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며 산자락에는 잎새들이 아직 청청하기만 한데, 벌써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함으로 정말 가을이 실종된 듯하다. 갈수록 뚝 떨어지는 기온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해 단풍은 고사하고 잎새들은 파리한 행색으로 팔랑거리다가 그냥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이 아니더라도 들녘의 국화는 이미 군데군데 피어 있으니, 기후의 변화는 이처럼 자연의 현상이나 생태마저 바뀌게 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지내고/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는다/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정보 시조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처럼 계절의 변화나 산수, 강호 등의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예찬하거나 심경을 토로한 시조를 읊어왔다. 이른바 강호가도(江湖歌道)라 일컬어지는 시조는 조선시대 문학에서 유랑과 자연, 인간의 정서를 주제로 하는 음풍농월(吟風弄月) 성격의 시적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강과 호수 같은 한적한 자연환경 속에서의 삶과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하는 시조로 자연 풍경과 속세를 떠난 은둔의 삶을 이상화하며, 인간의 감정을 자연과 결부시키거나 조화시켜 표현하고 비유하기도 했다.
이들은 복잡한 현실이나 시끄러운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산속이나 물가에 거처하면서 밤낮으로 자연에 마음을 팔고, 때로는 맑은 시냇가에서 짐짓 어부인 체하며 하루를 보내는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가 벗을 만나면 술병을 열어 놓고 시를 읊어 밤이 깊어 가는 것도 모르게 태평시대의 여유로움으로 풍류를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읊고 지어진 시에 장단을 붙이고 가락을 더해 소리 내 읊조리면 그 감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오래 갔으리라. 어쩌면 그러한 연유에서 시조창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시조창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時調)시에 운율을 올려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문학과 전통소리인 창(唱)이 어우러져 독특한 가락과 창법으로 선조들의 풍류와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격조 있는 문화유산이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시조창은 민족의 정서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삶의 여백이 배어 있는 독창성과 예술성이 돋보여 가곡·가사와 함께 우리의 전통국악인 노래로서의 정악(正樂), 정가(正歌)에 속한다. 즉 시조창은 시조시의 아름다움을 창법에 따라 고저장단으로 마음껏 표현할 수가 있어서 옛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전통 대중음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조창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보존과 발전을 위해 각 지역마다 전국 시조창 경연대회를 열어 장려하고 지원하고 있다. 시조 한 편 외워서 발표하기도 힘든데 시조창을 배우고 연습하여 경연대회까지 출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찮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발성법을 익히고 애써 시조창을 즐겨 부르는 이유는 시조창 특유의 창법과 흐름, 음조 등의 매력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흥겨운 듯 차분하게 장단을 맞춰 목소리를 풀면서 가냘프고 구슬픈 음조로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폭포수처럼 힘차게 용솟음치는가 하면 절제와 여운으로 마무리되는 시조 창법에서, 마치 삶의 애환과 고비를 지나온 듯한 스릴과 긴장감, 안도의 희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