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의 북동쪽 산록에는 석탑 하나가 서 있다. 어딘가 모르게 이 탑이 익숙하고 친근하다면 아마도 불국사 대웅전 앞에서, 감은사지에서 혹은 경주 박물관의 정원에서 이와 닮은 탑을 이미 마주한 적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국사 석가탑처럼 완벽하지도, 감은사지 석탑처럼 웅장하지도 않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 탑은 놀랍게도 국보에 등록된 보물 중의 보물이다.
1937년 이 탑이 위치한 낭산의 동쪽 기슭에서 ‘황복(皇福)’,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이 기와편이 정식 조사를 통해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이전까지는 막연히 기록으로만 전해왔던 ‘황복사’의 실체가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드러난 것이며, 이로써 이 탑은 ‘황복사지 삼층 석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황복사와 관련한 문헌 기록은 매우 불친절하다. 이 절을 누가, 언제, 어디에,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면서 신라의 고승(高僧) ‘의상’이 29세에 머리를 깎고 출가한 절이라고만 ‘삼국유사’가 넌지시 알려줄 뿐이다.
의상의 출생 시점은 ‘부석본비’와 ‘해동고승전’을 통해 625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의상이 출가한 나이 29세를 더하면 653년 즉, 진덕(여)왕 7년이 된다. 이는 황복사가 최초로 창건된 시기는 아니다. 하지만 늦어도 7세기 중엽 진덕왕이 신라를 통치하던 시점에는 황복사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 ‘부석본비’에서 전하는 의상의 전기에 따르면 “‘관세’에 출가(<4E31>歲出家)하여 영휘 원년 경술년(650)에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에서 어려움에 직면하여 돌아왔다.”고 전한다. 여기서 관세(<4E31>歲)는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나이 즉, 20세 미만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의상이 29세 이전에 이미 출가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의상의 출가 시점은 653년보다 더 빨라질 수 있으며, 의상이 출가한 황복사의 건립 시기 역시도 더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7세기 무렵에 건립되었으리라 막연히 추정할 뿐이다.
황복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1933년 간행된 ‘동경통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황복사는 낭산의 동쪽에 있으며, ‘팔부중상’이 새겨진 삼층 석탑이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동경통지는 17세기 조선 현종 무렵 간행된 ‘동경잡기’를 수정, 보완한 것으로 동경잡기 역시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동경지’를 참고한 후대의 기록이다. 황복사지 삼층 석탑이라 전하는 이 탑이 낭산의 동쪽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지는 않아서 이 기록 역시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1942년 6월 어느 날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서 2층 지붕돌 내부에 조성된 사리공이 확인된 것이다. 사리공에는 많은 양의 유리구슬과 사리함, 금동제, 은제 제기 등이 확인되었다. 사리함 뚜껑 내면에는 탑을 만든 시기와 경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마침내 탑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탑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천수 3년(692) 효소대왕이 어머니이신 신목태후와 함께 임진년(692) 7월 2일 승하하신 부왕 신문대왕과 종묘(宗廟)의 신성한 영령(聖靈)을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어 “성력 3년(700)에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나시고, 대족 2년(702)에는 효소대왕도 승하하시어, 신룡 2년(706)에 지금의 대왕(성덕왕)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의 2층에 안치하였다.”고 밝히며 이를 통해 신문대왕과 신목태후, 효소대왕의 명복을 기원하고 있다.
탑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대목이다. ‘종묘’란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또 ‘선원가람’이란 고요히 앉아서 참선(기도)을 주로 하는 사찰이다. 비록 이 탑이 전하는 기록에서 사찰의 이름이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성스러운 영령의 위패를 모신 종묘의 기능을 수행한 사찰임은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다.
2016년 낭산 일원의 문화재를 정비하고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황복사지 삼층 석탑과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지만, 탑 앞에 펼쳐진 넓은 들에서 금당으로 추정되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건물지의 남쪽에는 탑으로 추정되는 방형의 건물지 2동이 대칭을 이루며 확인됐다. 두 개의 탑에 하나의 금당을 갖춘 감은사나, 불국사와 유사한 구조다. 이 외에도 12지신상을 기단으로 사용한 건물지, 회랑, 연못 등이 확인되었으며, 다수의 금동불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절터의 동편에는 완성되지 못한 왕릉급의 무덤이 확인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