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사람 모양을 만드는 일을 맡고 있는 한 신라의 공인(工人)은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사람 모습을 만들고 있다. 작은 크기에 최대한 특징을 표현해야했는데, 특별한 옷을 입고 머리를 장식한 모습을 잘 표현하기 위해 서역에서 왔다는 특별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집중하고 있다.”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서역인의 모습을 한 토우(土偶)를 통해, 그 토우를 만들던 신라 공인을 떠올려 보았다. 그 공인이 만든 독특한 복장의 토우는 16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토우는 작은 크기(2~10cm 내외)에 그 특징을 정확히 담아낸다. 토기뚜껑이나 항아리 등에 장식적인 기능으로 부착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한 눈에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예를 들면 임신한 여인이 가야금을 뜯는 모습, 남녀의 성행위 장면, 얼굴이 풍선처럼 동그랗게 과장된 사람,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 등이 인상적인 토우의 모습 등이다.
앞서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독특한 복장의 토우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복장(服裝) 표현을 비교적 충실히 하고자 했던 제작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비록 팔 부분이 결실된 상태로 출토되어 자세를 완전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특별한 행동 혹은 자세 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얼굴과 몸은 과장되지 않게 일반적인 비율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복장이었다. 머리에 띠와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천을 덧댄 터번을 두르고 있다. 팔 부분의 소매가 좁은 카프탄(caftan·지중해 동부사람들이 입는 셔츠 모양의 기다란 상의)을 입고 있으며 허리는 꼭 맞게 조여져 윤곽선이 드러나고 무릎이 살짝 덮이는 길이다.
이러한 복장은 효율적인 이동성을 고려한 기마민족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고대 서아시아나 당(唐)나라에서 호복(胡服)으로 불리던 소그드인(Sogdian·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현재의 이란계 주민)의 옷과 유사하여 서역의 영향을 받은 차림새로 볼 수 있다. 정확한 유래 지역과 민족을 특정하기 어렵지만, 그 동안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다양한 서역 유물을 통해서도 그 연결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서역의 유물로는 이국적인 로만글라스(Romanglass·로마제국에서 제작되어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유입된 유리제품), 장식보검(계림로 14호분 출토) 등이 확인된 바 있다.
서역 사람의 모습으로는 괘릉(원성왕릉)의 무인석상과 경주 용강동 고분 출토의 토용(土俑)등이 알려져 있다. 왕릉에 부장된 로만글라스, 왕의 무덤을 지키는 서역인모습의 무인석상 등을 통해, 당시의 교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적극적인 신라 외교의 일면임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한창 발굴조사 중인 월성에서 최초로 확인된 신라의 아주까리(파마자)씨앗은 교류의 새로운 단면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아주까리 씨앗은 주로 기름을 사용하는데 머릿기름이나 약용 식용 혹은 등잔용 기름등으로 이용하였다. 신라시대를 기록한 ‘삼국사기’ 혹은 ‘삼국유사’에는 남겨진 바가 없었는데, 이러한 아주까리에 대한 흔적을 월성해자의 깊은 흙 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아주까리의 출현이 더욱 반가웠던 것은 씨앗이 한반도 자생종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아주까리 씨앗은 인도 및 아프리카 등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월성에서 찾은 길이 9mm, 폭 7mm의 아주 작은 씨앗이 어떻게 신라에까지 왔을까? 또 그 사용법과 재배 방법은 누가 누구에게 전달해 주었을까? 단 1점의 아주까리 씨앗은 우리에게 지금부터 풀어야할 많은 질문과 숙제를 남겨 주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서역사람들의 모습은 보다 적극적으로 당시의 국제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서역의 물건과 이국적인 식물 혹은 동물들을 배에 싣고 저 먼 지중해 바다를 지나 우리에게 당도했을 것이다. 혹은 먼 사막길을 거치며 수많은 밤과 낮을 지났을 것이다. 먼 곳에서부터 신라까지 직접 운반한 사람들은 용강동 고분의 토용처럼 덥수룩한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 터번을 쓰고 긴 상의를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을 수도 있다. 먼 바다 혹은 길을 지나 신라에 당도한 그들도 신라의 문화를 배웠을 것이다. 그 곳은 활기가 넘쳤을 것이고, 호기심과 새로움에 대한 호의적인 교환은 신라가 한반도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에서 더욱 확장해나갈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신라 공인이 담은 서역인의 모습과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 아주까리 씨앗을 통해 우리는 신라 사람들과 서역인들이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여행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단서들이 모여 연결된다면, 신라의 다양한 교류 관계의 실타래를 모두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