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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라 황금시대의 시작은?

‘황금의 나라’라는 말이 익숙한 경주다.사실 신라 고분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황금으로 만든 금관(金冠) 때문이다. 황금유물은 경주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금으로 만든 유물은 금관, 목걸이, 귀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그릇, 칼장식 등 다양하다.이것들은 사람을 치장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다. 특히 금관(머리장식)은 대형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어서 무덤의 주인공이나 사용된 시기와 관련하여 궁금증을 유발한다.경주 무덤 중에서 금관이 출토된 곳은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북분 등이다. 이들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마립간기(麻立干期)라고 불리는 시대에 만들어지며,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사실 왕만이 금관을 쓴 것은 아니라서 앞서 이야기한 5기의 무덤이 모두 왕의 무덤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또한 금관이 출토되지 않아도 왕릉으로 보는 무덤도 있다. 황남대총 남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황남대총 남분은 북분과 연결되어 황남동에서 가장 큰 무덤이며, 남북 120m, 동서 80m로 초대형분으로 분류된다.남분보다 작은 크기의 무덤인 금관총, 천마총, 서봉총 등에서 금관이 나왔기 때문에, 1975년 7월 1일 발굴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 무덤에서 금관이 나올 것으로 추정했다.그러나 무덤 주인공의 머리에는 금동관(金銅冠)의 흔적만 확인됐을 뿐이다. 그날 아침, 금관이 출토됐다고 금관 사진을 오려 붙여 기사를 쓴 신문기사는 분명한 오보였다.황남대총 남분 발굴 이전까지는 신분이 높아야만 금관을 착용했던 것으로 인식했다. 아니 왕만이 금관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아직도 금관이 왜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물음에는 뚜렷한 답은 없다.주목할 점은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장신구(裝身具)의 조합상이다.머리장식, 가슴걸이,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 등이 하나의 조합으로 모두 출토되는 것과 이 조합에서 하나 혹은 두 개 정도가 빠져 있는 경우만 신라 고분에서 확인된다.전자는 신분이 가장 높은 왕이나 왕족으로 볼 수 있으며, 후자는 차상위 계층이다.이것으로 보면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모든 장신구 조합이 확인되므로 분명히 왕에 버금가는 인물로 볼 수 있다.다시 말해 금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낮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금관은 가장 높은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에 황남대총 남분의 시기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황남대총에서는 금동관(金銅冠)과 은관(銀冠), 은제관모(銀製冠帽), 금제관식(金製冠飾)와 은제관식(銀製冠飾) 등이 확인된다.이들 제품에서는 이전 단계보다 금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으로 보면 금관이 나타난 시기는 금이 신라에 도입된 이후 금의 수량과 금제 세공술의 변화, 장신구류의 활성화와 관련됐을 것이다.즉 금관이 사용되지 않던 시기와 사용되던 시기가 있었으며, 황남대총 남분 이전까지는 금관이 없던 시기로 볼 수 있다.경주 월성로 가-13호묘에서 금으로 만든 그릇이 처음 나타나며, 남분에서는 기형이 다양해진다. 이후 북분과 천마총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신구나 그릇은 부장이 증가하며, 대부분의 금제품은 순금만을 사용하여 제작한다.박형열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결국 신라에서 황금은 황남대총 남분 이후 단계인 북분이 만들어지는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다.황남대총 북분 이후에는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등에서 금관이 출토되고 은제품은 이들 무덤보다 낮은 계층에서 사용하는 비중이 높아진다.이러한 현상은 계층별로 금속 장신구의 재질 차이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왕권의 강화와 장신구류의 발달로 인한 금세공술의 발전을 짐작케 한다.신라에서 황금유물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경주 월성로 가지구 13호묘를 통해 서기 4세기 말경으로 인식된다.이후 황남대총 남분이 조성되던 5세기 전엽에 다양한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점차 금의 비중이 높아지다가 황남대총 북분 단계인 5세기 중엽부터 금관을 비롯한 다양한 금제품이 등장한다.즉, 신라 왕과 귀족의 무덤으로 이용된 돌무지덧널무덤의 최전성기이며, 그 무덤 속에는 황금으로 만든 금관, 가슴걸이,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등 수많은 유물이 묻혀있다.이 시기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황금의 나라’ 이자 가장 화려한 신라가 잠들어 있는 것이다.

2021-03-08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은 어디에서 왔을까?

경주에는 알려진 155기와 더불어 무수히 많은 신라 고분이 시내에 자리하며, 현재까지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무덤의 묘제, 구조, 형태 등이 밝혀졌다.신라의 중심묘제는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있다.이들 적석목곽분이 구조적으로 매우 특이해서 ‘왜? 이 고분을 만들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은 발굴이 처음 이루어진 190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됐다.신라 고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서기 4세기 후엽부터 6세기 전엽까지 집중돼 조성됐다. 이 무덤들의 주인공은 신라의 왕과 왕족, 귀족 등과 같은 지배층으로 집단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신라 고분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라는 의문은 일제강점기 경주지역의 첫 고분 발굴과 함께 시작됐다.발굴을 통해 드러난 신라고분은 흙으로 높게 쌓은 일반적인 고분이 아닌 형태였다. 신라 고분은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고 돌을 겹겹이 쌓아 올린 후 다시 돌 위에 흙을 덮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이다. 처음 발굴한 사람들은 다른 고분과 달리 돌무지로 덮인 적석부를 확인한 이후 고분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발굴을 진행하지 않았다. 신라 고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굴된 1921년 이후이다.1920~1930년대에는 황금유물의 기원과 함께 이 무덤의 기원도 한반도 밖에서 찾기 시작한다.한반도에서 볼 수 없었던 이러한 무덤의 형태는 경주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그 모습이 확인된다. 그리고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이들 중앙아시아 지역 고분이 소개된다. 특히, 카자흐스탄 남부의 ‘제티수’ 지역에 위치한 ‘이식쿠르간’, ‘베스샤티스 쿠르간’, 러시아 남부의 ‘파지릭고분’ 등이 신라 고분과 비교된다.1970년대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은 적석목곽분의 기원에 대한 또 하나의 확신을 낳았다.이전의 발굴에서는 대부분 파괴된 무덤을 조사해 명확하게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의 발굴은 나무곽(덧널)과 돌무지, 흙무더기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무덤형태는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유사성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따라서 적석목곽분의 북방기원설이 대두됐으며, 1990년대 이후 이와 관련된 많은 연구가 진행됐다.그렇다면 신라 고분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것일까?아쉽게도 중앙아시아 지역 무덤과 신라 무덤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출토되는 유물도 다르다. 또 두 지역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단순히 비교하여 설명하기는 어렵다. 2000년대 들어서 경주를 비롯한 울산, 포항, 경산 등지의 발굴조사가 증가하고 자료가 쌓이면서 돌무지덧널무덤의 순차적인 변화가 확인됐다. 그 이후 거리와 시간의 격차가 큰 북방기원설보다 신라에서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자체발전설이 대두됐다.박형열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자체발전설은 목곽묘에서 점차 목곽주위에 사방으로 돌을 쌓는 적석목곽묘로 발전하고 그 이후 적석을 쌓는 범위가 확대돼 목곽 상부에 적석을 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것은 점차 목곽이 지상화되면서 적석목곽분으로 나타난다고 이해한다.그러나 이와 같은 자체발전설은 황남대총과 같은 거대 지상식 무덤과, 그 이전 무덤 또는 주변 무덤과의 연결 관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에 따르면 목곽 주위에만 적석을 한 무덤이 아닌, 황남대총 등 지상화된 상부적석식(上部積石式) 무덤만을 적석목곽분으로 보고, 이 견해를 ‘자체발생설’이라 부르고 있다. 앞서 살펴본 ‘자체발전설’과 더불어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볼 때, 외래(북방)기원설과 다른 ‘자생설’로 설명할 수 있다.2010년대 이후에는 신라 고분이 자체적인 발생과 발전이 함께 이뤄졌을 가능성이 새롭게 논의됐다. 이 의견은 적석목곽분이 계통적으로 지상식(地上式)과 지하식(地下式)으로 분리되고,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과 같은 지상식의 경우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황남리 109호분 3·4곽과 황남동 110호분 등 지하식의 경우 목곽묘에서부터 발전한 것으로 보는 등 계통에 따라 각각 다른 변화상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이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분 발굴이 증가하면서 이 지역 무덤 구조에 대한 다양한 모습이 밝혀지고 있는데, 기존에 알려졌던 무덤의 형태와 구조 등이 신라 무덤과는 다르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신라 적석목곽분은 신라 사람들의 차별화된 사회체계에 따라 만들어낸 독특한 무덤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무덤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아직도 많은 논의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으로 신라의 과거를 밝혀낼 기회일지 모르겠다.

2021-03-01

신라, 적석목곽묘를 쌓다

경주에 한번 쯤 와 본 사람이라면 시내 곳곳에 있는 집채만 한 무덤들을 보았을 것이다.이것들은 신라시대의 무덤들로 기원후 5~6세기대인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쯤 만들어진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라는 무덤이다. 돌을 쌓아 만든 나무 덧널무덤이라는 뜻으로 ‘돌무지 덧널무덤’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에서는 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무덤 양식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중심으로 가장 많이 축조됐고, 경주 주변지역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현재 경주시내에는 대략 50기 정도의 무덤이 있다. 하지만 원래 수 천기 이상의 무덤이 있었으며, 당시의 왕인 마립간(麻立干)과 친족, 귀족들이 묻힌 공간이었기에 오늘날로 보면 현충원과 같은 대규모 공동묘지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라시대 사람들이 살던 지표면이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표면보다 대략 1.5~2m 가량 낮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덤은 봉분이 거의 파괴되었어도 부장품과 무덤 주인공이 묻힌 부분은 지하에 온전히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대릉원 주변 일대의 주택이나 도로 밑에서는 지금도 문화재조사를 통해 많은 무덤들이 확인되고 있다.적석목곽묘는 무덤 주인공과 부장품을 넣는 목곽(木槨·나무 덧널)이 있고 그 주변으로 적석(積石·돌무지)을 한 다음,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구조이다. 봉분의 가장자리에는 돌담처럼 쌓아 만든 호석(護石·둘레돌)도 설치돼 있다. 이러한 적석목곽묘는 봉분의 규모에 따라 지름이 10m정도의 소형에서부터 약80m에 이르는 초대형 무덤도 있다.특히 봉황대(鳳凰臺)라는 무덤은 현재의 규모가 지름 약80m, 높이 약20m정도로 한국에서 단일 고분으로는 가장 크다.적석목곽묘는 규모에 따라 내부구조가 조금씩 다르지만 축조방법과 순서는 일정하다. 먼저,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파고 그 안을 강돌과 자갈로 채운다. 그 위에 목곽(木槨·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하는 공간)을 설치하는데, 무덤의 규모가 커지면 목곽을 이중(二重)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다음 목곽 주변으로 사람 머리 크기의 강돌로 쌓아 적석부(積石部)를 만든다. 이때 사용된 돌은 평균적으로 7~8kg 정도이며, 사용된 돌의 개수는 무덤 크기에 따라 수천 개에서 수십만 개에 이른다.봉분 지름이 30m 이상인 중대형급 무덤들은 적석을 쌓기 전에 목조가구시설(木造架構施設)을 설치한다. 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통나무기둥을 세우고 가로로도 통나무를 연결해 만든 구조물이다. 마치 어린이 놀이기구인 정글짐과 같은 형태인데, 적석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뼈대시설이다. 이렇게 적석과 목곽을 설치하고 나면 목곽 안에 주인공과 함께 부장유물을 넣는다. 유물은 토기(土器), 마구(馬具·말을 부리거나 장식하기 위한 물건), 무기(武器), 농공구(農工具), 장신구(裝身具) 등 다양하게 들어간다.처음에는 무덤 주인공이 들어가는 주곽(主槨) 외에 주인공의 발쪽에도 별도 부곽(副槨)을 만들어 유물을 따로 부장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곽은 사라지고 주곽 내에만 유물을 부장하게 된다.주인공은 주곽 한 가운데에 동서방향으로 안치하는데, 머리 방향을 동쪽으로 두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다. 주인공을 안치할 때는 목관(木棺)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관 없이 그대로 안치한 경우도 있다.이렇게 매장이 완전히 완료되면 목곽 뚜껑을 닫고 그 위로 다시 얇게 강돌을 깐다. 그런 다음 점토(粘土)를 덮어 목곽 상부를 완전히 밀봉한다. 마지막으로는 목곽과 적석 위로 봉긋한 봉토를 쌓아 올려 무덤 축조를 완료한다. 이때, 봉분의 지름과 높이의 비율은 4:1정도가 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적석목곽묘를 위에서보면 원형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모두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무덤이다. 타원형은 원형과 달리 초점(焦點)이라고 하는 2개의 점을 이용하여 그려진다. 적석목곽묘에서는 무덤 구덩이(墓壙)의 동서방향(긴 방향) 양 끝점이나 적석부의 양 끝점을 초점으로 하여 타원형인 봉분을 설계했다.이렇게 정밀하게 계산된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다 보니 목곽과 봉분의 긴 축 방향이 완전히 일치하게 되고, 이를 이용하면 봉분의 호석만 있더라도 목곽의 크기와 위치를 추정할 수도 있다.심현철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러한 봉분 설계방식 역시 신라 적석목곽묘 특유의 것이다. 기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고대에 신라인들이 타원이나 이와 관련된 수학 이론을 완벽히 습득하고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다만, 동아시아에서도 수학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중국에서 조차 타원과 같은 기하학이 알려진 시점은 중세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이후이기 때문에 신라고분에 반영된 이 같은 내용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고고학 연구자들에 의해 신라 고유 무덤인 적석목곽묘의 구조와 축조방법, 축조기술 등에 대한 많은 내용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무덤에 사용된 수많은 돌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운반해왔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 어떤 방식으로 쌓고 유지했는지 다 알아내지 못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미래의 고고학자가 나타나 적석목곽묘가 가지고 있는 많은 미스터리를 풀어줬으면 한다.

2021-02-22

경주 쪽샘 유적과 목곽묘

경주 쪽샘 신라고분 유적은 4~6세기 신라 왕경인들의 집단 무덤 유적이다. 쪽샘 유적은 본래 사적 제512호로 지정된 대릉원(大陵園)과 한 묘역(墓域)에 속하는 곳으로 신라 마립간(麻立干) 시기 집중적으로 축조된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또한 적석목곽묘 외에도 쪽샘 유적에는 목곽묘(덧널무덤), 석곽묘(돌덧널무덤), 옹관묘(독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신라 무덤들이 빼곡하게 조성됐음이 밝혀져 신라 고분 연구에 있어 핵심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쪽샘 유적은 지리적으로 신라 궁성(宮城)으로 알려진 월성(月城) 북편에 자리하고 있어 신라 왕경 내 고분군의 형성과 전개, 나아가 신라 왕경 경관 복원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쪽샘 유적에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다양한 형태의 신라 무덤들이 축조됐다. 특히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무덤이 바로 ‘목곽묘’이다. 목곽묘는 일반적으로 무덤 묘광을 파낸 뒤 그 내부에 나무로 제작한 곽(槨)을 설치해 무덤주인과 부장품을 함께 묻은 무덤을 말한다. 목곽묘는 영남지역에서 2세기 후반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4세기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다. 한편 몇몇 목곽묘들은 입지의 우월성, 규모의 대형화, 부장품의 대량 매납이 이뤄져 지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목곽묘는 고대 사회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복잡화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 중 하나로 현재 활용되고 있다.이와 같은 목곽묘의 고고학적 특성을 토대로 우리는 신라의 중심 즉 경주에서 ‘사로국’이 어떻게 성장하고 궁극적으로 ‘신라’라는 국가로 발전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경주지역에서는 구정동, 구어리, 덕천리, 황성동 등의 ‘주변’ 유적에서 다수의 목곽묘가 발견돼 보고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라의 ‘중심’ 고분군이 확실한 대릉원과 쪽샘 유적 일대에서는 3~4세기대 목곽묘군이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이러한 자료의 한계는 앞에서 설명한 사로국의 발전과 신라 국가형성 연구에 있어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그런데 최근 쪽샘 유적에서 4세기에 해당하는 대형 목곽묘가 새롭게 발견돼 사로국의 발전과 신라 국가형성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쪽샘 L17호로 이름 지어진 이 목곽묘는 전체 묘광 면적이 약 35㎡로 지금까지 경주지역에서 발견된 목곽묘 중 가장 큰 규모다. 또한 더 많은 부장품을 넣기 위해 주곽(으뜸 덧널)과 부곽(딸린 덧널)을 각각 다른 구덩이에 조성한 이혈주부곽식(異穴主部槨) 구조로 축조됐다. 이러한 이혈주부곽식 구조는 김해 대성동 유적과 부산 복천동 유적에서 발견되는 대형 목곽묘와 동일한 모습으로 4세기대 경주지역에서도 김해, 부산과 마찬가지로 최고 지배층의 묘제로 이혈주부곽식 목곽묘가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정대홍학예연구사한편 쪽샘 L17호 목곽묘는 후대 건축 등으로 인해 주곽과 부곽이 크게 파괴됐음에도 불구하고 ‘중원식 허리띠 장식’, ‘초기 마구류’, ‘다량의 고식 도질토기’ 등이 발견돼 4세기대 경주지역 대형 목곽묘와 부장품 연구에 있어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중원식 허리띠 장식은 경주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로 주곽 서쪽 공간에서 크게 2개의 편으로 출토됐다. 이 유물은 허리띠의 장식판과 드리게에 용무늬(龍文)로 추정되는 문양을 새겨 넣었다. 다음으로 마구류들은 모두 부곽에서 발견됐는데 말을 제어하는데 사용하는 재갈, 말 안장을 고정하는 직사각형태의 결속구, 심엽형(하트모양)의 장식 철기 등이 그것이다. 특히 재갈의 경우 그 끝을 S자형의 고사리 모양으로 만들어 말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형태의 도질토기들이 발견됐는데 기존 경주지역의 제작기법과 동시기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제작기법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당시 경주지역과 주변 지역의 인적·물적 교류의 결과로 이해된다. 특히 발견된 토기 중에 기존 김해와 부산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던 손잡이가 달린 화로모양의 토기등 이 발견돼 앞으로 도질토기 연구에 중요 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다.지금까지 신라의 중심고분군이라 할 수 있는 쪽샘 유적에서 발굴조사된 L17호 목곽묘에 대해서 살펴봤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경주 중심지역인 쪽샘 및 대릉원 인근에서는 4세기대 집단 목곽묘군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목곽묘들은 과연 어디에 자리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단정적으로 답을 할 수는 없지만 쪽샘 동편의 인왕동 유적 일대가 유력할 것으로 추정된다. 향후 쪽샘과 주변 유적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사로국의 발전과 신라 국가형성에 대한 실체를 꾸준히 밝혀 나갈 다양한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2021-02-15

신라고분과 경주 쪽샘 유적

신라의 옛 고도(古都)인 경주에는 지금도 과거 신라인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고분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고분들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낭만을 느낄 수 있게도 해준다. 특히 신라 고분들 중 천마총 그리고 황남대총이 위치한 대릉원(大陵園)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직접 방문하거나 들어보았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다.한편 이와 같은 거대한 고분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공예품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더불어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화려하고 찬란한 신라인들의 고분 문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 바로 동쪽 편에는 현재에도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인 쪽샘 신라 고분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쪽샘 유적과 대릉원이 담장과 도로로 단절되어 있지만 본래는 하나의 묘역(墓域)에 속하는 곳으로 신라 왕경인들의 공동묘지로 이 일대가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쪽샘 유적의 고분들은 대릉원과 달리 과거 보존조치 구역으로 지정되지 못하였고 점차 상가와 민가들이 들어선 마을로 변하여 그 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었다.이후 유적의 중요성에 비해 관리와 보존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에 경주시는 ‘쪽샘 고분공원 조성사업’을 계획하고 2000년부터 이 일대에 대한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경주 쪽샘 유적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대릉원과 본래 한 묘역에 속하는 신라 왕경인들의 집단무덤 유적이다. 특히 신라의 대표적 묘제로 거론되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고 이외에도 목곽묘(덧널무덤), 석곽묘(돌덧무덤), 옹관묘(독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음이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쪽샘 신라 고분 유적의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적석목곽묘의 경우 봉분 직경이 30m 이상의 대형분(大形墳)이 있는 대릉원과 다르게 봉분 직경 10~20m의 중·소형분(中·小形墳)들이 집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그리고 일정한 묘역을 가지는 대형분들과 달리 쪽샘 유적의 적석목곽묘들은 서로 근접하거나 중복되게 축조된 모습이다. 이러한 규모, 입지의 차이는 무덤 주인공의 생전 신분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신라 사회가 무덤의 규모나 입지, 조성방식에서 일정한 사회적 규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이와 관련된 현상은 목곽묘 축조 양상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쪽샘 유적 일대에서 발견된 목곽묘의 입지는 적석목곽묘가 만들어지는 낮은 구릉 사면부(斜面部)나 주변부에 주로 위치하며, 그 규모도 길이 5m 이하의 것들이 대부분이다.또한 부장 유물도 적석목곽묘에 비해 양과 질에서 다소 떨어지는 것들이 많으며, 서로 중복되어 있는 양상이 뚜렷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적석목곽묘가 축조되던 시기 목곽묘는 아마도 적석목곽묘의 주인공 보다는 조금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묘제였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정대홍학예연구사쪽샘 유적에서는 석곽묘와 옹관묘도 확인되었는데, 전체 무덤 중 그 수량이 많지 않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마도 목곽묘의 주인공보다 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보인다.이러한 쪽샘 유적의 고분 분포양상은 얼핏 작은 무덤들 혹은 화려한 금공예품(金工藝品)이 없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신라 고분 연구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의 지배자들은 거대한 봉분과 다량의 부장품, 우월한 입지 등을 통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무덤의 주인공을 당시 사회에서 최상위 지배층일 것이다. 반면 이보다 규모, 입지, 부장품 등이 다소 떨어지는 쪽샘 고분의 주인공들은 당시 사회에서 이들보다 더 낮은 계층이었을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쪽샘 유적의 신라 고분들은 당시 신라 사회의 계층성과 이에 따른 일정한 규제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즉 고분에 투영된 입지, 규모, 부장품의 차이를 통해 당시 신라 사회의 신분적 차별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신라 왕경 내 중심 고분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경관 복원에 있 쪽샘 유적은 신라 고분 연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021-02-08

신라 이전의 역사, 사로국 2

중국 삼국지(위촉오 삼국사, 184~280년)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역사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조조, 유비, 손권이 세운 삼국뿐만 아니라 혜성같이 잠깐 스쳐 지나간 여러 나라와 인물들도 대부분 기억할지도 모른다.그런데 위나라가 낙랑군, 대방군을 통해 삼한의 여러 국들에게 인수(관직이 표시된 도장과 끈 장식)를 전해줬다거나 교역 대상을 임의로 바꾼 탓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 말하는 기록은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사 기록 ‘삼국지’에 실려 있는 같은 시대 우리나라 역사이다.사로국이 건립된 지 200여 년이 지날 무렵부터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 예가 강성해져서 군현이 능히 통제하지 못하자 백성들이 삼한으로 이탈해 나간다.’ 위 기사는 중국 후한 말기(147~189년)의 기록으로 혼란스러운 중국의 상황과 사로국을 포함한 삼한 사회의 성장을 전해준다.이 시기부터 삼한 사회에서는 ‘목관묘’(널무덤)를 대신해 ‘목곽묘’(덧널무덤)를 무덤 구조로 채용하여 넓어진 부장 공간에 훨씬 많고 희귀한 유물들을 매납한다.이전 시기보다 풍족해진 경제적 기반이 무덤 구조에 반영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부(富)를 과시하는 현상이 유행할 만큼 당시의 상황이 변했던 것이다.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사로국은 또 다른 과감한 선택을 감행한다.진한 교역망에서 낙랑군, 대방군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입수하는 비중을 줄이는 대신, 사로국 브랜드의 철기 제품을 주변 국들에게 집중적으로 유통하면서 빠져나올 수 없는 소비 구조를 구축해 나간 것이다.이런 조치는 교통망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과 흔들리지 않는 진한 맹주국의 사회적 지위가 뒷받침된 결과였다. 진한 연맹체에서 사로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동해안 해로와 내륙 육로를 이용할 수 없었고, 의존적인 철 공급 시장에서 특화된 철기로 패권을 장악한 사로국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다.최근, 가야가 철의 왕국이라고 선전되지만, 그 원조는 사로국이라 할 수 있다.사로국은 영역 경계에 있던 달천 광산으로부터 원료를 공급받고, 중심지 주변의 황성동 유적 등지에서 철기를 생산했다.한반도 남부에서 대규모로 손꼽히는 철광석 산지가 사로국 수중에 있었으며, 발달된 제철 기술과 전문적 운영 시스템도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발굴 조사된 황성동 유적은 요즘으로 치면 포스코의 1차 하청 업체로 추정되는데 고도로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구조로서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설계됐다.시간이 흘러, 사로국의 철은 실용적 용도와 경제적 가치를 넘어 사회 통합의 상징으로 활용되기에 이른다.사로국으로부터 철을 공급받는 주변국들은 점차 무덤 구조와 장례 절차를 사로국의 기준에 맞추게 된다.장기명학예연구사당시 특징적인 사로국의 장례 풍습은 시신이 안치되는 목관 바닥에 철창을 비롯한 다양한 철기들을 빈틈없이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런 장례 의식은 유례없이 많은 철기가 요구됐음에도 주변국의 상류 사회에서 경쟁적으로 채택되고 공유된다.사실, 철기를 과소비하는 사회 현상은 우연한 유행이라기보다 주변국들을 ‘신라’라는 영역 국가로 통합하기 위해 기획된 노림수의 결과였다. 사로국은 진한 연맹체의 맹주로서 주변 들과 힘의 우열 차이는 뚜렷했지만, 기존 질서를 무시한 급진적 무력 복속을 택하지 않았다. 주변국들이 오랫동안 유지한 독립적, 자치적인 내부 구조를 단기간에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대신에 기울어진 진한 교역망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압박을 가중시키는 한편, 상류 사회가 사로국의 장례 의식을 통해 일반 구성원과 차별되어 내부 분열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결국, 진한 사회에서는 사로국을 중심으로 ‘철’이 매개된 공동 이데올로기를 이끌어냈고, 경제적 위기에 빠진 주변국들은 내부 분열을 거듭한 채 헤어 나오지 못했다.설상가상으로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고구려가 낙랑군, 대방군을 몰아내고 한반도 북부를 장악했다는 국제 소식이 들려왔다. 기존의 무역 체제는 무너졌고,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내부적 단합이 필요했다. 역사적 순간은 점점 다가왔다. 드디어 사로국이 이끌던 진한 연맹체는 역사 무대 뒤로 퇴장했고, 고대 국가 ‘신라’가 탄생했다.

2021-02-01

신라 이전의 역사, 사로국 1

‘기원전 57년,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를 6촌 촌장들이 추대하여 신라를 건국했다.’삼국유사에 전하는 이 짧은 기록은 마치 역사 상식처럼 알려지고, ‘천년 신라’라는 고유명사도 만들었다.그런데 이런 역사 기록이 사실(Fact)이 아니라면? 그렇다. 일반인이 흔히 아는 신라는 이때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경주분지에 터전을 잡았던 사로국이 등장했을 따름이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는 4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성립하며, 그때부터 경상도 일대를 영역화한 고대 국가로 인정된다. 그렇다면 신라 이전에 경주에서 성장하고 있던 사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사로국 시기는 대략 기원전 150년(?)~356년으로 추정된다. 400여 년이 넘는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역사 기록은 많이 남겨져 있지 않다. 더욱이 문헌 기록의 초기 역사는 신화, 설화의 형식을 취하거나 후대에 부풀려지고 연대가 맞지 않아서, 당시의 물질 자료를 분석하는 고고학의 영역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번 칼럼은 신라의 모태인 사로국을 2편에 걸쳐 다루기에 전반부(사로국의 소개와 주변국과의 관계), 후반부(사로국의 특징, 신라로의 전환 과정)로 나눠 이야기를 풀고자 한다.사로국의 영역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주시 일원으로 추정된다. 그 내부 구조는 비슷한 사회·문화를 공유한 5~6개의 지역공동체가 결합된 형태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지역공동체(구, 군 규모의 행정 단위)를 ‘읍락’이라 부른다. 크고 작은 취락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다시 중심 촌락을 매개로 몇 개의 촌락이 뭉쳐 읍락을 형성했다. 이런 5~6개의 읍락이 결합해 초기 국가로 성장한 사회가 바로 ‘사로국’인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국가로 조직화된 사로국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에 흔적을 남겼을지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옮겨간다.사로국 사회를 이끈 중심 집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중국 동북지역이나 한반도 서북지방에서 경주지역으로 유입된 외부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무렵 사회, 문화 속 가장 큰 변화로 ‘목관묘’(널무덤)라고 일컫는 새로운 구조의 무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목관묘 부장품은 멀리 떨어진 선진 지역으로부터 교역을 통해 입수한 제의용 청동기를 비롯해, 철제 무기, 농·공구 등으로 일괄 교체된다. 이런 물질문화의 변화는 이전 시기 거대한 돌을 이용해 ‘지석묘’(고인돌)를 공동으로 만드는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거리 교역에 기반한 네트워크 사회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결국, 읍락 단위로 내부적 발전을 거듭해 나간 지역공동체에 선진 문화를 가진 외부 세력이 유입되면서 새로운 정치체인 사로국이 형성되었고, 드디어 역사 무대에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던 것이다.장기명학예연구사시간이 흐르면서 사로국은 주변 나라들과 함께 ‘진한(辰韓)’이라는 경제적·사회적 연맹체를 이루게 된다. 진한 연맹체는 점차 한반도와 그 주변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낙랑, 대방, 동예, 마한, 왜 등과 교류하며 역사에 본격적으로 흔적을 남겼고, 그 중심에는 진한 연맹의 맹주로서 사로국이 있었다. 이러한 진한 연맹체의 활발한 대외 교역의 결과물로 중국 한나라의 청동 거울과 동전, 왜(일본)에서 생산한 다양한 청동 무기류 등 다양한 외래 문물이 경상도 일대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외래계 문물들은 당시 경상도 일대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불리는 회백색 토기 및 다양한 철제 도구들과 함께 사로국의 물질문화를 대표하게 된다.경제적 교역 공동체인 진한 네트워크는 문헌 기록에 남겨진 시점보다 훨씬 앞선 기원전 1세기 중엽부터 확인되며, 4세기 중엽에 소속 국들이 사로국에 의해 신라로 통합될 때까지 오랜 기간 유지된다. 마치 고대 그리스에 자리 잡았던 도시국가 폴리스 동맹체제처럼 각기 고유한 영역을 지니고 상호 간에 화합과 견제를 반복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삼한의 소국들은 활, 창, 방패와 같은 무기를 잘 사용했고, 비록 다투고 전쟁을 하더라도 서로 굴복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라고 기록된 중국의 ‘진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렇지만 당시의 동북아시아는 격변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었다. 대외적 상황은 너무나 불안정하고 유동적이었으며, 사로국의 지배 집단과 내부 구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당 시기 초기 국가는 결코 강력한 왕권에 기반한 구조가 아니었고, 국읍이라는 국가 중심지는 고정불변에 가까운 ‘수도’로 볼 수 없었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는 놀라울 만큼 동일한 역사상(歷史像)을 제시한다. 최고 지배자의 호칭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이라 불리는 토착 용어로서 존장자(종교 주관 혹은 나이·덕이 많은 사람)를 의미하였으며, 3성(박씨, 석씨, 김씨) 집단이 교대로 이사금을 배출했다거나 국읍에 의한 읍락의 통제가 어려웠다는 상황이 엿보인다. 실제로 탁월한 무덤이나 거대한 건축물은 한 지점에서만 지속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3~4개 유력 집단이 그들만의 근거지를 기반으로 각축을 벌이는 양상을 띤다.하지만 사람과 권력은 어느 순간 환경에 적응하고, 익숙한 상황을 일순간에 변화시킨다. 더 이상, 바깥에서 불어오는 유동적 국제 정세와 안으로부터 국내 기반을 흔드는 견제 움직임은 국가 권력의 풍향을 바꾸지 못한다. 물론, 신라(新羅)라는 고대 국가로 새롭게 일신하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와 내부 구조를 모두 장악할 수단과 정당화 기제가 필요했다. 이런 핵심 키워드를 제공한 것이 ‘철’과 ‘통합 이데올로기’였다. 역사적 시간은 점차 흘러,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2021-01-25

경주의 청동기(靑銅器)

고고학에서는 흔히 시대를 도구의 재료로 구분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이었다고 판단되었던 돌(석기), 청동(청동기), 철(철기)이 그것이다.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이는 인류가 자연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냈음을 의미한다.다시 말해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철보다 앞선 청동기의 제작은 한국 청동기시대를 열며,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다.또한 그 이후인 초기철기·원삼국시대까지 사용되고,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다.한반도 전역에 넓게 분포한 청동기는 동남부지역의 경주에서도 확인되는데 여기에서는 이를 살펴보려 한다.경주의 청동기는 대부분 원삼국시대에 집중돼 출토됐고 우리는 국립경주박물관 등에서 그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시기에 특이한 사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바로 경주 출토로 전하는 견갑형동기(肩甲形銅器, 일제강점기 수집)이다.이 견갑형동기는 단독 출토로 용도가 불명확한데 이와 비슷한 것이 중국의 심양 정가와자 6512호묘(1965년 8월 발굴)에서 확인된 바 있다. 여기 무덤 안 인골의 오른쪽 경골(정강이뼈) 옆에서 견갑형동기가 나왔는데 그 내부에 동부(銅斧·도끼)와 동사(銅9248·새기개)가 들어 있어 이를 넣어 보관하는 용도로 해석된다.경주의 견갑형동기는 현재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서 소장 중이고 복제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이 유물은 흥미롭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해석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다. 오히려 전형적이라 말할 수 있는 유적의 청동기에서 당시 사회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수 있겠다.경주에는 그러한 유적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입실리(1920년 8월 발견), 구정동(1936년, 1951년 10월 발견), 조양동(1979년 4월 발굴), 사라리(1995년 11월 발굴), 덕천리(2004년 6월 발굴), 탑동 21-3·4번지(2010년 2월 발굴), 죽동리 639번지(2018년 8월 발굴) 유적 등이다.이들 유적은 대부분이 목관묘이며, 청동기 외에 철기, 구슬 등도 나왔다.경주의 목관묘는 기원전 2~1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때 새로운 집단이 청동기를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이중 2기의 무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기원후 1~2세기는 고고학에서 원삼국시대, 사학에서 삼한시대라 부르는 시기에 속한다. 이때 만들어진 두 무덤이 경주 사라리 130호 목관묘와 탑동 목관묘이다.이들 무덤은 초기철기시대가 끝난 후 만들어진, 즉 원삼국시대 진한의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된다.여기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다량 부장됐는데 흥미로운 점은 한국식동검(세형동검)이 이들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따라서 이때까지도 한국식동검은 경주(진한)에서 중요한 권력의 상징물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사라리 130호 목관묘와 탑동 목관묘의 부장유물들이다.도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식동검, 청동거울, 호랑이모양 허리띠, S자 모양의 재갈, 나무를 끼울 수 있는 철제의 창, 양쪽 손잡이 달린 항아리 등 두 무덤에는 거의 같은 물건들이 묻혔다.이러한 유사한 유물이 공통적으로 부장된 사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군다나 이처럼 다양하고 많은 수의 유물들이 나온 무덤은 더더욱 그렇다.허준양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비슷한 시기, 같은 지역 안 15km 가량 떨어진 위치, 공통된 부장품들은 어쩌면 진한의 사로국 여러 지배자들을 떠올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이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있어 왔으나 아직까지 확증은 발견되지 않았다.하나 더 덧붙이자면, 경주 탑동 목관묘의 청동거울에서 왕(王 또는 主)명의 문자가 확인됐다. 우리는 이 한 글자를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이 王은 진짜 왕을 말하는 것일까? 또는 진한의 지배자(또는 장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단순한 글자인가? 만약 이 글자가 진짜 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탑동 목관묘의 주인은 왕이라는 뜻이다.그런데 이렇게 되면 비슷한 시기, 비슷한 수준의 무덤에 묻힌 사라리 130호 목관묘의 주인은 또 누구라고 할 수 있는가? 이렇듯 고고학은 역사문헌만으로 알 수 없는 단서를 찾아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다시 말해 경주에는 아직도 풀지 못한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보통 ‘경주’의 이미지는 신라의 고분들과 화려한 금관, 금귀걸이와 맞물려 있다.그러나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그에 더해 청동기와 밝혀지지 못한 수많은 이야깃거리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2021-01-18

청동기시대 경주人, 신라시대 경주人

“신라” 하면 떠오르는 도시는 당연히 “경주”일 것이다. 경주는 월성, 동궁과 월지 등 궁궐은 물론이거니와 대릉원에는 높디높고 크디큰 신라시대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이뿐이겠는가? 신라시대 유일한 별을 관찰했다는 첨성대, 9층목탑이 위엄있게 자리했을 대사찰 황룡사, 지금도 법등을 이어져 오고 있는 유명한 불국사, 분황사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문화유산이 자리한 곳이다. 그렇다보니 “경주=신라”로 통하게 됐다.그러나 경주지역에 신라가 자리하기 전부터 경주에는 선사시대 경주사람들이 살아왔다. 사람이 불을 이용하기 시작한 구석기시대에서 빗살무늬토기를 만든 신석기시대를 거쳐 무문토기를 만들고 청동을 다루기 시작한 청동기시대에도 말이다. 천년고도로 알려진 경주에선 천년보다 더 오랜 기간 청동기시대 경주 사람들이 살아왔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다.청동기시대는 학자마다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보통 기원전 13~10세기에 시작됐다. 이 시기에는 농경이 본격화 되면서 한곳에 머무는 정주취락이 증가하고 무문토기와 각종 마제석기가 널리 사용된다. 물론 시대명이 말해주듯 청동기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도끼 등 각종 무기류, 의기류 등이 등장한다. 청동은 구리(80~90%), 주석(10~20%), 납, 아연 등을 섞은 합금으로 당시 이러한 주조술은 매우 고도화되고 혁신적인 기술이었을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그리고 역사책에서 한손에는 비파형동검을 다른 한손에는 팔주령(청동방울)을 들고 반짝반짝 빛나는 청동거울을 목에 건 청동기시대 사람을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니기에는 매우 고가의 상위 1%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고나 할까?경주지역에도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사람들이 거주했던 주거지, 사후에 묻힌 무덤 그리고 간절한 소망을 기원했던 의례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주거지는 방형 또는 원형의 구덩이를 판 후 나무기둥을 세우고 풀 등의 초본류로 지붕을 이어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로 구릉이나 하천 근처에서 확인된다.경주 인동리·금장리·신당리·충효동·용강동·모량리 등지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조사됐다. 양북면 봉길리 13-1번지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기도 했다. 무덤으로는 석장동 876-5번지에서 묘역을 표시한 지석묘와 화장묘로 추정되는 수혈이 확인된 바 있는데 수혈 내부에서 목탄과 인골편이 확인됐다. 의례관련 유적으로는 화곡리에서 청동기~통일신라시대 제단이 확인된 바 있다.정여선학예연구사최근의 발굴조사 중에서 주목되는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경주문화재연구소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공동으로 조사한 경주 구황동 지석묘가 있다. 구황동 지석묘는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위치하는데 아마 이들 사찰은 잘 알고 있어도 그 사이에 커다란 상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의 육안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 지석묘의 상석으로 여겨져 왔을 뿐이다. 사실 진흥왕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신라 사찰사이에 청동기시대 상석으로 추정되는 50톤 이상의 큰 돌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2005년 분황사 발굴조사 중 청동기시대 석관묘 3기가 확인됐고, 내부에서 마제석창과 석촉이 출토된 적이 있다. 또한 신라시대 원지(園池)로 분황사 동쪽에 위치한 구황동 발굴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도 확인된 적이 있다. 즉, 신라시대 사찰이 들어서기 전 이 일대에는 이미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증거가 남겨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지금도 야트막한 잔디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구황동 지석묘이다.구황동 지석묘는 지난해 5월부터 여름이 끝나가는 그 해 8월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공동 발굴조사를 했다. 과연 이 큰 돌의 정체는 무엇일까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갖고 시작한 발굴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거대한 돌이 드러나고 그 아래로 돌을 받친 작은 돌(지석)이 확인됐고, 주변에서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이 확인된 것이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추정만 됐던 큰 돌이 청동기시대부터 이 자리에서 꿈적하지 않고 세월을 버텨온 것이다. 또한, 돌 주변으로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석렬이 상석을 따라 방형으로 돌아가는 양상이 확인됐다. 청동기시대 경주사람들이 만든 커다란 돌이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큰 돌의 존재만이 아니라, 신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비는 신성한 장소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황룡사와 분황사를 답사하게 된다면 꼭 한 번쯤은 사찰 사이 벌판에 오롯이 서있는 구황동 지석묘에 들러 청동기시대 사람과 신라시대 사람을 상상해 보는 기회를 가져보길 바란다.

2021-01-11

신라 이전의 시간

경주와 신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며 ‘수수께끼 가득한 보물창고’ 같은 공간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본지는 올 한 해 공동 연중기획으로 신라와 경주의 비밀을 풀어가는 칼럼 연재를 진행한다.사학자와 신라 연구자로 구성된 필진들이 ‘선사시대의 경주’에서부터 ‘신라의 왕실문화와 불교문화’ ‘신라 역사 속 인물들’까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격려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사람들은 아직 집을 짓지 않았고, 평생의 정착지를 정하지 않았다.바람과 물을 따라,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동하며 살았다.점차 생존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주변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는데,그런 의미에서 강과 바다는 마실 물과 음식을 얻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비와 홍수의 피해가 적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집을 중심으로 생긴 울타리는 그 안과 밖의 경계가 되었다.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무리지어 살기 시작했다.그렇게 역사가 시작되었다.신라가 태동하기 전, ‘신라 땅’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가장 이른 사람의 흔적은 안동시(와룡면 태리, 마애리)에서 확인되었고, 약 4만 년 전부터다. 동해안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이동하며 머물렀던 흔적이 확인된 것이다. 그들은 정형화된 형태의 도구를 돌로 만들어 냈다. 대표적으로 주먹도끼는 좌우, 앞뒤가 대칭을 이루고 끝 부분이 뾰족한 형태인데, 찍거나 자르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후,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도구들은 점차 크기가 작아지는데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포항·대구·성주 등 넓은 범위에서 보인다. 경주지역에서는 감포읍의 대본리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여전히 집을 짓지 않고 이동하였으며, 토기(土器)를 만들지 않았다.석기시대 사람들의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흘렀다. 그리고 신석기시대로 지칭되는 문화적 변화는 3만 년이란 시간이 더 흐른 뒤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집을 짓고, 불을 이용해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흙 그릇을 굽고, 사후 세계를 위한 무덤도 만들기 시작했다. 그 흔적은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에서부터 이어졌으며,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대구·청도·김천 지역, 형산강을 중심으로 한 경주지역 곳곳에서 확인된다.경주지역에서도 동해안의 봉길리·대본리, 형산강 북천에 맞닿은 황성동, 남천에 맞닿은 교동 등 그 분포가 넓다. 우리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시간의 흐름을 그들이 남긴 토기를 통해 찾아내곤 한다. 경북과 경주에서는 흙을 덧대어 그릇을 장식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덧무늬 토기부터, 빗살무늬를 선으로 그어 만든 토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늬를 긋거나 장식하지 않은 신석기시대 마지막 토기의 형태가 연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시간은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끝, 그리고 다시 청동기시대로 이어진다.최문정학예연구사그럼에도, 지금까지 드러난 석기시대 문화는 매우 단편적이다. 이러한 파편으로 남겨진 흔적으로 석기시대와 신라 문화와의 연속성을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석기시대의 경북 그리고 경주로 대표되는 지역에서는 동해안·남해안·내륙에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들이 공존하였고, 나아가 독특한 문화 형태를 띄기도 했다는 점이다.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등의 지리적 한계는 어쩌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동해와 남해를 통해, 그리고 산 너머 내륙에서 전해지는 문화를 온전히 받아드렸고, 또 환경에 적응시켜나갔다. 이러한 교류와 확산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한 조각을 우리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경주지역의 신석기시대의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월성(月城)’의 가장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 1915년 동경제국대학 인류학 교수였던 도리이류조(鳥居龍藏)가 ‘경상북도 경주 반월성대하(半月城臺下)’에서 석기시대 유물층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최초다. 이후 그 ‘월성’을 중심으로 신라가 이루었던 찬란한 문화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월성에서 처음 확인된 가장 아래층의 문화는 잊혀져갔다.역사가 기록되기 전의 시대. 선사(先史)시대의 경주는 여전히 그 실체가 선명하지 않다. 하지만 ‘가장 처음’의 흔적을 찾고 연구하는 일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부터 이어질 ‘신라에 대한 모든 이야기’보다 4만년이 앞선 시간이, 또 1만년이 앞선 시간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신라인’들이 그러하였듯, 또한 오늘날의 ‘우리들’이 그러하였듯 대륙과 해양, 그리고 또 다른 문화의 흐름 한 가운데 서있었다. 그 시작점에 있었던 사람들을 기억해두고 싶다.

202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