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2000)로 우리 관객에게 친숙한 왕가위(王家衛) 감독은 ‘동사서독’(1995)에서 기막힌 대사를 남긴다. “나는 사막에 오래 살았지만, 사막을 보지 못했다.” 서독 구양봉이 지금까지 살던 객잔을 불태우고 그곳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오래도록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사랑의 아픔과 정념을 뒤로 하고 어디론가 먼 길 떠나는 남자의 선 굵은 서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청도에 12년째 살고 있지만, 며칠 전에야 비로소 공암풍벽을 찾았다. 이른바 ‘청도 팔경’ 가운데 하나라는 공암풍벽을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미뤄둔 게 벌써 십여 년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그곳을 다녀온 일이 마음속에 흐뭇한 흔적을 남긴다. 공암풍벽은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에 자리한 높이 30여 미터의 반월형(半月形) 절벽을 일컫는다.
청도 하면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과 ‘소싸움’ 그리고 ‘청도 반시’ 정도를 연상한다. 청도 곳곳에 거대한 크기로 새겨진 ‘새마을 운동 발상지’라는 푯말은 시대에 뒤지고 고색창연한 서글픈 느낌을 전한다. 산업화 시대의 낡은 구호를 써먹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시대를 앞서지는 못한다 해도 전체주의 시대의 유물을 아직도 들먹거림은 꽤 우울한 일이다.
나는 소싸움에 반대한다. 애초부터 순하고 선한 우리 소를 가지고 억지로 싸움질하도록 하는 게 뭐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인지 모르겠다. 전통적인 투우의 나라 에스파냐에서도 투우는 이제 한물간 시대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 민간에서 소는 집안의 기둥이자, 아주 가깝고도 가족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그런 소를 싸움판에 내몰다니!
해마다 벌어지는 청도 반시 축제는 그야말로 2박 3일 동안 외지인들과 청도 군민들을 들썩이도록 한다. 쟁반을 닮았다고 하여 ‘반시(盤柿)’라 불리는 청도 감은 굵기도 하거니와 씨가 없고, 당도 또한 상당히 높다. 요즘에는 상업성이 많이 떨어지고, 군민들의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수확 자체를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한다. 위기의 대한민국 농어촌 풍경이다.
공암풍벽은 공암리에 있는 단풍나무 절벽을 의미한다. 봄에는 진달래를 필두로 온갖 꽃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운문천의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며,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절벽을 붉고 화사하게 장식하고, 겨울에는 송림의 푸르름이 웅혼한 기상을 웅변한다. 오늘날 공암풍벽은 1985년 운문댐 건설로 인해 상당 부분 수몰되어 있기로, 적잖은 아쉬움을 선사한다.
마을 입구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연정(居然亭)으로 방향을 잡고 걷다 보면 어느새 가을 정취에 흠뻑 젖게 된다. 왕복 2.7km를 느릿하고 여유롭게 걸으면서 지나간 시간과 사라진 자아를 돌아봄은 적잖게 유쾌한 노릇이다. 반환점이라 써진 풍벽 끄트머리 그곳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아온 70세 중반 남성을 만나 수몰민(水沒民)의 애환을 들을 수 있었다.
불과 스무 사람 남짓 살고 있다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마을은 한 시대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퇴락해가는 인구소멸지역 주민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애수가 묻어있었다. 공암풍벽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에게 생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해본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