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신라의 여왕들

등록일 2021-08-16 19:49 게재일 2021-08-17 17면
스크랩버튼
향기로운 여왕의 사찰이라는 뜻을 지닌 선덕여왕대에 창건된 분황사.
향기로운 여왕의 사찰이라는 뜻을 지닌 선덕여왕대에 창건된 분황사.

신라 역사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여왕의 출현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주목해볼만한 대상이다. 여왕과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신라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념으로 예전의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신라시대에 여왕이 나타날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널리 알고 있듯이 신라시대에 여왕은 모두 3명이 있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각각 신라 27대와 28대 그리고 진성여왕은 51대 왕으로 시기적으로 삼국통일 직전과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신라왕들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없는 것은 성골(聖骨) 개념이다. 그런데 성골이 제1대 박혁거세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 모든 왕을 가리킨다는 일제강점기 이래의 학설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과 그의 일족이 신성한 혈통을 지닌 특수한 집단이었음을 과시한 관념으로 보고 있다. 즉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고 그의 아내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인데 이러한 이름은 석가모니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과 같다.

당시 불교를 숭상하던 신라 왕실의 혈통을 석가모니 가계와 견주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당연히 석가모니와 같은 존재가 되는데 불행하게도 아들은 없고, 덕만(德曼)이라는 딸만 있었다. 신라 왕실의 혈통을 석가모니 가계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그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평왕이 죽기 2년 전에 귀족들이 반란을 꾀했지만 이를 진압하고 구족(九族)이라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죽였다는 점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엄청난 대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54년이라는 진평왕의 재위기간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딸인 덕만도 즉위 당시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그녀가 왕위에 오른 직후 성조황고(聖祖皇姑·성스러운 여자 임금)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선덕여왕의 왕위계승은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고령(高齡)의 나이라는 불안정한 요소를 품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즉위는 불만을 가지고 있던 세력과 타협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것은 막지 않는 대신 정치에 대한 실권은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덕여왕대에는 관청이나 관리의 새로운 설치나 증원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절을 짓거나 법회를 연 기록은 많이 등장하는데 바로 선덕여왕이 정치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보기도 한다.

647년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무렵 선덕여왕은 죽었거나 살아 있었더라도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勝曼)이 즉위했는데 곧 진덕여왕이다. 그런데 비담이 한 말은 보기에 따라서 선덕여왕의 치세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왕위에 오르기로 결정된 승만의 치세를 예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진덕여왕은 반란과 진압 그리고 즉위라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선덕여왕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한 김춘추 일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여왕이 자신만의 정치를 펼칠 수 없었다.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한편 진성여왕은 48대 경문왕의 딸이다. 경문왕 이후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순으로 왕위에 오르는데 이들은 모두 경문왕의 소생으로 형제나 남매지간이었다. 헌강왕의 재위기간이 12년으로 그의 아들이 있었지만 어렸으므로 동생인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정강왕도 2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진성여왕의 즉위는 겉으로 보면 형제들의 연이은 사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 경문왕의 장인인 헌안왕이 남긴 유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라고 했다.

헌안왕이 죽은 시점이 861년이므로 9세기 후반에는 여왕이 부정적인 의미로 여겨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재위 11년(897년), 그녀가 죽기 직전 당에 보낸 글에는 오빠 헌강왕의 아들이 15세가 되었고, 정치를 임시로 맡겼다고 하였다. 이에 진성여왕의 치세는 자신의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임시로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선덕, 진덕, 진성 등 3명의 여왕은 즉위를 전후한 정치적 상황에서 일어난 대립이나 타협의 산물이었다. 정치적인 고려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성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관직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라의 여왕들이 등장한 배경을 논의할 때 오늘날의 관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경주문화재연구소의 신라 속 ‘숨은그림찾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