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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발굴조사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록일 2021-11-01 19:41 게재일 2021-11-0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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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된 황룡사지의 모습.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공사를 시작해 30년(569)에 경역을 마련하고 1차 가람을 완료했다. 진흥왕 35년(574)에 약 5m 이르는 장육존상을 비롯해 금동삼존상을 조성했고, 진평왕 6년(584)에는 이 불상을 모셔두기 위한 금당을 새롭게 건립했다. 선덕여왕 12년(643)엔 자장스님의 건의로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조성하고자 했다. 목탑을 조성하기 위해 백제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하고, 이간 김용춘은 장인 200명을 인솔해 착공 3년만인 선덕여왕14년(645) 구층목탑을 완공했다. 구층목탑은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높이가 약 80m 정도다. 바닥의 면적이 약 150평이고 기단 한 변의 길이가 약 22.2m로 당대 왕경 내 최고 높이의 건축물이었다. 이렇게 황룡사는 신라 4대왕(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을 거쳐 93년 걸린 대역사를 통해 국찰로서 그 면모를 갖추게 된다.

사적 제6호인 황룡사 터는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황룡사지를 비롯해 신라시대 절터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구황동(九黃洞)’ 이라는 명칭도 ‘皇(黃)’자가 들어가는 사찰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1238년 몽골군에 의해 황룡사는 소실되었고, 이후 7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유허(遺墟)만 남고 그 터는 민가의 대지나 전답(田畓) 등으로 변모했다. 발굴조사 이전 황룡사 터에는 구황마을이 있었다. 조사 직전 촬영된 사진을 보면 목탑과 중문지 근처에 가가호호 들어선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제법 규모가 큰 돌담장도 눈에 들어온다.

황룡사 터는 1971년 11월 수립된 ‘경주관관종합개발계획’을 일환으로 1976년 4월 발굴조사가 착수된다. 사역 내 마을을 이루고 있는 민가 100여호를 철거하고, 연차적으로 56,700여 평의 주변 토지를 매입해 최초 3차년 계획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1983년 11월까지 8차년 사업으로 발굴조사는 마무리 됐다. 8년간의 조사 기간 동안 현장 작업일수만 2,000일에 가까우며, 발굴 현장에 동원된 연인원은 무려 78,000여 명에 달한다. 발굴조사 결과 25,000여 평에 이르는 황룡사 경역의 범위와 1탑 3금당식의 가람배치가 새롭게 밝혀졌다. 또한 금당, 목탑을 비롯해, 중문, 강당, 회랑, 종루, 경루 등의 사찰 내 중요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은 와전류, 용기류, 불상류, 금속유물 등 총 45,000여 점으로 대부분 신라와 고려시대 만든 것이다. 특히 강당지 북편에서 발굴된 치미 파편들은 모두 수습되어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약 180㎝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큰 치미로 알려져 있다.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우리나라 고대 사찰 연구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황룡사지 발굴 중 드러난 유구와 출토된 유물은 모두 기록으로 남겨져 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자료로 관리되고 있다. 먼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 학술적·역사적 중요도가 높은 유물은 국가에 귀속시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국가귀속대장은 6권이며, 여기에 수록된 국가귀속문화재는 모두 45,656점이다. 발굴조사 중 중요한 유구나 유물이 발굴되면 즉각 사진촬영을 한다. 발굴 당시는 모두 필름사진이었기 때문에 사진 한 컷이 매우 중요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황룡사지 발굴 관련 필름은 슬라이드필름, 흑백필름, 칼라필름 등 3종류. 슬라이드필름 24,934컷, 흑백필름 51,859컷, 칼라필름 1,983컷 등 모두 합해 78,776컷을 연구소에서 현재 보관 중이다. 유구나 유물을 실측한 도면은 2,845장, 그 외 발굴조사기록카드(589장), 유물분류카드(7,182장), 유물카드(2,144장), 유물조사카드(3,999장), 유물처리기록카드(4,784장) 등도 함께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황룡사지 발굴이 남긴 또 다른 역사이자 기록인데, 최근 연구소에서는 이 자료들을 모두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김동하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김동하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장기간 이뤄진 사업이었다. 예상치 못한 유구들이 발굴에서 확인돼 조사 자체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지만, 실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그 넓은 경역 전체를 꾸준히 발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황룡사처럼 경역 전체를 발굴한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1971년 11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정부에서 발표되고, 그 일환으로 경주지역 내 많은 유적의 정화사업이 착수된다. 이에 1973년 3월 문화재관리국은 ‘경주미추왕릉지구발굴조사단(이하 왕릉조사단)’을 임시로 구성하고, 대릉원 내 천마총, 황남대총 등을 발굴한다. 이후 1975년 10월 경주지역 유적 발굴조사의 지속성을 위해 기존 왕릉조사단을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으로 개편한다. 당시 부족한 예산과 인력에도 불구하고 경주 안압지, 황룡사지, 월성해자, 신라왕경 등의 대형발굴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경주 유적 발굴조사를 전담할 수 있는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단은 1990년 1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기관 ‘경주문화재연구소’로 정식 인가됐고, 이후 200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한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에 왜곡되었던 황룡사의 가람배치가 1970년대 우리의 발굴기술로 명확하게 밝혀졌다는 점에서 자부와 긍지를 가질 수 있다.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사단원들이 흘린 땀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나라 초창기 문화재 발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 시작점에 경주 황룡사지 발굴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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