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3일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이었다. 상강 절기를 며칠 앞두고 내린 된서리와 무서리 때문에 일부 언론은 앞다투어 ‘가을의 실종과 겨울의 도래’를 재잘거렸다. 어디 그뿐인가?! 한반도에 봄과 가을이 완전히 실종된 것처럼 호들갑 떠는 자들도 적잖았다. 여기 동조하는 생각 없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부아가 치미는 것이었다. 대체 왜들 저러는 걸까?!
자연은 일탈하는 듯하다가도 슬며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법이다. 우주 운항의 법칙이 어느 날 돌변함은 지구 종말이 다가왔다는 신호탄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지경까지 이른 상황은 아니다. 한두 가지 변화로 전체를 예단함은 오류와 제휴하는 첩경이다. 그래서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하는 영어 속담도 있는 게다.
각설하고, 상강 무렵이면 떠오르는 한시(漢詩)가 있다.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남긴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칠언 고시 스물여덟 글자로 가을의 서정과 나그네의 우수에 찬 심사를 그림처럼 포착하는 솜씨는 달인의 경지와 멀지 않다. 나이 50이 넘어 과거에 두 번째 낙방한 우울한 마음을 서리 내리는 시절과 절묘하게 배합한 ‘풍교야박’.
원문을 보자. “月落烏啼霜滿天 (월락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우리말로 바꿔본다.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구나. 강가의 단풍나무는 고깃배의 등불과 마주 보고 쓸쓸하게 잠들어 있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는 한밤중의 종소리가 나그네의 배까지 들려 오는구나.” 여러분은 이 시를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시는가?!
첫 줄에서는 깜장의 까마귀와 서리의 흰색이 대비되고, 서리 가득한 한밤중에 들리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중첩된다. 소리와 색깔의 공감각이 문득 화합한다. 둘째 줄에서는 단풍나무와 고깃배의 등불이 붉은색으로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방점은 ‘쓸쓸하게’ 혹은 ‘슬프게’라는 부사어에 있다. 조락을 목전에 둔 단풍과 하릴없는 고깃배의 등불이 화답하듯 어울려 잠든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세 번째 줄에서는 장면이 고소성 밖 한산사로 일신된다. 장소변화는 정황의 급변을 불러온다. 그것이 네 번째 줄에 고스란히 담긴다. 시인이 잠들어 있는 나룻배에 들려 오는 한밤중의 종소리. 그는 지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전전반측(輾轉反側) 불면의 밤과 대면하고 있다. 고향의 늙은 처와 장성한 자식들을 바라볼 면목이 없는 것이다.
나는 ‘풍교야박’을 소주의 풍교에서 만났다. 그때 일본 관광객들이 시에 보여준 친근함은 놀라웠다. 그들은 중학교 국어책에서 ‘풍교야박’을 배웠다 한다. 우리는 어떤가. 단 한 편의 중국인과 일본인 작가의 시나 소설, 희곡도 초중등 국어 교과서에 없을 것이다. 21세기를 살면서 좌우에 포진한 나라의 문학에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가?! 어디 내놔도 꿀릴 것 없는 대한민국이다. 이제라도 그들의 시와 소설, 희곡을 넉넉한 마음으로 읽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