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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다시보기

등록일 2021-08-02 20:01 게재일 2021-08-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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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자리한 김유신의 무덤으로 알려진 묘.

‘삼국사기’는 현재 남아 있는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이 책은 전체 50권이며 그 가운데 왕이 아닌 인물들의 생애를 담은 열전(列傳)은 10권을 차지한다. 그 10권 중에서 3권은 김유신이라는 1명에 대한 내용인데, 이는 다른 인물을 서술한 내용에서 볼 수 없는 높은 비중이다. 이러한 인물에 대해 일제강점기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그를 가리켜 지혜와 용기가 있는 명장(名將)이 아니고, 음흉하고 독살스러운 정치가이며,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자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김유신의 삶을 통해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김유신의 집안은 원래 신라 출신이 아니었다. 그 조상은 금관가야 왕족이었는데 금관가야가 532년(법흥왕 19년)에 신라에 항복하면서 그 왕과 일족은 진골 귀족으로 대접받았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이는데 참여했으며, 아버지인 서현(舒玄)도 군사 지휘관을 지냈다. 이에 김유신 가문은 장군 집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유신의 이름을 지을 때 그의 아버지가 유학(儒學)의 경전을 인용하고, 중국의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본 뜬 것으로 보아 유학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따라서 김유신 집안은 군사적인 능력과 학문적인 지식을 동시에 갖춘 문무(文武)에 조예가 깊은 가문이었다. 김유신이 종종 유학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여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학문에 익숙한 집안 환경 때문이라 여겨진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결합할 수 있었던 것도 공통적인 집안 환경과 관계있을 것이다. 즉, 김유신 집안은 군사적인 능력을 통해 신라에서 진골귀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금관가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차별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춘추는 왕족이었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귀족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점 때문에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보통 김유신과 김춘추가 결합할 수 있었던 요인을 두 집안이 비주류였기 때문에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비슷한 집안 환경도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즉 김춘추의 경우 그의 이름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하는 역사책 춘추(春秋)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김춘추 가문도 김유신 가문처럼 유학에 익숙한 환경이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사람이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결합은 이러한 측면에서 단순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어쩌면 당시 신라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 중심 정치 형태를 유학에서 추구하는 왕도정치로 바꾸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불교를 완전히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종교로서 남겨두고, 정치에는 유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즉,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다.

647년 1월에 벌어진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은 귀족들 사이에 있었던 권력 다툼이 아니라 장차 신라 사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정치 지향을 두고 벌어진 대립이었다. 즉 비담(毗曇)이라는 불교적인 용어를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때 그는 불교 중심적인 정치성향을 지녔고, 반대로 김유신과 김춘추는 유학적인 이념에 바탕을 둔 정치를 희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립 이후 김유신과 김춘추가 승리함에 따라 당의 연호(年號)와 관복(官服) 도입 등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추진했다. 따라서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비담과 염종의 대립은 권력 투쟁이 아니라 국가의 운영 방향을 둘러싼 갈등으로 볼 수 있다.

김유신이 유학에 바탕을 둔 정치 이념을 추구했지만 당에 대한 그의 이미지는 항상 좋은 것은 아니었다. 즉, 백제 멸망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 사이에 갈등이 나타났을 때 당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사대주의자라기보다는 국익에 충실한 현실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한편 김유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660년 이후 백제와 고구려 멸망 그리고 나당전쟁 과정에서 당나라와 왜는 그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즉 당나라는 그에게 벼슬이나 많은 포상을 내렸으며, 왜는 문무왕에게 선물로 배 1척을 보내면서 김유신에게도 따로 1척을 보낼 정도였다. 당나라나 왜의 행동은 김유신이라는 인물이 신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풀 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그를 알고 있으니, 그의 사람됨이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러한 표현은 이 글의 앞부분에 소개한 신채호 선생의 평가와 정반대이다. 이러한 정반대의 평가와 별개로 그의 삶을 되짚어 보면 그리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과연 여러분들은 김유신을 어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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