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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과 그의 시대

등록일 2021-07-26 20:02 게재일 2021-07-2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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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과 그의 후손들이 묻혀있다고 추정되는 서악동 고분군.
진흥왕과 그의 후손들이 묻혀있다고 추정되는 서악동 고분군.

진흥왕은 신라의 정복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복군주라는 표현은 그의 생애를 오롯이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이 자리에서는 진흥왕이 왕위에 있었던 시대와 함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되짚어보려 한다.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5F61>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며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과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출생시점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왕위 계승 당시 7세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을 토대로 534년생(법흥왕 21년)으로 여겨진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6세 무렵인 539년 음력 7월 3일에 왕실 사람들과 함께 지금의 울주군 천전리에 위치한 계곡을 둘러보았다는 내용이 울주 천전리 서석에 새겨져 있다. 그로부터 거의 1년 뒤인 540년에 신라 제24대 왕으로 즉위하는데 당시 어렸던 그를 대신하여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정치를 맡았다.

지소태후가 정치에 관여하던 시점이 언제까지 이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12년이 되는 551년에 연호가 개국(開國)으로 바뀐 점이 주목된다. 보통 개국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신라는 새로운 왕조로 바뀌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왕도 즉위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신라 내부의 정치적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551년부터 진흥왕이 직접 정치를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진흥왕이 자신만의 정치를 시작한 그 해(551년), 신라는 고구려를 쳐서 오늘날 죽령(竹嶺) 이북 땅을 차지했으며, 553년에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와 삼국유사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전한다. 일본서기 흠명기 13년조(552년)에는 백제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고 했으며, 삼국유사 진흥왕조에는 554년에 백제가 신라를 침략했는데 그 침략의 원인을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에서 찾았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고구려의 수도에서는 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서북쪽 국경에서는 돌궐의 위협이 점차 커져갔다. 고구려는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로인해 신라와 백제의 한강유역 진출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은 당시 국제정세와 맞물려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였다. 즉 신라는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고구려로부터 인정받았고, 고구려는 신라의 북진을 한강유역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스스로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 원인에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과 그로 인해 한강 유역을 제대로 지키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신라는 백제에서 고구려로 연합의 대상을 바꾸면서 한강 유역 지배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진흥왕의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안목을 바탕으로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에게 유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만들어냈다.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에 등장하는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해를 청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온다.’는 구절은 진흥왕의 업적을 칭송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묘사한 적절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유학(儒學)이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물론 법흥왕대 불교 공인 이후 출가가 허락되고, 왕실에서 민간으로 불교 신앙이 전파됨에 따라 그것은 신라사회의 중심 신앙이 되었다. 이와 함께 유학은 일부 지배층이 학문이나 정치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국 고대 주(周) 왕조의 시조 후직(后稷)의 이름을 본뜬 김후직(金后稷), 주 문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을 본뜬 주공지(周公智), 공자가 지은 역사서 춘추(春秋)의 이름을 본뜬 김춘추(金春秋) 등의 이름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즉,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경전을 익히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한 경전은 중국에서 들여왔다. 그러므로 한문(漢文)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유학의 기초 경전을 학습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유학은 신라 사회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그것이 점차 사회 전반에 자리 잡으면서 사람의 이름을 짓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측면에서 진흥왕이 다스리던 시기는 황룡사 건립과 장육존상 설치 등 불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시점이지만 유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신라 사회에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는 시기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진흥왕과 그의 시대가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개인적인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진흥왕 즉위 33년(572년)에 그의 아들이자 태자인 동륜(銅輪)이 죽고, 같은 해 10월에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팔관연회(八關筵會)가 열렸다. 삼국사기와 우리나라 유명한 스님들의 생애를 담고 있는 해동고승전에는 진흥왕이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는 이름을 짓고 살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지난날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자신의 아들과 영토 확대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마음이 기록처럼 불교를 받드는 형태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진흥왕의 시대는 신라에게는 영광스러운 것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고단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는 진흥왕만이 아니라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군주가 겪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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