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신라는 도시 중심에 적석목곽분이라는 큰 무덤을 축조했다. 무덤의 주인공은 최상위 지배층인 마립간(王)과 권력자로 추정한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 허리띠, 귀걸이, 목걸이 등의 금제품이 다량 발굴되었으며, 각종 마구류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신라는 가야를 비롯해 주변의 작은 소국을 병합하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다. 경주지역의 대형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금제공예품이 현재의 대구, 경산, 창녕 등에서 발굴되고, 경주 양식 토기가 인근 지역에서도 출토된 사실은 신라의 영향력이 주변지역까지 넓게 미친 것을 알려준다.
신라는 국가의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를 차근차근 갖추어 나갔고, 비로소 법흥왕(재위 514~540) 때 율령을 만들고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명실공히 중앙집권국가로 성장·발전한다. 신라 왕경의 중심부에는 도시계획이 새롭게 수립되어,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와 같은 왕실의 큰 사찰이 들어선다.
이 무렵부터 신라에는 다양한 문화적 변화가 나타난다. 무덤은 앞 시기와 달리 경주 분지 밖에 입지하고, 그 구조는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바뀐다. 무덤의 구조가 교체되면서 규모도 축소되고, 무덤에 들어가는 부장품도 매우 간소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신 왕경 중심에 축조된 사찰에는 황금의 불상과 화려한 장식의 불교 의례용품이 가득하고, 사찰 내에서는 각종 생활용기가 제작·사용되었을 것이다. 마립간 시기 각종 부장품을 위해 사용했던 황금은 이젠, 불상과 사찰을 장엄하는데 소비되었다. 다양한 문양의 와전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 와전(瓦塼)은 사찰 건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조영된 사찰에는 다수의 승려가 생활을 하며, 때로는 나라를 위해 때로는 왕실과 개인을 위해 불사가 이뤄졌다.
7세기에 이르러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왕위를 계승했고, 불교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마련한다. 높이 80미터에 달하는 황룡사 구층목탑은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신라 최고의 건축물이자,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신라인의 원대한 꿈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 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백제(660년 멸망)와 고구려(668년 멸망)를 병합하고,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호국불교를 바탕으로 한 신라인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삼한일통의 위업(676년)을 달성한 신라는 안정된 국가 기반을 바탕으로 최고의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는 황금시기를 맞이한다. 경덕왕(재위 742-765) 때 세워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불교의 이상향과 종교적 숭고함을 담아 완성된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다.
이는 동아시아 불교 문화권 속에서 신라불교문화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다. 또한 이 시기 신라에서는 비단길과 바닷길 등을 통해 중국, 일본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신라의 독창적인 문화는 발전·성장하게 된다.
178,936호의 왕경인(王京人·왕이 살고 있는 수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신라 수도 경주는 1,360방과 55리의 행정 단위로 구성된 계획도시였다. 또한 왕경에는 35개의 화려한 금입택(金入宅·귀족이 살던 저택)도 마련되어 있었다.
신라 수도 경주는 더 이상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세계 문화 교류의 거점이었던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더불어 국제적 도시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허브로 충실히 자리 잡았던 것이다.
경주는 역사와 문화의 길을 따라 주변 나라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며 발전해 왔다. 신라 천 년, 그리고 또 다시 천 년을 보낸 오늘날의 경주에는 우리의 탁월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다. 경주 분지 내에 위치한 거대한 왕릉,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과 동궁, 그리고 황룡사, 감은사, 불국사 등 경주 전역에 위치한 절터와 남산의 불교 유적…. 하지만 경주는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 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온 경주 사람의 문화적 동질성과 역사성이다. 경주 사람에게 언제부터 경주에 살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자연스레 선조 대대로 살아왔다고 답한다. 그 선조는 바로 천 년 전의 신라인이자 왕경인이다.
이것은 신라의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경주’와 끊임없이 이어져 소통하고 있다는 어엿한 증거이다. 천 년의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부단히 그 정신과 문물을 지켜온 경주는 오늘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공간이며, 유구하고 위대한 역사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