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말하면서 살아간다. 각자에게 유리한 사실만 기억하면서 나름의 정의와 진실을 마음속에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지독하게 꼬집은 소설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1922)이며, 구로사와 아키라는 ‘라쇼몽>(1950’으로 영화화했다. 반면에 노신(魯迅)은 ‘아큐정전’(1922)에서 이것을 ‘정신승리법’으로 규정하면서 신랄하게 공격한다.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예외 없이 왜곡되고 굴절되어 있기에 100% 진실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다. 지난 8월 하순 페테르부르크에서 체류한 사흘 일정은 나에게 22년 전 추억을 소환한다. 2003년 7월 하순에 사흘 머물면서 페테르부르크 곳곳을 누볐던 추억보다 그곳에 공부하러 나와 있던 경북대 학생들과 모교 졸업생들과 함께한 기억이 훨씬 강렬하게 남아있다.
보리스 옐친의 무기력한 통치가 종결되고 패기 넘치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 1기가 펼쳐지던 시기의 러시아 문화와 예술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는 여전히 불안하고 가난했다. 70년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각인됨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간 암울했던 러시아. ‘유럽으로 열린 창’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시민들의 삶은 곤고(困苦)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학생들과 밤마다 보드카 폭탄을 돌리곤 했다. 맥주잔에 40도짜리 독주 보드카를 일정 정도 따르고, 나머지를 맥주로 채워 단번에 마시는 것이다. 페테르부르크에는 새벽 3시 무렵 희뿌옇게 밤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가 30분쯤 지나면 환한 얼굴로 아침이 기다리고 있다. 보드카와 맥주병이 커다란 식탁에 날마다 3~40병 쌓이곤 했던 지난날의 추억이 밀려들었다.
창천의 일등성(一等星)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의 나는 2!30대 청춘들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던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겪어야 했을 허다한 모험담과 기행(奇行), 온갖 실패와 실수로 점철된 시절의 소환 같은 것이었을 터다. 10여 명이 무리 지어서 페테르부르크를 누비고 다니면서 러시아 역사와 예술의 향연을 한껏 들이마신 기억이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이번에는 국립 러시아 박물관과 에르미타주 미술관, 푸시킨이 다녔던 귀족학교 리체이를 차분하고 여유롭게 돌아본다. ‘피의 사원’과 ‘네프스키 대로(大路)’, 페테르부르크 운하와 네바강, 카잔 성당도 빼놓지 않는다. 박물관에서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오스트로프스키, 체호프 같은 러시아 문사들의 흉상이나 초상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새파랗게 젊은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러시아 문학, 특히 러시아 희곡을 향한 열망을 온몸으로 구현한 대가들 앞에서 지난 시절을 반추해봄은 해볼 만한 일이다. 어떻게든 남들과 다른 길을 찾아 걸어보려 했던 치기(稚氣) 어린 20대의 기억을 가슴에 안고 40대에 찾았던 페테르부르크를 60대에 다시 대면하노라니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라져버린, 불멸해야 했을 나의 청춘은 어디로 갔는가?! 마치 ‘세 자매’의 어리석은 주인공 안드레이의 한스러운 내적 독백을 되뇌는 것 같다. 돌이킬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까운 날들을 여름감기와 함께하면서 상념에 젖었던 페테르부르크의 추억이여!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