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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와 새

등록일 2021-10-25 18:44 게재일 2021-10-2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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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무엇을 해도 좋을 가을날이 정갈하게 여물어간다. 억새가 손짓하는 산과 들을 찾아 깊어가는 가을날의 정취에 젖어보는 것도 좋고, 도시의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기에도 좋으며, 풍성한 축제마당에 빠져 코로나 블루의 갑갑증을 떨쳐버리는 것도 좋을 일이다. 풍요로운 계절에 마음마저 넉넉해지는 때가 되면 유난히 먹거리에 대한 추억이 감미로움을 더해 주기도 한다. 그 중의 하나가 가지마다 주황색의 등을 켜는 감에 대한 얘기다.

유년시절의 가을, 고향집 뒷밭과 언덕에는 온통 주홍빛 감이 오지게 익어가고 있었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이 지나면 논밭의 모자라는 일손을 거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한편으론 다 익은 감을 따서 껍질을 벗겨내고 곶감으로 말리거나 큰 단지에 감잎과 함께 탱탱한 감을 켜켜이 쟁여놓는 일을 할머니와 수시로 하곤 했었다. 냉장고가 아직 보급되지 않아서 겨울날의 꿀맛 같은 별미와 허기를 달래기 위한 채비를 가을부터 했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감조리개를 이용하거나 큰 감나무에 올라서 감을 따는 일은 결코 만만찮은 일이었다. 긴 대나무 장대 같은 막대기 끝에 V홈을 파서 감이 달린 가지를 끼워 돌리는 방식으로 꺾어서 감을 따는 것은, 장대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팔의 힘과 끝부분을 가지에 정확하게 맞추는 집중력이 있어야 했다. 또한 ‘감나무에서 떨어지면 약도 없다’는 말처럼 약하고 미끄러운 가지를 잡거나 디디고 감을 따는 것은 위태롭기 이를ㅑ 데 없었지만, 공중곡예(?) 하듯이 노련하게 손발을 옮겨가며 몇날 몇일 감을 따야만 했었다. 그렇게 감을 따다 보면 더러 홍시도 나오기 마련인데, 감밭에서 먹는 홍시는 그야말로 꿀보다 더한 맛이랄까! 그러한 꿀맛 같은 감 맛이 어릴 때부터 입에 배어선지 필자는 감나무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좁지만 우거(寓居)의 뜰에는 감나무가 십 수년째 네 그루나 자라고 있다. 해마다 이맘 때면 담장 곁으로 단감이나 대봉감이 익어가는 모습에서 입맛을 돋구며 은근 슬쩍 한 개씩 따먹곤 했었는데, 아뿔싸 올해는 그러한 기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수년째 까치밥을 먹는 재미삼아(?)로 봄날부터 집을 찾아드는 몇 종의 새들이 감이 채 익기도 전에 먹잇감으로 쪼아먹어 거의 모든 감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새들의 지저귐이 그저 좋고, 때에 따라 새들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미묘한 소통의 방식까지 읽게 된 필자로서는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새들끼리는 “저 집에 가면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이 항상 있어” “가을이면 맛있는 감들이 우릴 기다려” 라고 짹짹거리며 자주 폴폴 날아와 떫은 대봉감까지 저지레를 한 것으로 보인다.

먹이를 가까운 곳에서 쉽게 구하며 재잘대는 새들이 가을의 한자락을 앗아간 것 같아 약간 떨떠름(?)하지만, 새들과의 공생은 마냥 정겹고 아름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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