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죽은 뒤에 얻었던 시호(諡號)는 문무(文武)인데 대부분 문이나 무 하나만 붙인다. 특히 이러한 시호는 나라를 새로 세우거나 그 기틀을 다진 사람에게 올린다는 점에서 특별한 칭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칭호가 문무왕에게는 두 글자가 붙여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 글에서는 7세기 무렵 당시 신라의 상황과 문무왕의 삶을 살펴보고, 그가 특별한 의미의 시호를 두 개나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문무왕의 생전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아들이자 김유신(金庾信)의 조카였다. 그는 626년(진평왕 48년)에 태어났는데 이 시점을 전후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고,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는 등 어수선했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642년에는 백제가 신라의 남쪽 거점인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때 그의 여동생인 고타소(古<9641>炤)가 백제군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훗날 660년에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당시 태자였던 법민은 의자왕의 아들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여동생의 죽음이 20년 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골치를 앓게 하였다고 말한다.
법민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등장하지 않는다. 647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을 김유신이 진압한 이후 그의 아버지인 김춘추가 신라의 권력자로 떠오르면서 그의 활동이 다시 드러난다. 650년(진덕왕 4년)에 신라가 당에 보낸 사신이 바로 법민이었는데 당시 황제였던 고종을 만나고 귀국하였다. 또한 654년에 그의 아버지인 김춘추가 즉위하자 병부령(兵部令)이 되었고,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는 전쟁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정치나 외교 그리고 전쟁 경험을 쌓았고, 이러한 경험은 백제 부흥 운동과 고구려 멸망 그리고 나당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660년에 법민은 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당시는 백제가 멸망하고, 그 부흥을 외친 백제 유민들이 활동하던 때였다. 또한 옛 백제 땅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 사이에 갈등이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즉 신라는 옛 백제 땅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했으며, 당은 그 땅에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그 우두머리로 삼았다. 또한 당은 문무왕과 멸망한 부여융을 만나게 하고 서로 화친하도록 강요했다. 신라의 시각에서 볼 때 백제라는 불씨가 꺼지지 않았으며 언제든 당을 등에 업고 되살아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여융과 화친하라는 당의 요구에 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결국에는 옛 백제 땅을 전부 차지한다. 즉 당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명분을 챙기면서 옛 백제 땅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는 실리를 추구한 것이다.
문무왕의 양면적인 모습은 나당전쟁 기간 중에 확실하게 드러난다. 나당전쟁의 정확한 시작 시기는 논란이 있지만 대략 670년을 전후한 무렵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신라가 압록강 유역에 있던 당의 거점을 공격한 시점은 토번과 당이 대규모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고 한다. 즉 한반도에 있던 당의 군사가 토번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서 당을 선제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672년에 당과 토번이 화친하면서 동쪽으로 군사력을 집중하여 신라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때 문무왕은 재빨리 사신을 보내서 당에게 사죄하면서 공격을 멈추게 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월지로 알려진 연못을 만든 시점도 674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때는 당과 토번이 다시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시점이기도 하다. 전쟁 도중에 뜬금없이 왕궁을 꾸미는 여유를 부린 것은 문무왕이 당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여기에는 그가 당에 사신으로 갔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676년 이후 신라와 당 사이에 전쟁은 더 이상 없었지만 곧바로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나당전쟁 기간은 물론 신문왕대까지 계속된 중앙 군부대의 신규 창설은 전쟁의 위협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통일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과제가 문무왕에게 주어졌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5년 뒤인 681년 7월에 문무왕이 죽으면서 남긴 말이 있는데, 그 첫머리에서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면서 ‘신과 인간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만하다’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후손들 모두 공감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그의 직계 후손들이 더 이상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하고 다른 김씨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할 때에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은 대대로 종묘에 모시는 조상으로 여겨졌다. 즉 그의 업적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던 것이다. 그만큼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나당전쟁이라는 사건은 신라인들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중심에는 바로 김법민, 문무왕이 있었다. 이처럼 문(文)과 무(武)라는 칭호에는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와 군사력을 통해 신라를 구한 신라인들의 문무왕에 대한 평가가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