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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 유적 발굴 담소

등록일 2021-07-19 19:20 게재일 2021-07-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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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월지 출토 목제 선박의 운반 모습.

경주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곳에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유적(사적 제 18호)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월지는 신라 문무왕이 서기 674년에 만든 연못이고, 동궁의 임해전은 서기 679년에 지었다고 한다. 동궁과 월지는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연회장으로도 이용됐으며, 통일 신라 최후의 어전회의를 열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했던 곳으로 신라의 희비(喜悲)를 함께했던 역사의 주요한 무대였다.

동궁과 월지에 대한 최초의 발굴 기록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25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보면 ‘고적을 연구하기 위해 경주에 가있는 일본 제국대학 교수 원(原)박사는 안압지 부근에서 음석(陰石·오목한 돌)으로 만든 길이 오십일 간(間)의 곡선상의 도랑을 발견했는데 군당국에서 발굴하는 중이라하며 그것은 고적 중에도 매우 진귀한 것이다.’라고 당시 발굴에 대해 설명했다. 기사와는 별도로 남아있는 일제강점기 유리원판 사진에서도 발굴 된 석조 도랑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발견한 석조 도랑은 지금도 동궁과 월지 유적 안에서 통일 신라인들이 만들었던 모양대로 남아있다. 석조 도랑의 길이는 83m이며 건물의 지붕에서 떨어진 빗물의 배수로로 이용되었고 연못과 연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초 청와대의 구상으로 경주종합개발계획 10개년 계획이 발표됐다. 그 일환으로 경주시의 유적과 시의 외관을 정비하는데, 연못도 정비하자는 생각으로 준설공사를 실시했다. 준설 작업을 시작하기 전의 월지는 잡초와 수양버들만이 엉성하게 있었다. 1926년에 세운 임해정(臨海亭)이라는 정자가 있어(현재 황성공원의 호림정) 사람들이 유적지라고 생각해 방문했다.

1974년 준설작업이 시작된 뒤 연못에서 다수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1975년 3월 준설작업을 멈췄다. 그리고 2년 2개월 동안의 대규모 발굴조사가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실시됐다.

발굴결과 4천700평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그 내부에 세 개의 섬이 발견됐으며, 연못을 따라 석재를 쌓아 만든 호안석축도 확인됐다. 못의 서쪽과 남쪽에서는 대형 건물터와 여러 건물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에서 출토 된 유물의 수량은 총 3만 3천여 점이며, 기와, 벽돌, 건축부재, 불상, 그릇, 숟가락, 배, 주사위, 금동제 가위, 목간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조사의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로 목제 선박의 수습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1975년 4월, 조사단은 월지의 중도와 소도 사이에서 뒤집힌 모습의 나무로 된 배를 발견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배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노출된 배는 세 개의 통나무를 이어 만든 길이 6m, 너비 1.2m로, 부식이 심해 스펀지와 같은 상태였다. 조사단은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도 약해진 배를 수습하기 위해 고심 끝에 묘책을 찾아냈다. 배는 가만히 둔 채, 배 밑의 흙을 파낸 후 몇 군데에 판재를 넣어서 완전히 고정시킨 다음, 흙채로 들어 옮기는 것이었다. 1975년 7월 25일 목선을 경주 박물관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많은 기자들과 손님들이 현장에 모였다. 조사단은 계획된 대로 배를 고정하고 지지한 뒤 20여명의 작업원들이 묶어둔 끈을 붙잡아 연못바닥에서 들어내어 움직여 점차 오르막을 올라갔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힘이 수평으로 균등하게 들어가지 않았는지 배가 휘어지며 가운데 부분에 금이 가버렸다. 모두들 당황하는 가운데 기자들은 ‘목선 두 동강’이라고 전보를 보냈고, 각종 신문에 특종으로 대서특필 됐다.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김동현 단장도 이 일로 그날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 무사히 배를 박물관으로 운반해 보존처리를 가능하게 한 공로로 사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영배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지영배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보존처리가 끝난 목선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월지관에서 실견(實見)이 가능하다. 월지관에 방문하게 된다면 그 때 금이 갔던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발굴조사 후 1980년 9월까지 유적의 정비·복원사업을 실시했다. 발굴당시 출토된 건축자재들을 기초로 하여 3기의 정자를 복원했고 발굴된 건물터의 기둥자리에 화강암을 다듬은 초석을 두었다.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동궁과 월지 유적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07년부터 현재까지 통일신라 왕경의 구조와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 동궁과 월지 유적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성과로 2017년에는 통일신라시기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로 여겨지는 석조물과 터널형 수로시설이 함께 발견돼 세간을 놀라게 했다.

앞으로의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동궁과 월지 유적은 통일신라 사람들의 어떠한 놀라움을 우리에게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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