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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 여왕의 염원이 깃든 곳 분황사

등록일 2021-09-13 19:38 게재일 2021-09-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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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의 모전석탑.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되어 지금까지도 법등(法燈)을 이어온 사찰이며, 오랜기간 유지되었던 사찰인 만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다양한 기록을 접할 수 있다. 특히 분황사는 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타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등 호국불교의 면모가 강하였다. 칠처가람 역시 신라 전 영토를 불국토로 여기는 것으로 그 가운데 분황사가 포함되었다는 점은 당시 신라 사회에 큰 영향력 있는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분황사는 황룡사·황복사 등과 같이 신라 왕실을 의미하는 ‘皇’자를 사용한 왕실사찰이다.

또한 문헌기록에는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하였다. ‘분(芬)’자가 향기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의미로 풀이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향기로운 임금’은 바로 분황사의 창건주인 선덕여왕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 하듯 1915년 발견된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리함에서 금바늘과 바늘통 그리고 실패와 가위 등 여성들이 주로 사용한 물건들이 사리장엄구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듯 분황사는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7세기 중엽부터 지금까지도 사찰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분황사는 정문을 지나면 일제강점기(1915년)에 수리된 모전석탑,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 우물,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건립된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해 석등과 많은 초석,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만이 남아 있다. 고찰(古刹)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람 영역은 불국사, 해인사와 비교하면 좁게만 느껴진다.

특히, 사찰의 주요 구조는 부처를 봉안한 금당(金堂)과 사리(舍利)를 모신 탑(塔)이므로, 탑과 금당이 일직선에 놓이도록 배치된다. 그런데 현재 분황사에는 금당인 보광전의 입구가 서쪽으로 향하여 전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특이하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분황사에 대한 궁금증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를 통해 해소할 있었다. 발굴조사는 20년간 이어져 2012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결과 분황사는 창건 당시 품(品)자형의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사찰에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 세 곳에 법당을 배치하는 방식) 가람(伽藍)으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일탑삼금당식의 가람구조는 고구려에서 시작되었지만, 분황사의 가람배치는 고구려의 것과 똑같은 구조는 아니었다. 신라만의 품(品)자형 일탑삼금당식이 등장한 것이며, 분황사에 이것이 적용된 것이다. 창건 당시 3금당은 모두 남향으로 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후 통일신라시기에 일탑일금당식으로 변화했고, 조선시대에 들어 현재 모습의 분황사 가람이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분황사 경내 위치한 모전석탑(방형모전석탑·方形模塼石塔)은 신라 유일한 전탑형식의 석탑으로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석탑은 분황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외에도 분황사 남북 외곽지역에서 당간지주·담장·축대·건물지·배수로 등이 확인되어 분황사 전성기의 사역 범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들을 확보하였다.

고소진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고소진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분황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가로 15줄, 세로 15줄의 바둑판전(42×43㎝, 높이7.8㎝)과 동궁과 월지와 황룡사지 등에서 출토되었던 숟가락의 거푸집이 있다. 그리고 1차 중건 중문지에서 출토된 치미를 통해 전성기 분황사 건물 규모를 가늠 할 수 있다. 특히, 분황사에서는 고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연화문, 보상화문, 당초문, 용문, 비천문 등의 다양한 기와가 출토되어 기와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분황사가 위치한 구황동에는 황룡사지, 황복사지, 미탄사지 등 사찰들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황룡사를 제외하고는 그 창건과 존속시기가 명확하게 알져지지 않았으나, 분황사와 공존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찰은 유일하게 분황사뿐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존재가 한국 역사에서 유일무이 하듯이, 분황사 역시 신라 최초의 품자형 일탑삼금식 가람양식과 모전석탑을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9년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는 사적 548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에 나오듯 자신의 죽는 날까지도 미리 예측할 정도인 선덕여왕은 자신의 염원을 담아 분황사를 세웠으며, 그의 염원은 최초의 여왕인 자신이 신라와 이 땅에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 것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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