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해외여행이나 이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근대시대에는 한 국가 안에서 자신이 사는 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의 통제와 불편한 교통수단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 오고가거나 심지어 정착하는 일까지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장보고와 재당신라인들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다른 나라로 건너간 이유와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의 이동 또는 이주는 흔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성립 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과 현지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동이나 이주는 보편적인 사건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국가 체제가 본격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하면 많이 줄어든다. 즉 세금 징수나 노동력이나 병력 동원 등을 위해 인원을 파악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이 해외로 이주한 사례는 6세기 말부터 등장한다. 587년 귀족의 아들인 대세(大世)와 그의 친구인 구칠(仇柒)이 서쪽 나라로 가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은 뜻(西遊之志)을 품고 떠났다고 하며, 621년에는 설계두(薛<7F7D>頭)가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고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인들의 이주는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개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816년에 기근이 들자 중국으로 가서 식량을 구한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신라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를 떠난 사람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당의 등주(登州), 초주(楚州), 양주(揚州)였는데, 이곳은 오늘날 산둥성(山東省)과 장쑤성(江蘇省) 일대로 비교적 한반도와 가까웠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은 당에 건너간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이었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해외에 있는 코리아타운 정도가 될 것이다.
당에 정착한 신라인들은 당의 지방통치자인 절도사의 관리가 되거나 신라 및 일본과의 무역 등에 종사했다. 특히 일본 스님인 엔닌(圓仁)이 838년~847년 사이 당에 유학왔던 일을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인들이 각종 편의를 베풀어 주고, 입·출국 관련 일을 대신 처리하거나 심지어 그가 귀국할 때 항로를 정하고 배를 운항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신라인들이 당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현지 사정에 밝았으며 바닷길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당에 정착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670년대 이후 벌어진 당의 정치적 혼란과 755년에 발발한 안록산의 난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국경 밖의 이민족을 통제하던 절도사가 반란 진압 과정에서 획득한 지방 행정 및 군사에 대한 권한을 이용해 자신들의 통치 구역인 번진(藩鎭)을 만들어 중앙정부와 대립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방 통치에 대한 재량권을 확보했다. 즉 절도사가 지방에 있었던 이민족을 통제하게 된 것이다.
또한 부여받은 재량권을 통해 그들 가운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이 있었던 소위 유력자(有力者) 또는 유지(有志)를 절도사가 등용하여 이민족에 대한 통제를 맡겼던 것이다. 즉 변형된 이이제이(以夷制夷 :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당 중앙정부의 의지보다 안록산의 난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던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제도화되었다.
장보고가 당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당이 이민족이나 그들의 문화를 잘 받아들였던 경향과 관계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당의 국력 약화와 함께 이민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졌던 상황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는 당시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혼란한 상황이었으며, 호족이라는 불리는 세력이 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이 무렵 서해는 주인이 없는 바다였다. 신라와 당 어느 나라도 서해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장보고는 바다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그런데 해적들은 이 바다에서 무역을 방해하고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비를 삼는 일을 저질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들을 퇴치한 것은 바다를 둘러싸고 다투던 경쟁자를 제거한 것이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얻기 위해 백성이나 국민을 위한 다는 명분을 내건 자들이 많았다. 장보고도 해적에 시달리는 신라인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신라와 당 어느 나라의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 서해를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여 한 것일지도 모른다.
장보고는 당의 황제, 신라의 왕 그리고 서해의 주인공인 자신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장보고를 비롯해 재당신라인들이 서해를 배경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느 권력도 미치지 못한 9세기 바다라는 특수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