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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유신 다시보기

‘삼국사기’는 현재 남아 있는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이 책은 전체 50권이며 그 가운데 왕이 아닌 인물들의 생애를 담은 열전(列傳)은 10권을 차지한다. 그 10권 중에서 3권은 김유신이라는 1명에 대한 내용인데, 이는 다른 인물을 서술한 내용에서 볼 수 없는 높은 비중이다. 이러한 인물에 대해 일제강점기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그를 가리켜 지혜와 용기가 있는 명장(名將)이 아니고, 음흉하고 독살스러운 정치가이며,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자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김유신의 삶을 통해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살펴보고자 한다.김유신의 집안은 원래 신라 출신이 아니었다. 그 조상은 금관가야 왕족이었는데 금관가야가 532년(법흥왕 19년)에 신라에 항복하면서 그 왕과 일족은 진골 귀족으로 대접받았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이는데 참여했으며, 아버지인 서현(舒玄)도 군사 지휘관을 지냈다. 이에 김유신 가문은 장군 집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유신의 이름을 지을 때 그의 아버지가 유학(儒學)의 경전을 인용하고, 중국의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본 뜬 것으로 보아 유학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따라서 김유신 집안은 군사적인 능력과 학문적인 지식을 동시에 갖춘 문무(文武)에 조예가 깊은 가문이었다. 김유신이 종종 유학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여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학문에 익숙한 집안 환경 때문이라 여겨진다.김유신이 김춘추와 결합할 수 있었던 것도 공통적인 집안 환경과 관계있을 것이다. 즉, 김유신 집안은 군사적인 능력을 통해 신라에서 진골귀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금관가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차별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춘추는 왕족이었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귀족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점 때문에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보통 김유신과 김춘추가 결합할 수 있었던 요인을 두 집안이 비주류였기 때문에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비슷한 집안 환경도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즉 김춘추의 경우 그의 이름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하는 역사책 춘추(春秋)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김춘추 가문도 김유신 가문처럼 유학에 익숙한 환경이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사람이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김유신과 김춘추의 결합은 이러한 측면에서 단순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어쩌면 당시 신라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 중심 정치 형태를 유학에서 추구하는 왕도정치로 바꾸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불교를 완전히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종교로서 남겨두고, 정치에는 유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즉,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다.647년 1월에 벌어진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은 귀족들 사이에 있었던 권력 다툼이 아니라 장차 신라 사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정치 지향을 두고 벌어진 대립이었다. 즉 비담(毗曇)이라는 불교적인 용어를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때 그는 불교 중심적인 정치성향을 지녔고, 반대로 김유신과 김춘추는 유학적인 이념에 바탕을 둔 정치를 희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립 이후 김유신과 김춘추가 승리함에 따라 당의 연호(年號)와 관복(官服) 도입 등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추진했다. 따라서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비담과 염종의 대립은 권력 투쟁이 아니라 국가의 운영 방향을 둘러싼 갈등으로 볼 수 있다.김유신이 유학에 바탕을 둔 정치 이념을 추구했지만 당에 대한 그의 이미지는 항상 좋은 것은 아니었다. 즉, 백제 멸망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 사이에 갈등이 나타났을 때 당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사대주의자라기보다는 국익에 충실한 현실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한편 김유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660년 이후 백제와 고구려 멸망 그리고 나당전쟁 과정에서 당나라와 왜는 그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즉 당나라는 그에게 벼슬이나 많은 포상을 내렸으며, 왜는 문무왕에게 선물로 배 1척을 보내면서 김유신에게도 따로 1척을 보낼 정도였다. 당나라나 왜의 행동은 김유신이라는 인물이 신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풀 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그를 알고 있으니, 그의 사람됨이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러한 표현은 이 글의 앞부분에 소개한 신채호 선생의 평가와 정반대이다. 이러한 정반대의 평가와 별개로 그의 삶을 되짚어 보면 그리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과연 여러분들은 김유신을 어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는지?

2021-08-02

진흥왕과 그의 시대

진흥왕은 신라의 정복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복군주라는 표현은 그의 생애를 오롯이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이 자리에서는 진흥왕이 왕위에 있었던 시대와 함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되짚어보려 한다.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5F61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며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과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출생시점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왕위 계승 당시 7세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을 토대로 534년생(법흥왕 21년)으로 여겨진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6세 무렵인 539년 음력 7월 3일에 왕실 사람들과 함께 지금의 울주군 천전리에 위치한 계곡을 둘러보았다는 내용이 울주 천전리 서석에 새겨져 있다. 그로부터 거의 1년 뒤인 540년에 신라 제24대 왕으로 즉위하는데 당시 어렸던 그를 대신하여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정치를 맡았다.지소태후가 정치에 관여하던 시점이 언제까지 이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12년이 되는 551년에 연호가 개국(開國)으로 바뀐 점이 주목된다. 보통 개국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신라는 새로운 왕조로 바뀌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왕도 즉위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신라 내부의 정치적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551년부터 진흥왕이 직접 정치를 시작했다고 여겨진다.한편 진흥왕이 자신만의 정치를 시작한 그 해(551년), 신라는 고구려를 쳐서 오늘날 죽령(竹嶺) 이북 땅을 차지했으며, 553년에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와 삼국유사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전한다. 일본서기 흠명기 13년조(552년)에는 백제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고 했으며, 삼국유사 진흥왕조에는 554년에 백제가 신라를 침략했는데 그 침략의 원인을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에서 찾았다.이 무렵을 전후하여 고구려의 수도에서는 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서북쪽 국경에서는 돌궐의 위협이 점차 커져갔다. 고구려는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로인해 신라와 백제의 한강유역 진출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은 당시 국제정세와 맞물려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였다. 즉 신라는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고구려로부터 인정받았고, 고구려는 신라의 북진을 한강유역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스스로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 원인에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과 그로 인해 한강 유역을 제대로 지키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신라는 백제에서 고구려로 연합의 대상을 바꾸면서 한강 유역 지배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진흥왕의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안목을 바탕으로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에게 유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만들어냈다.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에 등장하는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해를 청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온다.’는 구절은 진흥왕의 업적을 칭송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묘사한 적절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한편 신라에서는 유학(儒學)이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물론 법흥왕대 불교 공인 이후 출가가 허락되고, 왕실에서 민간으로 불교 신앙이 전파됨에 따라 그것은 신라사회의 중심 신앙이 되었다. 이와 함께 유학은 일부 지배층이 학문이나 정치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국 고대 주(周) 왕조의 시조 후직(后稷)의 이름을 본뜬 김후직(金后稷), 주 문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을 본뜬 주공지(周公智), 공자가 지은 역사서 춘추(春秋)의 이름을 본뜬 김춘추(金春秋) 등의 이름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즉,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경전을 익히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한 경전은 중국에서 들여왔다. 그러므로 한문(漢文)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유학의 기초 경전을 학습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유학은 신라 사회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그것이 점차 사회 전반에 자리 잡으면서 사람의 이름을 짓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측면에서 진흥왕이 다스리던 시기는 황룡사 건립과 장육존상 설치 등 불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시점이지만 유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신라 사회에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는 시기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진흥왕과 그의 시대가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개인적인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진흥왕 즉위 33년(572년)에 그의 아들이자 태자인 동륜(銅輪)이 죽고, 같은 해 10월에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팔관연회(八關筵會)가 열렸다. 삼국사기와 우리나라 유명한 스님들의 생애를 담고 있는 해동고승전에는 진흥왕이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는 이름을 짓고 살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지난날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자신의 아들과 영토 확대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마음이 기록처럼 불교를 받드는 형태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진흥왕의 시대는 신라에게는 영광스러운 것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고단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는 진흥왕만이 아니라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군주가 겪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른다.

2021-07-26

동궁과 월지 유적 발굴 담소

경주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곳에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유적(사적 제 18호)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월지는 신라 문무왕이 서기 674년에 만든 연못이고, 동궁의 임해전은 서기 679년에 지었다고 한다. 동궁과 월지는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연회장으로도 이용됐으며, 통일 신라 최후의 어전회의를 열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했던 곳으로 신라의 희비(喜悲)를 함께했던 역사의 주요한 무대였다.동궁과 월지에 대한 최초의 발굴 기록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25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보면 ‘고적을 연구하기 위해 경주에 가있는 일본 제국대학 교수 원(原)박사는 안압지 부근에서 음석(陰石·오목한 돌)으로 만든 길이 오십일 간(間)의 곡선상의 도랑을 발견했는데 군당국에서 발굴하는 중이라하며 그것은 고적 중에도 매우 진귀한 것이다.’라고 당시 발굴에 대해 설명했다. 기사와는 별도로 남아있는 일제강점기 유리원판 사진에서도 발굴 된 석조 도랑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발견한 석조 도랑은 지금도 동궁과 월지 유적 안에서 통일 신라인들이 만들었던 모양대로 남아있다. 석조 도랑의 길이는 83m이며 건물의 지붕에서 떨어진 빗물의 배수로로 이용되었고 연못과 연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1970년대 초 청와대의 구상으로 경주종합개발계획 10개년 계획이 발표됐다. 그 일환으로 경주시의 유적과 시의 외관을 정비하는데, 연못도 정비하자는 생각으로 준설공사를 실시했다. 준설 작업을 시작하기 전의 월지는 잡초와 수양버들만이 엉성하게 있었다. 1926년에 세운 임해정(臨海亭)이라는 정자가 있어(현재 황성공원의 호림정) 사람들이 유적지라고 생각해 방문했다.1974년 준설작업이 시작된 뒤 연못에서 다수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1975년 3월 준설작업을 멈췄다. 그리고 2년 2개월 동안의 대규모 발굴조사가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실시됐다.발굴결과 4천700평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그 내부에 세 개의 섬이 발견됐으며, 연못을 따라 석재를 쌓아 만든 호안석축도 확인됐다. 못의 서쪽과 남쪽에서는 대형 건물터와 여러 건물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에서 출토 된 유물의 수량은 총 3만 3천여 점이며, 기와, 벽돌, 건축부재, 불상, 그릇, 숟가락, 배, 주사위, 금동제 가위, 목간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발굴조사의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로 목제 선박의 수습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1975년 4월, 조사단은 월지의 중도와 소도 사이에서 뒤집힌 모습의 나무로 된 배를 발견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배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노출된 배는 세 개의 통나무를 이어 만든 길이 6m, 너비 1.2m로, 부식이 심해 스펀지와 같은 상태였다. 조사단은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도 약해진 배를 수습하기 위해 고심 끝에 묘책을 찾아냈다. 배는 가만히 둔 채, 배 밑의 흙을 파낸 후 몇 군데에 판재를 넣어서 완전히 고정시킨 다음, 흙채로 들어 옮기는 것이었다. 1975년 7월 25일 목선을 경주 박물관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많은 기자들과 손님들이 현장에 모였다. 조사단은 계획된 대로 배를 고정하고 지지한 뒤 20여명의 작업원들이 묶어둔 끈을 붙잡아 연못바닥에서 들어내어 움직여 점차 오르막을 올라갔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그런데, 도중에 힘이 수평으로 균등하게 들어가지 않았는지 배가 휘어지며 가운데 부분에 금이 가버렸다. 모두들 당황하는 가운데 기자들은 ‘목선 두 동강’이라고 전보를 보냈고, 각종 신문에 특종으로 대서특필 됐다.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김동현 단장도 이 일로 그날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 무사히 배를 박물관으로 운반해 보존처리를 가능하게 한 공로로 사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영배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보존처리가 끝난 목선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월지관에서 실견(實見)이 가능하다. 월지관에 방문하게 된다면 그 때 금이 갔던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발굴조사 후 1980년 9월까지 유적의 정비·복원사업을 실시했다. 발굴당시 출토된 건축자재들을 기초로 하여 3기의 정자를 복원했고 발굴된 건물터의 기둥자리에 화강암을 다듬은 초석을 두었다.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동궁과 월지 유적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07년부터 현재까지 통일신라 왕경의 구조와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 동궁과 월지 유적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성과로 2017년에는 통일신라시기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로 여겨지는 석조물과 터널형 수로시설이 함께 발견돼 세간을 놀라게 했다.앞으로의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동궁과 월지 유적은 통일신라 사람들의 어떠한 놀라움을 우리에게 보여줄지 기대된다.

2021-07-19

못 속에서 찾은 보물들

문무왕은 삼국시대 통일의 과업을 달성하면서 궁궐인 월성과 그 주변을 정비하였다. 이 시기에 개발된 동궁과 월지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태자의 공간이 되고, 연회를 베푸는 장소가 되는 등 궁궐인 월성과 함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신라 멸망 이후 못 속에 잠겨 있던 이 찬란한 문화들은 1975~7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발굴되었다.70년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량은 총 3만 점에 달한다. 유물들은 연못 내부 건물지 가까이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은 동궁과 월지의 존재와 그 연대의 근거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신라의 건물지에 쓰인 기와와 건축부재,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던 용기와 숟가락, 풍류를 즐길 때 쓴 주령구와 배 등 유물들은 신라인의 생활이 녹아있다.‘동궁과 월지’라는 이름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안압지’라는 명칭이 있다. 이 명칭은 2011년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유물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동궁은 679년에 창건되고, 동궁아, 세택, 월지전 등 동궁 소속 관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월지에서 출토된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세택’명 목간 등 월지 주변에 관청들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명 기와와 ‘조로이년(調露二年)’명 벽돌은 중국 당나라 황제 고종의 연호로 유물이 제작된 연대를 알려준다. 당나라 황제 고종의 13개의 연호 중 ‘의봉’과 ‘조로’는 9, 10번째로, 각각 679년, 680년에 해당된다. 이 연대는 ‘삼국사기’ 동궁 창건 연대와도 일치한다. ‘삼국사기’ 기록, 출토된 유물들의 연구를 통해 2011년 ‘안압지’를 포함한 ‘임해전지’라는 사적명은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다.동궁과 월지의 입구에서 걷다 보면 연못 서편으로 복원된 건물지 세 동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나 현대에 복원한 건물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물은 연못에서 출토된 부재들을 통해 복원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위 지붕을 받치기 위한 공포의 부재인 첨차와 주두, 난간을 장식한 살대 등의 건축부재는 모두 출토유물을 복원한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은 봉정사 극락전으로 고려시대의 것이다. 온전한 건물의 형태는 아니지만 이보다 오래된 한국의 전통 건축을 보여주는 것이 월지에서 출토된 건축부재이다.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죽은 이를 위해 만들어 무덤에 부장하는 유물과는 다르게 신라인들이 실제로 쓰던 생활유물들이다. 촛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 하나도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만든 것을 보면 신라인들이 얼마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생산된 고품질의 생활용품은 이웃나라 일본까지 수출되었다. 앞서 설명한 가위와 형태가 유사한 것이 일본 나라 동대사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월지 출토품과 유사한 숟가락과 금속 용기 등도 발견되었는데, 숟가락은 수출 시 흠집이 나지 않게 닥종이로 10개씩 곱게 싼 채로 보관되어 있었다. 일본 왕족과 귀족들이 신라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752년에 작성한 ‘매신라물해’라는 문서는 정창원에서 발견되어 다른 유물들과 함께 당시의 신라와 일본 교역을 잘 보여준다.동궁과 월지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관람경로를 걷다보면 돌을 쌓아 만든 연못과 조경수들 그리고 조경의 불빛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월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긴 것은 지금의 우리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월지에서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배경삼아 오락을 즐기던 신라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주령구이다. 주령구는 총 14면이고, 손에 잡히는 사이즈로 참나무로 제작되었다. 주령구의 각 면에는 삼잔일거(술 세 잔 한 번에 마시기), 금성작무(소리 없이 춤추기), 음진대소(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등 주연석상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문구들이 새겨져 있어 신라인들의 풍류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이수정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기록, 보존처리 등의 과정을 거쳐 책, 디지털 매체 또는 박물관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짧게는 수 십 년, 길게는 수 천, 수 만 년 전의 유물이 땅에 묻혀있었다는 신기함과 유물 자체가 주는 신비로움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나아가 유물이 언제 만들어졌고, 이 유물을 사용한 사람들의 생활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정보도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많이 축적되어 우리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못 속에서 찾은 보물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보물을 만들고 사용한 신라인들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동궁과 월지에서 발굴된 유물에 대한 연구는 아직 현재 진행 중이며 앞으로 신라문화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70년대 발굴지역의 추가 조사와 함께 주변의 확장 조사를 실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이 앞으로 더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 기대된다.

2021-07-12

월지를 통해 본 신라의 조경과 경관

경주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는 1974년 경주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연못 준설을 포함한 주변 정화사업을 시행하던 중 못 내에서 다량의 와전류와 함께 호안석축이 일부 확인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준설공사를 중지하고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을 결성하여 1975년 3월 25일 본격적으로 발굴조사에 착수하였으며, 1976년 12월까지 총 2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총 면적 15,658㎡에 이르는 큰 연못과 그 안에 있는 3개의 섬, 연못 안으로 물이 출입하는 수구시설, 그리고 연못의 서편과 남편에 총 31동의 건물지가 조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후 1977년부터 3동의 건물을 포함한 건물지와 연못의 호안석축 복원 및 조경 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그렇다면 동궁과 월지에 조성된 연못은 어떻게 축조되었을까? 연못과 섬의 외곽에는 돌을 여러 층 쌓아 벽을 만들었는데, 이를 호안석축(湖岸石築)이라고 한다. 호안석축은 각 부분의 자연 지형과 용도를 고려하여 축조되었다. 연못의 동쪽과 북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곡선으로 축조되었으며, 서쪽과 남쪽은 직선으로 축조되었다. 그중 직선으로 축조된 서안석축에서는 총 5동의 건물지가 석축과 연접하여 축조되었는데, 현재는 3동의 건물지(제 1·3·5건물지)가 복원되어 있다.호안석축은 자연석과 가공석을 사용하여 쌓았으며, 각 부분마다 축조방식의 차이가 있다. 특히 물에 잠기는 부분과 물 위에 노출되는 부분의 축조방법을 달리하여 조경 효과를 주었다. 먼저 건물지와 연접해 있는 서쪽 호안은 연못의 물에 잠기는 부분은 자연석으로 면만 맞춰 쌓았으며, 수면 위에 노출되는 부분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축조되었다. 다음으로 건물지와 연접해 있지 않은 서쪽 호안과 3개의 섬은 장방형의 가공석으로 축조하였고, 석축의 아랫부분에 굄돌을 배열하였다. 그 외의 부분은 물에 잠기는 부분은 가공석으로 쌓았으며, 수면 위에 노출되는 부분은 조경용으로 자연석을 드문드문 배열하였다.또한 연못의 서쪽 호안석축은 이중으로 축조되었는데, 단이 낮은 아랫부분에는 화단을 설치하여 조경 효과를 주었다. 이 외에도 각 건물들의 축조 위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연못의 서쪽 호안과 인접해 있는 건물들은 일렬로 축조되지 않고 각각 사선으로 축조되었다. 따라서 어떤 건물에서도 월지의 조망을 해치지 않는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연못에는 외부의 물을 연못 안으로 공급하도록 하는 입수구(入水溝)와 연못 안에 있던 물을 다시 외부로 배출시키는 출수구(出水溝) 시설이 있다. 입수구는 동안석축과 남안석축이 만나는 지점에 있고, 출수구는 북안석축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먼저 월지의 외부에 있던 물이 입수구를 통해 연못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연석과 가공석으로 만들어진 수로와 석조유구, 그리고 작은 연못을 지나면서 불순물이나 토사가 걸러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화된 물은 계단 모양으로 된 폭포시설을 거쳐 최종적으로 연못 안으로 들어간다. 이 때 입수구 근처에 있는 큰 섬으로 인해 폭포시설을 거쳐 거세진 물의 유압을 억제하여 완만하게 흐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연못 안에 물이 가득 차면 출수구를 통해 연못 밖으로 물을 내보낼 수 있다. 2단으로 쌓은 장대석 중앙에 약 15cm의 구멍을 뚫어 나무로 만든 물마개를 꽂아 물의 양을 조절하였다. 또한 출수구를 통해 외부로 흘러 나가는 물의 위치를 고려하여 바닥에는 장대석을 깔았는데, 이는 바닥이 파이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출수구에 우진각형 지붕돌을 씌워 의장까지 고려하여 조경 효과를 주었다. 황지수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하지만 월지의 수구시설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많이 오거나 물이 장기적으로 고여 있어 녹조가 생기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연못의 배수 문제가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가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당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잡지 직관조에 월지의 조경과 관리를 담당했던 부서로 추정되는 ‘월지악전(月池嶽典)’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관리 시스템이 갖춰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연못의 물은 월지 북쪽 기찻길이 있는 곳에 당시 신라의 인공천인 ‘발천(撥川)’을 통해 남천으로 흘러갔을 것으로 연구자들 간의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월지와 그 주변이 개발되는 시기에 궁궐인 월성에서도 배수 시설이 없던 해자에 석축을 쌓아 정비했다는 점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월지와 월성을 포함한 이 지역 전체의 배수체계도 계획적으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이처럼 동궁과 월지의 경관 조경은 각 공간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축조되었다. 특히 연못과 연못에 인접해 있는 건물지 및 섬의 축조 위치에 따라 개방성과 폐쇄성이 반복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막힘과 열림의 효과가 반복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동궁과 월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연못과 연못 주변의 건물지를 중심으로 둘러보는데, 연못이나 건물들의 축조 방식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고 관광한다면 더욱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2021-07-05

문무왕, 신라 동궁을 창조하다

신라의 통일을 이룬 문무왕.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왕실의 권위와 왕조 창건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월지(月池)를 조성(674)하고 동궁(東宮)을 창조(創造·679)한다. 여기에서 동궁 건설은 말 그대로 창조라는 단어가 쓰였다. 얼마나 대단한 것을 지었길래 창조라는 단어를 썼을까?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창조라는 단어는 총 2회 확인되는데 첫째는 황룡사, 둘째는 동궁이다. 황룡사의 규모와 9층 목탑 등을 본다면, 당시 동궁의 조성이 끼쳤던 사회적 파급력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이러한 동궁을 설명함에 앞서 같은 사적명으로 묶이고 있는 월지를 짚고 넘어가보자. 월지는 근·현대까지 雁鴨池(안압지)로 불렸으며, 2011년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기 전에는 바다에 임해있는 전각이라는 뜻의 臨海殿址(임해전지)로 불려왔다. 이후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여러 연구를 통해 연못의 본래 이름이 월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명칭에 대해 여러 연구자들도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다.하지만 동궁은 그 사정이 조금 다르다. 현재는 동궁의 위치와 영역, 역할에 대해 많은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동궁을 둘러싼 논란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월지 서편에 위치한 대형 건물지들의 역할과 기능, 실제 동궁의 범위와 위치, 왕궁 내부에 위치한 內帝釋宮(내제석궁)인 天柱寺(천주사)의 위치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먼저 월지 서편 건물지군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알아보자. 최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전모가 드러난 A건물지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닮은 내부 구조(내진열의 減柱), 복도(回廊)로 둘러싸인 건물지, 대형 적심, 출입시설에 설치된 踏道(답도) 등의 특징을 통해 정전(正殿)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추정의 배경은 A건물지보다 격이 높은 건물이 경주에서는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A건물지가 정전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왕의 궁성인 월성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점도 동궁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다음은 동궁의 위치와 역할이다. 그림을 참고하면 동궁의 위치로 추정된 곳은 크게 네 곳으로, 월지 서편 건물지와 동편 영역을 포함한 곳을 동궁으로 보는 견해, 월지의 동편을 동궁· 월지 서편은 월지궁으로 보는 견해, 국립경주박물관의 남측을 동궁으로 보는 견해가 기존에 있었고, 최근 동궁과 월지 A건물지의 서편을 동궁으로 보는 견해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이렇듯 연구자마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바꿔 말하면 여전히 동궁과 월지에서 동궁은 미지의 영역인 것이다. 다만 월지 주변에서 확인되는 동궁 관련 유물, 문헌에서 확인되는 동궁관(東宮官) 기구(機構)속에 월지 관련 관청명 등으로 볼 때 월지 주변에 동궁이 있었던 것은 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다음으로 동궁의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자. 동궁은 태자의 거처 혹은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문헌 속 임해전에서 펼쳐진 많은 횟수의 주연(酒宴)을 예로 들며 태자의 교육기관 내에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이 위치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즉, 외국의 사신 접대나 연회가 펼쳐지는 전각이 있는 곳에 태자의 교육기관이 있는 것이 어색하다는 것이 그 골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절대적인 왕이 군림하고 관할하는 왕궁 내에서 태자의 교육과 연회를 같은 영역에서 치루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이 의견 또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김경열학예연구사 마지막으로 왕궁 내부에 위치한 사찰, 내제석궁인 천주사의 위치이다. 천주사에 대한 단서는 동궁과 월지 주변에서 발견된 ‘천주’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1점이다. 하지만 언제든 위치 이동이 가능한 기와라는 점에서 기와의 출토지가 천주사가 될 수 있는 근거는 빈약하다. 다만 1975~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시행한 안압지 발굴조사에서는 다량의 불교 관련 유물이 확인되었다. 본존불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대형 청동제 부처 귀를 시작으로 장식 용도로 추정되는 板佛(판불), 여러 점의 금동제 불상 등이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동궁과 월지 주변에 천주사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하지만 이러한 유물도 천주사의 명확한 위치를 웅변해주지는 않는다. 이 또한 발굴조사 범위의 확장을 통해 풀어가야 할 숙제 중 하나일 것이다.동궁과 월지는 수많은 경주 관광객들이 한번은 꼭 들리는 소위 ‘핫’한 관광명소 중 하나로 자리했다. 동궁과 월지를 발굴조사 중인 필자도 화려한 야경과 고풍스럽게 복원된 건물 사이를 걷노라면 마치 왕이 되어 궁 한가운데를 거닐고 있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이면에는 많은 연구자들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수수께끼도 숨겨져 있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동궁과 월지에 관한 여러 수수께끼들을 함께 풀어가며 유적지를 관람하신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2021-06-28

1천500여 년 전 신라 왕경 경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경주는 약 천년 동안 나라를 이어온 신라(기원전 57년~기원후 935년)의 유일한 수도이다. 곳곳에 천년의 향기가 묻어있으며 당시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가, 남겨진 유적과 유물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경주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최고의 역사서이자 관광지이다.최근 KTX 신경주역이 생겨 관광 동선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시외버스를 타고 경주터미널에서 내려서부터 여정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엔 유적지를 순환하는 관광버스나 일반 시내버스, 택시를 이용해서 주요 유적을 보고 오는 여행이었다면, 요즘은 전동차, 전동킥보드, 전기자전거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지금 경주에서 가장 유명한 ‘황리단길’의 맛집, 커피숍 등 핫플레이스를 가는 사람이 많다.이때 보이는 주요 유적지들이 대릉원, 첨성대, 월성, 월정교이고 조금 더 가면 동궁과 월지, 황룡사지, 계림 등을 보게 된다. 이들 유적지가 무질서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발굴조사와 옛 지형 연구를 통해 밝혀진 모습을 이해하면 더욱 재미있게 신라의 수도를 둘러볼 수 있다.신라 주요 유적지가 있는 인왕동, 교동, 황성동 일대의 경주 시내는,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선상지(扇狀地)이다. 선상지란 산에서 흘러내리는 강에 의해 운반된 자갈, 모래 등이 양쪽으로 퇴적되면서 만들어진 부채꼴 모양의 지형을 말한다. 지금은 개발로 인해 지형이 바뀌었지만 1천500여 년 전에는 편평한 선상지가 펼쳐지고, 선상지를 동에서 서로 흐르는 북천(北川)과 남천(南川), 그 주변의 이러진 많은 물줄기가 마치 거미줄처럼 형성되어 있었다.현재는 볼 수 없는 당시 지형 모습이나 하천의 흔적은 발굴조사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발굴조사를 무덤이나 집자리의 흔적과 당시의 유물만 찾는 것으로 흔히 알고 있지만, 여러 가지 관찰과 분석을 통해 당시 자연환경과 사람이 활동했던 시간까지도 알 수 있다.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발굴조사법이 트랜치(trench)법이다. 길쭉한 직사각형의 도랑을 파고, 도랑의 벽에 보이는 흙이 쌓인 층들과 각 층에 있는 무덤, 집자리 같은 유구(遺構), 유물, 동·식물 유체(有體) 등을 분석하여 다양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흙이 쌓인 층에서 모래띠, 곡선형의 퇴적층, 뻘층과 같이 물이 흐르거나 주변으로 퇴적될 때 생기는 흔적을 통해 당시 하천이나 늪 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발굴을 통해 알려진 경주 시내는 마지막 빙하기 이후 선사시대를 거쳐 기원후 약 6세기 중엽경까지는 거미줄처럼 형성된 물줄기와 여러 늪 또는 습지가 형성되어 있는 선상지였다. 경주지역 내 청동시시대에 만들어진 고인돌의 위치와 황남대총 등 5세기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봉토를 가진 무덤의 위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선상지 내 물줄기와 늪 또는 습지를 피해서 자리잡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무덤이 없는 곳에 물이 흐르고 습지가 있었다고 머릿속에 그려보면 1천500여 년 전 경주의 모습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헌에 따르면 101년에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신라의 궁성(宮城)인 월성이 반달 모양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서 조성된 점도 지석묘, 무덤과 맥을 같이 한다. 정인태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그럼 언제부터 지금의 경주 시내와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17만호의 집이 있었던 적은 언제일까? 그 비밀은 황룡사(皇龍寺)에 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인 553년에 처음 짓기 시작해서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원래 새로운 대궐을 지으려고 했으나 황룡이 나타나 절로 지었다는 것에서 국가사찰임을 알 수 있다.이 황룡사의 발굴조사를 통해 물이 흐르고 습지가 있었던 땅을 최대 2m까지 매립하여 절을 지었음이 밝혀졌다. 황룡사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도로와 담장, 집 등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당대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경주에서 대규모 도시 조성사업이 벌어진 6세기 중엽은 고구려, 백제를 치고 한강을 차지하면서 최대 영토를 가지게 된 시기이다.옛 안압지(雁鴨池), 지금의 월지(月池)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유적지 중 하나로, 밤에는 조명이 켜져 주말이 되면 인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월지는 7세기 후반에 가장자리를 돌로 쌓아 만든 인공 연못이지만 그 이전에는 작은 하천이 흐르고 만나며, 늪지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아름다운 이 연못이 왕경에서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 궁금증을 풀기 위한 발굴조사가 지금 한창 진행 중에 있다. 1천500여 년 전 신라 천년 수도 경주의 모습이 점점 드러나는 걸 함께 느껴보시길 바란다.

2021-06-21

왕궁 건물지를 장식한 신라 기와의 정수

기와란 목조건물 지붕의 누수와 부식을 방지하고 건물의 치장을 위해 점토를 틀에 넣어 형태를 만들고 가마에 구워 만든 건축 재료입니다. 지붕은 수키와와 암키와를 이어 덮고 처마에는 수키와와 암키와 끝에 연꽃, 당초, 보상화, 귀면, 동물 등 다양한 문양을 부착한 수막새와 암막새를 장식합니다. 마루는 마루를 쌓아올리는 적새기와, 마루 밑의 기와골을 막는 착고기와, 서까래를 덮는 서까래기와, 추녀 밑 네모난 서까래에 사용한 사래기와, 마루 끝에 귀면기와와 용마루 양쪽 끝에는 치미를 배치하여 지붕을 치장합니다.삼국시대 기와건물은 왕궁, 관청, 사찰 등 국가적인 용도의 건물이나 특수계층의 주거건물 등 국가의 주도하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수막새나 치미 등 특수 용도의 기와 사용을 통해 건물 권위의 높고 낮음을 파악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의 왕궁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정궁인 월성, 동서 200m 남북 180m 규모의 대형 석축연못의 정원시설과 동궁과 관련된 복합시설이 조성되며 월지(月池)명 유물,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명 토기 등 동궁과 관련된 유물이 다량 출토되는 동궁과 월지, 우물 내부에서 ‘남궁지인(南宮之印)’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남궁으로 비정되는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내 유적, 월성의 정북방향에 위치하고 통일신라시대에 축조한 전각과 회랑의 건물 배치로 보아 북궁으로 비정되는 성동동 전랑지가 있습니다.또한 삼국시대에는 월성을 정궁으로 사용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동궁과 월지,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내 유적, 월성과 첨성대 사이 공간에 위치한 회랑식 건물지군 일대까지 왕궁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월성은 신라의 최고지배계층이 사용한 왕궁입니다. 왕궁 축조와 관련된 문헌기록으로는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 또는 재성(在城)이라고 하였다.”라는 기사가 확인되며, 실제로 월성에서 ‘在城’명 기와가 수습되기도 합니다.월성은 발굴조사를 통해 5세기대에 왕궁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5세기 후반 또는 6세기 전반부터 신라가 폐망하는 10세기 전반까지 기와를 사용한 건물이 여러 차례에 걸쳐 건립·중건된 것으로 확인되고, 수키와·암키와, 수막새·암막새, 귀면와, 특수기와, 문자기와, 전돌 등 다양한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고 있습니다.월성에서 출토되는 기와의 특징으로는 와통을 사용하지 않고 토기제작기법을 응용하여 회전하는 물레에서 제작한 신라의 초기기와가 다량 확인됩니다. 백제의 대통사지 창건와와 동일한 문양이 장식된 수막새와 접합된 초기기와가 출토되거나 기와 측면에 내림새가 부착된 초기기와가 출토되기도 한다. 신라 초기기와는 손곡동·물천리요지와 화곡리요지에서 생산되며, 소비지유적에서 출토되는 분포양상을 살펴보면 월성을 중심으로 500m 이내 근거리에 위치한 유적에서만 확인됩니다. 월성을 제외한 각각의 유적에서는 10점 이내 소량만 출토되어 초기기와를 사용한 건물이 존재하였다고 판단하기 어려우나 월성에서는 다량 출토되어 초기기와를 장식하여 신라의 정궁으로 사용한 건물의 존재 확인이 기대됩니다. 박정재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월성 출토 삼국시대 수막새는 문양에 따라 백제계·고구려계·신라식으로 구분됩니다. 백제계는 백제 웅진기와 사비기에 유행한 문양이 장식된 수막새가 출토되고, 고구려계는 삼각형의 꽃잎에 양감이 강한 문양이 장식된 수막새가 출토됩니다. 신라식 수막새는 백제계와 고구려계의 영향을 융합하여 개발되며 넓고 부드럽게 융기된 꽃잎 끝을 반전시키거나 잎 가운데 능선을 배치한 문양이 유행합니다. 통일신라 수막새는 꽃잎을 중첩하여 배치한 형태와 보상화문, 가릉빈가, 사자문 등 다양한 문양이 등장하고 대량생산의 필요로 제작기법도 정형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월성 출토 문자기와는 연호명이 나타내는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 신라 6부 가운데 북천이북의 소금강산 일대에 위치한 한지부와 관련성을 보이는 ‘한(漢)’·‘한지(漢只)’, 보문동과 낭산 부근 지역에 위치한 습비부와 관련성을 보이는 ‘습부정정(習部井井)’·‘습부정정(習府井井)’, 기와 제조와 관련된 관청인 와기전(瓦器典)과 관련성이 보이는 ‘전인(典人)’ 그 외 ‘생(生)’, ‘주(主)’, ‘정도(井桃)’, ‘주(朱)’, ‘본(本)’, 만(‘卍)’, ‘정(井)’이 있습니다.월성에서 출토된 문자기와 중에 특징적인 유물로는 ‘儀鳳四年皆土’명 기와가 있습니다. ‘儀鳳四年皆土’명 기와에 새겨진 儀鳳四年은 679년에 해당하는 연호이며 월성, 동궁과 월지, 국립경주박물관 주차장부지 등 신라 왕궁과 관련된 유적에서 다량 출토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후반 이후 월성 주변 일대에 관청건물을 건립하여 왕궁의 영역이 확대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2021-06-14

신라인이 본 세계… 유물에서 보이는 국제관계

“흙으로 사람 모양을 만드는 일을 맡고 있는 한 신라의 공인(工人)은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사람 모습을 만들고 있다. 작은 크기에 최대한 특징을 표현해야했는데, 특별한 옷을 입고 머리를 장식한 모습을 잘 표현하기 위해 서역에서 왔다는 특별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집중하고 있다.”월성해자에서 출토된 서역인의 모습을 한 토우(土偶)를 통해, 그 토우를 만들던 신라 공인을 떠올려 보았다. 그 공인이 만든 독특한 복장의 토우는 16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일반적으로 토우는 작은 크기(2~10cm 내외)에 그 특징을 정확히 담아낸다. 토기뚜껑이나 항아리 등에 장식적인 기능으로 부착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한 눈에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예를 들면 임신한 여인이 가야금을 뜯는 모습, 남녀의 성행위 장면, 얼굴이 풍선처럼 동그랗게 과장된 사람,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 등이 인상적인 토우의 모습 등이다.앞서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독특한 복장의 토우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복장(服裝) 표현을 비교적 충실히 하고자 했던 제작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비록 팔 부분이 결실된 상태로 출토되어 자세를 완전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특별한 행동 혹은 자세 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얼굴과 몸은 과장되지 않게 일반적인 비율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가장 관심을 끈 것은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복장이었다. 머리에 띠와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천을 덧댄 터번을 두르고 있다. 팔 부분의 소매가 좁은 카프탄(caftan·지중해 동부사람들이 입는 셔츠 모양의 기다란 상의)을 입고 있으며 허리는 꼭 맞게 조여져 윤곽선이 드러나고 무릎이 살짝 덮이는 길이다.이러한 복장은 효율적인 이동성을 고려한 기마민족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고대 서아시아나 당(唐)나라에서 호복(胡服)으로 불리던 소그드인(Sogdian·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현재의 이란계 주민)의 옷과 유사하여 서역의 영향을 받은 차림새로 볼 수 있다. 정확한 유래 지역과 민족을 특정하기 어렵지만, 그 동안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다양한 서역 유물을 통해서도 그 연결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서역의 유물로는 이국적인 로만글라스(Romanglass·로마제국에서 제작되어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유입된 유리제품), 장식보검(계림로 14호분 출토) 등이 확인된 바 있다.서역 사람의 모습으로는 괘릉(원성왕릉)의 무인석상과 경주 용강동 고분 출토의 토용(土俑)등이 알려져 있다. 왕릉에 부장된 로만글라스, 왕의 무덤을 지키는 서역인모습의 무인석상 등을 통해, 당시의 교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적극적인 신라 외교의 일면임을 이해할 수 있다.지금 한창 발굴조사 중인 월성에서 최초로 확인된 신라의 아주까리(파마자)씨앗은 교류의 새로운 단면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아주까리 씨앗은 주로 기름을 사용하는데 머릿기름이나 약용 식용 혹은 등잔용 기름등으로 이용하였다. 신라시대를 기록한 ‘삼국사기’ 혹은 ‘삼국유사’에는 남겨진 바가 없었는데, 이러한 아주까리에 대한 흔적을 월성해자의 깊은 흙 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아주까리의 출현이 더욱 반가웠던 것은 씨앗이 한반도 자생종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아주까리 씨앗은 인도 및 아프리카 등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월성에서 찾은 길이 9mm, 폭 7mm의 아주 작은 씨앗이 어떻게 신라에까지 왔을까? 또 그 사용법과 재배 방법은 누가 누구에게 전달해 주었을까? 단 1점의 아주까리 씨앗은 우리에게 지금부터 풀어야할 많은 질문과 숙제를 남겨 주었다. 최문정 학예연구사 우리에게 남겨진 서역사람들의 모습은 보다 적극적으로 당시의 국제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서역의 물건과 이국적인 식물 혹은 동물들을 배에 싣고 저 먼 지중해 바다를 지나 우리에게 당도했을 것이다. 혹은 먼 사막길을 거치며 수많은 밤과 낮을 지났을 것이다. 먼 곳에서부터 신라까지 직접 운반한 사람들은 용강동 고분의 토용처럼 덥수룩한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 터번을 쓰고 긴 상의를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을 수도 있다. 먼 바다 혹은 길을 지나 신라에 당도한 그들도 신라의 문화를 배웠을 것이다. 그 곳은 활기가 넘쳤을 것이고, 호기심과 새로움에 대한 호의적인 교환은 신라가 한반도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에서 더욱 확장해나갈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어느 신라 공인이 담은 서역인의 모습과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 아주까리 씨앗을 통해 우리는 신라 사람들과 서역인들이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여행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단서들이 모여 연결된다면, 신라의 다양한 교류 관계의 실타래를 모두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21-06-07

신라시대 사람은 누구인가? - 인골이 알려주는 그들의 모습

현대 사회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직접 보기도 하며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다.그러나 과거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모습을 알기는 쉽지 않다.이러한 모습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유적에서 출토하는 인골(人骨)이다. 유적에서 출토하는 인골을 통해 얼굴, 체격, 질병의 흔적, 생활 습관 등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분석하는 것을 형질인류학 혹은 체질인류학으로 하나의 연구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그러나 산성이 강한 한반도의 특징으로 인해 인골이 발견되는 경우는 드물다. 현재 경주지역에서 신라시대의 인골이 출토하는 지역은 7곳 정도이다. 출토하는 유적은 80년대 월성의 해자에서 발견된 해자를 제외하면 고분 속에서 확인되고 있다.그러나 전신의 골격이 출토되지 않고 있어 당시의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알려주지 못 하고 있다.인골이 남긴 힘든 상황 속에서 월성유적의 조사 과정에서 전신의 골격이 온전한 2구의 인골을 확인했다. 인골은 성벽의 축조과정을 살펴보기 위한 조사과정에서 확인됐다.2기의 인골은 모두 전신을 곧게 편 상태로 한 구는 하늘을, 다른 한 구는 또 다른 인골을 바라보는 형태로 출토했다. 그리고 발 아래부분에 토기도 함께 확인됐다.출토한 인골은 앞서 언급한 형질인류학적인 접근을 통해 성별, 생활습관, 특징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먼저 2기의 인골은 남자와 여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와 같이 태어난 연도에 대한 정보가 없이 골격만 남은 경우에는 나이가 들어가면 생기는 다양한 뼈의 변화를 통해 연령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결과 두 사람 모두 50대의 숙년(熟年)으로 사망과 관련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은 생전에 많은 노동 활동을 한 흔적도 보인다. 지속적인 운동은 근육도 발달시키지만 근육이 뼈에 붙은 부분도 발달한다. 특히 여성의 경우 남성으로 착각할 만큼 뼈가 발달해 있어 노동의 강도가 상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뼈 조직의 발달은 남녀를 구분하기 힘들게도 한다. 여성으로 판별한 것은 골반에서 임신과 관련한 흔적이 발견되어 남녀로 구분할 수 있었을 정도로 육체노동을 지속적으로 했던 사람으로 생각된다.치아를 통해서는 성장기의 영양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 했던 것을 알 수 있다.성장기에 영양 공급이 좋지 않을 경우 치아의 표면에 선과 같은 홈이 보이게 된다. 월성에서 확인된 2기의 인골 모두에게서 이런 흔적이 확인되는 점은 어린 시절을 곤궁하게 살았던 흔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식료는 쌀, 보리와 같은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을 하는 농경민의 경우는 치아에 충치가 많이 생긴다. 이에 반해 수렵채집민과 같이 곡물류가 적은 식생활인 경우 치석이 많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구의 인골에서도 치석(齒石)과 치주염(齒周炎) 흔적이 확인되는 등 곡물류의 섭취가 많지 않았을 가능성이 보인다.이러한 결과들을 두 사람은 지배층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어린 시절에 원활하지 못 한 식량 사정과 상당한 강도의 육체노동을 지속했던 사람이다. 이는 당시의 평범한 신라시대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신라시대에서는 상당히 장수한 사람인 것으로 생각된다. 김헌석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현재 삼국시대 사람의 평균적인 수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분에서 출토하는 인골들이 지배층인임에도 30-40대로 판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월성에서 확인된 2기의 인골은 50대의 사람들로 피지배층인 당시의 가장 많은 신라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그럼 왜 2기의 인골이 성벽 속에서 나오게 되었을까? 현재 인골이 출토된 상황을 보면 성벽의 기초를 만드는 작업이 끝나는 시점에 묻힌 것으로 생각된다. 그 시기는 인골의 발 아래 있던 토기를 통해 4세기에서 5세기의 시점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마도 월성의 안전한 축조를 위해 희생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지금까지 고분에서 주로 확인되던 인골은 당시의 지배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에 반해 월성에서 확인된 인골은 신라시대의 피지배층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는 아직 신라인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고 다양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해 나가야 한다. 월성에서는 해자에서도 다수의 인골이 확인됐다. 이러한 인골들도 정리된다면 신라시대 사람들의 생활고 모습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그리고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가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2021-05-31

땅 속 유적의 씨앗으로 엿보는 신라인의 정신문화

안소현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우리는 반려식물을 가꾸고, 꽃다발을 선물한다. 봄꽃놀이를 즐기며, 숲에서 휴식과 위안을 얻는다.이렇듯 식물은 우리에게 정신적 풍요를 선사한다. 땅 속 유적에서 발견되는 씨앗과 열매를 통해 옛 사람들은 어떤 식물을 자원으로 이용했는지 알 수 있다.선조들의 옛 생활상을 전시하는 박물관에서 불에 탄 쌀이나 도토리를 한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적에서 발견되는 식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먹거리 혹은 도구로 만들어 쓰는 실용적인 쓰임 외에도 옛 정신문화를 엿볼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성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신라의 왕이 대대로 기거했던 왕궁인 월성(月城·사적 제16호). 해자(垓字)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외부와의 경계로 삼기 위해 성벽 외곽에 땅을 파 만든 도랑이다.월성 해자 발굴조사에서 확인되는 과거의 씨앗 중에, 신라인의 머릿속, 마음속 식물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릴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지금까지 월성 해자가 조사된 구역에서만 2만개가 넘는 가시연꽃의 씨와 다양한 종류의 수생식물 씨가 출토됐다. 약 1600년 전에 가시연꽃을 비롯한 수생식물 군락이 해자에 자랐음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해자의 수심과 주변 환경이 어떠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가시연꽃은 오래된 연못이나 저수지에 주로 자라는 한해살이 식물이고, 지름이 1m 이상으로 크게 자라는 가시투성이의 둥근 잎을 수면에 띄우고 생활한다. 식물체 전체가 가시로 덮여 있고, 여름에는 자주색의 꽃을 피우는 가시연꽃은 사진 촬영의 소재로도 인기가 높다.가시연꽃의 씨는 검인(芡仁)이라 하여, 왕실 제사를 지낼 때의 제사 음식으로 올려졌다. 가시연꽃은 한 개의 열매 안에 100여개의 많은 씨가 영글어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고도 한다.또한 신령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징표로서 땅과 물에서 난 다채로운 식재료를 바치는 의미에서 못(澤)의 산물로서 진헌된 것이라 여겨진다. 옛 문헌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국가제사에 이용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라시대의 상황은 문헌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필자는 얼마 전 절기 상 춘분(春分)날, 신라의 김(金)씨 임금님께 제를 올리는 행사인 춘향대제를 취재하기 위해, 경주 숭혜전(崇惠殿·경북문화재자료 제256호)을 다녀왔다.전통을 계승하려는 참봉단의 정성과 노력으로 특별히 올해의 제사에는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는 검인(가시연꽃 씨), 능인(마름 열매), 진자(개암나무 열매)를 제사 음식으로 올리는 뜻 깊은 자리였다.월성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씨앗이 1600년 전의 옛날에도 신라 임금의 제사에 이용됐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해자에 남겨진 씨앗은 왕궁에서 심고 가꾸어 이용되었던 식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아마 신라인들도 가시연꽃의 씨를 정성껏 채집해 선대의 임금을 기리는 제사상에 올리지 않았을까.자(紫)색은 신라인에 있어 특별한 색이었다. 왕족과 신분이 높은 귀족들만이 자색의 관복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귀한 색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왕궁의 못에서 자주색의 꽃을 피우는 가시연꽃에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또 한 가지 소개하고 싶은 자료는 의도적으로 구멍을 뚫은 잣이다.보통 우리가 먹는 잣의 부분은 딱딱한 껍질 속의 종자에 해당한다. 먹고 난 후의 남겨진 흔적이라면, 딱딱한 씨껍질을 깨부순 파편의 형태로 남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해자에서는 같은 위치에 정교하게 구멍을 뚫은 잣 껍질이 여러 개 확인됐고, 끈 같은 것에 꿰어서 이용한 무엇인가로 추정됐다. 장식용이었을까, 아니면 염주 알처럼 이용된 것일까.귀한 식재료를 먹지 않고, 가공하여 다른 어딘가에 이용했을 신라인의 의도가 궁금한데, 그것을 바로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지금도 필자가 모르는 어느 곳에서는 잣 껍질을 꿰어서 쓰는 풍습이 있을지, 또 옛 문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찾아보고 차차 밝혀나가야 할 부분이다. 잣은 하나의 솔방울에 수많은 씨를 맺는 식물로, 자손 번창의 의미가 있어 지금도 껍질을 깐 잣은 결혼식 폐백음식에 이용되기도 한다.땅 속 씨앗을 찾아내고 조사하는 일, 식물에 얽힌 전통 풍습에 대한 조사 연구를 통해 옛 사람의 마음 속 식물의 의미를 발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21-05-24

유적에서 찾은 신라의 나무

나무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사용하기 적당한 무게와 크기를 가지며, 다른 재료에 비해 다루기 쉬워 많이 이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한 나무는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므로 식기, 도구와 같은 작은 유물부터 대형 건축물이나 구조물에 이용할 수 있는 재료로서 유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잘라서 이용한 후 새로 심으면 다시 이용할 수 있는 재료이기도 하다.나무를 잘라 톱, 도끼, 낫, 칼 등의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생활용기와 제작에 필요한 도구, 그리고 주택, 다리 등 건축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건축부재 등 나무를 이용하여 인류의 행위가 남겨져 전해지거나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을 목제유물(木製遺物)이라 한다.목제유물의 자연과학적인 분석은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되는 유물의 형태와 기능에 대한 것 외에도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환경적 의미와 재료로서 선택된 의도와 같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과학적 성과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확인과 옛 환경 복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목제유물은 나무를 구성하는 세포를 관찰하여 어떤 나무인가를 밝혀낼 수 있다. 이렇게 밝혀진 사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목적에 어떠한 나무를 선택해 이용했는지 알 수 있다. 나무는 생태적으로 적합한 환경에서만 생육이 가능하므로 출토된 유적의 당시 환경과 비교하면 나무 또는 목제유물의 교역(交易) 등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무가 자랐을 당시 기온, 강수량 등 기후의 변화는 나이테를 통해 다양한 생장패턴으로 나타난다.이렇게 만들어진 나이테를 분석하면 나무가 살아있었던 연대, 기후 등을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나무의 껍질인 수피(樹皮)가 붙어있을 경우, 나무가 잘려진 시기, 계절까지 알 수 있다. 자연목일 경우, 죽은 원인이 되는 사건(산불 등)이 일어난 계절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이테의 폭, 동위원소 분석 등을 통해 나무가 자랐던 당시 기후(강수량·기온)를 복원할 수 있다.경주 월성 성벽과 해자(垓字)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목제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해자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다. 이는 해자가 갖는 독특한 환경 때문이다. 물이 차 있던 해자는 일종의 저습지(低濕地)로 다른 곳보다 지면이 낮아 항상 물이 고여 축축한 상태가 유지되는 곳이다. 나무는 유기물질로, 시간이 흐를수록 곤충, 세균, 화학적 변화 등으로 분해되고 파괴되어 그 형태를 잃고 결국에는 없어진다.그러나 저습지에서는 흔히 뻘층 또는 진흙층에 의해 밀폐된 환경이 형성되어 분해활동을 제한하는 저산소 또는 무산소 환경이 만들어진다. 이는 일반적인 환경보다 분해속도가 더뎌지며, 나무의 주성분이 분해된 공간에 물이 채워져 목제유물이 묻힌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남아있게 된다.월성의 발굴조사로 출토된 목제유물의 분석 결과 대부분은 참나무, 밤나무 등 활엽수로 밝혀졌고, 침엽수로는 소나무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활엽수 중 대부분의 수종은 참나무 중 우리에게 익숙한 상수리나무가 대부분이었다. 소형 목제유물의 경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의 비율이 비슷하게 분석됐다.이는 활엽수에 비해 침엽수인 소나무가 섬세하게 가공하기 쉽고 건축부재와 같이 많은 하중에 버티거나 큰 강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해자에서 출토된 목제구조물 중 나무기둥, 나무판재 등의 제작에는 대부분 활엽수가 선택적으로 사용됐으며, 특히 상수리나무를 많이 사용했다.남태광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따라서 월성 성벽과 해자의 목제구조물이 만들어진 당시 주변지역은 온난하고 다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상수리나무가 생육하기 좋은 환경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강도가 커서 자르기가 힘든 상수리나무를 자르고, 가공하는 도구나 기술이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뛰어났을 것이다.현재 출토된 목제유물의 수종분석 등 일부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향후 출토된 유물의 도구흔적, 가공방법, 크기, 형태 등의 형태적인 분석을 통하여 삼국시대 신라 건축에 대한 자료를 확보할 예정이다.그리고 목제유물의 나이테 폭과 산소동위원소 분석을 통한 연대분석 및 고기후 추정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실시하여 당시 월성 주위의 식생을 복원함에 있어 보다 많은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21-05-17

신라 왕궁 속의 동물 이야기 - 곰은 왜 해자에 있었을까?

지금 경주의 첨성대를 가면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곳이 보입니다. 이곳은 신라 천년의 궁성인 월성유적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특히 월성유적 주변을 둘러싼 해자에서는 신라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밝혀주는 다채로운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해자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동물과 식물, 나무에 관한 유물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고, 이 글에서는 신라인과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대부분의 유적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이야기를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경주 월성유적은 해자라는 물이 흘렀던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 많은 동물뼈, 식물의 씨앗, 목제품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5세기 무렵의 신라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동물과 식물 그리고 나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현재 월성유적에서 확인된 동물은 멧돼지류(가축인 집돼지와 야생 멧돼지를 포함), 소, 말, 개, 곰, 소형사슴 등의 포유동물이 많습니다. 그리고 상어, 돌고래와 같은 바다의 동물, 꿩과 같은 날짐승까지 다양한 동물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해자에서 확인된 동물은 신라 왕실에서 먹고 이용한 후에 해자 속에 남겨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해자 속 대부분의 동물은 고기의 섭취라는 목적이 큰 동물이 많습니다. 물론 소와 말은 당시의 중요한 노동력이나 죽은 후에는 고기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곰은 식용의 목적이 크지 않은 동물입니다. 그리고 유적에서 확인되는 사례도 흔치 않은데 월성유적에서는 다수 확인되고 있습니다.현재 월성유적의 해자에서는 곰의 뼈가 10여점 확인되고 있습니다. 곰뼈는 하악골(아랫턱뼈),요골(앞팔뼈)과 종골(발뒤꿈치뼈), 상완골(윗팔뼈), 대퇴골(허벅지뼈) 부위의 뼈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요골과 종골이 가장 많이 출토하고 있습니다. 현재 해자에서 확인된 부위는 고기가 많지 않은 부위이고 종골의 경우 해체 후에 버리는 부위이기도 합니다. 그런 부위의 뼈가 왜 신라의 왕궁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일까?사실 신라시대 사람들이 동물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는 뼈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신라시대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삼국사기’에 신라인의 곰 이용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곰의 가죽을 이용해 군대의 깃발 장식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곰의 가죽 중에서도 뺨, 팔, 가슴의 가죽을 이용해 깃발 장식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월성유적에서 확인된 곰은 하악골(아래턱뼈)은 뺨, 팔은 요골이 해당하고 아래턱뼈에는 해체할 때 남은 흔적도 확인됩니다. 그리고 군권의 장악은 왕의 권위와 관련되고 이런 군대의 상징인 깃발은 왕실과 관련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 왕성의 주위에서 군대 깃발의 제작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신라 왕실에서 운영한 관청 중에는 가죽의 무두질과 제품을 만드는 관청을 설치해 관리하고 있었음이 ‘삼국사기’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월성의 해자 주변 유적 조사에서도 철공방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유구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왕궁의 주변에 이러한 물품의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는 것은 가죽과 관련된 제품이 월성 주변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가죽의 무두질에는 물을 이용하거나 동물의 뇌수(腦髓)를 이용하는 방법이 알려져 있습니다.월성 해자 속의 동물 중에도 두개골이 깨진 상태로 출토하는 것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해자 주변에 왕실과 관련된 수공업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월성 해자 속에서 확인된 곰뼈는 신라시대 군대의 장식품을 만들기 위해 가져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결과는 문헌 기록과 발굴 조사 결과가 일치하고 있어 신라시대 왕궁의 생활 모습을 사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김헌석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해자에서 출토하고 있는 동물뼈는 신라시대 왕궁에서 이용한 동물이 어떠한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해자에서 확인된 멧돼지종류는 육류의 섭취를 위한 것으로 소와 말은 육류 혹은 의례의 도구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뼈와 같이 특수한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버린 것들도 다수 섞여 있을 것입니다.아직 월성 해자에서 출토한 동물뼈는 정리 과정에 있습니다. 정리를 진행해 나간다면 신라시대 동물을 이용한 모습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동물을 가져와서 어떻게 해체하고 먹었는지 그리고 해자에 버리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이러한 동물의 이용방식을 지금의 우리와 비교하면서 동물을 바라보던 신라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2021-05-10

왕궁 안에 남겨진 신라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신라는 그 나라 이름에 담긴 소망처럼 월성을 중심으로 성장해 주변 나라를 통일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한 축으로 번영했다. 실크로드로부터, 그리고 다시 바다로 이어지는 문화 교류의 중심에 서 있었다.이곳이 서라벌로 불리던 때, 월성은 신라의 수도에 위치한 왕궁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였다. 약 800년 동안 왕과 왕족 그리고 역사 속 인물들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많은 외국 사신들이 오가며 다양한 문화가 함께 어우러졌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월성에는 연주하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낫고, 바다의 파도가 잔잔해진다는 피리인 만파식적이 왕실 보물창고인 천존고에 보관되어있었다고 전해진다. 월성은 신라의 국보(國寶)를 보관하던 신성한 공간이기도 했다.안타깝게도 현재 월성에는 드문드문 신라시대 건물을 지탱했던 돌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신라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 긴 역사의 시간이 온전히 땅 속에 남겨져 있음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월성 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 착수 이전, 2007~2008년 월성 전체에 대한 지하레이더탐사(GPR)를 실시하였다. 마치 우리 몸을 컴퓨터단층(CT)촬영을 통해 투시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지하레이더탐사를 통해 땅 속의 남겨진 건축물의 흔적을 찾아,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월성 내부 3만4천42평의 면적에 2.8m 깊이로 지하레이더탐사를 실시하여 건물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확인하였다. 문(門)의 흔적은 최소 3개소 이상, 건물지는 최소 20개동 이상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2014년 월성 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현재 조사 중인 약 6천400㎡ 범위에서는 17개의 크고 작은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밀집되어 확인됐고, 1만1천여점이 넘는 유물들이 출토됐다. 출토유물과 연대분석 검토를 통해, 약 240년 동안 이어진 통일신라시대 전 시기에 걸쳐 건물지가 지어지고 수리되고, 또 다시 새롭게 지어진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월성에서는 정전(正殿)이라고 불릴 수 있는 중심건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가로축이 긴 회랑형(복도식 건물) 건물들과 그 주변의 벼루 등 유물의 출토 상황을 통해 현재 조사 지역에는 관청(官廳)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발굴조사의 결과는 늘 새로운 발견과 또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곤 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조사 결과들을 통해, ‘그들’의 삶과 ‘그때’의 풍경이 궁금해지곤 한다.월성 조사를 통해 확인된 월성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수백 년의 시간이 깃든 월성의 전모를 확인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하지만 조사를 통해 확인된 몇 가지 힌트들이 우리에게 월성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최문정학예연구사먼저 6천여점이 넘게 확인된 기와이다. 기와는 고대 건축물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목조건물의 지붕에 올라가며 비와 화재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기후변화에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가진 재료이기도 하다. 더불어 건물의 경관과 장식, 위용을 돋보이기 위해 쓴 막새(瓦當)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와는 규격화된 형태의 대량생산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공인(工人)집단의 안정적인 생산체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기술을 익히고 운영하며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장소에 기와를 제공했을 신라의 솜씨 좋은 기와 공인들이 떠오른다. 왕궁을 짓고, 또 새로 고쳐 쓰는 동안 그들은 가장 좋은 기와들을 월성으로 보냈을 것이다. 또 월성에는 기와를 쌓아 지붕을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월성 내부에서는 흙으로 빚은 그릇, 토기도 다수 출토됐는데 그 중 도부(嶋夫)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도부’가 토기를 만든 사람 혹은 이 과정을 감독한 사람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한 연구 결과를 통해 본다면, 토기를 만드는 ‘도부’라는 이름의 사람이 자신이 만든 토기에 이름을 새기는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겠다.우리는 월성 발굴조사를 통해 ‘왕궁’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이용되어온 다양한 단면을 찾고자 한다. 더불어, 그 곳을 호령하던 왕의 발자취 뿐 아니라 묵묵히 월성을 쌓고 가꾸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찾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월성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기간을 생각해본다면 조사·연구의 깊이를 가벼이 여길 수 없다.차곡히 쌓여가는 충실한 조사와 연구 성과들이 모여, 우리는 신라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나길 기대한다.월성, 왕궁 안에 남겨진 신라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해 줄 것이다.

2021-05-03

600여 년의 왕궁 역사를 간직한 월성 해자

월성은 마립간기가 개시되는 4세기 중엽(내물마립간·356~402년) 전후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신라 멸망 때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신라 왕족 및 귀족, 관료들이 600여 년 동안 궁중 생활을 지낸 기나긴 세월이 월성에 남겨져 있다.하지만 아쉽게도 월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최근에 들어 본격화되는 단계라 아직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월성의 축조 시점이 문헌 기록(101년·파사왕 22년)보다 250년 정도 늦춰진다는 사실만이 확인됐을 따름이다.다만, 부분적이나마 신라 왕궁 역사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월성 성벽에 인접한 해자다.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을 일컫는다. 성벽에 부속된 방어 시설로 취급되며, 출토 유물 또한 물길에 휩쓸리거나 인근에서 폐기된 것으로 간주돼 학술적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했다.하지만 월성 해자는 기존 인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됐다.해자의 면적은 고구려, 백제, 가야 왕궁의 것에 비해 2~3배 이상 넓었고, 퇴적된 토사의 깊이는 2.5~3m에 달했다. 그리고 신라 월성의 해자만이 삼국~통일신라시대라는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그 기능이 방어, 배수 구조물에서 조경 시설로 변화됨이 확인된 것이다.해자 조사의 발굴 연혁을 보면 월성 성벽이나 내부 궁궐과 달리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간헐적이긴 하지만 꾸준히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중요 사적지인 월성을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하기에는 부담됐기 때문에 그 주변 일대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러한 까닭에 1984~85년 1차 시굴조사, 1985~89년 2차 발굴조사, 1999~2006년·2007~2009년 3차 발굴조사, 2015년~현재까지 4차 발굴조사로 마무리되고 있다. 특히, 4차 발굴조사는 월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성벽, 내부 궁궐 조사도 함께 진행 중이며, 융복합 연구를 위한 고환경팀, 문헌팀 등을 포함해 조사단을 꾸려 혁혁한 성과를 매년 선보인 바 있다.이렇듯 월성 해자는 꾸준한 조사 성과를 통해 삼국 통일을 기점으로 삼국시대 수혈 해자(구덩이를 파서 만든 해자)와 통일신라시대 석축 해자(석재로 만든 연못형 해자)로 구분됨이 밝혀졌다.수혈 해자는 최초에 월성 성벽의 북쪽 방면으로 너비 25~45m, 깊이 1~1.2m의 구덩이를 굴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다른 왕궁의 해자가 10~15m 정도의 폭을 지닌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대규모 면적으로 축조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설계의 배경에는 홍수 범람이나 지하수 용출에 취약한 지형 조건이 고려됐으며, 대규모 해자를 활용해 적군을 막기 위한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유로를 통제하는 배수 기능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시간이 흘러, 수혈 해자는 한 차례 보수, 정비가 이뤄지는데 해자 너비-면적 차이가 특정 구간별로 극심한 데서 발생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른 조치로 해자 바닥을 다시 굴착해 높이가 1.2~1.5m에 달하는 목제 판자벽 시설을 25~30m의 폭을 유지하게끔 설치한다. 이런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통해 건기, 우기에 상관없이 배수량, 유로 흐름의 관리를 효과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제의 절차로 배, 방패 모양의 의례 목제품이 출토돼 주목을 끌었다.장기명학예연구사월성 해자는 삼국 통일을 맞이하면서 또 한 번 큰 변화를 겪는다. 해자는 외부의 위협이 낮아지면서 방어 기능을 축소하는 대신, 석축 원지(苑池·관상용 연못)로 개축해 조경 시설로서 새롭게 단장됐다. 조경 시설로 거듭난 석축 해자는 6개의 석축 원지가 중간 지점마다 설치된 입·출수구를 통해 물이 흐르도록 설계됨으로써 월성 왕궁의 북편 일대가 운치 가득한 정원 단지로 느껴지게끔 조성됐다.현재 경주 관광 명소로 유명한 안압지 또한 동궁에 부속된 석축 원지로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당시 ‘월지’로 불리었고 월성 석축 해자의 축소판과 같은 모습을 띤다.이후 석축 해자는 2~4차례 개축되면서 전체 면적이 대폭 축소된다. 석축 해자가 줄어들면서 확보된 공간에는 관청 건물이 일렬로 늘어서 채워졌다. 이런 변화의 이면에는 삼국 통일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만끽했던 풍류를 넘어 국정 운영의 현실적 고충이 우선시된 배경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또 당시는 월성 왕궁뿐만 아니라 신라 왕경 전 구역이 도시 개발의 절정기에 도달하면서 전반적으로 중요한 건축물들이 확장되고 개축되는 시기를 지나가고 있었다.신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천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현재 월성 해자에서는 천년이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그 안에 담겨진 600여 년 간의 신라 왕궁 흔적을 흙 속에서 찾고 있다. 역사의 물길이 흘러 퇴적된 흙 속에는 소그드인(실크로드로 교역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으로 추정되는 토우, 국가 주도 토목 공사에 의한 징발령이 적힌 목간, 고대에 수풀을 이뤘던 나무, 식물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머지않아 해자에 대한 발굴조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만, 흙 속에서 찾은 유물과 고환경 시료는 지속적으로 분석돼 신라 왕궁 생활을 다각도로 밝혀줄 것이라 기대된다.

2021-04-26

신라 왕궁, 성벽을 쌓다

경주 월성(月城)은 신라의 최고지배계층이 사용한 왕궁 유적으로 2000년 유네스코에 의해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월성지구로 등재·관리되고 있다.월성의 총면적은 193,845㎡(약 59,000평)이며, 길이는 동서 890m 남북 260m 바깥 둘레 2,340m다. 월성 내부는 전체적으로 북쪽이 남쪽보다 높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평탄한 지형이며 가장자리는 평탄면보다 2~7m 더 높은 성벽이 남아있다.월성의 남쪽에는 자연하천인 남천이 흘러 방어에 용이하고, 경주 선상지 남쪽에 위치하여 경주 분지를 조망할 수 있는 입지적 장점을 지닌다.월성 관련 기록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서, 실록, 지리서, 문집 등 문헌자료에 남아 있고, 고려시대 대표적인 사서인 ‘삼국사기’에 월성의 축조나 수리와 관련된 기사가 확인된다.“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 또는 재성(在城)이라고 하였다. 신월성 북쪽에 만월성, 동쪽에 명활성, 남쪽에 남산성이 있고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소지마립간 9년(487) 가을 7월에 월성을 수리하였고, 소지마립간 10년(488) 봄 정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월성 성벽 조사는 성을 쌓는 방법과 과정, 쌓은 시점을 파악하기 위해 2015년부터 현재까지 성벽 서쪽과 남쪽 일부구간을 대상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월성 성벽은 흙을 주된 재료로 쌓은 성토구조물로 흙 이외에도 회가 발린 건축폐기물을 재활용하거나 불에 탄 흙(燒土), 볏짚을 태운 재(灰), 점토덩어리, 자연석(石)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된다. 다양한 재료의 사용은 성질이 다른 재료를 번갈아가며 쌓아 재료들 간의 접착력을 높여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성벽을 쌓는 과정은 성벽을 쌓을 공간에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고 땅을 단단히 다져 기초를 만드는 기저부 조성공정과 그 위에 본격적으로 성벽을 쌓아 올린 성벽 성토공정으로 구분된다.기저부 조성공정에서는 식물의 잎이나 줄기 등 식물성 재료를 층층이 깐 부엽(敷葉)공법과 흙의 밀도를 증대시키기 위한 목적의 말목지정, 목재구조물 등이 확인된다. 부엽공법은 흙의 인장력과 지지력을 높이고 지하수의 배수를 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성벽 성토공정에서는 수평 방향으로 흙을 층층이 쌓아 사다리꼴 모양의 성벽 중심부를 만들고 중심부의 경사면에 따라 소토, 벽체편, 점토덩어리 등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가며 쌓고 정상부와 외벽에는 자연석을 놓아 흙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는 순서로 성벽을 쌓은 것이 확인된다.성벽을 쌓은 시점은 성벽을 쌓는 각 단계에서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늦은 유물을 기준으로 성벽이 쌓인 시기를 파악하고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의 출토양상으로 보아 월성 성벽은 대체로 5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성벽을 만들어서 6세기대에 증축한 것으로 추론된다.박정재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성벽의 기초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성벽을 쌓기 직전에 성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제사의 제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확인된다. 국내에서 다수의 성벽이 조사 되었지만 성벽 기초부에서 인골이 확인된 것은 월성이 최초의 사례다.인골의 머리 방향은 북동향이며 2구가 나란히 누워 있다. 한 구는 정면을 바라보며 팔다리를 가지런히 하여 누워 있는 신장 166㎝의 50대 남성이고, 다른 한 구는 얼굴이 남성 인골을 바라보며 몸을 약간 튼 채로 있는 신장 153㎝의 50대 여성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몸 전면에 풀과 나무껍질이 덮여 있고, 뼈에서 외상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상태에서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남성 인골의 발쪽에서는 인골과 동시에 놓인 것으로 보이는 토기 4점이 확인되며, 토기 이외에도 인골 주변에서는 동물뼈, 목재, 씨앗 등 유기물과 골각기편 등이 다량 확인된다. 인골 발쪽에서 확인된 토기가 제작되고 유행하는 시기를 분석하여 인골이 묻힌 시점을 유추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현재까지 진행된 성벽 조사는 월성의 일부 구간에 대한 조사만 진행되어 성벽을 쌓는 방법과 과정, 쌓는 시기의 전모를 밝혔다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향후에도 월성이 만들어지고 사용될 당시의 모습을 밝혀나가기 위한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

2021-04-19

옛 지형과 신라… 알천과 북천 그리고 경주

신라왕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완만한 경주 선상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경주 선상지는 크게 고위면과 중위면, 저위면으로 나뉘며 왕경을 비롯한 유적은 주로 저위면과 중위면에 걸쳐 분포한다.경주 선상지는 인간이 생활하기 이전, 빙기와 간빙기 때부터 만들어진다. 경주 동쪽에 위치한 산지에서 자갈과 모래가 그 당시 물길을 따라 옮겨져 마지막 빙기가 끝날 때까지 경주 곳곳에 쌓였다. 현재 경주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북천은 사람이 살기 이전부터 물길과 폭을 달리하며 흐르면서 옛 지형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추정 할 수 있는 옛 물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는데 ①현재 북천 하천제방 정비 이전에 흘렀던 물길 ②동천동 전 헌덕왕릉(사적 제29호) 동쪽부터 약산과 금강산을 따라 용강동으로 흐르는 옛 물길 ③보문동 숲머리마을 부근부터 황룡사(사적 제6호)와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를 거쳐 남천과 서천(형산강)으로 이어지는 옛 물길이다.한편, 문헌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이전까지 알천(삼국사기) 또는 북천(삼국유사)으로 불렸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북천은 경주읍성(사적 제96호) 북쪽을 흐를 때부터 북천이라 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쌓은 제방을 따라 만들어진 숲(오리수) 위치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 왕경에서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몽골 침략 이후 급격하게 쇠퇴해 인구가 줄었던 탓에 현재 북천 남쪽에 있는 전랑지(사적 제88호)와 같은 중요유적은 13세기 후반에서 15세기 후반 사이에 북천 수해로 훼손됐다. 나라에서 경주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높았다면 훼손되지 않았거나 바로 복구됐을 것이지만 현재 유적에 남겨진 흔적으로 보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경주 북천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알천이다.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647년)에 반란을 일으켜 죽은 비담을 대신해서 상대등에 오른 사람 또한 알천이다. 알천은 그만큼 신라와 경주에서 중요한 이름으로 여겨져 왔음은 분명하다.알천 옛 물길 가운데에는 진흥왕(534~576년) 즉위 이후 가장 중요한 국가사업인 황룡사(553년 창건)가 있다. 황룡사가 창건되기 이전 상황은 의외로 단순하지만 신비롭다.황룡사가 새로운 궁궐로 계획되다가 사찰로 바뀐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거대하고 중요한 시설이 지어지기 전 옛 지형과 고고자료는 황룡사 발굴조사가 진전되어, 남쪽 황룡사 광장과 도시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주에서 몇 군데 조사사례가 있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황룡사 광장과 도시유적 주변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어 6세기대에 처음으로 이곳이 논으로 경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 논은 산간지역을 제외하면 주로 평평하고 물이 적당히 있는 곳을 개발하여 경작하는데 이러한 사실로 황룡사 주변이 북천 또는 알천의 영향을 받는 물이 많은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물길 범위 안에 계획되었던 새로운 궁궐의 건립과 이후 황룡사 창건이 가능하게 된 것은 국가가 주도한 하천 치수사업이 반드시 있어야 가능하다. 황룡사가 지어진 남쪽에서는 옛 물길을 따라 모래와 자갈이 많이 쌓여있는 자연지형을 파서 황룡사가 건립된 사역에 골재로 쌓아 대지를 만든 흔적이 조사됐다. 황룡사 사역에서는 흙둑을 서쪽에 만들어 동쪽부터 서쪽으로 흙과 자갈을 번갈아 쌓은 흔적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월성(사적 제16호) 북쪽에는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계림(사적 제19호) 부근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남천으로 합류하는 인공수로(발천)가 있다. 발천은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왕후인 알영이 태어나 목욕을 시킨 곳으로 역사기록은 전한다. 현재 석축으로 둘러싸여 폭이 일정한 발천은 선상지를 만들면서 흘렀던 옛 물길이 지나간 낮은 지점에 있다. 자연하천으로 폭이 넓었던 발천은 방향이 바뀌며 인공수로가 되면서 월성 서쪽을 따라 남천으로 합류하게 됐다.장우영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곳이 개발되기 이전은 자연하천이었고, 역사시대에 하천을 정비해서 인공수로를 만들었던 사실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차례로 조사 중인 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일원 발굴 결과로 알 수 있다.발천 옛 물길은 월지와 월성해자에도 영향을 끼쳤다. 동궁을 건설하면서 높게 흙을 쌓고 월지를 만들면서 주변 지하수와 지표수를 이용하여 조경을 염두에 두고 용수를 확보했다. 모래와 자갈로 가득 차 있던 선상지의 옛 물길을 파서 만든 삼국시대 수혈해자도 삼국통일 직후, 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문환경이 바뀌어 조경 성격이 강한 석축해자 단계로 탈바꿈 한다.우리가 사는 신라왕경과 경주는 그러한 땅 위에 지어져, 오랜 시간 동안 서울 또는 경도(京都)로 불리게 되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역사도시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21-04-12

갑옷을 입은 신라 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조사 중인 경주 쪽샘지구 44호 돌무지덧널무덤의 주변부에서는 제사 후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토기(土器) 파편들이 다수 발견됐다.그중 그릇 받침의 파편에서는 말의 갈퀴, 다리 관절, 발굽 등이 상세하게 표현된 말이 그려져 있었다. 말의 목부터 엉덩이까지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말이 갑옷을 입은 모양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신라시대에는 실제로 말이 있었을까?신라의 도성이었던 월성(月城) 유적에서 말뼈가 발견됐다. 경주 쪽샘에서 가까운 황오동 100번지 유적에서도 무덤 주변에 별도의 구덩이를 파고 말뼈를 묻은 것이 확인됐고, 황남대총과 미추왕릉 지구와 같은 인근 무덤 유적에서도 말뼈들이 발견됐다.이를 통해 토기나 벽화에 그려진 말이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이 신라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신라시대 갑옷을 입은 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경주 쪽샘지구 C10호 덧널무덤에서는 말 갑옷이 바닥에 펼쳐진 채 출토됐다.말 갑옷 주위에는 사람 갑옷도 있었고, 말 갑옷 위에는 칼과 창도 함께 발견됐다. 칼과 창의 위치로 보았을 때 말 주인은 펼쳐진 말 갑옷 위에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 말 투구는 껴묻거리를 묻어두는 딸린 덧널 바닥에서 따로 발견됐다. 현재까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남아 있는 상태가 좋아서 다방면의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연구 결과를 토대로 작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C10호에서 나온 말 갑옷과 월성 해자(垓子)에서 출토된 말을 복원해 ‘말 갑옷을 입은 신라시대 말’을 복원했다.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말뼈를 토대로 크기를 복원한 결과 신라시대에 살았던 말은 어깨 높이가 120~136㎝ 정도 되는 제주마(濟州馬·천연기념물 제347호) 크기 정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쪽샘지구 C10호 출토 말 갑옷을 이 말에게 입혀 본 결과 얇고 네모난 철판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갑옷이 복원된 말에 잘 맞춰 입혀졌다. ‘말 갑옷을 입은 신라시대 말’이 재현된 것이다.재현된 말 투구와 갑옷은 어떤 모양이었을까?말 투구와 말 갑옷은 두께 0.1㎝인 철판으로 제작됐다. 머리를 보호하는 말 투구는 모두 6매의 철판을 못이나 끈으로 이어 붙여서 제작했다. 말의 이마, 코, 볼을 덮어서 보호했고, 시야 확보를 위해서 눈 부분은 뚫려 있다.말 갑옷은 목 가리개(頸甲), 가슴 가리개(胸甲), 몸통 가리개(身甲), 엉덩이 가리개(尻甲)으로 구분된다. 몸을 감싸는 갑옷은 좌·우로 분리되고, 꼬리가 있는 엉덩이 부위는 상·하로 나누어 구성됐다. 두께 0.1㎝인 철판을 두드려서 약간 곡선이 지도록 제작하고 표면은 불에 한번 구워서 오염에 강하게 만들었다.모든 갑옷은 직사각형이나 사다리꼴로 제작된 철판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가죽을 연결해 만들었다. 여러 매의 철판으로 제작됐지만 가죽끈의 공간만큼 상하로 약간 유동성이 생겨서 움직일 때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목·가슴 가리개는 말의 목 뒤쪽, 몸통 가리개는 몸의 위쪽, 엉덩이 가리개는 엉덩이 위에서 가죽끈으로 말에 고정했다. 안장이 고정되는 등 부분과 움직임이 큰 다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말의 거의 전체를 무장할 수 있었다.또 말 갑옷 표면에는 직물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말위에 말 갑옷을 바로 고정하게 되면 갑옷 사이에 털이 끼거나, 살이 철제 갑옷에 찔릴 수도 있기 때문에 갑옷을 입히기 전 직물을 덮었을 가능성도 추론해볼 수 있다.말 투구와 말 갑옷 재현품 무게는 약 22.6㎏이었고, 함께 묻혀있었던 말갖춤(말을 부리는데 사용되는 도구, C10호 덧널무덤에서는 재갈, 안장, 안장 밑에 까는 직물인 언치와 등자, 운주, 후걸이가 출토됐다. 이중 재갈은 말 투구 무게에 합산됨)까지 합쳤을 때는 31.7㎏이었다. 이 위에 투구와 갑옷으로 방어하고 창과 칼로 무장한 무사를 태운다면 무게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강진아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대부분의 말이 몸무게에 비례해 일정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 말은 복원된 말과 같은 모습으로 신라 구석구석을 달리고 있었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말 갑옷은 아직 출토된 사례가 많지 않고, 신라 귀족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므로, 일정한 신분의 사람만 지닐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말은 예민한 동물인데 말 투구와 말 갑옷을 장착한다면 훈련된 말도 필요했을 것이다.실제로 어떠한 형태로 사람을 태우고 달렸는지, 신라에 기병대가 있었는지 같은 숙제가 많이 남아있다.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천오백 년 전 땅에 묻힌 유물들은 지금까지 경주에 남아서 조용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2021-04-05

신라 고분과 가야 고분

지금으로부터 1천600여 년 전후부터 만들기 시작한 신라·가야의 대형 봉토분(또는 고총고분·高塚古墳)은 위치, 모양, 무덤 구조, 시신과 부장품을 놓는 공간, 봉토를 쌓는 방법 등이 달랐다.신라의 수도인 경주시내에는 천마총,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과 주변 쪽샘유적 등에 넓은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다. 신라 왕과 귀족들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현재는 평지이지만, 고분을 만들 당시에는 크고 작은 하천과 늪지가 있었고, 이를 피해 봉토분을 만들었다.대구, 경산, 의성, 상주 등 신라권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의 접경지, 고령, 합천, 함안, 고성, 산청, 남원 등 가야권의 봉토분은, 대체로 구릉이나 산의 능선 위에 만들어져 있다.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높을수록 능선의 정상이나 끝자락에 커다란 봉분을 쌓았다. 봉분 안을 발굴하면, 주인공이 묻힌 무덤과 주변으로 흙, 돌 등을 여러 방법과 순서로 쌓은 모습이 드러난다. 특히 무덤의 구조와 만든 방식은 고분과 고분군을 만드는 사람들의 장례문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경주는 덧널(목곽·木槨)을 2~3중으로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관을 넣는데, 관이 없이 시신을 안치하기도 한다. 덧널 옆과 위는 셀 수 없이 많은 냇돌(하천에 퇴적된 표면이 둥글둥글한 돌)을 채우는데, 일정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를 엮은 뒤 돌을 채웠다. 이러한 무덤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이라 한다. 포항, 울산, 대구, 창녕 등에도 일부 확인되지만 경주가 압도적으로 많아, 신라 최고 지배층 특유의 무덤 구조임을 알 수 있다.신라 주변 지역인 경산 임당고분군은 무덤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바닥에 나무곽을 놓은 뒤 구덩이와 곽 사이를 돌로 채웠다. 구덩이 위는 큰 돌로 덮었다. 의성 금성산고분군은 적석목곽묘와 비슷하지만 무덤 벽을 돌로 차곡차곡 쌓은 듯 정연하여 차이가 있다. 대구 불로동고분군, 성주 성산동고분군은 무덤을 나무곽이 아닌 돌로 쌓은 돌덧널(석곽·石槨)이다. 상주 병성동고분군도 돌덧널이며 길고 좁은 모양이다.가야의 봉토분은 대체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면을 맞춘 돌덧널이지만 초기 봉토분인 지산동 73호분의 경우, 덧널을 놓고 무덤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 돌을 쌓듯이 채웠다. 인근 합천 옥전고분군도 덧널과 돌덧널을 함께 사용하는 점이 특징이다.신라·가야 접경의 창녕, 부산 등에도 많은 대형 봉토분이 있다. 창녕은 처음 돌덧널무덤이지만, 천장에는 지산동 73호분, 옥전고분군처럼 나무 뚜껑을 덮었다. 이후 돌 뚜껑으로 바뀌고, 네 벽 중 짧은 한 벽을 틔워 시신과 부장품을 넣는 독특한 방식도 보인다.시신과 부장품을 넣을 때 공간을 마련하는 모습도 다양하다. 경주시내는 주부곽식(主副槨式), 즉 시신을 묻는 곳(주곽·主槨)과 부장품을 넣는 곳(부곽·副槨)을 별도로 만들다가, 나중에는 한 곳에 합쳐(단곽식·單槨式) 안치한다. 주곽에도 그릇 등이 가득 든 나무 궤를 넣기도 한다. 신라 주변부, 가야와의 접경지 및 고령, 합천 등에서도 ‘日’자형, ‘昌’자형, ‘11’자형, ‘凸’자형, ‘ㄱ’자형 등 다양한 배치를 보이는 주부곽식이 있다.무덤을 만든 다음 흙이나 돌로 봉분을 채우고 고분의 형태를 완성한다. 신라의 적석목곽묘는 타원형, 그 외는 대체로 원형을 띤다. 봉분 가장자리에 둘레돌(호석·護石)을 놓기도 하고, 구덩이(주구·周溝)를 파기도 한다. 둘레돌은 경주, 대구, 창녕, 고령 등에 있지만 함안, 고성, 부산, 남원, 의성 등 해안지역과 주변부에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주시내 봉토분은 무덤과 적석부를 만든 후 봉분과 둘레돌을 쌓지만, 그 외 지역은 무덤을 만들 때 함께 쌓기도 한다.포클레인, 덤프트럭이 없는 당시에, 거대한 봉분을 쌓기 위해 여러 방법과 기술이 동원되었다. 작업 공간을 나누거나 위치 표시를 위해 돌이나 진흙덩어리 등으로 열을 지어 기준선을 만든 다음 고운 흙, 진흙, 돌이 섞인 흙 등 다양한 재료로 엇갈리거나 맞닿아 쌓아 무너짐을 방지했다.(구획·區劃성토) 고령 지산동고분군 등에서는 한 봉분 안에 주인공 무덤 이외에 순장자의 무덤을 따로 만드는데, 봉분 축조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정인태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또 경산, 고령, 함안 등에서는 도넛 모양으로 봉분 가장자리에 흙둑을 먼저 만든 뒤 안을 채우는 방식(토제·土堤성토)이 나타나기도 한다. 발굴에서 자세하게 관찰하면 방망이로 흙을 다지거나 봉분을 수리한 흔적을 찾기도 한다.마지막에는 봉분의 모양을 다듬고 표면에 진흙을 한 겹 발라 완성하는데, 최근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발굴에서 뚜렷이 확인되었다. 경주, 대구, 창녕, 고성 등에는 먼저 만든 봉토분 옆에, 합천 삼가고분군은 위에 덧붙여 새 고분을 만든다. 고성에서는 다 만든 봉토분을 일부 파고 여러 무덤을 배치하기도 한다.이렇듯 옛날 신라와 가야에서는 다양하고 복잡한 방법으로 많게는 수 백기, 수 천기의 고분이 떼를 이루는 고분군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신라·가야인이 남겨 놓은 봉토분을 통해 그들의 정신세계와 기술력을 느낄 수 있다. 금은보화와는 또 다른 과거와의 연결고리인 것이다.

2021-03-22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 이야기

사람들은 ‘경주’라고 하면 거대한 무덤을 떠올릴 것이다. 그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대릉원 일원(사적 제512호)에 모여 있다. 요즘은 그 서편으로 ‘황리단길’이 조성되어 경주를 방문하는 이들이 많이 찾곤 한다. 1970년대 대릉원이 막 조성될 무렵을 보자면 경주의 풍경도 많이 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거대한 무덤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 무덤이 만들어질 그 옛날에도 왕과 귀족의 사후(死後) 평안을 바라는 최고·최대의 구조물이었던 만큼 그 안의 부장품은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거대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이 어려운 돌무지덧널무덤인 까닭에 많은 유물을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 이는 문헌 자료가 부족한 당시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4~6세기 신라 마립간기(麻立干期)를 대변하는 이러한 구조물의 축조는 당대에도 국가 차원의 사업이자 사람들에게는 큰 화제였을 테지만, 오늘날에도 이러한 무덤 발굴은 많은 관심을 받는 큰 사업임은 틀림없다. 그 가운데서도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은 당시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고 한국 고고학계에서도 기념비적인 사업으로 인정받고 있다.이처럼 문화재 발굴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두 고분의 발굴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황남대총과 천마총을 발굴하였던 70년대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시작하고 급변하던 시기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관광자원을 확보할 목적으로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일환으로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 이루어지면서 황남대총과 천마총 발굴을 기획하였던 것이다.원래는 황남대총을 발굴하여 그 내부를 복원·공개할 계획이었으나, 남·북분을 합치면 120m에 달하고 당시 조사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에 앞서 천마총을 시험 발굴하기로 한 것이다.천마총 발굴은 1973년 4월에 착수하여 그해 12월까지 단 8개월 만에 마무리하였다. 이처럼 조사가 단기간에 그치고 황남대총을 위한 시험적 발굴이었지만,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공이 쓴 금관과 천마(天馬)가 그려진 장니(障泥)를 비롯하여 1만1천526점의 유물을 수습한 것이다.이와 함께 목관(木棺) 주위에 두른 석단(石壇·돌로 만든 단)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등 지상식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명확히 밝히는 성과가 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유물 수집 목적의 발굴에서 벗어나 사분법(四分法)을 고분 발굴에서 처음으로 도입하는 등 조사방법의 큰 진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천마총 발굴이 일단락되고 관광자원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듯 보였기에 황남대총의 발굴을 중단할 수도 있는 여지가 생긴 듯하였다. 당시 발굴을 담당하였던 김정기 단장도 황남대총 발굴에 대해 시기상조로 보아 내심 그런 기대를 한 것 같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천마총의 성과는 오히려 그다음 발굴인 황남대총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여놓았고 발굴은 강행되었다.정익재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황남대총 발굴은 북분을 먼저 조사하고 남분을 조사하였다. 이는 발굴 과정상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두 고분을 동시에 발굴하였을 때 오는 착오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북분은 1973년 6월 천마총의 적석부(積石部·시신을 안치하는 나무곽을 둘러싼 돌무지)를 조사할 무렵 봉분 발굴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12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북분 발굴에서는 역시 피장자가 착장한 금관을 비롯하여 3만5천769점의 유물이 출토하였다.또한, 나무곽 주변으로 적석(積石)을 쌓기 위해 마련한 목가구(木架構)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하여 천마총 발굴에 이어 또 하나의 신라고분 구조를 밝히는 성과가 있었다. 남분 발굴은 북분의 적석부가 조사될 무렵인 1974년 8월 재착수하여 1975년 12월에 마무리하였다. 남분 발굴에서는 천마총, 북분과는 달리 금동관이 출토하였고 이를 비롯해 모두 2만2천793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남분 조사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나무곽이 2중 곽(또는 3중 곽)인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하여, 남분보다 뒤에 만든 북분, 천마총과는 또 다른 형식의 무덤 구조를 밝힐 수 있었다.이처럼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학계에는 신라 고분연구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줬을 뿐만 아니라 돌무지덧널무덤의 조사방법, 구조, 편년, 유물 등 적지 않은 성과가 도출되어 이후 발굴 조사와 연구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더불어 일반 시민에게는 대표적 여행지로 자리했고, 대외적으로는 발굴된 유물이 다른 나라의 박물관 등에 전시돼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고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도 수행하였다.경주를 오게 된다면 마립간기의 신라와 1970년대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간직한 황남대총과 천마총을 꼭 한 번 답사하길 바란다. 아울러 이러한 문화유적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나아가 다음 세대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한번 고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1-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