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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속 경주 남산의 스님들

등록일 2021-11-15 19:47 게재일 2021-11-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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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의 승려상.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보물 제2071호)과 ‘삼국유사’ 탑상편 ‘생의사석미륵’조에 기록된 미륵불상은 동일한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최근 이 상과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었는데, 불상의 도상(미륵의좌상)과 석실(석굴) 봉안과 같은 특징을 고려했을 때 이 불상은 선관 수행(禪觀修行)의 목적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승려의 수행법 중 하나인 선관은 특정한 대상을 관(觀)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선관은 몇 가지 수행단계를 거치지만, 결국 부처(미륵불)의 친견이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남산 불적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덕왕 때 생의(生義)라는 스님이 항상 도중사에 거주했다. 꿈에 스님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 풀을 묶어서 표를 하게하고, 산의 남쪽 마을에 이르러서 말하길, “내가 이곳에 묻혀있으니 스님은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주시오”라고 했다. 꿈을 깬 후 친구와 더불어 표시해 둔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보니 석미륵이 나오므로 삼화령 위에 안치했다. 선덕왕 13년(갑진)에 절을 짓고 살았으니 후에 생의사라 이름하였다”

이야기 속 생의스님은 평소 도중사에 거주했었다. 그는 꿈에서 알려준 대로 남산에 올라가 석미륵상을 찾은 뒤 삼화령 위에 불상을 봉안하고, 선덕왕13년(643 혹은 644) 그곳에 생의사라는 사찰을 만들었다. 생의스님은 원래 왕경의 ‘도중사’ 승려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남산에 ‘생의사’를 짓고 거처를 옮긴 것이다. ‘생의사’라는 사명(寺名)에서 알 수 있듯 이 절은 생의스님을 위한, 생의스님에 의한 사찰임이 감지된다. 이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삼국유사’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로 이어진다.

“3월 3일(765년)에 왕이 귀정문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 분이 배회하고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를 입고 앵통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맞이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가 들어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는 충담이라고 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승려가 답하기를 “소승은 매해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 이야기는 충담스님이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기 위해 남산에 갔다가 돌아오고 있는 장면이다. 충담스님은 매해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하러 남산에 다녀온다고 했다.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것 역시 하나의 수행과정. 이야기 속에서 충담스님은 남산에 기거하는 것이 아니라, 왕경 사찰에 거주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즉 스님의 본사(本寺)는 왕경의 평지사찰이었고, 남산에는 특정시기에 수행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구성에서 평지사원과 남산 불적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기사에는 남산과 관련한 승려의 모습을 수행자처럼 묘사하고 있다.

“한 거사가 행색이 남루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 광주리를 이고 와서 하마대 위에서 쉬고 있었는데 광주리 안을 보니 마른 생선이 있었다. (경흥법사의) 시종이 그를 꾸짖어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그 살아 있는 고기를 양 넓적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과 삼시의 마른 생선을 등에 지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라고 하고, 말을 마치고는 일어나 가버렸다. ~중략~ 남산 문수사의 문 밖에 이르자 광주리를 버리고 사라졌다. ~중략~ 경흥은 그것을 듣고 한탄하여 “대성(大聖)이 와서 내가 짐승을 타는 것을 경계하였구나”라고 하고 죽을 때까지 다시 말을 타지 않았다.”

김동하​​​​​​​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김동하​​​​​​​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8년 정유에 (망덕사)낙성회를 베풀었는데 왕이 가마를 타고 와서 공양하였다. 한 비구가 있었는데 외양이 남루하였다.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또한 재를 보겠습니다”라고 청하였다. 왕이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장차 재가 끝나려 하니 왕이 그를 희롱하여 말하였다. “어느 곳에 주석하는가?” 중이 비파암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제 가면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하지 말라”라고 말하니 중이 웃으며 “폐하도 역시 사람들에게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마치고는 몸을 솟구쳐 하늘에 떠서 남쪽을 향해 갔다. ~중략~ (남산의) 비파암 밑에 석가사를 세우고, 모습을 감춘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를 나누어 두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삼국유사’ 감통 ‘경흥우성’조에 기록된 내용으로 경흥법사의 사치스러움과 비교해 남산에 기거하는 거사는 남루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두 번째 역시 ‘삼국유사’ 감통 ‘진신수공’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망덕사 낙성회에 참석한 효소왕과 비교해 남산 비파암으로 떠난 비구(석가진신)의 모습은 남루하다. 앞서 소개한 충담사의 이야기에도 위의(威儀) 있는 승려와 비교해 충담사는 초라한 모습이다.

세 이야기들 속에서 감지되는 남산과 관련한 승려의 모습은 유사하다. 이야기 속 승려들은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는 당시 남산 불적이 가지는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남산은 승려의 공간이면서, 수행의 공간이었다. 당시 승려는 험한 산지계곡에서 공덕을 쌓기 위해 조탑과 조상을 통한 수행을 감행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불적은 산림수행의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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