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고대 삼국이 공통으로 받아들인 종교이며, 신라시대 경주지역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興輪寺)로 554년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륜사를 시작으로 경주지역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는데 초기에는 주로 평지를 중심으로 세워지다 점차 구릉부로 입지가 변화되어가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중심인 감은사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이 대부분 평지나 구릉에 세워진 것과는 달리 바다에 인접해 창건된 흔치 않은 사찰이다.
감은사(感恩寺)가 바다 근처에 위치한 것은 사찰의 창건이유와 관련된다. 동해안에 위치한 감은사는 문무왕이 창건을 시작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 뜻을 이어받은 신문왕이 682년 완성하였다. 그 뜻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동해안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불력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한 바람에서 시작된 호국의 이념에 매우 강하게 투영된 사찰임과 동시에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한 마음이 함께 담긴 사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감은사에서 직선거리로 약 1.4㎞에는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이라는 유언에 따른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 위치하고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을 바라보고 그리워했다는 이견대(利見臺)도 인접하여 위치한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감은사 창건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문무왕이 창건하고 신문왕이 완성했다. 그렇다면 그 뜻은 언제까지 이어졌을까? 감은사 창건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폐사된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그 시기를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감은사에 대한 조사는 195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차적으로 발굴한 바 있고, 이후 전체 가람구조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정비하기 위해 1979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추가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당시 서회랑터 조사를 위한 트렌치에서 예상하지 못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바로 청동반자(靑銅飯子)가 그것인데 글자만 보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무슨 용도인지 금방 와 닿지 않는다.
청동반자는 사찰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북으로 금구(禁鼓) 또는 금고(金鼓)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감은사에서는 의도적으로 매납 된 반자 위에 청동풍탁이 함께 출토되었다. 청동반자는 지름 32.2㎝로 표면에 연꽃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테두리는 당초무늬를 돌렸는데 무엇보다도 뒷면 구연부 둘레에 명문 77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특히 “至正 11년”이라는 명문은 고려말기 공민왕 즉위년인 1351년으로 이를 통해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명문의 내용 중에는 반자의 제작 동기가 해적이 감은사의 반자, 소종, 금구 등을 훔쳐갔기 때문에 재차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어 당시 고려 말에 동해안에 해적이 시시때때로 출몰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감은사는 강당지-금당지-중문지가 일직선을 이루고 금당지 앞에 삼층의 동·서 두 탑이 서 있는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式)임이 밝혀졌다. 특히 석탑은 높이 13.4m로 1959년 석탑 보수를 위한 해체시 서쪽 탑 3층에서 청동사리장치가 확인되었고, 1996년 동탑 해체시에는 금동사리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감은사 건물지 구조 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금당의 구조이다. 금당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하부는 지하구조를 이루고 있다. 구조는 방형의 석재를 일정한 간격으로 놓고 이 석재와 석재 사이에 남북방향으로 길다란 장대석을 걸쳐 끼웠다. 그리고 장대석 위에는 다시 동서방향으로 길게 장대석을 직교하도록 잇대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마치 마루바닥처럼 돌바닥을 깔아 초석 아래에 약 60㎝의 지하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이 시설은 당시 일반적인 금당지의 구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로 ‘感恩寺 侍中記(감은사 시중기)’에 보이는 “문무왕이… 금당 밑의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도록 구멍을 내었으니 이 구멍으로 용이 금당으로 들어와 서리게 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