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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새로운 문화 아이콘 ‘詩뜨락’

때 이른 폭염의 기세가 만만찮다. 초복은 고사하고 소서마저 코앞인데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위가 연일 대지를 후끈 달구고 있다. 장마가 주춤하는 틈새를 타고 잽싸게 파고드는 더위에 벌써부터 열대야가 나타나고 매미소리가 들리면서 올 여름의 폭서를 예고하는 듯하다. 암록(暗綠) 속에 붉은 등을 밝히듯 능소화가 처연하게 피어나는 어느 뜨락에서는 때 이른 무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진지함의 열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담쟁이 넝쿨이 늘어지고 감나무와 모과나무 잎새가 반겨 맞는 뒤뜰에서는 악기의 잔잔한 선율이 흐르고 시낭송의 목소리가 다소곳이 피어나며 간간이 웃음과 환호, 박수 소리가 터지면서 정겹고 흥겨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도심 속의 작은 쉼터 같은 그곳에서는 사람과 문학이 만나고, 예술과 정담이 이어지며 어울리고 교감하는 낭만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른바 ‘詩뜨락(시가 흐르는 뜨락)’으로 일컬어지는 시낭송 문화마당이 누리달 끝자락에 소담스레 펼쳐진 것이다. ‘시뜨락’은 시와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경향의 문인을 작은 뜨락으로 초대해 시낭송회를 열고, 시에 대한 이야기와 문학의 삶을 나누며 독자와 소통하는 시낭송 북콘서트이다. 즉, 활자로 된 시를 목소리와 음향을 곁들인 소리예술로 풀어내면서 시에 담긴 은유와 감동을 더해주고, 초대시인과의 대화를 통해 문학과 예술적의 삶을 공감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시낭송 문화를 일궈가는 작은 발돋움이라 할 수 있다. ‘시의 행간에 목소리가 스며들어/그림을 그리듯 날개를 달아주니/비로소 시의 꿈이 피고 맵시마저 곱구나//···.//꿈결같은 시가 흐르는 뜨락에는/바람의 몸짓으로 시흥(詩興)이 어우러져/새로운 문화의 요람 향기 짙게 울리네’ -拙시조 ‘시가 흐르는 뜨락’ 중 그러한 ‘시뜨락’ 북콘서트가 벌써 열번째를 맞아 다양한 레퍼토리로 풍성하게 열렸다. 특히 올해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집, 김소월의 ‘진달래꽃’ 발간 100주년을 맞아 시인의 삶과 시 세계를 재조명하고 시낭송·시극·시노래·우정 시낭송 등으로 다채롭게 펼쳐졌다. 특히 어린이 출연진과 기타·아코디언 반주를 곁들인 소월 시노래를 관객들과 함께 부르며 교감하고, 100년 전의 ‘진달래꽃’ 시를 초판 그대로 충청도·전라도·함경도·경상도 사투리 버전으로 낭송하며 시극 퍼포먼스를 펼쳐 보일 때는 청중의 탄성과 환호가 연발했다. 그리고 시낭송 출연진들이 일일이 붓으로 쓴 시화작품을 뒤뜰의 소나무~감나무 사이의 줄에 매달아 바람 결에 살랑거리고, 또한 소월 시와 초대시인의 시를 붓글씨로 활달하게 시서(詩書)작품을 길거리에 미니 전시해 이색적인 시회(詩會) 분위기를 물씬 자아냈다. 그야말로 한국 현대시를 기적처럼 꽃 피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시뜨락에 그득해지며 청중들에게 문학과 음악, 예술이 어우러지는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었다고나 할까? 문학과 문화는 이렇게 독자와 청중이 교감하고 호흡하며 다양한 테마로 새로운 시도를 보일 때, 지속가능한 힘과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책으로 엮은 시를 복합적인 콘텐츠로 살아 숨쉬게 하는 ‘詩뜨락 북콘서트’가 지역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길 기원해 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7-01

포은선생의 학덕 묵향으로 피우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태어난 곳이든 성장기 배경이 된 곳이든 누구나가 어느 한 곳이나 본가 또는 외가 등지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출생과 성장에 관한 당시의 기록이나 문헌자료가 불분명한 위대한 인물일수록, 현재에 이르기까지 배경지의 논쟁이 되고 지자체의 대립과 반목을 유발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출생지와 성장지에 둘러싸여진 포항과 영천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장과 논점일 것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말의 절의(節義)의 충신이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비조(鼻祖)로 추숭되는 큰 인물이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등 모든 면에서 특출난 고려 최후의 보루이자 문무를 겸비한 역사에 길이 남은 인물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포은은 영일현 문충리에서 탄생, 인근 오천 구정리에 옮겨 살다가 유년 시절인 9~10세 경에 영천 우항리 외가댁에 잠시 머물렀고 가족들이 그곳에 터를 잡은 후에는 영천으로 완전히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영천에서는 포은 선생에 대한 기록이나 사료, 자취 등을 근거로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출생했다고 하여 생가터와 임고서원을 대대적으로 성역화하는 등 영천이 ‘포은의 고향’임을 굳히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 포은선생의 고향이 어디인가는 후학들의 관점에서의 문제이며, 포은선생에게 있어서는 포항이던 영천이든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포은선생의 충절과 위업·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지역문화의 정체성으로 제고시키는 노력과 지역민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의미 있는 전승활동과 추모사업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측면에서 오천읍에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2008년부터 매년 포은문화축제를 성대하게 개최해 왔고, 민간에서는 포은추모사업회를 발족하여 포은선생의 시문(詩文)과 예술을 고양시키는 사업 등이 이어지고 있어서 참으로 고무적으로 여겨진다. 포은 정몽주 선생 탄생 688주년을 기념하여 최근 1주일 간(6월 16~22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포은국제서예교류전’은 한·미·중·일 등 20여 개 국가의 저명작가들이 출품한 200여 점의 필묵작품들이 포은선생의 학예와 덕행을 만방에 드러내서 주목받았다. 포은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서예라는 예술을 통해 되새기는 국제 교류전은 각국의 귀한 작품들을 함께 전시·감상하는 특별한 시간이 단순한 문화교류를 넘어, 예술적 공감과 우정을 나누는 뜻깊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포은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 예술적인 삶을 재조명하여 충효사상과 외교활동을 널리 알리고 창조적인 계승과 발전을 도모하는 포은서예국제대회 공모전·포은선생추모백일장 등의 다양한 문화적인 프로그램도 가을에 예정돼 있어서 사뭇 기대와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역사회에서의 문화예술의 향기와 진흥은 지속가능한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시민의 정서적인 풍요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지방시대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문화도시 포항에 포은선생의 얼과 자취를 보듬어 고유한 정체성으로 확립, 발전시키고, 예술과 문화적인 가치를 지속적으로 발굴, 진작시켜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시민 모두가 행복한 포항’으로 나아가도록 각계각층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6-24

소월의 ‘진달래꽃’ 시집 발간 100주년

시원한 그늘을 즐겨 찾게 되는 계절이다. 어디선가 풀피리 소리가 정겹게 들리고, 먼 곳의 뻐꾸기 울음소리는 드문드문 한가함의 여운을 더하는 것 같다. 바람결에 흘러가는 구름은 유유자적 시를 쓰는가 하면, 나날이 벼려지는 햇살에 무성해지는 풀과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의 시편을 엮어내는 것 같다. 유월의 자연현상 그대로가 시의 여울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자연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시의 행간을 거니는 것처럼 보인다. 초목에서 뿜어지는 향긋한 냄새며 새들의 지저귐과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등을 가만히 듣거나 보고 있노라면 자연과 바람이 전하는 시의 운율과 리듬에 아늑히 젖어드는 것 같다. 마치 들판이나 산 속에서 잠을 자다 보면 자연의 아늑함과 편안함에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잠의 맛’이 달라지듯이, 자연에서 머무는 그 자체가 힐링이고 위안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자연은 시의 보고(寶庫)이며 예술의 총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시는 ‘영혼을 치유해주는 약’처럼 현실의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따스한 위로와 치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1925년 매문사(賣文社)에서 발행된 지 올해 100주년을 맞게 됐다. 김소월 시인이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으로 대표적인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 후일’, ‘산유화’, ‘초혼’, ‘왕십리’, ‘개여울’,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등 많은 수작 127편의 작품이 수록돼 있다. 이 땅에 최초의 자유시가 나온 지 약 106년쯤 되고 보면 외국에 비해서 그다지 역사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당시 일제강점기 상황을 고려해볼 때 초창기부터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며 창작의 열기가 퍼져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소월 시인은 우리의 한글을 가장 아름답고 맛깔스럽게 표현해서 암흑의 시대를 그리움의 언어로 위로해 준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진달래꽃’은 한스러운 민족 정서를 민요 가락과 민중의 일상어로 표현해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한국 현대시를 꽃 피운 기적과도 같은 시집이며, 한국 근대 시문학사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점이 인정돼 2011년 ‘진달래꽃’ 2종 4권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했다. 일반 대중들에게 다소 생소한 100년 전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초판 복각본(復刻本)이 서울의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한글 맞춤법, 활자, 세로쓰기 등이 현재와는 판이하지만,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초판 그대로의 완벽한 복간으로 최고의 선본(善本)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에 발맞춰 (사)일월문화원과 ‘시뜨락’에서는 복각본 편저자를 다음 주 포항으로 초청해 김소월 주제의 특별강연과 김소월 시 초판 원본으로 낭송하기, 시극 공연, 독자와의 대화 등의 시낭송 북콘서트를 풍성하게 준비하고 있어서 벌써부터 주목된다. 나라를 빼앗긴 깊고 무거운 어둠의 시대를 가볍고 찬란한 빛으로 바꿔준 김소월의 아름답고 맛있는 시편들로, 고단한 일상의 위로와 메마른 감성을 적셔주는 치유의 공감을 더해 ‘진달래꽃’ 발간 100주년 의의가 되새겨지길 기대해 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6-17

詩書畵 깃발이 나부끼는 포항철길숲

6월의 바람은 싱그럽다. 연록의 잎새들은 날로 짙어져 꿈결처럼 암록이 흐르고, 풋보리가 익어가는 들판엔 초록의 바람이 분다. 화사한 꽃들이 져버리자 초목은 더욱 무성해지며 생명력을 드러내는 때, 그래서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들이 꽃필 때 보다 낫다(綠陰芳草勝花時)고 했던가. 거기에 도심 속을 길게 가로지르는 숲길 한 켠에는 녹음방초 보다 더 진하고 그윽하게 묵향(墨香)을 피우며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올해 14회째를 맞은 ‘포항서예연합전’이 걸개 형태로 만든 다양한 깃발작품들을 길거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100여 년 동안 열차가 다니던 옛 철길을 획기적으로 개선, 복원하여 시민들이 즐겨 찾는 열린 공간인 ‘포항철길숲’ 한 켠에서 형형색색의 깃발 서예작품들이 유월의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도심 속의 복합 힐링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전국적인 명소가 된 포항철길숲 모퉁이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묵향이 푸른 초목과 어우러져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바로 곁에서 깃발 서예작품을 만날 수 있다니, 일상과 접목되는 ‘거리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예작품이 전시장이나 갤러리가 아닌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예가 일반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자연이나 일상 속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사람과 자연, 예술과 삶을 어우러지게 하는 새로운 문화적 향유를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통을 살리면서 자연 속에서 예술과 생활을 이어주는 문화적인 소통으로 ‘문화도시’의 품격과 기치를 한층 높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도 여겨진다. 특히 이번 연합전은 서예 동호인이나 서예작가·출향작가 뿐만 아니라 포항시민이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문화행사로서, 유치원생에서부터 100세 어르신까지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고 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붓을 잡고 한 점 한 획 또박또박 꿈과 희망을 쓰거나,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거북등 같은 손으로 떨리는 붓을 진정시키며 자손들에게 사랑과 염원의 글귀를 쓴 작품 속에서 순수하고 진솔함이 느껴져 눈시울을 붉게 만들기도 한다. 연령과 세대, 계층과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 예술적인 소통과 어울림으로 전통문화예술의 현대적인 계승 발전과 서예인구의 저변확대를 꾀하기도 한다. ‘도심을 넘나들며/만남과 이음으로//소통이 숨을 쉬고/여유가 살아나네//가뿐한 몸놀림 속에/활기참이 묻어나네//테마가 어리고/예술이 피어나는//철길숲 둘레마다/쉼과 삶이 어우러져//깃들고 품어주는 뜻/공생의 문화 흐르네’ -拙시조 ‘선로의 변신’ 중 구체적인 의미 표현의 수단이나 상징성을 드러내는 깃발에 곱게 스며든 350여점의 시서화(詩書畵) 작품들이 창공에 휘날리며 한결같이 문화예술을 외치는 것 같다. 묵향으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철길숲을 마실 가듯이 거닐며, 길가에서 환호하듯이 반기는 깃발 서예작품으로 잠시 풍요롭고 품격 있는 문화생활을 즐겨보면 어떨까? 철길숲과 예술작품이 조화를 이루고 시민들이 공감하며 상생하는 포항에는 문화의 향기가 피어난다. 예술과 문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융화와 공감, 감동의 울림으로 도시의 활력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준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6-10

130년 만의 일깨움, 해월문화제의 의미

6월의 초목은 새벽부터 내리는 비에 더욱 짙어지며 싱그러움을 더해가고 있다. 지난 5월 12일부터 22일간 초단기 대선 레이스에 목놓아 외치던 지지와 호소도 암록(暗綠) 속에 잠기며 지금은 ‘갈림길의 선택’을 하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전직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으로 인한 정치적 혼돈과 사회적 피로감이 고조된 국면에서 제21대 대통령을 뽑는 6·3 조기대선의 투표가 시작됐지만, 전국의 유권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책임감 있는 선택이 중요하다고 본다. 오늘의 귀중한 한 표가 대한민국의 미래 5년을 결정지으며 새롭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관심이 온통 대선후보의 경쟁이나 판세 가름으로 요동칠 때, 차분하게 정중동(靜中動)의 몸짓으로 의미 있는 걸음을 옮기며 고찰과 추모, 일깨움의 움직임이 있어서 참으로 고무적이다. 그것도 여타 지역에 비해 비중이 크며 정작 실제적인 활동을 펼친 본거지에서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존재와 그 의미를 심도 있게 되짚어서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행보라 한결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라(事人如天)’는 가르침을 실천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을 기리는 ‘해월문화제’가 5월 30일부터 오늘까지 포항 일원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해월 최시형을 깨우다’ 주제의 2025년 해월문화제는 (사)일월문화원의 창립 15주년 기념사업으로 해월선생의 숨결을 더듬어 동학의 정신과 자취를 재조명하는 문화축제이다. 동학 2세 교주로 포항이 길러낸 위대한 실천가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던 해월 최시형 선생을 집중 조명·기념하여 바른 인식과 보급, 전승을 위한 문화행사로 전국적인 대규모 행사로는 처음이다. 작년 11월 ‘포항시 동학사상 계승·발전을 위한 지원 조례안’이 포항시의회에 의결된지 6개월만에 소기의 결실을 맺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해월과 일월 동행 전시회’ 개막식과 함께 시작된 해월문화제는 문화·학술·예술·탐방·순례·추모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됐다. 해월초상화 그리기 대회와 해월 어록 서예전·해월 생애와 사상· 해월 순례길 안내도·해월 도피 경로연표 등의 보기 드문 전시물들이 해월선생의 고고하고 험난한 일생과 포덕(布德)을 떠올리며 관람객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도종환 시인을 초청해 ‘해월이 키운 어린이 세상’ 주제강연과 백승종 교수의 ‘21세기 동학을 묻다’와 김상백 시의원의 ‘검등골 사적지 지정’ 등에 대한 열띤 강연이 열렸다. 그리고 해월순례길(용담정↔검등골) 1~4구간 안내판 설치와 1구간 걷기·천곡사~해월 어록비~동학 16접주 임명지 답사·숲속 작은 음악회 등이 진지하고 다채롭게 펼쳐졌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고 바람처럼 떠돌던 구도자의 아픈 이름-포항 사람, 해월선생께서 130여 년의 잠을 깨고 후대들의 늦은 일깨움과 추념의 정에 여한(餘恨)이 조금이나마 풀리셨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포항이 낳은 ‘거룩한 성자’ 해월 최시형임에도 그와 관련된 유적이나 기념물은, 포항시민의 해월선생에 대한 인지도 만큼이나 너무 빈약하다. 민간주도의 기념·추모사업은 예산과 지원에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이번 해월문화제를 계기로 해월에 대한 포항시민들의 관심과 자긍심이 높아지고 자치행정 주관의 해월문화제 인프라가 꾸준히 구축되기를 기대해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6-03

동해안 기차여행

오월의 신록 속으로 질주하는 기차에 몸을 맡긴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 가는 산과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들판을 지나 이내 탁 트인 동해바다와 마주하며 미끄러지듯이 내달린다. 몇 개의 교량과 터널을 지나니 차창 밖으로 지난 3월의 대형산불로 산림과 농가에 극심한 피해를 준 처참함이 푸른 산의 검버섯처럼 드러나는 영덕 일대가 스치듯이 지나간다. 간간이 농촌ㆍ산촌ㆍ어촌마을이 나타나고 바다와 산을 접하며 동해안 7번 국도와 나란히 강릉까지 이어지는 동해선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개통된 동해선 고속철도는 한반도의 등줄기로 불리는 동해안을 따라 강릉~동해~삼척~포항~경주~울산~부산(부전)을 이어주는 약 370km 구간이다. 작년 말 포항~삼척 구간의 고속전철화 사업이 완공됨에 따라 올해부터 이른바 ‘동해안 철도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랜 염원의 동해선 개통으로 강릉~부산 간은 3시간 50분대에 주파 가능해져 동해안과 강원 북부권의 물류ㆍ산업ㆍ관광 등의 분야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강원 동해안과 인구 300만의 부산과 경북ㆍ경남 동해안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관광수요의 폭발적 증가는 물론 산업적인 측면의 시너지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항간에 명성(?)이 자자한 기차를 설렘 속에 직접 타보니 운행 내내 열차의 쾌적함과 편리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평소 자동차로 제법 시간이 걸려야 가던 월포나 영덕, 울진 등지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낯선 풍경 담기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다음 역에 다다를 정도로 빠른 속도감이 들었다. 마치 수도권의 전철을 타고 가다가 얼핏하는 사이 금세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는 것처럼 먼 거리가 짧게만 여겨졌다. 다만 예전의 완행열차 특유의 쇠바퀴 굴림의 덜컹거림이나 희미한 기적 속에 또렷하게 들려오던 “오징어 땅콩 카라멜~ 삶은 계란 있어요~”라고 외치며 기차 안에서 간식을 팔던 ‘홍익회’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없어져서 수십년 전과는 사뭇 격세지감이 드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다 가까이에 기차역이 있는 정동진역에 기차가 섰을 때는 잠시 추억과 낭만에 젖어 들기도 했었다. 어린 애들과 함께 정동진 해변 모래밭에서 사발이 오토바이를 신나게 타기도 했었고, 가족들과 함께 커다란 모래시계를 보면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한 것 같았다. 또한 5~6년 전 아들과 함께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동해안자전거도로를 따라 종주 중 정동진 고개 넘어 아들 자전거의 뒷바퀴 펑크로 때우는데 엄청 고생스러웠던 기억 등이 철썩이는 파도 결에 오버랩되기도 했었다. 차창에 어리는 풍경 감상과 아련한 회억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강릉역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한결 구미가 당긴 초당순두부전골, 환상적인 미디어아트에 몰입되는 강릉아르테뮤지엄,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교장(船橋莊) 고택에서의 보기 드문 파이프오르간 연주, 허균ㆍ허난설헌기념공원과 경포대 산책로, 카페거리 안목해변 등 어디 하나 둘러봐도 발길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동해안 기차여행은 축지(縮地)로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먹고 즐길 거리를 무한정 가능케 해주는 묘미가 있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27

부부의 날 단상

유난히 기념일이 많은 5월도 하순에 접어 들었다. 근로자의날을 비롯 어린이날ㆍ어버이날ㆍ입양의 날ㆍ스승의 날ㆍ성년의 날ㆍ세계인의 날ㆍ부부의 날 등 대부분 가족이나 가정, 이웃 등 사회구성원들을 배려하고 생각하며 기억, 기념하는 일들이 많아져서 가정의 달로 정해진 것일까? 그만큼 사람이 중요하며, 인류의 존엄과 가치,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을 귀중하게 여기는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가 바탕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 마침 오늘이기도 한 ‘부부의 날’은,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만드는 밑바탕이자 디딤돌의 역할을 해온 부부를 위한 날이기에 사뭇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즉 가족의 최소단위가 부부이며, 애정으로 맺어진 부부관계를 통해 가족이 늘어나게 되어 가정과 사회적인 요소의 근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정은 우주의 중심’이라고도 말하며, 가정의 참된 기능과 역할은 건강하고 화목한 부부생활에서 비롯되고 그 기반이 다져지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되는 부부(夫婦)는 서로 다른 두 이성이 만나서 합한 관계이다. 이는 곧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이 합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두 가문의 결합이기도 하다. 가문의 뿌리가 서로 다르기에 상호존중과 배려로 예절을 지키면서 언제나 화목해야 하는 취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즉 혼인은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회가 인정하는 결합을 의미하며, 예로부터 ‘두 성씨가 합하게 되는 만복의 근원(二姓之合 萬福之源)’으로, 이는 곧 서로 사랑하고 배우며 협력하여 사회적인 조화를 이루는 큰 일(人倫之大事)로 매우 중요시하게 여겼다. ‘긴 상이 있다/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좁은 문이 나타나면/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걸음을 옮겨야 한다/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서로의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다 온 것 같다고/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걸음의 속도로 맞추어야 한다/한 발/또 한 발’ -함민복 시 ‘부부’ 전문 어쩌면 이상적인 부부의 길이란, 이처럼 서로의 안색(顔色)을 잘 살피며 인생의 속도를 서로에게 맞추며 함께 걸어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부부로 만나 가정을 운영하며 살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들로 상이 기울어지거나 모퉁이에 부딪쳐 상 위의 음식들이 떨어질 위기가 있어도, 한 발 한 발 서로를 찬찬히 읽으며 가는 길에는 사랑의 익숙함이 깃들어 세월의 노련함으로 편하게 걸어가게 될 것이다. 배려와 양보로 빠르게 가라고 재촉하지 말고 상대방을 변함없이 존중하며 끝까지 정다운 부부의 애정이 유지되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 갈수록 우리나라의 높아지는 이혼율과 1인가구 비율 증가추세 등으로 인구절벽이 현실화되고 지방소멸마저 위협받는 때, 둘(2)이 하나(1)가 되는 부부의 날에 가정의 의미와 부부의 위상이 새삼 중요하게 여겨진다. 건실한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면서 사랑과 행복의 꽃을 피워가는 새로운 부부가 많아지고 아름다운 삶의 동행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20

세월의 속도감 줄이기

연초록 위에 진초록 잎새가 겹쳐지며 신록이 짙어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잎차례를 벌여가며 연록의 진영을 넓혀가더니 어느새 온통 초록의 숲을 이루고 있다. 마치 스밈과 번짐처럼 봄이라는 생장의 여울 속에 잎새들의 앞다투며 줄기차게 변화하는 양상이 순식간에 이뤄지는 듯하다. 잎새뿐만 아니라 언덕배기의 풀이나 들판의 농작물들도 돌아서고 나면 아찔한 정도로 몸짓을 불려가며 빨리 자라 생동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언제 어느 때나 한결같고 공평한, 영원한 세월 속의 나그네(光陰者 百代之過客)일텐데, 유독 봄날만큼은 생명의 잔치를 벌이며 발걸음이 빨라 보인다. 그것은 기실 똑같은 시간의 흐름이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가 생기다 보니 봄날의 시간이 빠르게 느껴져서 일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변화에서도 시간의 완급이 느껴지듯이, 외부의 환경이나 자극에 따라 시간의 속도가 사람들마다 다르게 느껴짐은 대체로 보편적인 일로 여겨진다. 어릴 적에는 한 해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처럼 길게만 다가오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빠르게 지나감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것이지만, 나이를 먹게 되면서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사람의 뇌가 시간 인식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데, 나이가 들수록 신경 가소성(可塑性)이 줄어들고 뇌는 정보를 적게 처리하게 되며,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기억 형성을 줄여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10대는 시속 10km, 60대는 시속 60km로 달려간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어린 시절 대부분은 처음 겪는 일들이 많아 신선함과 흥미, 긴장감을 일으키며 이러한 경험은 뇌가 더 많은 인식과 정보를 처리하도록 만들어 시간을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반면 성인이나 중년·노년기가 되면 새로운 경험보다는 반복적이고 익숙한 일상이 더 많아지면서 뇌의 활동량이 줄어들게 되어 시간의 흐름이 단조롭고 빠르게 느껴지게 된다. 어쩌면 이같은 일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경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도 세월을 더디 느껴지도록 하는 방법이나 루틴이 얼마든지 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에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며 보다 의미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거나 현재에 집중하려는 노력을 통해 충분히 시간의 흐름을 더 풍요롭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더 가치 있고 소중하게 보내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하루하루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듯한 시간의 속도를 늦추고 싶다면 일상의 작은 변화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 새로운 취미나 학습, 봉사, 여행 등으로 낯선 곳과 마주하게 된다면 늘 흥미롭고 호기심 가득한 나날이 세월의 속도를 꾸준한 각도로 줄여줄 것이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13

산불피해 복구, 희망과 베풂의 씨앗

극명한 대조였다. 밭두렁이나 길, 개울이나 둔덕, 골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토록 판이한 양상이 나타나다니, 참으로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게 희비가 엇갈리는 현실이 비탄스럽게만 여겨졌다. 대지는 파릇파릇 생기를 더해가며 무채색의 황량함을 초록으로 채워가는데, 지척의 산야에서는 불에 탄 흔적이 검버섯처럼 칙칙하고 시커멓게 멍들어가며 신음하는 듯하니 3월에서 4월, 불과 한 달새 이다지도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친 초대형 산불로 경북 북동부지역이 초토화되면서 사상 최악의 피해가 속출했다. 일상을 삼켜버린 화마에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하루 아침에 잃고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들이 3000명을 넘는다 하니, 막막하고 암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실의에 찬 이재민들을 위한 온정의 마음과 피해복구의 손길들이 각계각층에서 더해지고 있어서 그나마 안도스럽지만, 피해지역이 워낙 광범위하고 상흔이 깊어서 일상회복과 정상복구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작은 관심이 큰 희망이 되듯,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고 위로하는(患難相恤) 상부상조의 양속이 예나 지금이나 주변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며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것 같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산불피해성금을 전달하는 어린이나 기업체 등의 기부, 자원봉사자들의 한결 같은 복구활동 참여, 지자체 공무원들의 발 빠르고 체계적인 복구계획 시행·지원 등으로 피해복구에 다소 속도를 내고 이재민들의 임시거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거기에 휴일까지 반납하고 복구작업에 적은 일손이나마 보태며 피해 당사자들을 위로해주는 미담이 전해져서 훈훈하게만 여겨진다. 휴일 아침 일찍 영덕군 지품면 수암리의 한 과수원엘 가서 불에 탄 사과나무와 복숭아나무, 감나무 등을 베어내고, 소실물 잔해 정리작업에 팔을 걷은 이들은 포스코 포항제철소 사진ㆍ붓글씨봉사단원들이다. 주로 사진촬영과 붓글씨 나눔활동을 실시해온 재능봉사단원들이 이날만큼은 카메라와 붓 대신 톱과 낫을 들고 산불피해가 심각한 과수농가에서 복구작업을 펼친 것이다. 봉사단원들은 과수원 주인의 안내와 요청에 따라 불에 탄 사과나무 등의 피해목 30여 그루를 전동톱으로 베어내고 잔가지를 정리, 포터차량에 실어 폐목 임시보관장소로 운반하는 등의 작업을 실시했다. 또한 농가 2채와 농막, 저온창고, 차량 2대가 전소된 건조물 바닥의 소실물을 정리하고, 일부 불에 타고 찢어져 썰렁하게 일렁이는 그물망을 제거하는 작업도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과수 정리작업을 마치고는 한 봉사단원이 사비로 마련한 양말, 수건 등의 생필품을 과수원 주인에게 전달하면서 산불피해의 아픔을 달래 드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복구작업은, 포스코 1%나눔재단에서 최근 산불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의 조속한 피해복구를 위해 ‘Change My Town’ 지원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자발적인 봉사활동이다. 기부자인 임직원이 지역사회의 개선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봉사활동까지 직접 실행하는 참여형 ‘체인지 마이 타운’ 나눔 사업은 2019년부터 시행돼 수혜처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포스코의 상생협력 나눔활동이 희망과 베풂의 씨앗이 되길 기대해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06

환경을 깨끗하게, 도시를 활기차게

꽃이 피어 봄인가 했더니 꽃이 져버리자 어느새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며칠간 초여름 같은 날씨였었다. 그에 맞춰 연둣빛 잎새는 하루가 다르게 초록의 진영을 넓혀가고, 사람들은 얇고 짧아진 옷차림새로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 같다. 도심의 화단에는 온실에서 자란 화초들이 앙증맞게 손짓하는가 싶은데, 들판이나 텃밭에서는 파종과 작물 가꾸기의 일손으로 분주해지는 것 같다. 풋풋한 땅의 기운과 봄 햇살의 양기를 받아 만물이 생장하며 저마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다. 봄이 되면 집을 새 단장한다거나 문을 활짝 열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안팎을 대청소하는 등 깨끗하고 산뜻하게 가꾸기 마련이다. 그래서 봄날의 춘축(春祝)으로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掃地黃金出)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開門萬福來)‘는 대련을 즐겨 썼던 것일까? 땅을 쓴다는 것은 봄처럼 부지런하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이고, 문을 연다는 것은 마음을 열어 긍정과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 스스로의 복을 짓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집 안팎은 물론이고 골목길이며 길거리, 공원 등지에서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며 화단을 가꾸는 손길들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에 더하여 해안을 비(梳)로 쓸듯이 해양 쓰레기를 줍는 이른바 ‘비치코밍’을 실천하며 바다환경을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움직임들이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다. 해변을 뜻하는 비치(beach)와 빗질을 의미하는 코밍(combing)의 합성어로, 친환경적 가치가 중요해진 최근 해안가로 밀려나온 폐플라스틱 등의 표류물이나 사람들이 무심코 버린 쓰레기를 수거하는 환경보호 활동으로 그 의미와 활동폭이 커지고 있다. 어린 자녀들과 삼삼오오 해변을 거닐며 모래밭의 조개껍질이나 유리조각을 줍고, 방파제 돌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폐플라스틱과 폐어구 등을 제거하는 손길들이 진지하기만 하다. 멀리서 보면 평온하게만 여겨지던 해안이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어찌나 해양쓰레기들이 많던지, 실제 몇 번이고 비치코밍을 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초여름 같은 날씨에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해변에서 100여 명이 동시다발로 환경정화활동을 펼치니, 수거한 쓰레기가 순식간에 더미를 이뤘다. 이와 같은 풍경은 지난 주말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용한리해수욕장에서 포철공고총동창회 ‘행복나눔봉사단’에서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해변정화 봉사활동 장면들이다. 40여 명의 모교 재학생들도 동참하고 멀리 광양에서까지 달려와 ‘흥해읍에서도 아끼는 용한리 해변’에서 합심으로 펼친 정화활동에 흥해읍의 공무원들도 반갑게 맞이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때마침 용한리의 자매부서인 포스코 생산기술부 직원들도 가족과 함께 비치코밍을 실시해 눈길을 끌었다. 포철공고총동창회는 2023년 4월 ‘행복나눔봉사단’을 창단해 포항 영일대 해변 환경정화, 광양 옥곡면 드림스타트 협력 소외계층 사랑의 집짓기 봉사, 연말 포항시 흥해읍 취약계층 연탄 나누기 활동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추진해왔다. 포항과 광양에서 번갈아 펼쳐지는 행복 나눔봉사단의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사랑 나눔을 실천하며 영·호남 화합에도 기여하고 있어서 참으로 고무적으로 여겨진다. 봄 햇살처럼 따사로이 골고루 비추면서 도와주고 챙겨주는 꾸준한 이웃사랑으로 도시가 활기차고 환경이 깨끗해지길 기원해본다.

2025-04-22

2,000번째의 장수사진

봄꽃 떨어지자 눈꽃인가. 팝콘 같은 벚꽃 잔치가 끝나기가 무섭게 강풍과 돌풍에 때아닌 4월의 폭설과 우박을 동반한 봄비라니? 사람사는 세상에 탄핵과 파면, 화마와 붕괴 같은 이변이 속출하자 하늘에서는 일진광풍의 일갈(?)로 날씨마저 변덕을 부리는가. 그래도 꽃이 진 자리마다 연두색 새 움이 실눈을 뜨고, 산과 들에는 소생의 희뿌연 기운에 연초록이 어우러지며 하루가 다르게 생동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몇 차례의 꽃이 피고지며 봄날이 깊어가는 때, 봄꽃은 산이나 들, 길거리에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짧게 피었다가 져버리는 꽃보다 더 밝고 화사하게 오랫동안 향기롭게 피어나는 꽃이 있으니, 이른바 ‘사람 꽃’이다. 머리와 얼굴을 곱게 손질하고 분홍, 연두, 남색의 알록달록한 한복 저고리로 새단장한 모습은 그야말로 활짝 피어나는 꽃이나 다름없다. 움직이는 사람 꽃이 피워내는 웃음꽃은 얼마나 환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울까? 그러한 꽃같은 매무새와 얼굴 표정을 애써 카메라에 담으며 오래도록 사람 꽃을 기억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의 갈퀴 같은 이마의 주름살이며 검버섯이나 오므라들고 쪼그라드는 얼굴의 살갗마저 순수하고 리얼하게 앵글에 담으며 시간의 자취를 기록하고 있다.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람의 얼굴에는 저마다의 희로애락이 스미고 풍진세사가 점철돼 있다. 그러한 얼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당사자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려는 진솔한 정성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어르신들의 인물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한 포스코 포항제철소 사진봉사단은 2019년 7월 창단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장수한다는 의미가 담긴 장수사진을 찍어 두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활기차게 익수(益壽)한다는 속설로 붙여진 ‘장수사진’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긍정이고 자신감이라 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의 자취이자 앞으로의 존재감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남겨두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출범 이래 포항시의 읍·면지역과 동·리단위의 마을 30여곳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어르신들께 장수사진을 찍어 드린지 5년 9개월만인 지난 주 촬영누계 2,000명을 돌파했다. 포항시 65세 이상 인구 11만여명의 2% 남짓한 어르신들께 장수사진을 선물한 셈이다. 직장에 몸 담으면서 주말이나 개인일정을 뒤로하고 간혹 휴가까지 내면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단원들과 가족의 노력이 사뭇 가상하고 고무적이다.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익을 위해 힘쓰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체득하면서 밝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소리없이 일조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진 한 장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작년 말 기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는 갈수록 고령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때, 경로효친의 측면에서도 ‘찾아가는 장수사진’은 주위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추억과 스토리가 배인 사진을 보면 기억력이 살아나고 뇌운동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장수사진 속에서 피어나는 웃음꽃이 여생을 환하게 비추는 등댓불이 되어 어르신들께서 편안하고 느긋하게 연년익수(延年益壽) 하시기를 빌어본다.

2025-04-15

포어스(4us), 포스코와 한동대의 아름다운 교육기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청명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완연한 봄날이 온 듯하다. 겨울의 초입에 별안간 내려진 12·3 비상계엄령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던 나라가,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현직 대통령 탄핵 인용으로 파면시키자 혼란과 불안이 종식되고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봄날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탄핵 찬반의 대치가 극에 달하고 돌연한 화마의 상흔이 참혹한 가운데 사필귀정의 결정이 내려져서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이제는 암울과 갈등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도와 평온의 일상 속에 저마다 본연의 역할과 과업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 날씨가 맑고 밝아 좋아서 청명(淸明)이라 했던가? 청명절에 날씨가 좋으면 봄에 막 시작하는 농사일이나 고기잡이가 수월해지고 잘돼 그 해의 풍작과 풍어를 점치며, 들판에서는 봄 논, 밭갈이를 하고 어촌에서는 그물코를 손질하는 등 본격적인 생업활동을 펼치게 된다. 일이 비록 작더라도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듯이(事雖小 不作不成), 봄에 밭을 갈아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곡식이 없어 후회한다(春不耕種 秋後悔)는 의미를 되새기며 시기와 때에 맞춰 일을 하고 준비하곤 했었다. 학업의 시기도 비슷하여 때를 놓치지 않고 배우고 익혀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배워서 남주나’는 말도 있지만, 사람의 일생은 어쩌면 배움의 과정으로 다양한 학습을 통해 성장·성숙하고 나아지며, 배움을 체득하면서 결국 그 자신의 삶을 바꿀 수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배움의 모티브(motive)는 긴요하고 중대하여 어떤 계기나 기회에 배움의 실마리를 찾아 탐구하고 궁구하여 학습효과를 배가시키며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진정 의미 있고 가치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난 주말, 포스코와 한동대가 산학협력을 통해 2년째 펼치고 있는 ‘글로벌 교육기부 프로그램 포어스 제2기 발대식’은 상당히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다문화가정이나 취약계층 청소년들의 진학과 취업을 지원하는 ‘포어스(4us)’ 프로그램은 포스코1%나눔재단의 기부금과 한동대학교의 교육 인프라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고교생 멘티와 대학생 멘토의 1:1 멘토링을 중심으로 학습 및 취업 지원, 진로체험, 방학 진로캠프 등 다양한 테마로 학습활동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즉, 포어스는 서로가 만나 배우고 알아가는 성장 과정으로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고 꿈을 구체화시키며 가능성을 열어가는 큰 힘이라 할 수 있다. 배워서 나눌 수 있고 그러한 나눔의 가치는 더욱 빛나게 된다. 포어스는 배움과 깨달음으로 새로운 꿈을 찾아 함께 떠나는 가능성의 여정이다. 그것은 곧 병아리와 어미닭이 알의 안과 밖에서 부리를 모아 동시에 껍질을 깨어 새 생명이 탄생되는 즐탁동시(559E啄同時)의 계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조력으로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참여와 헌신의 동시성으로 함께 성장, 변화하여 포항지역과 철강분야의 미래 인재육성에 기여하는 포어스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25-04-08

화마(火魔)의 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잔인하다 못해 처참했다. 비통하고 참담하기만 했다.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옛 숨결이 스민 문화재며 고택이나 가옥 등을 가리지 않고 화마는 닥치는대로 순식간에 집어삼키며 광란의 불춤을 추고 있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백주 대낮에도 화산처럼 먹구름이 솟아 오르고 불기둥이 솟구치는 괴물 같은 불길 앞에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마저 숯검댕이로 타들어 가는 절체절명의 현실 앞에 망연자실하며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만물이 소생의 몸짓으로 새순과 싹을 틔우는 생동의 길목에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만고에 푸른산이며 대대손손 가꾸고 지켜온 터전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무참하게 일그러지며 무너져버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분신처럼 키우던 가축이며 산속이 집이었던 토끼, 다람쥐, 고라니 따위의 짐승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디로 정처 없이 떠나 갔을까? 불길 앞에 온몸이 타들어가도 의연히 버티는 나무들의 외마디 절규 같은 타닥거림을 누가 애처로이 들어주기라도 했던 것일까? 사상최악의 피해를 낸 경북 북동부 대형산불은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등 5개 지역을 초토화시키며 149시간만에 꺼졌다. 26명의 사망자와 4천여 명에 이르는 이재민, 3천채가 넘는 건물의 소실 등으로 천문학적인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한 순간의 부주의와 실화로 인해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바뀌게 됨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자나 깨나 불조심’ 처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산불로 인한 상상 초월의 인적·물적인 피해가 따르게 됨을 경고하며 심각성과 경각심을 시사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방천지 느닷없이 연막을 둘러치며/걷잡을 수 없는 불길 가증의 혀 날름대니//애타게 울부짖으며/숯덩이로 스러지고//대대의 보금자리 잿더미로 주저앉고/골골이 외마디소리 뼈저리게 타들어가도//무참히 집어삼키며/삶마저도 할퀴네” -拙시조 ‘화마(火魔)의 혀’전문 우리나라 산불의 대부분은 사람의 부주의에 의해 발생된다고 한다. 입산자에 의한 실화, 쓰레기 소각, 논·밭두렁 소각 등 절반 이상이 사람에 의한 실화 또는 소각행위에서 비롯된다. 즉, 인위적인 요소가 가장 큰 산불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감시체계와 입산통제, 감시원 배치 등으로 집중 감시하고 계도활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보다는, 사전 점검과 예찰을 선제적으로 실시하여 조기에 산불 발생의 징후를 인지 및 즉각적인 대응으로 대형산불을 예방하는 것이중요하리라고 본다. 3~4월의 고온건조한 날씨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연간 산불 발생의 절반 이상이 봄철에 나타나게 된다. 본격적인 농번기로 농부들의 움직임이 많아지고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의 바깥 나들이 활동이 늘어나면서 산불 발생의 위험도도 증가하게 되는 것이니 만큼, 각별한 주위와 산불 예방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인정사정 없이 할퀴고 위협하며 잿더미로 만드는 화마에게 한평생 일궈온 우리의 삶과 재산을 제물로 바칠 수야 없지 않을까? ‘꺼진 불도 다시 보고 너도 나도 불조심’하여 국민 모두가 평온한 일상을 지켜가면 좋겠다.

2025-04-01

일월문화원의 발돋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완연해진 봄의 길목에서 난데없는 산불로 국토가 신음하고 있다. 지난 주말, 건조한 날씨 속에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불이 발생해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있다. 산청과 의성, 울주 등 하룻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이 29건으로, 강풍을 타고 번져 나간 불길이 좀처럼 잡히질 않고 연기와 매캐함이 동해안 일대에서까지 느낄 정도였으니 심각함에 우려를 금할 길 없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이 무슨 화마의 변고란 말인가? 하늘이 온통 스모그 마냥 희뿌연 장막을 드리운 듯한 현상을 접하다 보니 초읽기에 들어간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안개정국과 뒤엉키면서 예측불허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아 때아닌 산불의 연무로 연상됨은 필자만의 억측일까? 어쨌든 봄은 왔고 산불은 곧 진화될 것이며 베일 같은 안개는 사라질 것이다. 널뛰기하듯 잎샘추위에 3월의 폭설까지 내리다가 화마의 엄습까지 봄은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시련과 위협 속에서 오는가 보다. 나무에는 이미 물이 올랐고 꽃은 앞다투어 피어나고 있으며 새순이 앙증스럽게 돋아나는 파릇함 속에 새들은 지저귀고 온갖 생물은 생명과 성장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겨우내 찬바람을 견디며 이기려고 몸에 힘을 줬다면 이제는 나른함을 이기려고 애를 써야 될 때, 문화의 새바람으로 봄보다 부지런히 심신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곳이 있다. 그곳은 해와 달의 고장 답게 일월의 의미를 되새기며 독특한 문화적인 아이템으로 지역의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일월문화원이다. 전통문화의 전승, 보급의 사회교육과 문화유산 보호활동으로 지역민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2012년 설립된 (사)일월문화원은, 일월문화아카데미와 문화유산답사 등의 다양한 문화강좌와 문화사업 추진으로 현재까지 매년 200여 명의 회원과 수강생이 동참해 역사와 종교, 철학 등에 대한 인문학적인 소양과 의식을 함양한 문화시민을 육성하며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강의나 답사가 아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문화 인프라를 구축해 실질적인 문화사업 운영으로 주체적이며 지속가능한 문화발전을 담보하는 의미와 가치가 큰 문화활동이라 할 수 있다. 즉, 고품격 인문학 강의와 문화유산 방문교육·문화재 지킴이 봉사단 운영·문화유산 해설사 양성·감성계발 문화교실 등 일련의 사업을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기획하고 펼침으로써 문화의 융성과 건실한 내일을 기약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비전과 역량으로 일월문화원은 2019년 제1회 장기유배문화축제를 주도적으로 개최했으며, 재작년에는 삼일문화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설립 15주년을 맞은 일월문화원은 올해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포항에 터전을 둔 포항사람임을 부각시키며 일련의 추모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문화이며, 문화예술의 품격이 그 도시의 품격이고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우리 지역 전통문화의 발굴, 보존과 정체성을 탐구, 정립하여 문화유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전승으로 현대화·미래화하는 일들은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상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융합·전파시키며 문화시민 저변확대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나가는 일월문화원의 기여와 발돋움이 사뭇 기대된다.

2025-03-25

꿈나무에서 실버까지 피우는 묵향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오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은 듯 비바람과 강원 산간에 ‘봄눈 폭탄’까지 내리니 막바지 동장군의 심술(?)이 만만찮은 것 같다. 더욱이 이번 주부터는 영하권의 꽃샘추위로 남도에 피기 시작한 산수유나 홍매화가 화들짝 놀라며 가녀린 꽃잎을 짐짓 다물지 않을까 싶다. 한창 망울이 부풀어가던 벚꽃나무 가지가 찬 기온에 필 듯 말 듯 낭창거리며 개화시기를 가늠하고 있어도, 볕 바른 곳엔 이미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며 생동의 새봄을 부추기고 있다. 생동하는 봄날의 리듬을 먼저 타기라도 하듯 고사리 여린 손길에서부터 백발의 주름진 더벅손까지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갈고 붓을 잡는 모습들이 진지하게만 보인다. 사각거리며 먹이 갈리는 소리가 긴 겨울의 움츠림을 걷어내는 손끝의 기지개 같고, 붓에 먹물을 찍어 서툴지만 한 점 한 획 써내려 가는 운필(運筆)은 성글어진 마음의 밭을 일구는 쟁기질 같다. 마치 예전의 서당이나 글방처럼 지필묵(紙筆墨)을 가까이하며 은은하게 묵향을 피워가는 몸짓들이 사뭇 담담하고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광경은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 펼치고 있는 ‘함께하는 서예 나눔’의 테마별 재능봉사활동 장면들이다. 즉,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는 매월 지역의 아동센터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서예체험학습을 통한 정서순화와 감성계발에 도움을 주는 ‘찾아가는 서예교실’을 운영하는가 하면, 고령화사회를 맞아 노년기의 인지력ㆍ기억력 개선과 치매 예방 및 어르신들의 활력증진을 도모하는 ‘실버인지 서예치유’ 교육 프로그램을 매주 진행하고 있다. 서예 꿈나무들의 육성에서부터 황혼기의 어르신들께 인지학습 소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세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활기차고 유익한 서예 재능기부활동이 아닐 수 없다.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은 2021년 4월에 창단돼 서예재능 나눔으로 관내 취약·소외계층을 배려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재능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찾아가는 서예교실 30여 회, 포항다문화가정·탈북민가족 가훈 써주기, 사회복지시설 방문 부채작품 써주기, 포항문화원 주관 새해 가훈 써주기 등의 서예 나눔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했다. 어르신들의 말벗을 해주며 인지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이색적인 서예치유 프로그램은 올해 3월부터 실시돼 주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서예를 배움은 단지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만이 아닌, 그에 수반되는 유용한 가치와 활동으로서 심신의 건강과 의지의 단련, 심미안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는 고도의 정신수양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먹을 갈고 먹물의 농도를 조절해서 붓글씨를 순서대로 써내려 가는 과정에는 뇌의 여러 영역이 자극되고 교감해 뇌의 활발한 활동이 이뤄진다. 한글이나 한문 글자의 의미와 필순을 떠올리며 기억력과 표현력이 좋아지고, 글자의 대소강약이나 먹물의 퍼짐, 전체적인 구도를 생각하면서 붓을 움직이면 공감각적인 능력이 살아나는 등의 효능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음악치료나 미술치료, 웃음치료 못지않게 ‘서예 치유’가 실버세대들의 정신과 마음의 안정, 치매 예방과 건강을 유지하는 신 장르로도 주목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예 꿈나무 학생들이 붓을 잡는 것이 흥미와 설렘의 희망이라면, 실버들에게는 치유와 소일의 활력과 위안일 것이다.

2025-03-18

옛것을 보듬는 손길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저만치 다가오는 봄을 맞이라도 하듯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겨울 내내 아니, 몇 년째 방치되다시피 한 자전거의 먼지를 털어내고 정말 모처럼만에 두 바퀴를 굴렸다. 강변으로 이어지는 자전거길로 접어들자 약간 쌀쌀한 듯했지만 아침 공기는 신선했고, 오리떼들이 가볍게 날거나 물 위에 떠서 먹이활동을 하는 모습들이 활기차게 보였다. 간간이 물 흐르는 소리와 경쾌한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한 시간 여 페달을 밟다 보니 어느새 양동마을을 지나 기계면 문성리에 위치한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에 당도했다.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고 봄날이 가까워지니 이쪽저쪽에서 열리는 주말의 봉사활동 횟수도 늘어나고 있다. 환호공원과 포항운하 일대의 공공시설물을 돌보거나 가꾸고, 취약계층·복지시설의 낡은 방충망 교체와 수목 전정 조경관리 활동을 비롯, 자전거 무료 수리, 해안가 비치코밍, 수중 정화, 도배 장판 교체, 전기시설 수리 등의 다양한 재능봉사활동이 봄보다 빠른 걸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자원봉사활동은 포스코에서 십 수년 전부터 기획, 추진해온 사회공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재능봉사활동이다. 임직원들의 재능과 특기, 기술과 전문성을 발휘하여 지역사회의 취약·배려 계층과 공공에 작으나마 도움과 공익을 주는 맞춤형 밀착 봉사활동인 셈이다. 그러한 취지에서 열리게 되는 포스코 문화유산 돌봄봉사단의 당일 기계면 일대의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돌봄과 환경정화활동에 동참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애써 달려간 것이다. 봉사활동 참여를 구실로 자전거 타기 운동을 하며 문화재 답사와 반가운 사람들까지 만날 수 있었으니 나름 일거양득의 루틴(?)이 아닐까 싶다. 더욱이 탄소배출을 줄이는 환경운동에도 한몫 한 셈이니 그야말로 일석다조(一石多鳥)라 해야 할까? 어쨌든 버스를 타거나 개별 출발한 봉사단원들과 집결장소에 합류하여,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바로 옆의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과 팽나무 보호수 탐방을 시작으로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홍보영상 시청, 전시관 관람 등을 마치고는 작년 8월에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된 포항의 대표적인 정자 분옥정으로 향했다. ‘옥구슬을 뿜어낸다’는 의미의 분옥정(噴玉亭) 입구의 노후된 봉좌산 숲길 안내판을 봉사단원들과 함께 새것으로 교체하고, 정자 뒤편의 세이탄(洗耳灘) 개울 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우며 문화재 주변을 깨끗하게 유지했다. 그런 다음 파평윤씨 시조 사당 봉강재 일대를 둘러보면서 문화재 해설을 듣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도 했다. “세월의 더께 속엔/켜켜이 지층 같은//시간이 박제되고 사연이 스며들어//한줄기 바람결조차/소리되어 머무네//고색이 창연할수록/숨막히는 아련함//심원의 절규인가/메아리쳐 맴도는데//무연히 사그라 드는/천만 갈피 실마리” - 拙시조 ‘옛것에 대하여’전문 가까운 곳에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을 비롯, 조선후기 전통가옥과 정자, 정원, 노거수, 사당 등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돌봄으로 잘 보전해야 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뜻있는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자연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서 시문을 짓고 강학을 하며 풍류와 운치 속에 유유자적을 즐기던 선인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지는 하루였다.

2025-03-11

남도의 봄 마중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을 재촉하는 비가 전국적으로 내리는가 싶더니, 강원·충청지방에서는 밤사이에 눈으로 둔갑해 소복이 쌓였다. 3월에 내리는 눈은 대부분 무거운 습설이라 농가 비닐하우스 등 시설물 피해나 설해목을 초래해 걱정이 앞선다. 한 달 전 입춘 무렵의 한파와 영하권의 날씨가 경칩까지 이어져 꽃과 나무들의 개화시기가 늦춰지는 바람에 지자체별로 고심하고 있다고들 한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매화축제가 매화는 없고 축제만 있는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대충 난감’이 따로 없을 정도다. 그만큼 기후변화는 이상기온과 예측불허로 다가오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디 오는 봄을 마중이라도 하듯 남도로 향했다. 섬처럼 군데군데 야트막한 등성이가 솟아 있고 바닷물이 빠졌다가 다시 채워지는 갯벌에서 묻어나는 비릿함이 인상적인 ‘녹차수도 보성’의 득량만이다. 전남 벌교읍과 장흥군 사이의 연안에 서당항, 군농항, 율포항 등의 고만고만한 항ㆍ포구들이 이어져 있고, 멀리 고흥군과 보성군 사이의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득량도를 품은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년 후인 정유재란 때,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고 배설이 감춰둔 12척의 배가 있는 장흥 회진포로 가던 중 군량미를 얻었다 해서 붙여진 득량(得糧)이기도 하다. 보물(寶)같은 고장(城)답게 전남에서 평균고도가 가장 높은 보성군은 바다와 산, 섬이 어우러져 발길 닿는 곳마다 테마와 먹거리, 스토리가 많은 곳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천혜의 산자락 일대에는 차밭이 많아 전국 녹차 생산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산 아래 도강과 영천마을에는 서편제 판소리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는가 하면, 동쪽 벌교의 꼬막과 서쪽 회천의 낙지 등의 먹거리가 풍부해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남도의 연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그곳 보성에서 ‘어디에도 없는 득량만’의 오묘함에 매료되어 시절인연처럼 일림산 기슭 삼의당에 5년째 칩거하며 글을 쓰고 살아가는 한 소설가가 있다. 세상의 풍찬노숙을 달관한 듯 해맑은 웃음이 여유롭고 ‘측간수인(厠間囚人)’을 자처하며 호탕하고 분방하게 글을 쓰고 시를 읊으며 지역의 문화적인 소통과 교류에도 한몫하고 있다. 밤낮없이 집필하고 고뇌하며 유유자적 행운유수로 수행하듯이 살아가며 때때로 세상을 향한 일갈도 서슴지 않는 그는, 어쩌면 요즘 보기 드문 기인(?) 같고 달인같은 모습이랄까? “커피 앞에서/바다를 마신다/고깃배 선창에 떠맡기고/집으로 돌아간 사람들/꼬막 낙지 주꾸미 갯 것 건진다고/칼바람 맞서며 짠물 삼켰다/사나운 시간이 잠들면/검은 머리 갈매기 날개를 접고/먹이를 찾느라 뻘짓 바쁘다//바다 앞에서/커피를 마신다/철게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숨어버리는/생을 찾는다” - 양승언‘커피 바다’전문 썰물과 밀물이 드나드는 율포항 언저리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커피 바다’ 시를 감상하는 기분은 어떨까? 그리움처럼 멀어져가는 썰물에 내 마음 뻘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속내를 보이지만, 두고두고 사무치는 마음 나지막이 밀물처럼 살며시 다가오면, 한결 넉넉하고 푸근하게 삶을 다독이며 세상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남도의 봄은 그렇게 잠방잠방 오고 있었다.

2025-03-04

靜中動의 봄 채비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고요와 침잠으로 이어지는 겨울의 끝자락이다.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함부로 물러서지 않는 동장군이 벽창호 같은 몸짓으로 막바지 추위의 기세를 드러내고 있지만, 매화의 등걸에서는 이미 망울이 맺히고 섣부른 가지에서는 벌써 한, 두송이 꽃이 피어나고 있다. 한설과 북풍의 회오리에 꿈적도 않을 것 같은 대지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며 동토의 장막을 밀어내고 있다. 조용한 가운데 어떠한 움직임이나 작용을 하게 되는 정중동(靜中動)의 몸짓이 일어나고 있다. 겨울은 어쩌면 정중동의 계절이다. 그토록 푸르청청하던 나무의 잎새가 떨어져 땅을 감싸며 뿌리의 활착과 번성을 조용히 돕고, 거세게 흐르던 폭포수도 온몸으로 얼어붙어 물보라의 비산을 막으며 나지막한 음조로 낙수의 흐름을 챙기고 있다. 움직이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듯 호수 위에 떠있는 백조가 더없이 평온하게 보이지만, 수면 아래서는 쉼없이 물갈퀴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요함 속에서도 움직임이 있고 움직이는 가운데도 고요함이 스며들어 계절이 바뀌고 나무가 자라나며 세상이 굴러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산다는 것은/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준다./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 법정 스님 ‘산중 한담’중 혹한의 계절에 동면이나 동안거(冬安居)에 드는 것은 결코 움츠림이나 위축되는 것이 아니다. 숨가빴던 호흡을 가누고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나름의 생존법이나 수양을 일삼으며 더 단단하고 단호해지기 위해 내밀한 힘을 키우는 시간이다. 그것은 어쩌면 망중한(忙中閑)의 여유로운 안도일 수도 있고, 한중망(閑中忙)의 새로운 시도일 수도 있다. 아무리 바쁜 가운데도 잠깐 틈을 얻어내 여유를 부릴 수 있고, 한가함 속에서도 열심으로 움직이며 뭔가를 준비하고 추구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자신의 안목과 의지, 처세술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바쁘고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일수록 정중동과 망중한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가면 어떨까 싶다. 온갖 정보와 광고가 난무하고 디지털, 스마트사회를 넘어 AI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차분하고 침착하게 본연의 평정심으로 주변의 사물과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의 루틴을 세워 ‘바쁜 듯이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스스로에게만 바쁜 듯이 대하고, 주변이나 이웃들에게는 여유를 보이며 ‘느긋하게 바쁜 듯이’ 넉넉하게 대한다면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우수와 경칩 사이, 아직은 바람이 여전히 차갑지만 남도 매화의 꽃 소식에 따스해지는 마음이다. 긴 겨울 깊은 적요에 들었던 만물이 정중동의 일깨움으로 차츰 봄 채비를 하듯이, 망중한의 여유로움으로 기지개를 켜며 조붓한 오솔길로 찾아오는 봄을 마중해야 하지 않을까? 봄은 출생이며 새로운 희망이다.

2025-02-25

월포 龍山을 오르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이른 봄맞이라도 하듯 야트막한 산엘 올랐다. 청하면 월포리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나즈막한 용산으로 비교적 가볍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중턱과 정상 부근에 군데군데 너럭바위가 있고 특히 청동기시대의 문화유산인 고인돌(지석묘)이 동쪽 등산로 초입에 있으며, 큰 암반 위에 솥모양으로 움푹 팬 솥바위 2개가 있을 정도로 신기하고 유서가 깊어 예로부터 청하 고을에서 신성시된 산이기도 하다. 용의 머리 형국을 하고 있다는 용산(龍山)은 용산으로 불러지게 된 슬픈 전설이 있는 산이다. 즉, 아주 오래 전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월포리의 한 부부가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예사롭지 않아 장차 장수가 될 아이이나 큰일을 저질러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라며 집안 어른들의 우려와 결정에 따라 더 자라기 전에 죽는 순간 그 산에 살던 용이 아들의 한과 함께 하늘로 날아가버렸다고 해서 ‘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믿기지 않은 주술적인 전설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액운타파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숨고르기 하듯이 천천히 등산로로 진입하는데 용을 연상케 하는 큰 소나무 뿌리가 투박한 모습으로 길바닥에 드러나 꿈틀대는 듯하니, 불현듯 전설 속의 승천한 용의 화신이 현상계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탄한 솔숲 주변에 2기의 고인돌을 지나서 크고 작은 소나무가 빽빽한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오르니 이내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용두암에 이르렀다. 활처럼 휘어진 월포리 해변과 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작년말에 개통된 동해중부선 철도가 너른 들판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힘차게 뻗어 있다. 그 옆으로는 포항~영덕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인데, 올해 말 개통되면 동해안을 잇는 교통망·관광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꿈에 부풀어 있는 듯하다. 북서쪽으로는 멀리 정상 부근에 잔설이 희끗한 내연산~천령산~삿갓봉의 연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들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청하읍내가 손에 잡힐 듯 정겹고 평온하게 다가온다. 또한 동쪽으로는 지척의 이가리 해안선 너머 호미곶 반도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용산 정상에서는 결코 조망할 수 없는 탁 트인 전경이 발 아래에 그림처럼 펼쳐지니, 과연 전설이 깃든 용산에서 용 한 마리를 타고 천하를 유람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해발 200여 미터의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는 너럭바위 등이 자리잡아 승천을 준비하는 교룡(蛟龍)의 억센 근육처럼 여겨졌다. 순탄한 둘레길 언저리에는 멸종 위기 종인 망개나무 덤불이 빨간 열매로 산객을 반기고, 진달래는 멀지 않은 날의 개화를 준비하는 듯 작은 망울을 내밀며 부풀고 있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던가. 몸을 움직여 걷고 뛰거나 함께 어울리다보면 저절로 생기가 나고 활력이 감돌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산보하듯이 산길을 걸으면 이것저것 보이고 새롭게 느껴지는 바가 많아져서 산행 그 자체가 힐링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25-02-18

정월대보름의 소묘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최근 들어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 설날을 전후해 눈이 살짝 내리는가 싶더니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다가오는데도 눈 소식이 끊이질 않고 있다. 서해안을 비롯 전라·충청·강원권 등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눈은 수시로 내리면서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풍경을 백설 가루로 덧칠하는 듯하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국을 눈으로라도 덮어보려는 속내일까? 겨울의 끝자락에 혹한과 강설로 동장군의 기세가 살아나면서 그나마 체면치레(?)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입춘이 지나고 정월대보름이나 우수가 가까워지면 눈이나 비가 잦아들게 된다. 산간 내륙이나 도서지방 등에서는 기압골의 차이로 눈도 내리게 되는데, 농경사회에서는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라 무엇보다 날씨를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정월대보름은 유일하게 대(大)자를 붙여 ‘새해 첫 번째 뜨는 만월’이라 해서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동제·풍어제를 지내거나 근신하면서 세시풍속을 즐기고 길흉화복을 예견하기도 했다. 즉 설날이 개인이나 가족 중심의 새해맞이 명절이라면, 정월대보름은 집단적이고 개방적인 마을공동체 명절이라 할 수 있다. 정월대보름에는 예로부터 새해의 풍요와 안녕을 바라며 함께 모여서 즐기고 어울리는 놀이문화가 있었다. 윷놀이나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줄다리기, 횃불싸움, 고싸움놀이, 놋다리밟기 등의 다양한 민속놀이를 즐기며 단순한 오락을 넘어 마을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결속을 다지기 위한 축제의 일부로 여겼다. 그러한 단체활동이나 힘겨루기 등으로 승패를 갈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며, 액을 쫓고 복을 부르는(遠禍召福) 전통놀이를 통해 마을에 행복과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또한 부럼 깨기와 오곡밥, 귀밝이술, 약밥, 진채(陳菜)를 먹으며 개인적인 건강과 농사의 풍년을 바라기도 했다. 정월대보름 이른 아침에 먹는 부럼 깨기는 한 해 동안의 각종 부스럼 예방과 건치의 염원을 담았고, 귀밝이술을 한잔하면서 남의 말과 어른 말씀을 잘 들으라는 교훈적인 의미를 일깨우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곡식을 섞어 풍요를 기원하며 짓는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인 진채를 먹으며‘9’가 지닌 단수 최고, 충만의 의미와 풍족의 누림을 부여하기도 했었다. 빈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내서 관솔을 넣고 불을 붙여 철사로 연결된 끈을 돌리면서 주위를 밝히는 쥐불놀이는 정월대보름 밤의 진풍경이었다. 휘영청 달빛 아래 논밭에서 삼삼오오로 저마다 불이 붙은 깡통을 빙빙 돌리면서 그려지는 크고 작은 원형의 불빛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불빛쇼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리다가 관솔이 거의 다 타게 되면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불이 붙은 깡통을 공중으로 일제히 던지게 되는데, 수직으로 솟구치는 불기둥에 불티가 눈처럼 날리면서 그려지는 불꽃 포물선은 쥐불놀이의 압권이었다. 어쩌다가 눈까지 내리는 달밤의 숨바꼭질이나 쥐불놀이가 끝나면 또래들과 큰 양푼을 들고 몇 집을 찾아가서 찰밥이나 식혜를 얻어와 살얼음이 뜬 동치미와 함께 먹으면, 그야말로 세상 부러울 게 없었던 꿈결 같은 정월대보름 밤이 켜켜이 동화처럼 각인되는 오늘이다.

2025-02-11