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고교 동창이 ‘주역’에 나오는 기막힌 구절로 나를 감동케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復)’ 여덟 글자였다. 언덕배기 없는 평지는 없으며,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세상 살면서 만나는 길흉화복은 어디나 있으며, 인과율로 작동하는 인간관계 역시 일방통행은 없다는 의미다.
어떤 방향으로 길을 시작했다면, 되돌아오거나 혹은 그 길로 끝까지 가면 출발 지점과 만나게 된다. 사람은 대개 전자(前者)를 택한다. 열차표든 비행기표든 우리는 편도가 아닌 왕복으로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런 연유로 출발지는 종착지가 되는 것이다. 스무 살 남짓했던 윤동주 시인이 “시(始)는 종(終)이요, 종은 시”라고 썼던 데에는 까닭이 있는 셈이다.
현지 시각 8월 29일 새벽 3시 반에 숙소에서 일어난다. 4시에 호텔 로비에서 조지아의 김 영사를 만나기로 한 때문이다. 그가 예약한 택시를 타고 4시 20분 무렵 트빌리시 공항에 도착한다. 적잖은 승객들이 ‘아지무트’ 항공사의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려고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탑승객 통로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김 영사는 자리를 지킨다. “영사 업무 수행 중입니다!”
6시 40분 트빌리시를 이륙한 비행기는 러시아 시각 오전 9시 40분에 모스크바 브누코보 비행장에 안착한다. 여기서 다시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것은 모스크바의 관문(關門) 격인 세르메치예보 공항을 거쳐 입국하던 때의 스산한 경험 때문이다. 나와 동행한 89학번 김 이사가 여권 검색대원에게 억류되어 1시간 40분 동안 하릴없이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전쟁하는 러시아는 불의하고 무도한 지난 정권의 미국 일변도 외교에 단단히 분노한 듯 보인다. 우리처럼 나이 지긋한 여행객을 아무 이유 없이 붙잡아두기 때문이다. 심지어 러시아 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의 동생 가족도 2시간 남짓 억류되는 일마저 일어나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새로 출범한 국민 주권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터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몰려온 노동자들과 그 가족으로 북새통인 브누코보 공항에서 2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마침내 검색대를 통과한다. 공항에는 92 졸업생인 남 사장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의 승용차 편으로 한국 식당으로 이동하면서 그가 모스크바에서 겪은 여러 애환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22년 넘게 모스크바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한식당에는 모스크바 문화원의 박 원장이 기다리고 있다. 그의 제안에 따라 내장탕(內臟湯)을 주문한다. 벌써 보름 가까이 매콤하고 얼큰한 맛과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나의 맹맹한 내장 속으로 붉은 색깔의 칼칼한 내장탕 국물이 밥과 함께 넘어가자 비로소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 곧 귀국이구나!’ 하는 따사로운 심사가 나를 찾아든다.
모스크바 시각 밤 8시 35분에 이륙한 에어 차이나 비행기가 8월 30일 오전 8시 북경에 도착한다. 거기서 다시 997km를 날아서 서울 시각 오후 1시에 김포 공항에 이른다. 빠른 입국심사를 거쳐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안착한 것이다. 역시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최고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