었다.신라 수도 경주는 더 이상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세계 문화 교류의 거점이었던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더불어 국제적 도시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허브로 충실히 자리 잡았던 것이다.경주는 역사와 문화의 길을 따라 주변 나라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며 발전해 왔다. 신라 천 년, 그리고 또 다시 천 년을 보낸 오늘날의 경주에는 우리의 탁월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다. 경주 분지 내에 위치한 거대한 왕릉,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과 동궁, 그리고 황룡사, 감은사, 불국사 등 경주 전역에 위치한 절터와 남산의 불교 유적…. 하지만 경주는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그것은 바로 천 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온 경주 사람의 문화적 동질성과 역사성이다. 경주 사람에게 언제부터 경주에 살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자연스레 선조 대대로 살아왔다고 답한다. 그 선조는 바로 천 년 전의 신라인이자 왕경인이다.이것은 신라의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경주’와 끊임없이 이어져 소통하고 있다는 어엿한 증거이다. 천 년의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부단히 그 정신과 문물을 지켜온 경주는 오늘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공간이며, 유구하고 위대한 역사의 현장이다.

2021-08-30

장보고와 재당신라인

오늘날 해외여행이나 이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근대시대에는 한 국가 안에서 자신이 사는 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의 통제와 불편한 교통수단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 오고가거나 심지어 정착하는 일까지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장보고와 재당신라인들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다른 나라로 건너간 이유와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사람들의 이동 또는 이주는 흔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성립 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과 현지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동이나 이주는 보편적인 사건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국가 체제가 본격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하면 많이 줄어든다. 즉 세금 징수나 노동력이나 병력 동원 등을 위해 인원을 파악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신라인들이 해외로 이주한 사례는 6세기 말부터 등장한다. 587년 귀족의 아들인 대세(大世)와 그의 친구인 구칠(仇柒)이 서쪽 나라로 가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은 뜻(西遊之志)을 품고 떠났다고 하며, 621년에는 설계두(薛7F7D頭)가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고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기도 했다.이에 신라인들의 이주는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개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816년에 기근이 들자 중국으로 가서 식량을 구한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신라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신라를 떠난 사람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당의 등주(登州), 초주(楚州), 양주(揚州)였는데, 이곳은 오늘날 산둥성(山東省)과 장쑤성(江蘇省) 일대로 비교적 한반도와 가까웠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은 당에 건너간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이었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해외에 있는 코리아타운 정도가 될 것이다.당에 정착한 신라인들은 당의 지방통치자인 절도사의 관리가 되거나 신라 및 일본과의 무역 등에 종사했다. 특히 일본 스님인 엔닌(圓仁)이 838년~847년 사이 당에 유학왔던 일을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인들이 각종 편의를 베풀어 주고, 입·출국 관련 일을 대신 처리하거나 심지어 그가 귀국할 때 항로를 정하고 배를 운항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신라인들이 당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현지 사정에 밝았으며 바닷길에 익숙했기 때문이다.사실 이들이 당에 정착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670년대 이후 벌어진 당의 정치적 혼란과 755년에 발발한 안록산의 난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국경 밖의 이민족을 통제하던 절도사가 반란 진압 과정에서 획득한 지방 행정 및 군사에 대한 권한을 이용해 자신들의 통치 구역인 번진(藩鎭)을 만들어 중앙정부와 대립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방 통치에 대한 재량권을 확보했다. 즉 절도사가 지방에 있었던 이민족을 통제하게 된 것이다.또한 부여받은 재량권을 통해 그들 가운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이 있었던 소위 유력자(有力者) 또는 유지(有志)를 절도사가 등용하여 이민족에 대한 통제를 맡겼던 것이다. 즉 변형된 이이제이(以夷制夷 :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당 중앙정부의 의지보다 안록산의 난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던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제도화되었다.장보고가 당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당이 이민족이나 그들의 문화를 잘 받아들였던 경향과 관계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당의 국력 약화와 함께 이민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졌던 상황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는 당시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혼란한 상황이었으며, 호족이라는 불리는 세력이 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이 무렵 서해는 주인이 없는 바다였다. 신라와 당 어느 나라도 서해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장보고는 바다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그런데 해적들은 이 바다에서 무역을 방해하고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비를 삼는 일을 저질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들을 퇴치한 것은 바다를 둘러싸고 다투던 경쟁자를 제거한 것이 아닐까?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얻기 위해 백성이나 국민을 위한 다는 명분을 내건 자들이 많았다. 장보고도 해적에 시달리는 신라인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신라와 당 어느 나라의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 서해를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여 한 것일지도 모른다.장보고는 당의 황제, 신라의 왕 그리고 서해의 주인공인 자신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장보고를 비롯해 재당신라인들이 서해를 배경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느 권력도 미치지 못한 9세기 바다라는 특수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21-08-23

신라의 여왕들

신라 역사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여왕의 출현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주목해볼만한 대상이다. 여왕과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신라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념으로 예전의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신라시대에 여왕이 나타날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널리 알고 있듯이 신라시대에 여왕은 모두 3명이 있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각각 신라 27대와 28대 그리고 진성여왕은 51대 왕으로 시기적으로 삼국통일 직전과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신라왕들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없는 것은 성골(聖骨) 개념이다. 그런데 성골이 제1대 박혁거세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 모든 왕을 가리킨다는 일제강점기 이래의 학설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과 그의 일족이 신성한 혈통을 지닌 특수한 집단이었음을 과시한 관념으로 보고 있다. 즉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고 그의 아내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인데 이러한 이름은 석가모니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과 같다.당시 불교를 숭상하던 신라 왕실의 혈통을 석가모니 가계와 견주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당연히 석가모니와 같은 존재가 되는데 불행하게도 아들은 없고, 덕만(德曼)이라는 딸만 있었다. 신라 왕실의 혈통을 석가모니 가계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그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진평왕이 죽기 2년 전에 귀족들이 반란을 꾀했지만 이를 진압하고 구족(九族)이라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죽였다는 점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엄청난 대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54년이라는 진평왕의 재위기간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딸인 덕만도 즉위 당시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그녀가 왕위에 오른 직후 성조황고(聖祖皇姑·성스러운 여자 임금)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선덕여왕의 왕위계승은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고령(高齡)의 나이라는 불안정한 요소를 품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즉위는 불만을 가지고 있던 세력과 타협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것은 막지 않는 대신 정치에 대한 실권은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덕여왕대에는 관청이나 관리의 새로운 설치나 증원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절을 짓거나 법회를 연 기록은 많이 등장하는데 바로 선덕여왕이 정치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보기도 한다.647년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무렵 선덕여왕은 죽었거나 살아 있었더라도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勝曼)이 즉위했는데 곧 진덕여왕이다. 그런데 비담이 한 말은 보기에 따라서 선덕여왕의 치세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왕위에 오르기로 결정된 승만의 치세를 예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어찌되었건 진덕여왕은 반란과 진압 그리고 즉위라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선덕여왕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한 김춘추 일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여왕이 자신만의 정치를 펼칠 수 없었다.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한편 진성여왕은 48대 경문왕의 딸이다. 경문왕 이후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순으로 왕위에 오르는데 이들은 모두 경문왕의 소생으로 형제나 남매지간이었다. 헌강왕의 재위기간이 12년으로 그의 아들이 있었지만 어렸으므로 동생인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정강왕도 2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진성여왕의 즉위는 겉으로 보면 형제들의 연이은 사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 경문왕의 장인인 헌안왕이 남긴 유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라고 했다. 헌안왕이 죽은 시점이 861년이므로 9세기 후반에는 여왕이 부정적인 의미로 여겨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재위 11년(897년), 그녀가 죽기 직전 당에 보낸 글에는 오빠 헌강왕의 아들이 15세가 되었고, 정치를 임시로 맡겼다고 하였다. 이에 진성여왕의 치세는 자신의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임시로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선덕, 진덕, 진성 등 3명의 여왕은 즉위를 전후한 정치적 상황에서 일어난 대립이나 타협의 산물이었다. 정치적인 고려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성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관직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라의 여왕들이 등장한 배경을 논의할 때 오늘날의 관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2021-08-16

문(文)과 무(武), 두 개의 시호를 얻은 문무왕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죽은 뒤에 얻었던 시호(諡號)는 문무(文武)인데 대부분 문이나 무 하나만 붙인다. 특히 이러한 시호는 나라를 새로 세우거나 그 기틀을 다진 사람에게 올린다는 점에서 특별한 칭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칭호가 문무왕에게는 두 글자가 붙여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 글에서는 7세기 무렵 당시 신라의 상황과 문무왕의 삶을 살펴보고, 그가 특별한 의미의 시호를 두 개나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문무왕의 생전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아들이자 김유신(金庾信)의 조카였다. 그는 626년(진평왕 48년)에 태어났는데 이 시점을 전후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고,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는 등 어수선했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642년에는 백제가 신라의 남쪽 거점인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때 그의 여동생인 고타소(古9641炤)가 백제군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훗날 660년에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당시 태자였던 법민은 의자왕의 아들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여동생의 죽음이 20년 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골치를 앓게 하였다고 말한다.법민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등장하지 않는다. 647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을 김유신이 진압한 이후 그의 아버지인 김춘추가 신라의 권력자로 떠오르면서 그의 활동이 다시 드러난다. 650년(진덕왕 4년)에 신라가 당에 보낸 사신이 바로 법민이었는데 당시 황제였던 고종을 만나고 귀국하였다. 또한 654년에 그의 아버지인 김춘추가 즉위하자 병부령(兵部令)이 되었고,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는 전쟁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정치나 외교 그리고 전쟁 경험을 쌓았고, 이러한 경험은 백제 부흥 운동과 고구려 멸망 그리고 나당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660년에 법민은 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당시는 백제가 멸망하고, 그 부흥을 외친 백제 유민들이 활동하던 때였다. 또한 옛 백제 땅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 사이에 갈등이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즉 신라는 옛 백제 땅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했으며, 당은 그 땅에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그 우두머리로 삼았다. 또한 당은 문무왕과 멸망한 부여융을 만나게 하고 서로 화친하도록 강요했다. 신라의 시각에서 볼 때 백제라는 불씨가 꺼지지 않았으며 언제든 당을 등에 업고 되살아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여융과 화친하라는 당의 요구에 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결국에는 옛 백제 땅을 전부 차지한다. 즉 당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명분을 챙기면서 옛 백제 땅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는 실리를 추구한 것이다.문무왕의 양면적인 모습은 나당전쟁 기간 중에 확실하게 드러난다. 나당전쟁의 정확한 시작 시기는 논란이 있지만 대략 670년을 전후한 무렵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신라가 압록강 유역에 있던 당의 거점을 공격한 시점은 토번과 당이 대규모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고 한다. 즉 한반도에 있던 당의 군사가 토번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서 당을 선제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672년에 당과 토번이 화친하면서 동쪽으로 군사력을 집중하여 신라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때 문무왕은 재빨리 사신을 보내서 당에게 사죄하면서 공격을 멈추게 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월지로 알려진 연못을 만든 시점도 674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때는 당과 토번이 다시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시점이기도 하다. 전쟁 도중에 뜬금없이 왕궁을 꾸미는 여유를 부린 것은 문무왕이 당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여기에는 그가 당에 사신으로 갔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전경효​​​​​​​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676년 이후 신라와 당 사이에 전쟁은 더 이상 없었지만 곧바로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나당전쟁 기간은 물론 신문왕대까지 계속된 중앙 군부대의 신규 창설은 전쟁의 위협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통일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과제가 문무왕에게 주어졌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5년 뒤인 681년 7월에 문무왕이 죽으면서 남긴 말이 있는데, 그 첫머리에서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면서 ‘신과 인간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만하다’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후손들 모두 공감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그의 직계 후손들이 더 이상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하고 다른 김씨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할 때에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은 대대로 종묘에 모시는 조상으로 여겨졌다. 즉 그의 업적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던 것이다. 그만큼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나당전쟁이라는 사건은 신라인들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중심에는 바로 김법민, 문무왕이 있었다. 이처럼 문(文)과 무(武)라는 칭호에는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와 군사력을 통해 신라를 구한 신라인들의 문무왕에 대한 평가가 반영되어 있다.

2021-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