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대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문헌기록에는 유독 신성스럽고 기이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3년(919년)에 사천왕사의 흙으로 만든 불상(塑像)이 들고 있던 활의 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소리를 냈는데 마치 짓는 것 같았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무왕법민(文武王法敏)에는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자, 갑작스런 풍랑이 일어 당나라군의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이 구절은 어느 소설에 등장할 법한 말은 아니다. 바로 사천왕사와 관련된 기록이다. 사천왕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앞서 사찰이 위치한 낭산(狼山)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할 것 같다.
낭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남북방향으로 긴 능선을 이루는데 삼국사기 권3 실성이사금조에는 “12년(413년) 가을 8월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났는데 바라보니 누각과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마땅히 이곳은 복 받은 땅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처럼 낭산은 신라왕실은 물론 신라인들에게도 신성한 신유림(神遊林)으로 인정받았고 그래서인지 사천왕사의 창건은 물론 주변으로 망덕사지, 황복사지, 선덕여왕릉 등 다수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이렇듯 낭산은 당시 신라사람들에게 복된 땅이자 신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사천왕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닐까?
사천왕사와 관련된 창건기록으로 이야기를 되돌아가 본다. 삼국유사 기록처럼 사천왕사는 당나라군의 침입을 물리친 영험을 계기로 창건되었다. 당나라군이 침입한다는 소식에 왕은 여러 신하들과 방어책을 논의했는데 명랑법사(明郞法師)가 아뢰길 “낭산 남쪽 신유림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사찰을 짓기에는 급박하자 명랑은 다시 “채색 비단으로 절을 임시로 지으십시오”라고 답한다. 이에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지으니,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싸우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의 배가 모두 침몰하였고,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문무왕 19년·679년)라고 했다 한다.
문두루비법은 산스크리트어 무드라의 음을 딴 밀교의 비법으로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의 재난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급박하게 임시로 만든 후 탄생한 사천왕사는 고려시대까지 문두루비법과 관련된 단석(壇席)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혹시 이 흔적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동·서 단석지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사천왕사와 관련해서는 기록뿐 아니라 발굴조사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발굴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이루어졌고 강당지-금당지-탑지 등의 가람배치를 밝히는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금당지 앞에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 서 있었을 탑지이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쌍탑의 석탑으로 정착되는데 목탑에서 쌍탑의 석탑으로 변화하는 가교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사천왕사이다.
흔히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 한국은 석탑이 많은 나라라고 하는데 물론 한국에서도 목탑과 전탑이 있었다. 황룡사 구층목탑과 목탑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사찰이 여러 곳 존재한다.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아 삼국시대 목탑의 원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목탑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탑지에 심초석과 사천주가 있느냐에 따라 알 수 있는데 사천왕사에서는 동·서 탑지에서 모두 목탑지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발굴조사 당시 주목된 것은 탑지 기단면에서 확인된 벽전이다. 바로 녹유신장벽전이다. 이 벽전은 명칭부터 논란이 있었는데 사천왕상, 신장상, 신왕상, 소조상, 팔부중상 등 어떻게 불러야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여기에서는 녹유신장벽전으로 부르고자 한다.
녹유신장벽전은 목탑 기단부 한 면에 6점씩 모두 24점이 배치되었고 따라서 동·서 탑지를 합하면 모두 48점인 셈인데 얇은 녹유를 시유한 것으로 복원결과 높이 90cm, 너비 70cm, 두께 7~9cm로 확인되었다. 이 벽전은 아치형의 감실에 갑옷을 입은 눈을 부릅뜬 신장상으로 두 악귀위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매우 실감 있고 자세하게 표현된 부조상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각각의 벽전 모습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얼굴의 모양과 바라보는 방향, 머리에 쓰고 있는 관(투구)의 모양, 갑옷의 모양, 앉아있는 자세 등이 달라 총 3종류로 구분된다. 특히, 목탑지 한면의 중앙에는 계단이 있고 이 계단을 기준으로 3종류가 1세트를 이루어 한 면에 2세트씩 배치된 것인데 이 상들의 얼굴 방향이 첫 번째는 좌측, 두 번째는 중앙, 세 번째는 우측을 응시하고 있다. 이는 조각에 있어 뛰어난 불교예술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배치에 있어서도 매우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녹유신장벽전은 통일신라시대 우수한 조형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이처럼 목탑기단면에 장식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혹시 녹유신장벽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세 종류의 벽전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각각 어떻게 다른 자세와 모양을 취하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사천왕사를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