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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旅路)의 끝

등록일 2025-09-07 15:13 게재일 2025-09-0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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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세상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생성과 소멸에 내재한 숙명 같은 것이다.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자연적인 대상이든 인위적인 존재든, 크든 작든,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자리한다. 안톤 체호프는 단편소설 ‘사랑에 관하여’에서 “세상에서 가장 적절하게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쓴다. 최고로 적당한 시점에 세상일이 끝난다는 주장이다.

13박 14일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흘러간다. 시차 적응도 문제려니와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지나친 더위와 습기로 육신의 정기(精氣)가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다. 어느새 찾아온 노화(老化)의 위력을 절감하기도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솟구치는 아련한 우수(憂愁)가 일상의 순조로운 운용을 막아선다. 어쩌면 이것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유품인지도 모른다.

여정을 시작하면서 나는 휴대전화에 내장된 메모 기능을 활용하기로 작심한다. 그것의 대체재로 두툼한 필기용 공책을 가져갔는데, 무겁고도 쓸모없는 공책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지나친 준비는 때로 과도한 피로를 수반한다. 어느 때는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혹은 다음 날이나 그다음 날에 미진한 내용을 휴대전화에 기록하고, 사진을 동봉하기도 했다.

이번에 실현한 여행은 사실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북대 노문학과 졸업생들의 유쾌한 성화(?)가 사건의 발단이다. 모스크바 한국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하는 94학번 졸업생은 청도 이서 출신 촌놈이다. 그는 틈나는 대로 내게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권하곤 했다. 연극과 오페라, 발레와 함께하는 문화 기행을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지난 7월 그가 잠시 들른 청도 이서의 허름한 식당에서 광복 80주년 기념행사를 설명한다. 모스크바가 아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구현하는 의미심장한 행사의 주빈(主賓)으로 나를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89 졸업생의 현황 파악에 따르면, 경색(梗塞)된 한러 관계 때문에 러시아 직항은 없었다. 그런 연유로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은 날려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일단 발화(發話)된 여행 기획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짧지 않은 여정으로 실현되기에 이른다. 벌써 일주일 전에 종결된 일정의 후유증이 아직도 나의 몸과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 그 사이에 있은 두 차례의 학부 강의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작년부터 시작한 대중 강연을 어떤 양상으로 마쳤는지도 알쏭달쏭할 지경이다.

저녁놀이 내릴 무렵이면 휴대전화기를 들고 허위단심 들길로 나서서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산과 들과 내 마음을 사진기에 담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상념은 날개를 타고 모스크바로 페테르부르크로 트빌리시로 소리 없이 날아가곤 하는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 함께했던 사람들과 풍광, 술과 음식 그리고 사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나서 부드럽게 나를 감싼다.

이번 여정을 역순(逆順)으로 기록함으로써 기억을 환기하고자 한다. 기록의 핵심에 자리하는 것은 인간과 사건과 인연일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벌써 정신 차리고 치열한 일상의 모퉁이로 귀환했을 터다. 삶은 때로 순서가 무용(無用)할 수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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